윤3월 1일 경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찬수(饌需)를 받았다. 상례(相禮)가 왕세손(王世孫)을 인도하여 들어가 자리에 나가자 인의(引儀)가 참연(參宴)한 여러 신하들을 인도하여 자리에 나아가 사배례를 행하고 꿇어앉았고, 주원(廚院)076) 의 제조가 찬안(饌案)과 찬상(饌床)을 들이고 예방 승지가 꽃을 올리니 악사(樂師) 2인이 전(殿) 앞으로 나아가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불렀다. 왕세손이 칭송하는 글과 술잔을 올리니 대치 사관(代致詞官)이 꿇어앉아 읽고 승지가 선교(宣敎)하기를 청하매 유교(諭敎)한 뒤에 찬수를 드렸다. 왕세손 이하가 세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번 천세를 부른 뒤에 사배하였다. 사배례가 끝나자 왕세손이 전 안으로 들어가고 참연한 여러 신하들도 전에 올라 자리에 나아갔다. 전악(典樂)이 등가(登歌)077) 를 인솔하고 전에 오르니, 주원의 부제조가 왕세손에게 찬수를 바치고 보덕(輔德)이 꽃을 바쳤으며 참연한 여러 신하들의 찬수도 베풀어지고 꽃을 부리니, 홍봉한(洪鳳漢)·김치인(金致仁)·김양택(金陽澤)·김상철(金相喆)·채제공(蔡濟恭)과 종신(宗臣)인 이연(李槤), 도위(都尉) 황인점(黃仁點) 등이 차례로 잔을 올렸다. 아악(雅樂)과 속악(俗樂)이 연주되고 처용무(處容舞)가 추어졌는데, 춤이 끝나자 주원의 제조가 찬수를 거두고 부제조가 왕세손의 찬수를 거두었으며 여러 신하들의 찬수도 거두어지니, 찬의(贊儀)가 ‘일어나소서’ 하고 외쳤다. 왕세손 이하가 각자 자리에 나아가 사배를 행하니, 통례(通禮)가 예필(禮畢)을 아뢰었다. 이어 광명전(光明殿)에서 내연(內宴)을 행하였는데, 임금의 뜻이 겸양을 주로 하고 태강(太康)078) 의 경계를 간직하여 하루에 두 잔치를 아울러 행하여 몇 시간 안에 예를 갖추었을 뿐이었다.
윤3월 2일 신유
이계(李溎)를 강원 감사로, 홍낙임(洪樂任)을 승지로 삼았다.
윤3월 3일 임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로연(養老宴)을 행하였다. 승지와 사관(史官)이 먼저 사배(四拜)하니, 왕세손이 사배를 행하고 자리에 나아가 시좌(侍坐)하였고 참연(參宴)한 여러 신하들도 사배하고 차례대로 자리에 나아갔다. 임금이 왕세손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손을 잡고 기로연회가(耆老宴會歌) 6구(句)를 적으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것은 대풍가(大風歌)079) 를 본뜬 것이다."
하고, 또 여러 신하들에게 즉석에서 차운(次韻)하여 올리게 명하였다. 찬안(饌案)과 찬상(饌床)이 올려지니 왕세손이 배연(陪宴)한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고 세번 천세를 불렀다. 왕세손이 잔을 올리고 홍봉한(洪鳳漢)·한익모(韓翼謨)가 차례로 잔을 올렸다. 임금이 또 이익정(李益炡)에게 잔을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이익정이 〈《시경》〉 천보장(天保章)을 낭송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 이익정에게 술 한 잔을 내리고 한익모 등 기로사(耆老社)의 여러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나이 순으로 신래(新來)080) 를 불러 서로 짝을 지어 춤을 추게 하니 아악과 속악이 아울러 연주되었다. 이날 문무(文武)의 종신(宗臣)과 사서(士庶)의 늙은이로서 연회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 인이었는데 사서민(士庶民)의 늙은이들이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추며 천세를 부르고 앞으로 나오니, 천세 소리가 궐정(闕庭)에 가득하였다. 늙은 백성으로 80세 이상인 자는 아울러 가자(加資)하라고 명하고 1백 3세된 사람에게는 특별히 지중추(知中樞)를 제수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의 가장 오래된 구포(舊逋)와 공인(貢人)의 오래된 미납(未納)을 모두 탕척하고 시민(市民)081) 요역과 태학(太學) 전복(典僕)의 속전(贖錢)도 다음 달까지 특별히 감면해 주게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공인(貢人)과 시인(市人)을 불러 폐막(弊瘼)에 대하여 물었다.
증광 복시(增廣覆試)를 행하여 이상준(李商駿) 등 36인을 뽑았다. 임금이 입격한 유생들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이휘중(李徽中)은 두 아들이 등과(登科)하였다 하여 이휘중에게 공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윤3월 4일 계해
교리 강윤(姜潤)이 상소하여 성궁(聖躬)의 보색(保嗇)과 동궁(東宮)의 보도(輔導)를 청하니, 답하기를,
"지금 너의 글을 보니 가히 절실하다 하겠다. 그 글을 듣고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나는 너의 돌아감을 애석하게 여긴다. 아! 임금의 나이 80세인데 네 어찌 차마 한번 연회에 참석하고서는 곧바로 가버릴 수 있느냐? 더구나 등과한 지 근 30년에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지도 오래인지라 지금 마침 빈자리가 있기 때문에 너를 하대부(下大夫)082) 로 임명하니 내 어찌 사의(私意)로 그러겠느냐? 너의 두 가지 조항으로 진달한 바가 처의상(處義上)에 모두 합당(合當)함을 가상히 여겨서이다. 내가 이미 이러한데 네 어찌 차마 곧바로 돌아가겠느냐? 지금쯤 필시 기전(畿甸)을 넘지는 못했을 것이니, 바로 도성에 들어와 그 소명(召命)에 숙사(肅謝)하고 임금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이어 특명으로 승지를 제수하였다.
특별히 전 대사간 이세택(李世澤)에게 가자(加資)를 명하였으니, 이세택은 선정(先正) 이황(李滉)의 후손이었다.
임금이 특별히 이번 경과(慶科)에 제도(諸道)에서 문무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 낙방하여 환향(還鄕)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친히 집경당(集慶堂)에 임어하여 시사(試士)하고 석종극(石宗克) 등 5인을 뽑았으며,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윤3월 5일 갑자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제도(諸道)의 무사(武士)를 시재(試才)하여 3중(中)한 사람에게 급제를 내려주었다.
임금이 신수채(辛受采)가 정묘년083) 에 태어났다 하여 특별히 지중추(知中樞)에 승진시켰다. 그리고 ‘정묘년과 갑술년084) 의 두 해에 같이 기로소에 들었는데[丁甲兩年同耆社], 지금 이때 나의 회포는 일만 가지라.[今辰此日予懷萬]’라는 글귀를 손수 써 주었으며, 이어 하교하기를,
"풍악을 잡히고 선온(宣醞)할 것이니, 영수각(靈壽閣)085) 에 가서 숙사하고 기로소(耆老所)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놀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제도(諸道)의 증렬미(拯劣米)086) 를 전량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윤3월 6일 을축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기로소(耆老所)의 당상들을 소견(召見)하였다.
홍낙인(洪樂仁)을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출보(出補)하였으니, 홍낙인이 경직(京職)에서 시간을 끌며 버티었기 때문이었다.
윤3월 7일 병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에서 《대학(大學)》을 강하고, 경외(京外)의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모두 잔치를 베풀도록 허락하였다.
유학(幼學) 박세기(朴世紀)가 상소하여 선조(先朝)에 휘호(徽號)를 올릴 것과 오달제(吳達濟) 등을 황단(皇壇)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고 겸하여 치안책(治安策) 4권(卷)을 올렸는데 임금이 책자를 보고는 은전(恩典)을 바라고 한 짓이라 하고 3년을 한정하여 정거(停擧)하게 하였다.
윤3월 8일 정묘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생원·진사과의 창방(唱榜)087) 을 행하고 이어 선온(宣醞)하도록 하였으며, 임금이 친히 어제(御製) 한 구(句)를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次韻)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호서(湖西) 열읍(列邑)에 있는 시노비(寺奴婢)를 영남과 호남의 예대로 비총(比摠)088)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3월 10일 기사
이익원(李翼元)을 대사헌으로, 이수봉(李壽鳳)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일찍이 《송사(宋史)》를 보니, ‘성문은 닫혔으나 언로(言路)는 열렸고, 성문은 열렸는데도 언로는 닫혔다.’라는 말이 있어 마음속으로 항상 개탄하였었다. 지금 만약 조금이라도 말할만한 일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가히 무사 세계(無事世界)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이는 입을 다물고 구차하게 남의 비위나 맞추는 것이 된다. 대저 양사(兩司)의 갈도성(喝導聲)089) 을 들으면, 대관(大官)이나 중재(重宰), 그리고 여대(輿儓)090) 와 하천(下賤)을 막론하고 모두 자취를 감추었으나, 요사이는 합사(合辭) 역시 문구(文具)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대관(臺官)이 비록 날마다 대각(臺閣)에 나온다 하더라도 대관과 경재는 눈을 흘겨보고 누웠으며, 여대들은 서로 손가락질하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형식(形式)에 의해서 숫자만 채워가지고 와서는 묵은 종이[故紙]만 베껴 전하고 간다’고 말하고 있으니, 비록 아주 간특(奸慝)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두려워 하겠으며, 또 분의(分義)를 범하고 예의에 어긋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무서워 하겠느냐? 지금은 일이 없다고 말을 하지 말라. 눈앞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고금에 어떻게 시골 선비가 승정원에 정소(呈訴)하는 일이 있기나 했느냐? 나는 면류(冕旒)로 얼굴을 가리고 주광(紸纊)091) 으로 귀를 막고서 단지 웃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박세기(朴世紀)의 경우는 이 일을 어찌 3년 정거(停擧)만 할 일이더냐? 그러나 백부(柏府)092) 의 장관(長官)은 내가 그 기풍(氣風)을 아는데, 된서리를 맞은 나머지 풀이 꺾여 그런 것인가? 미원(薇垣)093) 의 장관은 내가 그 명확(明確)함을 가상하게 여기고 있는 데, 지금은 어찌 입을 다물고 있는가? 모년(暮年)에 비록 하루에 1백 잔의 술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한갓 나이만 먹을 따름이다. 강개한 생각이 속에서 뻗쳐 있는데 아무리 하유(下諭)해도 신칙하는 것은 체차(遞差)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속셈에 맞추어 주는 꼴이 될 뿐이니, 진실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청사(靑史)에 특서(特書)하여 후손들을 면려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문답(問答)을 읽게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관서(關西)의 혼상 고조 장계(婚喪顧助狀啓)를 읽게 한 뒤에 곽산 군수(郭山郡守) 민영철(閔永喆)과 안주(安州)의 전 목사 이명빈(李命彬)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곽산에서는 장례(葬禮)를 도운 것이 한 척(尺)의 무명[木]에 불과하였고, 안주에서는 장기(葬期)가 지난 사람이 자그마치 수십 인에 달하였는데도, 안주의 현 목사는 도임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전 목사는 돌보지 않은 때문이었다.
윤3월 11일 경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자 약방과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다. 대사헌 송문재(宋文載)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박세기(朴世紀)의 상소는 오로지 은전(恩典)을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니, 그 정상과 태도가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도 겨우 정거(停擧)만 명하셨는데, 이는 비록 성상의 포용하시려는 도량(度量)에서 그러신 것이오나 그 죄상을 논하자면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박세기를 먼 곳에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은 비록 협잡(挾雜)하다 하겠으나 내용만은 경륜(經綸)에 속한 것이라 하겠다. 또 큰 사면(赦免)을 베풀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이 율을 시행하겠느냐? 그러나 어제 이미 하교한 것을 오늘 법으로 쟁집(爭執)하니, 예답(例答)은 못하겠구나. 3년을 〈한하여 정거하게 한〉 하교를 삭제하고 특별히 정거(停擧)를 명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3월 12일 신미
증광 전시(增廣殿試)에서 이회수(李會遂) 등 60인을 뽑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삼공(三公)과 호조 판서를 소견(召見)하고 조선(漕船)이 올라오는 횟수(回數)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윤3월 13일 임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김하재(金夏材)를 의흥(義興)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옥당(玉堂) 김하재가 아뢰기를,
"조영순(趙榮順)의 상소는 사사의 분의(分義)가 난처함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대개 그의 처지는 다른 사람과 다른데 죄명은 지극히 무겁고 조정의 토죄(討罪)는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설사 조영순은 돌보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어찌 그의 조부가 순국(殉國)한 충절은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하재는 바야흐로 합사(合辭)가 한창인 때에 감히 변명하여 구해주려 한다 하여 빨리 삭직하라 명하였으며, 대각(臺閣)에 나온 대신(臺臣)들은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다 하여 아울러 서용하지 않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는데, 좌의정 김상철(金尙喆)과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이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의흥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의 관직을 삭탈하고, 좌의정 김상철(金尙喆)과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의 면부(勉副)094) 를 명하였다. 대개 김상복은 전일 경연에서 조영순의 조부 고(故) 상신(相臣) 조태채(趙泰采)가 지난 계사년095) 에 도감(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었던 일을 말하고, 또 그의 시구(詩句)를 외어서 아뢰었기 때문이며, 김상철과 원인손은 같은 벌을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면부를 허락한 것이다. 한익모(韓翼謨)를 제배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이은(李溵)을 좌의정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입직(入直)한 유신(儒臣)이 김하재에 대하여 죄주기를 청하지 않았다 하여 모두 삭직하라 명하고, 김양택(金陽澤)은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였다 하여 또한 파직을 명하였는데, 김하재는 바로 김양택의 아들이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원계하(元啓夏) 등이 상소하여 숙종 대왕에게 존호를 추상(追上)할 것과 또 소녕원(昭寧園)을 능(陵)으로 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입시하라고 명하여 비답을 내리고, 그 상소를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행행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청대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3월 14일 계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 및 여러 승지(承旨)와 대신(臺臣)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신(大臣)과 승지들이 모두 말하기를,
"관학의 상소는 사체(事體)가 더욱 중하고 여러 사람들의 공론(公論)임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에게도 정해진 생각이 있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진달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이득종(李得宗)·대사간 박지원(朴志源)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상복(金相福)을 멀리 귀양보내고 김하재(金夏材)를 외딴 섬으로 안치(安置)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아뢰는 것을 들으니,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구나,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또 어제 말하지 않은 삼사(三司)의 관원은 모두 삭직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공의(公議)이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고, 이득종, 박지원에게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리고, 대소의 공사(公事)를 승정원에 남겨두라는 명을 특별히 정지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상설(霜雪)096) 을 보였으니, 우로(雨露)097) 를 보임이 마땅하다. 멀리 귀양보내는 것과 외딴 섬으로 안치시키는 것을 특별히 잠시 보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제 밤 하교한대로 그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윤3월 15일 갑술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영의정 한익모(韓翼謨)가 말하기를,
"군신(群臣)들은 날마다 예조 판서가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야 청하는 것은 늦은 일이다. 그저께 2품 이상이 굳이 청한 것을 내가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도리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계사년을 만났으니, 어떻게 헛되이 보내겠느냐마는 비단 작정한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하경(賀慶)에 맞추고자 할 것이므로 더욱 할 수 없다."
하였다. 좌의정 이은(李溵)이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굳게 거절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 두어라. 그래도 사체가 중하다는 것을 빙자하여 나를 괴롭히려 하느냐?"
하였다. 우의정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온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시지 않으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경 등의 청을 기다렸겠는가? 감히 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이다. 작년의 일은 지금도 후회스럽다."
하였다.
윤3월 16일 을해
전(前) 우윤(右尹) 이정철(李廷喆)이 지난 계사년098) 에 사마시(司馬試)에 등제(登第)하여 이제 그가 회갑을 맞았으므로 임금이 유건(儒巾)과 청삼(靑杉)을 만들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은(謝恩)하고 그대로 유복(儒服)으로 입시하니, 특별히 지중추(知中樞)에 제수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시임·원임 대신이 입시하여 다시 전청(前請)을 거듭 아뢰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첫째는 나의 〈경하(慶賀)하는〉 일에 맞추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어렵고, 둘째는 이미 수교(受敎)를 받았는데 선령(先靈)께서 척강(陟降)하면서 만일 왜 받았느냐고 하신다면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해 올리겠느냐? 이는 아래에서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지 않은 것인데 군하(群下)의 청으로 인하여 한다면, 불효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강력히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꿈속에서 만일 하교하시기를, ‘여러 사람들의 공의(公議)를 어찌 따르지 않느냐?’라고 하신다면 마땅히 윤허하겠다. 내일 연융대(鍊戎臺)에 간다면 나에게는 일부(一副)의 합당한 도리가 있기는 하지만 사책(史冊)에 쓰여져 후인(後人)들에게 전한다면 나더러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겠느냐? 정청(庭請)과 빈계(賓啓)를 막론하고 나의 불효만 더하게 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금의 뜻은 이토록 공명 정대한데 군하(群下)는 잘못 헤아리고 도유(謟諛)에 급급하여 날마다 연청(筵請)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실로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는가?
윤3월 17일 병자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신은(新恩)099) 을 소견(召見)하고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은 지방관에게 명하여 연수(宴需)를 도와주게 하였다. 김이용(金履鏞)은 고(故)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라 하여 특별히 관직을 높여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김이용·홍상찬(洪相纘)은 충량과(忠良科)에 직부(直赴)한 사람인데 홍패(紅牌)100) 의 연호(年號)를 고쳐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윤3월 18일 정축
채제공(蔡濟恭)을 홍문 제학으로, 서명응(徐命膺)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윤3월 19일 무인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손도 따라가서 같이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감황은송(感皇恩頌)을 받아 쓰게 하였다.
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임희교(任希敎)를 대사헌으로, 이보관(李普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의 소시(召試)를 행하여 각각 3인씩을 뽑았다.
윤3월 21일 경진
김양택(金陽澤)을 서용(敍用)하여 다시 영돈녕(領敦寧)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문관(文官)·무관(武官)·음관(蔭官)과 종신(宗臣) 중 나이 80세로 금년에 가자(加資)한 사람을 불러 대내(大內)에서 음식을 차렸는데, 옛사람의 갑계(甲稧)의 뜻을 본뜬 것이다. 왕세손이 시신(侍臣)과 노인들을 거느리고 뜰에 내려가 천세를 부르고 노인들에게는 각각 면주(綿紬) 1필씩을 주었으며, 박필욱(朴弼彧)에게는 특별히 동중추(同中樞)를 제수하였다.
윤3월 22일 신사
박사륜(朴師崙)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당상과 시종(侍從) 이하의 녹(祿)이 없는 관원으로 사과(司果)에 부직(付職)되어야 하는 사람을 우선 낮추어 사정(司正)에 부직하라고 명하였는데, 병조 판서 구윤옥(具允鈺)의 청에 의한 것이었다.
윤3월 23일 임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에서 《대학(大學)》을 강하고 잡과인(雜科人)을 소견(召見)하였다.
윤3월 24일 계미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서북(西北)의 별부료 군관(別付料軍官)101) 에게 시사(試射)를 행하여 더러는 가자(加資)하고 더러는 급제(及第)를 내렸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사기(史記)》의〉 범수전(范雎傳)102) 을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범수가 남의 골육(骨肉)을 이간한 것을 미워하지만 전(傳)으로 쓴 글은 극히 좋다. ‘범수가 절하다[范雎拜]’의 한 구절에서는 그 기변(機變)을 엿볼 수 있는데, 사마천(司馬遷)이 잘 형용하였다. ‘채택(蔡澤)103) 이 진나라에 들어가다[蔡澤入秦]’라는 한 구절[句]의 결말은 음미할 만하다. 범수가 채택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물러나 능히 시종(始終)을 보전하였으니,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인물로는 이 점이 가장 어려웠다."
하였다.
윤3월 25일 갑신
임금이 ‘율관(律官)도 백성의 휴척(休戚)과 관계가 있다’ 하고, 하교하여 신칙하였다.
윤3월 26일 을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 임희교(任希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원의손(元義孫)이 감·능(甘凌)의 칙교104) 을 본받지 않고 장계로 두 수령을 파직한 것은 그 처사가 진실로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번임(藩任)을 자주 교체하는 것은 비록 폐단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체통에 있어서는 참으로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문비(問備)105) 로 가벼이 감죄(勘罪)하는 것으로는 그 잘못을 징계할 수 없으니, 청컨대 그를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문신의 제술(製述)을 행하고, 이양수(李養遂) 등 2인을 뽑아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전 영상 김상복(金相福)에게 직첩을 주도록 명하였다.
윤3월 27일 병술
박사륜(朴師崙)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3월 28일 정해
사직 이언형(李彦衡)이 〈모든 것이〉 가득 찼을 때에 경계심을 간직해야 한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휴퇴(休退)하고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장(嘉奬)하고 특별히 허락하였다.
용강(龍岡) 사람으로 29세 된 총각 박흥조(朴興祖)가 신문고(申聞鼓)를 울리므로 전정(殿庭)으로 불러들여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친히 물으니, 소녕원(昭寧園)을 능으로 봉하는 일이었다. 임금이 식량을 주어서 쫓아보내라고 명하였다.
윤3월 29일 무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쪽 뜰로 나가서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고, 이어 월대(月臺)에 나아가 봉조하 이언형(李彦衡)에게 선마(宣麻)하고 어필(御筆) 네 글자를 친히 내렸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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