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경인
일식(日蝕)이 있었다.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행례를 마치고 이어 창의궁(彰義宮)으로 나아갔는데 이날 일변(日變)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일한재(日閑齋)의 앞 뜰 한데서 엎드려 군고(軍鼓)를 치고 잠깐 동안 구식(救蝕)049) 하였다.
김치인(金致仁)에게 직첩(職牒)을 주고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3월 2일 신묘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구상(具庠)에게 직첩을 주고 서용하라 명하였으며, 신익빈(申益彬)·이최중(李最中)·정존겸(鄭存謙)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3월 3일 임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대보단(大報壇)의 제향(祭享) 의식을 익혔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양세현(梁世絢)에게 특별히 삭판(削版)의 형전(刑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3월 4일 계사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헌 임희교(任希敎)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구보만(具普萬)은 아들을 시켜 역적의 후예와 통래하게 하였으니, 그가 범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데, 양세현(梁世絢)은 또한 특히 무슨 심사로 그를 품질(稟秩)050) 에 넣었단 말입니까? 그 마음의 소재가 매우 해괴하고 통분하니, 청컨대 그를 외딴섬에 안치(安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 등이 다시 양세현을 왕부(王府)051) 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히 신문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심사를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구보만에 대해서도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신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5일 갑오
전 동중추(同中樞) 민수집(閔洙集)이 상소하여 보색(保嗇)052) 하는 방도를 진달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날마다 건공탕(建功湯)을 복용하여 그 효과가 매우 컸는데 기로과(耆老科)053) 로 진출한 자로서 민수집이 이 소를 올린 것은 오로지 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정해년054) 에 친경(親耕)·친잠(親蠶)할 때의 기민(耆民)과 잠부(蠶婦)들을 불러 각각 쌀과 비단을 내렸다. 또 갑술생(甲戌生)의 기민 네 사람을 불러 그 생일을 물어보니 모두 9월 12일과 13일로 대답하였는데 대개 천추절(千秋節)이 갑술년055) 9월 13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요행(僥倖)을 바라는 문이 크게 열려 사람마다 모두 엿보고 바라는 생각이 있게 되었는데, 시골의 어리석은 지아비까지도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의주 어사(義州御史) 남강로(南絳老)가 들어왔는데, 전 부사 구상(具庠)·송재경(宋載經)·황최언(黃最彦)의 포흠(逋欠)056) 을 염찰(廉察)하는 일이었다. 이때에 구상과 송재경이 세상의 지목을 받았는데 이복휘(李福徽)가 이들 세 부윤을 소론(疏論)하였지만, 그 뜻은 오로지 구상과 송재경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임금이 남강로에게 명하여 가서 염찰하게 하였는데 별단(別單)에서 구상을 더욱 긴중하게 취급하자, 임금이 특별히 삼공(三公)을 불러 그 일에 대하여 묻고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였으나 임금이 깊이 죄주려 하지 않아 아울러 나문(拿問)하게 된 것이다. 그 뒤에 황최언과 송재경은 귀양가고 구상은 금고(禁錮)하였다.
임금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유시를 내려 40세가 넘도록 혼인하지 못한 자를 동임(洞任)이 본관(本官)에게 보고하여 즉시 돌보아서 도와주어서 혼례를 치르게 하였다.
3월 6일 을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한인(漢人)의 자손들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이때에 황단(皇壇)에 제사를 마치고 감회가 풍천(風泉)057) 에 미쳤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전득우(田得雨)을 제배(除職)하여 경상 병사(慶尙兵使)로 삼고, 황세중(黃世中)을 영장(營將)으로 삼았다. 대개 이 두 사람의 선대(先代)가 명(明)나라에 벼슬하다가 병자년058) 에 호란(胡亂)을 피하여 우리 나라로 나온 사람들이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척호장(陟岵章)059) 을 읽게 하였다.
3월 7일 병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童蒙)을 데리고 입시하여 각각 《소학(小學)》을 강하게 하고 지필묵(紙筆墨)을 차등있게 내렸다. 이때에 온갖 제도가 해이해져 교관도 유명 무실(有名無實)하였는데, 평소에는 한 사람의 동몽도 가르치지 않다가 매번 입시하라는 명이 있을 때마다 갑자기 친척집의 아이들을 한데 모아가지고 응명(應命)하였다.
3월 8일 정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어 육상궁(毓祥宮)으로 나아갔는데, 이날이 곧 육상묘(毓祥廟)의 기신(忌辰)이었다. 여러 신하들에게 풍월헌(風月軒)으로 입시하라 명하고 승지로 하여금 벽 위의 현판(懸板)을 읽게 하였으니, 현판은 곧 어필(御筆)인데, ‘아첨을 억누르고 예절을 다하면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抑諛盡禮 復何餘憾]’라는 여덟 글자였다. 팔순(八旬)과 육순(六旬)에 그린 어진(御眞) 두 본(本)을 걸게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였는데, 어용(御容)을 이 궁(宮) 안에 둔 것은 상시(常侍)060) 를 억누르기 위한 뜻이었다.
3월 9일 무술
임금이 환궁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김치인(金致仁)에게 선유(宣諭)하였다.
3월 10일 기해
김이주(金頤柱)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으니, 김이주는 월성위(月城尉)061) 의 아들인데,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의 아뢴 바에 의한 것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에서 《소학(小學)》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대질(大耋)062) 을 맞아 삼강(三講)을 오래도록 폐하였고, 간혹 경연(經筵)에 나온다 하더라도 《대학(大學)》의 경1장(經一章)과 《소학(小學)》의 입교편(立敎篇) 및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수장(首章)만을 윤강(輪講)하였으며, 유신(儒臣)도 책을 끼고 등대하여서는 다만 조용히 있다가 몇 마디로 책임만 다하고 물러나곤 하였다.
서천(舒川) 사람 김쟁(金錚)이 구폐(救弊) 15조를 써서 올렸다. 임금이 김쟁에게 명하여 그 책을 읽게 하였더니, 속되고 잗달은 이야기가 많았고 시용(時用)에 맞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김쟁은 또 구두(句讀)를 분간하지도 못하였고 그 행동 거지가 해괴하므로 그 책을 비국(備局)에 내려 쓸 만한 것을 가리도록 명하였다. 김쟁이 물러나가자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필시 차작(借作)일 것이다."
하였다.
안동(安東) 사람 김상찬(金象燦)이 상소하여 양로(養老)의 고례(古例)를 따라 행하기를 청하고, 한(漢)나라 때의 삼로 오경(三老五更)063) 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기까지 하였으니, 대개 이는 장차 양로연(養老宴)을 행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답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한다면, 조종(祖宗)을 먼저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오례의(五禮儀)》는 곧 시왕(時王)의 제도인데, 어찌 옛날의 제도에서 구하겠는가?"
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상신(相臣) 김상철(金尙喆)에게 이르기를,
"어제의 두 선비는 모두 초사(初仕)를 바란 것이다."
하니, 김상철이 말하기를,
"《강목(綱目)》에 실려 있는 것은 양로례(養老禮)이지만 오늘날 행하려는 것은 양로연(養老宴)인데, 어찌 비교하여 같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청양(靑陽) 사람 신재환(申在瓛)이 산송(山訟)으로서 신문고(申聞鼓)를 두들기니, 임금이 신대승(申大升)에게 안렴(按廉)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신문고는 곧 국초(國初)의 고제(古制)이다.’라고 말하고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였는데, 시골 백성들이 자질구레한 일을 가지고 와서 번거롭게 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번잡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임금이 조사하기도 전에 앞질러 처분해 버림에, 도신(道臣)과 수재(守宰)가 전후로 죄를 입은 자가 많았다. 최후에는 호남의 구(舊) 도백 홍낙성(洪樂性)이 대략 그 폐단을 아뢰니, 임금 또한 바로 후회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1일 경자
전 판윤 김시영(金始煐)이 상소하여 휴퇴(休退)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그 이튿날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선마(宣麻)064) 하였다.
경기 유생(京畿儒生) 이한운(李漢運) 등이 상소하여 숙묘(肅廟)에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할 것과 소녕원(昭寧園)을 능(陵)으로 봉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용이 정집(鄭㙫) 등의 상소와 같자, 임금이 그 상소를 사각(史閣)의 서고(西庫)에 넣어두라고 명하고 이한운의 이름을 청금안(靑衿案)065) 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융숭한 예를 다하여 이미 원(園)으로 봉하고 또 위호(位號)도 더하였는데, 이한운 등이 임금의 뜻이 능으로 봉하는 데에 있다고 잘못 헤아리고 전후로 상소를 모두 다섯 번이나 올렸던 것이다. 임금이 이한운에게 죄를 주고 여러 차례 자책(自責)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합문을 닫고 약을 물리치며 신료(臣僚)도 소접(召接)하지 않았는데, 대신과 정원(政院)·옥당(玉堂)에서 모두 복합(伏閤)하여 구대(求對)하니, 밤이 깊어서야 면대한다는 명을 내렸다.
3월 12일 신축
하교하기를,
"도유(道儒)로서 소장(疏章)을 올리는 자는 먼저 태학(太學)을 경유하도록 하되, 만일 곧바로 올리는 자가 있으면 일의 경중을 막론하고 그 글은 태학으로 보내고 이름을 기록한 사람은 10년을 한하여 정거(停擧)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양사·여러 승지들을 소견(召見)하고, 특별히 요즘의 하교를 정지(停止)하게 하였다.
영남(嶺南)의 81세에 발해(發解)066) 한 사람 성이연(成爾演)을 소견하였는데, 그가 숙명할 때에 임금이 일어서서 나이를 높혀주는 뜻을 보였고, 그 뒤에 해서(海西)의 거유(擧儒)067) 로 나이 79세 된 사람을 참봉(參奉)으로 삼았으며,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연석에서 호남(湖南)의 거자(擧子)로 나이 82세 된 사람을 동중추(同中樞)에 제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오위 장(五衛將)으로 제수하였다.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典禮)가 위에서 너무 지나치고 은전(恩典)을 희구하는 청이 또 아래에서 나오니, 늙은이들에게 모두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임금이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를 소견(召見)하였으나 그가 이한운(李漢運)의 상소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므로 재실(齋室)에서 내치라고 명하였다.
3월 13일 임인
영부사(領府事) 김치인(金致仁)이 상소하여 사관(史官)과 함께 오라는 명을 사양하였는데, ‘책서(策書)는 엄중하여 명산(名山)에 갈무리되어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 인혐의 단서를 삼으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고 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김치인이 견책을 받았는데 임금이 군신(群臣)에게 명하여 각자 생각하는 바를 말하라고 하여 그 죄를 성토(聲討)하고 책자 하나를 만들어 《영수백세록(永垂百世錄)》이라 이름하여 사고(史庫)에 간직해 두라고 하였다. 그를 수서(收敍)하고 명소(命召) 할 즈음에 이르러 은교(恩敎)가 일찍이 정중하지 않음은 아니었으나 《영수록(領垂錄)》은 사실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사간 이수일(李秀逸)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으니, 그의 나이가 69세이기 때문이었다.
3월 14일 계묘
엄숙(嚴璹)을 대사헌으로,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이택진(李宅鎭)을 황해도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전 참판 신수채(辛受采)가 올라와서 연회에 참석할 수 있으면 말[馬]을 주고 공궤(供饋)하되, 그것이 어렵다면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예외로 발탁하여 관(官)에서 음식을 장만해 주고 약도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故) 정랑(正郞) 황대수(黃大受)에게 우의정을 증직하고, 승지를 보내서 그 묘에 치제(致祭)하였으며, 또 그 자손에게는 벼슬을 내리게 하였다. 황대수는 선조[宣廟]께서 입궁(入宮)할 때에 주서(注書)로서 〈제삼자(第三子)의 ‘삼’자를 ‘삼(參)’자로 써서〉 처변(處變)을 잘한 자였다. 임금이 그의 사적(事蹟)을 묻자 판부사(判府事)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자세한 것은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져다가 보고 말하기를,
"재상(宰相)은 모름지기 식견이 있는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문신(文臣)에게 제술(製述)을 시행하고 입격한 사람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박상덕(朴相德)을 발탁하여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3월 16일 을사
월식(月蝕)하였다.
임금이 《오리집(梧里集)》을 가져다가 보고 제사를 받드는 자손[奉祀孫]을 특별히 좋은 직책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대체로 오리(梧里)는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의 별호(別號)인데, 선묘조(宣廟朝)의 명상(名相)이었다.
3월 17일 병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능마아강(能麽兒講)068) 을 행하였다.
3월 19일 무신
이날은 곧 의종 황제(毅宗皇帝)069) 가 순절(殉節)한 날이었다. 새벽이 되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흑단령포(黑團領袍)를 차려입고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의 판위(板位)에 나아가 사배(四拜)를 행하고 전(殿) 안으로 들어와 세번 향을 올렸으며, 도로 판위로 나아가 사배를 행하였다. 절을 마치자 한참 동안 부복(俯伏)하였다가 하늘이 밝아서야 비로소 일어나 앉아 황명인(皇明人)의 자손과 병자년070) ·정축년071) 의 호란(胡亂) 때의 충신 자손을 소견(召見)하였는데, 강세작(康世爵)의 봉사손(奉祀孫) 강상요(康相堯)에게는 북도(北道)의 변장(邊將)에 비망(備望)하고 강집규(康執圭)에게는 특별히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강세작은 황명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금주(錦州)의 노란(虜亂) 때에 전사하였는데 강세작이 우리 나라로 도망쳐 와서 무산(務山)에 정거(定居)하여 자손이 지금도 번성하고 있다.
3월 20일 기유
윤양후(尹養厚)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사(試射)를 행하여 황명인(皇明人)의 자손들에게 혹은 급제(及第)를 내리고 혹은 가자(加資)하며 혹은 말을 주고 혹은 궁시(弓矢)를 내렸다. 그 밖의 아약자(兒弱者)에게는 쌀을 내리고 미혼자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혼수(婚需)를 도와주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김치인(金致仁)에게 봉조하(奉朝賀)를 특별히 제수하고 승지를 보내어 위유(慰諭)하였으며 이어 함께 오도록 하였다. 또 선마문(宣麻文)을 친히 지어 정원으로 하여금 정서(精書)하게 하여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함경 감사의 장문(狀聞)으로 인하여 북청(北靑)의 적진포(赤津浦)에 창고(倉庫) 하나를 더 설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1일 경술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병자년·정축년의 충신 후손에게 제술(製述)을 실시하고, 장원한 홍상찬(洪相纘)에게 급제를 내렸으니, 홍상찬은 곧 충렬공(忠烈公) 홍명구(洪命耉)의 후손이었다.
3월 22일 신해
증광시(增廣試)의 생원·진사과의 방(榜)이 나오자 임금이 한 방에 입격한 자들을 편전(便殿)에서 소견(召見)하였다.
3월 23일 임자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해서(海西)의 나이 79세 된 사람이 회시(會試)의 방에 입격하지 못하였음을 듣고 전랑(殿郞)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전(前) 동중추(同中樞) 이정(李瀞)을 제수하여 지중추(知中樞)로 삼았다. 이정은 임오년072) 에 상서(上書)하고 궐문 아래에서 스스로 목을 찌른 사람이었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 앞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니, 헌관(獻官)이 향과 축문을 받들고 나왔다. 임금이 걸어서 통양문(通陽門) 밖에까지 따라갔다가 도로 덕유당으로 나아가서 87세 된 세 사람을 소견하고 각각 쌀과 비단을 내려 주었다.
3월 26일 을묘
이날은 인원 왕후(仁元王后)073) 의 기신(忌辰)이었다. 임금이 추모하는 마음으로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을 이안와(易安窩)에서 소견하였다. 이안와는 띠[茅]로 덮여졌는데,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갑진년074) 부터 지금까지 50년이 되었는데, 전하를 모자궁(茅茨宮)에 받들게 되었으나 신의 마음이 더욱 즐겁습니다."
하였다. 대가(大駕)가 환궁하여 집경당에 나아가 김치인(金致仁)을 소견하였다. 김치인이 울면서 그의 죄를 말하니, 임금이 자못 위유(慰諭)를 더하였다.
3월 27일 병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봉조하(奉朝賀) 김치인에게 선마(宣麻)하였는데, 교문(敎文)은 어제(御製)였다. 이어 신한(宸翰)075) 4구(句)를 내렸는데, 이르기를,
"오늘날에는 풍악을 잡히고[今設軒架], 옛날에는 음식을 내렸다네[憶昔賜饌]. 양대의 봉조하가[兩代奉賀], 옛날에 어디 있었던가[古豈有哉]?"
하였다.
3월 28일 정사
하교하기를,
"임금은 술잔을 받고 기민(畿民)은 진휼을 받았으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느냐? 대소 신민이 함께 즐기는 날에 만약 옥에 갇혀 있는 죄수가 있다면 그것을 장차 어찌 해야 하겠는가? 승지로 하여금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하고, 또 기백(畿伯)에게도 오늘안으로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9일 무오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와 도신(道臣)·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음식을 마련하고 풍악을 준비하여 사서(士庶)의 나이 80세 이상된 사람을 대접하게 하고, 주현(州縣)에서도 모두 거행하게 하되 저치미(儲置米)에서 보조해 주게 하였다.
3월 30일 기미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생(儒生)들이 이미 청하였으나 내가 거절하였는데, 무슨 마음으로 진연(進宴)을 받겠는가? 내일 양로연(養老宴)과 겸해서 행하려 한다."
하니, 세 상신(相臣)이 아뢰기를,
"이는 단지 유생들만의 말일 뿐만 아니라 바로 온나라 신민들의 마음입니다. 전하께서 성효(聖孝)를 펴고자 하신다면 신 등이 뉘라서 감히 봉행치 않겠습니까? 어떻게 이 일로써 이미 결정된 진연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나의 마음을 모른다. 이것은 겸양하는 덕(德)이 아니라, 곧 고심(苦心)인 것이다."
하였다.
호남(湖南)의 유학(幼學) 조두신(趙斗臣)을 소견(召見)하여 승자(陞資)하여 특별히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하라고 명하였으니, 그의 나이 82세이고, 고(故) 승지 조명신(趙命臣)의 10촌(寸)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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