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기축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양조(兩朝)의 을유년106) 과 신축년107) 에 책봉(冊封)되고 입학(入學)한 일기(日記)의 초록(抄錄)을 감인(監印)하게 하여, 덕유당(德游堂)에서 친히 받았다.
임금이 기로소(耆老所)의 영수각(靈壽閣)에 나아가 사배(四拜)를 행하고 대청(大廳)에 나아가 기로소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세 구[句]의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次韻)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기로소 당상에게는 말를 내리고 수직관(守直官)은 승서(陞敍)하였으며 하인에게는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였다.
4월 3일 신묘
김종정(金鍾正)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사서(士庶)의 노인으로 나이 80세 이상 된 사람에게는 쌀을 내리고 혹은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80세가 어찌 그리 많은가? 스스로 갑술생(甲戌生)이라고 칭하는 것은 속셈이 있는 듯하다."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갑술생이 많은 것은 또한 운수(運數)에 따른 소치일 것입니다."
하였다.
4월 4일 임진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지평 이한일(李漢一)이 아뢰기를,
"이번의 한권(翰圈)108) 은 전연 공평하지 못하여 물의(物議)가 자자하니, 주관한 사람을 견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주(遺珠)109) 가 있었구나! 대각(臺閣)이 적막하던 때에 이러한 소회(所懷)가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눈이 뜨인다. 권점(圈點)을 주관한 여러 한림들에게는 모두 서용하지 않는 형전(刑典)을 시행하라."
하였다. 이한일이 또 아뢰기를,
"정주 목사(定州牧使) 이정수(李廷壽)는 본래 용렬한 데다가 정신이 혼모하여 전연 일을 일답게 처리하지 못하니 척파(斥罷)하는 형전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그를 체직(遞職)하라."
하였다. 이한일이 또 아뢰기를,
"근래(近來) 각읍(各邑)에서는 향사(享祀)의 예폐(禮幣)에 저포(苧布) 대신 마포(麻布)와 면포(綿布)를 쓰고 있으니,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하여 적발하여 논죄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한일이 또 아뢰기를,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이 매번 포폄(褒貶)하는 때를 맞이하면 잘 다스리지만 권세가 없는 사람은 중(中)과 하(下)에 두고, 다스리지는 못해도 권세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고(上考)에 두고 있으니, 도신을 엄히 신칙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요사이 대각이 적막하던 때에 이한일이 능히 네 가지를 아뢰니, 가히 쟁쟁(錚錚)하다 하겠다."
하고,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려 주었다.
춘추관(春秋館)의 영사(領事)·감사(監事)와 여러 당상들을 모두 패초(牌招)하여 도당(都堂)110) 의 권점(圈點)을 명하고, 주서(注書)는 일찍이 주서를 지낸 세 사람을 한원(翰苑)의 예대로 겸주서(兼注書)로 계하(啓下)하고 패초하여 오늘 안으로 주서의 권점을 행하게 하였다.
4월 5일 계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친히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의식을 익혔다.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의 소시(召試)를 행하여 한림에는 정민시(鄭民始)와 홍국영(洪國榮) 등 4인을 뽑고, 주서에는 신사오(申史澳) 등 3인을 뽑았다.
4월 6일 갑오
임금이 서강(西江)의 조선(漕船) 점검소(點檢所)에 행행(行幸)하였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였다. 임금이 조졸(漕卒)의 구포(舊逋)111) 를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으며, 감관(監官)에게는 각각 무명 1필씩을, 색리(色吏)에게도 베 1필씩을 내렸다. 의소(懿昭)의 묘에 들려서 돌아왔다.
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양세현(梁世絢)을 삼수부(三水府)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양세현이 죄인 구보만(具普萬)을 품처질(稟處秩)에 넣었으므로 임금이 나문(拿問)하라 명하였는데, 그가 공사(供辭)에서 자신이 변변치 못하고 무식해서 그랬다고 자복하였기 때문에 이 명(命)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4월 7일 을미
호조의 낭관에게 명하여 무명 22필을 가지고 강가에 달려가서, 어제 참석하지 못한 영남(嶺南) 우조창(右漕倉)의 선인(船人)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임금이 억석와(憶昔窩)에서 재숙(齋宿)하였다.
4월 8일 병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건명문(建明門) 밖에까지 따라 나갔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도제조에게 말하기를,
"오늘 저녁은 연등(燃燈)하는 밤이다. 도민(都民)들은 부자 형제가 서로 이끌면서 관등(觀燈)하련만 나만 혼자니, 이 무슨 팔자인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허다한 선인(船人)들이 모두 양덕(凉德)112) 을 만나고 돌아가면 그 처자(妻子)가 필시 임금을 만나니 무엇을 주더냐고 물을 것인데, 모두 말을 못할 것이다. 이번 걸음은 전에 없었던 일이니 만약 전에 없던 은혜가 없다면 선인들은 비록 원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서강(西江)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겠느냐? 선인과 격군(格軍)에게는 선혜청(宣惠廳)의 낭관(郞官)이 달려가서 각각 쌀 1두씩을 나누어 주고, 색리(色吏)로서 혹 역(役)을 겸하는 자가 있으면 금년에만 특별히 역을 면제 해 주며, 격군은 모두 금년에 한하여 특별히 역을 면제해 주도록 해당 차사원(差使員)과 첨사(僉使)에게 전하게 하라."
하였다.
4월 9일 정유
홍낙명(洪樂命)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전 영부사(領府事) 김상복(金相福)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박사형(朴思亨)·조준(趙㻐)을 승지로 삼았다.
홍낙명(洪樂命)·이미(李瀰)에게 가자(加資)하고, 전(前) 주서(注書) 박상갑(朴相甲)·오재소(吳載紹)와 급제한 이병모(李秉模)에게는 모두 승륙(陞六)하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달에 의한 것이다. 지평 이한일(李漢一)이 아뢰기를,
"이번 과장(科場)은 엄숙하지 못하여 떡·엿·술·담배 따위를 현장에서 터놓고 팔았으니, 그때의 금란관(禁亂官)에게는 삭파(削罷)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여야 마땅합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유혁(柳爀)은 사람부터 용렬(庸劣)한데다가 성질도 흐릿하여 검전(檢田)이 실임(失稔)하자 곡물을 바꿔치기하여 원성을 초래하였으니, 척파(斥罷)의 형전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공조 좌랑 박질(朴質)은 강가에 살면서 무단(武斷)으로 전횡(專橫)하였으며, 상납(上納)하는 것을 탈취하여 이름이 문부(文簿)에까지 올랐으니 삭판(削版)의 형전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부여 현감(扶餘縣監) 박응환(朴應煥)은 왕명(王命)을 받드는 관리로서 고을 사람들에게 욕을 당하고도 태연히 무릅쓰고 눌러 앉아 있으니, 참으로 극히 유약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파직을 시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외방에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세궤(歲饋)113) 나 절선(節扇)114) 은 본래 정례(定例)가 있는 것인데도 요행을 엿보고 바라는 자들이 대부분 한도 이상으로 선사하여 벼슬을 도모하는 지름길로 삼고 있으며, 그곳의 소산(所産)에 따라 많은 것만을 위주로 하여 심지어 한 달에 두번 문안하는 일까지 있으니, 풍속을 손상함이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금은(金銀)의 많고 적음에 따라 관작의 고하(高下)가 결정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말들이 오늘날에는 없다고 어떻게 단정하겠습니까? 그러니 각도(各道)의 영읍(營邑)에 엄히 신칙하여 전처럼 지나치게 문안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청한 것은 염치를 권장하고 아첨을 막는 길이다. 비국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늙은이와 시골 백성으로서 서울에 온 80세 이상 된 자를 소견(召見)하고 각각 비단 1필씩을 내리고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함흥(咸興) 사람이 공포(貢布)를 바친 뒤에 성첩(成貼)을 못받고 지금까지 지체되고 있다고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형조에 명하여 해당 아전을 결장(決杖)하라고 하였다.
윤방(尹坊)을 승지로 삼았다.
4월 10일 무술
이세택(李世澤)을 대사헌으로, 안겸제(安兼濟)를 충청 감사로, 이최중(李最中)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4월 11일 기해
이한일(李漢一)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가뭄을 근심하여 어공미(御供米)를 하루에 3승(升)씩 감하라고 명하였다가 이튿날 영의정 한익모(韓翼謨)의 주달로 인하여 앞서의 명을 도로 거두었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여 이보온(李普溫) 등 30인을 뽑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이어 빈대(賓對)를 행하여 한필수(韓必壽)·윤면승(尹勉升)에게 모두 직첩을 주어 서용하라 명하고, 한필수를 삭훈(削勳)하라고 한 하교는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선전관으로 귀양간 사람들도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오위 장(五衛將) 조두신(趙斗臣)이 전토(田土)를 추심(推尋)하는 일로써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나이 82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오위장을 제수하였으니 광영이 이미 극진한 것이다. 그런데도 득롱 망촉(得隴望蜀)115) 의 계교를 꾸며냈으니, 이는 상하(上下)의 구별이 엄하지 못한 탓이다. 그를 삭판(削版)하여 시골로 내쫓아라."
하였다.
4월 12일 경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오부(五部)의 유생(儒生)들을 소견(召見)하고 선유(宣諭)하기를,
"제생(諸生) 중에서 국가와 농사에 대하여 칠실지우(漆室之憂)116) 가 있는 사람은 전상(殿上)에 올라와 진달하라."
하니, 이택규(李宅圭)는 요사이 가뭄이 농사를 망치게 하는 것에는 이르지 않는다고 우러러 아뢰고, 김사주(金師柱)는 외방의 전답이 모두 대가(大家)의 소유로 들어갔다고 아뢰고 또 근래에는 관작과 상전(賞典)이 너무 넘친다고 말하였으며, 이의형(李宜馨)은 10일 이내에만 비가 내리면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고 우러러 아뢰니, 모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충청 감사의 장문(狀聞)에 장흥(長興)의 대동미(大同米) 1천 4백 석이 태안(泰安)의 지경에서 취재(臭載)117) 하였다고 아뢰니, 임금이 본부(本府)에서 실지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배에 태우지 않았다 하여 부사(府使)를 먼저 파직한 뒤에 나문(拿問)하라 하였으며, 태안 군수가 배를 잘 호송(護送)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분하게 하였다.
4월 13일 신축
임금이 말하기를,
"《백세록(百世錄)》 서문 중에 이형원(李亨元)·유강(柳焵)·유항주(兪恒柱)의 일이 있었고 하교도 매우 준엄하였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외람되게도 도당록(都堂錄)에 들게 되었느냐? 그러면 이형원도 들었단 말이냐? 이 역시 어찌 제방(隄防)을 엄히 하는 도리더냐? 양사(兩司)가 마침 들어왔는데 내가 어찌 이목(耳目)의 일을 대신 행하겠느냐? 개연한 뜻만 유시할 뿐이다."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 박사륜(朴師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조두명(趙斗明)을 먼 곳으로 정배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도(海島)에 정배하라."
하였다. 또 유강과 유항주를 도당록에서 빼버릴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심이지(沈頤之)를 승지로 삼았다.
4월 14일 임인
임금이 가뭄을 민망히 여겨 월령 봉진(月令封進)을 비가 내리기 전에는 모두 올리지 말라 하고 탕제(湯劑)도 들지 않으니, 약방에서 재계(再啓)까지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을 소견하고 농사의 형편을 하문하였다.
하교하기를,
"듣자니, 유강(柳焵)과 유항주(兪恒柱)의 이름이 《백세록(百世錄)》에 올라있다 하는데도 도당록(都堂錄)에 착오가 있었던 것은 대개 그 일이 이미 타결된 것으로 여긴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름을 《영수백세록(永垂百世錄)》이라 하는데도 겨우 한 해를 넘기자 씻은 듯이 없어졌다. 한정유(韓鼎𥙿)의 준점(準點)118) 여부를 정원에 물었더니 과연 차점(次點)이었다. 처음에는 정원에 명하여 그 전례를 묻게 하였으니, 이런 일들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영상이 영사(領事)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준점·차점을 막론하고 영상이 모두 5점으로 한계를 삼으니, 5점에 들지 않은 것을 어찌 거론하겠는가? 한정유를 특별히 권점(圈點)에서 빼버리고 권점하는 일을 엄히 하라. 《백세록(百世錄)》을 사고(史庫)에 보관하고 나라 안에 반포까지 하였는데도 이렇다면 후일 《대훈(大訓)》·《소감(昭鑑)》·《유곤록(裕昆錄)》도 역시 모두 이렇게 될 터이니, 한권(翰圈)도 다시 한천(翰薦)으로 되고, 주천(注薦)도 곧 되살아날 것이다. 접때 권점에 참여하였던 삼공(三公)은 모두 상직(相職)에서 면직하고 참여하였던 여러 신하들에게는 모두 서용하지 않는 율(律)를 시행하라."
하였다.
김상철(金尙喆)을 제배하여 좌의정으로 삼고, 원인손(元仁孫)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임금이 전설사(典設司)에서 재숙(齋宿)하였다.
4월 15일 계묘
이수훈(李壽勛)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사간 정만순(鄭晩淳)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유강(柳焵) 등의 도당록(都堂錄)을 할 때에 수참(隨參)한 여러 당상과 권점을 주관한 수당상(首堂上) 한익모(韓翼謨) 등을 모두 파직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하교하기를,
"삼공(三公)은 하나와 같으니 똑같이 파직하라."
하였다.
임금이 승지로 하여금 여러 죄수의 문안(文案)을 읽으라 하고 특별히 감률(減律)하여 섬으로 보내서 종으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형조 판서 홍낙성(洪樂性)이 허다한 중죄수를 앞질러 특별히 용서한 것은 왕법(王法)에 흠이 되는 일이라고 우러러 아뢰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호피(虎皮)를 내렸다.
4월 16일 갑진
김상복(金相福)을 다시 제배하여 영의정으로 삼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 조강(朝講)에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창승(蒼蠅) 소리를 닭 우는 소리로 알고 달빛을 날이 밝은 줄 알았다.’는 〈《시경(詩經)》 제풍(齊風) 계명(鷄鳴)장의 시(詩)는〉 옛날 어진 임금이 날마다 조회에 나감을 노래한 것이다.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매일 상참을 취품(取稟)하였던 것은 뜻이 대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어찌 감히 늙었다고 편할대로만 하겠느냐? 이 뒤로 삭망(朔望)의 상참은 전례에 따라 하여 조신(朝臣)들의 잠을 깨우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수훈(李壽勛)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제의 합사(合辭)에서는 수상(首相)만 논하여 성상의 처분을 번거롭게 한 것은 일이 살피지 못한 것에 관계되니, 청컨대, 어제 대각(臺閣)에 나아갔던 대신(臺臣)은 모두 파직(罷職)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어보(御寶)를〉 위조(僞造)한 여러 죄인(罪人)을 특별히 방면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을 우러러 보면 비록 한 사람을 참작하여 처분하더라도 대신(臺臣)은 반드시 재삼 입계하여 지난(持難)하였다. 더구나 그저께 내린 여러 처분은 또한 한 고조(漢高祖)의 약법 삼장(約法三章)의 뜻을 따른 것인데, 지금의 대각(臺閣)은 단지 어보(御寶)의 위조만 알고 삼장(三章)의 뜻이 소중함은 모르니 널리 많은 책을 상고하여 보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고요(皐陶)119) 가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 순임금은 용서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참작하여 처분하는 것은 가엾음을 특별히 진념한 것이나 대신은 또한 법을 지키려 함이니, 이는 이른바 병행(並行)하여도 서로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희우랑(喜雨廊)이라고 써서 내려 전설사(典設司)에 걸라고 명하였다.
4월 17일 을사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사관(史官)에게 《노중련전(魯仲連傳)》120) 을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먹[墨]으로 지운 곳이 있어 감히 읽지 못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필시 흉역(必是凶逆)’이란 네 글자일 것이다. 나는 항상 마음에 상처(傷處)를 입으면 나의 마음이 먼저 동하였기 때문에 꿈속에서 얼핏 듣고 곧바로 읽기를 그치라고 명한 것이다. 전에는 주인(朱璘)이란 환관(宦官) 때문에 마음을 썼는데, 이제 사경(死境)에서 겨우 살아남은 목숨이 모년(暮年)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니, 모두 나의 운명이다. 이 뒤로는 약도 물리치고 조용히 생각에 잠길 따름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청대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의 꿈이 이상하니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성상의 마음속에 담아둘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고에 어찌 배윤명(裵胤命) 같은 흉역이 있었겠느냐?"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그의 살을 씹고 그의 가죽을 깔고 자도 부족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노중련전》에 망측스런 말이 있었으나 내가 알 수가 없어서 명하여 읽게 하고 을해년121) 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과 비교하려 한 것이다. 한필수(韓必壽)의 청이 비록 과중하였으나 나는 병이지심(秉彛之心)에서 나왔음을 안다고 말하였다. 배윤명(裵胤命)의 일에 응당 연좌되어야 하는 자들에게 만일 극형을 시행한다면 간쟁(諫爭)하여도 좋지만 정배(定配)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이것도 명류(名流)의 남은 기풍(氣風)이다. 전 우상 이사관(李思觀)에게는 관작을 삭탈하는 율로써 시행하고 배윤명의 족속으로서 사방에 정배된 자 중에서 여자로 15세 미만자는 거론하지 말고 나머지는 모두 종전대로 정배하라. 배윤명의 죄는 비록 그와 같으나 모년(暮年)에 어떻게 법에 없는 일을 열 수 있겠느냐? 이 뒤로는 의금부나 법을 집행하는 신하들도 원례(援例)하지 말라."
하였다.
이상주(李商舟)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에게 명하여 박상갑(朴相甲) 등 6인을 호당(湖堂)에 뽑았다.
4월 18일 병오
유언호(兪彦鎬)를 호당록(湖堂錄)에서 빼고 대제학 이복원을 파직(罷職)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오늘 입시한 여러 대신(臺臣)들은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유언호는 이름이 《백세록(百世錄)》에 올라 있었는데 이복원이 초계(抄啓)하였다가 그 후에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하자 이조 판서와 예조 판서도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하문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이조 판서와 예조 판서는 도당(都堂)과는 다름이 있기 때문에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이조 판서·예조 판서는 대제학과 더불어 전지를 받들라 하고 서용하지 말라는 것만은 감하라고 명하였다.
4월 19일 정미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판서로, 조중회(趙重晦)를 예조 판서로, 김상익(金相翊)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서유신(徐有臣)·홍상간(洪相簡)·박상갑(朴相甲)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대개 이들 세 사람이 서로 잡아끌고 버티며 호당(湖堂)에 즉시 응명하지 않으니 임금이 그들의 교만을 미워하여 이 조치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서유신은 그의 조부 서종태(徐宗泰)가 공무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말하니, 임금이 근거가 있다고 여겨 특별히 모면하였으나 홍상간과 박상갑은 서로 잡아끌고 버티면서도 호당의 이름만 취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홍상간은 한강 가별장(漢江假別將)으로, 박상갑은 삼전도 가별장(三田渡假別將)으로 삼았다.
임정원(林鼎遠)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관(中官)이 당도하기 전에 먼저 융복(戎服)을 갖추고 나아가 점검을 받았다 하니, 어찌 가상하기만 하랴? 참으로 그 할아버지의 손자이니, 홍상간을 가별장으로 삼으라는 명을 특별히 거두라."
하였다.
4월 20일 무신
박상갑(朴相甲)에 대한 어제의 하교를 도로 거두라고 명하였다. 대개 병조에서 삼전도(三田渡)의 고립군(雇立軍)에게 사문(査問)하니, 박상갑도 또한 중관이 당도하기 전에 나와서 별장의 융복을 빌어 입고 참견(參見)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응제(應製)에 입격(入格)한 정원시(鄭元始) 등에게 각각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임금이 해미(海美)의 세선(稅船)이 짐을 많이 실어 치패(致敗)하였다 하여 해당 현감은 진도군(珍島郡)에 정배(定配)하고, 좌수(座首)는 수사(水使)로 하여금 종중 결곤(從重決棍)하게 하였으며, 선주(船主)는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4월 22일 경술
심이지(沈履之)를 대사헌으로, 이담(李潭)을 지경연 지춘추 우부빈객 사복 제조 사포 제조(知經筵知春秋右副賓客司僕提調司圃提調)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시골 군졸과 농민을 소견(召見)하고 보리 농사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임금이 독서당(讀書堂)에 소장된 수정배(水晶盃)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어필(御筆)로 ‘이제야 옛날 물건을 보니 팔순에 좋은 구경을 하였다. 특별히 써서 내리며 술잔 셋을 다함께 보관하라.’고 써서 내리고, 전(前) 대제학에게 명하여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호당(湖堂) 박상갑(朴相甲)을 소견하고 글제를 내서 오언(五言)·육언(六言)·칠언(七言) 절구(絶句)를 지어 올리라 명하고, 특별히 지필묵(紙筆墨)을 내렸다. 홍상간(洪相簡)에게 지어 올리라고 명하자 홍상간이 지을 줄을 모른다고 사양하니, 임금이 이는 모면하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특별히 묘파리(廟坡里) 권관(權管)에 차임하였다.
4월 23일 신해
구익(具㢞)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박상갑(朴相甲)에게 명하여 어제시(御製詩)를 차운(次韻)하여 올리라 명하고 이어 선온(宣醞)하였으며, 홍상간(洪相簡)을 외방에 보직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4월 24일 임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호당(湖堂)의 사전(謝箋)을 받고, 박상갑(朴相甲)에게 어제시(御製詩)를 차운(次韻)하여 올리게 하였다. 또 승지와 시위(侍衛)에게도 차운하여 올리게 하고, 이어 주강(晝講)에서 《소학(小學)》을 강하였다.
박상갑을 특별히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다.
4월 25일 계축
정광한(鄭光漢)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홍인한(洪麟漢)을 평안 감사로 삼고 외방에 보직하는 예대로 당일에 사은하고 즉시 하직하게 하였다. 조덕성(趙德成)을 승지로 삼았다.
4월 26일 갑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경기 감사에게 경기의 백성을 인솔하고 입시하게 하여 농사 형편을 하문하였다.
지평 이언일(李彦一)이 상소하여, 저희들은 이미 대각(臺閣)을 거쳤으니, 괴원(槐院)122) 에 소속시켜 주기를 청하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었으며, 임금도 엄한 비답을 내려 물리쳤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비국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제언(堤堰)을 수리(修理)하게 하였다.
4월 27일 을묘
심욱지(沈勗之)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4월 28일 병진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나아갔다가 이어 효장묘(孝章廟)와 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전작(奠酌)하였는데, 왕세손이 수가(隨駕)하였다.
4월 29일 정사
장지항(張志恒)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과 여섯 승지의 파직을 명하였다. 이때에 옥당 오재소(吳載紹)가 앞질러 나가버리자 임금이 우의정 원인손(元仁孫)에게 묻기를,
"오재소가 앞질러 나가버린 것은 어찌된 일이냐?"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이복원의 상소로 말미암아 박상갑(朴相甲)의 상소가 있게 되었고, 박상갑의 상소로 말미암아 오재소가 앞질러 나가버린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이복원의 상소에서 도당록(都堂錄)에 대해 언급하여 격례(格例)로 보아 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박상갑이 이것을 사직소(辭職疏)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만약 호당(湖堂)을 사양하고자 한다면, 다만 그 일만 말할 일이지 어쩌자고 이미 타결이 된 도당록을 들먹이느냐? 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휴지가 되어 버렸을 것인데 또 어찌 사방에 보였단 말이냐?"
하고, 마침내 모두 파직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성규(李聖圭)·최태형(崔台衡)·이흥종(李興宗)·서호수(徐浩修)를 승지로 삼았다.
정범조(丁範祖)를 소견(召見)하고 어제(御製)의 시구(詩句)를 차운(次韻)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특별히 지필묵(紙筆墨)을 내렸다. 또 객지에서 벼슬살이하기가 구차할 것이라 하여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4월 30일 무오
이성수(李性遂)·이재간(李在簡)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주강(晝講)에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친히 호당(湖堂)의 사전(謝箋)을 받고, 정범조(丁範祖)에게 시를 짓게 하여 호당의 옛 술잔을 가져다가 이어 선온(宣醞)하였다.
승지 이성수(李性遂)를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고, 정범조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상간(洪相簡)이 내가 내린 술을 마시고도 내가 명한 글제에 응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이더냐? 그를 호당으로 대접하니 내가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어떻게 그 태만함을 방치할 수 있겠느냐? 호당 학사 홍상간을 월곶 첨사(月串僉使)로 차하(差下)하여 오늘로 부임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입시하였을 때에 만약 하교가 혹 잘 들리지 않았다면, 승지가 사관(史官)에게 묻는 것이 옳은데 중관(中官)에게 물었으니,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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