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20권, 영조 49년 1773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1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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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기미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호당(湖堂) 정범조(丁範祖)가 칠언(七言) 20운(韻)의 배율(排律)을 지어서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능히 삽시간에 지어서 올리니 호당으로 간선(簡選)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고, 특별히 녹비(鹿皮)를 내렸다.

 

이조 판서 박상덕(朴相德)을 삭직(削職)하고, 이조 낭관(郞官)은 해남현(海南縣)에 충군(充軍)하라 명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의망(擬望)할 사람이 수두룩하고 오늘의 칙교(飭敎)도 어떠하였는데, 대사헌에 삼망(三望)된 사람이 하나는 북관(北關)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는 틀림없이 핑계를 대고 버틸 사람이며, 하나는 영남(嶺南)에 있는 사람이니, 구차하기가 이렇게 심할 수 없다. 집필 낭관은 어찌 마음에 달갑게 여겨 시킨대로 방자하게 받아 썼단 말이냐?"
하고, 이어서 이 명이 있었다.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조덕성(趙德成)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5월 2일 경신

이담(李潭)을 이조 판서로, 이휘지(李徽之)를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이조 참판 윤득양(尹得養)과 참의 홍낙순(洪樂純)이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고 이조 낭관에 대한 하교는 특별히 도로 중지하였다.

 

집의 홍빈(洪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관(瀛館)123)  의 간선은 사람마다 헤프게 주는 것이 아닌데도 어리석고 둔한 홍상성(洪相聖)과 경솔하고 천박한 안성빈(安聖彬)과 추잡하고 비루한 이보천(李普天)·이규위(李奎緯)의 행동이 경망하고 패려하며 이보온(李普溫)처럼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자도 모두 부당하게 참여시켜 함부로 더렵혀지고 있습니다. 도당(都堂)의 여러 신하들이 이미 감죄(勘罪)의 처벌을 받았으니,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주관한 사람도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마땅히 해당 부제학은 빨리 삭판(削版)을 명하시고, 참석했던 여러 사람도 역시 견파(譴罷)해야 하며, 홍상성·안성빈·이보천·이규위·이보온 등은 모조리 홍문록에서 뽑아버려 영관의 선발을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요사이 대간[耳目]이 적막하던 때에 이러한 글이 있으니, 가히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 아! 우로(雨露)는 땅을 가려서 내리는 것이 아니고 요(堯)임금 같은 성인도 오히려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사람을 논함에도 한창 자라는 사람은 꺾지 않거늘 또한 어찌하여 일필(一筆)로써 단죄(斷罪)하려 한단 말이냐? 홍문록에 실린 여러 사람들에 대한 규정(糾正)은 도당록(都堂錄)에 있는만큼 이번 소청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당은 첨위(唐恩僉尉) 홍익돈(洪益惇)이 노복(奴僕)을 단속하지 않아 항간에서 작폐하였으므로 근처의 푸줏간이 간혹 걷어치우는 때가 많았고 문을 마주 대하여 사는 종신(宗臣)이 이사를 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청컨대, 그를 파직하고, 노복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익돈은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고, 그 노복은 해조로 하여금 호남(湖南)의 연해 지방에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상묵(金尙默)의 일전의 상소 내용과 공사(供辭)는 크게 상반됨이 있습니다. 공사에는, ‘문벌과 처지가 같지 않으니 우리 족류(族類)는 아닙니다.’ 하였고, 상소 내용에는, ‘남을 팔아 스스로 모면하려 하였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전일의 공사가 옳다면 오늘의 상소는 자연히 기망(欺罔)의 죄과를 범한 것이 될터이고 만약 오늘의 상소가 옳다면 전일의 공사는 흐리게 하려는 계교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이를 내버려 둔다면 이후의 폐단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니, 청컨대, 삭직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은 첨위의 일은 몹시 놀랍다. 종신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신(臺臣)이 모두 귀머거리가 되어서 그랬단 말이냐? 만일 대사헌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 가상한 일이다."
하고, 특별히 숙마(熟馬)를 내렸다.

 

5월 3일 신유

임금이 억석와(憶昔窩)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5월 4일 임술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행행하였다.

 

김상익(金相翊)을 승지로 삼았다.

 

5월 5일 계해

임금이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보리를 받았다. 임금이 판위(板位)에 나아가자 봉상 제조(奉常提調)가 보리 상자를 받들고 꿇어앉아 승지에게 전하매, 승지가 꿇어앉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받았다.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경기 감사를 소견하였다. 대신(大臣)이 탕제 드시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가 넉넉하게 내리면 내국(內局)124)  을 부르려 하였으나, 비가 그쳤기 때문에 부르지 않았다."
하였다.

 

5월 6일 갑자

부수찬 이도묵(李度默)이 홍문록(弘文錄)을 할 때에 부제학 정상순(鄭尙淳)이 준엄한 말로써 막았으므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군민(軍民)을 불러 폐막(弊瘼)을 물었다. 이어 10조(條)의 책기(責己)하는 교서를 내리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경조(京兆)로 하여금 이익만 추구하여 곡물을 쌓아 놓고 있는 자들을 밝혀내어 그 곡물을 시전(市廛)에다 풀어서 판매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조의 하속(下屬)들이 작폐하는 것을 먼저 조절한 뒤에 이것에 의하여 신칙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담당 관원에게 분부하여 응당 내려야 하는 공물(貢物)은 값진 것부터 지급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경조에 명하여 오부(五部)에 엄칙하여 좌경(坐更)125)  을 전처럼 좌목(座目)의 순서에 따라 윤번으로 숙직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전에 내가 판윤에게 이르기를, ‘경의 노복에서부터 시작하여 실행하라.’고 일렀는데, 지금 아뢴 바를 들으니, 법이 오래되어 해이해져서 그런 것이다. 이에 의해 신칙하고 만약 따르지 않는 병폐가 있으면, 경조로 하여금 초기(草記)를 올리게 하여 해당 부관(部官)을 무겁게 감죄(勘罪)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절용(節用)하는 방도에 더욱 힘쓰고 혹시라도 상전(賞典)을 넘치게 베푸는 일이 없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소후(韓昭侯)가 바지를 간직해 둔 뜻이126)   대개 이러한 것이었다. 아! 지난날 경복전(景福殿)에 종신(宗臣)으로 하여금 여덟 글자를 써서 걸게 하였으니, 곧 ‘용도(用度)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되 시기에 알맞게 하라[節用愛人 使民以時]’는 것이었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천승지국(千乘之國)을 다스림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 말이다. 지금 아뢴 바는 바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내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유의하겠다."
하였다. 정언 송락(宋樂)이 아뢰기를,
"일전의 빈대(賓對)에서 한성부 우윤 윤태연(尹泰淵)이 앞뒤를 두리번거리고 옆 사람과 말을 주고받는 등 전연 조심성과 존경하는 마음이 없었고, 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제 마음대로 먼저 나가서 끝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경칙(警飭)하는 도리에 있어 방치해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삭직의 형전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한 바는 대간(臺諫)의 체통을 얻었으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7일 을축

강계 부사(江界府使) 김욱(金熠)이 즉시 숙사(肅謝)하지 않았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가뭄을 민망히 여겨 죄인을 소석(疏釋)할 때에는 우선 대관(大官)부터 해야할 것이니 한익모(韓翼謨)·이은(李溵)·이사관(李思觀)을 모두 특별히 서용 하라."
하고, 이어 김하재(金夏材)·김종수(金鍾秀)도 소석하게 하였으며, 조동하(趙東夏)의 단서(丹書)127)  도 소설(昭雪)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조동하는 곧 을해년128)  의 역옥(逆獄)에 관련되어 앞질러 죽은 사람인데, 이때에 이르러 그의 아내가 상언(上言)하였고 김상복(金相福)·채제공(蔡濟恭) 등이 그 원통함을 힘써 말하자 임금이 《사변일기(事變日記)》와 문안(文案)을 가져다가 보고 특별히 소설을 명한 것이다.

 

5월 8일 병인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는 참으로 인재를 뽑아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직 문벌만 보고 재주와 식견은 불문에 부쳐 위로는 현관(顯官) 요직(要職)에서부터 아래로는 웅부(雄府) 유읍(腴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울 사람이고 비록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하더라도 먼 궁벽한 시골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장차 초야(草野)에서 늙어 죽게 될 뿐이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환곡(還穀)의 가분(加分)에 대해 신칙하는 하교가 엄절하였는데도 수령이 된 자가 매번 가분하는 처사가 있어 끝내는 받지 못하는 근심까지 초래하고 있으니, 이듬해의 걱정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신이 젊었을 때에 일찍이 성균관에서 배울 때에는 담장의 높이가 어깨보다 높아 한계가 몹시 엄절하였는데, 요사이 들으니 옛 담장은 모두 무너지고 터만 남아 매양 과거 때만 되면 대충 가시 울타리만 치기 때문에 부수기도 쉽고 넘기도 쉬워 과장(科場) 안의 온갖 병폐가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올 가을 과거 전까지는 성균관의 담장을 높이 쌓는 것도 과장을 엄히 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성윤검(成胤儉)·조세선(趙世選)이 대헌(臺憲)을 맡고서는 몇 사람을 잡아다가 애당초 신문하지도 않은 채 뇌물을 받고 몰래 놓아주어 형조에서 금리(禁吏)를 형추(刑推)하고 헌장(憲長)이 하례(下隷)를 치죄하기에까지 이르러 대각에 수치스러움을 끼치고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아울러 개정해야 하겠습니다. 어제는 조동하(趙東夏)의 처가 상언한 것으로 인하여 신설(伸雪)하라신 명이 계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그때에 해방(該房) 승지로서 종일 참국(參鞫)했었기 때문에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조동하의 이름은 흉적 윤상백(尹尙白)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니, 예사 옥수(獄囚)의 공초와는 다른데 어떻게 시일이 조금 오래 되었다 하여 갑자기 단서(丹書)의 이름까지 신설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두 번째 일이 비변사에게는 가히 정문 일침(頂門一針)이라 하겠다. 아! 그러나 어찌 담당하는 사람만 범연하고 경솔하여 그랬겠느냐? 지금 나도 일이 있을 때마다 상신(相臣)에게 묻고 있는데, 이 또한 관사 상규(官師相規)129)  라 하겠다. 그러나 비록 대관(大官)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면 더욱 힘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일은 사람을 쓰는 일인데 이것은 내가 항상 개연하게 여겨온 바이기도 하다마는 궁벽한 시골의 재주있는 사람을 전관(銓官)이 능히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나 아뢴 바는 참으로 옳은 일이니, 전조(銓曺)에 신칙하라. 네 번째 일도 지금의 폐단에 꼭 맞는 말이니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가분(加分)을 함부로 허가하지 말게 하고 아울러 제도(諸道)에 신칙하게 하라. 다섯 번째 과장(科場)의 폐단은 식자가 한심하게 여겨온 지 오래이나 나는 이것도 먼저 기강부터 세워야 한다고 여길 뿐이다. 어찌 담장에만 힘쓸 일이더냐? 성윤검·조세선의 일은 듣기에도 몹시 놀랍다. 이 뒤로는 풍속을 바로잡는 일과 연관된 것 외에는 함부로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되 기왕 듣고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간삭(刊削)하여 바로잡는 형전으로써 시행하라. 말단의 일에 있어서는 그는 의당 소석(疏釋)할 자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성에게 믿음을 심어줌이 없으면 명령이 서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내 어찌 옛 장수의 아내에게 불신을 보이겠느냐?"
하였다.

 

수찬 정일겸(鄭日謙)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년에 조영순(趙榮順)이 일신(一身)의 사의(私義)만을 위했다고 한 것은 바로 탕평(蕩平)을 주장한 여러 신하들이 10년 동안 전하를 도와서 섬겨온 바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 조부의 손자로서 의리에 처한 바가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데도 절새(絶塞)에 던져지고 일률(一律)130)  에 놓여져 합사(合辭)가 날마다 잇달고 중외(中外)가 겁에 질려 떨고 있습니다. 아! 저 조영순은 비록 아까울 것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그 조부의 충성스러움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합사가 바야흐로 한창일 때에 직책이 삼사(三司)인 자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지금 가뭄을 민망히 여겨 소결(疏決)131)  하는 때를 당한만큼 비록 매우 참작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예사롭게 칙려(飭勵)하겠느냐? 이 글을 되돌려 주고 먼저 삭판(削版)의 율을 시행하여 향리에 방축하라. 이렇게 하여 그치지 않는다면 응지(應旨)를 구실삼아 조영순을 위한 소장이 앞으로 연달아 올라오게 될 것이다. 받아들인 승지는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하고, 입시한 승지 이외의 여러 승지는 모조리 체차하라."
하였다.

 

대사간 조덕성(趙德成)이 아뢰기를,
"장폐 죄인(杖斃罪人) 조동하(趙東夏)를 죄적(罪籍)에서 특별히 신설하라신 명이 비록 가뭄을 민망히 여겨 소석(疏釋)하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남북(南北)에서 호응하여 군병을 일으키기로 서로 약속하였다는 말이 신경훈(申景勳)의 공초에서 긴밀하게 나와 마침내 옥중에서 병들어 죽었으니, 죄에 간여함이 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월이 오래된 뒤라 해서 그의 아내의 호소를 관용하여 제방(隄防)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도(南道)의 곤수(閫帥)에 대해서는 내가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하물며 북관(北關)에 미처 부임도 하지 않은 자이겠느냐? 이 일은 이미 거짓으로 드러났다."
하였다.

 

수찬 이석보(李奭輔)가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조동하의 일로 쟁집(爭執)한 것은 이미 대간의 체통을 얻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제방을 엄히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5월 9일 정묘

부응교 채홍리(蔡弘履)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일겸(鄭日謙)이 조영순(趙榮順)에게 어찌 일호라도 변명하여 보호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바야흐로 성상께서 가뭄을 민망히 여겨 구언(求言)하시는 때를 당하여 감히 옛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바는 숨기지 않는다’는 뜻을 본받으려 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논한 바는 말이 매우 정직하고 뜻은 공평함에 있었으니, 그 말이 그의 마음속에서 나와 추후도 딴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윤허를 내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꺾어버리시니 신은 저으기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10일 무진

임금이 경봉각(敬奉閣)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풍천록(風泉錄)》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니, 대신과 형조 당상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토록 단 비를 만났는데, 어떻게 어름어름 지내겠는가? 오늘의 차대(次對) 또한 빠뜨렸으니, 내일은 자정전(資政殿)에서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하겠다."
하고, 이어 사창궁문(謝蒼穹文)을 지어서 내렸다.

 

5월 11일 기사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상소하여 스스로 연로(年老)한 것을 아뢰어 휴퇴(休退)하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물선(物膳)을 풍년이 들기까지 정봉(停封)하라신 명은 너무 중도에 지나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매번 초조하게 근심하는 때를 맞기만 하면 간혹 보색(保嗇)하시는 절차를 소홀히 여겨 한데서 거처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부복하여 성체(聖體)의 젖음도 생각지 않으시는데 종사(宗社)를 부탁(付托)받은 성체를 어찌 스스로 가벼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여 연로한 것을 인용한 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조강(朝講)에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상번 유신(上番儒臣) 정우순(鄭宇淳)의 글 읽는 소리가 아주 낮아 강체(講體)를 이루지 못하자, 하번(下番)으로 하여금 다시 읽게 하였다. 영사(領事)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강하는 소리가 너무 낮고 글 뜻도 아뢰지 않았으니,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고(推考)만 하라."
하였다.

 

김상복이 강원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인제현(麟蹄縣)의 조(租) 8백 90여 석을 소미(小米)로 절가(折價)하여 대신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김상복이 말하기를,
"전최(殿最)132)  에 거상(居上)한 수령이 혹 수의 어사의 서계(書啓)에서는 도리어 다스리지 못한 것으로 되기도 하고, 거중(居中)한 수령이 도리어 어사의 포상을 청하는 서계에 들기도 하는데 한 사람의 치적이 앞뒤가 다를 수는 없을 듯합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무릇 치적을 고과(考課)할 때에는 더욱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는 정사에 힘쓰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복이 말하기를,
"이제는 큰 비를 얻었으니, 어공(御供)을 전례대로 봉진(封進)하고 제도(諸道)의 물선(物膳)도 봉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남교(南郊)에 행행하여 농사의 형편을 살폈는데, 왕세손(王世孫)이 수가(隨駕)하고 〈조신(朝臣)으로는〉 비국 당상만이 배종(陪從)하였다.

 

임금이 석우(石隅)의 성경대(省耕臺)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 및 경기 감사를 입시하라 명하고 농민을 불러 술을 내렸으며, 정범조(丁範祖)로 하여금 희우부(喜雨賦)를 짓게 하였다. 또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고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次韻)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지나는 길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렸다.

 

5월 12일 경오

비국에서 태천(泰川) 사람 박태겸(朴泰謙)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회계(回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항오(行伍)에서 승천(陞遷)하는 예(例)는 단지 훈국(訓局)에만 있다. 그러나 여러 해를 항오에서 무예를 단련하면 어찌 사부(士夫)의 서얼(庶孽)이나 군문(軍門)에서 추종(騶從)한 자만 못하겠느냐? 병서(兵書)를 보지 못하고 항오를 모르던 자가 다행히 이를 얻으면 억지로라도 날마다 활을 가까이 하니 어찌 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외방에는 이 폐단이 특히 심하여 한번 천총(千摠)·파총(把摠)이 되면 그 일족은 모두 군역(軍役)을 면하게 되기 때문에 청탁을 도모하기까지 하므로 양정(良丁)이 줄어들고 있다. 이 뒤로는 제도(諸道)의 천총·파총도 훈국의 예대로 항오에서 승차(陞差)시키도록 하라. 만약 영(令)을 어긴 자가 있으면 마땅히 금고(禁錮)의 율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부수찬 김약행(金若行)이 응지(應旨)로 상소하여 인재를 등용하기를 청하고 이어 윤홍렬(尹弘烈) 등 4인을 천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일은 대관(大官)이나 하는 일인데 오활한 데서 나온 짓이 아니냐? 윤홍렬은 출입을 끊고 조용히 지내는 사람인데, 또한 어찌 시끄러운 세상에서 분경(奔競)하려 하겠느냐? 혹 그의 생각과 상반된 일이 아니더냐?"
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작은 벼슬아치로서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다 하고 금단(禁斷)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조 판서 이담(李潭)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외조(外祖)에게 증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담이 챙기지 못한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광회(韓光會)를 이조 판서로, 구익(具㢞)을 승지로 삼았다.

 

예조 판서 조중회(趙重晦)를 파직하였으니, 시골 유생의 상서(上書)에 회계(回啓)를 잘못한 까닭이었다.

 

대사간 조덕성(趙德成) 등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담(李潭)의 이번 일은 참으로 몹시 방자하니, 청컨대, 삭직의 율로써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숭호(李崇祜)의 지난번 상소는 참으로 해괴한 일인데, 이번의 처분은 단지 가볍게 한다는 법의(法意)에 따르신 것 같습니다. 청컨대, 먼 곳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3일 신미

이수봉(李壽鳳)을 대사간으로, 이익원(李翼元)을 병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갔다. 구익(具㢞)을 잡아들일 때에 하교 가운데에, ‘만약 내가 연잉군(延礽君)으로 그대로 있었더라면 어찌 이런 광경(光景)이 있었겠느냐?’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도승지 구익이 받아 쓰지 않자 임금이 진노하여 이러한 조치가 있게 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조부는 내가 사지(死地)에서 빼내어 비단 방석 위에 앉혔는데, 네가 이렇게 은혜를 저버리느냐? 너의 종형(從兄)은 ‘맑을 청[淸]’자로 자복(自服)하더니 너는 어찌 감히 ‘이름 명[名]’자의 여습(餘習)으로 나에게 갚으려 하느냐?"
하니, 구익이 말하기를,
"불충(不忠)·불효(不孝)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형제들은 어찌 그리 쉽게 자복을 하느냐? 이로써 보건대, 어찌 참다운 ‘청명(淸名)’이었겠느냐? 그러나 특별히 너그럽게 풀어 주어 삭판(削版)만 하여 끌어내고 구윤옥(具允鈺)에게는 특별히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년(暮年)에 조용히 생각해 보니, 남아(南衙)133)  와 북시(北寺)134)  가 엄숙해야만 나라가 다스려 질 수 있다. 아! 지난날에는 법도 엄하게 서고 한계도 엄하였는데, 그 뒤로는 씻은듯이 없어졌다. 중관(中官)의 자식이 심익창(沈益昌)에게 글을 배워 신축년135)  ·임인년136)  의 사화(士禍)를 빚어냈다. 이른바 동·서학(東西學)의 학도도 전에는 남의 집에서 기식(寄食)하는 궁색한 선비를 스승으로 삼더니 근자에는 동서학의 교수나 훈도를 저희들 속에서 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제방(隄防)은 된다고 본다. 그러나 내시(內侍)의 교관(敎官)은 왕자의 사부(師傅)나 동몽 교관(童蒙敎官)과 같은데도 고강(考講)할 때에는 술을 제공(提供)하니, 이는 왕자의 사부에게도 없은 일이다. 비록 고강할 때에는 상대해도 괜찮다 하지마는 여러 학도가 세시(歲時)로 방문하는 것은 모두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4일 임신

강화 유수(江華留守) 성천주(成天柱)의 장문(狀聞) 중에, ‘단 비를 얻어 전답을 살펴본다.’는 말이 있자, 임금이 특별히 숙마(熟馬)를 내렸다.

 

사옹원(司饔院) 감착관(監捉官) 조임(曹)을 도태해 버리라고 명하였는데, 봉진(封進)의 빠뜨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故) 처사(處士) 조위(曹偉)의 후예임을 듣고 임금이 특별히 중지시켰다.

 

5월 15일 계유

구윤옥(具允鈺)을 특별히 서용하여 다시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하교하기를,
"황최언(黃最彦)·송재경(宋載經)을 이미 방면하였으니, 구상(具庠)에 대한 금고(禁錮)의 명도 특별히 유보하라."
하였다. 또 구익(具㢞)의 삭판 명령도 특별히 거두고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도록 명하여 그 아비의 출세할 길을 터 주었다.

 

조종현(趙宗鉉)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6일 갑술

호당(湖堂)의 신(臣) 정범조(丁範祖)에게 명하여 건공가(建功歌) 오언(五言) 1백 운(韻)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들을 데리고 입시하게 하여 시강(試講)하고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5월 17일 을해

송형중(宋瑩中)을 대사헌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연화문(延和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고, 이어 전설사(典設司)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5월 18일 병자

윤방(尹坊)을 대사간으로, 윤양후(尹養厚)를 대사성으로, 조엄(趙曮)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나주(羅州) 유학 이양래(李陽來)가 응지(應旨)로 상소하여 백성들의 폐막(弊瘼)을 아뢰었는데, 첫 번째는 황구(黃口)와 백골(白骨)에게서 베를 징수하는 폐단을 말하고, 두 번째는 환곡(還穀)을 작전(作錢)하는 폐단에 대해 말하였으며, 세 번째는 농우(農牛)를 사들이는 폐단을 말하였고, 네 번째는 계미년 증광시(增廣試)의 예(例)대로 각각 의막 수졸(依幕守卒)을 지급하여 스스로 짓고 쓰게 할 것을 말하였으며, 다섯 번째는 임진란(壬辰亂) 때에 전망(戰亡)한 유적지에 사람을 보내서 제사를 지낼 것을 말하니, 임금이 비국에 내려 회계(回啓)하게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특별히 한정유(韓鼎𥙿)을 교리로 제수하였다.

 

5월 19일 정축

조종현(趙宗鉉)·오재순(吳載純)을 승지로, 이병정(李秉鼎)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합계한 조영순(趙榮順)에게 안률(按律)하는 일을 정계(停啓)하기로 하였다.

 

5월 20일 무인

이명식(李明植)을 대사간으로, 황승원(黃昇源)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주강에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전 정언 황승원을 친국(親鞫)하였다. 이에 앞서 대사간 이수봉(李壽鳳)이 조영순(趙榮順)에 대한 합계를 정지하였는데, 윤방(尹坊)이 이수봉의 뒤를 이어 상소하면서도 역시 거론하지 아니하니 임금이 이수봉은 삭판(削版)하고 윤방은 파직하게 한 뒤에 누차 엄한 하교를 내렸다. 황승원을 정언으로 삼았는데 패초(牌招)를 어기니, 임금이 진노하여 전좌(殿座)에서 엄히 묻고 결안(結案)을 받았는데, 늙은 어머니가 있다 하여 곧바로 흑산도(黑山島)에 충군(充軍)하게 하고 늙은 어머니와 아우도 아울러 정배하게 하였다.

 

지평 구수온(具修溫)이 이수봉의 삭직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1일 기묘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삼사(三司)와 여러 승지들을 소견(召見)하고, 이 수봉은 대정현(大靜縣)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고 한광회(韓光會)는 북청부(北靑府)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한광회는 황승원을 대망(臺望)의 첫번째로 의망(擬望)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사헌 송형중(宋瑩中)과 대사간 이명식(李命植) 등이 조영순(趙榮順)의 안율(按律)과 황 승원의 의율 처단(依律處斷)을 다시 발계(發啓)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삼사(三司)의 삼사다움을 보겠다."
하고, 도사(都事) 2인을 보내어 그 자리에서 법을 바루게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조영순의 형 조영극(趙榮克)과 황승원의 종형 황경원(黃景源)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런데 조영극의 조부 고(故) 상신(相臣)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는 지난번의 계사년137)  에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되었었고, 황승원의 조부 황처신(黃處信)은 지난번 계사년에 의약(議藥)에 동참하였다 하여 특별히 조영순과 황승원에게 안율(按律)하라는 명을 거두게 하고, 조영극에게 이르기를,
"네 할아버지가 필시 구원(九原)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구원에 돌아가거든 네가 너의 할아버지에게 전하라."
하고, 이어 두 사람을 석방하였다.

 

5월 22일 경진

송문재(宋文載)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과 여러 승지 및 삼사를 소견(召見)하였는데, 대사간 이명식(李命植) 등이 조영순(趙榮順)에 대한 안율(按律)을 특별히 중지하라는 명을 도루 거두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정해졌다. 비록 그렇더라도 세도(世道)를 위하여 〈불윤(不允)〉 두 글자를 버리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것으로 답을 내린다."
하였다. 또 황승원(黃昇源)에 대한 안율을 특별히 중지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참작(參酌)하여 처리한 일인데, 어떻게 따르겠느냐?"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일 크고 작은 공사(公事)가 정원에 머물러 있으니,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임금은 하늘의 일[天工]을 대신하는만큼 하루에 만기(萬機)를 살펴야 하는데, 지금 벌써 이틀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만기의 정체(停滯)를 어떻게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즉시 크고 작은 공사를 도로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합사(合辭)의 조어(措語)를 보고 체통을 얻었음을 가상하게 여겼는데, 또 아뢴 바를 들으니, 말이 몹시 절직(切直)하므로 특히 포상하는 뜻에서 마지못해 윤허한다."
하였다.

 

특별히 이담(李潭)은 이조 판서로, 윤득양(尹得養)을 이조 참판으로, 홍낙순(洪樂純)을 이조 참의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5월 23일 신사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이어 향을 따라 걸어서 전설사(典設司) 앞까지 나아가서 향이 건명문(建明門)을 나간 뒤에, 전설사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3경(三更)에 걸어서 건명문에 나아가 부복하여 5경이 되어서야 내전(內殿)으로 돌아왔는데, 이날이 곧 태조 대왕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었다.

 

5월 24일 임오

특별히 홍상간(洪相簡)을 문학(文學)으로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니, 이때 홍상간이 월곶 첨사(月串僉使)로 출보(出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수봉(李壽鳳)의 위리 안치(圍籬安置)를 중지하고 곧바로 그 곳에서 멀리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5월 25일 계미

장령 신응삼(辛應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식년(式年)과 증광(增廣) 동당시(東堂試)를 간일(間日)로 과장(科場)을 설행(設行)하는 것은 본래부터 나라의 정제(定制)인데, 지난 을유년138)  에 비록 날마다 설행하라시는 영이 계셨으나 곧바로 복구되었습니다. 올 봄에 관서(關西)의 남과 북에서 과장을 설행하였을 때에 감시(監試)는 간일로 하고 동당시는 연일(連日)로 하였으니, 이는 정제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순편함을 따른 것입니다. 신은 관서의 남과 북에서 장시(掌試)한 여러 신하들은 모두 견파(譴罷)의 형전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깁니다. 당하관이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구례(舊例)에 없던 일인데, 저번 김약행(金若行)의 상소에서 끌어대고 비유한 바는 해괴 망측하고 말씨도 외람되게 잡다하였습니다. 대신이 비록 이미 연석(筵席)에서 여쭙고 저지하기는 하였으나 나라의 체통에 있어서는 오활(迂闊)로 돌리고 말 일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수찬 김약행에게도 속히 삭판(削版)의 형전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여기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과(大科)를 간일로 설행하는 것은 금석지전(金石之典)이다. 이 뒤로는 한결같이 고규(故規)에 따르라. 그때에는 조례로 정한 일이 없었으니 멀리 행역(行役)하는 일이 괴로워서 이런 해괴한 거조가 있었던 것인데, 경사를 함께 하려고 널리 뽑을 때를 당하여 거자(擧子)들이 어찌 한탄이 없었겠는가? 그때의 경시관(京試官)과 도사(都事)는 김약행에게 청한 율로서 시행하라. 세 번째 일은 대간(臺諫)의 체통은 그러하나 올 봄 등용한 뒤에 그 사람됨을 겪어 보니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크게 어긋났었으니, ‘오활’ 두 글자를 어떻게 면하겠느냐? 이는 오활한 속에서도 향암(鄕諳)까지 겸한 자이다. 더구나 구언(求言)의 하교에 이어 이미 효유하였으니, 오활한 것은 덮어두어야 하겠다. 무슨 깊이 책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는데, 대신이 청한 대로 제도(諸道)의 삭선(朔膳)을 정봉(停捧)하게 한 명을 특별히 정지하였다.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춘방(春坊)에 합당한 사람으로 민종렬(閔鍾烈)·홍상간(洪相簡)·박상갑(朴相甲)·서유신(徐有臣)·이상준(李商駿)·홍낙임(洪樂任) 등과 계방(桂坊)에 합당한 사람으로 박사형(朴師亨)·김근행(金謹行) 등을 천거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임종주(任宗周) 등 6인을 잡아들이게 하였으니, 이들은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으로서 즉시 사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종주는 궐문 밖에까지 왔었고 또 고 판서 임방(任埅)의 손자라 하여 특별히 방면하였으며, 남강로(南絳老)는 집이 성 밖에 있다 하여 분간(分揀)하였고, 심환지(沈煥之)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하여 특별히 홍문록(弘文錄)에서 뽑아내고 진도군(珍島郡)에 충군(充軍)하였으며, 박상갑(朴相甲)은 시골에 있으면서도 즉시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 삭직하고, 유의양(柳義養)은 그 공사(供辭)가 사실과 다르다 하여 종성부(鍾城府)의 서민(庶民)으로 삼았으며, 권평(權坪)은 가까운 읍에 있으면서도 오지 않았다 하여 바로 그곳으로 정배하고, 이사조(李思祚)는 아버지의 병을 칭탁하였다 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분간하였다.

 

5월 26일 갑신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의 소시(召試)를 설행하였다.

 

5월 27일 을유

신익빈(申益彬)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8일 병술

돈녕 도정(敦寧都正) 정택(鄭擇)에게 서용하지 않는 형전을 시행하라고 명한 것은 그의 사직소에서 말이 아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5월 29일 정해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번에 청계천(淸溪川)을 준설(浚渫)하고 석축(石築)할 물력(物力)을 제때에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비국에서 행회(行會)한 관서(關西)의 무역(貿易) 보관중인 소미(小米) 1만 석을 3군문에 나누어 주어 청계천을 준설하고 석축을 끝낸 뒤에 준천사에서 주관하여 조적(糶糴)하고 있는 소미 3천 석을 해마다 모조(耗條)까지 합하여 차차로 이번에 나누어 준 1만 석의 수량을 채워 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언 이유철(李有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여러 관료가 자주 바뀌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관 말직의 서관(庶官)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아침에 제수하였다가 저녁에 체직할 수는 없는 일인데, 하물며 대신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한번 격노하시면 견책이 뒤따르자 대신을 바꾸는 일도 그 사이에 흔하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신이 된 사람이 설령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모유(謨猷)가 있다한들 어느 겨를에 자기의 소신을 다 펴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는 조금만 일이 있어도 대신이 문득 견파(譴罷)되었으며, 어떤 때는 한 달도 채 못되어서 바뀌었기 때문에 이유철이 상소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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