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임진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2월 2일 계사
하교(下敎)하여 환관(宦官) 함희춘(咸熙春)과 김하서(金夏瑞)를 극변(極邊)에 유배시키게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그 죄목(罪目)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자, 곧바로 비망기(備忘記)를 환수(還收)하도록 명하였다. 그 이튿날 도승지(都承旨) 이조(李肇) 등이 아뢰기를,
"두 환관이 범한 죄가 반드시 그 작은 잘못과 하찮은 허물이 아닌 줄로 알고 있는데, 잠깐 사이에 곧바로 환수하게 하였습니다. 군주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은 국사(國史)에 기록되고 사방에 전해지는 것인데, 갑자기 명하셨다가 갑자기 거두셨으니, 일이 전도(顚倒)된 점이 있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에게 분부(分付)하여 조율(照律)해서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죄가 가볍다."
하고, 그대로 두도록 명하였다.
2월 11일 임인
청(淸)나라 사신(使臣) 사가단(査柯丹)과 나첨(羅瞻) 등이 책봉(冊封)하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와서 도성(都城)에 들어오니, 임금이 길복(吉服)을 입고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대궐에 돌아와 명정전(明政殿)에서 칙서(勅書)를 받고 예(禮)를 행하여 마친 다음 시사복(視事服)으로 갈아 입고 청나라 사신과 만났다. 다례(茶禮)를 행하고 파하였다.
2월 15일 병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국휼(國恤) 때 조신(朝臣)과 사서(士庶)의 연거대(燕居帶)를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여 마대(麻帶)로 정식(定式)했는데, 무릇 공복(公服)은 연거복(燕居服)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조사(朝士)가 이미 포단령(布團領)·포과모(布裹帽)·포과 각대(布裹角帶)가 있으니, 이번 생원과 진사를 방방(放榜)할 때 입을 복색(服色)은 마땅히 생포 두건(生布頭巾)·생포 단령(生布團領)을 사용해야 하고, 대(帶)는 그대로 쓸 수 없으니, 연거 마대(燕居麻帶)는 마땅히 한결같이 조사의 포과 각대의 제도에 의거하여 생포대(生布帶)로써 참작하여 정식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의논하기를,
"조복(朝服)은 공복을 사용하고 대(帶)는 연거대(燕居帶)를 사용한다면 아주 여러 가지 빛깔이 뒤섞이게 될 것입니다. 한결같이 조사의 포단령·포과 각대의 준례에 따라 마땅히 포대(布帶)로 정식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2월 16일 정미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가 청구한 잡물(雜物)이 지난번의 칙사에 비해 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을묘년018) 의 등록(謄錄)을 참고해 그 수를 더하여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전해 보여주게 하였더니, 두 칙사가 아주 불만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예조(禮曹)의 낭청(郞廳)이 와서 제사를 지낼 날짜를 전하니, 이로 인해 틀어져 거조(擧措)가 해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지(小紙)에 써서 보여주기를, ‘17일에 제사를 지내고 18일에 떠나려고 생각했는데, 듣건대 왕의 어가(御駕)가 임하시고자 한다 하니, 결단코 감히 감당할 수 없으며, 바로 혹시 강림(降臨)하시더라도 또한 감히 면오(面晤)019)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잘 주선하지 못하여 역경(逆境)이 있게 되었으니, 대신(大臣)을 보내어 머무르기를 권유하는 것이 접대(接待)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신이 머무르기를 권유한 뒤에 또 아뢰기를,
"칙사가 통관(通官)으로 하여금 지난번 관소(館所)에서 써서 보여준 것은 경시(輕視)하는 의도가 현저히 나타나 있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큰 일로서 끝마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반드시 명백한 말을 들어야만 결정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큰일이란 지난 겨울 칙사 행차 때 비밀히 준 것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신은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한결같이 등록(謄錄)을 준용하며 금번의 봉전(封典)도 단지 기해년020) ·을묘년021) 의 등록을 적용하였을 뿐이다. 비밀히 준 것에 있어서는 예전의 전례에 없는 바이므로 결단코 변경하여 고치기 어렵다.’고 답하였는데, 끝내 회청(回聽)하지 않았습니다. 내일 제사를 행한 뒤 마땅히 다시 전석(前席)에서 품의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비답(批答)하였다.
청(淸)나라 사신이 청나라 군주[淸主] 명령이라 하여 또 별제(別祭)를 혼전(魂殿)에서 행하였다.
2월 19일 경술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문안(問安)하는 중사(中使)022) 와 승지(承官)가 관소(館所)에 가니, 칙사(勅使)가 반드시 친히 보고자 하여 역관(譯官)을 다그쳐 이끌고 들어가게 하였고, 재삼 다투어 고집하였으나 끝내 회청(回聽)하지 아니한 채 화를 내고 고함지르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단(禮單)과 요구하여 청한 것이 그 뜻에 만족스럽지 않고, 또 그 절은(折銀)023) 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감(都監)에 몹시 성을 내어 고소(告訴)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마지못해서 계달(啓達)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청컨대 승정원으로 하여금 바로 조속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승정원에서는 또 전례가 없다고 계품(啓稟)하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비국(備局)에서 드디어 도감에서 능히 거절하지 못한 죄를 논핵하여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고 수역(首譯)을 나문(拿問)하자고 논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0일 신해
청(淸)나라 사신이 경성(京城)을 출발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병(病) 때문에 교외(郊外)에서 전송(餞送)하지 못한다고 일렀다.
2월 29일 경신
정시(庭試)를 베풀어 문과(文科)에서는 윤심형(尹心衡) 등 7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는 박용채(朴龍采) 등 1백 48인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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