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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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계사

식년 별시(式年別試)를 베풀어 문과(文科)에서는 오성유(吳聖兪) 등 34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는 이홍정(李弘楨) 등 86인을 뽑았다.

 

4월 20일 경술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상소(上疏)하기를,
"삼춘(三春)024)  의 극심한 가뭄이 여름에 이르러 더욱 혹독해지고, 전염병이 점차 퍼져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며 거기다가 도적(盜賊)들이 곳곳에 들끊어 심지어 말을 타고 포(砲)를 쏘면서 백주에 사람을 죽이는 변고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존망(存亡)이 장차 호흡(呼吸)의 사이에서 결단이 나게 되었는데,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구중 궁궐에 깊이 거처하여 신료(臣僚)들을 보기를 싫어하시고, 여러 신하들은 또 차례로 인퇴(引退)하여 그 몸을 보전할 것만 생각하며, 조정에 있는 자들도 대부분 병이 났다고 인혐(引嫌)하고서 직사(職事)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문(衙門)에서는 늘상 폐인(閉印)025)  을 일삼아 조의(朝儀)가 반항(班行)을 이루지 못하고, 향관(享官)026)  은 전차(塡差)027)  함이 없으며, 시관(試官)은 의망(擬望)028)  함이 없습니다. 비국(備局)은 추밀(樞密)의 장소인데도 한 달이 지나도록 개좌(開坐)하지 못하고, 빈청(賓廳)의 일차(日次)는 비록 혹시 인원이 갖추어지는 때가 있기는 해도 전하께서 때때로 사대(賜對)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가뭄을 당해 기우제를 지내는 일은 준례에 따라 응당 행해야 되는 일인데도 또한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와 같이 대충대충 세월만 보내거나 허둥지둥대는데도 오히려 천명(天命)을 맞아 계승하여 그 나라를 보전하여 지킬 수 있겠는지요?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날마다 대신(大臣)과 여러 재신(宰臣)들을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앞에 나오게 하여 친히 옥음(玉音)을 내어 은근하고 간절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날마다 이와 같이 하고 또 날마다 이와 같이 하시되, 또한 윤음(綸音)을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포고(布告)하기를, ‘그대들이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어찌 차마 나를 버리겠는가? 비록 나는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독 선조(先朝)의 은우(恩遇)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어, 성의(誠意)를 열어 보여주며 반복해서 효유(曉諭)하소서. 또 날마다 강연(講筵)을 열어서 유신(儒臣)들을 친근히 대하시고, 고금(古今)을 끌어 증거하여 치도(治道)를 강마(講劘)하소서. 이와 같이 하신다면 여러 신하들이 비록 기묘(奇妙)한 꾀와 특이한 계책은 없을지라도 위태로움을 바꾸어 안정되게 할 수 있고, 상하의 정과 뜻이 저절로 유통(流通)되어, 대소 신료(臣僚)들이 각각 마음과 생각을 다하여 무릇 나라에 이익이 될 만한 것은 반드시 장차 무슨 계책이든지 열거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지금 이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중외(中外)의 저축이 모두 고갈되어, 경사(京司)는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의 값[價]을 대부분 넉넉히 주지 못하고 있으며, 백관(百官)의 반록(頒祿)과 군병(軍兵)의 방료(放料)를 구차하게 미봉(彌縫)한 것이 갖가지입니다. 그리고 진청(賑廳)의 예전에 저축해 둔 것은 이미 경외(京外)의 주진(賙賑)에 바닥이 났습니다. 외읍(外邑)은 팔도를 통틀어 조적(糶糴)의 곡식이 본래는 수백만 곡(斛)이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수십만 곡에 불과합니다. 보리가 나기 전에 이미 죄다 흩어주고 보리가 익는 때에 만약 수확할 것이 없다면 백성들은 장차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 외읍이 이와 같고 경사(京司)도 또 이와 같으니, 다시 무슨 곡식으로 접제(接濟)하며, 또한 장차 무슨 계책으로 밀가루가 없는 밀국수를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굶어 죽었다는 보고가 날마다 들려오고, 유랑하여 빌어먹은 무리들이 구렁을 메우고 있는 판이라, 신이 늘 밤낮으로 계획을 세워보지만 결국 구원할 만한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찌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로 염연(恬然)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과연 능히 지성(至誠)·측달(惻怛)029)  하여 날마다 건져 구제할 방도를 강구하신다면 비록 그 형편이 궁색하고 힘이 다하여 구제할 수 없더라도 구렁에 빠져 죽은 귀신들은 또한 반드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두어 가지의 품정(稟定)할 일이 있어서 홀(笏)에다 써서 기다려 온 지 이미 두 달에 이르렀는데, 번거롭고 자질구레하여 감히 모두 진술하지 못합니다. 단지 성덕(聖德)과 조정(朝廷)에 관계되는 큰 것만을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드립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누누이 진언(進言)한 것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병으로 자리에 누운 지 이미 오래 되어 경연(經筵)에 나가지 못하니, 경(卿)·대부(大夫)들이 봉직(奉職)하는 데에 게을러져서 기강이 아주 무너지고, 온갖 법도가 해이해진 것이 많았다. 그런데 오직 민진원(閔鎭遠)만은 밤낮 근심하여 조정에 들어가서는 충정(忠貞)의 절개를 다하여 임금의 규계(規戒)가 되었고, 나와서는 보필의 의지를 다져서 나라를 도모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였다. 바야흐로 임금의 병환이 났을 적에 허둥지둥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데, 조의(朝衣)가 그로 인해 다 젖으니,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음이 없었다.

 

4월 28일 무오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말하기를,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연복(練服) 가운데 전하의 요질(腰絰)은 갈(葛)030)  로 하고, 백관(百官)은 숙마(熟麻)로 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빛깔이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또 관(冠)과 요질(腰絰)의 영자(纓子)는 끈[繩]을 사용할 것인가 포(布)를 사용할 것인가를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소루합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예서(禮書)를 상고하여 품의해서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이번의 절목(節目)을 경자년031)  ·을묘년032)   두 해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전하의 요질(腰絰)은 갈(葛)을 사용하였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요대(腰帶)는 숙마(熟麻)를 사용하였으며, 수릉관(守陵官)·시릉관(侍陵官)의 요질도 숙마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때 백관의 복제(服制)가 이미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 아니었으니, ‘요질·숙마’라고 한 것을 비록 표준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수릉관이나 시릉관은 최복(衰服)을 입은 여러 예절의 백관과는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 오히려 또 이와 같으니, 이것은 족히 오늘날 백관의 종복(從服)033)  의 준례가 될 만합니다.
연관(練官)과 요질(腰絰)·영자(纓子)의 승(繩)을 사용하고, 포(布)를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만 전후의 등록에 모두 거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본조(本曹)의 절목에도 또한 모두 기재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와서 절목이 이와 같은 것은 형편이 본래 그러한 바입니다. 신 등의 고루한 견해로는 감히 고례(古禮)를 고거(考據)하여 재정(裁定)할 수 없으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기를,
"연제(練祭) 지낼 때 요질(腰至)을 갈(葛)로 만드는 것은 고례(古禮)가 바로 그러하지만 갈이 없으면 숙마(熟麻)로 하는 것도 가하니, 이미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경자년·을묘년 두 해에도 또한 이미 행하였던 전례가 있으니, 본조(本曹)에서 숙마로 마련한 것은 과연 증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혹은 칡으로 하고 혹은 숙마로 하여 그 구비한 바를 따르는 것은 여러 가지 빛깔이 뒤섞일 혐의가 없을 듯합니다. 연관(練冠)과 요질(腰絰)의 영자(纓子)는 《의례(儀禮)》에 ‘흰 것을 사용한다.’는 글이 있으니, 흰 것은 바로 포(布) 종류이므로 포를 사용하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그리고 또 해조(該曹)의 절목(節目)에 간구(菅屨)는 ‘그대로 쓴다.’고 마련하였는데, 연제를 지내기 전에는 간구로 하고, 연제를 지낸 뒤에는 승혜(繩鞋)로 하는 것이 또한 예서(禮書)에 있습니다. 상복(喪服)의 여러 가지 예절이 모두 점점 길(吉)해지는데 홀로 신발에만 변경하지 않는 것은 미안할 듯합니다. 이것도 승혜로 고치는 것이 아마 타당할 듯하나, 또한 마땅히 널리 물어서 처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도 김창집과 의논이 같으니, 임금이 그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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