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1권, 경종 즉위년 1720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1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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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계사

국장(國葬) 때의 총호사(摠護使) 이하 당상관(堂上官)·낭관(郞官) 및 집사(執事) 인원(人員)에 대하여 차등이 있게 논상(論賞)하였다.

 

예조 참판 박태항(朴泰恒)이 상소하기를,
"청나라 사신이 황지(皇旨)라 핑계하면서 국왕(國王)의 아우·조카 및 여러 종실(宗室)을 보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그 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몹시 비상(非常)한 일입니다. 일이 상도(常道)가 아니고 이미 칙서(勅書)가 없으니, 어찌 한결같이 구전(口傳)을 따라 들어주어 허락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정사(正使)와 여러 재신(宰臣)들이 마땅히 왕복 쟁집(爭執)하여 반드시 저지하고야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원접사(遠接使)의 장계(狀啓)에 이미 이 말이 있었으나 범연하게 하는 말로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얕은 데로부터 깊은 데로 들어가 물어서는 안될 일들을 물으니, 몹시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은 모두 역관(譯官)의 무리들에게 내맡겨 둔 채 잘 도유(導諭)하지 못하고 진실로 해야 할 말이 있어도 감히 억지로 비위를 건드리지 못하고 달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점차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수역(首譯)을 우선 엄하게 문책하여 극형(極刑)에 처하신 후에야 청나라 사신의 뜻을 돌릴 수가 있고 조정의 체모를 높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청나라 사신이 칙지(勅旨)라 핑계하여 왕의 아우를 만나보기를 요구하니, 여러 소인들이 의혹을 가졌기 때문에 박태항의 상소가 이와 같았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또 영접 도감(迎接都監) 및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를 얻어 보았더니, 다 말하기를, ‘칙사(勅使)가 칙지(勅旨)를 핑계하여 국왕의 아우·자질(子姪) 및 종실(宗室)을 보기를 요구한다.’ 하였고, 비국(備局)에 있어서는 ‘왕자(王子)는 모빈(某嬪)의 소생(所生)이고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을 적어서 보여주었다 합니다. 아!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이미 보여준 글을 지금 도로 빼앗을 수 있는 형편은 못되지마는, 삼가 함께 온 승지(承旨)가 보여준 승정원(承政院) 소보(小報) 가운데 이른바 황지(皇旨) 등본(謄本)이란 것을 보니, 그 끝에 단지 말하기를, ‘이 표장(表章)을 조선(朝鮮)의 국왕(國王)과 처(妻)·자질(子姪)에게 전달하여 고루 효유하라[這表章 傳于朝鮮國王妻子姪均諭]’란 열 네 글자뿐이었습니다. 어디에 ‘아우와 종실’ 등이라고 말한 것이 있습니까? 또한 어디에 ‘왕자는 어떤 빈(嬪)의 소생이고 모씨에게 장가들었느냐?’는 문장이 있습니까? 승지가 신에게 보여준 글은 등전(謄傳)하는 즈음에 혹시 빠진 글이나 잘못된 글자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만일 빠졌거나 잘못된 것이 없다면 청나라 사신과 도감(都監)·비국(備局)에서 보여준 칙지 가운데 있는 ‘제종실(弟宗室)’이란 세 글자와 ‘왕자는 모빈(某嬪)의 소생이고 모씨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은 무엇에 의거하여 극력 막지 않은 것입니까? 설령 참으로 칙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방편(方便)의 도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한결같이 그들이 하는 말대로 따라 하여 적어서 보여주기를 공순히 한단 말입니까? 이 일은 관계가 매우 중대하니, 바라건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다시 좋은 방향으로 잘 처리할 방도를 생각하도록 하여 나라의 체모가 훼손되지 않게 하고 이국(異國)으로 하여금 감히 경솔히 모멸(侮蔑)할 수 없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적어서 보여준 일은 영의정이 재삼 강경히 거절하였으나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누누이 진언(進言)한 것에 대하여 감패(感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였다.

 

12월 3일 을미

연접 도감(延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사은 사행(謝恩使行)의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의 조어(措語)가 우리가 돌아가 아뢰는 말과 혹시라도 서로 틀린 점이 있다면, 대단히 미안한 일이니, 대의(大意)를 기록해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친히 관소(館所)에 전달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에서 그 말에 따라 기록해 보여 줄 것을 청하였다. 도감에게 또 아뢰기를,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의 조어(措語)를 전해 보이도록 하였더니, 청나라의 사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두 나라의 일이니 좌상(左相)과 도승지가 친히 와서 전달해 보여 주어 피차간에 서로 의논해서 정한 뒤에 각각 종이 끝에 서명(署名)했으면 한다.’ 하고, 또 별도의 증여를 요구하였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니, 묘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청컨대 역관으로 하여금 종전에 없던 예(例)를 방지하도록 하소서. 별도의 증여는 참작하여 증급(增給)하되 칙사에게 별도의 노자 각각 은(銀) 5백 냥씩을 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칙사가 부족하게 여기고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번의 두 가지 일은 모두 칙지(勅旨)가 있었는데 그대 나라의 청을 굽혀 따르는 바람에 이제는 우리의 공이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국왕(國王)이 이미 정성껏 대접해 주었는데 또 신물(贐物)이 있으니,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전송하는 자리가 마련될 때 친히 증단(贈單)을 되돌려 주고받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도감(都監)에서 또 이것을 계청(啓請)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미리 선처(善處)할 대책을 강구토록 하였다. 묘당에서 또 더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2월 5일 정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연명(聯名)으로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국왕의 아우와 조카를 만나보려 한다는 설이 처음에 빈신(儐臣)의 장문(狀聞)에서 나왔는데 섣불리 왕복한다면 갈등이 생기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또 중로(中路)의 빈신이 비록 말한 바가 있어도 그들의 생각을 돌리기는 어려운 바가 있을 듯하기에 우선 그들이 관(館)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처리하려 하였습니다. 관에 도착한 뒤에 저들이 또 단서를 꺼냈는데, 요상(僚相)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신 등도 또한 결코 그것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병이 있다고 핑계하면서 그들의 말을 강력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관소(館所)에 친히 나아가신 날 저들이 그제야 칙지(勅旨)가 이와 같다는 뜻으로 비록 말을 하기는 하였으나, 또한 극력 청하는 의사는 없었기에 그 일은 그대로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말이 반드시 칙지에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또한 곧바로 교명(矯命)107)  으로 돌려서 서로 맞닥뜨려 불화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창졸간에 방편(方便)의 도리가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산릉(山陵)의 전제(奠祭)에 있어서도 문자(文字)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언제 칙지의 진위(眞僞)를 따져서 가리지 못하고 다만 예의(禮意)와 사세(事勢)로써 다투게 된 것이 모두 이런 뜻입니다. 모빈(某嬪)의 소생이고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다는 한 구절의 말에 이르러서는 칙지의 유무(有無)를 측량하기 어려움은 이미 진달한 바와 같은데, 국왕의 아우와 조카들을 만나보기를 청하는 일에 비교할 때 다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산릉의 일 이래로부터 사사건건 서로 다투어 지력(智力)이 이미 고갈되었는데, 저들이 바야흐로 말하기를, ‘봉행(奉行)하지 않으면 대궐에 나아가지 않고 마땅히 곧바로 귀로(歸路)에 오르겠다.’ 하였습니다. 도감(都監)에서 누차 성상께서 앉아서 접견을 기다리고 계시는 형상을 말하였으나 시종 자신들의 의사를 고집하면서 변동할 생각이 없었으니, 그 곤욕스러움이 이보다 심함이 없었습니다. 진실로 일단(一段)의 반드시 다툴 만한 의리가 있다면 마땅히 한결같이 휘척(揮斥)해서 사단(事端)을 야기시키지 않아야 하는데도 이제 이에 사정(事情)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말후(末後)의 지엽적인 일을 가지고 아울러 이미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하여 마무리지은 근본적인 일까지 한꺼번에 끄집어내어 말을 하게 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우상(右相)의 차자(箚子) 내용은 결코 다른 뜻이 없다. 경(卿) 등의 나라를 위한 충근(忠勤)한 정성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으니, 개의치 말고 함께 국사(國事)를 보살피라."
하였다.

 

12월 8일 경자

이조 판서 권상유(權尙游)가 면직되고 송상기(宋相琦)가 대신 임명되었다.

 

12월 11일 계묘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상소하기를,
"청대(請對)하여 아뢴 말씀을 보게 되면 이른바 국왕의 아우와 조카들을 만나보기를 청한다는 한 사항에 대해서 전혀 방지를 청한 것이 없었고, 다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것을 앙품(仰稟)했을 뿐인데, 신이 어떻게 그들이 관(館)에 도착한 뒤에 방지할 것을 미리 헤아리고서 한 마디 말씀도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섣불리 왕복하면 사세(事勢) 파악이 어렵다는 것은 형편상 혹시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연석(筵席)에서 품정(稟定)하는 즈음에는 돌아보건대 무슨 갈등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곧바로 강경하게 방지하자는 뜻을 진달하지 않고 범연하게 앙품(仰稟)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뒤에 이른바 칙지(勅旨)의 등본(謄本)을 얻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애당초부터 조종(操縱)한 것은 태반이 칙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저들이 이에 ‘균유(均諭)’라는 두 글자를 빙자하여 이런 의외의 무리한 행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몹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칙지 가운데 있는 말이 아니라면 종척(宗戚)의 다소(多少)나, 모빈(某嬪)의 소생이고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중대하고 않고를 물론하고 어찌 공공연히 저 사람들에게 적어 주어야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곧바로 칙지 가운데 없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구실(口實)을 만들어 사리에 의거해 엄정하게 물리친다면, 저들이 다시 무슨 말을 가지고 힐난하겠습니까? 이런 방법으로 하지 않고 이에 허다한 필요치 않은 말들을 적어 주었으니, 이런 길이 한 번 열리게 된다면 이다음부터는 저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가 비록 이것보다 더한 무리한 점이 있을지라도 다시 장차 어떻게 위복(違覆)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천정(天井)을 쳐다보고 한탄하면서 뒷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계책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양편을 이해시키고, 이어서 함께 오게 한 승지(承旨)를 소환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청나라 사신이 도성(都城)에 들어와서 칙지(勅旨)를 핑계하면서 국왕의 아우를 만나보기를 요구한 것은 장차 칙지를 골고루 효유(曉諭)하려는 까닭이었고 전혀 깊은 의미가 없었으며, 김창집(金昌集)이 청나라 사신에게 적어 준 것도 단지 품지(稟旨)하여 거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조태구(趙泰耉)가 ‘모혐(冒嫌)’으로써 비방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한 뒤로부터 조태구가 의혹을 가졌다가 청나라 사신이 왕의 아우를 만나보기를 요구함에 미쳐서는 이에 이런 ‘모혐’의 설이 있게 되어 스스로 그것이 악역(惡逆)에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유봉휘(柳鳳輝)의 상소가 있었고 또 목호룡(睦虎龍)의 무고(誣告)의 변(變)이 있어 끝내는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기에 이르러 화란(禍亂)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반역을 하게 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모혐(冒嫌)’의 설에서 나왔으니, 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충청도 유학(幼學) 이몽인(李夢寅)이 상소하기를,
"춘추(春秋)의 법(法)에 죄가 있으면 반드시 토주(討誅)하는 것이 군부(君父)를 업신여기고 이륜(彝倫)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있어도 그 죄를 마땅히 처벌해야 하는데, 더구나 이 두 가지를 겸한 것이겠습니까? 아! 군신(君臣)의 분의(分義)이 엄정함과 모자(母子)의 윤상(倫常)의 중대함은 천지(天地)에 경위(經緯)가 되어 예나 이제나 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한 번 무너지게 되면, 사람은 사람의 구실을 할 수가 없고 나라는 나라의 구실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찌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신 처음에 저 윤지술(尹志述)이 갑자기 무륜(無倫)·부도(不道)한 말을 발설하여 군부(君父)를 업신여기고 이륜을 무너뜨릴 줄 예상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선왕(先王)의 대통(大統)을 빛나게 이으시고 천승(千乘)의 지위에 높이 거처하시면서 차마 한낱 하찮은 어린아이로 하여금 팔뚝을 내저으며 우리 전하를 탄생하신 사친(私親)을 여지없이 모욕하였는데도, 오히려 한 마디 말을 하거나 한 마디 명령을 내려서 조금이나마 그 흉악하고 방자한 죄를 징계하지 못하였으니, 분의(分義)와 윤상(倫常)은 여기에 이르러 남김없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신 등은 차라리 관면(冠冕)을 벗어 찢어버리고 산림(山林)으로 도망쳐 들어가 이런 역적 무리들과 효치(孝治)의 세상에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아! 제왕가(帝王家)의 변괴(變怪)가 전하께서 만난 바와 같은 경우가 비록 혹시 있더라도 선조(先朝)에 죄를 얻었다 해서 바로 그 천성(天性)의 사친을 끊은 일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고, 또한 그 신자(臣子)된 이가 군부(君父)를 대하여 그를 낳아준 사친을 배척하여 억지로 기절(棄絶)하게 하기를 윤지술처럼 하였다는 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반드시 ‘이분은 선왕의 죄인이니 지금도 죄인으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죄인의 아들로써 전하를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 싹수를 추적해 보면 유래가 있어 점차 확대된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근본을 미루어 논하려 합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춘추(春秋)가 한창이실 때 저사(儲嗣)가 없다가 늦게야 원량(元良)을 얻게 되니, 온 나라가 기뻐하고 경하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위(儲位)를 책정(策定)한 뒤 일종의 흉악하고 음험한 무리들이 항상 불만스러운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사랑에 그친다[止慈]’는 뜻으로 엄하게 제방(隄防)을 가하여 보호하는 도리가 지극히 깊고 또 간절하였습니다. 기사년108)  에 승정원(承政院)에 내린 비답에 이르시기를, ‘원자(元子)의 명호(名號)가 이미 결정되고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아주 결정된 뒤에 국체(國體)를 일찍 결정했다는 것을 가지고 불만의 뜻을 현저히 나타내고 있으니,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또 갑술년109)  에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심지어 ‘강신(强臣)·흉얼(凶孽)로서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는 자는 역률(逆律)로써 논죄하겠다.’는 하교까지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요얼(妖孽)들이 그 흉악한 계책을 실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조위(弔慰)와 책봉(冊封)에 대해 모두 소식(消息)이 없는데, 칙서(勅書)도 갖고 있지 않은 청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나와서 여러 가지로 공갈하니, 일의 시작과 끝을 측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김창집(金昌集)이 청나라 사신과 대화를 나눈 뒤로부터 신민(臣民)이 의구심을 가지고 놀라 몸둘 바를 모르며, 마치 어떤 화기(禍機)가 조석(朝夕)에 닥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시세(時世)이며 이것이 어떤 효상(爻象)입니까? 국정(國政)을 맡은 수상(首相)이 한 장의 종이를 써서 주자, 우상(右相)의 놀라움에 찬 우려를 초래하였으니, 오늘날 인심(人心)이 어찌 물결처럼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나라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그 일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조속히 현명한 하교를 내리시어, 먼저 윤지술의 목을 베어서 이미 어두워진 이륜(彝倫)을 밝히시고, 김창집의 죄를 통쾌히 바로잡아서 이미 흩어진 인심을 안정 시키소서. 후원(喉院)의 옹폐(壅蔽)110)  한 죄상도 똑같이 통쾌하게 다스리신다면 종사(宗社)를 위해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하였다. 이몽인이 작도(斫刀)를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 군졸(軍卒)을 구타(毆打)하니, 병조 참의 윤양래(尹陽來)가 아뢰기를,
"이몽인이 돈화문(敦化門)을 밀치고 들어와 거조(擧措)가 패악하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붙잡아 가두고 죄를 주도록 하고, 수문장(守門將) 김필흥(金弼興)은 평상시에 제대로 금단(禁斷)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추고(推考)하여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12일 갑진

태백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12월 18일 경술

태백성이 사지에 나타났다.

 

초복(初覆)을 행하여 사람을 살해한 사형수(死刑囚) 두 사람에 대해 삼복(三覆)111)  을 기다려 다시 의처(議處)하도록 명하였다.

 

12월 19일 신해

태백성이 사지에 나타났다.

 

12월 22일 갑인

삼복(三覆)을 행하여 사람을 살해한 사형수 두 사람을 결단하니, 형률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12월 28일 경신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진검(李眞儉)이 상소하기를,
"근일에 인심이 함닉(陷溺)되고 세도(世道)가 물결처럼 흔들려 기회를 타고 곁에서 엿보는 자가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을 들추어내어 종용(慫慂)하여 시험해 보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고, 권세를 도둑질하여 엿보면서 희롱하는 자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추가로 끄집어내어 감히 조절(操切)하고 협박하는 행태를 멋대로 하니, 조중우(趙重遇)와 윤지술(尹志述)이 바로 그들의 부림꾼이 된 자들입니다. 조중우의 상소는 은혜를 핑계하여 의리에 어긋났고 윤지술의 말은 의리를 핑계하여 은혜를 끊었으니, 이들은 모두 전하의 죄인으로서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저 조중우라는 자는 임금의 뜻을 함부로 헤아리고 기회를 엿보아 불쑥 발설하여 끝내 대의(大義)의 중대함을 돌아보지 않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마음을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반드시 살해한 것을 가지고 과중(過重)하다 하지만 어리석은 신은 삼가 망령되이 헤아린 바가 있으니, 혹시 성상의 뜻이 제방(隄防)을 위주로 하셨다면 차라리 과중한 쪽에 실수를 한 것이라고 여기겠습니다. 참으로 이와 같다면 진실로 국가의 복(福)입니다. 전하께서 시조(施措)하는 사이에 이미 털끝만큼도 간쟁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이들도 마땅히 다시 지난 일을 끄집어내어 어버이를 숨겨주는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서 전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 명백합니다.
저 윤지술이란 자는 홀로 무슨 심장(心腸)을 가졌기에 조금도 돌아보거나 기탄하는 일 없이 다만 손가락질하면서 말하는 것을 시원하게 여기니,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시경(詩經)》의 위풍(衞風) 하광장(河廣章) 주(註)에 풍성 주씨(豐城朱氏)가 송(宋)나라 환공(桓公) 부인(夫人)의 일을 논하기를, ‘어머니가 쫓겨나면 따라서 종묘(宗廟)와 단절되는 것이나 어머니와 자식간에는 애당초 단절하는 도리가 없다. 종묘의 가운데서는 은혜로써 의리를 가리어 숨기지 않고 규문(閨門)의 안에서는 의리로써 은혜를 이기지 않는다. 양공이 능히 종묘에 그 성심(誠心)을 다하였으니 밖으로 이미 승중(承重)의 의리를 잃지 않았고, 자모(慈母)에게 효경(孝敬)을 다하였으니 안으로 애친(愛親)의 인(仁)을 잃지 않았다. 거의 은혜와 의리가 둘 다 온전하여 유감이 없다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자식이 어머니를 끊는 의리가 없다는 것이 이미 분명히 경전(經傳)에 기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천하(天下)에 휘친(諱親)할 수 없는 의(義)는 이미 공자(孔子)로부터 시행되었으니, 《춘추(春秋)》에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거나 어머니를 끊을 수 없는 의(義)가 해와 별같이 밝혀져 있습니다. 과연 윤지술의 말처럼 반드시 전하로 하여금 자기를 낳아 준 은혜를 단절하게 한 뒤에야 마음에 쾌할 수 있겠습니까?
조중우에 대해서는 처분(處分)이 이미 엄정하여 그 자신이 이미 죽음을 당하였으니, 본디 더 거론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해 보려고 화(禍)를 남에게 떠넘기는 무리들이 그 뒤를 계속하니 이르는 자가 장차 얼마가 될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더욱 제방(隄防)을 가해야 할 곳입니다.
윤지술의 죄는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이 다같이 분개하는 바이고 전하께서도 이미 엄정한 하교를 내리셨는데, 처벌이 멀리 유배(流配)시키는 것으로 그쳤으니, 오늘 조정의 신하되는 이들은 진실로 마땅히 같은 말로 엄정하게 배척하여 군부(君父)의 모욕을 설치(雪耻)해야 하는데, 다만 이렇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극력 신구(伸救)하였고, 끝내는 군부를 조절하여 일단 내린 명령을 취소하는 데 이르게 하고야 말아서, 반드시 전하로 하여금 그 모욕을 달게 받고 손을 쓸 수 없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심술이며 이것이 무슨 의리입니까? 신은 다시 윤지술이 임금을 모욕한 죄를 바로잡고, 이어서 당여(黨與)로서 윤지술을 신구(伸救)한 자들의 죄를 다스려 미래(未來)를 엄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고(金槹)는 몸이 법종(法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한 말의 패망(悖妄)함이 윤지술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윤지술을 정죄(定罪)한 뒤에는 다만 마땅히 움츠려 엎드려 죄를 지었다고 해야 될 것인데, 이에 도리어 자신이 앞장서서 변호하여 방자하게 기탄이 없었으니, 신은 윤지술과 같이 처벌하지 않는다면 삼가 이런 무리들을 징계하여 두렵게 할 바가 없을까 합니다.
조최수(趙最壽)의 한 통 상소는 말이 엄하고 의리가 바르니, 대계(臺啓)가 이를 향해 공격한 것은 그 기습(氣習)이 절통(絶痛)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조최수에게 배척당한 여러 대간(臺諫)들이 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무릅쓰고 그대로 눌러앉아 있으니, 신은 모조리 깨끗이 도태시켜 대각(臺閣)의 체통을 무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행진(金行進)과 홍흡(洪潝)의 상소는 어의(語意)가 비록 협잡(挾雜)이 있지만, 단지 윤지술의 일만 거론한 것으로서 조중우의 상소와는 조관(條貫)이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 까닭도 없이 죄를 만들어 여러 승지들을 모조리 축출하였습니다. 더구나 지난해에 역적 임창(任敞)의 상소 가운데의 부도(不道)한 말은 여러 사람 입으로 전파되었고, 그의 숙부(叔父)인 임홍망(任弘望)은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장주(章奏)를 올려 사실을 자백하였다가 홍흡의 상소를 듣고 아울러 임창의 죄를 논핵하였는데, 임형(任泂)은 그의 종제(從弟)로서 감히 막아 비호할 계획을 내어 칼날을 후원(喉院)으로 옮겨 공격해 제거하고야 말았으니, 방자하고 무엄함이 어찌 이처럼 극심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신은 임형에 대해서는 마땅히 엄한 징계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신이 정유년112) 독대(獨對)113)  하였을 때의 일에 대해서 일찍이 말하고자 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일은 먼저 이미 입진(入診)하였을 때에 발단(發端)되었으니, 독대의 연유를 입대(入對)한 대신(大臣)이 마땅히 묵묵히 헤아리는 바가 있었을 것인데도 승지와 사관(史官)이 앞에서 인도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연영전(延英殿) 일보(一步)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이미 신하의 광명(光明)한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입대 때의 설화(說話)를 사관이 기록할 수 없었으니, 외부의 사람이 감히 알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이미 ‘광구(匡救)한다.’고 했으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지금까지 4년 동안 중외(中外)의 인심(人心)이 이것을 가지고 대신의 죄를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갑자기 독대한 것은 죄가 될 수 있으나 입시한 이후의 일을 억눌러서 억지로 깊이 죄주어서 인서(仁恕)의 도리를 손상시키고 싶지는 아니합니다. 다만 대신이 분부를 받고 연경(燕京)에 갔을 때 차자(箚子)를 올려 은화(銀貨)를 얻기를 청하여, 이에 감히 병자년114)  의 사신(使臣) 행차 때에 저 사람들이 인용한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일로써 말썽을 삼은 것은 실로 신하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명회전》의 일은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이니,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상세히 아실 수가 있겠습니까? 병자년에 저위(儲位)를 봉(封)하기를 청하였을 때에 고(故) 상신(相臣) 서문중(徐文重)이 상개(上价)115)  의 분부를 받고 갔는데, 저들이 ‘《회전(會典)》 가운데 있는 제후왕(諸侯王)의 나이 50이 되어 정실(正室)에 자손(子孫)이 없은 후에라야 비로소 승중(承重)의 저사(儲嗣)가 됨을 허락한다.’는 내용을 말하면서 봉전(封典)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 재차 청하여 이에 준부(準副)를 얻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동방(東方)의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하께서는 춘궁(春宮)에 정위(正位)하신 지 거의 30년 세월이나 되고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하여 누차에 걸쳐 북사(北使)를 접대하셨으니, 아무리 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이에 다른 의논을 용납하지 못할 터인데, 대신(大臣)이 이에 감히 저들이 싹틔우지도 않은 마음을 미리 탐지하여 감히 차마 오늘에 원인(授引)하여 공동(恐動)할 계획으로 삼은 것은 무슨 심산이었습니까? 더구나 저들에게 청한 것은 스스로 응당 행하여야 할 상전(常典)이니, 비록 일전(一錢)을 허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순조롭게 이룩될 수 있을 것인데, 6만여 은화(銀貨)를 장차 어디에 쓰려 한 것이었습니까? 지문(誌文)의 일에 있어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척(指斥)하여 말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의리에서 나온 것인데, 끝에 가서는 이에 중도(中途)에서 봉장(封章)하여 스스로 물의(物議)를 일으켜 각역(刻役)이 이미 시작된 이후에 문자(文字)를 고치기를 청한 것은 마치 윤지술의 오늘의 일을 계도(啓導)한 듯하니, 사람들 마음의 의혹을 어찌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12월 30일 임술

효령전(孝寧殿) 사향 대전(四享大祭)의 친행(親行)과 삭망(朔望)의 은전(殷奠)을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교리(校理) 김제겸(金濟謙)이 차자(箚子)를 올려 논하기를,
"전하께서 여러 해 동안 가슴을 태우시던 나머지 끝내 이런 커다란 슬픔을 당하셨으니, 병이 날 것은 이세(理勢)가 당연히 그러합니다. 매양 제일(祭日)을 당할 때마다 섭행의 분부가 있으니, 군신(群臣)들은 모두 경동(驚動)하여 성체(聖體)의 강녕(康寧)치 못하심을 깊이 우려합니다. 병환이 계시어 억지로 참여하시기 어려운 바가 있으시다면 비록 사향 대제일지라도 혹시 친히 행하지 못할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삭망(朔望)의 은전(殷奠)만을 유독 어찌 섭행케 하여 제사지내지 않은 것 같다는 탄식을 남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만일 미리 법식을 정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신은 원근(遠近) 지방의 청문(聽聞)을 만족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시고 성상의 체후(體候)가 억지로 참여하기 곤란한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면 이내 내일의 전(奠)을 친히 행하겠다는 것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김제겸의 차본(箚本)을 보건대 친향(親享)을 극력 청하여 종이에 가득히 늘어놓았으니, 그 사체(事體)에 있어 자못 몹시 미편(夫便)하다. 체차(遞差)토록 하라."
하였다. 승지 남도규(南道揆)·정형익(鄭亨益) 등이 복역(覆逆)116)  하여 간쟁하니, 답하기를,
"갑자기 생각해 보니 김제겸이 차자로 진달한 것은 진실로 충성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므로 내가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그대들이 말이 더욱 몹시 간절하니,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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