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고양(高陽)은 산릉(山陵)이 있는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온갖 책응(責應)이 다른 고을에 비해서 갑절이나 되니, 봄철의 대동미(大同米) 3두(斗)를 양감(量減)해서 덕의(德意)를 보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임금이 연묵(淵默)이 너무 지나친 이유로써 《주역(周易)》의 천지(天地)가 교태(交泰)하는 뜻을 인용하여 졸곡(卒哭) 후에도 강연(講筵)을 열어서 대신·유신들과 문의(文義)를 논난(論難)하고 치도(治道)를 강구(講求)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아니하였다.
11월 4일 정묘
경기(京畿) 유학(幼學) 김행진(金行進) 등이 상소하기를,
"《춘추(春秋)》에 자식이 어머니를 끊는 도리가 없고, 자식이 어머니를 원수로 여기는 의리가 없습니다. 전하의 사친(私親)은 전하를 낳아 주신 어머니가 아니십니까?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슬프다! 부모님은 나를 낳으시느라고 고생하셨네. 그 덕을 갚고자 해도 하늘처럼 높아 한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있어서 그 고생하고 돌보아 준 은혜는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습니다. 어찌 자식이 제왕(帝王)이 되어 부모가 낳아 준 은혜를 단절하고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王位)를 계승하신 뒤에는 도리(道理)와 사체(事體)가 종전과는 스스로 다른데, 이제 윤지술(尹志述)이 이에 감히 말하기를, ‘전하께서 다시 사친이 있지 않다는 것은 의리(義理)가 매우 명백하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도리가 어떤 전기(傳記)에 나와 있습니까? 옛적에 송(宋)나라 환공(桓公)의 부인(夫人)이 양공(襄公)을 낳고는 나와서 위(衞)나라에 돌아왔는데, 양공이 즉위한 뒤에 부인이 양공을 생각하여 이에 하광(河廣)의 시(詩)092) 를 지었습니다. 이에 대해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양공과 같은 경우는 마땅히 어머니가 살아서는 그 효성을 극진히 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예(禮)를 극진히 할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양공의 어머니는 이미 그 아버지로부터 축출을 당하였는데도, 선유의 논평이 이와 같이 천리(天理)를 추광(推廣)하고 인정(人情)을 곡진하게 한 것은 어찌 어머니에 대한 도리는 끝내 끊을 수가 없고, 낳아서 길러 준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기 때문에 아니겠습니까? 이제 만일 이 의리를 미루어 말한다면 전하께서 사친을 추보(追報)하고, 신자(臣子)가 성상의 심정을 우러러 본받는 것은 마땅히 각각 그 도리가 있어야 할 것인데도, 이제 윤지술이 이에 감히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숨길 만한 어버이가 없고 신하는 마땅히 숨겨야 될 의리가 없다.’ 하였습니다. 아! 이는 장차 전하로 하여금 사친을 죄인으로 대우하여 낳아 준 큰 은혜를 단절하게 하려는 것이고, 전하의 신하가 된 이들은 또 다 나쁜 말을 서로 하여서 휘피(諱避)하는 바가 없게 한 후에야 마음에 통쾌할 것입니까? 모자(母子)의 사이는 사람들이 말하기가 어려운 것으로서 비록 대등(對等) 이하(以下)의 사람에게 있어서도 감히 드러내놓고 곧바로 지적하여 효자(孝子)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윤지술은 이에 감히 말하기를, ‘밝게 전장(典章)을 시행하여 여러 사람들의 분개심이 풀어졌다.’고 하여, 마치 전하의 망극(罔極)하신 변(變)을 다행으로 여기고 국가의 불행한 일을 통쾌하게 여기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가 윤기(倫紀)를 무너뜨리고 군부(君父)를 모멸함이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윤지술을 잡아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조속히 나라의 형벌을 바르게 하시어 이륜(彝侖)이 파괴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충청도 유학(幼學) 홍흡(洪潝) 등도 또한 상소하여 윤지술을 참형(斬刑)에 처하기를 청하였는데, 김행진의 상소와 같이 들어가니, 모두 유중 불하(留中不下)093) 하였다.
11월 8일 신미
영빈(寧嬪)의 집을 개수하여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영빈은 선조(先朝)의 후궁(後宮) 김씨이다. 졸곡(卒哭)이 지난 뒤에는 마땅히 대궐을 나가야 하는데, 전에 살던 집이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개수하여 하사하라고 한 것이다.
설국(設局)하여 선왕(先王)의 실록(實錄)을 찬수(纂修)케 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에게 총재관(摠裁官)을 겸임토록 하였다.
11월 10일 계유
청(淸)나라 사신(使臣) 내각 학사(內閣學士) 액화납(額和納)과 부사(副使)일등 시위(一等侍衞) 의도액(宜都額)·진덕록(眞德祿)이 조제(弔祭)의 일 때문에 나왔다.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치문(馳聞)하니, 유명웅(兪命雄)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각참(各站)의 영위사(迎慰使) 이정주(李挺周)·안중필(安重弼) 등이 병을 핑계대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계품(啓稟)하니,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1일 갑술
윤각(尹慤)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윤각은 양국(兩局)의 장임(將任)을 역임하지 않았는데, 이 관직을 제수한 것은 김창집(金昌集)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11월 12일 을해
임금이 친히 나가서 종신(宗臣)의 전강(殿講)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두 사람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11월 13일 병자
동부승지 정형익(鄭享益)이 상소하여 산릉(山陵)을 전알(展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여 해조(該曹)에 좋은 날을 골라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4일 정축
고부사(告訃使) 이이명(李頤命) 등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언서(諺書)로 칙행(勅行)094) 에 덧붙여 주달하기를,
"봉전(封典)095) 에 관한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예부(禮部)에 올렸더니, 낭중(郞中)이 당상(堂上)의 뜻으로 와서 묻기를, ‘세자(世子)가 미처 교지(敎旨)를 받들어 왕(王)에 봉(封)해지지 않았는데, 추봉(追封)096) 과 요봉(邀封)097) 을 어찌하여 한꺼번에 들어서 청하는가?098) ’ 하였습니다. 답하기를, ‘전례(前例)가 모두 그러하다.’ 하였더니, 그 뒤에 오랫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회동관 제독(會同館提督) 상숭탄(尙崇坦)이 애당초 자못 은근한 기색을 보이면서, 시랑(侍郞) 경일진(慶一陳)이 지은 복주(覆奏)를 은밀히 보여 주었는데, 그 결어(結語)에, ‘왕비의 책봉은 그 성명(聲名)을 주청(奏請)하는 시기를 기다려 다시 책봉을 의논하자.’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상숭탄이 이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야흐로 힘을 써서 그의 마음을 돌리고 있다.’고 하면서 뇌물을 요구하는 의사가 현저히 있었는데, 역관(譯官)의 무리가 임시변통으로 꾸며서 답변하였습니다. 갑인년099) 의 사신(使臣) 행차 때에도 이와 같이 트집을 잡은 일이 있어서 예부(禮部)에 정문(呈文)해서 변쟁(辨爭)하기까지 하여 특지(特旨)로 청을 인준하였는데, 다른 길을 통해서 주선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트집을 잡아 흔단(釁端)으로 삼은 것이 몹시 해괴하지만 사세가 이와 같으니, 갑인년의 준례를 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나가서 문신(文臣)의 강(講)을 시험하고, 으뜸을 차지한 사람에게 말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나아가 말하기를,
"종신(宗臣)과 문신(文臣)의 전강(殿講)에 연이어 친림하시니, 이는 실로 재예(才藝)를 권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졸곡(卒哭)이 이미 지나서 청정(聽政)이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이러한 일은 원래 제1의 급무는 아닙니다. 오늘날에 있어 시급한 바는 유신(儒臣)을 친근히 하고 서사(書史)를 강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점을 성상의 마음에 유념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소망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 ‘잘 조섭(調攝)을 하고 때때로 삭망(朔望) 제전(祭奠)에 친림할 것’을 청하니, 역시 그대로 받아들였다. 또 말하기를,
"영빈(寧嬪)의 가사(家舍)를 개조(改造)하도록 분부하셨는데, 후궁(後宮)의 집을 일찍이 개조해서 준 전례가 없습니다. 단지 참작하여 값을 주고 내수사[內司]로 하여금 간검(看檢)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17일 경진
병조 판서 이만성(李晩成)이 면직되고, 최석항(崔錫恒)이 대신 임명되었다.
11월 20일 계미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권업(權𢢜)과 원접사(遠接使) 유명웅(兪命雄) 등이 장문(狀聞)하기를,
"안주(安州)에 있을 때 역관(譯官) 장문익(張文翼) 등이 와서 청(淸)나라 칙사(勅使)의 말을 전하기를, ‘그들이 연경(燕京)을 출발할 때 그들이 나라에서 교지(敎旨)가 있어 그들로 하여금 곧바로 산릉(山陵)으로 가서 조전(弔奠)의 예(禮)를 설행(設行)하도록 하였으므로, 홍제원(弘濟院)에 가서 유숙한 뒤에 그 다음날 마땅히 능소(陵所)에 가서 행례(行禮)하여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역관의 무리들에게 단단히 타일러 좋은 말로 가로막도록 하였는데 칙사가 앞의 말을 고집하니, 이는 단지 권위(權威)를 빙자해 뇌물을 요구하려는 계획이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여러 역관들에게 엄하게 신칙(申飭)을 더하여 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해 쟁집(爭執)해서 꼭 회청(回聽)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앞서서 먼저 치계(馳啓)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관반(館伴)100) 민진원(閔鎭遠)·이관명(李觀命)을 거느리고 입대(入對)를 청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기축년101) 의 국상(國喪) 때에도 청나라 사신이 곧바로 산릉(山陵)으로 가겠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체(事體)가 구별이 있다는 것으로써 답하였으며, 돌아갈 때에 산릉을 참배하겠다는 청은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따로 중신(重臣)을 보내서 개유(開諭)함이 사리에 합당할 것인데, 이관명이 바야흐로 관반을 맡았으니, 청컨대 그에게 사무를 잘 아는 역관을 데리고 내려가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일 산릉을 참배하기를 청한다면 거절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민진원은 말하기를,
"저들이 만일 칙지(勅旨)를 핑계하여 반드시 산릉에 가겠다고 하며 표석(表石)에 쓴 ‘숭정(崇禎)102) ’이란 두 글자가 자못 불편하게 됩니다. 이것을 판벽(板壁)으로 막았다가 저들이 설사 질문이 있더라도 복어물(服御物)을 보관한 곳이라고 답변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1월 22일 을유
원접사(遠接使) 유명웅(兪命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김유경(金有慶) 등이 다시 치계(馳啓)하기를,
" 수역관(首譯官) 김홍지(金弘祉)가, ‘산릉(山陵)에 가서 전(奠)을 올리는 것은 이미 전례(前例)에 어긋나고, 또 칙지(勅旨)의 문자(文字)가 없으므로 결코 처음 만들어 행하기 어렵다.’며 누누이 말하였더니, 그들은 ‘분부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종전에 한 말을 고집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정에서 특별히 우리들을 보내 산릉에 가서 전(奠)을 올리고 또 꿇어앉아 곡배(哭拜)를 드리도록 한 것은 다 전에 없던 특별한 은전이다. 우리들이 산릉에 갈 때에는 그대들 나라의 주상(主上)께서도 마땅히 백관을 거느리고 산릉에 나와서 높은 은혜에 사례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봉산(鳳山)에 이르러 청(淸)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따로 칙지 한 통이 있는데, 마땅히 산릉에 가서 전을 올린 뒤 국왕과 서로 만날 때에 비로소 직접 전달하겠다.’ 하고는 시종 거절하며 미리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다시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청나라 사신이 반드시 곧바로 산릉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그들의 풍속이 산릉을 중요하게 여김으로 인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다시 개유(開諭)하여도 끝내 듣지 않는다면 마땅히 허락하여야 할 듯합니다. 저들이 산릉에 갈 때에 성상께서는 비록 거동을 하지 못하시더라도 마땅히 대신(大臣)을 보내 접대해야 할 터인데, 대신과 도승지가 홍제원(弘濟院)에 나갔다가 그대로 함께 가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저들이 혼전(魂殿)에는 조제(弔祭)하는 일이 없으면 주상께서 접견하시는 한 가지 사항이 몹시 불편하게 될 것입니다. 또 이미 주객(主客)이 조위(弔慰)하는 예(禮)가 없으니, 청나라 사신이 관(館)에 머무를 때에 또한 무단히 찾아가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세자(世子)와 종실(宗室)의 자질(子姪)들을 만나보고 싶어한다 하니, 이런 등류의 허다한 곤란한 절목(節目)은 청컨대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반복해서 강정(講定)한 뒤에 조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저들은 우선 책봉(冊封)한 일이 없다 하여 세자라고 말하고, 또 종실을 만나보고 싶어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였다. 민진원(閔鎭遠)이 모두 빈신(儐臣)에게 분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5일 무자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예조 판서 이관명(李觀命)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신 등이 홍제원(弘濟院)에 나가서 청나라 관원을 접견하는 예(禮)를 행한 뒤 저들이 서로 의논할 일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서로 만났습니다. 이어서 능소(陵所)에서 제사를 마련하는 것은 본래 예의(禮意)에 어긋나며, 반우(返虞) 한 후에는 혼전(魂殿)이 중요하다는 뜻으로써 누누이 개유(開諭)하였더니, 칙사(勅使)가 과연 허락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다만 산릉(山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별한 은전이 있는 것인데, 이제 만일 능소에 제사를 올리지 않고 돌아가게 되면 분부를 어기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조선국(朝鮮國)의 대신(大臣)이 만일 이것을 가지고 문자(文字)를 만들어 보내 준다면 우리 나라에 돌아가 보고할 수 있겠다.’ 하였습니다. 형편상 미처 앙품(仰稟)할 수가 없었고 일이 또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이 과연 청(淸)나라 사신에게 써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어첩(御帖)으로 오기를 청한다면 내일 마땅히 도성(都城)에 들어가겠다.’ 하였으니, 청컨대 예랑(禮郞)으로 하여금 어첩을 받들고 가서 오도록 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창집이 또 말하기를,
"비록 칙서(勅書)는 없었지만 이미 향폐(香弊)가 있었으니, 마땅히 칙사를 영접하는 절차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11월 26일 기축
청나라 사신이 도성(都城)에 들어오니,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가 맞이하였다.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가 면직되고 권상유(權尙游)가 대신 임명되었다.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이 향려(鄕廬)에 물러나 돌아온 뒤로부터 묘당(廟堂)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하여 아무도 와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들어서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비로소 북사(北使)의 이른바 지회(知會)103) 하는 문자(文字)의 등본(謄本)을 보았는데, 그 대지(大旨)는 대략 의례적으로 대신(大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것 외에 특지(特旨)로 가까이서 시종하는 대신을 선발하여 가서 조문하도록 하며, 생각 같아서는 곧바로 산릉(山陵)으로 가서 배전(拜奠)의 예(禮)를 올렸으면 한다.’ 하였고, 그 아래에는 또 ‘세자(世子)와 그 아우와 종실의 자질(子姪)을 만나 보고, 만난 뒤에는 급히 돌아와 칙지(勅旨)를 받으라.’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실로 전달된 소식이라면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마음에 놀랍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만일 방지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사리(事理)만 가지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상국(上國)이 열국(列國)의 임금을 조문함에 있어서 아울러 아우·조카로서 배신(陪臣)이 된 자까지 언급하는 경우는 옛적에 이런 사례가 없었습니다. 상국이 이를 시행하는 것은 실례(失禮)가 되고 배신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 됩니다. 저들을 비록 예의로써 꾸짖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 왕자(王子)와 여러 종실(宗室)이 어찌 감히 이 문제에 안심(安心)할 수가 있겠습니까? 산릉에 곡배(哭拜)하고 전(奠)을 올리는 것은 말리다가 안되면 오히려 마지못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는 결코 들어주어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따로 묘당(廟堂)에 신칙(申飭)하여 빈접(儐接)하는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준례에 따라 엄하게 방지하도록 하소서. 그것을 방지하는 데 있어 변명할 말이 없을까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 정하여 시행토록 하겠다."
하고, 이어서 조속히 올라올 것을 명하였다.
11월 27일 경인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어전 통사(御前通事) 김재로(金在魯) 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청나라 사신이 칙지(勅旨)라 핑계하며, ‘특별히 대신을 보내 산릉에 치제(致祭)하고 종실(宗室)의 자질(子姪)들을 만나본 뒤에 급급히 돌아가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이 소식을 듣고 차자(箚子)를 올렸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만나보기를 청하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마땅히 ‘종실을 서로 만나보는 것은 원래 전례(前例)가 없다.’ 하여 사리에 의거해 따져서 고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지금 종실은 다 소원(疏遠)한 친척이고, 단지 왕(王)의 아우 한 사람만이 있는데 병세(病勢)가 몹시 위중하여 출입을 할 수가 없으며, 오늘 전(奠)을 드리는 자리에도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와서 참석할 형편이 못된다.’는 것을 말하여 준엄한 말로 막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건명이 말하기를,
"당초에 원접사(遠接使)의 장계(狀啓)에 이런 말이 있었는데, 만일 방색(防塞)하도록 하였다면 왕복하는 즈음에 반드시 사설(辭說)이 많았을 것입니다. 칙사가 와서 조문할 때에 만일 과연 이에 대해 질문을 한다면, ‘왕자(王子)는 단지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병으로 인해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답변을 한다면, 바로 이것은 규정에 따른 문답(問答)이 되니 굳이 염려를 할 것까지 없습니다. 설혹 억지로 청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사리에 의거하여 쟁집(爭執)할 뿐입니다."
하였다. 김창집이 ‘칙사를 접견할 때 주상께서 친히 하교(下敎)하여서 통사(通事)로 하여금 청나라 사신에게 전유(傳諭)토록 할 것을 청하였다. 이건명이 이어서 말하기를,
"연접(延接)할 때에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저 사람들이 살피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수응(酬應)하실 즈음에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였다. 김재로가 또한 선조(先朝)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절차를 진달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신 등을 돌아보며, ‘홀기(忽記)104) 에 의해 가서 전유(傳諭)하라.’는 뜻으로써 친히 하교를 내리시어 저 사람들로 하여금 전하께서 친히 스스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도록 하소서."
하고, 이건명 등이 청하기를,
"다례(茶禮) 및 연향(宴享) 때 친히 스스로 젓가락질을 하시어 저 사람들에게 보이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항폐(香幣)를 받들어 혼전(魂殿)의 내탁(內卓) 위에 올렸다. 임금이 전정(殿庭)에 서 있으니, 청나라 사신이 임금에게 잔[酌]을 올리는 데 동참할 것을 청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예절에 어긋난다.’고 다투니, 청나라 사신이 비로소 세 번 분향(焚香)하고 곡배(哭拜)하였다. 임금도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곡한 뒤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서계(西階)를 통해서 올라가 전내(殿內)로 들어가 동향(東向)하고 서 있으니, 청나라 사신이 칙지(勅旨)를 받들어 임금 앞에 바쳤고, 임금이 꿇어앉아 받았다. 이건명이 펼쳐서 그 내용을 읽었고,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사은(謝恩)하는 뜻을 전달해 바치도록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국왕(國王)의 아우·조카를 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니, 승지(承旨) 이정신(李正臣)이 사리에 의거하여 막을 것을 청하였다. 이건명이, 임금이 청나라 사신을 편전(便殿)에서 접견할 것을 청하니, 청나라 사신이 하직하고 나갔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차비 역관(差備譯官)이 와서 말하기를, ‘청나라 사신이 칙지(勅旨)라 핑계하며, 국왕(國王)의 아우·자질(子姪) 및 종실(宗室)을 보려고 한다는 사실을 중로(中路)에서부터 발설하였으며, 관(館)에 들어온 뒤에도 번번이 이것을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역관들이 신 등의 지휘에 따라 ‘국왕은 아직 저사(儲嗣)105) 가 없고, 왕의 아우는 두 사람이었는데 한 사람은 작년에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였고, 한 사람은 병이 몹시 위중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아들도 없으며, 종실은 원래 가까운 친족이 없다.’는 등의 말로 상세히 언급하였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오늘 또 말하기를, ‘왕의 아우가 비록 병이 있다 해도 반드시 서로 만나보고자 하니, 왕의 아우는 어느 비빈(妃嬪)에게서 태어났고 모씨(某氏)에게 장가들어 부인(婦人)으로 삼았는지를 상세히 기록하여 보여주도록 하고, 여러 종친(宗親)들은 오늘 편전(便殿)에서 접견할 때 어좌(御座)의 뒤에서 배시(陪侍)하도록 하라.’ 하였다 합니다. 역관 등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대(事大)한 이후에 없었던 일로서 결코 봉행(奉行)할 수 없다.’ 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봉행하고 싶지 않다면 또한 봉행할 수 없다는 뜻으로써 영상(領相)이 상지(上旨)를 앙품(仰稟)하여 문자(文字)로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타당한데, 영상이 그 기록한 문자를 가지고 친히 와서 전달한 후에 마땅히 영상과 더불어 같이 대궐에 나아갈 것이다. 만일 봉행하지 않는다면 영상이 또한 마땅히 친히 곧바로 귀로(歸路)에 오를 것이다.’ 하였다 합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급속히 품처(稟處)토록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장차 관소(館所)에 가려 하다가 복주(覆奏)하기를,
"청나라 사신이 반드시 우리 나라의 문자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돌아가서 주달할 계책을 삼으려고 해서 그런 것인 듯합니다. 그 말에 따라 써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문장을 만들어서 그 말에 따라 적어 보여주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김창집이 청나라 사신을 만나 본 뒤에 다시 대궐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김창집이 아뢰기를,
"신이 청나라 사신을 만났더니, 그가 말하기를, ‘전(奠)을 올려서 예(禮)를 거행한 뒤에 마음속으로 국왕(國王)이 반드시 문후(問候)의 예(禮)가 있을 것으로 여겨 물러나 기다렸는데, 끝내 그런 거조(擧措)가 없기 때문에 도로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혼전(魂殿)은 문후하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대인(大人)께서 편전(便殿)에 들어오면 국왕이 문후의 예를 행하고 이어서 감축(感祝)하는 뜻을 언급하려 하였는데, 듣건대 대인께서 대신(大臣)을 만나보고 정당(停當)한 뒤에 들어오려 한다 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왔습니다.’ 하였더니, 그가 현저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내일은 국왕께서 친히 관소(館所)에 와서 문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임시 방편의 말로 답하기를,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아도 국왕께서 내일은 와 보려고 한다.’ 하였더니, 그가 또 말하기를, ‘내일 국왕과 접견할 때 국왕의 아우를 반드시 맞이 해서 보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병세가 몹기 위중하여 출입을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오랜 시간 동안 힘을 다하여 다투었더니, 그가 이에 말하기를, ‘무단히 만나보지 않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니 귀국(貴國)이 만일 시행하지 않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왕의 아우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곡절(曲折)을 소지(小紙)에 적어서 나에게 주면 내가 마땅히 돌아가서 아뢸 것인데, 왕의 아우가 모씨(某氏)의 소생(所生)이고 모씨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것 또한 적어서 달라.’ 하였습니다. 신이 문자를 만들기를, ‘여러 대인들이 국왕의 아우·자질(子姪)을 만나보기를 청하는 것은 칙지(勅旨) 가운데의 「골고루 효유하라[均諭]」는 성의(盛意)에 연유한 것 같은데, 국왕은 현재 사속(嗣續)이 없고 선왕(先王)께 왕자 두 분이 있으나 한 분은 지난 겨울에 사망하였고 한 분은 몸의 병이 바야흐로 위중하여 출입할 수가 없다. 종실은 선왕과 선조왕(先祖王)이 모두 형제가 없기 때문에 가까운 일가가 없다. 현재 있는 왕자는 선왕의 빈(嬪)인 최씨(崔氏)의 소생으로 처(妻)는 고(故)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이다.’ 하여 이것을 적어 주었더니, 그가 또 이 문장이 너무 지루하고 번거롭다고 말하면서 다시 다듬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주상의 춘추(春秋)는 얼마이고 사자(嗣子)는 몇이며 왕의 아우의 연세와 사속은 또 몇인가 하는 것 등을 묻기에 신이 낱낱이 답하였더니, 그는 호서(胡書)로써 베껴 썼고, 신은 우리 나라의 문자로 번역해 왔습니다."
하고, 드디어 옷소매 속에서 소지(小紙)를 꺼내어 임금의 앞에 놓았다. 그 소지에 이르기를,
"조선국(朝鮮國) 세자(世子)의 금년 나이는 33세인데 현재 자녀(子女)가 없고, 세자의 아우는 금년에 27세인데 군수 서종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그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현재 자녀가 없다."
하였다. 임금이 본 뒤 도로 내려 주니, 김창집이 이내 사관(史官)에게 넘겨 주었다. 또 아뢰기를,
"저들이 당초에는 또 종실을 맞이해서 보겠다는 말이 있었으나 오늘 물어 보았더니, 답하기를, ‘원래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의 정상(情狀)은 갑자그럽게 바뀌기 때문에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또 헤어질 무렵에 왕의 아우를 만나보는 일에 대해 신이 칙지(勅旨)가 비록 엄하지만 왕의 아우가 실지로 질병이 이와 같으니, 어찌 용서해 줄 방도가 없겠는가?’ 하고 답하였더니, 그가 또 말하기를, ‘내일 국왕이 내림(來臨)하실 때 결단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서 내일 반드시 모름지기 친히 가서 문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저들에 대한 의례적인 증여를 종전에 비해 더 줄 것을 청하였다.
11월 29일 임진
조태채(趙泰采)를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삼았다.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현관복(玄冠服) 차림으로 문후(問候)의 예(禮)를 거행한 뒤 시복(時服)으로 갈아 입고 청나라 사신과 접견(接見)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다례(茶禮)를 행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선왕(先王)께서 50년 간 재위(在位)하는 동안에 근신하며 봉직(奉職)을 잘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리들이 나올 때 선왕께서 백성을 구휼하신 덕을 추념(追念)하여 이런 의사로써 소지(小紙)에 베껴 쓰게 하여 일로(一路)에 반포(頒布)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그런 선왕의 덕을 알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 조종의 특지(特旨)입니다. 그리고 또 백성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는 우리들이 매양 다담(茶啖)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의(謝意)를 표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또 묻기를,
"선왕의 여러 아들이 몇 분이나 됩니까? 우리들이 그들고 만나서 골고루 이 뜻을 효유한 뒤에 떠나가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말을 전달하게 하기를,
"왕자(王子)는 단지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병이 있어 출입을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조정의 뜻입니다. 받들어 이행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이것을 돌아가 아뢰어야 할 것이니, 자세하게 적어서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점다(點茶)106)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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