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을축
부교리(副校理) 조문명(趙文命)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들으니, ‘사람의 병을 잘 치료하는 의원(醫員)은 먼저 그 상처를 받은 근본을 치료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먼저 그 병이 든 근원을 다스린다.’ 하였습니다. 지금 국가의 병을 얻게 된 근원은 오직 붕당(朋黨)일 뿐이니,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 붕당을 타파하는 한 가지 일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붕당의 해로움에 그 다섯 가지 조목이 있는데, ‘시비(是非)가 진실하지 못하고, 사람을 임용함이 넓지 못하고, 기강(紀綱)이 서지 못하고, 언로(言路)가 열리지 못하고, 염치(廉恥)가 모두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제할 방도는 ‘임금이 그 표준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신이 청컨대 조목조목 진술하고 분석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옳고 그름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하는가 하면, 당론이 있어 온 이래로 논의(論議)가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갑(甲)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을(乙)이 그르다 하고, 을이 옳다고 하는 것을 갑이 그르다고 하여, 그 옳다고 여기는 것에는 한 가지 선(善)으로 백 가지 허물을 숨기고 그 그르게 여긴 것에는 작은 잘못으로 큰 덕을 버립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의리(義理)가 회색(晦塞)034) 하고, 인심(人心)이 함닉(陷溺)하여 각자가 피차(彼此)의 다투는 것을 오로지 득실(得失)의 기관(機關)으로 삼으며, 한쪽이 나아가면 한쪽은 물러나게 되어 점차 격화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각자가 일시의 왕의 말씀에 권위(權威)를 빙자하여 간혹 경서의 가르침을 변모(弁髦)035) 처럼 버리고 새로운 학설을 개창(開創)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국시(國是)를 억지로 결단하여 여러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자도 있습니다. 그것을 주장하는 자는 먼저 표치(標幟)를 세워 통색(通塞)으로 위협하고, 후욕(詬辱)하여 을러대므로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듯 확 쏠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간혹 조금은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할 줄 아는 자가 있으나, 밀어서 도와주는 가운데 들어가지 않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색목(色目)이 한 번 정하여진 뒤에는 다시 하나의 도철(塗轍)036) 가운데에서 드나들지 못하게 되어, 보고 듣는 것이 가로 막혀진 바에 따라 그 좋아하고 미워함의 본심(本心)을 잃게 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그리하여 언의(言議)의 교격(矯激)037) 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풍속(風俗)의 괴패(乖敗)가 때로 다르고 달로 같지 아니하니, 진실로 이 폐단을 없애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사람을 임용함이 넓지 못하다.’고 하는가 하면, 옛적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재주에 따라서 알맞게 등용하고 한 가지의 준례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론이 생긴 이래로 문호(門戶)를 분할하여 혹은 나아기도 하고 혹은 물러나기도 하며, 이쪽이 들어가면 저쪽은 나가게 되어 취사(取舍)·전형(銓衡)할 때 그 사람의 현명 여부를 따지지 않고, 단지 말과 의논의 다르고 같은 것만을 계산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 집안 가운데에서도 화외(化外)038) 와 똑같이 보며, 중대한 공기(公器)039) 를 가져다가 사사로운 물건으로 삼습니다. 지난번 배대 쌍집(配對雙執)의 규정도 진실로 이미 놀랄 만하였으나, 지금 그것을 본다면 곧 먼 옛적[上古]의 일과 같습니다. 승진 발탁되는 자들은 서로 관련이 있는 친속이 아니면 대부분 그 문하(門下)에 출입하는 사람들이고, 대각(臺閣)의 석상에는 혹시라도 자기와 다른 사람이 뒤섞이게 될까 두려워하여 물색(物色)과 배의(排擬)040) 에 모두 교묘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치켜세우고 깎아내림이 모두 일대(一隊)의 약속 가운데에서 나오기 때문에 낮은 품계와 보통 벼슬의 임용은 응견(鷹犬) 같은 무리를 위한 것이 되어 중요한 자리를 엉뚱하게 차지하는 경우가 많고 문학(文學)과 재화(才華)가 성대하여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는 자는 전야(田野)에서 할 일 없이 서성대는 지경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논의(論議)의 본령(本領)을 추구해 보면 중도에 지나치고 마땅함을 잃음은 피차 다를 바 없으며, 그 마음가짐의 편벽되고 치우친 것을 논한다면 취멱(吹覔)041) ·경알(傾軋)이 똑같은 투식입니다. 번갈아 나아가고 번갈아 물러나는 즈음에 그 드러난 득실(得失)을 추적해 보면 간혹 이쪽이 저쪽보다 나은 경우가 있으나, 악역(惡逆)에 관계되고 윤상(倫常)을 범함이 지난번의 사람들과 같은 것이 아니니, 보통의 사류(士類)가 되기에 해롭지 않습니다. 다만 오로지 영예를 탐하고 이익을 즐기는 무리들만이 총록(寵祿)을 자기가 독점하려 하여, 오직 다른 사람들이 거머쥐어 빼앗아 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억지로 명목(名目)을 만들어 사(私)·정(正)으로 서로 이름을 지어 반드시 한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망측(罔測)한 죄과(罪科)로 몰아 넣으려고 합니다. 진실로 이 폐단을 없애고자 한다면 또한 어찌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기강(紀綱)이 서지 못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당론이 생긴 이래로 사랑함과 미워함이 편벽되고, 사사로운 뜻이 승리하였으며, 요행의 문이 열리고 공도(公道)가 끊어졌으며, 상을 주고 벌을 내림이 분명하지 못하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정당함을 잃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위에서는 능히 통섭(統攝)하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없습니다. 고을 백성들은 수령에 대해 바로 군신(君臣)의 분수가 있는 것인데도 방자하게 구타하며, 도적이 백주에 돌아다니고, 간혹 군병(軍兵)과 같은 위세를 부려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일컫는 유상(儒相)을 일개의 무부(武夫)가 어린애 부르듯 부르고, 나라의 대신(大臣)을 합계(合啓)하지도 않고 노예(奴隷)처럼 질책하기도 합니다. 관절(關節)042) 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지고, 간촉(干囑)043) 이 풍속을 이룬 것에 이르러서는 각사(各司)의 종이나 하인은 지극히 미천한 자리인데도 한 자리의 결원(缺員)이 생기면 대신(大臣)이 구걸(求乞)하며, 어사(御史)의 염문(廉問)은 지극히 엄중하고 비밀스러워야 하는데도 계사(啓辭)를 다듬을 즈음에는 사찰(私札)이 간혹 오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습상(習尙)이 물결처럼 퇴패(頹敗)하고 변괴(變怪)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니, 이와 같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이 폐단을 없애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언로(言路)가 열리지 못한다.’고 하는가 하면, 무릇 정령(政令)을 베풀어 시행하는 사이에 반드시 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고, 초야(草野)에서 말하게 하여 가부(可否)를 서로 구제해 주고, 시비(是非)를 서로 논난(論難)해야 하는데, 당론이 생긴 이래로 국정(國政)을 맡은 자들이 대부분 모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두루 묻기를 꺼리고 있으며, 남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기뻐하고 남이 자기에 대해서 비평하는 것을 싫어하며, 방자하게 위에서 호령(號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감히 그 장단(長短)을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미 굳게 앞에 가리워졌는데, 강성한 이웃 나라와 강(强)한 적국(敵國)이 좌우에서 엿보니, 득실(得失)의 염려가 또 뒤에서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속(團束)을 갑절로 하여 마치 계엄(戒嚴)하듯이 해야 할 것인데, 혹시 지적하여 배척하는 말이 국외(局外)의 사람에게서 나오면 지목하기를, ‘경알(傾軋)이다.’, ‘괴란(壞亂)이다.’ 하여, 칼날을 드러내서 맞이하고 살촉을 뾰족하게 해서 겨누어 오직 그들이 혹시라도 느닷없이 불쑥 들어올까 두려워합니다. 심지어 소장(疏章)을 봉입(奉入)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 그대로 빙자하여 가로막는 것이 풍속을 이루었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망치는 제일 첫 번째의 조짐입니다. 지금은 가로막고 저지하는 것도 부족하여 관사(官師)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것까지 폐지하였으니, 어찌 아주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병폐를 없애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염치(廉恥)가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당론이 생긴 이래로 예양(禮讓)은 점차 무너지고, 경탈(傾奪)044) 이 풍속을 이루어 무릇 모든 진퇴(進退)에 관련된 바와 득실(得失)이 있는 곳에는 요탈(撓奪)045) 하지 않은 것이 적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온 세상이 미친 듯하여 눈을 치켜뜨고 이익을 추구하기에 급급하여, 바야흐로 그 얻지 못하였을 적에는 동쪽을 엿보고 서쪽을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시기를 틈타서 이익이 임금의 뜻을 격감(激減)시키는 데에 있으면 임금의 뜻을 이에 요구하고 이익이 당로(當路)를 격축(擊逐)하는 데에 있으면 당로를 공격하여, 무릇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면 그 극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그 잃을 것을 근심할 적엔 왼쪽으로 주먹질하고 오른쪽으로 발길질하며 앞을 가로막고 뒤를 가려서, 이익이 임금에게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 데 있으면 등창과 치질이라도 빨고, 이익이 임금의 총명을 막고 가리는 데 있으면 언로(言路)를 막아 단지 득실(得失)이 있는 것만 알고, 사대부(士大夫)의 염우(廉隅)의 일절(一節)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아! 얻기를 근심하는 자도 진실로 소인(小人)이지만, 잃을 것을 근심하는 자도 또한 소인이 아니겠습니까? 췌마(揣摩)로 경영하여 반드시 훔쳐 빼앗고자 하는 것도 진실로 아름다운 습관은 아니지만,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전혀 기탄(忌憚)이 없는 것을 어찌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공부자(孔夫子)의 두 글자의 제목(題目)046) 을 다 사피(辭避)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폐단을 없애고자 한다면 어찌 또한 그 표준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시비가 억지로 결정되어 공의(公議)가 막히고, 용사(用舍)가 너무 편벽되어 현로(賢路)가 막히고, 기강(紀綱)이 서지 아니하여 군주의 위엄이 능히 아래에 펼쳐지지 못하고, 언로(言路)가 열리지 아니하여 하정(下情)이 능히 위에 통하지 못하고, 염치(廉恥)의 예절이 없어져서 일세(一世)의 풍속과 교화가 크게 무너졌으니, 무릇 이 다섯 가지는 대개 다 정사를 해치는 큰 좀이요, 나라를 병들게 하는 뿌리입니다. 그 까닭을 추구해 보면 오직 하나의 ‘사(私)’ 자가 빌미가 되는데, 이른바 붕당은 바로 이 사의(私意)의 소굴입니다.
아! 붕당의 화(禍)가 옛날인들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대개는 다 현(賢)·사(邪)가 같은 무리끼리 왕래 상종(相從)하여 그 나누어짐이 끊은 듯하였으니, 한(漢)나라의 남부(南部)·북부(北部)047) 와 송(宋)나라의 원우(元祐)·희풍(熙豐)048) 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만 오늘날의 당(黨)은 그렇지 아니하여 선(善)·악(惡), 우(優)·열(劣)이 그다지 다름이 없고, 음(陰)·양(陽), 흑(黑)·백(白)이 별로 구분이 없습니다. 장차 한 당(黨)을 들어 이끌어 임용한다면 반드시 다 어질지만은 않을 것이요, 장차 한 당을 들어 다 버린다면 반드시 다 악(惡)하지만도 않을 것이며, 장차 마지못해서 양쪽을 참용(參用)하여 고르고 공평하기에 힘쓴다면, 범 충선공(范忠宣公)의 조정(調停)의 의논049) 도 또한 구차한 결과가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므로, 결국 능히 표준을 세우는 도리를 다하는 것만한 것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이른바 ‘표준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도리가 없고, 오직 학문을 힘씀에 있으니, 다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항상 학문에 뜻을 두소서. 신은 깊이 이 일이 반드시 나라를 망치는 여계(厲階)050) 가 될 줄 알기에, 이에 감히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드립니다. 만일 성상께서 신의 상소를 조당(朝堂)에 내려 보이시고, 이어서 명백한 뜻을 내려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상하(上下)의 신서(臣庶)로 하여금 환하게 성상의 뜻이 있는 곳을 알게 한다면, 표준이 서 있는 곳에 여러 사람이 모두 다 달려나와 풀이 바람에 눕듯 신속하게 장차 멀지 않아 나쁜 폐단이 변하여 좋은 풍속이 되는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로 진달한 것이 지극히 간절하니, 유심(留心)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조문명이 상소에서 시폐(時弊)를 진술한 것은 대체적으로 좋지만 별다른 기책(奇策)이 없으니, 또한 복주(覆奏)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5월 8일 무진
임금이 친히 나가서 소결(疏決)051) 하였으니, 가뭄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수찬(修撰) 이중협(李重協)이 말하기를,
"효령전(孝寧殿)의 제향(祭享)을 섭행(攝行)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많이 말하기를, ‘전하의 정성스러운 효성으로 반드시 신하로부터 권면(勸勉)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아마 전하께서 반드시 억지로 행사하기 어려운 질환이 있으심에 연유한 것이다.’ 합니다. 그러나 군주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만백성이 우러러보고 뒤를 이을 임금의 준칙(準則)이 되는 것이니, 진실로 절목(節目) 사이의 일이라고 해서 지나쳐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바깥 사람들은 전하의 질환에 대해 알지 못하니, 실로 답답하고 의혹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삭망(朔望)의 은전(殷奠)은 또한 반드시 친히 행하시고, 만약 질환으로 억지로 행사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면 또한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셔서 바깥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도 또한 말을 하니, 임금이 유의(留意)하겠다고 하교하였다. 다음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효령전의 은전을 대신 행하게 한 것은 실로 다리의 통증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친히 행하지 못하는 것을 항상 슬프고 한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어제 연중(筵中)에서 수찬(修撰) 이중협(李重協)이 옥서(玉署)052) 의 승후(承候)하는 신하로서 나의 병의 증상을 알지 못하고 누누이 번거롭게 진달하였는데, 말이 몹시 지극하고 정성스러워 마음에 부끄러움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비록 억지로 하려고 해도 그 형편이 어쩔 수 없다. 이와 같은 나의 허물을 중외(中外)의 여러 신하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5월 15일 을해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면직(免職)되고, 이의현(李宜顯)이 대신 임명되었다.
5월 20일 경진
비로소 가랑비가 내렸다.
5월 21일 신사
상의원(尙衣院)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연제(練祭)를 지낼 때 성상께서 입으실 최복(縗服)의 포(布)는 마땅히 호조(戶曹)에서 진배(進排)해야 하는데, 포의 품질이 초상(初喪) 때 사용하던 것보다 조금 못합니다. 그러므로 ‘연복(練服)은 점차 가벼움을 따라야 하니, 다시 준비하여 진배해야 한다.’는 일을 호조에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호조에서 예서(禮書)를 고증하여 ‘참최(斬衰)의 의상(衣裳)은 매우 발이 굵은 생포(生布)를 사용하고, 연제의 최상(衰裳)은 마땅히 칠승포(七升布)를 써야 하는데, 초상 때에 이 포를 사용하여 실례(失禮)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한결같이 예문(禮文)대로 대공(大功)의 칠승포를 사용함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습니다. 상방(尙方)에서 이에 의거하여 직조(織造)해 사용하는 것이 실로 예의(禮意)에 부합하겠으나, 일이 복제(服制)의 절목에 관계된 것이므로 예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더니, 예조에서 ‘당초의 실수 때문에 그대로 더욱 발이 가는 포를 사용하여 더더욱 예의에 어긋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호조에서 저축해 놓은 넓은 포가 승품(升品)은 비록 혹시 부족하더라도 한결같이 을묘년053) 2월과 8월 및 기사년054) 8월, 갑자년055) 12월의 연제 지낼 때의 준례에 따라 가져다 사용함이 아마도 편리하고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을묘년의 준례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호조 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자최(齊衰) 연제(練祭)의 상복(喪服)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는 것이니, 비록 그것이 어복(御服)이라 하더라도 최복에 이르러서는 별도로 가는 포를 사용함이 부당합니다. 금번의 연복은 한결같이 고례(古禮)대로 시행함이 타당합니다. 만약 옷소매의 길지 않은 것을 혐의로 삼는다면,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의거하여 연폭(聯幅)056) 을 사용하더라도 또한 예(禮)를 어김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에게 물어 보도록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초상에는 일이 갑작스러워 호조의 넓은 포(布)를 가져다 썼기 때문에 승수가 예경(禮經)과 같을 수 없었지만, 이미 선대왕(先大王)의 유교(遺敎)로써 상하(上下)의 복제(服制)를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기로 하였으니, 초상에는 비록 혹시 실례(失禮)를 하였더라도 연제를 지낼 때에는 마땅한 예문(禮文)에 기재된 승수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 송상기(宋相琦)는 말하기를,
"이번의 연사(練祀)를 지낼 때부터 시작해서 칠승포(七升布)로써 예문에 의거하여 사용함이 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8일 무자
소대(召對)를 행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강(講)하였다. 애초에 대사헌(大司憲) 이재(李縡)가 상소(上疏)하기를,
"왕위에 오르신 이래로 무릇 모든 시조(施措)가 위미(委靡)057) 하고 태예(怠豫)058) 하여 마침내 한 마디의 말, 한 가지의 일도 천심(天心)에 보답하고 백성의 기대를 위로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친히 제사 지내시는 일에 대해 간(諫)한 자들은 많았지만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여 중외(中外)의 근심과 답답함이 날로 심하던 차에 어제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는 조금 군하(群下)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성상의 하교가 아니었더라도 여러 신하들은 진실로 그것이 이와 같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전하께서 어찌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신의 근심은 오히려 감히 갑자기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대개 질병이 찾아오는 것은 성인(聖人)이라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와 자성(慈聖)을 위하여 마땅히 감히 스스로 몸을 가볍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나, 그 애통(哀慟)·참달(慘怛)이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은 억누르고자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배궤(拜跪)059) 할 즈음에는 능히 예(禮)대로 못하신다 하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첨전(瞻展)·곡읍(哭泣)의 예절이 있을 뿐인데, 개세(開歲)060) 이후로 오히려 한 번도 성배(省拜)하지 않았고, 크고 작은 제사(祭祀)에 걸핏하면 ‘제사 지내지 않은 것 같다.061) [如不祭]’는 탄식이 있습니다. 근력이 미치지 못함은 진실로 어찌할 수 없지마는, 마음에 숨긴다면 그것이 과연 스스로 편안하겠습니까? 전하의 전후 하교(下敎)는 번번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뜻이 있으므로, 양심(良心)이 진절(眞切)하고 착한 단서가 발현하여 샘물이 콸콸 솟아나고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기세가 있으니, 여기에 나아가 채워간다면 마땅히 현인(賢人)이 될 것입니다.
아!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효성스런 생각은 다함이 없는 것인데, 가는 것은 붙잡을 수 없어도 오는 것은 오히려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더구나 연제(練祭) 지내기 이전의 은전(殷奠)은 유독 이번 달 초하루가 있을 뿐인데, 침(鍼)을 맞으시는 것도 정지하시고, 다리 부위의 시리고 아픈 증세도 또한 조금 없어졌으니, 전하께서 이번에 전애(展哀)하지 않으신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지난번에 사향(四享)의 정식(定式)은 이미 사체(事體)와 예전(禮典)에 아주 어긋났는데, 전하께서 또 능히 그 말씀을 한 번도 실천하지 않으셨으니, 지금 와서 개도(改圖)한다면 일식(日食)·월식(月食)이 다시 복원(復圓)하는 것보다 더욱 빛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조속히 분명한 하교를 내리셔서 친히 삭전(朔奠)을 행하소서. 만약 혹시 배궤(拜跪)하기가 어려우시면 관천(祼薦)062) 의 한 절차는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대신 행하게 하시고, 지금부터 이후로는 향사(享祀)도 반드시 근력을 헤아려 거행하셔서 반드시 스스로 성상의 심정에 다하도록 하신다면, 중외(中外)의 마음을 크게 위로하고 신인(神人)의 희망을 영구히 매어 둘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혹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하시기를, ‘전일의 비망기(備忘記)가 충분히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였다.’ 하여 번번이 대신 행하게 할 뿐이고, 여러 신하들도 또 따라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위에서는 사람들의 간(諫)함을 막아버리고 아래에서는 군주의 허물을 이루어 주는 것이 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감히 함부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경계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서찰(恕祭)하소서.
군주는 구중 궁궐에 깊이 거처하니, 그 본원(本源)의 은미한 것을 쉽사리 엿보아 헤아리지 못할 것 같으나, 안에 있음으로 해서 밖으로 나타나는 바는 스스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조정(朝廷)에 나와 정사를 보실 적에 오로지 연묵(淵嘿)만을 숭상하시고, 무릇 시비(是非)·흑백(黑白)의 사이에 거의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는 것처럼 하시며, 크고 작은 정령(政令)을 일체 유유범범(悠悠泛泛)한 지경에 방치하여 마치 일개의 몸과 마음으로 더불어 서로 관섭(關涉)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아래에서 봉승(奉承)하는 자들도 안일에 젖어서 재물이나 탐내고 구차하게 시일(時日)을 보내며, 멍하니 마치 깊은 샘물 가운데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이와 같고서는 능히 나라를 다스리는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시험삼아 전사(前史)를 보소서. 어찌 일찍이 임어(臨御)한 초기에 한 해가 다가도록 한 번도 개강(開講)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승선(承宣)063) 이 입대(入對)하는 규정이 드디어 폐지되어 진현(進見)은 더욱 뜸해졌고, 전강(殿講)이나 친정(親政)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나, 느리게 하고 다급하게 할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빈청(賓廳)의 차대(次對)064) 는 나라의 중대한 일인데도 하전(廈氈)065) 의 우불(吁咈)이 하나의 ‘유(唯)’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하고서 그만둔다면 비록 하루에 세 번을 인접하는 부지런함도 또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거처해 팔짱을 끼고 계시면서 신료(臣僚)들을 드물게 접견하시니,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평소 친근(親近)하게 하는 자는 누구이며,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군주의 마음을 좀먹고 덕(德)을 잃게 함은 비단 성색(聲色)·치빙(馳騁)만이 그런 것이 아니며, 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면 족히 나라를 잃는 근저(根柢)가 되는 것이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아! 천재(天災)는 날마다 이르고, 인심(人心)은 날로 떠나가며, 사의(私意)는 날로 더욱 방자해지고, 의리(義理)는 날로 더욱 문란해지며, 기강(紀綱)은 날로 더욱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갑자기 망(亡)하는 데 이르지 않는 것은 다만 선왕(先王)의 덕택(德澤)이 사람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믿고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종전의 예태(豫怠)의 습관을 덕음(德音)을 깊이 발하여 엄격히 스스로 잘 질책하소서. 여러 신하들의 주장(奏章)에 이르러서는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성상의 비답(批答)도 가납(嘉納)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끝내 채용(採用)하였다는 실상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거의 ‘기뻐하면서도 근본을 추구(推究)하지 않고 따르면서도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에 가깝습니다. 지금 신의 진달하는 바는 삼가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의리’에 붙이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또 말씀하시기를, ‘유의(留意)하겠다.’고 할 뿐이라면 신은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체직(遞職)해서 해면(解免)해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세월이 덧없이 흘러 상기(祥期)가 어느덧 임박하였다. 애통(哀痛)한 가운데 경(卿)이 상소하여 진달한 것을 보니, 경계하여 가르친 것이 지극히 간절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므로, 내가 가납(嘉納)한다. 경의 말이 이와 같으므로 본직(本職)은 지금 우선 체직(遞職)을 허락한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들어오라."
하였다. 이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며 청명(淸名)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추천으로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고, 자리를 옮겨 시독(侍讀)에 이르렀으며,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받았다. 계사년066) 에 공경(公卿)들이 숙종(肅宗)에게 존호(尊號)를 올렸을 적에 이재가 ‘존호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북도(北道)의 평사(評事)가 되었다. 이미 돌아온 후에 그 어머니 민씨(閔氏)가 이재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가 이미 많아서 늙고 다른 자식이 없는데, 너는 왕사(王事)에 종사하니, 내가 밤낮으로 외롭게 집안에 있다. 너는 어째서 종양(終養)067) 한다고 진정(陳情)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재가 이로 말미암아 감히 종사(從仕)하지 못하고, 그 뒤에 균전사(均田使)가 되었을 적에도 굳이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성상 원년(元年)에 김일경(金一鏡)이 대대적으로 충량(忠良)한 사림들을 죽였는데, 이재의 중부(仲父) 이만성(李晩成)도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이재가 그의 어머니와 더불어 인제(麟蹄)의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유학(儒學)을 공부하며 힘써 실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이름이 당세(當世)에 높았고, 사방(四方)의 학자(學者)들이 스승으로 존경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윤6월 (0) | 2025.10.19 |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6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4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3월 (1) | 2025.10.18 |
| 경종수정실록2권, 경종 1년 1721년 2월 (0) | 2025.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