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갑오
대사간(大司諫) 김재로(金在魯)가 상소(上疏)하여 논하기를,
"상복(喪服)의 제도는 원래 상하(上下)·귀천(貴賤)의 차별이 없는데 친자(親子)의 상복은 ‘연(練)하지 않은 최복(衰服) 및 상(裳)을 개복(改服)한다.’고 하면서도 승수(升數)는 말하지 않았고,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복(服)은 단지 ‘최복 및 상을 개복(開服)한다.’고 말하고 승수와 ‘불련(不練)’ 두 글자를 모두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원래의 절목(節目)에서 애당초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현혹되게 한 것입니다."
하니, 예조(禮曹)에서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改付標)068) 하여 복계(覆啓)하였다.
1.‘전하(殿下)의 요질(腰至)은 갈(葛)을 사용하고 삼중사교(三重四絞)069) 로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김재로가 소론(疏論)하기를,
"숙마(熟麻)가 비록 《상례비요(喪禮備要)》에 나왔으나 이것은 비로 갈(葛)이 없을 경우 대용(代用)하는 물건이니, 진실로 마땅히 먼저 고례(古禮)를 말하고 뒤에 대신 사용하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비록 숙마(熟麻)를 대신 사용한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삼중사고(三重四股)070) 로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친자(親子) 및 백관(百官)의 상복에 있어 갈질(葛絰)을 기록하지 않고 곧바로 숙마 요질(熟麻腰絰)이라고 썼으며, 또한 삼중 사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땅히 숙마를 고쳐 갈로 하고, 또 삼중 사고와 갈이 없을 때 숙마를 사용한다는 등의 말을 주(註)에 달아야 하며, ‘교(絞)’자는 잘못된 것이니 마땅히 ‘고(股)’자로 고쳐야 합니다. 갈질(葛絰)을 치갈(治葛)을 사용할 것인가 생갈(生葛)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는 선유(先儒)의 의논이 각기 다른데, 예의(禮意)로써 헤아려볼 때 생갈에 비하여 조금 가벼우니, 치갈의 설(說)이 아마 옳을 듯합니다. 마땅히 상하(上下)의 상복에 ‘치(治)’자를 첨서(添書)해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改付褾)합니다만, 사교(四絞)의 ‘교(絞)’자는 예경(禮經)에 그렇게 나와 있고 전후(前後)의 등록(謄錄)에도 모두 이와 같으니, 그대로 두어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전하의 요질(腰絰)은 갈(葛)을 사용한다.’는 ‘갈(葛)’자 위에 ‘치(治)’자를 첨서(添書)하는 것은 친자복(親子服) 이하는 이미 숙마(熟麻)를 사용하니, 굳이 첨가하여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뒤에 김재로의 재차 상소로 인해 모두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하였다.
1.‘관영(冠纓)’에 대하여 김재로가 상소하기를,
"예경(禮經)에는 단지 ‘참최(斬衰)에 관(冠)은 승영(繩纓)으로 한다.’고만 하였으며, 원래 ‘연관(練冠)은 영(纓)을 바꾼다.’는 조문이 없습니다. 교대(絞帶)071) 는 연제(練祭)에 이르러 포(布)를 변경한다는 것도 또한 경문(經文)은 아닙니다. 단지 소주(疏註)의 설에 의거한다면 승영(繩纓)을 포영(布纓)으로 변경한다는 것이 족히 방조(旁照)072) 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布)를 연(練)하는 것은 대신(大臣)의 수의(收議)에서는 원래 거론하지 않았는데 절목(節目)에는 연포(練布)로 하였으니, 관(冠)을 이미 연(練)한다면 관(冠)에 부속된 것들도 아마 마땅히 모두 연(練)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관(冠)을 받히는 건(巾)에 있어서도 마땅히 관영(冠纓)으로 더불어 일례(一例)로 하여야 할 것 같은데 절목(節目)에는 원래 나오는 곳이 없으니, 마땅히 연(練)할 것인가의 여부(與否)를 명백하게 강정(講定)하여 연관(練冠)의 아래에 첨주(添註)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예조의 복계(覆啓)에는 소사에 따라 연포(練布)로 한다고 첨주(添註)하였다.
1.‘관(冠)의 승수(升數)’에 대해 김재로의 소(疏)에 이르기를,
"고례(古禮)에는 관포(冠布)의 승수(升數)가 최상(衰裳)에 비하여 조금 발이 가늘었습니다. 지금 비록 우변(虞變)의 일절(一節)이 없기는 하지만 소상(小祥)의 최상(衰裳)을 이미 칠승포(七升布)를 사용하니, 마땅히 연(練) 아래에 ‘팔승포를 쓴다[用八升布]’는 네 글자를 첨주(添註)해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단지 말하기를, ‘조금 발이 가는 생포(生布)로 한다.’ 하였지만, 전하의 관포(冠布)는 팔승포(八升布)로써 개부표(改付標)합니다."
하였다.
1.‘참최 교대(斬衰絞帶)’에 대해 김재로의 소(疏)에 이르기를,
"교대(絞帶)를 마(麻)를 변경하여 포(布)로 하는 것은 원래 《의례(儀禮)》의 경문(經文)이 아니고 바로 소가(疏家)의 설인데, 본문(本文)에는 연(練)을 사용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최상(衰裳)을 연(練)하지 않는다면 대(帶)도 연(練)하지 않는 것이 옳은 듯한데, 절목(節目) 가운데는 ‘연포대(練布帶)’로 되었으니, 아마 마땅히 강정(講定)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포대(布帶)를 연(練)을 사용하는 것은 경자년073) 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헌의(獻議)로 인하여 그렇게 시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뒤 을묘년074) 에도 준용(遵用)하였으니, 지금 변개(變改)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다시 상소하기를,
"고례(古禮)에는 단지 연관(練冠)·연포의(練布衣)만 말하였고, 소가(疏家)에 ‘교대(絞帶)를 마(麻)를 변경하여 포(布)를 착용한다.’는 설이 있으나 원래 연(練)을 사용한다는 조문은 없습니다. 도식(圖式)에도 단지 말하기를, ‘마(麻)를 변경하여 포(布)를 착용하는데 칠승포(七升布)로써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만일 최상(衰裳)을 모두 연(練)한다면 대(帶)도 따라서 연(練)하는 것이 오히려 옳겠지만, 최상(衰裳)을 이미 연(練)하지 않는데 유독 그 대(帶)만을 연(練)한다는 것은 아마 예의(禮意)가 아닐 듯합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헌의에도 이르기를, ‘연시(練時)에 요질(腰絰)을 이미 고례(古禮)를 따라 갈(葛)을 사용한다면 교대(絞帶)도 마땅히 연포(練布)를 사용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 글의 본의(本意)는 단지 숙마(熟麻)로 만든 교대(絞帶)가 예(禮)에 어긋났음을 언급하여, 마땅히 고례(古禮)를 따라 변경하여 포대(布帶)를 착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며, 애당초 연(練)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니한가를 인하여 발설한 것은 아닙니다. 이 일단(一段)은 《상례비요(喪禮備要)》에 근본한 것인데, 《상례비요》에는 ‘연(練)’자가 없습니다. 선정(先正)이 한 ‘연(練)’자를 썼던 것은 신은 그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와 군신(群臣)들은 다만 그 관(冠)만을 연(練)하고 대비전(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은 다만 그 대(帶)만을 연(練)하면서 정복(正服)은 모두 연(練)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머리와 허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복(外服)의 관(冠)과 대(帶)를 모두 연(練)하는 것은 여기에 어긋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널리 물어서 강정(講定)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覆啓)하기를,
"경자년 연제(練祭)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보니,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의 헌의(獻議)에 따라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수의(收議)하여 절목 가운데 부표(付標)를 하였습니다. 선정(先正)이 말한 바가 이미 이와 같고 전후(前後)의 국제(國制)에도 다 준용(遵用)하였으니, 청컨대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1.‘왕대비전(王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은 요대(腰帶)를 제거하고 연(練)하지 않은 최복(衰服) 및 상(裳)을 바꾸어 입는데 대공(大功) 칠승포(七升布)를 사용하고 백대수 장군(白大袖長裙)은 연포(練布)를 사용하며, 연포(練布)로 만든 개두(蓋頭)·두수(頭𢄼) 및 대(帶)를 착용한다.’는 대목에 대해 김재로의 소(疏)에 이르기를,
"이미 ‘연(練)하지 않은 최복(衰服) 및 상(裳)을 바꾸어 입는다.’고 말하고, 또 말하기를, ‘백포 대수 장군(白布大袖長裙)을 착용한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대수 장군(大袖長裙)’이란 바로 성복(成服)의 최상(衰裳)인데, 모르긴 하지만 연제(練除)075) 때에 대수 장군 이외에 따로 성복(成服) 때에 없었던 최상(衰裳)이 있는 것입니까? 이미 ‘백포(白布)’라 하고 혹은 ‘연포(練布)’라 하였으니, 모두 마땅히 상세히 살펴서 개정(改布)해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오례의》에 ‘졸곡(卒哭) 후에 백포 대수 장군을 착용한다.’ 하였는데, 지난해에 초상(初喪) 절목을 마련할 때에 졸곡(卒哭)은 이미 변제(變除)076) 의 절차가 없기 때문에 이 조문을 연제(練祭)의 아래에다 옮겨서 적용하였습니다. 이번의 절목은 한결같이 지난해에 마련한 절목을 준용하여 연(練)하지 않은 최복과 백포 대수 장군을 혼동(混同)하여 마련하였습니다. 소주(小註)에 ‘연포(練布)를 사용한다.’고 한 것은 또 백포(白布)와는 각각 다르니,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改付標)합니다."
하였다.
1. 제시(祭時)의 절목(節目) 중에서 ‘대비전(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은 악차(幄次)에 나아가 요대(腰帶)를 제거하고 연(練)하지 않은 최복(衰服) 및 대(帶)를 바꾸어 입어 연포(練布)의 개두(蓋頭)·두수(頭𢄼), 연장군(練長裙)을 착용하며, 내명부(內命婦) 및 빈(嬪) 이하도 동일하다.’고 한 대목에 대해 김재로의 소(疏)에 이르기를,
"이것은 변제(變除)의 절목과 서로 어긋납니다. ‘불련 최복(不練衰服)’이라는 것 밑에는 ‘상(裳)’이 있는데 여기에는 없고, 원절목(元節目)에는 대수(大袖)가 있는데 여기에는 없으며, 원절목 안에는 대(帶)를 연(練)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불련 포대(不練布帶)’라고 되어 있으니, 개정(改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예조에서 복계하기를,
"이것은 갑인년077) 연제(練祭) 때의 절목을 준용(遵用)한 것으로서 갑인년(甲寅年) 등록(謄錄)의 소루(踈漏)한 결과인 듯합니다. 이제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改付標)하되, 연포(練布)로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1.‘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생도(生徒)·갑사(甲士)·정병(正兵)은 백립(白笠)·백의(白衣)·포대(布帶)를 착용한다.’는 대목에 대해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이른바 포대(布帶)라는 것도 마땅히 생포(生布)·연포(練布)·백포(白布)의 구별은 분명히 말하여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연포(練布)로써 개부표하여 복계하였다.
1.‘종친(宗親)·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불련 최복(不練衰服)으로 바꾸어 입는다.’는 대목에 대해 김재로의 소에 이르기를,
"파산관(罷散官)이나 전함(前銜) 당하관(堂下官) 조항과 궐내(闕內)의 입직(入直) 제관(諸官)의 조항에는 ‘연복(練服)으로 바꾸어 입는다.’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글을 생략하여 간략함을 따른 결과입니다. 두 조항은 모두 마땅히 개부표(改付標)해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소사(疏辭)에 따라 개부표하여 복계하였다. 김재로의 상소에 또 이르기를,
"교대(絞帶)를 이미 변경하여 포대(布帶)로 한다면 연제(練祭) 후에 상복(常服)의 대(帶)도 저절로 마땅히 포(布)를 사용해야 합니다. 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의 시위 장사(侍衞將士)도 차이가 없을 듯한데, 절목(節目)에 백천익(白天翼)·숙마 세대(熟麻細帶)로 되어 있습니다. 시위신(侍衞臣)만 유독 숙마 세대를 사용하는 것은 어떤 의논에 의거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마땅히 다시 강정(講定)해야 합니다."
하니, 예조에서 포대(布帶)를 써야 한다고 복계하였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기를,
"《의례(儀禮)》의 소(疏)에 이르기를, ‘소상(小祥)에는 연관(練冠)과 연중의(練中衣)를 착용하기 때문에 연(練)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상복(喪服)의 마땅히 연(練)해야 하는 것은 이것에 그치는 듯합니다. 대(帶) 같은 것은 이것이 정복(正服)에 연계된 것이니, 아마도 중의(中衣)와 함께 연(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고례(古禮)에는 졸곡(卒哭)에 상복을 입을 때에 대(帶)를 이미 마(麻)를 변경하여 포대(布帶)를 착용하였고, 소상(小祥)에 이르러서는 별도로 재차 변경하여 연(練)으로 한다는 조문이 없기 때문에 연복도(練服圖)에도 교대(絞帶)를 말한 것이 상세하지 않습니다. 옛적에 졸곡(卒哭)에 상복을 입는 예절을 지금은 소상(小祥)에 시행하니, 대(帶)의 마(麻)로 변경한 것은 이미 종길(從吉)078) 의 의미가 있는 것이 됩니다. 어찌 반드시 다시 그 대(帶)를 연(練)한 뒤에야 변제(變除)가 되겠습니까? 최씨(崔氏)의 변제(變除)의 설(說)에도 단지 ‘참최(斬衰) 13개월 만에 연(練)한다.’고 하였는데, 포대(布帶)일 따름이며, 또한 그 ‘반드시 연포(練布)로 대(帶)를 만들어야 된다.’고는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포대(布帶)를 마땅히 연(練)해야 한다는 것은 마침내 분명한 증거가 없습니다. 만약 경솔하게 고쳐서 혹시 실수라도 한다면 전의(傳疑)079) 의 득(得)이 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지금 이 변제(變除)할 때의 포대(布帶)의 일절(一節)은 예서(禮書)에 실려 있지만 연(練)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중의(中衣)와 관질(冠絰) 외에는 다 정복(正服)을 변경하지 않는다는 의리를 따라서 그런 것일까요? 다만 경자년080) 에 의논을 드렸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송준길(宋浚吉)이 이미 연포(練布)를 말하였는데, 그때에 여러 유현(儒賢)들이 조정(朝廷)에 있었지만 다른 의논을 듣지 못하였으며, 갑인년081) 국휼(國恤)에도 이 예(禮)를 사용하였으니, 이로부터 바로 조가(朝家)의 정제(定制)가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고례(古禮)의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이의를 제기하려 하는 것은 혹시 정제(定制)를 준용(遵用)하여 그다지 과차(過差)가 없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성상(聖上)께서 널리 문의하고 살펴서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권상하(權尙夏)는 의논하기를,
"관(冠)을 연포(練布)를 사용한다면 교대(絞帶)도 연(練)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습니다. 요질(腰絰)을 숙갈(熟葛)이나 혹 숙마(熟麻)를 사용한다면 교대(絞帶)는 바로 질(絰)을 받드는 물건이니, 연(練)을 쓴다고 해서 또한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문정공(文正公) 신(臣) 송준길(宋浚吉)은 신의 스승입니다. 그가 경자년에 의논을 드렸을 때 교대(絞帶)는 이미 연포(練布)로써 정론(定論)으로 삼았습니다. 이미 스승의 말씀이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이를 어기고서 시론(時論)에 굽혀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전(前) 승지(承旨) 김간(金榦)은 말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상례도식(喪禮圖式)》에 말하기를, ‘교대(絞帶)는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 마(麻)를 바꾸어 포(布)를 착용하는데, 칠승포(七升布)로 한다.’ 하였습니다. 또 살펴보건대 《의례(儀禮)》의 상복 참최장(喪服斬衰章) 전(傳)에 이르기를, ‘관(冠)은 6승(六升)으로 하는데 단(鍛)하고 회(灰)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 소(疏)에, ‘단(鍛)하고 회(灰)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로 세탁(洗濯)만 하고 회색(灰色)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며, 6승(六升)을 회색을 쓰지 않는다면 7승(七升) 이상은 본디 회색을 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살펴보건대 《예기(禮記)》 간전(間傳)에 이르기를, ‘참최(斬衰)에 이미 우제(虞祭)를 지내고 졸곡(卒哭)이 지나면 관(冠)은 7승(七升)으로 한다.’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설(說)로써 살펴본다면, 우제(虞祭)를 지낸 뒤의 교대(絞帶)와 우제를 지낸 뒤의 관포(冠布)는 모두 7승포(七升布)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7승포로 한다고 한다면 바로 소가(疏家)의 ‘7승(七升) 이상은 본디 회색을 사용한다.’는 설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고회(故灰)’라는 것은 연(練)의 종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른바 대공 7승포(大功七升布)라는 것은 참최장(斬衰章) 소(疏)의, ‘7승 이상은 회색을 사용한다.’는 것이나, 대공장(大功章) 주(註)의 ‘대공(大功)에는 단치(鍛治)한다.’는 것이나, 또는 소(疏)의 ‘단치(鍛治)에는 회색을 첨가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나, 《예기(禮記)》 복문(服問)의 ‘이미 연(練)하였으면 공최(功衰)를 착용한다.’는 것이나, 장자(張子)의 ‘대공포(大功布)를 단련(鍛鍊)하여 의(衣)를 만든다.’는 것이나, 주자(朱子)의 ‘대공포(大功布)는 누운 것[熟]을 사용한다.’는 등의 설로써 합하여 살펴본다면, 대공 7승(大功七升)의 연포(練布)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이미 대공 7승이라 말하였다면, 연(練)은 스스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신이 또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경자년에 헌의(獻議)한 것을 보니, 그의 말에 ‘교대(絞帶)는 포(布)의 연(練)한 것을 쓴다.’고 한 것이 명백할 뿐이 아닙니다. 신의 스승인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도 연(練)을 사용하는 것을 옳게 여겨 지구(知舊) 사이의 문답(問答)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니, 두 분 선정(先正)께서 여기에 어찌 소견(所見)이 없으면서 말하였겠습니까? 대저 연제(練除)의 복(服)은 점차로 강쇄(降殺)하면서 가벼움을 사용하여 가식(加飾)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초상(初喪)의 마질(麻絰)을 연제(練祭)에 이르러서는 갈(葛)로 바꾸는 것인데, 그 갈을 이미 치갈(治葛)을 사용하였다면, 초상(初喪)의 마교(麻絞)는 연제(練除)에 이르러서는 포(布)로 바꾸되 그 베는 연포(練布)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연(練)을 사용한다.’는 설(說)이 이미 십분(十分) 명백하지 못하고, ‘연(練)으로 하지 않는다.’는 설도 또 명백하게 증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뜻대로 행하여 준식(準式)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연(練)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기》의 간전(間傳)과 주·소(註疏)의 여러 설과 도식(圖式) 및 선정(先正)의 설이 족히 증거가 될 만하고, 이른바 ‘연(練)하지 않는다.’는 것은 금번에 ‘최상(衰裳)의 제도를 고침에 있어 연(練)하지 않는다.’는 설로 인하여 교대(絞帶)에 추급(推及)한 것에 불과한 듯합니다. 이것에 의거한다면 그 연(練)할 것인가 연(練)하지 않을 것인가에 있어 아마도 취사(取舍)의 분간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판부사(判府事) 권상하(權尙夏)의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6월 8일 무술
유성(流星)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왔다.
6월 12일 임인
황해도(黃海道) 용매진(龍媒鎭)의 서해변(西海邊)에서 암석(巖石)이 불쑥 일어나 저절로 섰다.
6월 25일 을묘
황랍(黃蠟) 2백 근을 올릴 것을 명하였다가,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이 간(諫)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민진원이 아뢰기를,
"대내(大內)로부터 황랍 2백 근을 들여보내라고 명하였고, 또 2월부터 매달 첩금(帖金)을 올리라고 명하셨습니다. 항간에서는 혹은 ‘불상(佛像)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혹 ‘화룡촉(畫龍燭)을 제작하는데, 전체를 도금(塗金)으로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불상을 만든다.’는 설은 진실로 사리에 가깝지 않지만, 3년 안의 제향(祭享)에 있어서는 마땅히 살아 계셨던 때를 본떠야 하는 것으로, 선왕(先王)의 검소하신 덕(德)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셨는데, 지금 만약 금촉(金燭)으로 사용하신다면 실로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는 것과 같이한다.’는 예(禮)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의 형편이 몹시 곤궁하니, 성상께서 마땅히 비용을 아끼려는 생각을 가지시고, 제향(祭享)의 모든 절차를 한결같이 기해년082) ·갑인년083) 의 두 등록(謄錄)대로 따라 하여 혹시라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6월 28일 무오
임금이 장차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기도를 행하려 하였는데, 하루 종일 비가 내리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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