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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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기묘

경기(京畿)의 유학(幼學) 김홍석(金弘錫) 등이 소장을 올렸는데, 대략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살아서는 뜻을 같이했고 죽어서는 함께 전하여 오고 있으니, 그분들의 입론(立論)은 참으로 백세(百世)토록 바뀌지 않을 정론(正論)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잘것없는 후생(後生)이 한편으로 찬양하거나 한편으로 억제하면서 사사로이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송시열(宋時烈)은 겉으로 학문한다는 이름을 빌어 입으로는 이이·성혼의 도(道)를 외면서 세상을 속이고 발신(發身)할 계책으로 삼았으므로, 그때 대소(大小) 문자(文字)가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는데, 그가 성혼을 포양(褒揚)함에 있어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현신(賢臣)의 연보(年譜)와 서문(序文)도 또한 그가 찬술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 부자(父子)와 흔단이 생긴 뒤부터는 성혼이 윤선거의 외조(外祖)라는 것으로 공공연히 성혼에게 노여움을 옮겨 서간(書簡)에도 왕왕 은미하게 폄(貶)하는 뜻을 간략히 보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성혼의 후손인 고(故) 현령(縣令) 성지선(成至善)에 이르러서는 윤선거의 고제(高弟)로서 동문(同門)인 고(故) 장령(掌令) 나양좌(羅良佐) 등과 함께 사문(師門)의 무함에 대해 소장을 올려 변해(辨解)했다는 것 때문에 노여움을 대발하여 그의 문도(門徒)인 이희조(李喜朝)의 답서(答書)에다 공공연히 멋대로 무욕(誣辱)을 가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론(士論)이 일제히 분노를 터뜨려 변해하는 소장이 발하게 되자 그가 먼저 소장을 올려 거짓으로 스스로 해명하였습니다. 또 갑오년071)  에 주본(奏本)을 논한 일을 억지로 화의(和議)라고 창출(創出)하고서는 또한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가탁하여 일컫기를, ‘임진년072)   이후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지 않다.’고 하고서 끝에 가서는 자신의 말로 결론짓기를,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선사(先師)께서도 우계(牛溪)073)  의 일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주본(奏本)에 대한 것이 원래 화의가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겠습니다.
고양겸(顧養謙)이 당시 대권(大權)을 쥐고 있으면서 고하(高下)를 마음대로 조종했는데, 크게는 정절(旌節)을 변역(變易)시켜 유정(劉綎)을 불러들일 수 있고 작게는 주청(奏請)을 저지하여 막으면서 관문(關門)을 닫고 통과시키지 않음으로써 위기(危機)가 잇따라 닥치는 상황이었으니, 이런 때에 그와 서로 맞서서 항쟁하면서 국가의 존망을 도외시하고 방치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부득이 그의 말을 억지로라도 따라 그의 노여움을 풀게 함으로써 시들어 없어져가는 국명(國命)을 보존시켜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선조(宣祖)께서 호택(胡澤)을 인접(引接)했을 적에 부득이 그의 청을 따르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성혼이 주본(奏本)의 대지(大旨)에 대해 하문(下問)할 때를 당하여 대답하기를, ‘고총독(顧摠督)이 우리 나라로 하여금 왜국(倭國)의 봉공(封貢)을 청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의(義)에 있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의 협박 때문에 상주(上奏)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진청(陳請)하기를, 「소방(小邦)은 왜노(倭奴)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가 된 사이여서 죽는 한이 있어도 차마 화친(和親)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 그들을 용납하여 속국(屬國)을 만들고 소방(小邦)으로 하여금 원수를 잊고 원망을 푸는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가운데 급박한 위기를 완화시켜 준다면 그 또한 천조에서 내려 준 은혜입니다.」 하는 내용으로 말을 만든다면 의에 있어 어긋나는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이것이 진대(進對)했을 적의 대략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김장생이 성혼을 높이고 사모한 것이 문제자(門弟子)074)  에 못지않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함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속에 의심나는 점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성혼의 생전에 질의(質疑)하지 않고서 뒤에 와서 문제삼는 말을 만들어 은밀히 송시열에게 전수(傳授)하여 선현(先賢)을 무함할 구실이 될 자료를 만들어 줄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성혼의 묘표(墓表)를 찬술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행동 거지(行動擧止)를 반드시 의리에 따라서 함에 평탄하거나 험난하다고 하여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출처(出處)의 올바름을 지킨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다.’ 하였고, 결론을 짓기를, ‘김집(金集)이 일찍이 문하에 나아가 배웠었고 또 부사(父師)를 인하여 출처와 언행에 대해 익히 들었다.’고 했습니다. 김장생이 만일 주본에 대해 의논한 일을 화의(和義)라고 여겨 헐뜯어 비난했다면, 김집이 어찌하여 부사(父師)를 통하여 익히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찬양했겠으며, 홀로 송시열만이 헐뜯어 비난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아! 남이 자신을 그르다고 하는 데 대한 노여움으로 남의 선조(先祖)를 이처럼 극심하게 무함하였는가 하면, 이어 성혼의 아들인 증(贈) 판서(判書) 성문준(成文濬)까지 싸잡아 무욕(誣辱)을 가하기를, ‘파문(坡門)075)  의 제공(諸公)들이 자못 정인홍(鄭仁弘)에게 붙어서 오로지 송강(松江)076)  를 헐뜯었다.’고 했습니다. 성문준의 순순(醇純)한 성품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고 성경(誠敬)의 학문은 가정(家庭)에서 배운 것이니, 인조(仁祖)께서 듣고 발탁했다는 비지(批旨)는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는 것이요, 성혼이 효우(孝友)스러움을 칭한 것은 아들이 아는 것이 아비만한 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어짊이 이와 같은데 정인홍에게 붙는 짓을 하겠습니까?
기축년077)   역옥(逆獄) 때 정철(鄭徹)이 위관(委官)이었는데, 최영경(崔永慶)이 갑자기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나와 국옥(鞫獄)에 연계되기에 이르렀을 적에 정철이 실지로 구해(救解)하여 면하게 해주었었습니다. 다시 국옥에 연계되었을 적에는 정철이 이미 국옥에서 체면(遞免)되었을 때였습니다. 이미 위관에서 체면되었는데도 최영경을 죄에 얽어넣어 살해했다는 것으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어 정철의 죄를 날조한 것도 이미 너무도 사실과는 근사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더구나 계속 산야(山野)에 있었던 성혼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단지 정철과 좋은 교우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이유로 정인홍이 자신의 문도(門徒)들을 사주하여 도리어 정철을 무함하는 죄목으로 삼고 또 성혼까지 무함하여 화(禍)가 지하(地下)에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성문준은 성혼의 아들로서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이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무신년078)  에 성혼의 문인인 신응구(申應榘)가 스승을 위하여 신변(伸辨)하면서 겸하여 정철은 결단코 군자임을 말하고 그가 무함받은 것에 대해 송변(訟辨)했는데, 그 과정에서 조그만 잘못에 대해 성혼이 이이를 위해 변해(辨解)하면서 그의 경솔한 점을 숨기지 않았던 것과 같게 대략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 전해지고 두 번 전하여 감에 따라 자꾸만 사실과 어긋나게 되었으므로, 정철의 아들인 고(故) 참판(參判) 정홍명(鄭弘溟)이 고(故) 참판 이명준(李命俊)에게 보낸 서한(書翰)에 지나치게 의심하여 서로 탓하는 이야기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문준의 심사(心事)가 진실하여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이르러서는 오래 된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고 교의(交誼)도 쇠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홍명의 조카인 고(故) 장령(掌令) 정양(鄭瀁)이 그의 문집(文集)을 수집하여 그 서한을 산삭(珊削)하고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그때의 설화(說話)에 잘못된 것이 많았던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고(故)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도 또한 부방(浮謗)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성문준이 신응구의 소장을 중지시키지 못한 것을 그르다고 했었는데, 이를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지나치게 했기 때문에 성문준이 글을 지어 스스로 변해한 것이 매우 명백하였고 이것이 문집에 환히 실려 있으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아! 김창협(金昌協)은 곧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인데, 자기 할아비가 성혼을 우러러본 뜻을 잊은 채 송시열의 여론(餘論)에 부합(附合)하여 망령되이 의논(議論)을 가하면서 여탈(與奪)을 임의로 하여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 삼현(三賢)의 도덕을 열거하여 기록하고서 찬미했는데, 유독 성혼에 대해서만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조종(操縱)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의 말이 성혼의 도덕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의 용심(用心)이 외람되고 패려스러운 데 대해서는 통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할아비인 김상헌이 묘표(墓表)를 지으면서 ‘평소 늘 마음을 단속하고 절제가 있었기 때문에 언행(言行)이 모두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고 운운(云云)했는데, 손자인 제가 감히 이렇게 비방하여 헐듣었으니, 할아비를 배반하고 선현을 업신여긴 죄를 이루 다 주토(誅討)할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과 김창협의 문집이 모두 간행되어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속히 송시열과 김창협의 직명(職名)을 추탈(追奪)할 것을 명하고, 또 성문준을 성혼의 파산 서원(坡山書院)에 추배(追配)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5월 2일 경진

이교악(李喬岳)을 동래부(東萊府)에 찬배(竄配)하였다.

 

5월 8일 병술

청(淸)나라의 사신(使臣)이 경성(京城)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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