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계축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의 소장(疏章)에 대한 비답(批答)을 내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문형(文衡)068) 에 결원(缺員)이 났었는데 전 대제학(大提學) 강현(姜鋧)이 그 추천을 주관하면서 뜻을 맞추기 위해 김일경을 수망(首望)으로 올렸었다. 권점(圈點)을 할 때에 이르러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점수(點數)가 그와 대등하게 되자, 그때의 상신(相臣)이 직급(職級)의 순서에 따라 등제(等第)를 매겼는데, 고례(古例)가 아니었다. 이는 김일경을 앞에 둔 것을 미워해서였던 것으로, 김일경은 이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 뒤 정수기(鄭壽期)가 강현(姜鋧)을 탄핵했는데, 김일경이 이사상(李師尙)에게 답한 서한에서 말하기를,
"강(姜) 대감이 문형(文衡)의 천망(薦望)을 주관하면서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게 한 것을 인하여 병조(兵曹)·형조(刑曹)의 두 대감이 정수기를 사주하여 논핵하게 하였습니다."
했는데, 강 대감은 강현(姜鋧)을 가리킨 것이고 두 대감은 이광좌와 조태억을 가리킨 것이다. 이 서한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되자 여기에 해당된 사람들은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이광좌가 체직되고 조태억이 대신하기에 이르러서는 결국 그 일이 발론되었고. 정수기도 또한 소장을 올려 변해(辨解)하였다. 대사간 김동필(金東弼)이 소장을 올려 김일경을 공척(攻斥)하였고, 또 그가 말을 만들어 배알(排軋)한 정상에 대해 논하자, 김일경이 드디어 대변(對辨)하기를,
"신은 지극히 어리석어 자신을 위한 계모(計謀)는 돌아보지 않고 망령되이 임금의 원수는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되고 국가의 역적은 반드시 주참(誅斬)해야 한다고 여겨 삼가 종사(宗社)를 부지하여 편안하게 할 것만을 기약한 채 거실(巨室)069) 들에게 죄를 얻게 되는 것은 생각지도 않으면서 어두운 밤길을 더듬거리듯이 해 온 지 1주년이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화(禍)가 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중신(重臣)의 소장이 한 번 나오자 좌우(左右)에서 교대로 공격하여 죄를 성토한 것이 낭자했습니다. 아! 교문(敎文)을 지어 바친 것은 신의 임무가 아니었습니다만, 마침 태학사(太學士)가 고병(告病) 중에 있었고 예원(藝苑)도 소명(召命)을 어긴 차에 신이 소패(召牌)를 받들어 예궐(詣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때가 마침 저물녁이었는데 야밤에 빈청(賓廳)에서 창졸간에 응제(應製)하노라니 거칠고 난삽하게 되어 스스로도 부끄럽고 놀라웠습니다. 구어(句語)의 출처와 자획(字畫)의 방변(傍邊)을 창황하여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자 좌중(座中)에 있던 제우(儕友)가 간혹 지도(指導)하여 주기도 했는데, 그날의 사실은 이와 같은 데에 불과합니다. 신을 논하면서 이른바 다른 말을 삽입하였고 인유(引喩)가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 데 대해서는 신이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짓는 사람은 무심히 써낸 것인데 보는 사람은 유심히 보고 집어낸다면 융설(瀜洩)이란 말을 모후(母后)에 대해 인용하고 거간(拒諫)이란 말을 군부(君父)에 대해 인용할 경우 모두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계교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어느 날 이사상이 신에게 서한(書翰)을 보내어 말하기를, ‘정수기의 두 번째 소장에서 「강현(姜鋧)이 문형(文衡)에서 낙천(落薦)된 사람을 어찌하여 문형의 천망(薦望)에 올릴 수 있습니까?」 했는데,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는데, 이럴 즈음에 풍문에 전해 들은 말이 있어 과연 붓가는 대로 써서 답하였습니다. 전해 들은 말을 경박하게 믿은 것은 실로 경솔한 데 관계되는 것이니, 어떻게 그 책임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상과는 정의(情意)가 형제와 같아 서신을 왕복하는 사이에 우연히 번전(翻傳)된 것이 신의 큰 죄안(罪案)이 되어 소장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신은 이것이 사체(事體)와 도리에 있어 과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궁구하여 보면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김동필이 또 ‘논의가 사리에 어긋나고 과장되었으며 공격을 멋대로 자행하는 것이 오로지 신에게서 연유되었다.’고 했는데, 신이 헌직(憲職)에 있으면서 토역(討逆)한 이외에 달리 공격하거나 탄핵한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격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연소(年少)한 신진(新進)들이 대각(臺閣)에서 논의한 것을 가지고 신이 혹 참여하여 듣고서 주장한 것인가고 의심하는 것인가 봅니다. 장임(將任)이 걸맞지 않는다는 데 이르러서는 신도 또한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건물을 짓는 단서가 많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곡절이 있는 것으로, 다만 신의 집 후원(後園)에다 터를 닦고 재목을 영구(營求)해다가 두어 칸의 사우(祠宇)를 건립한 적이 있는데, 이것으로 신을 죄준다면 신이 어떻게 감히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의 두 번째 소장에서는 신을 비난한 것이 매우 급박했는데, 신의 구대(口對)와 진소(陳疏)는 대부분 이삼석(李三錫)의 공사(供辭)에 의해 거론한 것이었습니다. 애석하게도 함원군은 어찌하여 불러다 곡절을 물어 본 뒤에 즉시 변진(辨陳)하지 않고서 끝내는 신에게로 노여움을 돌려 집에서 난 노여움을 시장에 가서 푸는 형국을 만들었으니, 어찌 횡액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그의 말이 옳았습니다만, 분명한 하교(下敎)를 내려 성충(聖衷)의 의도를 쾌히 보였는데도 함원군은 신이 억지로 결정했다고 하니, 이 또한 어찌된 일입니까? 더구나 품백(稟白)하여 윤허를 받은 일을 전지(傳旨)로 써 내는 것은 오늘날 처음 있는 일이 아닌데, 일찍이 정원(政院)의 당랑(堂郞)070) 을 지낸 국구(國舅)가 어찌 갑자기 잊어버리고 신의 죄라고 공척(攻斥)하면서 멋대로 행했다고 하기에 이른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삭직(削職)을 명하시어 물러가 어리석은 분수를 지키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것이 지난 겨울이었는데, 오래도록 답보(答報)가 없다가 대신과 연신(筵臣)이 누차 말을 하였으므로, 이제야 비로소 하답이 있게 된 것이다.
4월 27일 병자
청(淸)나라의 정사(正使)인 내각 학사 예부 시랑(內閣學士禮部侍郞) 상보(常保)와 부사(副使)인 두등 시위 이도(頭等侍衞伊都) 액진명(額眞明)이 서울에 들어왔다.
4월 28일 정축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조성복은 양주(楊州) 풍양(豐壤) 사람이다. 임금이 병이 있어 후사(後嗣)가 없자 대신(大臣)들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어 왕세제(王世弟)를 책립(冊立)하였는데, 조성복이 소장을 올려 저군(儲君)을 위하여 학문에 힘쓰게 하는 방도를 논하고, 이어 신료(臣僚)들을 인접(引接)하고 서무(庶務)를 재결(裁決)할 적마다 세제(世弟)로 하여금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참청(參聽)하게 함으로써 일에 따라 훈도(訓導)하는 바탕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소장이 들어간 지 4일 만에야 비답(批答)이 내렸는데, 유의(留意)하겠다는 하교가 있었다. 그날 밤에 이어 하교하기를,
"나에게 괴기한 병이 있어 정사(政事)에 침체된 것이 많으니, 크고 작은 국사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
하였으나, 곧 제신(諸臣)들의 쟁집(爭執)을 인하여 드디어 도로 중지되었다. 이어 조성복은 파직되었고 진도군(珍島郡)에 안치(安置)되었다. 다음해 봄에 목호룡(睦虎龍)이 변서(變書)를 올렸는데, 세제에게 무핍(誣逼)을 가하였고, 이를 인하여 큰 옥사를 일으켜 사대신(四大臣)을 살해하였다. 조성복도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혹독한 형신(刑訊)을 가하자, 조성복이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나의 말이 당일에 시행되었더라면 박상검(朴尙儉)의 변(變)과 목호룡의 무함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야 나의 말이 충언(忠言)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도리어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뜨려 기필코 죽이고야 말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그때 마침 날씨 크게 가뭄이 들자, 최석항(崔錫恒)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에게 형신(刑訊)을 가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역옥(逆獄)과는 다르니 도로 정배(定配)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의현(旌義縣)으로 개찬(改竄)했는데, 6월달에 바다를 건너 배소(配所)로 갔다. 그런데 흉당(凶黨)들이 또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10월달에 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다. 누차 형신을 가하여 드디어 옥에서 죽으니, 당시의 나이가 4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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