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계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우항(金宇杭)이 졸(卒)하였다. 김우항의 자(字)는 제중(濟仲)이다. 신유년018) 에 명경과(明經科)에 을과(乙科)019) 로 합격하였다. 근칙(謹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재능이 없었으나 숙종의 알아줌을 받아 우상(右相)에 제배(除拜)되기에 이르렀다. 금상(今上)020) 신축년021) 에 박상검(朴尙儉)의 일이 발각되자 소장을 올려 주토(誅討)가 엄하지 못한 것을 논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했는데, 나이 75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위차(位次)를 만들고 거애(擧哀)하였으며, 3일 동안 철조(輟朝)022) 하였다.
증광 전시(增廣殿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文科)에 박사수(朴師洙) 등 41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 이진룡(李震龍) 등 1백 16인을 뽑았다.
3월 10일 기축
지평(持平) 이보욱(李普昱)이 소장을 올려 녹훈(錄勳)한 일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이 책훈(策勳)은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처음에는 국구(國舅)를 추대했다가 그가 굳게 사양하자 따라 주었고, 또 두 포장(捕將)에게 돌렸다가는 다시 대계(臺啓)를 윤허하였습니다. 금방 결정했다가는 금방 파기해 버림으로써 사체(事體)만 손상시키고, 동쪽을 지적했다가는 다시 서쪽을 추대함으로써 끝내 정박(定泊)될 데가 없게 되자, 끝에 가서는 단훈(單勳)으로 감정(勘定)하여 맹제(盟祭)023) 가 박두했습니다. 국조(國朝) 3백 년 동안 역옥(逆獄)이 발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만, 일찍이 고변한 자가 원훈(元勳)이 된 전례는 없었으니, 단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것으로도 이미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훈(勳)’이라는 한 글자를 몸을 더럽히는 물건처럼 피하면서 사체의 구차스러움은 돌아보지 않은 채 기필코 엉성하게 미봉(彌縫)하려고 하니, 신은 실로 개연(慨然)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大臣)024) 이 노영손(盧永孫)을 전례로 든 것025) 으로 인하여 그렇게 했습니다만, 옥사(獄事)의 대소(大小)가 이미 피차에 다르고 또 녹훈(錄勳)한 것도 자그마치 40여 인이나 되었었는데, 세월이 오랜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삭훈(削勳)시켰던 까닭에 노영손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단훈(單勳)의 전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한 것 이외에는 다시 먼저 기미를 살핀 공이 있는 이가 없으니, 역적들을 신문(訊問)하여 흉모의 절차를 끝까지 추구하여 국가를 태산(泰山) 반석처럼 편안하게 해 놓은 사람이 어찌 오늘날 녹훈할 만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선조조(宣祖朝)의 기축 옥사(己丑獄事)026) 때는 위관(委官) 이하가 모두 상신(相臣) 정철(鄭澈) 등 제인(諸人)으로 일대(一代)의 명신(名臣)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들 자신의 몸에 녹훈이 가해졌어도 감히 사피(辭避)하지 못했던 것은 녹훈은 국가의 중대한 일이어서 상변한 사람만을 구차스럽게 단록(單錄)하여 군부(君父)와 함께 맹약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사람들은 기축년027) 이후 옥관(獄官)들의 녹훈을 방색(防塞)한 것을 가지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속히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제신(諸臣)들을 조당(朝堂)에 모 이게 하여 옥사를 다스린 제신(諸臣)들을 녹훈하는 한 조항에 대해 가부를 순문(詢問)하여 조속히 감정(勘定)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소장을 봉입(奉入)한 지 여러 날이 지났어도 임금이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맹제(盟)의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 이미 박두해지자 동부승지(同副承旨) 홍중우(洪重禹)가 소장을 올려 이보욱(李普昱)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고, 이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연길(涓吉)을 조금 물리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에 아울러 비답을 내리기를,
"맹제(盟祭)의 날짜가 이미 박두했으니, 조금도 물리지 말라."
하였다.
3월 11일 경인
임금이 장차 회맹단(會盟壇)에 거둥하려 하니, 대사간(大司諫) 남취명(南就明)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역적을 주토(誅討)하고 회맹(會盟)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거조입니까? 그런데 조정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아 갑(甲)이냐 을(乙)이냐를 확정짓지 못한 채 결국은 단훈(單勳)으로 감정(勘定)하여 엉성하게 미봉(彌縫)하고 말았습니다. 대저 목호룡(睦虎龍)은 본디 일개 천례(賤隷)로서 역당(逆黨)에 투입하였다가 흉모(凶謀)가 패로(敗露)되기에 이르자 비로소 상변(上變)하였으니, 죽지 않고 녹훈의 끝에 끼인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국구(國舅)·대신(大臣)과 장신(將臣)에 이르기까지 그저 공을 사양하는 마음만 가졌을 뿐 국가를 욕되게 하는 수치를 생각지도 않은 채 사직(社稷)을 호위하고 역적을 주토(誅討)한 공을 한낱 천례에게 미루어 귀결시킴으로써 차마 우리 전하(殿下)로 하여금 제천단(祭天壇)에 마주 대하여 서서 맹약하는 피를 마시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신자(臣子)로서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대신(臺臣)이 수의(收議)하기를 청한 것도 신중을 기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대신(大臣) 이하는 서둘러 성례(成禮)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충분(忠憤)스런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말고삐를 끊고028) 수레바퀴를 더럽히는029) 의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사(喉司)의 신하들의 의리가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음은 물론 맞바로 의식(議式)을 거행하기를 청하였고, 또 재숙(齋宿)할 것을 청하였으니, 해당 승지(承旨)에게는 의당 경책(警責)을 가해야 합니다. 이어 회맹일(會盟日)을 조금 물리도록 명하고 2품 이상에게 수의(收議)하여 다시 감정(勘定)하게 하소서."
하고, 도승지(都承旨) 이세최(李世最)는 아뢰기를,
"단훈(單勳)이 구차스럽기는 하지만, 만일 명백하게 녹훈(錄勳)에 응할 사람이 있다면 처음에 무엇 때문에 누차 결정했다가 누차 고쳤겠습니까? 맹단(盟壇)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고, 의식의 거행에 대한 것이 이미 이루어져 법가(法駕)가 장차 출발하려 하고 있는데,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두 사람이 논쟁하기를 마지않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에도 녹훈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진다."
하였다. 남취명(南就明)이 승지가 대신(臺臣)과 이렇게 쟁론하는 것은 전에 있지 않았던 일이라는 것으로 이세최(李世最)를 추문하기를 청하니, 이세최가 추주(趨走)하여 나아갔다. 남취명이 다시 앞서의 이야기를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3월 12일 신묘
녹공 도감(錄功都監)에서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을 3등으로 단록(單錄)했는데, 훈호(勳號) 가운데 ‘갈성 효력(竭誠效力)’이란 네 글자는 삭감하여 제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직접 회맹제(會盟祭)를 행하였다.
3월 13일 임진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녹훈(錄勳)에 대한 교문(敎文)을 반시(頒示)하였는데, 이르기를,
"왕(王)은 말하노라. 난역(亂逆)을 주토(誅討)하는 왕법(王法)은 더없이 엄한 것이고 공로에 보답하는 방전(邦典)은 더없이 중한 것이다. 이에 대려(帶礪)030) 의 맹세를 신명(申明)하기 위해 윤음(綸音)을 반시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보잘것없는 내가 외람되이 큰 서업(緖業)을 이어받아 암려(闇廬)031) 에서 도(道)를 생각하여 부모의 뜻을 고치지 말라는 성모(聖謀)를 따랐고, 낭묘(廊廟)에서 완성시킬 책임을 지게 되자 또한 구장(舊章)을 따르라는 경훈(經訓)을 몸받았다. 그런데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이에 거족 대가(巨族大家)에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과거 내가 저이(儲貳)032) 로 있을 적에 이미 동요시킬 계책을 부렸었고, 사위(嗣位)한 뒤에 이르러서는 더욱 반측(反側)033) 하는 마음을 품었었다. 처음에는 영고(寧考)께서 지극히 명석하심을 두려워하여 화심(禍心)을 부리지 못했으나, 끝에 가서는 과매(寡昧)한 나를 하찮게 여겨 음모(陰謀)를 더욱 심화(深化)시켰다. 그리하여 은밀히 경영(經營)한 모든 것이 말할 수 없는 악역(惡逆)이 아닌 것이 없었다.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추대(推戴)한 것은 은밀히 흉괴(凶魁)에게 붙이는 것이었고, 궐내(闕內)에 군대를 진설하게 한 지시는 전적으로 노적(老賊)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여 악역을 이루었으니 여기(厲氣)가 같은 집안에 뭉쳤고, 교음(驕淫)이 이미 넘쳐 흘러 간계(奸計)를 계도(啓導)하니 밀계(密計)가 연석(聯席)에서 합치되었다. 끝내는 네 번째의 차자(箚子)가 계속 올라왔으니, 이것이 실로 삼수(三手)034) 를 은밀히 배포(排布)하는 빌미가 되었다. 손톱과 어금니 같은 복심이 빌붙은 것이 번성하니, 머리와 꼬리에 이르기까지 포치(布置)를 이미 완료하게 되었다. 금백(金帛)을 가지고 야밤에 달려가 환관(宦官)·궁첩(宮妾)들과 교통(交通)하였고, 귀역(鬼蜮)들이 대낮에 돌아다니면서 요인(妖人)·사사(死士)들과 체결하였다. 누런 환약(丸藥)을 멀리 가서 사가지고 왔으니 이것은 잔인한 계책이 마음속에 싹튼 것이고, 흰 칼날을 은밀히 숨기고 있었으니 장차 어디에다 시험하려 한 것인가? 위태롭구나, 계교가 표독하고 마음이 참독했으니,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고 가슴이 떨린다. 오래도록 복(福)을 주고 위엄을 부리는 권병(權柄)을 휘두르며 부도(不道)한 짓을 자행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일이겠는가? 이렇게 하여 도모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화(禍)가 몸에 절박함에 사기(事機)가 이미 주액(肘腋)에 박두하였고, 쌓인 섶에 불이 붙음에 화란(禍亂)이 종팽(宗祊)035) 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다행히 급서(急書)의 상문(上聞)을 힘입어, 이에 죄인을 체포하게 되었다. 원사(爰辭)036) 에 일제히 승복(承服)하니 바람에 쓸리듯이 남김없이 다 토로(吐露)하였고, 원악(元惡)이 나란히 처형되니 금방 위의(危疑)스러움이 안정되었다. 요망의 허리와 난역의 머리가 도끼에 잘렸으나 할 말이 없었고, 여얼(餘孽)의 잔당들도 천망(天綱)에 걸려 함께 분쇄되었다. 생각하건대 이번의 확청(廓淸)시키는 경사(慶事)가 있게 된 것은 모두 발고(發告)한 공에 연유된 것이다. 깊이 숨겨진 음모를 적발해 내니 역적들의 정형(情刑)이 하나도 누락되지 않았고 충성과 의리를 다 바쳤으니 한 사람의 성곤(誠悃)이 가상하다.
아! 30년 동안 빚어온 음계(陰計)를 통쾌하게 하루아침에 깨끗이 쓸어내었다. 흉역을 제거하여 화인(禍因)을 없애니 국세(國勢)가 반석처럼 편안해지게 되었고, 공로에 보상하고 훈적(勳籍)에 기록함에 있어 명수(名數)는 모토(某土)037) 의 법전(法典)을 상고하였다. 철권(鐵券)038) 을 반사하여 공적을 기재하고 등제(等第)를 매김에 있어서는 대개 구규(舊規)를 적용하였으며, 운대(雲臺)039) 에 나아가 모습을 그려 채색한 것은 영원한 후세에 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좋은 길일(吉日)을 가려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하늘에 고하고 피를 마셔 맹약을 다짐하였다. 훌륭한 의식을 갖추어 거행함에 있어서는 모두 상헌(常憲)을 따랐다.
아! 나는 시종 영원히 보전시키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그대는 깨끗이 씻어 준 특이한 사은(私恩)을 잊지 말지어다. 총명(寵命)은 오직 새로운 것이니 충순(忠順)을 따라서 공경히 실행하라. 융숭한 보답은 변함이 없을 것을 후예(後裔)를 가리켜 기약하노라. 그러므로 이 교서(敎書)를 반시(頒示)하노니, 의당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고, 또 공신(功臣) 목호룡(睦虎龍)에게도 교서(敎書)를 선시(宣示)하였다.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목호룡이 복주(伏誅)되었고 을사년040) 에 삭훈(削勳)되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범갑(金范甲)이 상소(上疏)하기를,
"도봉 서원(道峰書院)은 곧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의 영령(英靈)을 모신 곳인데, 일찍이 병자년041) 에 송시열(宋時烈)을 함께 배향(配享)하였으니 어찌 식자(識者)들이 놀라고 탄식할 일이 아니겠으며, 사림(士林)이 울분을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춘추 대의(春秋大義)는 곧 송시열이 세상을 기만했던 패병(欛柄)인 것입니다. 효종[孝廟]께서는 실효(實效)를 찾았는데 송시열은 허성(虛聲)으로 응했으며, 효종은 성의(誠意)로 대우했는데 송시열은 사위(詐僞)로 응하였습니다. 그의 평생의 기량(伎倆)은 단지 한세상을 속이는 데에만 있었기 때문에 실지의 사업(事業)에 이르러서는 전혀 척촌(尺寸)만큼도 말과 걸맞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가 서한을 보내어 실상이 없는 공언(空言)임을 심하게 논척(論斥)했었으니, 그의 심지(心地)가 간사하고 대의(大義)를 거짓 가탁했다는 것이 식자(識者)들의 공안(公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현종[顯廟]께서 사위(嗣位)한 처음을 당하여 영안(永安)의 조서(詔書)042) 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칭탁하여 나아가기 어렵다는 단서로 삼았었습니다만, 경신년043) 에 이르러 다시 기용될 적에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사양하는 말이 대의(大義)에 언급된 것이 다시는 없었으니, 어쩌면 전후 상반(相反)된 것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가 찬술(撰述)한 고(故) 상신(相臣) 김유(金瑬)의 묘명(墓銘)에 그가 화친(和親)을 주장한 한 조항을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로 허여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그가 평생 고집하였던 대의(大義)가 그의 허성(虛聲)과 아울러 변모(弁髦)가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진실을 가차하여 허위를 부린 작태가 곳에 따라 탄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주자(朱子)를 모의(摸擬)한 것이 곧 송시열의 평생의 기량(技倆)이었습니다. 그의 문집(文集)을 가지고 살펴보면 한 마디 말을 할 적마다 반드시 주자(朱子)를 자처(自處)하였고, 한가지 일을 할 적마다 반드시 주자에다 견주었습니다. 아! 주자(朱子)와 송시열은 현사(賢邪)는 물론 의리의 구분이 천양(天壤)처럼 현격히 다를 뿐만이 아닌데도 반드시 빙자하여 가탁하고 나섰으니, 이것이 왕망(王莽)이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본받았다고 한 것과 어쩌면 그리도 한결같이 서로 비슷합니까? 저 송시열이란 자는 이름을 도적질하여 값을 올리면서 금방 왔다가 떠났다 하다가 끝에 가서 국면(局面)이 번복될 즈음에는 몸을 떨쳐 일어나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밀어내어 죄에 빠뜨리고 자신에게 빌붙는 자는 이끌어 나아오게 하였습니다. 권세를 탐하여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하였고, 훈척(勳戚)과 굳게 체결하여 함께 악한 일을 해내었으며, 무고(誣告)를 한 간적(奸賊)을 비호하여 주고 사류(士類)의 청의(淸議)를 배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도(世道)가 점차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고, 인심이 날로 함닉(陷溺)되게 만들어서 신축년044) 의 화변(禍變)을 순치(馴致)시켰으니, 흉역(凶逆)들이 사납게 날뛰어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될 뻔한 것은 또한 모두가 송시열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아! 송시열의 가슴속에 가득히 들어 있는 것은 오직 한 가닥 시기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정인(正人)을 해치는 수단이 쇄록편(瑣錄篇)에서 더욱 드러났는데 문자(文字)를 따다가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법을 김창집(金昌集)과 신구(申球) 등 역적에게 전하여 병신년(丙申年)의 화(禍)045) 를 빚어 내게 하였으니, 일찍이 유사(儒士)라는 명칭을 지니고 또한 이렇게 소인배(小人輩)들이 사람을 무함하는 습성을 지닌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 송시열은 사람에게 추욕(醜辱)을 가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아왔습니다. 윤선거는 곧 송시열의 외우(畏友)로서 무너져 내리는 물결 가운데 버티고 선 지주(砥株)와 같다는 포장(褒奬)이 있었고, 천지(天地)와 일성(日星) 같다는 칭송이 있었으므로, 그가 경복(敬服)해 온 것이 지극하다고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선정신(先正臣) 윤증(尹拯)이 그의 본원(本源)에 대해 의심한 뒤로부터 비로소 노여운 마음을 품고 공공연히 추욕(醜辱)을 가하였습니다. 더구나 남이 자신을 그르다고 한 데 대한 노여움을 빌미로 도리어 남의 부모(父母)에게 질타를 가하는 것은 비록 여항(閭巷)의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짓인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은 곧 송시열과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서로 좋게 지내는 사이였는데도 간혹 한두 가지 일이 자기 마음에 어긋나 거슬리면 그때마다 추욕을 가하였습니다. 윤휴(尹鑴)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일개 간신(奸臣)이니 임녕(壬佞)046) 이라고 배척해도 되고 흉얼(凶孽)이라고 배격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송시열은 그가 거처하는 동명(洞名)이 개곡(介谷)임을 취하여 윤휴를 구(狗)라고 하였는가 하면 혹은 견(犬)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와 같이 추패(醜悖)스런 말은 저자 사이의 악소년(惡少年)들에게 시키더라도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부끄러운 줄을 알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그의 문집(文集)을 가져다 보신다면 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송시열처럼 흉악하고 간사하며 송시열처럼 음험하고 비뚤어진 심보를 가진 자를 도봉 서원에 아울러 배향(配享)하였으니, 그 선현(先賢)에게 욕을 끼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출향(黜享)시키는 거조가 어찌 하루가 급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송시열을 입향(入享)시킬 적에 고(故) 상신(相臣) 윤지선(君趾善)이 소장을 올려 간쟁하자 성명(成命)을 도로 중지했었으니, 이런 것으로 살펴본다면 당초에 합향(合享)한 것은 실로 선왕(先王)의 본의(本意)가 아니었습니다. 바라건대 해조(該曹)에 명하여 송시열의 원향(院享)을 철거하게 하소서."
하였다. 소장을 봉입(捧入)하였는데, 오래도록 답보(答報)가 없었다.
사도(四道)의 유생(儒生) 최탁(崔鐸) 등이 소장을 올렸는데, 내용이 더욱 심각하고도 참혹했다. 심지어 말하기를,
"과거 무진년047) 에 세자(世子)의 책례(冊禮)를 행하려 할 때 송시열(宋時烈)이 이에 감히 소장을 진달하여 간쟁했는데, 그때 선왕(先王)께서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러냈다는 것으로 엄준(嚴峻)한 사연으로 배척(排斥)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종(一種)의 불령(不逞)한 무리들 가운데 그를 존신(尊信)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창(敞)·규(奎)의 【임창(任敞)과 박규서(朴奎瑞)이다.】 무리가 앞에서 창도하고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의 무리가 뒤에서 잇대어 지원함으로써 흉당(凶黨)들의 기세가 맹렬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그 정절(情節)을 조사하여 보면 단지 불만스럽고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싹이 튼 것이니, 송시열이 비록 악역(惡逆)은 아닐지라도 악역이 나온 것이 송시열에게서 연유되지 않았다고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송시열이 장기(長鬐)에 안치(安置)되어 있을 적에 지은 시(詩)에, ‘천리 밖이 또한 오랑캐 땅인데, 4, 5년 이래 태평하기로 이름났네. 달 밝은 밤 노래 소리 피리 소리 요란한데, 옛 신하는 도리어 영정행048) 을 읊조리네.’ 하였는데, 이는 역적 이희지(李喜之)가 영정행을 지어 장황한 사설(辭設)을 늘어놓은 것과는 다릅니다만, 그가 비난하고 경멸한 것으로 보면 또한 어찌 난적(亂賊)의 효시(嚆矢)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답보(答報)하지 않았다. 성균관(成均館)에서 계품(啓稟)하기를,
"비지(批旨)가 내리지 않는 것을 이유로 허다한 유생(儒生)들이 과시(科試)에 응시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으니, 의당 처분(處分)을 내려야 합니다."
하고, 승지(承旨)도 누차 말을 하니,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조(李肇)가 연석(筵席)에서 진백(陳白)하기를,
"송시열을 병향(並享)할 적에 이미 물론(物論)이 있었으니, 선대왕(先大王)의 본의(本意)를 우러러 알 수가 있습니다만, 그럭저럭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선비들의 공의(公議)가 이미 발론(發論)되었으니,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소서."
하고, 우의정(右議政) 최석항(崔錫恒)도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말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병향(並享)한 것은 공공(公共)의 의논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니,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나름대로 문제삼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김범갑(金范甲) 등이 시기를 노려 비난을 가하면서 신축년049) 의 화(禍)를 순치(馴致)시켰다고까지 말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참된 시비(是非)이겠는가? 사향(祀享)은 중한 법전으로 이미 선조(先朝)의 처분(處分)을 거쳤는데, 일개 예관(禮官)이 쉽사리 진청(陳請)한 것에의해 하루아침에 철파(撤罷)했으니, 너무도 전도된 일이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흉당(凶黨)들이 숙묘(肅廟)의 병신년050) 처분(處分)에 대해 불만을 품고 기필코 송문정(宋文正)051) 에 대해 원한을 풀려고 했고 도봉 서원에서 출향(黜享)시키기까지 했으니, 너무 심한 짓이었습니다. 김범갑과 최탁(崔鐸)의 소장은 모두가 날조해 낸 흉패(凶悖)스런 말인데도 해조(該曹)와 묘당(廟堂)이 같은 말로 찬성했기 때문에 그때의 사관(史官)이 비난했다 하고 전도되었다 한 것인데, 그것은 또한 밖으로 공의(公議)를 내어 보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3월 16일 을미
정시(庭試)를 설행(設行)하여 문과(文科)에서 박사유(朴師游) 등 13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서 유덕징(柳德徵) 등 4백 78인을 뽑았다. 이 과거(科擧)가 곧 위옥(僞獄)을 경사라고 칭하면서 설행하여 사람을 뽑은 것인데, 영조조(英祖朝)에 이르러 파방(罷榜)시켰다. 그런데 그 이름을 다시 고쳐 별과(別科)라고 하였다.
3월 23일 임인
진사(進士) 곽진위(郭鎭緯) 등이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서 출향(黜享)시키는 일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면서 올린 소장이 정원(政院)에 도착하자, 정원에서 이를 퇴각시켰다. 곽진위 등이 다시 소장을 올려 정원을 공척(攻斥)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품달(稟達)하여 입계(入啓)하였다. 그 소장에 대략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송시열(宋時烈)은 성대(聖代)를 만나 지치(至治)를 도와 이룰 것을 기약했었으나, 불행하게도 군간(群奸)들에게 무함을 당하여 아울러 참봉(讒鋒)에 걸렸으며, 결국 황천(黃泉)에서 한을 머금고 있습니다. 두 분의 도학(道學)의 순정(純正)함과 시명(時命)의 궁액(窮扼)함이 전후로 같았기 때문에 사림(士林)들이 기필코 송시열을 같은 사당(祠堂)에서 같이 제향하게 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소청을 윤허하신 것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 병자년052) 에 합향(合享)한 뒤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마는, 감히 원향(院享)에 대한 한 가지 일을 입술에 올려 거론하지 못했던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공의(公議)를 두려워하고 선왕(先王)을 두려워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기를 타고 방자하게 기탄없이 마구 발론하여 전일에 감히 하지 못했던 것을 감히 하였으니, 그 또한 통분스럽습니다.
효종[孝廟]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는 것이 나의 책임이다. 나와 함께 이 일을 같이할 사람이 경(卿) 말고 누구이겠는가?’ 하였으니, 이른바 실제의 사업(事業)은 이에서 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낭중(囊中)의 봉서(封書)와 경악(經幄)의 독대(獨對)에서 아뢴 치법(治法)과 정모(政謨)는 정확하게 근거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혈성(血誠)을 다하여 치욕을 씻으려 도모했습니다만, 하늘이 돕지 않았기 때문에 대업(大業)을 성취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일종(一種)의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이 은밀히 하자를 집어낼 마음을 품고 이에 가모(假冒)했다고도 하고 허성(虛聲)이었다고도 한 것입니다.
아! 이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바로 윤증(尹拯)의 말이요, 윤증의 말이 아니라 곧 윤선거(尹宣擧)의 말이었습니다. 윤선거가 한 번 강도(江都)에서 낭패한 뒤로부터 스스로 도리(道理)에 편의한 것을 점유하려고 도모하여 문득 죽지 않은 것이 십분 정당했다고 하면서 이에 감히 실지(實地)의 공부로 자부(自附)한 반면 선정(先正)을 허위(虛僞)라고 책함으로써 일세(一世)의 사람들로 하여금 ‘대의(大義)’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선정이 답서(答書)를 보내면서 극히 엄절(嚴截)하게 하였습니다. 공자(孔子)·주자(朱子)를 가탁하여 인의(仁義)에 화(禍)를 끼친다는 말이 있었던 것은 그저 윤선거의 심술(心術)을 드러내기에 충분할 뿐인 것으로, 선정에게야 무슨 병통이 될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朱子)는 공자(孔子)·맹자(孟子) 이후 일인(一人)입니다. 그리고 송시열의 평생 심사(心事)는 주자(朱子)를 본받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이제 김범갑(金范甲)의 무리가 도리어 주자(朱子)를 빙자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공 ·맹(孔孟)을 존신(尊信)한 사람은 정자(程子)·주자(朱子) 등 제현(諸賢)과 같은 이가 없는데, 정자·주자(朱子)도 또한 공·맹을 빙자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현종께서 사복(嗣服)053) 한 처음에 홍여하(洪汝河)가 처음 배알(排軋)하는 소장을 올렸고 그리고 나서 예송(禮訟)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선정의 자취가 갈수록 더욱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산릉(山陵)의 일이 끝나자마자 창황히 조정을 떠나고 말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영안(永安)의 조서(詔書)를 받지 못했다고 운운(云云)한 것은 모두 두찬(杜撰)한 말이니, 많은 변해(辨解)를 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선정(先正)이 장기(長鬐)에서 돌아와서는 억지로 조정에 나아갔었는데, 신유년054) 의 진수당(進修堂)에서 올린 수차(袖箚)와 계해년055) 의 세실(世室)에 대한 소장(疏章)과 정묘년056) 의 일을 논한 소장(疏章)은 모두가 이 의리인 것입니다.
김유(金瑬)의 비문(碑文)은 과연 선정(先正)이 찬술한 것인데, 종사(宗社)를 위한 계책이라고 한 것은 실로 선정의 말이 아니라 김유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말인 것으로, 그 또한 화친(和親)을 주장하는 일을 전적으로 찬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를 날조하여 억지로 합치시켰는가 하면 또 뒤집어서 선정이 한 말로 만들었으니, 이는 시례 발총(詩禮發塚)057) 하는 것에 가깝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소인(小人)이 충현(忠賢)을 함해(陷害)할 적에는 ‘훈척(勳戚)’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협박하는 자료로 삼지 않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옛날 조여우(趙汝愚)는 송(宋)나라의 숭훈(崇勳)이요 종척(宗戚)이었는데, 주부자(朱夫子)는 아닌게 아니라 훈척이라는 것 때문에 스스로 달리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선정께서 당일 함께 교유했던 사람은 모두가 척리(戚里)들 가운데 선류(善類)였으니, 또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신축년058) 의 변을 순치(馴致)시켰다고 한 것은 더욱 참독스럽습니다. 선정이 졸서(卒逝)한 지가 이제 거의 40년이나 되었는데, 뒤에 와서 일어난 일이 선정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저들의 이야기가 종래 신경제(申慶濟)의 소장 내용과 동일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아! 또한 두렵습니다. 윤선거(尹宣擧) 한 사람의 신상(身上)에 두 가지의 일이 만들어져 있으니, 포장(褒奬)할 것은 포장하고 폄척(貶斥)할 것은 폄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그 말에 저앙(低仰)이 있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김수항(金壽恒)은 일생 동안 선정을 존신(尊信)하였는데, 나양좌(羅良佐)는 김수항의 부제(婦弟)로서 매양 양쪽이 좋게 지내는 것을 깨뜨리기 위해 제생(諸甥)들에게 글을 보내어 공공연히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어 그로 하여금 선정의 문(門)을 등지게 하려 했었습니다. ‘구(狗)’·‘견(犬)’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윤휴(尹鑴)의 집이 구동(狗洞)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거처하는 곳에 딸 구윤(狗尹)이라고 한 것으로,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령 윤휴가 용동(龍洞)에 거처하였다면 또한 용윤(龍尹)이라고 칭하였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들은 또 칭송(稱頌)한 것으로써 병통을 삼지 않겠습니까?
아! 이들의 혈맥(血脈)이 윤휴와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언의(言議)가 하나하나 모두 부합(符合)되어 기유년(己酉年)의 서한(書翰)059) 은 적휴(賊鑴)060) 의 경자년061) 논례설(論禮說)과 뜻이 같았고, 신유 의서(辛酉擬書)062) 는 흉도들이 기사년063) 에 현인(賢人)들을 해쳤던 계교와 같은 내용이었는데, 최탁(崔鐸) 등의 소장에서 또 신경제가 썼던 구어(舊語)를 전용하고 있습니다. 선정이 무진년064) 에 올린 하나의 소장은 곧 노신(老臣)이 국가를 우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혈성(血誠)이 환히 드러나 단연코 다른 마음이 없었는데도, 흉도들이 죄에 얽어넣는 매개로 삼아 마침내 참화(慘禍)를 당하게 했으므로, 사림(士林)의 통분(痛憤)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는 신경제가 발론하고 뒤에는 최탁 등이 계속해서 윤휴가 했던 행위를 행하면서 같은 뜻으로 계속 조술(祖述)한 것이 스승을 계승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의 간신(奸臣)이라고 지목함으로써 마치 거꾸로 스승을 공격하는 듯한 수단과 비슷했으니, 또한 사표(師表)의 방법을 잘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정시(永貞詩)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곧 당(唐)나라의 신하인 한유(韓愈)가 당시 소인(小人)들이 갑을(甲乙)로 작당(作黨)한 것을 비난한 것인데, 윤휴의 당여들이 요직에 두루 웅거하고 있을 적에 선정이 그 시(詩)를 읊은 것은 실로 인인(仁人)·군자(君子)가 시속(時俗)을 안타깝게 여겨 슬퍼하는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으로 선정의 죄를 얽어낼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이것을 비방이라고 하여 법으로 다스린다면 한문공(韓文公)065) 이 마땅히 제일 먼저 그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통분스러운 것은 종이 되어 목숨을 도둑질하여 명의(名義)에 죄를 얻었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윤선거를 출향(黜享)시켰는데도 태연스럽게 다시 배향한 데 반하여 정의(正義)를 부지시키고 사설(邪說)을 내침으로써 몸소 대의(大義)를 떠맡았기 때문에 선조(先朝)에서 숭장하여 보답했던 선정을 갑자기 철향(撤享)시키려 하였으니, 오늘날의 거조가 어쩌면 한결같이 이렇게 전도된단 말입니까? 백세(百世) 뒤에 오늘을 어떤 시대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전 승지(承旨) 이교악(李喬岳)이 또 소장을 올려 송변(訟辨)하기를,
"선정(先正)은 평일에 말 한 마디 행동 한 가지를 걸핏하면 주자(朱子)를 본받아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히는 것을 제일의 건사(件事)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연원(淵源)과 문로(門路)는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게서 얻었으므로 평생 흔연히 사모하여 죽을 때까지 존경하였습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참화(慘禍)를 당한 것도 전후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니, 한 사당(祠堂)에 병향(並享)하는 것이 예법(禮法)에도 마땅한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祖)에서 특별히 그 소청을 윤허한 것으로 그 이후 30년 동안 조정에는 이론(異論)이 없었고 사림(士林)에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병신년066) 옥후(玉候)가 침중하신 가운데에도 손수 ‘화양 서원(華陽書院)’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승지(承旨)를 보내어 특별히 사제(賜祭)하였습니다. 비록 일종(一種)의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이나 양좌의 무리가 쓰던 수법과 기사년067) 의 당인(黨人)들의 남은 투식을 전해 받아 기필코 선정에게 오욕(汚辱)을 가하고 선정을 죄에 얽어넣어 해치려 했지만, 감히 실행에 옮기려는 마음을 먹지 못한 것은 단지 그들의 마음에 두려워 꺼리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과 원망을 머금은 채 참고서 기회를 기다렸는데 선왕(先王)께서 승하(昇遐)하신 뒤에 이르러서는 좋아라고 떼 지어 일어나 시세(時勢)를 타고 날뛰면서 죄를 날조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또 추욕(醜辱)을 가하였고, 추욕을 가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또 없는 사실을 꾸며내었으니, 차마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왕께서 ‘나의 뜻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신 전교(傳敎)를 몸받아 속히 통렬한 지척(指斥)을 가하여 멋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아울러 도로 내어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掌令) 서종하(徐宗廈)가 아뢰기를,
"진사(進士) 곽진위(郭鎭緯)의 소장 내용은 추패(醜悖)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전혀 돌보아 꺼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배향한 것을 출향(黜享)시킬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절로 일세(一世)의 공론(公論)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정(先正) 부자(父子)에게 무슨 털끝만큼인들 관계되는 것이 있기에 불필요한 말을 삽입하여 가면서 공공연히 침욕(侵辱)을 가한단 말입니까? 영정시(永貞詩)에 대해 변해(卞解)한 것에 이르러서는 송시열(宋時烈)을 한유(韓愈)에다 견주기까지 했는데, 이는 저들의 무리가 송시열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선조(先祖)를 당 순종(唐順宗)에게 견준 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멋대로 유행시키게 한다면 역적 이희지(李喜之)의 속영정시(續永貞詩)도 또한 한유를 모방했다고 하면서 구해(救解)할 장본(張本)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그 말류(末流)의 폐해는 마침내 인기(人紀)를 멸절시키고 국가(國家)를 난망시키는 데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定配)시키소서. 이교악(李喬岳)은 스승을 위하여 신변(伸辨)한다는 것을 가탁하면서 하나의 소장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억지로 제목(題目) 밖의 말을 인용하여 선정 부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욕(誣辱)을 가하였으니, 아! 너무도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유 감과 원망을 품었다느니 선왕이 승하하였다느니 하는 등등의 이야기는 더할 수 없이 패려(悖戾)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교악(李喬岳)도 또한 전하의 신하인데 어떻게 감히 이런 등등의 이야기를 마음에 싹틔워 입으로 발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의 윤기(倫紀)를 무시한 무엄한 죄를 징계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원찬(遠竄)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26일 을사
이교악(李喬岳)을 경산현(慶山縣)에 찬배(竄配)하였다.
3월 27일 병오
곽진위(郭鎭緯)를 금갑도(金甲島)에, 안윤중(安允仲)을 운산군(雲山郡)에 정배(定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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