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갑인
헌납(獻納) 권익관(權益寬)·정언(正言) 김중희(金重熙)가 아뢰기를,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宮人)이 흉적(凶賊)과 화응(和應)하여 어찬(御饌)에다 독을 탔다는 것은 김성절(金盛節)이 직초(直招)한 것입니다.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주달하고 대간(臺諫)이 논계한 것으로 인하여 그때마다 조사하여 내보내겠다는 비답(批答)을 내리셨으므로, 신료(臣僚)들이 크게 마음먹고 기다린 지 지금까지 얼마의 세월이 흘렀습니까? 그런데도 아직껏 내보내는 거조가 없음으로 인하여 주액(肘腋)013) 처럼 가까운 금달(禁闥) 사이에서 흉적이 숨을 쉬고 있게 함으로써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화근(禍根)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으니, 종사(宗社)의 걱정과 신인(神人)의 분노를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궁금(宮禁)의 일은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진실로 외신(外臣)으로서는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김성절이 이른바 약을 진어하고서 토해냈다는 말이 누런 물을 토해냈다고 약원(藥院)에 하교한 일과 서로 합치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약을 쓴 기일도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이 한두 명이 아니겠습니다만, 포주(庖廚)의 임무는 다른 일과는 구별이 있고 여관(女官)의 호칭 또한 각기 다르니, 직임과 관호(官號)를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서로 미루면서 핑계대기 때문에 갑자기 적발할 수 없다면, 역시 전부 유사(有司)에게 맡겨 철저히 조사하여 분명하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징토(懲討)를 엄히 하여 후환(後患)을 예방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한결같이 미루기만 하여 도적을 자라나게 하고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만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화근(禍根)을 아직껏 제거하지 못하였으니, 예전의 불꽃이 반드시 다시 불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 역적을 끝내 사핵(査覈)하여 잡아내지 못한다면 신은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안정될 날이 없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김성을 가진 궁인으로서 의심스러운 사람은 국청(鞫廳)으로 내보내어 사핵하여 정범(正犯)을 잡아내어 속히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아! 그때의 국옥(鞫獄)에서는 없는 죄를 날조해 낸 것이 진실로 끝이 없었다. 김성(金姓)을 가진 궁인에 대해서는 전후의 비지(批旨)에서 본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하교(上敎)했는데도 오히려 극력 내보내 줄 것을 청하였는가 하면, 영조(英祖)가 즉위한 뒤에 끈질기게 청하여 마지 않았으니, 그 지의(指意)한 바가 무엇인가?
2월 8일 무오
장령(掌令) 정계장(鄭啓章)이 아뢰기를,
"임창(任敞)의 죄는 이루 다 주토(誅討)할 수가 없습니다. 연전에 올린 하나의 소장(疏章)이 상달되지는 못했지만, 그 소장에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세상에 모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으니, 흉역의 심장(心腸)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올린 소장의 내용을 가지고 보더라도 분수를 범하고 의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못할 말이 없이 다했습니다. 그의 숙부(叔父)인 임홍망(任弘望)은 지친(至親)의 사정(私情)으로서도 감히 죄악을 숨길 수가 없었으며, 그 화(禍)가 자신에게 연급(延及)될까 두려워한 끝에 소장을 올려 스스로 해명하였으니, 그의 말이 불경(不敬)스럽고 부도(不道)하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의 죄를 논한다면 실로 역적 윤지술(尹志述)보다도 더한데, 이제 죄를 준 것이 찬배(竄配)에 그쳤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천지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역적 윤지술이 억울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종래에 적당(賊黨)들이 전하를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해 온 지가 오래입니다. 김춘택(金春澤)은 은밀히 그것을 주관하였고, 임창과 박규서(朴奎瑞)는 드러내어 말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경영(經營)하여 기필코 마음대로 하려고 했으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사람으로서 누군들 그들의 살점을 먹고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깔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김춘택과 박규서는 모두 법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은 채 편안히 일생을 마쳤으니, 지금에 와서 조금이나마 분을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적 임창을 정형(正刑)에 처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처럼 징토가 바야흐로 엄한 때를 당하여 임창 같은 악역배(惡逆輩)를 결코 하루라도 용서하여 실형(失刑)했다는 비난을 야기시켜서는 안됩니다. 흉적 임창을 속히 처치하여 방형(邦刑)을 바루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졸(卒)하였다. 정재륜은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의 아들로, 효종(孝宗)의 부마(駙馬)이다. 사람됨이 준걸스럽고 계려(計慮)가 있어 몸가짐을 검약(儉約)하게 하였으며, 일이 있어 출타(出他)할 적에는 반드시 추종(騶從)을 간략하게 하고 벽제(辟除)를 금지하였으니, 사람들이 그가 귀척(貴戚)임을 알지 못하였다. 무릇 네 조정(朝廷)에서 임금이 내린 진완품(珍玩品)들을 모두 봉함하여 기록해 놓음으로써 공경심을 극진히 했으며 하나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국조(國朝)의 고실(故實)에 대해 널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질문(質問)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76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구재(柩材)를 내렸다.
2월 10일 경신
이조(李肇)를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광좌(李光佐)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2월 18일 무진
정언(正言) 유수원(柳壽垣)이 소장을 올려 조태구(趙泰耉)를 논척(論斥)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축년014) 12월은 곧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신 때인데, 처음 경연(經筵)에서의 대양(對揚)이 이미 여정(輿情)에 거슬렸으니, 단지 부의(涍議)에 동요당한 것만 보았을 뿐 국시(國是)에 대해 엄하게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명을 받들어 옥사(獄事)를 다스림에 이르러서는 전후 계속 병이라고 핑계대다가 끝에 가서 받아들였으니, 이는 더욱 책임만 메우는 데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인정(人情)이 울분을 품고 물의(物議)가 들끓게 되었습니다 이미 남의 충고(忠告)를 받아들이지도 못했고 또 그 도량이 너그럽지도 못해서, 이에 태현(台鉉)015) 의 지위에 있으면서 늙은 나이에 편사(偏私)하다는 지목을 받는 것을 혐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괴리(乖離)된 사세를 조정할 의도가 없었는가 하면 사람을 끌어들일 적에는 자기 임의로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으므로, 지부(地部)016) 의 수의(首擬)에 대해 너무도 굴곡(屈曲)이 많았고, 전관(銓官)이 차임에 대해 문의할 적에도 당초에 상량(商量)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청의(淸議)가 확장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정기(正氣)도 저상(沮喪)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사람들을 꼼짝못하게 하여 얼버무리기만을 일삼아 헛된 것을 가차(假借)하여 고식적인 부귀(富貴)를 누리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뜻을 굽혀 승봉(承奉)하여 극구 찬양 하면서 역적을 두둔하는 사람이 있다고 함으로써 일세(一世)로 하여금 노하게 하였으나, 감히 말하지는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관(大官)도 이러하였으니 소관(小官)은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묘당(廟堂)의 의논이 이러했으니 전형(銓衡)을 책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정수기(鄭壽期)가 처음 영선(瀛選)에 참여한 것도 이미 너무 옳지 못한 것이었는데, 의정부(議政府)의 좌참찬(左參贊)은 더욱 사람들이 기대한 밖에서 나왔습니다. 근래의 영화로운 승진이 마치 공로에 대한 보답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정제(李廷濟)는 간사하고 지나치게 공손하여 사부(士夫)의 태도가 전혀 없고 반생(半生) 동안 벼슬한 술법이 이익만을 추구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마침내 높은 지위로 오른 것은 모두 권문(權門)의 세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외람되이 사국(史局)에 끼여 있었고 계속해서 웅번(雄藩)을 맡게 되었으니, 진실로 이미 물정(物情)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 조태채(趙泰采)가 복주(伏誅)되었을 적에는 이에 감히 천 리에 사람을 보내어 가득 실은 짐바리를 선물(膳物)로 보내었는데 그에게 만약 일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더럽고 아첨하여 분의(分義)를 모른 무리들은 결코 조적(朝籍)에 끼이게 할 수 없으니, 속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는 법전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수기(鄭壽期)가 영관(瀛館)017) 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배척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하였다.
2월 20일 경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가 파면(罷免)되었다 유봉휘(柳鳳輝)를 이조 판서로, 이진유(李眞儒)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2월 23일 계유
목호룡(睦虎龍)을 수충 분의 갈성 효력 부사 공신(輸忠奮義竭誠效力扶社功臣) 동성군(東城君)으로 삼았다.
순릉(純陵)에 불이 났다. 임금이 정전(正殿)을 피하여 변복(變服)하고 감선(減膳)하였으며 3일 동안 철악(撤樂)하였다.
원임(原任) 대사간(大司諫) 김동필(金東弼)과 원임 정언(正言) 유수원(柳壽垣)을 주현관(州縣官)으로 보임(補任)시켜 내칠 것을 명하였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아뢰기를,
"김동필이 서로 배척하여 무사한 가운데에서 일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엊그제 정언 유수원이 소장을 올려 또다시 부정한 의논을 제기하여 분열(分裂)됨을 마음에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이를 억재(抑裁)하지 않으면 마치 요원(燎原)의 불길과 같아 실로 끄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김동필과 유수원을 아울러 외직에 보임시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습성을 징계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4월 (0) | 2025.10.20 |
|---|---|
|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3월 (0) | 2025.10.20 |
|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1월 (0)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12월 (1) | 2025.10.19 |
| 경종수정실록3권, 경종 2년 1722년 11월 (1) | 2025.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