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실록4권, 경종 3년 1723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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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무신

원임(原任)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상기(宋相琦)가 강진(康津)에서 졸(卒)하였다. 송상기(宋相琦)의 자(字)는 옥여(玉汝)이고 은진인(恩津人)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 송규렴(宋奎濂)의 아들이다. 신축년079)   겨울 조태구(趙泰耉)가 왕대비(王大妃)의 언문 교서(敎書)를 봉환(封還)시킬 때를 당하여 송상기가 병조 판서(兵曹判書)로서 소장을 올리기를,
"신이 파출(罷黜)된 뒤에 자전(慈殿)의 교서에 궁인(宮人)·환시(宦寺)와 체결한 자는 율법에 의거 처치(處置)하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빈청(賓廳)의 계문(啓聞)에서는 어떤 궁인 한 사람이 환시와 체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전의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조태구가 이에 소장을 올려 송상기가 자전의 뜻을 속였다고 하면서 강진현(康津縣)에 찬배시켰다.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 67세였다. 송상기는 글을 짓는데 즉석(卽席)에서 이룬 것이 많았으므로 관각(館閣)의 제공(諸公)들이 모두 말하기를, ‘옥여(玉汝)080)  의 민첩함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6월 4일 신해

판의금(判義禁) 심단(沈檀)이 소장을 올려 임창(任敞)을 윤지술(尹志述)의 예(例)에 의거 곧바로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태좌(李台佐)가 아뢰기를,
"죄인에게 반드시 결안(結案)되기를 기다려 정형에 처하게 되어 있는 것이 곧 삼척(三尺)081)  의 상전(常典)인 것입니다. 한때의 특별한 하교는 전례로 인용할 수 없으니, 의당 결안되기를 기다려 정법(正法)에 처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심단이 다시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종래 흉역들이 화기(禍機)를 빚어 온 것이 모두 몇 년이었습니까? 그 동안의 흉역스런 말들은 임창이 실지로 창도한 것으로 처음의 소장에는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뒤 산삭(刪削)하여 고친 소장에도 부도(不道)하여 망측(罔測)한 말이 있었으니, 찰 대로 찬 그의 죄악을 역적 이건명(李健命)에 견주어도 경중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역적 이건명은 이미 결안(結案)을 기다리지 않고 처형했는데 어찌하여 유독 역적 임창에 대해서만은 의심하여 망설인다는 말입니까? 선조(先朝) 때에는 조사기(趙嗣基)를 곧바로 정형(正刑)에 처하였고, 근래의 일로는 윤지술이 있습니다. 대개 죄가 대벽(大辟)082)  에 해당되면 결안에 구애됨이 없는 것이니, 곧바로 정형에 처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그대로 따랐다. 승지(承旨) 이익한(李翊漢)이 말하기를,
"이태좌(李台佐)가 결안(結案)되기를 기다려 정법에 처하자고 청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는데, 이제 심단의 주청(奏請)을 인하여 또 정형에 처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이는 처분(處分)이 전도(顚倒)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은 뒷폐단에 관계가 되니, 청컨대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자, 심단이 또 극력 곧바로 처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동의금(同義禁) 이명언(李明彦)이 소장을 올려 판의금(判義禁)이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이 사의에 맞는 것이라고 논하니, 임창(任敞)이 마침내 죽게 되었다.

 

6월 6일 계축

조태구(趙泰耉)가 죽었다. 처음 영조(英祖)가 잠저(潜邸)에 있을 적에 조태구가 가만히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마음을 품고서 혐의를 무릅썼다는 말을 만들어 내어 위핍(危逼)을 가하였다. 저위(儲位)로 세워지고 나서는 역신(逆臣) 유봉휘(柳鳳輝)가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마음을 품고 흉소(凶疏)를 올리자 방자하게 구해(救解)하면서 충지(忠志)에서 나왔다고 추장(推奬)했다. 그리고 정사(政事)를 대리(代理)하라는 명이 있게 되자 몰래 북문(北門)으로 들어가서 기필코 저알(沮遏)시키고야 말았다. 목호룡(睦虎龍)의 변(變)이 발생하자 양옥(梁獄)083)                  은 추구(推究)하지 말라고 한 일을 인용함으로써 세제(世弟)를 암매(暗昧)한 지경에 처하게 하였고, 무옥(誣獄)을 단령(鍛鍊)해 내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러니 흉도(凶徒)의 거괴(巨魁)를 논한다면 조태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런데 왕장(王章)이 가해지기도 전에 편안히 방안에 누워 죽었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죄진 자를 징토한다는 뜻이겠는가? 영조조(英祖朝)에 이르러 삼사(三司)가 토죄하기를 청하면서 해가 지나도록 고집하여 간쟁했는데, 병인년084)                  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작(官爵)의 추탈을 명하였고, 을해년085)                  에 처자를 노예로 삼고 가산을 적몰하는 법전을 거행하였다.

 

6월 11일 무오

간원(諫院)에서 논계(論啓)하기를,
"동성군(東城君) 목호룡(睦虎龍)의 상달되지 않은 소장에서 이중환(李重煥)이 말을 빌려 준 죄에 대해 신구(伸救)하면서 그가 사직(社稷)을 위한 공이 있다는 것을 성대히 일컬었는데, 심지어는 ‘신(臣)의 충의(忠義)를 격동시켰고 신에게 모획(謀劃)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역적들을 제재하여 삼수(三手)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하였고, 또 이중환의 공을 국청(鞫廳)에 고했으나 끝내 거론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이중환이 의당 수공(首功)에 해당된다는 정상을 이미 국청에 직고(直告)했는데도 감훈(勘勳)할 적에 수록(收錄)하지 않은 것처럼 하였으니, 청컨대 잡아다 추문하여 분명히 사핵(査覈)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이중환이 김천 찰방(金泉察訪)으로 있을 적에 역말을 목호룡에게 빌려 주고서는 잃어버렸다고 하였는데, 그뒤 이천기(李天紀)의 집에서 그 말을 찾아냈다고 했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臺臣)이 과연 발계(發啓)086)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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