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오
밤에 번개가 쳤다.
유척기(兪拓基)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도당록(都堂錄)167) 을 거행하여 이기진(李箕鎭)·신절(申晢)·신방(申昉)·김진상(金鎭商)·이중협(李重協)·조문명(趙文命)·이덕수(李德壽)·정석오(鄭錫五)·서종섭(徐宗燮)·홍현보(洪鉉輔)·김민택(金民澤)·김제겸(金濟謙)·윤연(尹筵) 등 13인을 선발(選拔)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당록(堂錄)은 옛 규례에 여러 당상관(堂上官)이 먼저 모이고 대신은 최후에 나아가는 것인데, 이날 김창집(金昌集)은 당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꼭두새벽에 먼저 나와 종일 여러 당상들을 힘써 불러들여 저녁때에 이르러 비로서 권점(圈點)을 마쳤으니, 전하며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록에 오른 자들도 또한 용잡(冗雜)하여 김진상처럼 세루(世累)168) 가 있는 자와 이중협처럼 아첨하는 자와 홍현보처럼 어눌한 자가 또한 모두 참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13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註 167] 도당록(都堂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2차 선거(選擧) 기록. 의정(議政)·찬성(贊成)·참찬(參贊)·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이 모여 홍문록(弘文錄)에 오른 명단에서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은 뒤, 그 권점의 수를 헤아려 임금에게 올리면 득점의 순위대로 교리·수찬에 임명함.[註 168] 세루(世累) : 대대(代代)로 오점(汚點)이 있는 것.
사신은 논한다. "당록(堂錄)은 옛 규례에 여러 당상관(堂上官)이 먼저 모이고 대신은 최후에 나아가는 것인데, 이날 김창집(金昌集)은 당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꼭두새벽에 먼저 나와 종일 여러 당상들을 힘써 불러들여 저녁때에 이르러 비로서 권점(圈點)을 마쳤으니, 전하며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록에 오른 자들도 또한 용잡(冗雜)하여 김진상처럼 세루(世累)168) 가 있는 자와 이중협처럼 아첨하는 자와 홍현보처럼 어눌한 자가 또한 모두 참여하였다."
10월 2일 을미
이중협(李重協)을 헌납(獻納)으로, 조상경(趙尙絅)을 부응교(副應敎)로, 신절(申晢)·신방(申昉)을 부교리(副校理)로, 이기진(李箕鎭)·김제겸(金濟謙)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김민택(金民澤)·조문명(趙文命)을 수찬(修撰)으로, 조최수(趙最壽)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10월 3일 병신
유중무(柳重茂)·박휘등(朴彙登)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5일 무술
이민영(李敏英)·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임형(任泂)을 장령(掌令)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승지(承旨) 유중무(柳重茂)·이정신(李正臣) 등이 천둥의 변괴 때문에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 조정에 당론(黨論)이 횡행(橫行)하고, 용사(用捨)의 즈음에 편벽됨이 날로 심하며, 시비를 다투는 사이에 어지러움과 의혹이 더욱 깊어만 가고 있습니다. 옛날에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새로 큰 기업을 반드시 먼저 구언(求言)의 성지(聖旨)를 내리셨는데, 여러 달을 귀를 기울였으나 윤음(綸音)이 아직도 막연하니, 신 등은 저으기 민망합니다. 하물며 이런 재앙을 만난 날은 널리 순문(詢問)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가 더욱 없을 수 없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유의(留意)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재앙을 만나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에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는데, 그대들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유의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0월 6일 기해
삼남(三南)의 전지(田地)를 개량(改量)하는 역사(役事)를 마쳤다. 조세(租稅)의 부과에 해당되는 총수(總數)는 경상도가 26만 2천 결(結)이고, 전라도가 24만 5천 5백 결이며, 충청도가 16만 3백 결이었다. 결부(結負)는 예전에 비하여 자못 불어났으나, 온갖 간사한 폐단이 나와 허위가 서로 뒤섞였으니, 민폐(民弊)는 도리어 심하였다.
이날 국장(國葬)의 초도 습의(初度習儀)를 마땅히 거행해야만 하였으나, 총호사(摠護使) 이건명(李健命)이 대소(臺疏)169) 로 인하여 나오지 못하니, 정원(政院)에서 계품(啓稟)하여 날짜를 물려 거행하기로 하였다.
10월 7일 경자
정언(正言) 조최수(趙最壽)가 소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조신(朝臣)들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의구심(疑懼心)을 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계책을 꾸미는 것이 날로 깊어져 무릇 상궁(上躬)을 조절(操切)170) 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윤지술(尹志述)의 일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 만약 사친(私親)을 지나치게 높이는 거조가 있었다면, 신자(臣子)가 된 자 비록 죽을 힘을 다하여 다투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겠으나, 이제 전하께서 이 일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언급한 것이 없었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원래 말할 만한 단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문(誌文)의 한 조항에 이르러서는, 임금을 위하여 그 어버이에 관한 일을 숨기는 것은 신자의 지당한 의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윤지술은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이 문제를 갑자기 제기(提起)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반드시 지난 일을 폭로시켜 우리 전하의 아픈 심회를 더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이미 차마 못할 일이며, 참으로 어버이를 위하여 은휘(隱諱)할 일이 있는 것처럼 했다는 등의 말은 군부(君父)로 하여금 억지로 낳아 준 사친(私親)의 은혜를 스스로 끊게 하는 것입니다. 군부에게 비리(非理)를 더함이 이와 같이 끝이 없으니, 어찌 너무나도 절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자신을 낳아 준 사친에게 불행하게도 변고가 있는 사람은 비록 정리는 펼 수 없으나 사사로운 은혜를 끊을 수 없으니, 이는 참으로 고금(古今)에 바꿀 수 없는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윤지술이 이런 일을 창론(倡論)하자, 관학 유생(館學儒生)으로서 윤지술과 기미(氣味)가 같은 자들도 또한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죄다 흩어져 버렸던 것이니, 인심이 같은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윤지술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홀로 담당했으니, 또한 무슨 뜻입니까? 비단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깡그리 땅을 쓴 듯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륜(人倫)이 이로 인해 끊어질가 두렵습니다. 형률(刑津)이 편배(編配)171) 에 그친 것도 이미 너그러운 은전(恩典)이었는데, 한때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구해(救解)하여 마침내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여러 사람의 말을 홀로 당해낼 길이 없어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시게 하고 말았으니, 이는 의리가 잠깐 밝았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인주(人主)의 권위가 조금 시행되다가 도로 빼앗긴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윤지술에게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율(律)을 베풀어 왕법(王法)을 바로잡음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양사(兩司)172) 의 여러 신하들은 번갈아 소를 올려 두둔하며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이 없었으니, 그 분의(分義)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성균관 당상들이 들어오기를 권유한다는 데 빙자해 자신의 의견을 붙여 협박하고 조절(操切)한 것은 유생의 소회(所懷)보다 더 심한 것이 있으니, 이같은 거조는 지극히 무엄한 것입니다. 양사(兩司)와 성균관 당상을 한결같이 파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또 듣건대 본원(本院)에서 전(前) 승지(承旨) 송성명(宋成明)에 대한 삭탈 관직의 계사(啓辭)가 있었다 합니다. 아! 권위(權威)는 아래로 옮겨지고 인주(人主)의 형세는 외로운 때를 당하여 송성명의 말은 절실하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노여워하여 달을 넘겨가며 논계(論啓)했으니, 또한 너무나 방자합니다. 신은 삭탈 관작의 청을 준엄한 말로 물리쳐야 할 뿐만 아니라, 저번의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도 또한 빨리 도로 거두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살펴보고 소상히 알았다. 그러나 대신을 침범하고 헐뜯어 말에 화평이 결여되었으니, 그것이 온당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한세량(韓世良)·임수간(任守幹)을 승지(承旨)로, 조명겸(趙鳴謙)을 사간(司諫)으로, 김제겸(金濟謙)을 교리(校理)로, 김간(金榦)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삼았다. 김간은 박세채(朴世采)의 문인(門人)인데, 시론(時論)을 붙좇아 그 손자 박치후(朴致垕)를 시켜 소두(疏頭)가 되어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의 관작과 시호(諡號)를 박탈(剝奪)할 것을 청했다. 이로써 추천받아 헌부(憲府)와 은대(銀臺)173) 를 역임(歷任)했으니, 공의(公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10월 8일 신축
간원(諫院)에서 앞서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고, 또 논하기를,
"정언(正言) 조최수(趙最壽)는 반유(泮儒)의 일을 빙자해 일망 타진(一網打盡)의 계책을 이룩하고자 하여 한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그 말뜻이 음험하였습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죄를 받는 것은 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이 무리인들 그 거조가 지나침을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남몰래 서로 억측하고 헤아려 망령되게 생각하기를, ‘지금이야말로 바로 틈탈 만한 기회이다.’ 하고 성청(聖聽)을 공동(恐動)시켰으며, 조신(朝臣)을 무함하여 막중한 습의(習儀)를 정일(正日)에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죄상을 논한다며 너무나도 분통합니다. 청컨대 관작을 삭탈하고 성문 밖으로 쫓아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조최수를 파직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김고(金槹)·집의(執義) 홍우전(洪禹傳) 등이 조최수(趙最壽)의 소로 인하여 인피(引避)하니,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였다. 관학 유생들이 또 권당(捲堂)하고 들어가도록 권면하는 것을 빌미로 소회(所懷)를 써서 올렸는데 조최수를 여지없이 헐뜯어 욕하였다. 임금이 들어가도록 다시 권면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0일 계묘
부교리(副校理) 신방(申昉)이 차자를 올려 조최수(趙最壽)를 배척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반유(泮儒)에게 정배(定配)의 명을 내렸다가 즉시 도로 거두셨으니, 무릇 보고 듣는 자 누군들 전하의 전환(轉圜)174) 의 덕(德)에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조최수(趙最壽)는 이에 감히 시기를 틈타 간교한 수단을 부리니, 그 마음가짐을 길 가는 사람 또한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흉계를 이루는 데 급급하여 나라 일도 돌보지 않고 막중한 습의(習儀)를 정지하게 만들었으니, 진실로 일분(一分)의 심장(心腸)이라도 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그 관직을 파면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간원(諫院)의 비답에 하유(下諭)했다."
하였다. 【차자가 들어간 지 4일 만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3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사(宗社)
[註 174] 전환(轉圜) : 간(諫)하는 말을 순하게 따름.
10월 11일 갑진
총호사(摠護使) 이건명(李健命)이 청대(請對)하여 산릉(山陵)의 좌향(坐向)·수파(水破)·분금(分金)175) 을 써서 각자(刻字)한 것과 선조(先朝) 때 산릉 우편(右便)의 비워 둔 곳에 묻은 분금·좌향과 전교(傳敎)에 의하여 새긴 것을 아울러 하전석(下磚石) 아래에 묻을 일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진달하기를,
"인산(因山) 전에 온전(殷奠)176) 은 다만 망전(望奠)이 있을 뿐인데, 성상의 환후(患候)가 미령(未寧)하여 은전에 참여할 수 없다는 하교가 있으니, 여러 신하들의 우려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다시 조섭을 더하시어 만약 은전에 참여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효성을 또한 펼 수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며칠간 동정(動靜)을 보아 근력을 스스로 헤아려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2일 을사
송필항(宋必恒)을 사간(司諫)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조태구(趙泰耉)를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 임금이 당초에 가복(加卜)177) 을 명하자 정호(鄭澔)로써 복입(卜入)하였는데, 다시 가복을 명하였으므로 이에 조태구가 제배(除拜)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조태구는 인품이 단아(端雅)하고 충절(忠節)이 있어 선조(先朝) 때부터 매우 소중히 여겼는데, 임금이 즉위함에 미쳐 처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1책 13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177] 가복(加卜) : 의정(議政) 벼슬에 추천할 때 후보자 명단 외에 한두 사람을 더 추천하는 일.
사신은 논한다. "조태구는 인품이 단아(端雅)하고 충절(忠節)이 있어 선조(先朝) 때부터 매우 소중히 여겼는데, 임금이 즉위함에 미쳐 처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10월 15일 무신
민진원(閔鎭遠)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심수현(沈壽賢)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0월 16일 기유
이날 빈전(殯殿)에 시호(諡號)를 올렸다. 예문관(藝文館)에서 축문(祝文)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이미 지어 올려 계하(啓下)하였는데, 《오례의(五禮儀)》에 독축(讀祝)의 절차가 없고, 전후 국휼(國恤)에도 시호를 올릴 때 축문이 없었으므로, 이에 예조(禮曹)에서 전례에 의하여 쓰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18일 신해
유명웅(兪命雄)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유명웅은 인품이 용렬하고 식견(識見)도 없었는데, 요행히 기회를 타서 벼슬이 팔좌(八座)178) 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10월 19일 임자
임금이 몸소 계빈전(啓殯奠)과 계찬 궁제(啓攢宮祭)와 조전(祖奠)을 거행하였다.
10월 20일 계축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영가(靈駕)가 발인(發靷)하였다. 임금이 배종(陪從)하여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곡(哭)하고 물러나와 창경궁(昌慶宮)에 나아갔다.
10월 21일 갑인
명릉(明陵)에 장례(葬禮)를 모셨다. 새벽에 영가(靈駕)가 산릉(山陵)에 이르니,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건(巾)을 받들어 재궁(梓宮)을 닦으니, 내시(內侍)가 구의(柩衣)와 삼중 구의(三重柩衣)를 가(加)하고 그 위에 명정(銘旌)을 펼쳤다. 금루관(禁漏官)이 정각(定刻)이 되었음을 아뢰니, 총호사(摠護使)가 여관(舁官)을 거느리고 재궁(梓宮)을 받들어 선도(羡道) 안에 안치(安置)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유명웅(兪命雄)이 손을 들어 미는 형용을 하자, 여관(舁官)과 내시(內侍)와 액례(掖隷) 등이 차례로 서서 대홍융 환전(大紅絨絙纏)을 잡고 재궁의 아랫편에 정열(整列)하여, 매양 한 번 경필(警蹕) 소리를 외치면 문득 한 번 서서히 끌어당겨 점차 현문(玄門) 안에 나아가 탑(榻) 위에 안치(安置)하니, 왕자(王子)> 이하 여러 신하가 광(壙)에 임하여 엎드려 곡(哭)하였다. 곡을 그치고 사배(四拜)한 다음 영의정이 현문 밖에 나아가 애책(哀冊)를 받들고 선도(羡道)의 서쪽에 안치하고, 옥백(玉帛)을 애책의 남쪽에 안치하였다. 내시(內侍)가 유의(遺衣)를 바치고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삽(鍤)179) 을 올렸으며, 명기(明器)·악구(樂具)·목노비(木奴婢)·복완(服玩)·부신(符信)을 현문 밖에 올리니, 드디어 현궁(玄宮)을 닫았다. 집의(執義)가 봉쇄(封鎖)에 삼가 서명(署名)하였고, 우의정이 아홉 삽(鍤)의 흙을 덮은 후에 여러 신하가 물러나왔다. 봉사위(奉辭位)에 나아가 절하고 곡한 다음 왕자 및 총호사·예조 판서·도감 당상·승지·사관(史官)이 모두 길유궁(吉惟宮)에 나아가 제주례(題主禮)를 거행하였다.
대축(大祝)이 우주(虞主)를 받들어 내어 탁자 위에 뉘어 놓으니 제주관(題主官)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서쪽으로 향하여 서서 제주(題主)180) 하였고, 사자관(寫字官)이 칠(漆)로 자획(字畫)을 보첨한 다음 대축이 영좌(靈座) 위에 안치하니, 입주전(立主奠)을 거행하고 드디어 반우(返虞)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 뒤를 따라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임금이 나와 맞이하였다. 통례(通禮)가 신연(神輦) 앞에 나와 잠시 멈추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곡배(哭拜)한 다음 드디어 신연을 모시고 효령전(孝寧殿)181) 에 이르러 초우제(初虞祭)를 거행하였다.
제주(濟州) 세 고을의 백성 1백여 인이 올라와 인산(因山)에 집역(執役)하기를 청하고, 또 네 가지 토산물(土産物)을 올렸으나, 예조에서 퇴각(退却)하고 받지 않았다. 정원에서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회로(回路)의 양식을 주어 보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제주에 여러 해 연달아 큰 흉년이 들자 대행 대왕(大行大王)이 여러 차례 선곡(船穀)을 보내어 구제하라고 명하였고, 심지어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휼(賑恤)을 감동(監董)하게 하였으므로, 섬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완전히 소생했으니, 북쪽으로 머리를 굽혀 성덕(聖德)을 칭송한 지 오래였다. 휘음(諱音)을 듣자 바다를 건너 먼 길에 발을 싸매고 올라와 이런 소박(素朴)한 정성을 바쳤으니, 거룩한 성덕이 변방의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다면 저 어리석은 무리들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아! 거룩하도다.
10월 22일 을묘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반우(返虞)를 따라 서교(西郊)에 이르러 소를 남겨 놓고 시골로 돌아가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10월 24일 정사
삼우제(三虞祭)를 거행하였다. 수찬(修撰) 조문명(趙文命)이 시골에 있으면서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臣)의 문학은 사장(詞章)과 고명(誥命)을 빛내지 못했고, 식견(識見)은 고문(顧問)에 대비(對備)하지 못했으며, 언론은 부박(浮薄)한 풍습을 진정시키지 못했으니, 논사(論思)의 중요한 자리는 신이 또한 감당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설령 감당할 실력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나가지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애석합니다. 저번 세 유신(儒臣)이 나온 것은 어찌 그리 돌연하였는지요? 한때의 지나치게 과격한 대간의 말이야 비록 오래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다 하겠으나, 유신에게 논박을 당한 일에 이르러서는 유신이 염의(廉義)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몸 밖으로 집어 내동댕이치고 있지 못할 관직(館職)에 무릅쓰고 있으면서 심지어는 폐초(廢草)하기로 완의(完議)된 유래(流來)의 규례를 구차히 처리하고 잠깐 나왔다가 문득 들어갔으니, 무슨 바쁜 일이 있어 이와 같이 황황 급급(遑遑汲汲)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대개 대신이 연주(筵奏)에서 관직(館直)의 모양을 갖추는 데 급히 서두르므로, 저도 또한 대신의 뜻을 본받아 다만 관사(館事)의 중대한 것만을 생각하고 한 몸의 나가야 옳은지 나가지 않아야 옳은지는 계교(計較)하지 아니하여 이같은 창망(蒼茫)하고 어슴푸레한 거조를 자아냈는가 합니다. 그러나 그 득실(得失)은 신에게 있어서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논하는 자의 말에, ‘당록(堂錄)을 주관하는 사람이 이미 염의를 무릅쓰고 담당한 혐의가 있으면, 당록에 참여하는 사람도 또한 무릅쓰고 나갈 수 없는 의(義)가 있다.’ 하였으니, 신이 비록 용렬하지마는 어찌 이 사람의 천거를 기꺼이 받아 구차히 한 몸의 영화를 도모하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10월 26일 기미
사우제(四虞祭)를 거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태구(趙泰耉)가 소를 올려 명소(命召)를 도로 거둘 것을 거듭 간청하니, 임금이 승지(承旨)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10월 27일 경신
조상경(趙尙絅)를 사간(司諫)으로, 김용경(金龍慶)을 정언(正言)으로, 이중협(李重協)을 수찬(修撰)으로, 이기진(李其鎭)을 부교리(副校理)로, 심택현(沈宅賢)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았다.
10월 28일 신유
오우제(五虞祭)를 거행하였다.
10월 30일 계해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죽고, 평방 성의(平方誠義)가 습작(襲爵)하였다. 역관(譯官) 2인을 보내어 조의(弔儀)와 하례(賀禮)를 겸행(兼行)하였고, 부의(賻儀) 물품을 주었으며, 도서(圖書)182) 를 개조(改造)하여 보냈으니, 전례를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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