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1724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22.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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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임인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고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하였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좌승지(左承旨) 박내정(朴乃貞), 수찬(修撰) 홍정상(洪廷相) 등이 말하기를,
"재이(災異)193)  가 거듭 이르고 음우(陰雨)와 지진(地震)이 있는 것은 바로 형법(刑法)이 펴지지 않아 음기(陰氣)가 너무 왕성한 소치입니다. 청컨대 빨리 삼사의 계청(啓請)을 윤허하시어 하늘의 견책(譴責)에 보답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조상경(趙常慶)이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혹시라도 정범(正犯)을 잘 조사해 내지 못해서 도리어 옥석(玉石)을 함께 불태울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당시 장선(掌膳) 궁비(宮婢)를 우선 먼저 섬으로 귀양보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또 들어주지 않았다. 집의(執義) 이진순(李眞淳)이 논하기를,
"장령(掌令) 이정필(李廷弼)이, 공채(公債)를 징족(徵族)194)  하지 말게 하라고 발론한 계달(啓達)은 그 형적이 사정을 낀 데 가까우며, 또 지난번 사헌부(司憲府) 직임(職任)에 있을 적에도 전포(廛鋪)195)   사람과 베[布]를 가지고 다툰 사건으로 추조(秋曹)196)  에서 조사하여 판결(判決)한 뒤에 차인(差人)197)  을 보내어 〈가게 보는 사람을〉 잡아다 가두고 매를 때린 다음 방송(放送)하였으며, 이번에 헌부에 들어와서도 다시 많은 사람을 수금(囚禁)하고는 강제로 그 베를 속공(屬公)시키려 하였고, 또 본부(本府)의 규칙(規則)에 관아(官衙)에 나아가지 않으면 출금(出禁)198)  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도 집에 있을 때에도 날마다 계속 출금을 하였으며, 그의 겸인(傔人)199)  으로서 새로 서리(書吏)에 차임된 자를 보내어 여리(閭里)를 제멋대로 쏘다니게 하여 도성(都城) 안의 백성들이 이를 원망 비방하고 진신(搢紳)들도 비방하기에 신이 글을 보내어 규제하여 깨우쳐주고 물의(物議)가 있다고 일렀는데도 안연(晏然)히 자리에 나아가 조금도 의란(疑難)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2일 계묘

임금이 장차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려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 이조(李肇)가 청대(請對)하여, 날씨가 뜨거움을 이유로 서늘해지기를 기다려서 날짜를 물려 정하도록 청하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계론(啓論)하기를,
"일전에 중일 시재(中日試才)200)   때에 액례(掖隷)201)  로 간계(奸計)를 쓰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가 있어 해조(該曹)로 이송(移送)하였는데, 법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지 아니하고 곧 속전(贖錢)을 징수하는 잘못된 법규를 적용(適用)하였습니다. 청컨대 형조 당상(刑曹堂上)을 추고(推考)하고, 간계를 부리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는 법률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정걸(李廷傑)을 장령(掌令)으로, 임광필(林光弼)을 정언(正言)으로, 정제두(鄭齊斗)를 좨주(祭酒)로 삼았다.

 

7월 4일 을사

사간원(司諫院) 【임광필(林光弼)이다.】 에서 계청(啓請)하기를,
"각사(各司)의 이서(吏胥)를 다 찾아 모아 그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음을 상량(商量)하여 수효를 정해서 삭제(削除)해 감원(減員)하고, 서교(西郊)의 덕현사(德峴寺)와 동교(東郊) 30리 안의 승사(僧舍)를 모두 훼철(毁撤)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포도 대장(捕盜大將) 이봉상(李鳳祥)은 오로지 우선 탈없이 편안한 것만 일삼고 기꺼이 직사(職事)에 뜻을 다하지 않으며, 정읍 현감(井邑縣監) 이익형(李益烱)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미련하며 행동이 비천(卑賤)하더니 일찍이 혼궁(魂宮)의 충의(忠義)202)  가 되어 환시(宦侍)들과 친압하여 서로 네니 내니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봉상은 체차(遞差)하고 이익형은 사판(仕版)203)  에서 삭제토록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박윤동(朴胤東)을 지평(持平)으로, 오명준(吳命峻)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7월 5일 병오

윤용(尹容)이 해서 방백(海西方伯)을 사임하여 패초(牌招)를 어긴 것이 열 두어 차례에 이르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어 그를 체임(遞任)시키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시환(金始煥)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7월 6일 정미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자,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諭示)하고 조금 서늘하기를 기다려서 올라오도록 하였다.

 

7월 7일 무신

정유년204) 온양(溫陽) 별시(別試)에 합격한 이유춘(李囿春)의 과제(科第)205)  를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이유춘의 아버지 이성채(李星彩)는 온양 사람으로, 비천(卑賤) 한미(寒微)하였으며 글을 못하였고, 그와 친했던 윤시택(尹時澤)은 글을 잘하였는데, 윤시택이 부상(父喪)을 당하여 아직 장례를 치루기 전에 온양 행행(溫陽幸行)에서의 정시(庭試)를 당하자 윤시택에게 후하게 장례에 수용(需用)할 물자를 지급해 주기로 약속해서 최복(衰服)을 벗고 과장(科場)에 들어가 이성채와 그의 아들 이유춘을 위해 대신 글을 지어 주어 모두 합격이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성채와 원한이 있는 집에서 대간(臺諫)에게 부탁하여 논계(論啓)하였고, 이를 조사한 결과 사실을 캐냄으로서 마침내 부자(父子)가 같은 방(榜)에 참여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하여 이유춘의 과제(科第)를 삭제하고, 아울러 윤시택을 법대로 정배(定配)하였다.

 

7월 8일 기유

충청도(忠淸道)에 백충(白蟲)이 발생하여 농사를 손상시켰고, 남포현(藍浦縣)에는 게[蟹]가 벼의 줄기를 씹어서 온 들판에 피해가 있었다.

 

임금이 이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이사(尼舍)206)  를 훼철(毁撤)하도록 하라는 계청에 따랐다가 다시 하교(下敎)하기를,
"오래된 사찰(寺刹)은 훼철하기 어려우니,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 승정원(承政院)에서 대답하기를,
"사간원(司諫院)에서 훼철을 청한 것은 본래 구찰(舊刹)이 아니라 바로 새로 창건한 사찰이며, 동교(東郊)에서 엊그제 벌써 훼철을 하였으니, 지금 훼철하지 말도록 하라는 하교(下敎)는 받들어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7월 9일 경술

조익명(趙翼命)을 부응교(副應敎)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심수현(沈壽賢)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오수원(吳遂元)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7월 11일 임자

김일경(金一鏡)을 판윤(判尹)으로, 유수(柳綏)를 사간(司諫)으로,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이진급(李眞伋)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7월 12일 계축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고, 토성(土星)에 백기(白氣)가 하늘에 뻗쳐 남으로부터 북에 이르렀는데, 한참 있다가 비로소 없어졌다.

 

7월 14일 을묘

사간원(司諫院) 【임광필(林光弼)이다.】 에서 계론(啓論)하기를,
"무과(武科)의 강(講)하는 규례(規例)가 너무 수월하고 그 액수(額數)가 한정이 없으니, 청컨대 묘당(廟堂)과 병조(兵曹)로 하여금 개정(改定)하여 영구히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7월 16일 정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박윤동(朴胤東)이다.】 에서 논하기를,
"경리청(經理廳)에서 화폐를 총괄하고 이익을 독점하므로 그 해독(害毒)이 생민(生民)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차인(差人) 최수징(崔壽徵)과 김우태(金遇兌)는 팔도[八路]를 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더러는 대동미(大同米)207)  를 방납(防納)208)  하기도 하고 더러는 조곡(糶穀)209)  을 사들여 남는 것을 탐내어 이익을 취득하니, 그 귀착지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 폐단이 첩첩이 발생하여 백성이 생활을 지탱하기가 어려우며, 진휼청(賑恤廳) 차인(差人) 서필웅(徐必雄)과 함대우(咸戴禹)는 이익으로 유사(有司)를 꾀어 관가(官家)의 돈을 도모해 얻어서는 호남과 영남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 여리(閭里)를 소요하게 만들었으므로 남쪽 사람들은 그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유사의 신하는 지금 이미 죽었으니 비록 추급해 줄 수는 없으나, 이는 간교(奸巧)한 무리들이 교묘한 꾀로 농락한 데 말미암은 소치이니, 청컨대 일을 맡았던 네 사람을 먼 곳에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또 경리청(經理廳)에서는 차인(差人)의 속임수의 말만 신임해 듣고 가을이 오면 선곡(船穀)이 많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미리 인가(人家)를 사서 창고(倉庫)를 설치하려고 했으므로 강가에 사는 친근한 무인(武人)이 자기 집을 팔려고 청하자 가사(家舍)의 많고 적음을 묻지도 아니하고 수백 냥의 백금(白金)을 지급하였는데, 그 뒤에 선곡이 이르지 않자 강가의 집은 갑자기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본청(本廳)으로 하여금 그 집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지불한 값의 본전을 받아 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유사(有司)의 신하는 바로 이유(李濡)이었다. 또 논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은 군부(君父)의 과실을 들추어 내었고, 이지규(李志逵)는 글을 지어 역적 이홍술(李弘述)을 조문(弔問)하면서 절의(節義)로 칭찬하였으며, 권응(權譍)은 흉역(凶逆)의 시체를 위로하고 적몰(籍沒)해 들인 재산을 숨겼습니다. 그런데도 경상도(慶尙道)에서는 방면(放免)할 죄수와 방면하지 않을 죄수를 계문하는 문서에 다같이 품질(稟秩) 속에 두었으니, 공의(公議)가 모두 놀랍게 여깁니다. 청컨대 감사(監司) 김동필(金東弼)을 중률(重律)에 따라 추고(推考)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봉징(柳鳳徵)을 승지(承旨)로, 이익한(李翊漢)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박동상(朴東相)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7월 17일 무오

비변사(備邊司)에서 계론(啓論)하기를,
"각릉(各陵)의 참봉(參奉)을 모두 승품(陞品)시켜 영(令)으로 삼게 되면 능관(陵官)이 자주 체임되어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자, 이조(吏曹)에서 계청(啓請)하기를,
"29능(陵) 중에 8능(陵)은 도로의 이수(里數)가 조금 멀어서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있으니 전과 같이 그대로 참봉(參奉) 2원(員)을 두고, 그 나머지 20능 중에 또 8능은 참봉 1원을 직장(直長)으로 삼고, 13능은 참봉 1원을 봉사(奉事)로 삼으며, 경사(京司)에 직장 8자리와 봉사 9자리를 모두 승품하여 영(令)으로 삼고, 주부(主簿)와 별제(別提) 등의 벼슬과 빙고(永庫)와 전설사(典設司)의 별검(別檢)을 모두 별제(別提)로 승품하고, 영희전(永禧殿)·영휘전(永徽殿)의 참봉 1원을 승품하여 영(令)을 삼으면, 참하(參下)를 감하여 참상(參上)의 지위를 증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정(大政)210)  을 행하여 이진급(李眞伋)을 부교리(副校理)로, 권익순(權益淳)을 승지(承旨)로, 김상규(金尙奎)를 헌납(獻納)으로, 이정제(李廷濟)를 대사간(大司諫)으로, 박필몽(朴弼夢)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강현(姜鋧)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삼았다.

 

7월 18일 기미

김일경(金一鏡)을 우참찬(右參贊)으로, 김상규(金尙奎)를 응교(應敎)로, 이인징(李麟徵)을 판윤(判尹)으로, 이정걸(李廷傑)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7월 19일 경신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약방(藥房)211)  의 입진(入診)으로 인하여 계언(啓言)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은 직무(職務)를 거행(擧行)함에 매우 부지런하였는데, 정원(政院)과 서로 다투면서 심지어는 퇴거(退去)하라는 말까지 있게 되었으며 의심하고 화냄이 더욱 격렬하여지니, 이것이 곧 그의 병통(病痛)입니다. 그리고 윤순(尹淳)은 문학과 사한(詞翰)이 평범한 유(類)보다 뛰어난데, 제배(儕輩)들 사이에 더욱 막히고 격리(隔離)되어 심지어는 고금(古今)에 듣지 못했던 소조(所遭)까지 있어서 제수(除授)하는 대로 번번이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명언(李明彦)은 나라를 향한 정성과 부지런함이 조정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는데, 성묘(省墓)길에서부터 갑자기 물러가 쉴 계획을 하였으니, 반드시 그의 마음속에 즐겁지 못한 바가 있었을 것이나, 이는 태평을 누릴 때에는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같이 어렵고 위태로울 때에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김일경을 패초(牌招)하시고, 윤순은 다시 인혐(引嫌)하지 말도록 하며, 이명언은 조정(朝廷)에 돌아오도록 타일러 훈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독약(毒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罪惡)인데, 성궁(聖躬)을 모해(謀害)한 사람이 궁중(宮中)에 있는데도 조사해 내어 법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찌 이같은 신자(臣子)가 있겠습니까? 역비(逆婢)는 계집종으로 부리는 무리에 불과한데 전하께서는 조사해 내는 데 무엇이 어려워서 이렇게 해이하고 완만하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 일이 없다."
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다투어 논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으며, 양사(兩司)에서 각각 앞서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니 임금이 단지 무과(武科)의 시험 규정의 개정(改定)과 경리청(經理廳) 차인(差人)의 배소(配所)를 정하는 것과 사들인 가사(家舍)를 본래의 주인에게 환급(還給)하라는 청만 따랐다. 부교리(副校理) 신치운(申致雲)이 시원한 가을철을 당하였으니 자주 경연(經筵)을 열어서 경사(經史)를 토론(討論)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7월 20일 신유

임금이 병환이 있어 편치 않으므로 약방(藥房)에서 날마다 문안(問安)하였다.

 

7월 21일 임술

사헌부(司憲府) 【박윤동(朴胤東)이다.】 에서 논하기를,
"한산인(韓山人) 김홍적(金弘績)도 경리청(經理廳)의 차인(差人)으로서 관서(關西)의 세미(稅米)를 빼내어 흥정해 판매하고 백금(白金) 천여 냥(兩)을 포흠(逋欠)212)  하였는데, 김홍적이 관가(官家)의 돈으로 임피(臨陂)에서 사들인 논 30여 석(石)지기의 생산되는 것으로 해마다의 수치를 계산하여 포흠을 모두 상환한 뒤에 도리어 출급(出給)해 달라는 뜻으로 본청(本廳)에 고소(告訴)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논값은 본래 관가(官家)의 돈이었으므로 김홍적에게 환급(還給)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청컨대 김홍적은 멀리 유배(流配)하고 그 전답(田畓)은 본청에 몰입(沒入)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            유수(柳綏)이다.】        에서 계론(啓論)하기를,
"역적의 괴수는 법에 의해 사형되었으나 나머지 적당들은 법망(法網)을 빠져나가 요망과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인심(人心)을 선동(煽動)하였는데, 어비(御批)213)                  를 위조(僞造)하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황하신(黃夏臣)의 국문(鞫問)은 대개 엄중하게 징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이경(李坰)을 앞질러 먼저 참작하여 처리한 것은 죄는 같은데 벌(罰)이 달라 법률의 적용이 반박(斑駁)214)                  되었습니다. 청컨대 다시 왕부(王府)215)                  로 하여금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정실(情實)을 얻어 내도록 하소서."
하였고, 또 논하기를,
"이유춘(李囿春)이 제술(製述)을 빌린 정절(情節)은 이미 윤시택(尹時澤)의 공초(供招)에서 드러났고 과장(科場)에서 간교(奸巧)를 부린 것은 스스로 해당되는 형률이 있는데, 이유춘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그의 음모(陰謀)와 흉계(凶計)가 모두 그의 아비 이성채(李星彩)의 주장(主張)이었습니다. 청컨대 이유춘은 이세정(李世禎)의 예(例)에 의거하여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고, 이성채는 박태회(朴泰晦)의 예에 의거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3일 갑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종묘(宗廟)의 전알(展謁)은 성상(聖上)의 환후(患候)가 쾌하게 회복되기를 기다리도록 그 시기를 물리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송상기(宋相琦)가 지은 선왕(先王)의 시장(諡狀)은 너무 소루하고 간략합니다. 청컨대 사신(詞臣)216)  을 시켜 별도로 행장(行狀)을 짓도록 하소서. 그리고 임금이 즉위한 뒤에는 의례적으로 태봉(胎峯)217)  의 석물(石物)을 더 배설(排設)하는 조치가 있는 법인데, 선조(先朝)께서 즉위하신 후에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정지시키고 물려오다가 계해년218)  에서야 처음으로 거행하였습니다. 지금 수환(水患)이 극도로 심하고 또 한재(旱災)가 있으니, 청컨대 우선 명년 가을 농사의 흉풍(凶豐)을 보아서 다시 품지(稟旨)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억(趙敎億)이 함께 입대하여 경비(經費)가 다 떨어져서 잇대어 쓸 수가 없다는 이유로 안흥(安興)과 양진(揚津) 창고의 쌀 각각 2천 5백 곡(斛)과 진휼청(恤賑廳)의 쌀 5천 곡, 그리고 선혜청(宣惠廳)의 쌀 1만 곡을 편리한 대로 취하여 쓸 것을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7월 25일 병인

양사(兩司)에서 앞서 계달한 일을 다시 아뢰었는데, 임금이 단지 최수징(崔壽徵)·이성채(李星彩)·이유춘(李囿春)의 일만 따랐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7월 26일 정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계론(啓論)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유(尹游)가 감사(監司) 김동필(金東弼)을 멸시하여 거만한 말로 침책(侵責)을 하고 패악(悖惡)한 말로 능력(凌轢)219)  하였으며 연명(延命)220)  을 하던 날에는 정문을 열어주지 않은 데 화를 내어 영리(營吏)까지 잡아갔는데도 김동필은 부하를 잘 단속하지 못하고 한갓 스스로 모욕만 당하였으니, 진실로 피연(疲軟)221)  한 실책도 있으나, 윤유의 사기(辭氣)는 더욱 교만하여 상관(上官)을 차고 밟고 하였으니 지극히 놀랄 만합니다. 그리고 판윤(判尹) 이인징(李麟徵)은 나이도 늙고 신병(身病)도 있어 사송(詞訟)222)  이 적체(積滯)해 있으며, 결성 현감(結城縣監) 박사일(朴思一)은 사리에 어두워서 능히 사체를 살피지 못하며, 양덕 현감(陽德縣監) 김대(金岱)는 술에 빠져서 정사(政事)를 하리(下吏)에게 맡겼고, 토산 현감(兎山縣監) 김정희(金鼎熙)는 간악(奸惡)하여 오직 자기의 이익만을 일삼으며, 증산 현령(甑山縣令) 이광적(李光績)은 괴팍하고 표독하여 정치와 형벌이 지나치게 혹독합니다. 청컨대 이인징은 체임(遞任)하고, 윤유·박사일·김대·김정희·이광적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7일 무진

사간원(司諫院) 【한사득(韓師得)이다.】 에서 계론(啓論)하기를,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일경(金一鏡)이 사직(辭職) 상소를 받들어 들이지 않는데 화를 내어 후원(喉院)223)  을 침책(侵責)하고 기세(氣勢)를 부려 사람을 능멸하였으니 본시 놀랄 만한데다가, 승지(承旨)는 대소(對疏)에 중신(重臣)을 짓밟으며 꾸짖고 욕보이기를 낭자(狼藉)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그리고 명천 부사(明川府使) 황재징(黃再徵)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과람한데다가 또한 결점과 비방이 많으며, 철산 부사(鐵山府使) 박진규(朴震圭)는 천성이 광패(狂悖)하여 이임(吏任)에 합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동필(金東弼)은 도내(道內)에 유배(流配)된 죄인(罪人)이 범죄를 저지른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논하지도 않고 품질(稟秩) 속에 올려 둔 것이 10여 인에 이르며, 귀양온 사람들을 돕고 불쌍히 여기기를 친척(親戚) 보호하듯이 하고는 베푼 은덕의 생색을 완곡하게 보이는 등 현저하게 그 정태(情態)를 나타내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을 명하여 다시 서용(敍用)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8일 기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7월 29일 경오

사간원(司諫院)에서 앞서 계달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다만 황재징(黃再徵) 등의 일만 따랐다.

 

이광보(李匡輔)를 지평(持平)으로, 유필원(柳弼垣)을 부응교(副應敎)로, 권이진(權以鎭)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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