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4월 1일 갑술
당초에 장희재(張希載)가 역적으로 죽임을 당함으로 해서 그의 어린 아들 장종경(張終卿)과 며느리 실애(實愛)가 연좌되어 귀양을 갔었는데, 이때 와서 종[奴]을 시켜 격고(擊鼓)하여 호소하며 석방(釋放)을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의 복계(覆啓)를 기다리지 않은 채 윤허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그 명령을 정침하라고 재차 계청(啓請)하고 사헌부에서 또 논계(論啓)하여 다투었는데, 따르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독약을 탄 김성(金姓) 궁인(宮人)을 유사(攸司)에 넘겨서 왕법(王法)으로 쾌히 바로잡기를 청하고, 옥당(玉堂)에서 또 차자를 올려 논쟁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경기(京畿) 용인(龍仁) 등 다섯 고을과 충청도 청안(淸安), 평안도 의주(義州)에 우박이 내리고, 함경도 홍원현(洪原縣)에 산불[地火]이 치솟아 10여 일 동안 꺼지지 않았는데, 흙이 검게 그을리고 풀이 타고,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윤4월 2일 을해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고, 옥당(玉堂)에서 상차(上箚)하여 김성 궁인의 일에 대한 논쟁을 날마다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품계(稟啓)하기를,
"대비전 진연(進宴) 때의 내명부(內命婦)의 입참 절목(入參節目)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일이 너무 매몰(埋沒)할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마련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4월 3일 병자
심공(沈珙)을 우승지(右承旨)로 삼았다.
윤4월 5일 무인
밤에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밑에서 나왔다.
김시경(金始慶)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진망(李眞望)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조진희(趙鎭禧)를 교리(校理)로, 홍정상(洪廷相)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윤4월 6일 기묘
사간원(司諫院)에서 논계(論啓)하기를,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인복(李仁復)은 권흉(權凶)이 국권(國權)을 잡고 있던 날 그의 추천을 받아서 옥당(玉堂)에 선발되었다가, 개기(改紀)116) 하던 처음에 와서는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를 ‘사흉(四凶)’이라고 곧바로 지척(指斥)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에 ‘세속에서 이른바 사흉’이라는 등의 말로 소장(疏章)에 썼으므로 공론이 놀라와하고 분개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어제 또 허목(許穆)의 서원을 훼철하는 데 대한 일을 상소로 논하면서 이에 ‘선정(先正)’이라는 두 글자를 가하여 쓰는가 하면, 또 ‘근래의 선정으로서 허목처럼 티없이 순수한 사람이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은연중 한 시대의 명현(名賢)을 속이려는 뜻을 두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치 말게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전(前) 장령(掌令) 이단장(李端章)은 전장(銓長)117) 의 아룀을 공격하면서 마음껏 모함한 일은 오로지 해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제의 세초(歲抄)118) 에서 갑자기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시므로, 공론이 한층 더 격력합니다. 청컨대 서용하라는 명을 정침하시고 인하여 관직(官職)을 삭탈(削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윤4월 7일 경진
왕대비(王大妃)의 병환이 평복되었으므로 약방(藥房) 제조(提調) 이하 관원에게 상전(賞典)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게 하였다.
이세근(李世瑾)·유봉징(柳鳳徵)을 승지(承旨)로, 신치운(申致雲)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함에 있어 매우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정언(正言) 구명규(具命奎)는 말하기를,
"명(明)나라 홍무(洪武)119) 연간에 궁중(宮中)에서 저주(咀呪)한 변고가 있었는데, 이때 고 황제(高皇帝)가 온 궁중의 궁인을 다 죽였습니다. 청컨대 어선(御膳)을 맡았던 궁인을 모두 찾아내어 외옥(外獄)에 넘기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인주(人主)로서 잔인하게 학살(虐殺)을 감행함이 명나라 고 황제(高皇帝) 같은 이가 없는데, 남의 신하가 되어 당시 임금에게 진언(進言)을 하면서 정작 이것으로 경계는 하지 못할 망정 도리어 이것으로 법을 삼으라고 권하였으니, 무식함이 심하도다.
윤4월 8일 신사
햇무리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는데, 승지 심공(沈珙)이 말하기를,
"어제 삼사(三司)에서 입시(入侍)하여 궁인의 일을 논하면서, 임금의 하교에 ‘이미 죽었다.’고 하신 말을 사관(史官)이 사초(史草)에 등재(謄載)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병으로 귀가 먹어 자세히 듣지 못하였지만 삼사(三司)의 신하들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왕언(王言)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 것인데, 만약 하교가 과연 사관이 들은 바와 같다면 이미 죽은 사람을 베자고 청할 리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집의 김시혁(金始㷜)이 말하기를,
"이제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하교를 받들고 보니, 신들도 사관이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니, 사관이 드디어 임금의 하교 중 ‘이미 죽었다[旣死]’는 두 글자를 사책(史策)에서 삭제해 버렸다. 이때 임금이 너무 침묵을 지켜서 뭇 신하들이 사안(事案)을 아뢰어도 수답(酬答)이 드물었고, 또 음성이 낮아서 가끔씩 여러 신하들이 잘 듣지 못하여 사관이 쓴 기사도 틀리기도 하였다. 이번에 심공의 진품(陳稟)은 본시 곧은 말인데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답이 역시 명백한 하교가 아니었으니, 연신(筵臣)이 그것을 다시 계청(啓請)하지 않은 채 이미 기록된 사초(史草)를 바로 고친 것도 그 또한 무엄한 처사라 하겠다.
윤4월 9일 임오
삼사(三司)에서 비로소 복합(伏閤)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시필(李時弼)이 제주(濟州)에서 잡혀 오던 중 남해(南海)에 이르러 자살(自殺)을 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논하기를,
"잡아 오던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방수(防守)를 엄격히 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전(前) 병사(兵使) 김수(金洙)가 장세상(張世相)과 결탁한 일을 가지고 대계(臺啓)에서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명(赦命)으로 인하여 완전히 석방해 주었습니다. 아무리 그의 공사(供辭)로 보아 밀담(密談)을 하고 칼을 건네준 일은 혹 밝히기 어렵다고 핑계할 수도 있겠으나, 연접(延接)해 보고 건네준 형적(形跡)이 사실 자수에서 드러났습니다. 자신이 곤외(閫外)를 통제하는 원수(元帥)가 되어 죄를 지은 흉악한 환관(宦官)을 수없이 접견하였으니, 만약 조정을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그처럼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4월 10일 계미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쟁하기를 날마다 계속하였다.
유명응(兪命凝)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강원도 통천군(通川郡)에 불이 나서 공해(公廨) 2백 52칸과 민가(民家) 1백 2호가 탔다.
평안도 개천(价川)·은산(殷山)·맹산(孟山) 등의 고을에 눈비가 번갈아 내렸다.
윤4월 11일 갑신
개가 요금문(曜金門)으로 들어왔다.
윤4월 12일 을유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연령군(延齡君)의 종이 시장 사람을 구타하고는 이에 도리어 본방(本房)120) 에 무소(誣訴)하여, 심지어 종부시(宗簿寺)에서 초기(草記)로 형벌을 청한 거조까지 있었습니다. 하찮은 시민이 왕자궁(王子宮)에 욕설을 한다는 것은 사리에 근사하지도 않은만큼, 본시(本寺)로서는 당연히 유사(有司)에게 분부하여 조사해 처리하도록 청하여야 할 것인데 바로 엄형(嚴刑)을 청하여 곤장을 맞고 죽기에 이르렀으니, 성치(聖治)에 누도 되거니와,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되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청컨대 종부시 제조(提調)를 추고(推考)하게 하고 이제부터 모든 궁가에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유사에게 분부하여 종부시는 안치(按治)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충청도에 우박이 내려서 곡식이 손상되었다.
윤4월 13일 병술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였는데, 하루에 두 번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경기도 양주(楊州)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새알 만하였다.
윤4월 14일 정해
밤에 달이 구성(鉤星)·금성(金星)을 범하였다.
삼사에서 복합하여 하루에 세 번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유명응(兪命凝)을 승지(承旨)로, 권익순(權益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권익순은 몽매하고 비루하여 한 치의 장점도 없었지만, 다만 김일경(金一鏡)의 지친(至親)이기 때문에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된 뒤에 갑자기 변방 고을 부사(府使)로 승진되었다가 이에 이르러 또 대사간에 제배(除拜)하니, 공론이 놀라와하였다.
윤4월 15일 무자
삼사(三司)에서 다시 복합(伏閤)하여 하루에 세 번을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 그 후로 매일 이를 상례(常例)로 하였다.
윤용(尹容)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윤4월 18일 신묘
밤에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윤4월 20일 계사
삼사에서 매일 복합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하였으나, 임금이 끝까지 듣지 않았다. 이에 대사헌 이세최(李世最)·대사간 권익순(權益淳)·교리 박필기(朴弼夔) 등이 모든 동료를 이끌고 궐 밖으로 물러나 엎드려서 견책(譴責)하여 줄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김성 궁인은 의혹할 만한 일이 없으니 번거롭게 소요하지 말 것이며, 사피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라."
하였다.
윤4월 21일 갑오
밤에 유성(流星)이 기성(箕星) 밑에서 나오고, 미시(未時)에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도승지(都承旨) 이만선(李萬選) 등이 입대(入對)를 청하여 말하기를,
"김성 궁인의 일은 삼사의 소비(疏批)에 그럴 만한 의혹이 없다고 한 하교가 있습니다. 어찌 이 장선(掌膳) 중에 김씨 성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난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죽었다는 겁니까? 설령 없다고 하여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한다면 백성들의 의혹이 시원하게 풀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없다고 하였다. 여러 승지들의 차례로 진달(陳達)하여 쉬지 않고 떠들어 대자 임금이 역정을 내며 말하기를,
"승지가 감히 군부(君父)에게 침묵만 지킨다고 말하다니! 모든 승지를 일체 나문(拿問)하라."
하였다. 승지들이 모두 대궐 밖으로 뿔뿔이 물러나가니, 이윽고 사알(司謁)에게 명하여 앞서의 명을 거두어들이고 다시 모든 승지를 불러들였는데, 승지들이 황공하여 감히 다시 입대를 청하지 못하였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약원(藥院)에 명하여 지난해 황수(黃水)를 토한 월(月)·일(日)을 상고하여 그날의 주방 나인[厨房內人] 중에서 김씨 성을 가진 자를 찾아내어 왕옥(王獄)에 넘겨 옥사(獄事)를 잘 심리하도록 할 것을 청하고, 이어 삼사의 관원을 불러들여서 돌려보내고 쾌히 따르겠다는 뜻으로 타이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주방 나인 중에 의심스럽고 유사한 김씨가 전혀 없는데도 대신(臺臣)이 이처럼 조사해 낼 것을 청하니,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였다. 이로부터 삼사에서 다시는 복합(伏閤)하지 않았다.
윤4월 22일 을미
조석명(趙錫命)을 부응교(副應敎)로, 유필원(柳弼垣)·김시혁(金始爀)을 교리(校理)로, 이광덕(李匡德)을 부교리로, 윤광익(尹光益)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중술(李重述)을 집의(執義)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삼았다.
윤4월 23일 병신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 등이 3품관(三品官) 이상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김성 궁인을 조사해 내어 외옥(外獄)에 넘겨서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장선 궁인(掌膳宮人) 중에 그럴 만한 김씨는 본래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부교리 이광덕이 또 자잔를 올려 논하니, 임금이 조사해 낼 이유가 없다고 답하였다.
윤4월 26일 기해
이사상(李師尙)을 도승지(都承旨)로, 이명언(李明彦)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오광운(吳光運)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병조 좌랑(兵曹佐郞) 정광제(鄭匡濟)는 역비(逆婢)의 토죄를 청할 즈음에 늦추고 회피하는 태도가 현저하게 보였습니다.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4월 27일 경자
사헌부(司憲府)에게 논계(論啓)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백성이 군영(軍營)의 창고에 조곡(糶穀)의 포흠(逋欠)하여 주관하는 별장(別將)에 의해 구류(拘留)되어 비록 원조(元朝)121) 가 되어도 석방하지 않고 있다가, 창고 안에서 불이 나서 갇혀 있던 두 사람이 불에 타서 죽었다고 합니다. 청컨대 그 별장은 죄를 결단하고 타 죽은 사람에게는 휼전(恤典)을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동궁(東宮)의 어린 딸이 두증(痘症)을 앓아서 임금이 자전(慈殿)의 하교에 따라 내간(內間)의 진연(進宴)을 정지시키니, 왕세제(王世弟)가 상소하기를,
"자성(慈聖)의 환후가 강녕을 되찾았으므로 진연을 거행하는 것은 종사(宗社)의 경사와 신민(臣民)의 다행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에, 날짜를 세어 가며 진연을 계획하여 보좌(寶座)앞에 술잔을 올려 자그마한 경축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보려던 것이었는데, 엎드려 듣건대 신의 딸이 두증을 앓고 있다 하여 갑자기 물려서 정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하니, 이는 뭇 신민의 심정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신의 마음의 불안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비록 자성(慈聖)의 애휼(愛恤)을 체험하신 성대하신 뜻과 성상께서 어길 수 없는 지극하신 효심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날짜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이제 와서 물려 거행할 것 같으면 일이 구애를 받게 됨은 진실로 논할 겨를이 없다 하더라도 막중한 연례(宴禮)에 어찌 하겠습니까? 의리에는 조금도 구애될 것이 없다고 하나 예법에는 크나큰 흠을 초래하는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공적인 까닭으로 해서 물려 정한다 해도 오히려 실망스러울 터인데, 더구나 일이 소절(小節)에 얽매여서야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자성(慈聖)께 여쭈어 물려서 거행하라는 명을 거두시게 하시고, 전에 택일(擇日)한 그대로 거행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대작례(大酌禮)를 물려서 거행하려는 일은 자성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간절한 성의가 이와 같으니, 부득이 억지로 따르겠다."
하였다.
봉교(奉敎) 윤상백(尹尙白)이 상소하기를,
"열조(列朝) 이래로 매양 《실록(實錄)》을 찬수(撰修)할 때를 당하여 도청 당상(都廳堂上)이 사관(史官)이 기록한 사초(史草)를 가져다가 마음대로 넣거나 빼고, 《실록》 찬수를 마치고 나서는 그 사초를 탕춘대(蕩春臺)의 물위에 흩어 버리고 이것을 ‘세초(洗草)’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렇게 당시에 그 사실이 다 없어져서 후세에서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게 됩니다. 설령 도청의 직임을 맡은 관원이 과연 모두 정인 군자(正人君子)이고 그들의 선택으로 취하고 버림이 하나같이 지당한 마음에서 나왔다해도, 사관의 원초(原草)만은 장구하게 보관해 두고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 본시 나쁠 것 없는데, 더구나 수찬을 맡은 자가 반드시 다 어질지 못하면 뽑는 데에서 공정한 마음으로 하지 못하여 버리고 취하는 것이 사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만약 사실이나 채록(採錄)하고 전례(前例)나 상고하려고 한다면 당후 일기(堂後日記)122) 만으로도 열람하는 자료에 만족합니다. 무엇하러 반드시 사관을 선발하며 사관을 중요시하겠습니까? 청컨대 이제부터는 찬수의 일을 마친 뒤에 한림(翰林)의 사초를 따로 한 궤짝에 담아서 《실록》과 함께 명산(名山)에 보관해 두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다.
윤4월 28일 신축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 이공윤(李公胤)은 괴벽하고 미련한데다가 행동과 모습마저 대체로 해괴한 데가 많습니다. 내국(內局)에서 의약(議藥)할 즈음에 이르러 그를 유의(儒醫)라 하여 동참(同參)을 허락하였으니, 매양 차례가 되는 날마다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가 누차 부른 뒤에야 느릿느릿 들어와서 다만 다른 여러 의관들의 입만 쳐다보다가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답할 뿐, 정성들여 깊이 연구해 보려는 뜻이 전혀 없고 괴로와하고 소홀한 태도가 현저히 보였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토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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