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신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이정필(李廷弼)이다.】 에서 논하기를,
"풍덕 부사(豐德府使) 최진일(崔震一)이 병(病)을 칭탁하고 일을 폐하였으며 많은 불법(不法)을 행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도성(都城) 밖에 있으면서 여러번 상소(上疏)하여 면직(免職)을 청하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로하고 유시(諭示)하니, 이광좌가 마침내 도성으로 들어왔다.
6월 2일 계유
이익한(李翊漢)을 승지(承旨)로, 이거원(李巨源)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윤진(尹晉)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경상도 안동(安東)·상주(尙州) 등의 고을에 큰 물이 지고 황충(蝗虫)이 발생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오명항(吳命恒)이, ‘의주(義州) 각 진보(鎭堡)의 변장(邊將)이 치보(馳報)한 사냥하는 오랑캐의 수효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하루 동안에 보고한 바가 많으면 30여 명에 이르고 적을 때에도 2, 30명에서 밑돌지 않으며, 나누어 타고온 마상선(馬尙船)이 압록강(鴨綠江) 일대(一帶)에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따르니, 이는 금령을 무시하고 왕래하는 자인 듯하므로 봉성(鳳城)에 빨리 통지하여 이를 금지시켜 후일의 폐단을 막아야 한다는 일’을 치계(馳啓)하였다.
6월 3일 갑술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다투어 의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으며, 사간원(司諫院)에서 앞서 계달(啓達)한 것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단지 최진일(崔震一)의 일만 따랐다.
전라도(全羅道)에 큰 물이 지고, 황충(蝗虫)이 생겼다.
6월 4일 을해
박내정(朴乃貞)을 승지(承旨)로, 유엄(柳儼)을 정언(正言)으로, 이명언(李明彦)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오수원(吳遂元)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강원도(江原道)에 큰 물이 지고, 황충이 생겼다.
6월 5일 병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일경(金一鏡)이 본조(本曹)에 업무(業務)가 번다하여 사기(史記)를 수찬(修纂)하는 일에 뜻을 전일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상소하고 해직(解職)을 청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서 받아들이기를 허락하지 않자, 김일경이 화가 나서 상소하여 승정원을 헐뜯기를,
"출납(出納)하는 곳에서 대부분 일을 잘 몰라서 소장(疏章)을 진퇴(進退)함에 있어서 국가(國家)의 체모에 적당한가 않은가를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시의(時議)를 따라 부앙(俯仰)하고 있으며, 더구나 선왕(先王)의 실록 수찬(實錄修纂)을 가지고 말하였는데 어찌 감히 방자하게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자, 승지(承旨) 이정제(李廷濟)가 상소하여 인혐(引嫌)하기를,
"이 사람과 시끄럽게 다투며 분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수찬(修撰) 이광보(李匡輔)가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김일경은 상소한 말이 이미 지나쳤지만 이정제 역시 재신(宰臣)을 대우하는 체모를 잃었으니, 청컨대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6월 7일 무인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사령(赦令)이 있은 뒤에 도내에 귀양와 있는 죄인(罪人) 등의 방면(放免)이 된 자와 방면이 되지 않은 자를 계문(啓聞)하자, 임금이 특별히 명(命)하여 방면되지 않은 죄인 이석보(李碩輔)와 고봉헌(高鳳獻)을 방송(放送)하도록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이석보의 사건(事件)은 장오(贓汚)161) 에 관계되고, 고봉헌은 죄명(罪名)이 매우 중합니다. 당초 성상(聖上)의 비답(批答)에, ‘내가 잠저(潛邸) 때부터 항상 매우 미워하였다.’고 하교(下敎)하셨는데, 지금 갑자기 석방(釋放)하시기를 마치 경미한 과실처럼 여기심이 있으며, 더구나 해부(該府)의 복주(覆奏)162) 를 기다리지 않은 것은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청컨대 빨리 성명(成命)163) 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무릇 두 번이나 계달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체로 귀양간 죄인을 소방(疏放)164) 함에 있어 이미 번신(藩臣)165) 이 순서를 나누어서 계문(啓聞)하는 절차가 있으니, 우선 유사(攸司)의 복품(覆稟)을 기다려서 판부(判付)166) 에 가부(可否)하는 것이 있어야 나라의 체모와 왕장(王章)167) 에 있어 진정 합당함이 되는데, 지금 이 두 죄수를 방송(放送)하라는 명은 실제로 이를 앞지른 데 관계되므로, 물정(物情)이 놀라고 의혹됨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고봉헌은 권력을 남용한 중관(中官)168) 으로서 죄범(罪犯)이 매우 중대하여 앞서 이미 ‘내가 잠저(潛邸) 때부터 항상 매우 미워하였다.’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이제 와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특별히 방송(放送)하는 것은 처분(處分)의 전도(顚倒)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근자의 풍습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꺼려해서 조금이나마 그 치장(鴟張)하는 형세를 그 치게 하겠는가? 지난번에 역적 박상검(朴尙儉)의 무리가 함부로 날뛰며 교만 방자하던 일을 생각하면 부지불각 중에 뼛골이 오싹하여지는데, 이 뒤에 이어 나가는 이에게 두려워하도록 매우 징계해야 할 일들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6월 8일 기묘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기를,
"근래 계속 흉년을 만나 세입(稅入)이 줄어들어 조달과 지출이 극히 구간(苟簡)169) 합니다. 금년 가을의 답험(踏驗)170) 을 소홀히 하면 반드시 전결(田給)이 더욱 줄어들 것이니, 각도의 도사(都事)와 경차관(敬差官)은, 청컨대 삼사(三司)171) 의 관원(官員) 중에서 상명(詳明)하고도 풍력(風力)이 있는 자로 차출하여 보내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 수의(繡衣)172) 를 나누어 보내어 복심(覆審)의 허실(虛實)을 염찰(廉察)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비변사(備邊司)에 내린 바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시행하기를 청하여 그대로 따랐다.
6월 9일 경진
사간원(司諫院) 【이정걸(李廷傑)이다.】 에서 앞서 계달한 일을 다시 아뢰고, 또 이석보(李碩輔)·고봉헌(高鳳獻) 등을 특별히 방송(放送)하도록 한 명령을 도로 정침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10일 신사
지평(持平) 이성신(李聖臣)이 일찍이, 박태항(朴泰恒)이 이사상(李師尙)을 영구(營救)173) 한 잘못을 탄핵한 바 있는데, 이보욱(李普昱)이 이사상의 당(黨)으로서 이에 이르러 지평(持平)이 되자 상소하여 이성신을 배척하고 그 잘못을 견책하여 체직(遞職)하도록 청하니, 이성신이 인피(引避)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이거원(李巨源)도 ‘이성신이 당초의 일을 논한 것도 이미 잘못이 많았는데, 지금 또 장황(張皇)하게 늘어 놓아 더욱 공평과 진실을 잃었다.’고 하면서 이성신을 체임하도록 청하였다.
유술(柳述)을 승지(承旨)로, 박필기(朴弼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6월 11일 임오
부응교(副應敎) 유필원(柳弼垣), 교리(校理) 신치운(申致雲), 수찬(修撰) 이광보(李匡輔)·이거원(李巨源) 등이 양사(兩司)174) 와 함께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하려 하자, 대사헌(大司憲) 오명준(吳命峻)과 헌납(獻納) 이정걸(李廷傑)이, ‘햇볕이 뜨거워 쇠도 녹아 흐르는 때인데 인접(引接)하시게 되면 반드시 성상(聖上)의 옥체를 조섭(調攝)하시는 데 해로울 것이다.’ 하며 조금 시원한 때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르니, 유필원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오명준과 이정걸이 군상(君上)을 안일하고 나태한 생각을 환기토록 인도하여 고인(古人)의 부시(婦寺)175) 의 충성과 같게 하는 기롱을 범하였다.’고 헐뜯고 체차(遞差)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2일 계미
남취명(南就明)을 도승지(都承旨)로, 유명응(兪命凝)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14일 을유
조상경(趙尙慶)을 지평(持平)으로, 이정필(李廷弼)을 장령(掌令)으로, 이진순(李眞淳)을 집의(執義)로, 윤순(尹淳)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이명언(李明彦)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유(金濰)를 헌납(獻納)으로, 조원명(趙遠命)을 사간(司諫)으로, 윤용(尹容)을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삼았다. 윤용은 고(故) 판서(判書) 윤지인(尹趾仁)의 아들이다. 등제(登第)한 지 겨우 3년 만에 6품(品)직에 올랐고, 또 한 해가 채 못되었을 즈음에 해서(海西)의 방백(方伯)이 공석중이어서 여러번 바꾸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차자(箚子)를 올려 윤용을 추천하기를,
"윤용은 명신(名臣)의 아들로서 본래 이목(耳目)에 젖어 익숙함이 있고, 사람됨이 침착하고 민첩하여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의 자급(資級)과 이력이 아직 얕은 것을 생각할 때 정례(政例)를 깨뜨리고 자급을 뛰어넘는 것이 미안함이 되는 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일이 궁색한 데에 이르면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니다. 바라건대 해조(該曹)에 명하여 윤용을 수망(首望)에 주의(注擬)176) 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때문에 이 명(命)이 있었다. 부수찬(副修撰) 이거원(李巨源)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윤용은 진실로 후진(後進) 중에 뛰어난 사람이라 말할 만한지라, 진실로 천거한 바를 저버리지 않을 줄 알지만, 조가(朝家)177) 에서 벼슬을 명함에 있었서는 점차적으로 승진함은 있어도 갑자기 승진함은 없어야 마땅합니다. 옛날 소식(蘇軾)178) 이 제과(制科)179) 에 합격하였는데, 영종(英宗)이 지제고(知製誥)를 제수(除授)하려고 하자 재상(宰相) 한기(韓琦)가 말하기를 ‘소식은 원대한 그릇이라 그 요체는 조정(朝廷)에서 배양(培養)하는 데 있는 것인데, 갑자기 높이 기용하는 것은 바로 그를 누(累)가 되게 하는 것이다.’고 하니, 그를 불러 직사관(直史館)으로 시용(試用)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윤용이 통적(通籍)180) 한 지 아직 3년을 경과하지 않아서 미처 정사(政事)에 시험(試驗)한 바도 있지 아니한데 방백(方伯)의 직임에 발탁하니, 조정에서 사람을 씀에 있어 아마도 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하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윤용은 마침내 극력 사양하여 임명하지 못했다.
6월 17일 무자
이봉년(李鳳年)을 승지(承旨)로, 이광보(李匡輔)를 교리(校理)로, 유언통(兪彦通)을 정언(正言)으로, 성덕윤(成德潤)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6월 19일 경인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김유(金濰)이다.】 에서 계론(啓論)하기를,
"신녕 현감(新寧縣監) 성세욱(成世頊)은 정신이 흐리고 용렬하며 정사(政事)에 밝지 못하고, 창녕 현감(昌寧縣監) 정동윤(鄭東潤)은 구변이 좋고 잔꾀가 있어서 거짓이 많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0일 신묘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고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다투어 논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홍양 현감(洪陽縣監) 박태삼(朴泰三)은 인망(人望)이 가볍고 하자와 비방이 있으니, 청컨대 고쳐서 차임하도록 하소서."
하고, 사간원(司諫院)에서 거듭 성세욱 등의 일을 논하자, 모두 그대로 따랐다.
6월 21일 임진
사헌부(司憲府) 【이정필(李廷弼)이다.】 에서 계언(啓言)하기를,
"우리 태조(太祖)께서 서쪽 지방을 순행(巡行)하시다가 평양(平壤)에 어가(御駕)를 머무르시고 기자(箕子)의 정지(井地)181) 를 두루 살펴보시고 감탄하는 마음이 일어나 다시 십일(什一)의 세(稅)182) 를 정하시고, 그 전답의 이름을 ‘마록(麻菉)’이라고 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어공(御供)183) 의 수용(需用)을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오년184) 사이에 민진원(閔鎭遠)이 감사(監司)가 되어 그 십일(什一)의 세(稅)를 혁파(革罷)하고 상용(常用)하는 세금 제도를 만들도록 계문(啓聞)하여 성제(聖制)를 폐지하여 단절되었습니다.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마록(麻菉)의 십일(什一)의 세(稅)를 즉시 회복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도성(都城)의 백성으로 빚을 진 자에 대하여 각사(各司)에서 징수를 독촉하는데, 모두 보수(保授)185) 나 일족(一族)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습니다. 전에 선조(先朝)에서는 부자(父子) 외에는 비록 형제(兄弟)라 하더라도 서로 침해가 미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을 거듭 경계하였습니다. 청컨대 여기에 의거하여 법칙을 정해서 혹시라도 마구 침해(侵害)함이 없도록 하되, 관원(官員)으로서 위반한 자는 파직(罷職)시키고 해당 이속(吏屬)은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22일 계사
권익순(權益淳)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황해도(黃海道)에 큰 물이 졌다.
6월 24일 을미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고, 양사(兩司)에서 각기 앞서 계달한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납(獻納) 김유(金濰)가 계론(啓論)하기를,
"이이명(李頤命)·이건명(李健命) 두 역적의 아비를 당초 서원(書院)에 제향(祭享)토록 한 것은 극히 모람(冒濫)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두 역적이 처형되었는데 연좌(連坐)하는 법을 비록 이미 죽은 사람에게 추급하여 실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대로 서원에 제향하도록 두는 것은 법리(法理)로 보아 말이 안되니,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사하여 훼철(毁撤)하고 출향(黜享)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필용(呂必容)을 승지(承旨)로, 이세최(李世最)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사간(司諫)으로, 조진희(趙鎭禧)를 부교리(副校理)로, 김홍석(金弘錫)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명언은 천성(天性)이 어리석고 배우지 않아 무식하여 언론(言論)이 고의로 장식하고 과격하였으며, 김동필(金東弼)이 김일경(金一鏡)을 배척하자 이에 노하여 외임(外任)으로 전보(轉補)시키려고 이조(李肇)와 다투었지만 얻어내지 못하였고, 또한 조정(朝廷) 사람들이 거의 모두 자기의 명(命)에 따르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논의가 서로 어긋나서 불합(不合)함이 많자 마침내 분을 참지 못하고 사퇴를 결심하여 벼슬을 제수하면 번번이 사임을 하였으니, 이는 그 사람이 작록(爵祿)과 영리(榮利)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벼슬을 맡으면 직책을 다하였고, 강한 결단성이 있어서 굳고 확실하였으며, 스스로 굳게 지키고 구차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처(自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좌(李光佐) 등 여러 사람들 또한 모두 그를 중하게 여겼다.
6월 25일 병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앞서 계달한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논하기를,
"홍원(洪原)에 정배(定配)된 죄인 이휘천(李輝千)이 공회(公會) 중에서 국가를 향하여 망측(罔測)한 말을 방자하게 발설하였다가 대간(臺諫)의 계달(啓達)이 준엄(峻嚴)하게 발의(發議)되어 즉시 유배(流配)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지금 사령(赦令)으로 인하여 갑자기 석방(釋放)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방송(放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가 약방(藥房)의 입진(入診)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근년에 신출신(新出身)186) 및 음관(蔭官)으로 처음 벼슬에 들어온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앞서 벼슬을 지낸 한산(閑散)187) 으로 문(文)·무(武)·음(蔭)이 1천 명에 가까운데, 벼슬자리는 한정되어 있어서 복직(復職)을 못하니, 자릿 수를 조금 넓혀서 점차적으로 조정해 임용하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각릉(各陵)의 참봉(參奉) 한 사람을 각각 품계를 올려 영(令)으로 삼고 참상(參上)188) 으로 삼아서 차임(差任)해 보내면 참하(參下)189) 가 감소되고 참상이 증가되어 스물 아홉 자리를 더 얻게 될 것이며, 지금부터 괴원(槐院)190) 의 여섯 자리와 국자감(國子監)191) 의 한 자리를 각각 6품(品) 자리로 올리고 각 능령(陵令)을 모두 6품으로 내려서 승천(陞遷)192) 의 계제(階第)를 통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6월 27일 무술
비로소 진연청(進宴廳) 당상(堂上) 이하의 상격(賞格)을 차등을 두어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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