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묘
임금이 진연(進宴)하고, 왕대비전에 헌수(獻壽)하였다.
황해도·평안도에 우박이 내리고 황충(蝗蟲)이 곡식을 손상시켰다.
5월 2일 갑진
이세근(李世瑾)·홍중우(洪重禹)를 승지(承旨)로, 오명준(吳命峻)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심공(沈珙)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봉년(李鳳年)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명언(李明彦)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조익명(趙翼命)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이진망(李眞望)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중관(李重觀)을 장령(掌令)으로, 여선장(呂善長)을 헌납(獻納)으로, 김시환(金始煥)을 지의금(知義禁)으로, 김연(金演)을 우참찬(右參贊)으로 삼았다.
강화(江華)·교동(喬桐)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5월 3일 을사
황해도·평안도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5월 6일 무신
이진검(李眞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정사효(鄭思孝)·박내정(朴乃貞)·권익순(權益淳)을 승지(承旨)로, 황정(黃晸)을 정언(正言)으로, 이광덕(李匡德)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5월 8일 경술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하택(李夏宅) 등이 소를 올려 독약을 탄 김성(金姓) 궁인(宮人)을 법정에 넘겨서 왕법(王法)으로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논쟁이 비록 지성스럽기는 했어도 복합(伏閤)을 지레 철수하였고, 대신(大臣)의 차자(箚子)가 비록 간절은 했어도 궐정(闕庭)에서 부르짖는 일을 여태 지연하고 있으니, 조정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그 책임을 사피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김성 궁인은 끝내 조사할 길이 없다."
하였다.
5월 9일 신해
유성(流星)이 하늘 한가운데서 나와 북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나 되었다.
5월 11일 계축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다만 이공윤(李公胤)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자는 청만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하기를,
"지난번에 복합(伏閤)을 한 삼사(三司)가 소장을 올리고는 뿔뿔이 나가버렸고, 패초(牌招)를 어겼는데도 으레 해야 될 파직을 하지 않은 것은 성상의 뜻이 애당초 언관(言官)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승정원으로서는 당연히 잇따라 패초(牌招)를 청했어야 함에도 서둘러 사직 단자를 받아 올려서, 징토(懲討)에 직분을 다한 여러 대신(臺臣)으로 하여금 차례로 체직(遞職)을 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컨대 해당 승지를 추고(推考)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12일 갑인
삼사(三司)에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다시 논쟁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정언(正言) 황정(黃晸)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지문(誌文)을 고쳐 짓는 일을 대신에게 문의하여 아직 천천히 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선왕의 거룩하신 공렬(功烈)은 마땅히 문학과 재망(才望)이 높은 사람으로 가려서 영원히 썩지 않을 문자를 지어야 합니다. 어떻게 흉역(凶逆)이 지은 것을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선왕조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지문을 고쳐 지어서 사책(史冊)에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려 김성 궁인의 일을 다시 논한 다음, 또 병으로 인하여 자력(自力)으로 대궐에 나가지 못하고 한갓 소장만 올려 번거로움을 무릅쓴 것이 죄스러움을 진달하고 벼슬을 삭탈하고 죄를 심문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사죄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또 재차 상소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거듭 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랫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으므로 진사(進士) 남원명(南遠明)이 또 상소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하기를,
"안옥(按獄)하는 신하가 일을 늦추고 끝까지 추구(推究)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론이 들끓어서 삼사(三司)의 신하가 비로소 복합을 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백관의 수위(首位)에 있는 자가 인구(引咎)하면서 질병을 말한다는 것은 실로 그 시기가 아닙니다."
하였으니, 대개 이광좌를 가리켜 한 말이었다. 수찬(修撰) 이광보(李光輔)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청(鞫廳)의 의계(議啓)나 대소(臺疏)의 쟁론을 처음에는 다 따르신다고 윤허하셨다가 바로 다시 어기시고 두 해 동안이나 지연시키다가 끝내 청에 준거(準據)하지 않으시니, 사세로 보아 진실로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늦추고 소홀히 하실 뜻이야 있었겠습니까? 대신이 실제로 질병이 있다는 것은 뭇사람이 다 아는 바이긴 하나 침엄(沈淹)한 지 두 달에 마침내 기동(起動)을 하지 않았으니, 어찌 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생의 언론이 본래 과격하긴 하나 성상께서 마땅히 그 일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것을 살피셔서 토복(討復)의 청을 윤허하시고, 대신과 관학 유생의 소차(疏箚)에 모두 비답을 내리셔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익한(李翊漢)·유만중(柳萬重)·이중술(李重述)을 승지(承旨)로, 조지빈(趙趾彬)을 교리(校理)로, 박필기(朴弼夔)를 부교리로, 이정필(李廷弼)을 장령(掌令)으로, 김유(金濰)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5월 13일 을묘
양사(兩司)에서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역복(逆復)123) 이 지레 죽었을 때 약물을 전하여 준 나졸(邏卒) 조선창(曹善昌)이 경성(鏡城)으로 정배(定配)된 뒤에 서울 집에 와 있으면서 그의 아들을 시켜 대신 점검을 받게 하였으니, 이는 해당 지방관이 엄히 신칙하지 못해서 이처럼 마음대로 떠나 있게 된 것입니다. 청컨대 그 지방관을 나문 정죄(拿問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이광덕(李匡德)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은 죄명은 비록 무거우나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동기(同氣)로서는 민진원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여서, 부부인(府夫人)이 그를 멀리 떠나 보내고 나서 늘 걱정하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민진원의 죄를 용서하고 석방하여 돌아와 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민진원의 정리(情理)는 아무리 가긍한 생각이 있다 해도 대각(臺閣)의 논의는 당연히 의리를 주장하여 결단해야 됩니다. 이제 이광덕은 자신이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갑자기 민진원의 죄를 용서하여 석방하자는 청을 올렸으니, 공론이 있는 터에 규경(規警)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석명(趙錫命)을 집의(執義)로, 이정걸(李廷傑)을 필선(弼善)으로 삼았다.
5월 14일 병진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역비(逆婢)를 토죄하자고 청하는 것은 성궁(聖躬)을 위함이며 종사(示社)를 위한 것입니다. 진실로 난적(亂賊)과 같은 심장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감히 주저하고 회피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비변사 낭청(備邊司郞廳) 최명주(崔命柱)와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김상두(金相斗)는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모두 나문 정죄(拿問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승지 유만중(柳萬重)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소비(疏批)가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는다 하여 식당을 옮겨, 그에 따른 폐단도 매우 많지만 성묘(聖廟)에 분향(焚香)하는 유생이 또 입재(入齋)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속히 비답을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장선(掌膳)하는 궁인 가운데 의심할 만한 사람이 원래 없으니 조사해 내라는 청이 합당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5월 15일 정사
생원 이석조(李錫祚) 등이 소를 올려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하기를,
"왕법(王法)이 오래도록 지연됨으로 해서 요얼(妖孽)이 여태 법망에서 빠져 있습니다. 3년이 지난 뒤에 나이 젊은 한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하여 마치 꿈에서 처음 깨어난 것처럼 비로소 복합(伏閤)의 논의를 발의한 것도 너무 늦었는데, 이미 시작한 것을 바로 중지한 것은 이미 너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삼사(三司)의 청과 백관의 소가 오늘 또 발단되어 힘도 다하고 말까지 궁진하였는데도 천청(天聽)은 더욱 막연하니, 일분이나마 천청을 돌릴 가망이 있다면 오직 대신(大臣)이 백관을 이끌고 부르짖는 길 뿐인데, 귀를 기울인 지 여러 날인데도 정청(庭請)을 한다는 소식은 아직도 적막하니, 저러한 재상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국가의 균축(勻軸)을 전담하고 있는 신하가 병을 무릅쓰고 나서는 그 의리는 생각지 않고 자기집에 안연히 누워서 대론(大論)을 넘어다 보며 상례에 따른 두어 번의 차자로 책임이나 면하고 있습니다. 대신이 평일에 또한 일찍이 잘난 체도 하였는데, 오늘날 군부(君父)가 위급한 환란에 처한 때에 인신(人臣)이 휴가나 청하다니 어찌 그리 내버려둔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도성 밖으로 나가서 대죄(待罪)하였는데,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석조(李錫祚)의 상소 사연을 본즉 대신을 핍박 배척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그를 먼 곳에 정배(定配)토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 이중술(李重述)을 보내어 이광좌를 돈독히 타일러서 같이 오라고 명하였는데, 이광좌가 극력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았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죄인 이상집(李尙)·조이중(趙爾重)·백시구(白時耉) 등으로부터 적몰(籍沒)한 노비를 모두 본조에 예속시키고 신공(身貢)은 받아서 쓰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상집 등은 역옥(逆獄)에 걸려서 형장을 맞아 죽을 때까지 승복(承服)하지 않았고, 조이중은 그의 사망이 역옥 사건이 나기 수년 전에 있었고, 특히 그의 아들 조흡(趙洽)이 연루되어 국문을 받았으므로, 법으로 보아 함께 재산을 적몰(籍沒)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대간(臺諫)이 그들이 벼슬살이할 때 탐오(貪汚)를 범한 장물(贓物)은 역시 관에 몰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논계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적몰을 하게 되었다. 대저 이러고 보면 무신(武臣)으로서 탐오를 범한 자가 어찌 이상집 무리뿐이었겠는가? 역적이니 탐장(貪贓)이니 하는 것이 모두 법 밖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식자(識者)가 이를 비난하였다.
5월 16일 무오
사헌부(司憲府)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청양 현감(靑陽縣監) 송식(宋湜)은 재결(災結)124) 을 순영(災營)에 많이 보고하고서 백성에게 주는 것은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였고, 피소(被訴)된 양정(良丁)에게 뇌물을 받고서 탈하(頉下)125) 로 하여 주었으며, 가을철의 환곡[秋糴]을 큰 말[斗]로 받아들였다가 봄철 대여할 때는 작은 말로 헤아려 주고는 그 남은 것을 슬그머니 취하여 모두 사용(私用)에 썼다고 합니다. 청컨대 나문 정죄(拿問定罪)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난하기를,
"강원 도사(江原都事) 서명구(徐命九)는 철원부(鐵原府)의 아전을 불러다가 군정(軍丁) 6명을 탈하(頉下)로 대처해 내도록 하였고, 추노(推奴)126) ·징채(徵債)127) 에도 또한 극히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청컨대 파직토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명응(兪命凝)을 승지(承旨)로, 이성신(李聖臣)을 지평(持平)으로, 조최수(趙最壽)를 교리(校理)로, 조진희(趙鎭禧)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서종하(徐宗厦)를 헌납(獻納)으로, 유필원(柳弼垣)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5월 17일 기미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 등과 행 사직(行司直) 김상현(金尙鉉) 등과 종실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 등과 보덕(輔德) 윤성시(尹聖時) 등과 호군(護軍) 윤우진(尹遇進) 등과 훈련원 정(訓鍊院正) 김준(金浚) 등과 호군(護軍) 박세정(朴世挺) 등과 전 우후(虞候) 정광우(鄭光羽) 등과 사과(司果) 유술(柳述) 등이 각기 소를 올려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을 논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장선 궁인(掌膳宮人) 중에는 원래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5월 18일 경신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논쟁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일경(金一鏡)의 붕당이 매번 역적 토벌을 자신들의 공으로 내세워 오다가 역옥(逆獄)이 마무리되자 신치운(申致雲)을 사주하여 김성 궁인의 일을 가지고 복합(伏閤)의 논의를 주도하게 한 것인데, 복합한 지 날이 오래되어도 끝내 준청(準請)이 어렵게 되자 윤유(尹游)·이진수(李眞洙) 등은 그네들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죄 사직(待罪辭職)하고 물러나 다시 애써 논쟁하지 않았고, 대신들 역시 정청(庭請)을 즐겨 하지 않았다. 이러자 김일경의 일당이 본래 이광좌(李光佐)를 꺼려 오던 터에 드디어 남인(南人)과 합모(合謀)하여 이광좌가 역적을 토죄하는데 늦추고 있다는 이유로 배척하여 버리고 또 구명규(具命奎)를 시켜 다시 복합(伏閤)의 논의를 발동케 한 바, 이광좌가 병을 핑계로 인입(引入)128) 하니, 이석조(李錫祚)가 드디어 소를 올려 극력 이광좌를 비난하고 나섰다.
한편 교리 박필기(朴弼夔)가 본시 김일경의 일당으로서 당직(當直)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석조의 소를 보고 놀란 나머지 상소하여 이광좌가 실제로 병을 앓고 있음을 진달함과 동시에 이석조의 옳지 못함을 지척하였다. 이석조가 죄를 받게 되자, 김일경의 일당은 박필기를 시켜서 상소하여 구원하도록 했는데, ‘이석조는 충의심이 북받쳐서 과격하였던 것이므로 마땅히 너그러이 용서해야 할 바이며, 의당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일을 중지하여 유생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고 말하였고, 이석조의 일당인 승지 정사효(鄭思孝)·참의 김시경(金始慶)도 서로 잇따라 상소하여 ‘이석조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명을 정침하라.’고 말하였다. 이러자 장령 이중관(李重觀)은 ‘정사효와 김시경이 협잡심을 가지고 박필기를 옹호하려고 앞뒤가 다르게 변환(變幻)하고 있다.’고 아뢰어 탄핵하고, 이들을 모두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응교 유필원(柳弼垣)이 말하기를,
"상소한 유생의 죄는 정거(停擧)129) 는 가하나 먼 곳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박필기가 당초 유생의 소를 내려보내려 한 것은 생각함이 좋지 못하였으나, 무릇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라는 특명이 내려짐에 미쳐서는 혹시나 처분이 과중할까 두려워서 계속하여 다시 소를 진달한 것입니다. 정사효는 승지의 직임에 있는지라 소회(所懷)가 있어 상소한 것은 그 죄가 된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하자, 이중관이 인피(引避)하였는데, 정언 황정(黃晸)·김유(金濰)가 이중관의 출사(出仕)를 청하였다. 이에 헌납 서종하(徐宗厦)가 다시 상소하여 이석조를 구원하면서 이중관 및 사간원의 부당한 처치를 지척하여, 이중관·황정·김유가 모두 인피(引避)하였다. 장령 이정필(李廷弼)은 처음에 이중관과 함께 박필기를 탄핵하는 논계에 같이 참여하였다가 유필원과 서종하의 지척을 받자 김일경의 일당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인피할 즈음에 느닷없이 미뤄 소상히 알지 못하였다며 좌절된 언사로 치사(致謝)하여 마지 않으니, 식사는 이를 더욱 해연(駭然)해 하였다. 이로부터 김일경의 일당이 이중관을 깊이 미워하였는데, 나중에 필선(弼善) 및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서도 명론(名論)이 본래 가벼웠다는 이유로 유필원의 논박을 받고 체직되어 다시는 대각(臺閣)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사간원에서 논계하기를,
"평안 병영(平安兵營)의 우후(虞候) 이중창(李重昌)은 우둔하고 교활하고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이력이 적은데다 또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중무(柳重茂)·이정제(李廷濟)를 승지로 삼았다.
5월 19일 신유
사간원에서 논하기를,
"사도시 직장(司䆃寺直長) 심보(沈溥)는 문식(文識)이 모자라서 관원의 모양이 전혀 없으니, 청컨대 태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20일 임술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광양 현감(光陽縣監) 구문영(具文泳)은 관사(官舍)를 수리한다 핑계하고 수영(水營)에 보고하여 금송(禁松)을 얻어 낼 획책을 하였는가 하면, 크고 작은 관청의 일과 사송(詞訟)을 일체 이성(李姓)의 좌수(座首)에게 물어서 결정하므로, 그 좌수가 하나같이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등, 권세에 기대어 농간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청컨대 구문영은 파직하고 좌수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형에 처하여 징계토록 하소서. 전 군수 이정엽(李廷燁)은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삼남(三南) 양전(量田) 때에 제 전장에 사인(私人)을 보내는가 하면, 바닷가 개펄에 제방을 막은 곳이나 산골짜기의 새로 일군 땅들을 혹은 사패(賜牌)130) , 혹은 입안(立案)131) 을 사칭하고 모조리 불법으로 명의를 바꾸어서 백성들이 세업(世業)의 전지를 하루아침에 빼앗겼다고 하니, 권세를 믿고 법을 멸시하는 그의 행위는 향곡(鄕曲)의 교활한 토호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지방관으로 하여금 수교(手敎)에 의거하여 백성들에게 그 땅을 돌려주어서 궁핍한 백성들이 직업을 잃는 폐단을 면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고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하찮은 부유(腐儒)가 믿고 의지하는 대신을 침범 공박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경의 넓은 아량에 개의할 것이 없다. 부디 나의 깊은 뜻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사피하지 말고 속히 도성으로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1일 계해
김시경(金始慶)을 승지(承旨)로, 신치운(申致雲)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세 번이나 상소하여 궁비(宮婢)의 일을 논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궁인(宮人)은 결코 조사해 낼 길이 없다."
하였다.
5월 22일 갑자
수찬(修撰) 이광보(李光輔)가 차자를 올리기를,
"이중관(李重觀)은 당초의 계사(啓辭)가 원래 적중함을 얻지 못하였고, 이정필(李廷弼)은 처음에 소상히 알지도 못한 채 경솔히 덩달아 참여하여 앞뒤의 인피(引避)에서 말이 너무 구차스러웠습니다. 청컨대 모두 체차(遞差)하소서."
하였고, 또 논하기를,
"서종하(徐宗厦)가 소를 올려 이석조(李錫祚)를 구원한 것을 오활하고 고지식했다기 보다는 지나친 변명에 관계된다 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체차(遞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4일 병인
좌참찬(左參贊) 강현(姜鋧) 등이 다시 상소하여 궁인의 일을 논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경기·강원도에 황충(蝗蟲)이 일었다.
5월 25일 정묘
유시모(柳時模)·김중희(金重熙)를 장령(掌令)으로, 이정걸(李廷傑)을 헌납(獻納)으로, 유명응(兪命凝)을 황해도 관찰사로, 최종주(崔宗周)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5월 27일 기사
삼사(三司)에서 다시 입대(入對)를 청하여 김성(金姓) 궁인(宮人)의 일은 논쟁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청하기를,
"세족(勢族)이 여염집을 빼앗아들이는 일과 궁가(宮家)에서 사문(私門)에 빚을 징수하는 행위와 응방(鷹房)에 사람을 구류(拘留)하는 폐단을 금지시키소서."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하기를,
"전 현감 김정오(金定五)·전 찰방 최익수(崔益秀)는 역괴(逆魁)의 품안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연전에 삼흉(三凶)132) 이 처형을 받았을 적에 길가에서 영곡(迎哭)을 하였는가 하면, 같은 마을 사람 장문위(張文煒)가 토역 별시(討逆別試)에 등장하여 방(榜)에 응하고 집에 돌아오자 강력하게 배척하고 발길도 닿지 못하게 하는 등, 그의 마음이 오로지 역당에게 쏠려 있습니다. 청컨대 나국 정죄(拿鞫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찬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전 참판(參判) 이집(李㙫)은 이건명(李健命)의 혈당(血當)이자 민진원(閔鎭遠)의 인척으로서 신축년133) 가을을 당하여 흉당(凶黨)에게 아부하다가 사류(士類)에게 버림을 받더니, 작년의 정시(庭試)는 곧 다같이 경하(慶賀)할 과거인데도 이집이 제 아들을 억눌러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마음속에 원망을 품어서 같이 경하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으니, 그의 심술을 캐어 볼 때 너무도 뼈아픈 일입니다. 의당 먼 변방으로 물리치는 법전을 베풀어서 역적을 편드는 버릇을 징계해야 됩니다."
하니, 임금이 듣지 않았다. 처음에 이집이 신축년134) 가을 빈청(賓廳)에서 유봉휘(柳鳳輝)를 국문하자고 하는 계청(啓請)에 참여하였다가 당시의 여론에 용납함을 받지 못하여 박필몽(朴弼夢)의 탄핵을 입었는데, 유독 조태구(趙泰耉)·이광좌(李光佐)만은 서로 관계를 끊지 않으므로, 이진유(李眞儒)의 무리가 조태구 등을 더욱 사사로운 원수처럼 미워해 왔다. 이에 이르러 이광보가 드디어 이 논의를 발의하자, 이광좌가 박문수(朴文秀)를 시켜 조정에 말을 퍼뜨리기를,
"역적 김성절(金盛節)은 곧 이집(李㙫)의 아내의 서동생[庶弟]이니, 그의 아들 이주진(李周鎭)에게는 외삼촌과 생질의 사이이다. 가령 이주진의 외조(外祖)가 살아 있을 적에 김성절이 처형을 받았더라면 당연히 연좌가 되어 죽었을 것이니, 이주진이 토역과(討逆科)에 응시를 한다면 윤리를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니, 오늘날 어떻게 그가 과거에 나오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잘못이라 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의 아버지를 죄줄 수 있겠는가?"
하니, 이광보가 드디어 수그러들었다.
5월 29일 신미
이사상(李師尙)을 도승지로, 조진희(趙鎭禧)를 정언으로 삼았다.
당초 신치운(申致雲)이 지평(持平)으로 있을 적에 권상하(權尙夏)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는 논계를 발의한 바, 권상하의 문도(門徒) 윤현(尹俔) 등이 상소하여 신치운의 증조 신면(申冕)이 역점(逆點)135) 과 편당을 지어 청(淸)나라와 내통하여 나라를 화란 속에 빠뜨리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신묘 옥사(辛卯獄事) 때 고문을 받다 죽은 사실과 신치운의 조부 신종화(申宗華)가 역견(逆堅)136) 부자와 편당을 하다가 경신 옥사(庚申獄事)에 연루된 사실과, 신치운의 아비 신유(申輶)가 종통(宗統)을 앗아 인륜을 문란케 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옥에 갇혀 조사받은 사실들을 일일이 진술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신치운이 문학(文學)이 되어 상소하여 그때 윤현의 말을 변명하였으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효종 초에 유일(遺逸)을 불러들이니 송시열(宋時烈) 일대(一隊)가 조정에 들어와서 그네들끼리 말한 세 건의 큰 일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원수를 갚아 치욕(恥辱)을 씻는 일이고, 또 하나는 강옥(姜獄)137) 을 뒤집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혼탁(混濁)하고 악한 무리를 도태(淘汰)하고 맑고 선한 사람을 등용한다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신의 증조 신면이 말하기를, ‘원수를 갚아 치욕을 씻자는 논의는 허명(虛名)만 떠벌이고 실재(實才)가 없으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 되고, 힘을 헤아리지 않고 강호(强胡)138) 에게 도전한다면 나라의 화환(禍患)을 부르는 결과가 되며, 강씨(姜氏)의 억울함은 비록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기는 하나 옥사가 대내(大內)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라 외신(外臣)으로서 감히 말할 바가 아니며, 혼탁하고 악한 자를 도태하고 맑고 선한 자를 등용하자는 설은 격렬하게 들추어 내기를 힘써 신기(新奇)하게 한다면 시비(是非)가 공사(公私)를 어지럽게 하고 현사(賢邪)가 애증(愛憎)에 현혹되어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문만 열어놓아 불안한 계제만 만들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송시열이 그 정상을 꿰뚫은 것을 미워하여 ‘또 같지 않구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자(帽子)를 벗어 던지고 뛰어 나갔는데, 신의 증조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배척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임금을 섬기는 데 예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아무리 질병으로 해서 불시에 인접(引接)하였다지만 이는 진(秦)나라 때도 아니고 초(楚)나라 때도 아닌데, 인신(人臣)의 분의(分義)에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였는데, 송시열이 이 말을 듣고 원한을 품고는 드디어 〈신의 증조가〉 김자점에게 편당하였다는 사연의 논핵(論劾)을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양사(兩司)에서 김자점을 논죄(論罪)할 적에 대신(臺臣)이 소매 속에 초고(草稿)를 넣고 와서 신의 증조에게 묻는데, 증조가 답하기를, ‘김자점이 강옥(姜獄) 때부터 사론(士論)에 죄를 얻었는데, 이제 공제(公除)139) 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이 기간이나 지나고 논하는 것이 합당하겠다.’고 하니, 그가 또 이 말을 증거로 삼아 죄인을 두둔해 구원한다고 일렀고, 또 유언 비어를 퍼뜨려 위에까지 들리게 한 다음, ‘비방하는 자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산인(山人)140) 은 조정에 수용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효종께서 진노(震怒)하시어 신의 증조를 귀양보냈는데, 채 두 달이 못되어 귀양에서 풀어주고 곧바로 진용(晉用)되어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던 것입니다.
신묘년141) 김자점의 옥사 때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金世龍)의 납초(納招)에서, ‘신면이 안철(安澈)·변사기(邊士紀)와 함께 저희 아버지 김식(金鉽)의 집을 찾아 왔었는데, 그때 역모를 원망하는 말이 있었다.’고 하였고, 또 김자점의 집에서 뒤져 온 문서 가운데 김식이 김자점에게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속에, ‘신면(申冕)이 대사간이 되었으니 당연히 정론(停論)될 듯하다.’라는 말이 있어서, 효종께서 이것을 가지고 신의 증조에게 문책(問責)하시니, 신의 증조가 대답하기를, ‘변사기는 원래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고, 안철은 얼굴만 알 뿐이며, 김자점은 비국 당상(備局堂上)이어서 공무로 인해 그의 집에 오가기는 하였으나, 김식은 나이가 서로 맞지 않아서 그의 집에는 왕래가 거의 없었습니다. 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을 때에 일찍이 정론(停論)을 한 적도 없거니와, 적(賊)의 부자가 그네들끼리 편지를 왕복한 것이 신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국청(鞫廳)에서 다시 김식을 신문하니, 김식이 말하기를, ‘역모에 있어서는 실로 신면과 동모(同謀)하지 않았고, 8월께 다만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호중(胡中)과 통하여 산인(山人)을 잡아가도록 할 것을 나에게 권유하였으며, 그때 같이 모였던 사람은 세 명이 아니라 신면과 안철(安澈)뿐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안철이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있다가 8월에 파직되어 9월에 비로소 교귀(交龜)142) 하였는데, 관찰사 허적(許積)이 그 상황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효종께서도 문목(問目) 내용에 ‘모역(謀逆)했다’는 일은 빼고 다만 노(虜)와 내통했다는 것으로 사연을 만들도록 명하였는데도 옥정(獄情)이 갈수록 바뀌고 단련(鍛鍊)이 더욱 급하여짐을 면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 임진년143) 봄에 이형장이 처음 북경에서 돌아와 국청에 나가서 ‘신면의 억울함이 매우 크다.’고 말하여, ‘노와 내통하였다.’는 한 가지 일도 또 억울한 적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대와 초년에 신의 조부 신종화(申宗華)가 비로소 상소하여 억울함을 호소한 바, 여러 대신(大臣)들이 다같이 신원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하므로, 선왕께서 특명으로 관작을 회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신의 조부가 무고를 입은 일에 대해서는 신의 조부의 표제(表弟) 김석주(金錫胄)가 경신년144) 에 불안하던 때를 당하여 역견(逆堅)145) 을 손수 제거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켰는데, 그때 신의 조부가 종제(從弟) 신범화(申範華)를 시켜 흉적 정원로(鄭元老)를 잡아다가 김석주에게 보냄으로 해서 드디어 흉적(凶賊)의 실정을 알게 되었던 것이니, 대개 정원로가 역견의 집에 드나들어서 역모에 가담할 수 있었고, 또 일찍이 신범화의 집에도 내왕하면서 김석주의 동정을 엿보았으므로, 신의 조부가 이 같은 흉인(凶人)은 가까이 해서 아니된다고 하였습니다. 정원로가 이 말을 듣고 원한을 품어 오던 중 고변자(告變者)에 대한 책훈(策勳)이 결정됨에 미쳐 역당(逆黨)을 다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차 국청에 들어가게 되자, 스스로 다시는 살아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서 김석주를 깊이 원망한 나머지 드디어 신의 조부 및 신범화를 무고하여 김석주 대신 신의 조부와 신범화에게 원한을 푸는 터전을 삼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그의 무리인 강만철(姜萬鐵)에게 넘겼는데, 강만철의 말이 이것은 다 정원로가 날조 무고한 것이라고 하므로, 드디어 면질(面質)을 시킨 바, 정원로가 말이 막히게 되자 자복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억울한 정상을 통찰하시고 용서하여 석방한 사실이 앞뒤 비망기(備忘記)에 해와 달처럼 환히 실려 있는데도, 이제 권상하(權尙夏)의 무리가 선왕의 분명한 전교도 아랑곳 않고 도리어 정원로의 흉언(凶言)을 도습(蹈襲)하려고 하니, 이 역시 정원로의 무리입니다.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신의 아비는 무고한 일에 이르러서는 빼앗은 것이 어느 적통(嫡統)이고 어지럽힌 것이 무슨 인륜인지 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는 아마 신의 종형(從兄)이 지난날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은 일을 가리킨 것인 듯한데, 이 일의 전말(顚末)은 이미 법부(法府)의 문안(文案)이 있기 때문에 신이 굳이 변명은 하지 않겠으나, 이 무리가 남의 골육(骨肉)을 이간(離間)하는 유언(流言)을 주워 모아서 남의 집을 무함(誣陷)하는 계획을 달성하려 드는 것이 또한 서글픈 일입니다.
신이 가만히 지난날의 역사를 관찰해 보건대 군자는 소인을 가리켜 소인이라 하고 소인은 군자를 가리켜 소인이라 하므로, 사도(邪道)와 정도(正道)의 분간이 확정될 수 없을 것 같지만, 급기야는 선악(善惡)이 그 귀추가 다르고 비태(否泰)146) 는 그 도(道)가 판이하기 때문에, 소인의 화(禍)가 당세에 거셀수록 군자의 논리는 참으로 촛불같이 환하고 귀복(龜卜)처럼 정확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의 화(禍)147) 가 채경(蔡京)·채변(蔡卞)의 간신(奸臣)이 나오기에 이르러서야 여회(呂誨)148) 가 앞 일을 내다본 것이 곧 밝혀졌고, 귀산(龜山)149) 의 정론(正論)이 바야흐로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신의 증조와 산인(山人)과의 뜻이 맞지 않았던 것은 당초 그 출처(出處)와 사정(邪正)의 나뉨을 논한 데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사문(斯文)의 변괴가 날로 생기고 국가의 화란(禍亂)이 잇따라 일어남으로 해서 세도와 인심이 여지없이 괴란(乖亂)되어 마침내는 어버이를 무시하고 군주를 무시한 논의가 온 세상을 메워 그 해독이 진신(搢紳)에 만연되고 화가 종묘 사직에까지 미치게 된 것인데,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같은 역적이 나온 데 이르러서는 또한 채경·채변의 간사함에 비유할 바가 아닙니다. 당초 간신을 분변하는 논의가 과연 천고(千古)의 뛰어난 안목이 될 수 없었다면 귀산(龜山)의 정론(正論)이 정문(程門)150) 의 원망하여 씀[懟筆]이라 이를 수 있으며, 《춘추(春秋)》의 단례(斷例) 역시 공자(孔子)의 사서(私書)라고 하여 세상에 행할 수 없단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붓을 들어 산림(山林)의 간사함을 논하여 적이 귀산이 왕안석을 배척하고, 《춘추》에서 조돈(趙盾)을 토죄한 고사(故事)151) 에 스스로 붙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은 이에 도리어 당시의 무훼(誣毁)하던 그 명목을 가지고 오늘날 모욕거리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이는 신의 바른 말이 그들의 간장을 척결(剔抉)해 내고 두뇌를 파쇄(破碎)할 것을 두려워하는데 불과한 까닭입니다.
신의 증조는 대대로 충정(忠貞)을 독실히 하고 본래 명절(名節)을 고상하게 의지해 왔으며, 영인(佞人)을 지척(指斥)하는 충성심을 품고서도 요임금 궁정의 굴질초(屈軼草)152) 가 되지 못하고, 간신(奸臣)을 밝히는 지감을 갖고서도 진 시황(秦始皇) 앞의 속을 들여다 보이게 하는 거울이 되지 못하였기에, 자그마한 외손바닥 하나로 홍수를 막아 내지 못하고 반복된 헛소문만 사실로 와전되어 혹독한 화(禍)가 에워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뒤 백 년이 채 못 되었는데도 그 말이 크게 입증되어 당시의 공론이 또한 범방(范滂)153) 의 고충(孤忠)을 쓰라려 하고, 여회(呂誨)의 선견지명을 탄상(嘆賞)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시비(是非)는 후세에 가서야 판정된다는 실례입니다. 오직 저 흉도(凶徒)들은 여러 역적의 무망(誣罔)한 납초(納招)를 이어받아 공안(公案)을 뒤집고 국시(國是)를 뒤엎으려는 생각만 갖고 천지의 영험(靈驗)과 뇌정(雷霆)의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다시 알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역식(逆鉽)154) 에게서 힘을 빌리고 흉로(凶老)155) 에게서 넋을 돌려받아서입니다. 신은 진실로 놀랍고 분해서 이 무리와는 같은 세상, 한 나라에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어찌 횡역(橫逆)이 오는 것을 밀쳐두고 태연히 영광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침해하려 드는 말을 가지고 어찌 반드시 인혐(引嫌)하여야겠는가?"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면(申冕)은 이름 있는 집의 자제로서 역점(逆點)156) 에게 아부하였다가 산인(山人)의 배척을 받아 뜻을 잃고 원망을 품었다가 역옥(逆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니, 비록 신치운(申致雲)의 해명 상소에서 말한 양사(兩司)에서 김자점을 논박하는 아룀을 만류하였다는 것과 김식(金鉽)의 편지 가운데에 ‘신면이 대사간이 되었으니, 자연히 논의를 정지하게 할 것이라.’는 말로 보더라도 역시 아부하고 비호한 사실은 숨기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숙종 초기에 벼슬이 회복되고 신원까지 하였으니, 이는 역시 산인이 패하고 허적(許積)이 국권을 잡으매 신면의 아들 신종화가 허적에게 아부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공론이 인정하여 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종화는 당초에 역견(逆堅)157) 과 같이 모의를 하고 김석주(金錫胄)를 죽이려 하다가 바로 김석주에게 발각이 되어 그의 꾀임을 받고서 허견을 배반하고 김석주를 추종하였고, 김석주는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비호해 주어서 죽임을 면하도록 해 주었던 것이며, 신유(申輶)158) 의 집이 패란(敗亂)된 것은 또한 온 세상 사람이 지목한 바로서, 신치운은 3대에 걸쳐 그 하자의 낭자함이 이와 같은데도 출신(出身)159) 초부터 박필몽(朴弼夢)에게 빌붙어서 그의 입김에 힘입어 청환(淸宦)을 역임하더니, 끝내 감히 집안의 오점을 드러내어 호소하고, 산인을 마구 헐뜯었다. 그런데도 위아래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세도의 변질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아! 김자점이 국권을 전담하고 나랏일을 어지럽힐 적에 진신 대부(搢紳大夫)들이 파리처럼 빌붙고 개처럼 기면서 염치를 다 잃은 채 예의(禮義)와 명절(名節)이 무엇인지도 전혀 몰랐었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마침 효종을 만나서 일체로 청렴한 자를 등용하고 혼탁한 자를 배격하여 절의를 숭상하고 염치를 가다듬어서 한때의 풍속이 크게 변화토록 하였으며, 끝내 거괴(巨魁)를 제거하여 왕법을 통쾌하게 바로잡음으로써 당시 빌붙었던 무리들이 하나도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여 백세의 철안(鐵案)160) 을 이룩하였으니, 송시열이 뒷날에 와서 설사 만반의 과오(過誤)가 있었다 해도 이미 드러난 공로를 속일 수 없고 이미 정해진 시비도 현란시킬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저 신치운이 부질없이 사감(私憾)을 풀고 세루(世累)를 씻고자 솔개의 궂은 소리를 멋대로 내고 독사의 독기를 함부로 내뿜으며, ‘방자하게 군자와 소인, 사특함과 정직함을 구분한다’는 말로써 선류(善類)를 거간(巨奸)이라 속이고 제 할아비를 고충(孤忠)으로 추켰으니, 저 밝은 효종의 영혼이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데 신치운이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 통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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