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임신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하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김수문(金守文)이 사원(私院)을 주장(主張)하여 이건명(李健命)에게 공을 세웠고, 과제(科製)를 대술(代述)하여 김제겸(金濟謙)과 교제를 맺었으며, 현인(賢人)을 상해하고 정도(正道)를 독해(毒害)하는 논박이면 팔을 걷고 담당(擔當)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로 자신을 출세하는 계제로 삼았으니, 의관(衣冠)을 갖춘 관원의 대열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토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논하기를,
"우림 장(羽林將) 채덕윤(蔡德潤)이 미세(微細)한 일로 인하여 광흥창 수(廣興倉守) 이언위(李彦緯)에게 화를 내고, 짧은 옷에 편복(便服)으로 내정(內庭)에 갑자기 들어가 온갖 추악한 욕을 다하여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멀리 유배(流配)한 죄인 최수징(崔壽徵)·김우태(金遇兌)를 잡아다가 심문하여 엄중히 사실을 캐내어 그 재곡(財穀)의 거처(去處)를 모두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광보(李匡輔)를 교리(校理)로, 심단(沈檀)을 판윤(判尹)으로, 조석명(趙錫命)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이현보(李玄輔)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임금의 병환이 계속 여러 날 동안 낫지 않아 수라(水剌) 올리는 것마저 싫어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또 한열(寒熱)의 징후가 있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약(藥)을 의논하여 시진탕(柴陳湯)을 지어 올렸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을 이루었고, 해를 지낼수록 깊은 고질이 되었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昏迷)한 증상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 국방(局方)에서 올린 우황 육일산(牛黃六一散)과 곤담환(滾痰丸) 등 하리(下利)의 약제(藥劑)를 복용하였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 사인(士人) 이공윤(李公胤)은 성질이 광망(狂妄)하였으나 의업(醫業)으로 명성이 있었는데, 그의 의술은 대체로 준리(峻利)224) 를 위주로 하였다. 임인년225) 이후로 천거(薦擧)되어 약방(藥房)에 들어가 임금의 병환을 모시었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桃仁升氣湯)을 자주 복용하여 크게 탕척(蕩滌)해 내면 임금의 병환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을 시험해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오히려 방자하게 노기 띤 눈으로 보면서 스스로 의술을 자랑하며, 다시 시평탕(柴平湯)을 의논하면서 대황(大黃)·지실(枳實) 등 추탕(推盪)226) 하는 재료로 군약(君藥)227) 을 삼아 계묘년228) 에 시작하여 올봄에 이르도록 계속하여 1백 수십 첩(帖)을 올렸다. 그러자 비록 임금의 체부(體膚)의 외형(外形)은 왕성하나 비위(脾胃) 등 내장이 허하였고, 음식을 싫어하는 날수가 오래 되어 마침내 한열(寒熱)의 증세가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이광좌(李光佐)는 이공윤의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대비(大妃)의 병이 나은 것도 그 의약(議藥)의 공을 이공윤에게 돌리고 논상(論賞)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식자(識者)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8월 3일 계유
【사헌부장령(司憲府 掌令) 유시모(柳時模)이다.】 에서 논하기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 이기복(李基福)이 병든 몸을 싣고 부임하여 합문(閤門)을 닫고 굳게 누워서 군정(軍政)과 병영(兵營)의 업무를 한결같이 포기(抛棄)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도록 하소서."
하였고, 사간원(司諫院)에서 여러 도(道)의 목화(木花) 밭에 급재(給災)229) 하기를 청하자,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밤에 임금이 한열(寒熱)이 갑자기 심하여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 등이 대조전(大造殿) 침실에 입진(入診)하고, 이튿날 아침에 의논하여 승양산화탕(升陽散火湯)을 지어 올렸다.
8월 6일 병자
임금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으로 이어(移御)하였다.
8월 7일 정축
임금이 또 설사(泄瀉) 기운이 있어서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수어사(守禦使) 김일경(金一鏡)이 대간(臺諫)의 논계를 만나 부신(符信)을 반납하고 교외(郊外)로 나가 오래도록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으니, 사체(事體)가 미안합니다. 청컨대 김일경을 추고(推考)하고 재촉하여 올라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8일 무인
임금이 한열(寒熱)이 그치지 않아 약방(藥房)에서 의논하고 시호백호탕(柴胡白虎湯)을 지어 올리고, 세 제조(提調)가 처음으로 본원(本院)에서 직숙(直宿)하였다.
권변(權忭)을 승지(承旨)로, 이명의(李明誼)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일제(李日躋)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8월 9일 기묘
【사헌부지평(司憲府 持平) 이현보(李玄輔)이다.】 에서 논계하기를,
"위솔(衞率) 홍유도(洪裕度)는 부관(部官)230) 의 출신으로 성질 또한 용렬(庸劣)하고 어리석으며,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박필신(朴弼莘)은 유학의 영수(領袖)요 이름난 재상(宰相)의 손자로서, 행실이 이미 보잘것이 없고 술주정이 심하여 미치광이같으며, 훌륭한 조상이 남긴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타인(他人)의 가르치는 대로 하며 가정(家庭)의 문자(文字)를 괴란(壞亂)하는 대로 방치하여 온 세상 사람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기며 선비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홍유도를 태거하고 박필신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10일 경진
사헌부(司憲府) 【이현보(李玄輔)이다.】 에서 논하기를,
"금부 도사(禁府都事) 윤득귀(尹得龜)는 용렬하고 잗단 사람으로 해괴(駭怪)할 만한 일이 많고, 호조 정랑(戶曹正郞) 이제상(李齊尙)은 지체가 이미 한미(寒微)하고 사람 또한 간교하고 잗달며, 앞서 남원(南原)에 부임(赴任)하여서는 관탕(官帑)231) 의 곡식을 덜어내어 가면서 비용을 후하게 하는 것에 그릇이 된다는 말이 낭자(狼藉)하게 전파(傳播)되어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분노하였습니다. 전답(田畓)을 답험(踏驗)하는 책임이 아무리 긴요하고 중대하다고 하나 염문(廉問)하고 안찰(按察)하는 데 비교하면 경중(輕重)이 저절로 분명한데, 이조(吏曹)에서는 수의(繡衣)232) 로 초계(抄啓)한 사람이라 하여 경차관(敬差官)으로 의망(擬望)하였습니다. 유필원(柳弼垣)은 초계(抄啓)를 받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시골에 내려가 올라오지 않으니, 사체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윤득귀는 도태(淘汰)시켜 제거하고, 이 제상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며, 이조 당상(吏曹堂上) 및 유필원은 추고(推考)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성흠(韓聖欽)을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유필원(柳弼垣)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8월 11일 신사
임금이 한열(寒熱)로 인해 수라(水剌) 올리는 것을 싫어함이 더욱 심하므로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우선 복약(服藥)을 정지하도록 청하였다. 그리고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여러 도에 급재(給災)한 바의 결수(結數)가 아직도 부족한지라 지금이라도 더 급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남(嶺南)에 이미 8천 결(結)을 주었으니 지금 8천 결을 더 주고, 호남(湖南)에 이미 6천 결을 주었으니 지금 6천 결을 더 주며, 호서(湖西)에 이미 6천 결을 주었으니 지금 4천 결을 더 주고, 해서(海西)에 이미 2천 1백 결을 주었으니 지금 2천 2백 결을 더 주고, 경기(京畿)에 이미 2천 2백 결을 주었으니 지금 1천 8백 결을 더 주며, 강원도(江原道)에 이미 5백 결을 주었으니 지금 1천 결을 더 주게 하소서. 그리고 지금 더 줄 밭이 얼마이며 논이 얼마인지는 오직 도신(道臣)이 그 다소(多少)를 참작해 헤아려서 분정(分定)하여 고루 주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광좌가 또 말하기를,
"실록 당상(實錄堂上)이 중대한 업무를 띠고 있어서 역사(歷史)를 수찬(修纂)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니, 마땅히 당상(堂上) 중에서 문망(文望)이 있고 직무(職務)가 번거롭지 않은 자를 채택하여 그로 하여금 사국(史局)에 임무(任務)를 전임(專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윤순(尹淳)의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체직(遞職)하여 사국 당상(史局堂上)으로 임명하도록 하소서."
하니, 또한 그대로 따랐다.
8월 15일 을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이일제(李日躋)이다.】 에서 계론(啓論)하기를,
"장령(掌令) 윤동수(尹東洙)가 일찍이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재임(在任)할 때, 감사(監司) 권익관(權益寬)이 공문(公文)으로 보고한 것을 회제(回題)하면서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어조(語調)를 띠어 예모(禮貌)의 도리를 결여함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권익관을 추고(推考)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능침(陵寢)의 제관(祭官)을 백도(白徒)233) 순장(巡將)으로 차정(差定)하는 것은 제사(祭祀)의 전례(典禮)를 공경히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해조(該曹)에 신칙(申飭)하여 문관(文官)·남행(南行)234) ·무관(武官)과 종반(宗班)을 논할 것 없이 반드시 벼슬이 현달(顯達)한 자를 차송(差送)하고, 싫어서 회피하는 자는 계달하여 논죄(論罪)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시골 유생(儒生) 조명관(趙命觀)의 상소에 감히 ‘현(賢)’이란 한 글자를 복주(伏誅)된 흉적(凶賊) 윤휴(尹鑴)에게 은연히 더하였으니, 적(賊)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현인(賢人)으로 삼는 이치가 어찌 고금 천하(古今天下)에 있겠습니까? 청컨대 변방 먼 곳으로 정배(定配)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명응(兪命凝)을 승지(承旨)로, 김시혁(金始㷜)을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삼았다.
8월 16일 병술
교리(校理) 오수원(吳遂元), 부교리(副校理) 신치운(申致雲)이 차자(箚子)을 올려 말하기를,
"식려(式閭)235) 와 설례(設醴)236) 는 오직 조정(朝廷)에서 선비를 예우할 즈음에 논할 수 있으며, 옹수(擁篲)237) 하고 절절(折節)238) 하는 것은 영부(營府)239) 와 관하(管下)240) 의 사이에서 책망할 바가 아닙니다. 도신(道臣)으로서 수령(守令)을 꾸짖고 힘쓰도록 권장한 것을 조롱하고 업신여겼다고 문득 책벌(責罰)을 더한다면, 지금 이후로는 하나라도 유학(儒學)하는 이름을 가지고 수령으로 자처할 사람이 드물 터이니, 도신이 된 자는 체통(體統)을 베풀 곳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대간(臺諫)은 바로 법을 집행하는 관원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서 법을 집행하는 일을 탄핵하는 것은 대간의 체모(體貌)에 합당하지 못하며, 크게 후일의 폐단에 관계될 것입니다. 청컨대 충청 감사(忠淸監司) 권익관(權益寬)을 추고(推考)하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하고, 논계(論啓)한 대간은 체차(遞差)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윤동수(尹東洙)는 학문과 행검으로 조정에 나아간 사람이라서 보통 음관(蔭官)과는 구별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읍재(邑宰)가 되어서 권익관(權益寬)이 행정에 관한 일로 독려하고 꾸짖은 것은 본래 당연하거늘 이일제(李日躋)가 그것을 논한 것은 또한 가소롭기는 하나, 이일제가 신진(新進)으로서 김일경(金一鏡)의 무리와는 조금 스스로 다른 입장을 표방하므로 오수원(吳遂元)과 신치운(申致雲)이 논박하여 체임을 주장한 것은 대개 이일제를 오래 대각(臺閣)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임금이 병환으로 침선(寢膳)이 날로 줄어들고 소변이 점점 단축되므로 약방(藥房)에서 약(藥)의 조제를 의논하고 시령탕(柴苓湯)을 올렸다.
8월 17일 정해
조상경(趙尙慶)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8월 19일 기축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다시 약의 처방을 의논(議論)하고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올렸으니, 비로소 임금의 환후(患候)가 허하고 피곤함을 염려하였다.
8월 20일 경인
밤에 임금이 가슴과 배가 조이듯이 아파서 의관(醫官)을 불러 입진(入診)하도록 하고,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문안(問安)을 하였다.
8월 21일 신묘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生柿]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豉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
8월 22일 임진
임금의 복통(腹痛)과 설사(泄瀉)가 더욱 심하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고 황금탕(黃芩湯)을 지어 올렸다.
8월 23일 계사
임금의 설사의 징후가 그치지 않아 혼미하고 피곤함이 특별히 심하니,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탕약(湯藥)을 정지하고 잇따라 인삼속미음(人蔘粟米飮)241) 을 올렸다.
8월 24일 갑오
비와 눈이 내렸다. 임금의 환후(患候)가 피곤하고 위태함이 더욱 심하고 맥(脈)이 낮아져서 힘이 없었다. 4경(更)에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여 삼다(參茶)를 올리고 물러나와서는 주원(厨院)242) 으로 옮겨서 입직(入直)하기를 청하였으며, 사각(巳刻)에 다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병환이 있은 뒤로 여러 신하들이 성후(聖候)를 문안하면 임금이 번번이 응수(應酬)하여 대답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음성이 점점 미약하여졌다.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와 제조(提調) 이조(李肇)가 미음(粥飮)을 진어하기를 권하였으나 모두 응답하지 않았으며, 세제(世弟)가 일어나서 청하매 임금이 비로소 고개를 들므로 미음을 올렸다. 제조 등이 물러나와 여러 의원(醫員)들과 약을 의논하였는데, 이공윤(李公胤)이 공언(公言)하기를,
"삼다(蔘茶)를 써서는 안된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2첩만 진어할 것 같으면 설사는 금방 그치게 할 수 있다."
하므로, 마침내 다려 올려 복용하였다. 유각(酉刻)에 의관(醫官)이 입진(入診)하고 물러나와 말하기를,
"환후(患候)의 증세가 아침에 비교해 더욱 위급합니다."
하자, 모든 신하들이 희인문(熙仁門)으로 달려 들어갔고, 대내(大內)로부터 제조(提調)의 입진(入診)을 재촉하여 이광좌 등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내시(內侍)를 의지하고 앉아서 눈을 몹시 부릅뜨고 보았다. 이광좌가 문후(問候)를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자, 세제(世弟)가 울면서 말하기를,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하였고, 이광좌가 삼다(參茶)를 올려 임금이 두 번 복용하였다. 이공윤(李公胤)이 이광좌에게 이르기를,
"삼다를 많이 쓰지 말라. 내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氣)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
하니, 세제(世弟)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본시 자기의 의견(意見)을 세울 곳이 있긴 하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꼭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하였다. 조금 지나자 임금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여졌다. 세제가 또 말하기를,
"내가 의약(醫藥)의 이치를 알지 못하나, 그래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陽氣)를 능히 회복[回陽]시키는 것만은 안다."
하였다. 어제 쓰던 삼을 바로 멈추었던 것은, 생각건대 반드시 이공윤의 말 때문에 미루었던 것 같다. 2경(二更)에 임금의 기식(氣息)이 다시 미약하므로 이광좌가 삼다를 올렸으나 임금이 스스로 마시지 못하여 의관(醫官)이 숟가락으로 떠서 넣었다. 이광좌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기도(祈禱)하기를 청하고 이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여 증후(症候)에 어두워서 약물을 쓰는 데도 합당함을 잃은 것이 많았으니, 그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고, 세제는 말하기를,
"성상(聖上)이 나에게 정(情)으로는 형제(兄弟)이나 의(義)로는 부자(父子)의 관계를 겸하였는데, 병환중에 모시기를 잘하지 못하여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빨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제관(祭官)이 미처 향(香)을 받지도 못하였는데 임금이 그만 속광(屬纊)243) 을 하였다. 세제(世弟)가 대비(大妃)에게 품지(稟旨)하여,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전성군(全城君) 이혼(李混),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 도사(都事) 김후연(金後衍), 주부(主簿) 심유현(沈維賢)을 명소(命召)하여 유문(留門)244) 입시(入侍)하도록 하고, 또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으로 하여금 《오례의(五禮儀)》를 가지고 입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승지(承旨) 박내정(朴乃貞)이 궁성(宮城)을 호위(扈衞)하도록 청하자 중전(中殿)이 이광좌에게 하교(下敎)하여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를 기복(起復)245) 하여 입시(入侍)하도록 하니, 이광좌가 대답하기를,
"국구(國舅)의 기복은 대신이 독단(獨斷)하여 할 수 없는 것이니, 동궁(東宮)의 영지(令旨)246) 를 취득함이 합당합니다."
하였다. 이에 중전(中殿)이 세제(世弟)에게 청하고, 세제는 내교(內敎)로써 승정원(承政院)에 영(令)을 내려 기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제가 예관(禮官)을 돌아보고 피발(被髮)247) 하는 것의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을 물어보면서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옛일을 상고하여 의논을 정하도록 하였으며, 이광좌는 사관(史官)을 시켜 ‘상대점(上大漸)248) ’의 세 글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두루 보이도록 하고 곧 고복(皐復)249) 을 하였다.
8월 25일 을미
밤에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왔으며 또 정성(井星) 위에서도 나왔다. 축각(丑刻)250) 에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니, 내시(內侍)가 지붕에 올라가 고복(皐復)을 하고 곧 거애(擧哀)251) 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세제(世弟)가 피발(被髮)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 아니한지를 가지고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유신 등이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 참최 변복조(斬衰變服條)에 왕세자(王世子)와 대군(大君) 이하가 피발하는 글이 있는데, 저하(邸下)가 대행 대왕(大行大王)252) 에게는 왕통(王統)을 계승(繼承)하는 의(義)가 있으니, 상복(喪服)을 변통하는 절차는 당연히 《오례의》에 의거하여 거행하여야 합니다."
하니, 세제가 드디어 피발을 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덕스러운 의용(儀容)이 혼후(渾厚)하였으며,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섬기는 데 성효(誠孝)를 돈독히 다하였고, 어린 나이에 일찍 학문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물욕(物慾)의 누(累)도 없었다. 불행한 소조(所遭)에 걸려서 변통하며 지내는 데 지극히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그에 대해 헐뜯고 칭찬함이 전혀 중외(中外)에 들리는 바가 없으니, 사람들은 모두 신성(神聖)한 덕(德)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심과 두려움이 쌓여 병을 이루었고 깊어갈수록 더욱 고질화해서, 즉위한 이래로 정사(政事)를 다스리는 데 게을리하였고 조회에 임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정사를 여러 아랫 신하들에게 맡겼는데, 그런데도 승하하신 날에는 뭇 신하들과 백성이 달려와 슬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아! 그 애통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애통해 하였고 공경(恭敬)함을 백성에게 베풀지 않았는데도 백성은 공경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를 총호사(摠護使)로, 종실(宗室)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을 수릉관(守陵官)으로, 심단(沈檀)·이진검(李眞儉)·이명언(李明彦)을 빈전 제조(殯殿提調)로, 조태억(趙泰億)·김일경(金一鏡)·이세최(李世最)를 국장 제조(國葬提調)로, 오명준(吳命峻)·심수현(沈壽賢)·이사상(李師尙)을 산릉 제조(山陵提調)로 삼고, 이광좌를 원상(院相)253) 으로 삼아 승정원(承政院)에서 직숙(直宿)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옛부터 내려온 예(列)이었다.
사각(巳刻)에 목욕(沐浴)을 하였는데, 대신(大臣)·육승지(六承旨)·사관(史官)과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함평군(咸平君) 이홍(李泓), 도사(都事) 김후연(金後衍), 주부(主簿) 심유현(沈維賢), 대사헌(大司憲) 이명언(李明彦), 사간(司諫) 유수(柳綏)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미시(未時) 초(初)에 염습(殮襲)을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서야 마쳤다.
8월 26일 병신
예조(禮曹)에서 성복(成服)을 하는 날 사위(嗣位)하는 절목(節目)을 올렸는데, 세제(世弟)가 환급(還給)을 영(令)하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하루 세 번 환납(還納)하고는 조종(祖宗)의 떳떳한 법전(法典)을 상고하고 천지의 대의(大義)를 생각하여 다시 환급하지 말도록 진달하였으며, 승정원(承政院)·양사(兩司)·홍문관(弘文館) 역시 세 번 진달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미각(未刻)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염(斂)을 마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심수현(沈壽賢)이 들어가서 염한 것을 재어보니, 넓이가 1척(尺) 9촌(寸) 9분(分)이었는데, 장생전(長生殿)에 저장(儲藏)되어 있는 재궁(梓宮)254) 아홉 부(部) 중에서 가장 넓은 것이 겨우 1척 7촌이었다.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비록 여염(閭閻)에 있는 것을 찾아 본다 하더라도 그 두께와 넓이가 반드시 국가(國家)의 수용(需用)에는 맞지 않을 것이니, 일이 군색한 지경에 도달하면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효종(孝宗)의 국장(國葬) 때에도 일의 형세가 역시 이번과 같았는데, 현종 대왕(顯宗大王) 같은 하늘이 내신 효사(孝思)와 수상(首相) 정태화(鄭太和)의 현명함으로도 역시 부판(附板)255) 을 해서 사용하였습니다."
하니, 세제(世弟)가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자, 모두 말하기를,
"부판을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자, 세제가 말하기를,
"자전(慈殿)에 들어가 품지(稟旨)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이광좌(李光佐)는 말하기를,
"이는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니, 청컨대 2품(二品) 이상과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이광좌가 물러나와 회의를 하고 다시 진달(陳達)하기를,
"여러 신하들도 모두 부판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합니다."
하니, 마침내 부판(附板)을 하도록 명하였다.
사간(司諫) 유수(柳綏)가 논하기를,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기복(起復)에는 당연히 오모 각대(烏帽角帶)를 착용해야 하는데, 지금 포과 모대(布裹帽帶)로 입시(入侍)하였으니, 청컨대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세제(世弟)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어제 생기(省記)256) 한 이외의 대소 관원이 모두 궁궐 안에서 직숙(直宿)하였으니, 이것은 곧 승지(承旨)가 유문(留門)하도록 품하여 청하지 못한 실수이니, 청컨대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27일 정유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예조(禮曹)에서 경자년257) 국휼(國恤) 때 백관(百官)의 상복(喪服) 제도에 저장(苴杖)258) 의 한 의절(儀節)에 소루(疎漏)한 단서(端緖)가 없지 않았으니, 다시 대신(大臣)과 종친(宗親)의 도정(都正) 이상, 문관(文官)·무관(武官)·음관(蔭官)의 2품(二品)으로서 일찍이 동돈녕(同敦寧)·부총관(副摠管) 이상을 지낸 자와, 당상(堂上)으로서 일찍이 판결사(判決事) 이상을 지낸 자, 당하(堂下)의 참하(參下)로서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을 지낸 외관(外官), 그리고 수사(水使) 이상과 각 고을 수령(守令)으로서 일찍이 내직(內職)을 보았고 저장(苴杖)을 가지는 일을 지낸 자와 논의하여 고쳐 마련하도록 하고,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생도(生徒) 이하는 옛 예(禮)에 백의관(白衣冠)을 착용한다는 글이 있으나 지금은 참최(斬衰)259) 로서 상복(喪服)을 받은 일이 없는데도 띠를 생마(生麻)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 반박(斑駁)260) 됨이 심하니, 지금은 고쳐서 생포(生布) 띠를 하도록 하며, 백관(百官)의 시사복(視事服)은 포과대(布裹帶)로 하고, 평소 가정에서의 복장도 역시 참최가 아닌데 띠를 생마로 쓰면 철주(掣肘)261) 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역시 생포립(生布笠)과 생포대(生布帶)를 착용하도록 마련하여 들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과 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를 거느리고 다시 사위(嗣位)의 절목(節目)을 올려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어상(御床)262) 의 봉심(奉審)으로 인하여 입시해서 눈물을 흘리며 돈독히 청하였으나, 세제(世弟)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종실(宗室) 및 승정원(承政院)과 삼사(三司)에서 재차 진달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이광좌가 자전(慈殿)과 중전(中殿)에게 계달하여 내전(內殿)에서 돈독히 권하도록 청하자, 그대로 허락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최규서(崔奎瑞)가 용인(龍仁)으로부터 달려 왔는데, 대궐 아래로 세제(世弟)가 승지(承旨)를 보내어 유시(諭示)하고 함께 들어오라고 하매 최규서가 달아나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엎드려 명(命)을 기다리자, 다시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하여 우사(寓舍)로 돌아갔다.
8월 28일 무술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의정부(議政府)에서 백관(百官)·종실(宗室)·승정원(承政院)·삼사(三司)를 거느리고 하루 세번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였고, 이광좌가 또 어상(御床)의 봉심(奉審)으로 인하여 극력 청하매, 세제(世弟)가 처음으로 의정부(議政府)의 계달을 따랐다.
8월 29일 기해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으며, 밤에 번개가 쳤다.
예조(禮曹)에서 청하기를,
"왕대비 평복 칭경 정시(王大妃平復稱慶庭試)는 졸곡(卒哭) 뒤를 기다려서 날을 가려 물리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사직(司直) 이인복(李仁復)이 상서(上書)하기를,
"왕대비(王大妃) 복제(服制) 의주(儀註)에 강등(降等)하여 자최 기년(齊衰朞年)263) 으로 한 것은, 신은 이 예(禮)가 어디에 근거하였는가를 모르겠습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숙종[肅廟]의 장자(長子)로서 열성(列聖)의 정통(正統)을 이었으니, 지금 이번 대상(大喪)에 자성(慈聖)264) 께서 복(服)을 받는 의절은 참으로 경례(經禮)265) 에 이른 바와 같이 적자(嫡子)를 위한 자최(齊衰) 3년이 되는 것입니다. 논의하는 자가 비록 국가의 제도(制度)를 가지고 말을 하였다 하나 현종[顯廟]이 말년(末年)에 각오(覺悟)하신 바나 숙종께서 그 뜻을 따라 이정(釐正)266) 하신 것은 유독 이미 행한 국가의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단의 왕후(端懿王后)267) 초상(初喪) 때에 양전(兩殿)의 복제(服制)를 고쳐서 기년(期年)으로 하고, 대공(大功)268) 을 적용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적자(嫡子) 3년의 의(義)를 취한 것이니, 그 소중한 바가 바로 오늘날에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소중한 처지에 도리어 줄여서 행하려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널리 옛 제도를 상고하고 근래의 일도 참작하여 막중한 예전(禮典)으로 하여금 지극히 당연한 데로 돌아가도록 힘쓰소서."
하니, 세제(世弟)가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이를 의논하도록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와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가 모두 말하기를,
"을묘년269) 에 비록 윤휴(尹鑴)의 말을 채용하여 고쳐서 3년 제도를 행하였으나, 단의 왕후(端懿王后)의 상(喪)에는 선왕(先王)의 비답(批答)에 국가의 제도로 단정(斷定)하여 기년(期年)으로 하였습니다. 대개 국가의 제도로는 장자(長子)와 장부(長婦)가 아울러 기년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특별히 3년의 의(義)를 지적한 것은 어디에 의거하여 발론하는 것입니까? 공경히 선조(先朝)의 최후의 비지(批旨)를 따르는 이외에는 별도의 의논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니, 세제(世弟)가 그대로 따랐다.
오각(午刻)270) 에 환취정(環翠亭)으로부터 대행 어상(大行御床)271) 을 받들어 선정전(宣政殿)으로 옮기고 대렴(大斂)을 하여 재궁(梓宮)에 내렸는데, 세제(世弟)가 봉(封)한 물건 하나를 가지고 대신들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이것은 곧 숙묘(肅廟)의 어필(御筆)인데, 대행왕(大行王)께서 일찍이 보배롭게 소장(所藏)하시던 것으로, 곤성(坤聖)272) 께서 재궁(梓宮)에 넣고자 하신다."
하고, 인하여 스스로 받들어 넣고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사책(史策)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예를 마치자, 도승지(都承旨) 남취명(南就明)이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오를 때에 승지(承旨)는 그 인원을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밖에 있는 승지는 체임(遞任)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권변(權忭)을 옛 전례(前例)에 의하여 불러 들여서 원상(院相)을 차출(差出)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갑인년273) 에 비록 총관(摠管)을 차출한 예(例)는 있으나, 차출하여 제수(除授)하는 것은 인신(人臣)이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남취명이 이를 신에게 의논하므로 신이 그 불가함을 말하였는데도 남취명이 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진달한 바 있으니, 이는 체통(體統)이 문란한 것입니다."
하니, 세제(世弟)가 말하기를,
"승지(承旨)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변통하지 말고 그 마음을 안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조(李肇)가 고부사(告訃使)와 청시사(請諡使)를 갑인년274) ·경자년275) 의 예(例)에 의하여 종신(宗臣)으로 차출해 보내도록 청하자,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옛일은 비록 이와 같으나, 지금 만일 새로 뽑는다면 신이 비록 연경(燕京)에 가더라도 정석(鼎席)276) 을 비우지는 않을 것인데, 어찌 꼭 종신(宗臣)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이조(李肇)가 신과 서로 대면했을 때는 한 마디도 이를 언급함이 없더니 직접 청하였으니, 역시 체통을 무너뜨렸습니다. 청컨대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세제(世弟)가 말하기를,
"대신이 어떻게 갈 수 있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말하기를,
"그 불가함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신이 아무리 보잘것이 없다 하더라도 체통이 이와 같아서는 안됩니다."
하고, 인하여 재삼(再三) 극력 청하매, 세제(世弟)가 그대로 따랐다. 세제가 몸소 송종(送終)의 일을 집행하는데 일마다 정례(情禮)에 합당하였고 털끝만큼도 차질이 없어서 남은 유감이 있지 않았으며, 우의정(右議政) 이광좌(李光佐) 역시 홀로 균축(勻軸)277) 을 잡고 갑자기 대상(大喪)을 만났는데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진중하고도 자상하고 세밀하여 조금도 빈틈이 없었으니, 중앙이나 지방에서 모두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8월 30일 경자
선정전(宣政殿)에서 성복(成服)을 하였다.
"이날 오시(午時)에 왕세제(王世弟)가 면류관과 곤복을 갖추어 입고 옥새(玉璽) 받는 것을 빈전(殯殿)278) 에 고하고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즉위하니, 백관(百官)이 길복(吉服)으로 하례(賀禮)를 올렸다. 왕대비(王大妃)를 높여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왕비(王妃)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교명(敎命)을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고 크게 사면(赦免)하였다. 세제(世弟)가 여차(廬次)279) 에서부터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면류관을 쓰지 못하다가 전문(殿門)에 임하여는 슬피 부르짖으며 자리에 기꺼이 오르지 않았고, 또 자리를 물리치라고 명하여 대신(大臣)들이 번번이 많은 말로 간곡히 청해서 허락을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융성한 덕품과 지극한 선행으로서, 세자(世子) 자리에 있은 지 30여 년 만에 숙묘(肅廟)의 대리(代理)의 명령을 받았고, 팔역(八域)280) 의 민생[含生]이 목을 빼고 〈대행왕(大行王)을 위해〉 죽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신축년281) 개원(改元) 초에 이르러 일찍이 대책(大策)을 결정하고 주창(主鬯)282) 의 중대한 임무를 개제(介弟)283) 에게 부탁하였으니, 이는 진정 천고(千古) 제왕가(帝王家)의 융성한 절문(節文)으로서, 의지와 사려가 깊고 원대하며 주고받음이 광명(光明)하여 길이 종사(宗社) 만년의 기초가 되었으니, 아! 아름답도다. 더구나 대행왕의 마음에서 우러난 우애(友愛)와 사왕(嗣王)의 하늘이 낸 효성은 백왕(百王)에 뛰어나 궁중 안이 애연(䔽然)한 화기에 차 있었으며, 가까이 친압(親狎)하는 무리도 숙연(肅然)히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이간하는 자가 없었다.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 즈음에 이르러서는 승순해 받들고 보호하며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승하하신 뒤에는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여 보는 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일국의 신민들이 더욱 대행왕이 막중한 부탁에 훌륭한 사람을 얻은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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