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정사
임금이 청(淸)나라 사신(使臣)을 인화문(仁和門) 안에서 접견(接見)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나와서 우리 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 주상(主上)은 자라면 반드시 엄명(嚴明)할 것이다. 너희 나라 신하들은 마땅히 근신(謹愼)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1월 29일 무자
대사헌(大司憲) 허목(許穆)이 고향에서부터 들어와서 새로 임명된 데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여차(廬次)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연령(年齡)은 비록 늙었으나, 지금 보니 기력(氣力)은 쇠하지 아니하였으니, 힘써 머물러 물러나지 말고 나의 과실을 보충해 도우라. 이를 바라는 바다."
하니, 허목이 이르기를,
"신(臣)이 향곡(鄕曲)에 살고 있어 세상 일을 알지 못하오나, 근래에 인심(人心)과 세변(世變)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의 윤기(倫紀)가 문란해지고 하늘의 이치가 어둡고 막혀 있는지라, 이러한 때에 중흥(中興)의 어려움은 간과(干戈)가 창궐하는 시기보다도 배(倍)가 됩니다. 성명(聖明)의 임어(臨御)하심을 비록 촌부(村婦)와 초동(樵童)까지 모두 다 기뻐하고 있으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누구나 시초는 있어도 유종의 미를 거두는 자는 드물다.’고 했습니다. 종시(終始)가 여일(如一)해야만 제왕(帝王)의 업(業)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묵묵히 있었다. 【나머지는 위에 보인다.】
12월 18일 정미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송시열(宋時烈)과는 스승과 제자의 의(義)가 있는데 엄명(嚴命)에 핍박되어 오(誤)자 한 글자를 썼기 때문에 인혐(引嫌)한다.’고 말하고, 말단에 이우정(李宇鼎)의 피사(避辭)를 논하였는데, 요약하면,
"신(臣)의 집은 대대로 당론(黨論)이 없었고 신과 교유(交遊)하는 사이에도 또한 편계(偏係)함이 없었던 것은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바입니다. 신이 금년 봄의 사직소(辭職疏)에서 평생에 뜻한 바를 다 진달하였는데, 그것이 오직 태괘(泰卦) 구이효(九二爻)의 뜻에 있습니다. 이를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매양 조신(朝臣) 중에 총명(聰明)이 뛰어나고 국사(國史)에 유의(留意)하는 자를 보면 오늘날의 당목(黨目)의 피차(彼此)를 논하지 않고 언제나 이런 뜻을 논하면서 태괘(泰卦)의 도로써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였고 자신도 또한 그 사이에서 분촌(分寸)의 효력을 얻은 바 있어서 거의 서로가 공경하고 협력하여 성조(聖朝)를 비보(裨補)하기를 바랐습니다…….’ 신이 이우정·목창명(睦昌明) 등과는 일찍이 서로 친숙하지 못했으므로 미처 이러한 뜻으로 강론(講論)하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그 사람됨을 보니 본래 용류(庸流)가 아니므로 항상 심지(心志)를 서로 융통(融通)하여 함께 국사에 힘쓸 것을 생각하였더니, 애석하게도 당론(黨論)이 백년(百年)의 고질이 되어 그 편사(偏私)하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가리워져서 유현(儒賢)을 죄로 얽고도 구제할 생각을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되돌려줄 것을 명하고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하게 하였다. 【원소(原疏)에 대한 비답의 요지는 위에 보인다.】 이단하는 연약하고 겁이 많아서 특별한 지조가 없었고, 위명(威命)에 겁을 내어 능히 자기의 소견을 지키지 못하고는 그 스승과 제자의 분의를 잊고 오(誤)자 한 글자를 송시열의 예론(禮論) 아래에 써 넣었다. 이 상소는 이우정 등을 권장하고 허여하는 것이 되었으니, 또한 시속 무리들에게 아첨하여 자신의 용납을 구하는 것과 같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조롱하고 비웃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보궐정오3권, 숙종 1년 1675년 4월 (0) | 2025.10.22 |
|---|---|
| 숙종실록보궐정오2권, 숙종 1년 1675년 1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1724년 9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1724년 8월 (0) | 2025.10.22 |
|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1724년 7월 (0) | 2025.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