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3권, 숙종 1년 1675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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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무술

경기(京畿)의 진사(進士) 성호석(成虎錫) 등이 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의 석방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송시열이 예론(禮論) 때문에 죄를 입었음은 진실로 너무 억울하였다. 그러나 초사(初史)를 편수(編修)한 자가 당시의 재이(災異)만을 나열하여 써서 송시열을 멀리 귀양보낸 것의 응험(應驗)이라 한 것은 부회(傅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견식이 있는 사람은 이를 비웃었다.

 

4월 20일 무신

김우명(金佑明)이, 홍우원(洪宇遠)이 일찍이 상방(尙方)에서 짜서 만든 명주가 검소함을 해친다고 논한 것 때문에, 소를 올려 상방 제거(尙方提擧)를 사퇴(辭退)하니, 임금이 상례(常例)의 비답(批答)을 내렸다.                        【자세한 것은 위에 보인다.】 홍우원이 경연(經筵)에서 아뢴 것은 경계를 진달(陳達)한 예(例)를 든 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반드시 국구(國舅)를 침핍(侵逼)하려는 데 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즉 김우명이 이를 인책(引責)하여 굳이 사퇴한 것은 너무 지나쳤다 하겠다. 그런데 초사(初史)를 편수한 자가 또 이를 ‘홍우원(洪宇遠)이 임금께서 속으로 혐의를 품은 줄을 알았으므로 틈을 엿보아 〈말을〉 꺼낸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더욱 본래의 사정(事情)이 아니었을 것이다. 홍우원은 비록 말할 것이 못되지만, 군자(君子)의 공평 무사(公平無私)한 의논은 마땅히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4월 25일 계축

특별히 윤휴(尹鑴)를 승진시켜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윤휴가 예제(禮制)를 의논할 때 본래 화(禍)를 일으킬 마음이 있었으니, 평일(平日)에 교유(交遊)하던 자가 진실로 능히 작은 조짐을 보고서 크게 나타날 것을 알아, 이를 조기(早期)에 절교하였더라면, 진실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인년002)                                              이전의 윤휴의 죄는 다만 예제(禮制)를 의논하였던 일 하나뿐이었으니, ‘대고(大故)가 아니면 절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의논하든지, ‘숙계(宿契)를 추념(追念)하여 차마 갑자기 절교하지 못하였다.’고 했다면, 이는 또한 충후(忠厚)한 것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또 윤선거(尹宣擧)가 윤휴에게 글로 경계하였건만, 경계를 하여도 듣지 않아서 또 그를 절교하였는데, 그가 권권(眷眷)하게 편지로 송시열에게 권면하여 송시열로 하여금 윤휴의 잘못을 용서하여 죄고(罪錮)를 관대(寬大)하게 하려고 한 것은 또한 세도(世道)를 근심하고 당화(黨禍)를 염려한 뜻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뜻을 얻은 뒤에 서로 붙어서 악(惡)을 함께 한 무리들과 방불(彷彿)한 것이겠는가? 그런데 초사(初史)를 편수한 자가 반드시 이유(李𣞗)와 오정창(吳挺昌) 등을 견련(牽連)하여 썼으며, ‘애중(愛重)하라.’고 말한 것을 오멸(汚蔑)의 계획으로 여기기까지 했다는 것은 또한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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