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을축
행 대사성(行大司成) 남구만(南九萬)이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임금의 덕을 논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송시열(宋時烈)이 분곡(奔哭)하려 도성(都城)에 들어 왔다는 말을 듣고 곧 궁관(宮官)을 보내어 위안되고 기쁘다는 뜻을 전하고, 또 지문(誌文)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셨으며, 돈유(敦諭)하는 명을 일여덟 번이나 내려 끝내 불러 오시고야 말았으니, 이때에 전하께서 송시열에 대하여 허저(虛佇)001) 가 정성스럽고 예우(禮遇)가 융숭하셨던 것은 지극하다 하겠거니와, 겨우 한 두 달이 지나서 성심(聖心)이 문득 변하여 엄준한 분부와 꾸짖는 말씀이 전후에 잇달아서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것이 많이 있었는데, 전하께서 본디 송시열을 이러한 사람으로 여기셨다면 처음에 송시열을 사랑하여 대우하신 것이 어찌하여 저렇게 부지런하고 도타왔습니까? 이때문에 중외(中外)사람이 다들 ‘전하께서도 살을 에이듯 물에 점점 젖어드는 듯 참소하는 말에 동요되지 않으시지 못하여 앞뒤가 아주 다르게 되셨다.’ 하니, 이것은 소인(小人)의 마음이 함부로 천의(天意)를 헤아린 것이기는 하나, 자취를 잡아서 보면 조금도 그럴듯한 것이 없지는 않을 듯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외로운 한 몸이 홀로 재려(齋廬)에 계셨으니, 안으로는 두 자전(慈殿)께 문안하더라도 평소에 선왕(先王)을 늘 모시던 것만 못하고, 밖으로는 비국(備局)의 대신(大臣)을 인접(引接)하더라도 평소에 날마다 강관(講官)을 만나던 것만 못하시다는 것을 아침·낮·새벽·저녁으로 전하께서 함께 거처하신 자는 알 수 있습니다. 통곡하고 발을 구르며 슬퍼 어쩔 줄 모르는 심정이 이미 속에서 절박하고 만기(萬機)에 수작하는 번거로움이 또 눈앞에 더하면, 그때에 고문(顧問)하고 사령(使令)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가까이 있어 친숙한 사람에게 때때로 미쳤을 것인데, 이것은 예전부터 거룩하고 밝은 임금도 혹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이러하였다면, 전하께서 엄히 단속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또 정령(政令)을 내실 때에 홀로 신(神)처럼 밝은 결단을 내려 감히 털끝만큼도 끼어드는 것이 있을 수 없게 하셨더라도, 잠시 응낙하는 사이에 넉넉히 전하의 뜻을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이 전대(前代)를 두루 보건대, 이러한 무리를 임금이 처음에는 친숙하여 제어하기 쉽게 여기나, 중간에는 친근하여 믿을 만하게 여기고, 마침내는 화(禍)가 이루어져도 뉘우칠 수 없어서, 몸에 해롭고 나라에 흉(凶)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는데, 천고(千古)에 지나온 것이 마치 한 바퀴 자국에서 나온 듯하였습니다. 이것이 지사(志士)·충신(忠臣)이 분을 내어 팔짱을 끼고 통곡하여 눈물을 흘리며 제 몸이 죽고 사는 것을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한 번 아뢰어 느껴 깨닫기를 바라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송시열이 죄받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크더라도 반드시 존망(存亡)의 갈림에 문득 이르지 않으나, 신이 위에 아뢴 것에 혹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것이 있다면 억조 신민은 다 그 선뜩 마음이 차가와지고 나라의 일은 마침내 안정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니,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임금이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만나는 때가 적으면, 어쩔 수 없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사로이 사랑하는 자를 가까이하는 때가 많아져서, 그 끝의 폐단이 마침내 여기에 이를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능히 유사(儒士)를 가까이하여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강론하고 날마다 조신(朝臣)을 만나 다스리는 도리를 물으신다면, 고금의 치란(治亂)을 되새길 때에 반드시 놀라와서 마음에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고, 정령(政令)의 득실(得失)을 살필 때에 반드시 두려워서 마음에 닿는 것이 있을 것이므로, 뭇 부정(不正)한 문이 절로 막히지 않을 수 없고, 뭇 바른 길이 절로 열리지 않을 수 없어서 어두운 것이 나오는 것은 반드시 물리칠 수 있고 안팎의 말은 드나들게 되지 않을 것이니, 오늘날 거리에서 논의되는 깊은 고통과 긴 근심은 다 전하께서 한 번 마음을 돌리시는 사이에 구름처럼 사라지고 얼음처럼 녹을 것입니다.
예전에 주자(朱子)가 영종(寧宗)이 즉위한 처음에 면대하여 아뢴 차자(箚子)에 ‘이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열흘이 못되어 재집(宰執)을 진퇴(進退)하고 대간(臺諫)을 바꾼 것이 다 폐하께서 홀로 결단하신 데에서 나오고 대신(大臣)도 모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급사중(給事中)·사인(舍人)도 의논에 미치지 않았으나, 참으로 다 전하께서 홀로 결단하신 데에서 나오고, 그 일이 다 도리에 맞더라도 다스리는 체모에 어그러져서 장래의 폐단을 만들 것인데, 더구나 중외(中外)의 소문에는 의혹이 없지 않아서 다들 좌우가 그 권세를 훔쳤을는지도 모른다 하니, 이 폐단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신은 이름은 홀로 결단한 것이라 하나 임금의 위세가 아래로 옮겨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여 다스려지기를 바라려 하여도 도리어 어지러워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되새겨 그 뜻을 깊이 음미해 보건대, 신을 시켜 정성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다시 논열(論列)하게 하더라도 이 말만큼 매우 절박하고 마음에 슬퍼서 오늘의 병폐를 절실히 맞추지는 못할 것이므로, 감히 인용하여 말씀드립니다."
하고, 끝에 또 관유(館儒)의 벌을 풀어 주는 일을 논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매우 꾸짖었다. 【소(疏)의 개략과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4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註 001] 허저(虛佇) : 임금이 마음을 비워 신하의 말을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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