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을유
승지(承旨) 심광수(沈光洙)에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하였다. 심광수는 효묘(孝廟)의 잠저(潛邸) 때의 사부(師傅)였다. 장릉(長陵)을 추숭(追崇)하는 데 다른 의견을 주장했고, 병자년001) 에 성이 포위되었을 때는 화의(和議)를 배척하여 자못 명성과 인망이 드러났으며, 기해년002) 에 예(禮)를 논할 때는 윤휴(尹鑴) 등과 합하여 언론(言論)이 피창(詖猖)한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과람한 포상의 은전을 입었다.
경상도(慶尙道) 성주(星州)에 독용 산성(禿用山城)이 이루어졌다.
1월 6일 기축
윤휴(尹鑴)가 병거(兵車)의 제조를 정지했다 하여 소(疏)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에 눈물을 뿌리고 영결(永訣)한다는 말이 있어, 임금이 연달아 비망(備忘)을 내렸는데, 그 말의 뜻이 특별히 융숭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니, 윤휴가 오랜 만에 나왔다. 윤휴의 이른바 대계(大計)라는 것은 병거를 만드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기황(飢荒)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오직 많이 만들기를 일삼기 때문에 임금의 뜻이 조금만 어려워하면 언제나 퇴임하겠다고 임금에게 청하였으니, 그 패망(悖妄)됨이 심하였다. 무릇 송시열(宋時烈)이 고론(高論)을 제창한 뒤로 자취를 산림(山林)에 의탁한 자가 언제나 이를 빙자하여 진신(進身)하는 길로 삼았다. 송시열은 효종의 분발하여 유위(有爲)하려는 뜻을 만났던 것이니, 본래 이러한 말을 올릴 만하였지만, 윤휴에게 있어서는 시기적으로 나이 어린 임금이 새로 왕위를 이어 국세(國勢)가 고위(孤危)하였으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구구한 동남(東南)의 일을 이루 다 근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휴가 큰 소리로 공갈하여 간과(干戈)를 움직여 보려고 꾀했으나, 다행히 당시의 여론이 허여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나라를 그르치고 일을 낭패시킨 죄는 그 살덩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보상되겠는가? 아! 윤휴는 특별히 한 창자없는 사람일 뿐인데, 처음에 어떻게 하여 이름을 도둑질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2월 7일 기미
이 무렵 총관(摠管)은 마땅히 파(罷)해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는데, 우의정(右議政) 허목(許穆)이 차자[箚]를 올려 폐할 수 없음을 논하니, 임금이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가볍게 파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3월 2일 갑신
하교(下敎)하기를,
"지난번에 강화부(江華府)의 각 진보(鎭堡)의 군기(軍器)를 보니, 전죽(箭竹)이 영성(零星)하였다. 만약 위급한 일이 있으면, 진(陣)에 임하여 적을 상대로 쓰는 것은 시석(矢石)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이는 실로 국가(國家)의 숨은 근심이다. 내궁방(內弓房)의 전죽(箭竹)이 거의 누만(累萬)에 이르니, 전죽 1백 편(編)과 치우(雉羽) 5천 개를 빼내어 강도(江都)로 보내어 수보(修補)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김징(金澄)의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라고 한 명령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기를,
"김징은 일찍이 탐오(貪汚)한 죄로 폐기(廢棄)된 사람으로 판정되었는데, 지난번 사유(赦宥)하던 날에 직첩을 환급하는 명을 함께 입었으니, 삼가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당일(當日)의 사상(事狀)을 다 아시지 못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 김징은 일찍이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있을 때에 수연(壽宴)을 칭탁하고 각 고을에서 함부로 거두어 들였는데, 한 고을에 분정(分定)된 고기가 많은 데는 8백 미(尾)에 이르렀고, 다른 물건도 낭자(狼藉)하였으며, 통영(統營)에 요구하여 나환(羅紈)과 면포(綿布)를 실은 짐바리가 연속되었던 사실이 경외(京外)에 자자하게 전파되어 이목(耳目)을 가리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일이 적발되어 취리(就理)하여서는 도리어 일금(一金)도 쓰지 아니했다는 말로 심리에 대답했으나, 마침내는 사장(査狀)과 크게 어긋나서 탐람(貪婪)한 것 외에 다시 기망(欺罔)의 죄를 첨가했습니다. 당시의 편배(編配)가 이미 극히 잘못된 형벌이었는데 얼마되지 아니하여 용서를 받은 것만도 실로 관대한 은전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어찌 직첩을 환급하여, 평인(平人)으로 대우하신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김징이 일찍이 호남(湖南)의 방백(方伯)003) 으로 있을 때에 그 어머니의 생일을 칭탁하고 남용(濫用)한 물건들이 극히 불법적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문(拿問)하여 증거를 대기에 이르러서는 본래에 이러한 일이 없는 것같이 하여 천청(天聽)을 기만하였으니, 당초에 편배된 것도 실상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번 대사(大赦)가 있었고, 세월도 이미 오래 되어 그 죄를 징벌하기에 충분하여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뜻을 보인 것이니,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3월 7일 기축
하교(下敎)하기를,
"인재(人才)가 결핍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 만일 재능과 학문이 현저(顯著)한 자가 있거든 각별히 천거하여 내가 어진이를 구(求)하는 뜻을 몸받게 하라."
하였다.
3월 11일 계사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이후평(李后平)의 소(疏)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하기를,
"이후평의 소의 주된 뜻은 오로지 조사기(趙嗣基)와 이수경(李壽慶)을 신구(伸救)하기 위하여 나온 것입니다. 이 일의 전말(顚末)은 이미 성명(聖明)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입니다. 조사기에 대한 지난날의 일은 그 근거가 없음이 막심(莫甚)하므로, 한때의 착오로 논할 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臣)이 전석(前席)에서 통렬히 배척한 것입니다. 이수경(李壽慶)은 모자(母子) 사이에 불화(不和)하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지라, 신이 오히려 말을 캐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조사기의 소가 있은 뒤에도 안연(晏然)하게 행공(行公)하면서 청죄(請罪)하였던 것인데, 이번에 이후평이 양쪽을 찔러 기이하게 맞추고 사혐(私嫌)으로 어진이를 방해한다는 등의 말로써 신의 죄를 벌여 놓았는데, 신이 조목(條目)을 좇아 변명하려 해도 또한 피로(疲勞)할 것이요, 나라의 체통에 있어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권대운(權大運)도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면서 조사기 등을 통렬히 배척하니, 이에 대하여 임금이 아울러 우악한 내용으로 비답(批答)을 내렸다.
6월 1일 임자
헌부(憲府)에서 아뢰기를,
"해남 현감(海南縣監) 이항(李炕)이 쌀 10석(石)을 세선(稅船)에 첨가해 실은 것이 지금 이미 드러나서 잡았으니, 청컨대 율(律)에 의거하여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5일 병진
이보다 앞서 왜인(倭人)의 글을 위조(僞造)하여 전파시킨 일이 있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정금(鄭錦)이 이미 병선(兵船)을 정비하고 우리 나라와 함께 중원(中原)을 건지고자 하니, 저들의 뜻은 귀국(貴國)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고자 한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얻어 보고 그 거짓인 것을 의심하여 그것이 나온 데를 물었더니, 덕산(德山) 사람 조송(趙松)과 조송의 아비 조창한(趙昌漢), 그리고 경중(京中)의 사인(士人) 어수원(魚壽遠)에게로 돌아갔다. 비국(備局)에서 체포하여 다스리기를 계청(啓請)하여 형신(刑訊)하였으나 불복(不服)하므로, 임금이 친국(親鞫)하여 다스리고자 하였다. 영상(領相) 허적이 그 만연(蔓延)될 것을 염려하여 참작하여 처치할 것을 청하고 대간(臺諫)도 중지하기를 논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더니, 이에 이르러 대비(大妃)의 병환이 위중하므로 인해 옥문(獄門)을 활짝 열어 전부 석방되어 나왔다.
7월 8일 무자
임금이 허적(許積)을 인견(引見)하고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김육(金堉)이 묘정(廟庭)의 배향(配享)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이 무엇인가 물으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병자년004) 에 적(敵)의 선봉이 이미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렀는데, 대가(大駕)가 미처 강도(江都)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문루(南門樓)에 주필(駐蹕)005) 하고 있었습니다. 성상(聖上)께서 군신(群臣)을 불러 일을 꾀했으나, 군신은 모두 경황(驚遑)하여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했는데, 최명길이 홀로 적진(賊陣)으로 나아가서, 강화(講和)하기를 청하고 곧 단기(單騎)로 가서 용(龍)006) ·마(馬)007) 두 추장[酋]을 보고 화친을 의논했습니다. 이 때에 여러 추장들은 이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할 즈음에 대가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사생(死生)을 결단하고 국가의 위급함에 순절(殉節)할 자가 아니고서는 능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만약 최명길이 없었더라면 뒷날 비록 복수(復讎)를 하고 설치(雪恥)를 하고자 하더라도 종사(宗社)는 이미 혈식(血食)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공(功)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른바 청의(淸議)의 반대에 부딪쳐서 심지어 진회(秦檜)008) 에게 비유하기도 하여 마침내 배향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국가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김육의 일도 장하다고 말하였다. 【위에 보인다.】 임금이 추배(追配)코자 하여 실록(實錄)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다.
7월 12일 임진
이보다 앞서 윤휴(尹鑴)의 소(疏)로 인하여 특별히 허적(許積)에게 유지를 내리면서 윤휴를 배척한 말이 자못 엄중하였다. 이에 승지(承旨) 정박(鄭樸)이 소(疏)를 올려 논(論)하매 즉시 고쳐서 내릴 것을 명하였는데, 승지 권대재(權大載)가 은밀히 품하여 도로 정침되었다. 태학생(太學生) 김문하(金文夏) 등이 소를 올려 윤휴를 신구(伸救)하고 아울러 권대재를 배척하였다. 이 뒤에 학유(學儒) 조하주(曹夏疇) 등이 또 소를 올려 윤휴를 소환(召還)하기를 청하니, 이때에 윤휴를 도운 자를 탁남(濁南)이라 하고, 윤휴를 배척하고 허목(許穆)을 높인 자를 청남(淸南)이라 일렀다고 한다.
9월 11일 경인
고(故)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를 배향(配享)하는 일로 인하여 모든 대간(臺諫)이 인피(引避)하자, 옥당(玉堂)에서 처치(處置)하여 정태화를 공격한 자는 나오게 하기를 청하고, 정태화를 편든 자는 갈아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지금 처치한 것을 보니 괴당(乖當)009) 함을 면치 못하겠다. 당초 복제를 의논할 때 정태화의 논의가 송시열(宋時烈)과는 크게 달랐는데, 오늘날 대각(臺閣)에서는 송시열과 일체로 논죄(論罪)하니, 내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더구나 김해일(金海一)의 소(疏) 가운데에 이른바 ‘대신의 자리에 있은지 20여 년인 데도 한 가지 일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은 더욱 해악(駭愕)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조위명(趙威明)의 피사(避辭)의 논의(論議)는 진실로 체통을 얻었다. 조위명·김휘(金徽)·유명현(柳命賢)은 출사(出仕)시키고, 권해(權瑎)·이봉징(李鳳徵)·김해일 등은 모두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뒤로 양사(兩司)에서 오래도록 논쟁하여 드디어 배향을 중지하였으나, 뒤에 가서 마침내는 추향(追享)하였다. 대개 정태화가 정권을 잡은지 수십여 년 동안 적임자를 얻어 위임(委任)하였으므로 나라 안이 편안하였으며, 현종(顯宗)의 의임(倚任)이 더욱 두터웠으니, 바야흐로 거상(居喪) 중에 있을 때는 정승의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렸으며, 일이 있으면 승지(承旨)를 보내어 상려(喪廬)에 나아가서 묻게 하였으니, 그 제우(際遇)의 융숭함은 천재(千載)에 견주기가 드물었다. 그러니 태실(太室)에 배식(配食)함에 있어 이 사람을 두고 그 누가 있겠는가? 당인(黨人)들이 송시열을 깊이 미워하여 아울러 정태화도 배척한 것이다. 송시열이 예(禮)를 논할 때에 두 가지 참최(斬衰)로 하지 않는 것과 사종(四種)의 설(說)이 쓰이지는 못했지만, 당시 예를 아는 자는 모두 다 복종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을 가지고 송시열을 얽어 폄박(貶薄)·괴란(壞亂)하였다는 것으로 무패(誣悖)하는 것은 심한 것이다. 더구나 정태화가 국제(國制)를 쓴 것이 어찌 피차(彼此)의 논쟁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도리어 교묘하게 지무(詆誣)를 더하는 것인가? 아! 또한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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