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임신
승지(承旨) 임규(任奎)의 사직 상소[辭疏]의 죄상(罪狀)을 가지고 헌부(憲府)에서 심집(沈楫)을 먼저 파직(罷職)한 후에 추국(推鞫)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위에 상세하게 보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규(任奎)는 평생(平生) 행기(行己)002) 에서 볼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으니, 겉으로는 소탈한 듯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음흉하여 동기(同氣)를 행인[路人] 보듯이 하였다. 그 고향 한 아우가 살았는데, 때때로 와 보면 문득 속히 돌아가게 하며 잠시도 그 집에 머물게 하는 적이 없었다. 그 가행(家行)으로 말한다면, 실로 사판(仕版)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 못한데, 반룡 부익(攀龍附翼)003) 을 인연하여 청반(淸班)에 통할 수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직임을 제수받은 초기에 이미 인기(人器)가 적당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특별히 말하는 자가 없어서 마침내 부임(赴任)하게 되었다. 부임한 후에는 창첩(倡妾)에게 미혹되어 온 도에서 비웃음을 샀으며, 정령(政令)을 시행할 때 놀랄 만한 거조(擧措)가 많아서 호남(湖南)에 온 인사(人士)들이 자자하게 말을 전하니, 지금 와서 탄핵(彈劾)받은 것도 늦은 것이다. 그런데 임규는 스스로 대간(臺諫)의 논핵(論劾)이 오로지 심집이 비방한 데에 말미암았다고 의심하였으니, 이는 대개 심집이 영하(營下)에 있으면서 그 다스리지 못한 다는 것을 듣고는 직접 일깨워 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이를 마음 속에 품고 의심하여 멀리 하다가 사직(辭職)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두루 심집의 불법(不法)한 일을 거론(擧論)하여 마음속으로 반드시 보복할 계책을 생각하였으니, 그 뜻은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마침내 실상이 없는 데로 돌아가서 그 마음의 자취가 드러나니, 많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4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02] 행기(行己) : 처신(處身).[註 003] 반룡 부익(攀龍附翼) : 용의 비늘을 끌어잡고 봉황의 날개를 붙든다는 뜻으로, 세력에 있는 사람에 의뢰함을 뜻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규(任奎)는 평생(平生) 행기(行己)002) 에서 볼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으니, 겉으로는 소탈한 듯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음흉하여 동기(同氣)를 행인[路人] 보듯이 하였다. 그 고향 한 아우가 살았는데, 때때로 와 보면 문득 속히 돌아가게 하며 잠시도 그 집에 머물게 하는 적이 없었다. 그 가행(家行)으로 말한다면, 실로 사판(仕版)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 못한데, 반룡 부익(攀龍附翼)003) 을 인연하여 청반(淸班)에 통할 수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직임을 제수받은 초기에 이미 인기(人器)가 적당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특별히 말하는 자가 없어서 마침내 부임(赴任)하게 되었다. 부임한 후에는 창첩(倡妾)에게 미혹되어 온 도에서 비웃음을 샀으며, 정령(政令)을 시행할 때 놀랄 만한 거조(擧措)가 많아서 호남(湖南)에 온 인사(人士)들이 자자하게 말을 전하니, 지금 와서 탄핵(彈劾)받은 것도 늦은 것이다. 그런데 임규는 스스로 대간(臺諫)의 논핵(論劾)이 오로지 심집이 비방한 데에 말미암았다고 의심하였으니, 이는 대개 심집이 영하(營下)에 있으면서 그 다스리지 못한 다는 것을 듣고는 직접 일깨워 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이를 마음 속에 품고 의심하여 멀리 하다가 사직(辭職)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두루 심집의 불법(不法)한 일을 거론(擧論)하여 마음속으로 반드시 보복할 계책을 생각하였으니, 그 뜻은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마침내 실상이 없는 데로 돌아가서 그 마음의 자취가 드러나니, 많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4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02] 행기(行己) : 처신(處身).[註 003] 반룡 부익(攀龍附翼) : 용의 비늘을 끌어잡고 봉황의 날개를 붙든다는 뜻으로, 세력에 있는 사람에 의뢰함을 뜻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임규(任奎)는 평생(平生) 행기(行己)002) 에서 볼 만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으니, 겉으로는 소탈한 듯하면서 속으로는 실로 음흉하여 동기(同氣)를 행인[路人] 보듯이 하였다. 그 고향 한 아우가 살았는데, 때때로 와 보면 문득 속히 돌아가게 하며 잠시도 그 집에 머물게 하는 적이 없었다. 그 가행(家行)으로 말한다면, 실로 사판(仕版)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 못한데, 반룡 부익(攀龍附翼)003) 을 인연하여 청반(淸班)에 통할 수 있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직임을 제수받은 초기에 이미 인기(人器)가 적당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특별히 말하는 자가 없어서 마침내 부임(赴任)하게 되었다. 부임한 후에는 창첩(倡妾)에게 미혹되어 온 도에서 비웃음을 샀으며, 정령(政令)을 시행할 때 놀랄 만한 거조(擧措)가 많아서 호남(湖南)에 온 인사(人士)들이 자자하게 말을 전하니, 지금 와서 탄핵(彈劾)받은 것도 늦은 것이다. 그런데 임규는 스스로 대간(臺諫)의 논핵(論劾)이 오로지 심집이 비방한 데에 말미암았다고 의심하였으니, 이는 대개 심집이 영하(營下)에 있으면서 그 다스리지 못한 다는 것을 듣고는 직접 일깨워 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이를 마음 속에 품고 의심하여 멀리 하다가 사직(辭職)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두루 심집의 불법(不法)한 일을 거론(擧論)하여 마음속으로 반드시 보복할 계책을 생각하였으니, 그 뜻은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마침내 실상이 없는 데로 돌아가서 그 마음의 자취가 드러나니, 많는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3월 26일 을묘
헌부(憲府)에서 이조 참의(吏曹參議) 박태상(朴泰尙)을 체차(遞差)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계사(啓辭)는 위에 보인다.】 지평(持平) 김진귀(金鎭龜)가 논한 것이었다. 박태상(朴泰尙)의 경신년004) 주대(奏對)는 진실로 정직(正直)하고 긴절(緊切)함이 부족하였으나, 이단하(李端夏)의 갑인년005) 의 처사(處事)와 비교하여 보던대, 잘못한 바에 스스로 경중(輕重)이 있다. 이단하에 있어서는 당로자(當路者)와 친하다고 해서 문식(抆拭)하여 높은 벼슬에 임용(任用)되고, 혜문(惠文)의 탄핵(彈劾)은 오로지 박태상에게만 미쳤다. 조정(朝廷)의 의논이 어긋나는 바가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인심(人心)을 복종시키겠는가? 마땅히 공의(公議)가 불울(拂鬱)하여 끝내 사림[士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은 마땅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여러 박씨(朴氏)가 바야흐로 힘써 격양(激揚)하여 훈척(勳戚)을 조절(操切)하는 데만 힘쓰기 때문에, 김진귀가 앞장서서 이러한 계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박태상의 지난날의 주대(奏對)가 비록 개절(剴切)함이 부족하다 하나, ‘이미 김수항(金壽恒)이 죄없이 귀양간 것을 알고도 스스로 근시(近侍)의 신하로 있으면서 일찍이 앙달(仰達)하지 못했다.’는 등의 말을 자핵(自劾)하는 말로 삼았으니 머뭇거리고 뒤돌아보는 태도로 단정(斷定)할 수는 없다. 또 이원정(李元禎)이 갑자기 삭출(削黜)된 것은 죄악(罪惡)이 미처 드러나기 전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 사기(事機)를 함께 안 바가 아니므로, 후사(喉司)006) 에서 복역(覆逆)할 때 박태상이 전례를 좇아 함께 참여한 것은 또한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데 아무 말이 없었던 것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이로써 논핵(論劾)하는 것은 또한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겠는가? 김진귀(金鎭龜)가 시기를 틈타 독계(獨啓)한 것도 또한 반드시 공의(公議)가 있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때 혹 김씨(金氏)와 박씨(朴氏) 양가(兩家)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렇게 배척[觝排]하여 경알(傾軋)하는 계책이 있었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40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04]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005]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註 006] 후사(喉司) : 승정원(承政院).
지평(持平) 김진귀(金鎭龜)가 논한 것이었다. 박태상(朴泰尙)의 경신년004) 주대(奏對)는 진실로 정직(正直)하고 긴절(緊切)함이 부족하였으나, 이단하(李端夏)의 갑인년005) 의 처사(處事)와 비교하여 보던대, 잘못한 바에 스스로 경중(輕重)이 있다. 이단하에 있어서는 당로자(當路者)와 친하다고 해서 문식(抆拭)하여 높은 벼슬에 임용(任用)되고, 혜문(惠文)의 탄핵(彈劾)은 오로지 박태상에게만 미쳤다. 조정(朝廷)의 의논이 어긋나는 바가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인심(人心)을 복종시키겠는가? 마땅히 공의(公議)가 불울(拂鬱)하여 끝내 사림[士流]이 둘로 나뉘어진 것은 마땅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여러 박씨(朴氏)가 바야흐로 힘써 격양(激揚)하여 훈척(勳戚)을 조절(操切)하는 데만 힘쓰기 때문에, 김진귀가 앞장서서 이러한 계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박태상의 지난날의 주대(奏對)가 비록 개절(剴切)함이 부족하다 하나, ‘이미 김수항(金壽恒)이 죄없이 귀양간 것을 알고도 스스로 근시(近侍)의 신하로 있으면서 일찍이 앙달(仰達)하지 못했다.’는 등의 말을 자핵(自劾)하는 말로 삼았으니 머뭇거리고 뒤돌아보는 태도로 단정(斷定)할 수는 없다. 또 이원정(李元禎)이 갑자기 삭출(削黜)된 것은 죄악(罪惡)이 미처 드러나기 전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 사기(事機)를 함께 안 바가 아니므로, 후사(喉司)006) 에서 복역(覆逆)할 때 박태상이 전례를 좇아 함께 참여한 것은 또한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데 아무 말이 없었던 것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이로써 논핵(論劾)하는 것은 또한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겠는가? 김진귀(金鎭龜)가 시기를 틈타 독계(獨啓)한 것도 또한 반드시 공의(公議)가 있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때 혹 김씨(金氏)와 박씨(朴氏) 양가(兩家)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렇게 배척[觝排]하여 경알(傾軋)하는 계책이 있었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40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04]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005]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註 006] 후사(喉司) : 승정원(承政院).
사신(史臣)은 말한다. "박태상의 지난날의 주대(奏對)가 비록 개절(剴切)함이 부족하다 하나, ‘이미 김수항(金壽恒)이 죄없이 귀양간 것을 알고도 스스로 근시(近侍)의 신하로 있으면서 일찍이 앙달(仰達)하지 못했다.’는 등의 말을 자핵(自劾)하는 말로 삼았으니 머뭇거리고 뒤돌아보는 태도로 단정(斷定)할 수는 없다. 또 이원정(李元禎)이 갑자기 삭출(削黜)된 것은 죄악(罪惡)이 미처 드러나기 전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 사기(事機)를 함께 안 바가 아니므로, 후사(喉司)006) 에서 복역(覆逆)할 때 박태상이 전례를 좇아 함께 참여한 것은 또한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데 아무 말이 없었던 것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이로써 논핵(論劾)하는 것은 또한 너무 지나치지 아니하겠는가? 김진귀(金鎭龜)가 시기를 틈타 독계(獨啓)한 것도 또한 반드시 공의(公議)가 있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한때 혹 김씨(金氏)와 박씨(朴氏) 양가(兩家)가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렇게 배척[觝排]하여 경알(傾軋)하는 계책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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