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을묘
인견(引見)하였을 때 행 대사성(行大司成) 김만중(金萬重)이 상홍양(桑弘羊)을 삶아 죽여야 하늘에 비를 내릴 것이라는 말을 끌어대어 오시수(吳始壽)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상황을 힘써 말하고, 또 지난날의 사람은 비록 죄가 드러난 것이 없는 자라 하더라도 마땅히 아울러 쫓아내고 함께 조정(朝廷)에서 상합(相合)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위에 상세히 보인다.】 무한한 재이(災異)는 억울함을 품고 답답함이 맺혀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데서 기인함이 많은데, 설령 의심스러운 죄가 있는데도 다행히 면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재이(災異)에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 상홍양(桑弘羊)의 죄는 이미 이식(利息)을 독점하고 수렴(收斂)한 원망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해독(害毒)을 끼쳤으니, 이 때문에 한(漢)나라 신하가 상홍양을 삶아 죽여야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일종(一種)의 당류(黨類)를 치려는 무리들이 문득 모두 이 말을 빙자(憑藉)하여 사사로운 분노(憤怒)를 풀려고 하였으나, 스스로 하늘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또한 통탄(痛歎)할 일이다. 죄가 없어도 아울러 쫓아내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다스리지 않아도 새로워진다는 교훈과는 더욱 다름이 있으니, 사람의 어질지 못함이 용(俑)을 만든 사람은 후손(後孫)이 없다는 것013) 보다 아마도 심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41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13] 용(俑)을 만든 사람은 후손(後孫)이 없다는 것 : 악례(惡例)를 만들어 놓음을 말함. 용(俑)은 사람을 대신하여 무덤에 매장(埋葬)하던 목우(木偶)인데, 공자(孔子)가 장차 사람을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였다고 함.
무한한 재이(災異)는 억울함을 품고 답답함이 맺혀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데서 기인함이 많은데, 설령 의심스러운 죄가 있는데도 다행히 면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재이(災異)에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 상홍양(桑弘羊)의 죄는 이미 이식(利息)을 독점하고 수렴(收斂)한 원망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해독(害毒)을 끼쳤으니, 이 때문에 한(漢)나라 신하가 상홍양을 삶아 죽여야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일종(一種)의 당류(黨類)를 치려는 무리들이 문득 모두 이 말을 빙자(憑藉)하여 사사로운 분노(憤怒)를 풀려고 하였으나, 스스로 하늘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돌아감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또한 통탄(痛歎)할 일이다. 죄가 없어도 아울러 쫓아내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다스리지 않아도 새로워진다는 교훈과는 더욱 다름이 있으니, 사람의 어질지 못함이 용(俑)을 만든 사람은 후손(後孫)이 없다는 것013) 보다 아마도 심할 것이다.
인견(引見)할 때 겸 이조 판서(兼吏曹判書) 김석주(金錫胄)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당상(堂上)의 의망(擬望)은 구간(苟簡)014) 함을 면하지 못하니, 지금 시종(侍從)의 신하 가운데 전(前) 사간(司諫) 송규렴(宋奎濂)은 벼슬길에 나온 지 30년인데, 비록 노모(老母)가 있기 때문에 먼 지방에서 벼슬살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찌 끝내 종사(從仕)하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윤진(尹搢)도 또한 종사한 지 오래되었는데, 비록 놀라서 가슴이 뛰는 병이 있다 하더라도 본래 대단한 것이 아니며, 또 그 사람됨이 정묘(精妙)하고 긴절(緊切)하며, 여러 해 동안 전야(田野)에서 독서(讀書)하여 놀라운 진보를 보였습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세 조정(朝廷)에서 시종(侍從)하였고, 한 사람은 두 조정에서 시종하였으니, 모두 당상(堂上)으로 승진시킨다면,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특이(特異)할지 모르겠으나, 구차(久次)015) 로 논한다면 또한 반드시 실정에 맞을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사람을 임용(任用)하는 도리는 마땅히 재주와 명망(名望)을 취해야 하며, 오로지 구차로 말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성상께서 겨우 분경(奔競)을 금지하는 뜻으로써 하교(下敎)하셨는데, 이 두 사람은 사환(士宦)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진취(進取)하는데 담박하니, 만약에 염정(恬靜)하다는 것으로 박세당(朴世堂)을 기용하듯이 한다면, 염치(廉耻)를 권장하는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훗날의 정사(政事)에서 당상(堂上)에 의망(擬望)함이 가하다."
하였다
교리(校理) 임영(林泳)·심수량(沈壽亮), 부교리(副校理) 오도일(吳道一), 수찬(修撰) 심유(沈濡), 부수찬(副修撰) 송광연(宋光淵)이 응지(應旨)하여 7조목(條目)의 차자(箚子)를 올리고, 말미(末尾)에 말하기를,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와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병권[兵柄]을 도맡고 전형(銓衡)을 관장(管掌)하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다르다고 책망하였다. 【원소(原疏)에 대한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이때 두 척신(戚臣)의 기세가 어떠하였는가 하면, 폐부(肺腑)의 친속(親屬)으로서 세상에 드문 공(功)을 세우자, 주상(主上)께서 앙성(仰成)016) 하는 바 되고 온 세상이 붙좇는 바 되어, 산과 바다를 이전(移轉)할 만하고, 음양(陰陽)을 순식간에 변개(變改)시킬 만하였다. 그런데 저 두세 청류(淸流)가 하늘을 태울 만한 불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비린(批麟)017) 의 주벌(誅罰)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바른 말을 하여 그 기세를 꺾고 마침내 청의(淸議)를 창도(倡道)하였다. 풍채(風采)가 늠름하여 동쪽 산기슭의 봉(鳳)018) 과 전상(殿上)의 범019) 에 진실로 부끄럽지 아니하였으니, 기쁘고도 위대하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삼가서 공박하는 말을 소홀히 하고 위에서는 곡돌(曲突)020) 의 경계에 어두웠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41면
【분류】역사-편사(編史)
[註 016] 앙성(仰成) : 고개를 들고 성공하기를 바람.[註 017] 비린(批麟) : 용의 비늘을 거스르듯 임금의 노여움을 삼.[註 018] 동쪽 산기슭의 봉(鳳) :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서 따온 말. 봉황이 깃드는 오동나무가 자라난 동쪽에서 운다는 것은 신하가 그 힘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고 함.[註 019] 전상(殿上)의 범 : 송(宋)나라 유안세(劉安世)가 조정에 공도(公道)를 위하여 극력 간쟁(諫爭)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전상의 범이라 불렀다고 함.[註 020] 곡돌(曲突) :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으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미리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하는 데서 나온 말.
이때 두 척신(戚臣)의 기세가 어떠하였는가 하면, 폐부(肺腑)의 친속(親屬)으로서 세상에 드문 공(功)을 세우자, 주상(主上)께서 앙성(仰成)016) 하는 바 되고 온 세상이 붙좇는 바 되어, 산과 바다를 이전(移轉)할 만하고, 음양(陰陽)을 순식간에 변개(變改)시킬 만하였다. 그런데 저 두세 청류(淸流)가 하늘을 태울 만한 불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비린(批麟)017) 의 주벌(誅罰)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바른 말을 하여 그 기세를 꺾고 마침내 청의(淸議)를 창도(倡道)하였다. 풍채(風采)가 늠름하여 동쪽 산기슭의 봉(鳳)018) 과 전상(殿上)의 범019) 에 진실로 부끄럽지 아니하였으니, 기쁘고도 위대하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삼가서 공박하는 말을 소홀히 하고 위에서는 곡돌(曲突)020) 의 경계에 어두웠으니, 애석하다.
5월 19일 신미
박신규(朴信圭)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신후재(申厚載)를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삼았다. 박신규는 추솔(麤率)021) 하고 목강(木强)022) 하나, 청렴하고 엄격하게 법을 지키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것으로써 요구[干求]하지 못하였다. 또 그 당우(黨友)가 참혹하게 논박하는 데 따르지 아니하며 이 때문에 칭찬받아 임용(任用)되었다. 신후재는 허적(許積)의 생질(甥姪)인데, 허적이 권세를 부릴 때 허적과 부합(附合)하지 않고, 허견(許堅)의 무상(無狀)함을 통탄(痛歎)하였다. 허견이 일찍이 병을 핑계대고 집에 있으면서 남여(籃輿)023) 를 타니, 신후재가 허적에게 묻기를, ‘허견이 형벌(刑罰)을 받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남여를〉 타고 다닙니까?’ 하자, 허적이 묵묵히 있었다. 허적이 패몰(敗沒)하니, 허적의 친당(親黨)이 모두 죄를 받았으나, 신후재만 혼자 연루(連累)됨을 면하고, 잇달아 주(州)·(府)에 제배(除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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