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4권, 숙종 9년 1683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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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을사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정고(呈告)001)  를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오도일(吳道一)이 대신 지은 불윤 비답(不允批答)이 칭찬하는 내용의 말이 전혀 없으므로 임금이 노(怒)하여 오도일의 관직을 파면하려 하자, 승지(承旨) 이언강(李彦綱) 등이 간(諫)하여 정지하였다. 이때 김수항이 파방(罷榜)하는 의논을 배척하고 김익훈(金益勳)을 천거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삼았고, 김중하(金重夏)·전익대(全翊戴)의 죄를 조사하여 처분하면서 매우 가볍게 하니, 공론이 더욱 격렬하였다.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이 김수항의 의논과 맞지 않음이 많았고, 또 김익훈의 잘못을 매우 힘써 배척하자, 사람들이 대간(臺諫)의 의논을 민정중이 주도(主導)한다고 하니, 이 말이 잘못 옮겨져 의심하고 멀어졌다. 김수항이 이때문에 사직(辭職)하였다.

 

1월 7일 기유

지부사(知府事) 이상진(李尙眞)이 치사(致仕)002)  를 빌자,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9일 신유

각 군사 아문(軍事衙門)과 이서(吏胥)들의 면신(免新)하는 규례를 혁파하라고 명하였는데, 【면신(免新)은 새로 벼슬에 차임(差任)된 자가 선진(先進)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거나 물품을 바치는 일이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남구만(南九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대체로 면신(免新)은 구례의 잘못 인습된 것인데, 혹 이로 인하여 파산(破産)하는 자까지 있다고 남구만이 임금에게 말하여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 액정(掖庭)003)  에도 이런 폐단이 있는데, 법령의 시행은 반드시 안에서 밖으로 파급되는 것이므로, 액정에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다고 말하니, 마침내 모두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1월 22일 갑자

무고(誣告) 죄인 전익대(全翊戴)를 잡아와서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김환(金煥)을 함께 문초하니, 공사(供辭)가 대면하여 힐문한 것과 같은 것이 많았고 다른 것이 적었는데, 고변(告變)을 하던 하루 전날 밤에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이 김환을 시켜 영기(令旗)004)  를 가지고 전익대를 불러서 함께 김환의 숙부인 김원위(金元瑋)의 집에 이르렀고, 상변(上變)하는 글을 내보이며 전익대를 꾀고 협박하여 무고장(誣告狀)에 잇달아 서명하게 한 사실이 유명견(柳命堅)의 정절(情節)005)  에서 비로소 다 폭로되었다. 전익대를 무고죄로 논하고 김환을 도배(徒配)로 논할 때에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은 매우 김환의 처지를 위하였고, 인하여 입대(入對)006)  하여 말하기를,
"김환의 말이 실정을 정탐하려는 데서 나왔고 지도하여 사주(使嗾)한 것이 아니니, 형신(刑訊)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상진(李尙眞)은 모두 말하기를,
"김환이 전익대를 꾀고 협박한 것은 분명하지만, 형신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으며, 판의금(判義禁) 여성제(呂聖齊)와 여러 사람들은 모두 형신을 주장하거나 혹은 면질하라고 말하였는데, 이때 김환은 할말이 궁하여 말을 회피하는 정상이 밝게 드러났다. 대사간(大司諫) 이수언(李秀彦)은 말하기를,
"사정(事情)을 정탐하려고 하였다면 조용히 심문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 어찌 꼭 영기(令旗)를 가지고 불러와서 죽고 사는 말로 협박하여 무고하는 데 이르렀습니까?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은 말하기를,
"전익대를 비록 당연히 죽여야 할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의 말은 신임하지 않고, 유독 김환의 스스로 변명하는 말만 신임하는 것입니까? 이 옥사는 본래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하였다. 민정중이 말하기를,
"김환이 상변했을 때 상하가 놀라며 동요하였고, 호위(扈衛)를 베푸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다만 역적 허새(許璽) 밖에는 끝내 단서가 없으니, 이것으로 물정(物情)이 쾌하게 여기지 않으며 사람들의 말이 몹시 시끄럽고 번잡합니다. 대각(臺閣)에서 거듭 김익훈을 논죄(論罪)하고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하도록 청한 것은 다만 전익대의 일뿐만이 아니라, 김익훈이 전익대의 말을 듣고서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고 갑자기 그대로 아뢰었으니, 참으로 그 책임이 있습니다. 대체로 김익훈이 정탐하여 살피라는 임무를 받고 가만히 김환 등의 불만을 가진 무리로 대사(大事)를 정탐한 후에 역적 허새(許璽)의 흉모(凶謀)를 인해서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고 단련(鍛鍊)하여 자기의 공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김환(金煥)을 시켜 허새를 고변하고, 조금 지나서 다시 스스로 아방(兒房)에 나아가 밀계(密啓)하였으니, 전익대와 같은 무고죄에 귀결됩니다. 그런데도 대신이 그가 척리(戚里)라 하여 계속 덮어주고 보호하였고, 대각의 의논은 끝내 허락하기를 아꼈습니다. 【이 단락은 처음 사초(史草)의 무진일 경연(經筵)의 말과 참고하여 보라.】  삼가 고찰해 보건대, 정탐하여 살피는 일이 계해년007)  반정(反正) 뒤에 시작되었는데, 그 때는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국가의 형세를 처음 일으키는 시기로 더러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었으나, 훈신(勳臣)들이 조아(爪牙)008)  를 풀어놓아 비상(非常)을 살핌은 이미 태평 세대의 광명 정대한 거사는 아니었습니다. 경신 역변(庚申逆變)009)  은 단지 여우와 쥐 같은 소인배들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취하였을 뿐이어서 한번 거사하여 박멸하고는 다른 근심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석주(金錫胄)등이 화를 즐기고 공을 탐하여 크게 확장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으니, 이사명(李師命)·신범화(申範華)·이입신(李立身)·이광한(李光漢) 등은 백도(白徒)의 천류로서 염탐하고 살핀 조그마한 공로로 모두 공신이 되니, 이로부터 공과 상을 바라는 자들의 상변(上變)이 없는 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신이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책으로 통쾌하게 징계하지 않아 간악한 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놓도록 하였습니다. 또 제거하고 남은 무리들의 인심이 불목할까 두려워하여, 김익훈 등 패려(悖戾)하고 악독한 무리들로 하여금 다시 기찰과 염탐을 일삼도록 해서, 무고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다스리면서 또 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론(士論)이 이로부터 격발하여 사람을 논하는 말도 혹 중도를 지나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신은 바야흐로 또 훈척(勳戚)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되고, 성상께서도 대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 어려워 붙들어주거나 억제하는 데 공평함을 잃었습니다. 마침내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을 세우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그 폐단이 지금에 와서는 노론의 당이 된 자는 염탐하고 살피는 일이 부끄러운지를 알지 못하고, 이에 감히 방자하게 김익훈을 제편이라고 합니다. 그 까닭을 궁구해 보면 비록 잘못된 선례는 계해년의 훈신(勳臣)에게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 등이 처음 시작한 죄입니다."
하였다.

 

1월 23일 을축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불러들여 면대하니, 비로소 출사(出仕)하여 입시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에 앞서 민정중(閔鼎重)이 거듭 임금에게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를 경연(經筵)에 불러서 큰 일을 도모하게 하도록 권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이미 이르렀는데, 이는 사류(士類) 때문에 나온 것이지 김수항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김익훈(金益勳)을 그들의 사사로운 의리 때문에 드러나게 배척할 수는 없었으나, 역시 대간(臺諫)의 의논을 그르다고 하지도 않았으므로, 김수항이 매우 궁하고 위축되어 병을 칭탁하고 오래도록 조정에 나오지 아니하니 송시열과 민정중이 임금에게 권유하여 출사하도록 권면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명을 받들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1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에 앞서 민정중(閔鼎重)이 거듭 임금에게 송시열(宋時烈)·박세채(朴世采)를 경연(經筵)에 불러서 큰 일을 도모하게 하도록 권하였으므로 송시열이 이미 이르렀는데, 이는 사류(士類) 때문에 나온 것이지 김수항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김익훈(金益勳)을 그들의 사사로운 의리 때문에 드러나게 배척할 수는 없었으나, 역시 대간(臺諫)의 의논을 그르다고 하지도 않았으므로, 김수항이 매우 궁하고 위축되어 병을 칭탁하고 오래도록 조정에 나오지 아니하니 송시열과 민정중이 임금에게 권유하여 출사하도록 권면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명을 받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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