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6권, 숙종 11년 1685년 11월

싸라리리 2025. 11. 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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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정사

일식(日食)이 있었다.

 

예조(禮曹)에서 국상(國祥) 뒤에 신료(臣僚)들이 진현(進見)하는 복색(服色)이 아직 담제(禫祭) 전인데 길복(吉服)을 따르는 것은 미안하다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대신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정지화(鄭知和)·정재숭(鄭載嵩) 등이 말하기를,
"임금이 연복(練服)을 입은 뒤에는 백관(百官)들은 이미 제복(除服)166)  하였더라도 감히 길복차림으로 진현할 수는 없습니다. 천담복(淺淡服)을 마련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국상 뒤에 임금이 비록 최복(衰服)167)  은 벗지만 아직 순길(純吉)은 아닙니다. 그런즉 여러 신하들이 담제를 지내기 전까지는 천담복을 그대로 입는 것이 정(情)과 예(禮)로 헤아려 보아도 아마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신들의 의견이 나의 뜻에 맞는다. 담제를 지내기 전까지는 천담복을 그대로 입게 하라."
하였다.

 

11월 2일 무오

김만길(金萬吉)을 헌납(獻納)으로 삼고 특별히 이사명(李師命)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임명하였다. 이사명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재지(才智)가 있었다. 호남(湖南)의 구황(救荒)하는 정책을 맡았을 적에 명성과 공적이 가장 나타났었다. 그러나 성품이 위태하고 부정(不靖)하였기에 빈천한 사람으로 정국(政局)이 바뀔 때에 공(功)이 있어서 훈적(勳籍)에 추후로 참여되니 공의(公議)가 그를 헐뜯으므로, 청현직(淸顯職)에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권애(眷愛)가 자못 무거웠기에 이 명이 있게 되었다. 그가 과거에 오른 지 겨우 여섯 해 만에 갑자기 팔좌(八座)168)  에 승진되었으니 나이 겨우 39세이라 전고(前古)에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11월 3일 기미

천둥이 있었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조사석(趙師錫)이 지난해 가을에 영소전(永昭殿)의 오향 대제(五享大祭) 및 삭망(朔望)·속절(俗節)의 제사에 반(半)으로 줄였던 제물(祭物)을 그전대로 회복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특명으로 아직은 그대로 반으로 줄이라 하였다. 조사석이 또 첩가미(帖價米)169)  를 진구(賑救)에 쓰지 말기를 청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이 힘써 방색(防塞)하였기에 임금이 드디어 발락(發落)170)  하지 않았다. 주자(朱子)가 이른바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비용을 아끼는 마음보다 못하다’고 한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니겠는가?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민서(李敏叙)가 말하기를,
"전일에 ‘전랑(銓郞)이 통색(通塞)171)  을 멋대로 한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당하관(堂下官)의 청망(淸望)을 통색하는 것은 이것이 낭관(郞官)의 직책(職責)입니다. 그러니 그 직임(職任)에 두고서도 통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낭관(郞官)은 본조(本曹)의 요속(僚屬)들입니다. 당상관(堂上官)은 스스로 선발하여 의망(擬望)하지만 당하관(堂下官)의 청망(淸望)만은 낭관들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통색하게 하고 당상관과 낭관이 서로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여 낭관에게 전적으로 책임지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낭관은 직책(職責)을 잃지 아니하면서 폐습(弊習)은 저절로 변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정재숭이 아뢰기를,
"이는 폐단이 없을 듯하니, 시행함이 좋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명하였다. 그때에 노비(奴婢)를 내사(內司)에 결급(決給)하는 명을 진고(進告)하는 이가 있었다. 정언(正言) 안세징(安世徵)이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고 다시 생각한 것으로써 주달(奏達)하기를,
"밖의 의논들은 다 이르기를, ‘일이 내사(內司)에 관계되는 것이면 임금께서도 반드시 머뭇거린다’고 말합니다만, 지난날 방진해(方振海)의 일만은 통쾌히 윤종(允從)하셨기에 신이 매양 성덕(聖德)을 칭송(稱頌)하고 있는데, 어찌 유독 이 일만은 이와 같이 윤허함을 아끼십니까? 국가에서 얻는 것은 사소하고 잃은 것은 너무나 큽니다. 통쾌히 따라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정재숭이 아뢰기를,
"대간(臺諫)의 말을 외부 의논들이 모두 옳게 여기고 있으니 마땅히 윤종(允從)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안세징(安世徵)이 또 도하(都下)의 인민(人民)들이 받았던 진휼청(賑恤廳) 환상(還上)의 비모곡(費耗穀)을 견감하여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뒤에 복계(覆啓)로 시행하지 말게 하였다.

 

밤에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 나왔다.

 

11월 4일 경신

엄집(嚴緝)을 집의(執義)로, 성호징(成虎徵)·박태손(朴泰遜)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지금 함경 감사(咸鏡監司)의 장계(狀啓)를 보니 ‘후주진(厚洲鎭)의 군관(軍官)과 토병(土兵)들이 연달아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첨사(僉使) 조지원(趙之瑗)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하니,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지금 갇혀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혹시 뜻밖의 염려(念慮)가 없지 아니하니, 각별히 이를 엄하게 막을 것을 분부한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상(李翔)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며, 또 재해(災害)로 손실(損失)된 농사(農事)의 상황을 아뢰고 원결(元結) 중에서 견감(蠲減)해야 함을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고, 이어서 불러서 위로하는 교지를 내리었다. 비국(備局)에서 재해(災害)를 아주 심하게 입은 곳에는 미곡(米穀)을 거두어 들이는 두수(斗數)를 양감(量減)하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11월 5일 신유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수언(李秀彦)이 장계(狀啓)를 올려 말하기를,
"범월인(犯越人)의 일로 공초에 관련되어 체포(逮捕)된 자가 앞뒤로 서로 이었기에 변방의 백성들이 놀라고 소란하기를 마치 새가 도망가듯 물고기가 놀라듯 합니다. 이들을 개유(開諭)하여 안집(安集)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지금은 맨 먼저 나서서 변고(變故)를 일으킨 사람은 거의 다 체포(逮捕)되었으며, 그 나머지를 압송(押送)하여 온 자들도 또한 적지 아니합니다. 이를 한결같이 수사(搜査)하여 잡아오면 변상(邊上)의 일을 진정(鎭定)할 수 없으니 이는 크게 염려할 일입니다. 그러니 바야흐로 평안도(平安道)에 있는 17인 이외에는 조사하여 체포하는 것을 정지시키고 그들을 개유하여 안집시키는 뜻으로 급속히 서북(西北) 두 도(道)에 분부하소서."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태상(朴泰尙)이 〈청나라에서〉 조사하는 칙사(勅使)가 나온다는 일로써 장계(狀啓)로 아뢰었다.

 

11월 6일 임술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위에 나왔다.

 

11월 7일 계해

우박(雨雹)이 내렸다.

 

11월 8일 갑자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지원(趙之瑗)이 제 죄를 스스로 알고서 앞질러서 죽어버렸으니, 이를 인하여 트집을 잡지 않겠느냐?"
하니,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군기(軍器)를 주어 보낸 것은 곧 전 첨사(僉使)가 한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지원은 새로 본진(本鎭)에 이르러서 다만 인삼(人蔘)의 이익만을 탐하여 국경을 넘어가 채취(採取)하는 것을 허락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지원은 방자(放恣)함이 더욱 심하다."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지금부터는 변장(邊將)들은 특별히 가려서 보내야 하며, 또는 따로 더 신칙(申飭)하소서. 그리고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에 따라 남병사(南兵使)와 북병사(北兵使)는 행영(行營)에 들어가 있게 하면 법금(法禁)을 범하면서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는 자는 감히 방자하게 행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도승지(都承旨)와 형방 승지(刑房承旨)는 마땅히 조사하는 칙사(勅使)를 접견(接見)할 때에 입시(入侍)해야 할 것이므로 사람을 선택(選擇)하여 맡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평상시에 병권(兵權)을 맡은 사람은 비록 승지(承旨)가 될 수 없습니다만 지금은 일이 상규(常規)와 다르니 다른 방법으로 재량(裁量) 처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뜻이 서문중(徐文重)을 두고 한 말이다. 또 말하기를,
"근래(近來)에 종2품(從二品)은 적임자가 모자라기에 제조(諸曹)에 참판(參判)을 의망(擬望)할 적에 또한 매우 구차스럽고 간략합니다. 전일에 이와 같았을 적에 혹은 당상관(堂上官) 가운데서 올려서 의망(擬望)하기도 하고, 혹은 특지(特旨)로 하기도 하고, 혹은 대신들에게 물어 의논하기도 했으니 다만 성감(聖鑑)의 양탁(量度)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말이 옳다."
하였다.

 

다시 남구만(南九萬)을 좌의정(左議政)으로, 김만길(金萬吉)을 수찬(修撰)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징명(李徵明)을 정언(正言)으로, 이국방(李國芳)을 헌납(獻納)으로, 유경(柳炅)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서문중(徐文重)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11월 9일 을축

유성(流星)이 위성(胃星) 위에 나왓다.

 

11월 10일 병인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사명(李師命)이 범월인(犯越人)을 사핵(査覈)하는 일로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그 범인 중의 우두머리의 사람됨을 물으니, 이사명이 아뢰기를,
"그의 사람됨은 매우 용맹스럽고 침착 강인하여 입밖에 나온 말은 다시 바꾸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조사 체포하는 것이 너무 넓어서 변방이 소란스럽기가 마치 병란(兵亂)을 겪는 것과 같다고 하니, 어떻게 하여야 진정(鎭定)시키겠느냐?"
하니, 이사명이 말하기를,
"이 일이 끝난 뒤에는 마땅히 따로 개유(開諭)하여 안집(安集)시키겠습니다. 또 산삼(山蔘)의 채취(採取)를 금지함은 엄하게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이 길이 끊어지고나면 미천한 백성들의 살아갈 도리가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조가(朝家)에서 이를 진념(軫念)하시어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11월 11일 정묘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충원 헌감(忠原縣監) 홍득우(洪得禹)는 몸소 사창(社倉)에 이르러 곡물(穀物)을 가려서 바치게 하니 간사한 백성들이 작간(作奸)을 할 수 없게 되자, 바람을 이용하여 관원(官員)들의 기숙(寄宿)하는 방에 불을 질렀으니, 원근에서 이를 듣고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를 만약 엄하게 조사하여 엄격히 징계(懲戒)하지 않는다면 장리(長吏)를 다투어 죽이는 변고(變故)가 장차 연달아 일어날 것입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그들에게 과죄(科罪)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무진

사간(司諫) 이홍적(李弘迪)이 말하기를,
"이조 참판(吏曹參判) 임상원(任相元)은 글 재주는 조금 있습니다만, 인망(人望)이 본래 가볍습니다. 비록 인재(人才)가 모자라는 때를 당했으므로 갑자기 이 직위(職位)를 임명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조가(朝家)에서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이 구차스럽고 간략하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를 체차(遞差)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영유(永柔) 유생(儒生) 김응원(金應元) 등이 상소하기를,
"선조(宣祖)께서 임진년172)  의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셨을 때에 본현(本縣)에 오래 머물러 계셨기에 위유(慰諭)하시는 명을 여러 번 내리셨습니다. 효종(孝宗)께서 왕자(王子)로 있으면서 북쪽 〈청나라〉로 가셨을 때에도 본현(本縣)에 머무시며 권고(眷顧)함이 특이하였었으니, 승호(陞號)시키는 은혜를 입기를 원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상소를 살펴보고는 감회(感懷)가 일어남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뢴 말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조(吏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세월이 오래 된 뒤에 이러한 희망(希望)이 있으니 이미 합당한 때가 아니며 또 명백(明白)하게 근거(根據)될 만한 사례(事例)도 없으므로 이를 가볍게 허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11월 13일 기사

큰 비가 종일(終日)토록 내려 밤에까지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겨울의 차서(次序)가 이미 반이 지났는데도 날이 따뜻하기가 봄과 같으며, 절후(節候)가 대설(大雪)이 지났는데도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아니합니다. 중신(重臣)을 보내서 기설제(祈雪祭)를 종묘(宗廟)와 사직단(社稷壇) 및 북교(北郊)에서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칙서(勅書)의 끝머리에 이른바 착종보(着終保) 등이 한꺼번에 찰의(察議)하여 보고하겠다고 한 것은 이는 주상의 몸을 가리킨 것이 분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벌금(罰金)을 내게 하려는 뜻이겠느냐?"
하니,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찰의한다는 것은 국왕을 유죄(有罪)로 인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찰의하게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만, 혹시 종보(終保) 등으로 하여금 국왕(國王)과 더불어 같이 상의(商議)하여 감죄(勘罪)하자는 뜻 같기도 합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당시(當時)에 능히 검칙(檢飭)하지 못하여 변고(變故)가 뜻밖에 나오게 되었으니 허물은 실지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같이 감죄하기 어려운 뜻은 별도로 조사(措辭)를 한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벌금(罰金)의 일은 본래 뜻이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 더할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수항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의 일을 비록 헤아려 알 수는 없습니다만, 만일 우호(友好)를 끊을 뜻이 없다면 어찌 다른 생각이야 있겠습니까?"
하였다. 남구만의 말하기를,
"삼수 군수(三水郡守)가 지방관의 신분으로써 사문(査問) 가운데 들어있으니 이것은 마땅히 그가 참여하여 알았다고 써주어야 합니까?"
하니, 김수항 등이 말하기를,
"만약 그가 참여하여 알았다고 말하면 점점 조정에 핍박(逼迫)하게 될 것이니, 이로써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김수항 등이 이어서 지금부터는 변장(邊將)을 정밀하게 가려서 뽑지 않으면 아니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를 해조(該曹)에 분부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의 변고(變故)는 이미 후주(厚州)로부터 생겼고 또 새로 설치한 곳이니 이제부터는 혁파(革罷)함이 좋을 듯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니, 김수항이 말하기를,
"혹 범월(犯越)하는 길이 점점 넓어진다고 말하기도 하니 이로 인하여 혁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남구만이 말하기를,
"이는 신이 의견을 아뢰어 창설(創設)했던 것이니, 지금 만약 허물을 저에게 돌린다면 신은 마땅히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살아갈 계획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신이 본도(本道)에 있을 적에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회복하기를 청하였던 것이니, 대개 사군(四郡)이 이미 회복되고 후주(厚州)에 진(鎭)을 설치하면 삼수와 갑산으로부터 길주(吉州)에 통하게 되어 그곳의 어염(魚鹽)을 힘입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삼수와 갑산의 사람들은 거의 살아갈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후주는 새로 설치한 것인데 이번의 변고(變故)가 생긴 것이 마침 이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이곳에 허물을 돌리고 있으니 지금 비록 혁파하더라도 어찌 국경을 넘어 산삼(山蔘)을 채취하는 길을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혁파하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변경(邊境)은 파수(把守)하는 것이 가장 중하다. 이제부터는 변장(邊將)을 각별히 가려 보내는 뜻을 해조(該曹)에 말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근래(近來)에는 적임자가 모자라는 것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그리고 종2품(從二品)은 더욱 심한 편이니 마땅히 처분(處分)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그러한 줄은 알고 있으니 어찌 대처(對處)할 방법이 없겠느냐?"
하였다.

 

11월 14일 경오

신익상(申翼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박태손(朴泰遜)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고, 최석정(崔錫鼎)을 특별히 승진시켜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고, 이세백(李世白)을 승진시켜서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삼고, 이언강(李彦綱)을 특별히 임명하여 승지(承旨)로, 김석연(金錫衍)을 호조 참의(戶曹參議)로 삼았다. 두 참판의 특별 승진은 대개 김수항(金壽恒)과 이민서(李敏叙)의 말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언강은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칭예(稱譽)가 조금 있었으므로, 일을 조사할 때에 형방(刑房)의 소임을 맡기기 위하여 특별히 임명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김수항의 말을 쓴것이다. 김석연은 다만 항상 음관(蔭官)에 임용되었는데도 외척(外戚)이라는 이유로 지부(地部)173) 좌이(佐貳)174)  의 임명이 갑자기 중비(中批)에서 나왔으니, 물정(物情)이 이를 매우 놀랍게 여겼다.

 

밤에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11월 15일 신미

임금이 선후(先后)의 대상일(大祥日)이 가까왔기 때문에 소찬(素饌)을 올리기를 명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 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주상의 체후(體候)가 미령(未寧)하니, 지금부터 소찬을 드시면 반드시 손상됨이 많을 것입니다."
하여 힘써 그 일수(日數)를 줄이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이를 매우 어렵다고 여기다가 나중에야 허락하여 23일부터 소찬을 들기로 하였다. 김수흥이 말하기를,
"후주(厚州) 및 폐사군(廢四郡)은 반드시 개창(開創)하여 범월(犯越)하는 폐단이 있게 해서는 안되고, 또 파수(把守)하는 계책이 이에 있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본래 혁파(革罷)하려고 했는데도 좌상(左相)이 어렵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소상히 알고서 처리하려 한다."
하였다.

 

이여(李畬)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11월 16일 임신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을 가려서 최규서(崔奎瑞)·조상우(趙相愚)·민진주(閔鎭周)·이징명(李徵明)·이굉(李宏)·강현(姜鋧)·황흠(黃欽)·이윤수(李允修)·홍수헌(洪受瀗)·윤주석(尹疇錫)·김창집(金昌集)·서문유(徐文 𥙿)·박태만(朴泰萬)·김성적(金盛迪)·송상기(宋相琦) 등 15인을 뽑았다.

 

11월 17일 계유

이돈(李墩)을 부응교(副應敎)로, 민진주(閔鎭周)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신정(申晸)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제민(李濟民)을 정언(正言)으로, 김만길(金萬吉)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최석정(崔錫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수찬(修撰)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조상우(趙相愚)를 부교리(副校理)로, 강현(姜鋧)을 지평(持平)으로, 정재희(鄭載禧)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신규(朴信圭)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사간(司諫) 이홍적(李弘迪)이 상소하기를,
"삼가 정목(政目)의 중비(中批)를 보건대 승진 박탈된 자가 2인이요 제수된 자가 두 사람인데, 그 가운데의 한 사람은 척리(戚里)였고, 그 가운데 두세 신하들은 혹은 재화(才華)로서 높일 만한 이가 있으며 국량으로 일컬을만한 자가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인재가 적은 때를 당하여 순서를 뛰어넘어서 임사(任使)하려고 한다면, 이들을 버리고 어떠한 사람이 있는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묘당(廟堂)의 의견을 듣고 전조(銓曹)에 물은 뒤에 임명하였더라면 위로는 자신의 의견을 썼다는 과실(過失)이 없게 되고 아래로는 편안하기 어려운 혐의(嫌疑)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임금의 처단(處斷)이 너무 예리하여 두세 줄 정사(政事)의 초안(草案)에 중비가 거의 반이니 도로(道路)에서 이를 서로 전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고(前古)에 듣지 못하였던 것으로 지금에 갑자기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석연(金錫衍)에 이르러서는 전하에게는 폐부(肺腑)와 같은 지친(至親)이 아닙니까? 그가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는 신이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만, 지부(地部)의 좌이(佐貳)는 또한 등한(等閑)한 직책(職責)이 아닌데, 인망(人望)을 벗어나서 발탁하시어 현반(顯班)에 두었으니, 전하의 이번 처사(處事)는 공(公)입니까? 사(私)입니까? 일찍이 선조(先朝)175)  에 고(故) 판서(判書) 장선징(張善澂)은 문아(文雅)와 성망(聲望)이 진실로 김석연에 비할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가 아직 석갈(釋褐)176)  하기 전에는 일찍이 그에게 현질(顯秩)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선왕(先王)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그를 중비로 특별히 제수하신 것은 결코 성세(聖世)의 일이 아니니, 한결같이 모두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중비로 발탁 승진시킨 것은 지금에 창시(刱始)된 것이 아니니 전고(前古)에 듣지 못하였다고 한 말은 이미 괴이(怪異)하다. 하물며 그가 현능한지를 잘 살펴서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곧 군주가 사람을 쓰는 큰 권한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모든 크고 작은 관직의 제배(除拜)를 반드시 물어본 뒤에 하게 하고, 심지어 은대(銀臺)177)  의 제배(除拜)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군주로 하여금 장차 손과 발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할 것이니, 그 말류(末流)의 폐단이 어찌 태아(太阿)178)  를 거꾸로 쥐고 칼자루를 남에게 주는 데 이르지 않겠느냐? 내가 이를 매우 한심하게 여긴다. 김석연의 일은 고(故) 판서(判書) 장선징이 석갈하지 않았을 때와는 자연히 같지 않은데 사람들이 말을 만드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범월인(犯越人)은 추후로 잡아온 20여 인에 대하여 따로 중신(重臣)을 보내 칙사(勅使)에게 통고함으로써 우리가 이 사체(事體)를 중하게 여긴다는 뜻을 보이고 겸하여 그들의 대답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관찰하자고 청하였다.

 

대사간(大司諫) 박태손(朴泰遜)이 ‘임상원(任相元)이 문아(文雅)하여 수립(樹立)한 것이 있었는데도 논박(論駁)하여 체차(遞差)하여야 한다는 의논이 뜻밖에 나왔으니 구차하게 따라서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으로 인피(引避)하자, 사간(司諫) 이홍적(李弘迪)이 ‘임상원이 비록 문아하여 수립한 것이 있지마는 소우(疎迂)하여 인망(人望)이 가벼웠는데 지난번에 무엄(無嚴)하다는 교지를 받고도 뻔뻔스럽게 인혐(引嫌)할 줄을 알지 못하기에 체차(遞差)하라고 논박(論駁)한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닌데도 장관의 인피가 이와 같으니 감히 편안하게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인피하니, 옥당(玉堂)에서 박태손(朴泰遜)을 출사(出仕)하게 하고 이홍적(李弘迪)은 체차하게 하였다.

 

11월 18일 갑술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상운(柳尙運)은 비국(備局)의 계사(啓辭)로 장차 칙사(勅使)가 올 곳에 나가게 되었다. 비국에서 그에게 숙배(肅拜)를 제폐하고 새벽을 타서 내보내기를 청하였는데 유상운은 타고갈 교자(轎子)를 꾸민다고 핑계하여 해가 늦도록 출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제멋대로 하는 그의 습관은 진실로 놀랄만한 일이며, 또한 나라의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하여졌음을 볼 수도 있겠다.

 

이때에 임금께서 미령(未寧)하여 조섭(調攝)하는 중이기에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을 칙사(勅使)에게 보내서 친히 교영(郊迎)하지 못하는 까닭을 말하게 하였다.

 

11월 19일 을해

신엽(申曅)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유명일(兪命一)이 아뢰기를,
"사람을 등용(登用)하는 방도(方道)는 반드시 전형(銓衡)에 맡겨야 하는데, 이번 발탁(拔擢)하여 임명하는 거조(擧措)에는 진실로 임금의 뜻이 있는 데를 알겠습니다. 하루의 정사에 중비(中批)가 대부분이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김석연(金錫衍)에 이르러서는 한갓 폐부(肺腑)와 같은 지친(至親)인 이유로써 갑자기 탁지(度支)179)  의 좌이(佐貳)를 제수(除授)하였으므로 이를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최석정(崔錫鼎)과 이세백(李世白)에게 새로 주신 가자(加資)와 김석연에게 특별히 제수하신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도로 거두어 들이는 일에 대하여는 이미 간신(諫臣)의 소비(疏批)에 유시하였으니, 이 의논은 빨리 정지시키고 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20일 병자

남구만(南九萬)이 파주(坡州)에 달려가서 교영(郊迎)하는 일을 허락하지 말라는 일로 여러번 칙사(勅使)에게 청하였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을 보내어 두세 번 힘써 청하니, 칙사가 비로소 편전(便殿)에서 칙서(勅書)를 받도록 허락하였다.

 

11월 21일 정축

임금이 칙사(勅使)를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接見)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관대(冠帶)를 갖추고 당실(堂室)을 통하여 나와 앉았었다. 원접사(遠接使) 윤계(尹堦)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주상께서 만약 이와 같이 하시면 칙사(勅使)들이 반드시 성상의 병이 심하지 않은 것이라 의심하고 교영(郊迎)하지 않았던 일로 노(怒)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안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그들을 만나 보소서."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방안에 들어가서 옆에 침구(寢具)를 두고 〈칙사들을〉 만나 보았다. 그런데 방안이 너무 어두웠기에 호차(胡差)들은 밖에서 갑자기 들어오니 물체(物體)를 분변할 수가 없고, 임금은 이미 방가운데에 있었기에 칙서(勅書)를 다 보았는데, 호차들이 자세히 보려들지 않는 것이라 의심하여 통관(通官)들이 꾸짖고 힐책(詰責)하는 말까지 있었으므로, 마침내 촛불을 가져오게 하고, 도승지(都承旨)가 다시 칙서를 올리었다. 그 사이의 거조(擧措)가 자못 전도되었으니, 우리 나라에서 능히 일에 앞서 대비(對備)하지 못하고 창졸간에 응(應)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비변사(備邊司)의 계사(啓辭)가 있었기에, 따로 승지(承旨)를 관소(館所)에 보내서 임금의 체후(體候)가 편치 못하기 때문에 명일(明日) 조사를 행할 때에 친히 임석(臨席)하기 어려운 뜻으로 유시하게 하였다. 두 칙사(勅使)가 모여서 의논한 뒤에 ‘임금의 체후가 평복(平復)된 뒤에라도 같이 참석하여 조사를 행할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라고 회답(回答)하였다. 이는 대개 그들의 뜻이 조사하는 일에 임금이 직접 참석하지 않는 것을 쾌히 허락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노사(虜使)가 통관(通官)을 시켜서 묻기를,
"죄인의 원적관(原籍官)이 대후(待候)하고 있는가 있지 아니한가? 강변(江邊)의 파수(把守)는 어느 사람이 관섭(管攝)하였는가?"
하니, 대신(大臣)이 답하기를,
"지방관(地方官)인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는 지금 바야흐로 대후하고 있습니다만, 죄인의 원적관은 전부터 일을 조사할 때에 일찍이 거론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대후시키지 않았습니다. 강변의 파수는 즉 변장이 관섭하였고 지방관은 다만 검칙(檢飭)만 하였을 뿐입니다."
하니, 상칙사(上勅使)가 중서(中書) 2인 및 통관들을 데리고 부칙사(副勅使)의 방에 모여서 수역(首譯) 등에게 말하기를,
"파수가 비록 변장의 소관이지마는, 민정(民丁)은 수령(守令)에게 소속되어 있으니 범인(犯人)들의 원적을 수령들이 반드시 알지 못할 이치가 없는데 대후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대신들이 답하기를,
"한 고을의 민정은 그 수가 제법 많은데 백성들의 가고 오는 것을 수령들이 어찌 낱낱이 알겠습니까?"
하니, 부칙사가 말하기를,
"명일(明日) 조사를 행할 때에 이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에 들어갔다.

 

11월 22일 무인

삼공(三公)이 관소(館所)에 나아가서 칙사에게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글에 ‘칙서의 맨 끝말이 너무나 절박하므로 우리들이 스스로 중감죄(重勘罪)180)  당할 것을 청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두 칙사가 중서로 하여금 해설하게 한 뒤에 통관(通官)을 시켜서 회보(回報)하기를,
"올린 글 가운데서 사연(辭緣)은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다."
하면서 그 정문을 도로 내주었다.

 

노사(虜使)가 서쪽 연청(宴廳)에 나와 앉으니, 두 칙사는 북벽에 앉았고 중서(中書)와 통관은 동벽에 앉았으며, 삼공(三公)·의금부(義禁府)·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과 양사(兩司)의 장관(長官)들은 서벽에 앉아서 조사를 행하였다. 이에 한득완(韓得完) 등 6인이 취복(就服)181)  하고 그 나머지 19인은 칙사가 ‘그들 죄상(罪狀)이 한가지니 하나의 공사(供辭)로 합하여 쓰라’ 하니, 모두 25인이었다.

 

밤에 유성(流星)이 북두성(北斗星)의 아래에 나왔고,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11월 23일 기묘

삼공(三公) 이하가 관소(館所)에 나아가서 칙사들과 더불어 다시 조사를 행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죄인의 원적관(原籍官)은 일체(一體)로 공초(供招)를 받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함흥(咸興)·강계(江界)·안주(安州)·희천(熙川) 등 고을과 평안 감사(平安監司)는 공초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로 하여금 빨리 올라오도록 하라."
하기에, 삼공(三公)들이 ‘원적관이 일찍이 공초를 받은 규칙이 없다’고 하여 말을 여러 차례 주고받고 하였으나, 칙사의 말과 얼굴빛이 매우 사나와서 마침내 마음을 돌려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들이 올라올 기일(期日)을 정하니, 대신들이 할 수 없어서 평안 감사(平安監司) 및 원적관을 속히 올라오게 하였는데 강계 부사(江界府使)만은 길이 멀어서 형세가 기한에 닿게 올라올 수 없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안주(安州)에 와서 기다리게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상운(柳尙運)이 호차(胡差)들에게 뇌물을 줄 일로 청대(請對)하였다. 일찍이 전에 일을 조사하였을 때에는 호차 김거군(金巨軍)은 2천 금(金)을 차지하였고, 장효례(張孝禮)는 1천 4백 금을 차지하였는데, 지금은 또 그 수량에 갑절이 된다고 하였다.

 

11월 24일 경진

사헌부(司憲府)에서 중비(中批)를 도로 거두어 들이라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이세백(李世白)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이때 황해 감사(黃海監司)를 체임(遞任)하였으나 아직 교인(交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한편으로는 황해도에 새로 임명된 감사를 재촉하여 보내서 속히 교인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사조(辭朝)를 면제하고 바로 관서(關西)로 부임(赴任)하게 하였다.

 

11월 25일 신사

칙사가 다시 삼공(三公)과 더불어 범월인(犯越人) 25명을 조사하여 인삼(人蔘)을 판매(販賣)한 곳과 판매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다. 또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수언(李秀彦)·남병사(南兵使) 윤시달(尹時達)·삼수 군수(三水郡守) 이관국(李觀國)을 불러들여서 그들로 하여금 영외(楹外)에 나와 엎드리게 하고 문목(問目)을 내 보이면서 이 일에 동모(同謀)하였는지 또는 고의로 놓아주었는지의 여부를 힐문하였고, 대통관(大通官)들로 하여금 한득완(韓得完) 등 6인을 형신(刑訊)하여 다시 동당(同黨)과 채취(採取)한 인삼(人蔘)이 얼마인지를 물었다.

 

장령(掌令) 유명일(兪命一)은 김석연(金錫衍)을 특별히 제수(除授)한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던 것을 모두 정계(停啓)한 데 대해, 물의(物議)가 잘못이라고 하였으므로 인피(引避)하고 물러가 기다리니, 처치(處置)하여 체직하였다.

 

권항(權恒)을 지평(持平)으로, 민진주(閔鎭周)를 교리(校理)로, 윤계(尹堦)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11월 26일 임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편전(便殿)에서 같이 조사한다는 뜻으로 별도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칙사에게 유시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대개 주상의 체후(體候)가 아직도 미령하므로 칙사가 단독으로 감죄(勘罪)할 수가 없어서였고, 칙사들도 또한 주상과 같이 감죄하지 않았다가는 그를 나라에 들어간 뒤에 혹시 소홀히 하였다는 책망을 들을까봐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칙사들을 편전으로 나오라고 바로 청하기는 미안하다. 그러니 조사(措辭)하여 그들에게 전갈을 보내서 그들이 대답하는 것을 보고 대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말하기를,
"김거군(金巨軍)은 말하기를, ‘봉황성(鳳凰城) 근처에 갑군(甲軍) 4만을 내보내 연변(沿邊) 일대를 막아 지키고 이어서 팔고산(八高山)으로 하여금 검찰(檢察)하게 할 따름이다’ 하니, 이 뒤의 일이 진실로 염려됩니다. 또 자문(咨文)을 싸가지고 온 관원의 수본(手本)을 보건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또 말하기를,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갑군(甲軍)을 내보내서 잡인(雜人)을 기찰(譏察)한다’고 하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김거군의 말이 거것말이 아닌 듯합니다. 지난해에 이유(李濡)가 고부사(告訃使)로 들어갔을 적에도 영고탑(寧古塔)의 계본(啓本)을 가지고 힐문(詰問)하였다 합니다. 대개 저들은 항상 우리를 의심하는 사단(事端)이 있었는데 이번의 칙사(勅使)들도 만약 또 기찰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들의 환심(歡心)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 나라에서 계획하는 일이 있더라도 먼저 적인(敵人)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계획하는 일이 없는데도 한갓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번 칙사(勅使)가 다녀간 뒤에는 연변을 막아 지키는 등의 일은 마땅히 특별하게 신칙(申飭)하는 방도(方道)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의 일은 진실로 경계하고 신중(愼重)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감죄할 때에 우리가 먼저 형률(刑律)을 무겁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뜻을 진달(陳達)하였다.

 

지평(持平) 권항(權恒)이 정유악(鄭維岳)의 일로 인피(引避)하였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기성랑(騎省郞)182)  이 되었을 적에 정유악에게 도태(淘汰)당하였으므로 참여하여 아뢰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또 말하기를,
"정유악의 죄명(罪名)은 매우 무거워서 먼 변방에 귀향보내는 형률(刑律)도 또한 말감(末減)이라 할 수는 있지만 그의 집에는 노모(老母)가 있으므로 그 사정(事情)이 매우 딱한데 한결같이 논집(論執)만 하는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를 처치하여 체직하소서."
하였으니, 그는 죄명(罪名)이 무거운 줄을 알고 나서도 억지로 혐의(嫌疑)가 되지 않을 일을 제기하여 다른 의견을 내세워서 스스로 공평(公平)한 처사라고 핑계대기까지 하였으니 진실로 웃을 일이었다.

 

11월 27일 계미

칙사(勅使)가 또 범월인(犯越人)을 붙잡아들여서 다시 동당(同黨)한 자들과 채취(採取)한 인삼(人蔘)이 많고 적은 것을 물어서 형장(刑杖)을 네 차례나 가한 뒤에 중지하였다. 또 함경 감사(咸鏡監司)와 병사(兵使)와 삼수 군수(三水郡守)를 불러서 추문하였다.

 

11월 29일 을유

이돈(李墩)을 집의(執義)로, 정내상(鄭來祥)을 장령(掌令)으로, 민진주(閔鎭周)를 지평(持平)으로, 이윤수(李允修)를 정언(正言)으로, 이징명(李徵明)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이때에 외부 의논들이 흉흉(洶洶)하여 ‘장차 감죄(勘罪)할 때에 곤욕(困辱)이 임금에게 미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거조(擧措)가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삼공(三公) 김수항(金壽恒)과 남구만(南九萬)·정재숭(鄭載嵩)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김수흥(金壽興)·민정중(閔鼎重)이 청대(請對)하였다. 삼공은 곧 조사하는 일 때문에 관소(館所)에 나아가고 김수흥과 민정중이 입시(入侍)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칙서(勅書) 가운데 맨 끝의 머리말에 대하여는 상하(上下)가 진실로 이미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제 역관 무리들로 하여금 탐문(探問)하게 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장차 죄인을 감정(勘定)할 때에 주상에게 묻게 되는 일이 있을 텐데 문자(文字)로 물을 것이다.’ 하면서 말하기를, ‘상국(上國)의 예(例)에 존귀한 사람에게는 문자로 추문(推問)하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민정중이 말하기를,
"대개 침욕(侵辱)의 뜻을 변명하려고 하여 장차 함답(緘答)한 것을 추고(推考)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저들이 처음부터 매우 순하였습니다만 어제 두 칙사(勅使)가 대통관(大通官)의 방에 이르러서 서로 말한 것에서 자못 불평(不平)스러운 기색(氣色)이 있어 말하기를, ‘칙서(勅書)에 이미 국왕(國王)과 함께 조사하라고 되어 있는데 국왕은 한 번도 참여하지 않으니 우리가 들어간 뒤에 황제(皇帝)께서 만약 함께 조사하였는지 여부를 물으면 일이 매우 난처(難處)하게 되어 혹시 다시 오게 되는 폐단이 없지 않을지 모르겠으니, 국왕께서 잠깐이라도 내림하신다면 사세(事勢)가 편당(便當)하겠다’ 하였는데 다만 주상의 체후가 평복되지 못하였으니 억지로 거둥하시기는 어렵겠습니다. 만일 중사(中使)를 보내시어 함께 조사하지 못함을 사과하고 이어서 편전(便殿)에서 같이 감죄(勘罪)하자는 뜻을 보이신다면 저들도 또한 기쁘게 들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에도 이들과 함께 조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을 편전에서 맞아 보려고 한다."
하였다. 김수흥 등이 물러가고 나서 삼공이 관소에서 들어와서 청대하여 임금께 아뢰기를,
"칙사들의 말에 ‘임금께서 한 번은 관소에 오시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고, 통관들도 ‘이와 같이 한다면 일이 매우 편하고 순조로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초하루에 관소에 행차하기로 정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태상(朴泰尙)과 희천 군수(熙川郡守) 이유욱(李惟郁)과 함흥 판관(咸興判官) 이삼징(李三徵)이 들어와서 조사받고 공초하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말하기를,
"김석연(金錫衍)을 특별히 제수(除授)하였던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말하기를,
"이번에 범월(犯越)한 것은 대개 삼화(蔘貨) 때문입니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심지어 국가에까지 사건(事件)이 생기게 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북경(北京)의 사행(使行)이 있을 때에는 원역(員役) 이하와 남상(南商)으로서 삼화를 가지고 가는 자는 일체 수색하여 엄하게 금단(禁斷)하고, 죄과(罪科)를 범한 자는 일죄(一罪)183)  로 처단하소서. 또 연변(沿邊)의 각진(各鎭)에는 현상(懸賞)을 거는 길을 널리 열어서, 고발하는 자에게는 중상(重賞)을 내리고 고발하지 않고 숨겨 두는 자에게는 중률(重律)로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밤에 천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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