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해
임금이 장차 관소(館所)에 행차(幸次)하려 하는데 삼공(三公)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들의 묻는 말이 매우 불손(不遜)합니다. 신 등이 이를 마땅히 옳고 그름을 다투어야 하겠습니다마는, 저들이 만일 황제(皇帝)의 명이라고 핑계댄다면 이는 끝까지 힘써 다투기는 어려울 듯하니, 이것이 난처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사시(巳時)에 임금이 남별궁(南別宮)에 행차하여 재실(齋室)에 들어가니, 삼공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김수흥(金壽興)·민정중(閔鼎重), 도승지(都承旨) 서문중(徐文重),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언강(李彦綱)이 입시(入侍)하였다. 이미 두 칙사(勅使)와 중서(中書)·통관(通官) 등이 들어와 있었고, 임금은 다만 앉은 자리에서 손을 들어 인사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어전(御前)의 통사(通事)를 불러서 임금의 체후가 미령하여 절하러 일어날 수 없다는 것으로 칙사에게 말하게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신정(申晸)·윤계(尹堦),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사명(李師命), 대사헌(大司憲) 정재희(鄭載熙), 대사간(大司諫) 박태손(朴泰遜)이 또한 입시하였다. 임금이 깊이 인구(引咎)하여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죄책이 있는 것은 감히 죄인들을 같이 감죄(勘罪)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칙사가 답하기를,
"황제가 이미 ‘국왕과 더불어 같이 조사하라’ 하셨으니 우리들이 어찌 홀로 감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간사한 백성들이 법금(法禁)을 범한 것을 국왕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설령 관인(官人)이 죄를 범하더라도 국왕께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재삼 인구하니, 노사(虜使)가 말하기를,
"국왕이 만약 죄가 있다면 황제께서 마땅히 함께 감죄하라 하셨을 텐데 지금 그렇지 않았으니 어찌 지나치게 스스로 인구하십니까? 이와 같이 서로 버티고만 있으면 조섭(調攝)에 방해가 될 듯하니 속히 감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인이 병이 있어 같이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조사를 한 뒤에 감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죄인들을 이미 문초(問招)를 받았으니, 어찌 더 조사할 것 있겠습니까? 그 초사(招辭)를 보신 뒤에 잘못된 곳을 지시(指示)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므로, 임금이 마침내 문서들을 올리게 하였다. 김거군(金巨軍)이 말하기를,
"어째서 귀국(貴國)의 문서만을 올리게 합니까? 우리들이 만든 문서도 또한 보아 주소서."
하고, 이어서 중서로 하여금 그들의 문서를 올리었다. 임금이 다 보고서 말하기를,
"여러 대인(大人)들께서 그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여 감죄하여 처단(處斷)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명령을 받은 이래로 황제께서 이미 국왕과 함께 감죄하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혼자서 경중을 결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다시 사양하였으나, 노사가 또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득완(韓得完) 등 6인은 그 죄가 가장 무거우니 어떠한 율(律)로 감죄하겠습니까?"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한득완 등은 이미 국경을 넘어온 죄를 범하였고 청나라 사람들을 상해(傷害)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무겁습니다. 그 나머지 범월(犯越)한 자들도 모두 사죄(死罪)에 해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법에는 무릇 범월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사죄인데 하물며 청나라 사람을 상해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사죄에 해당합니다만, 사죄 이외에 어떠한 율(律)이 있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가율(加律)하고 싶으면 연좌(緣坐)와 적몰(籍沒) 등의 법이 있습니다."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한득완 등 6인에게는 가중(加重)의 율을 쓰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사죄로 논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첨사(僉使) 조지원(趙之瑗)은 이미 자살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수(郡守)는 이것이 지방관이니 어떠한 율을 써야 합니까?"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국왕의 의사(意思)는 어떻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수 군수(三水郡守)는 비록 정상(情狀)을 알고서 한 일이 아닙니다만, 이미 간사한 백성들을 금즙(禁戢)하지 못하여서 이러한 변고(變故)를 발생하게 했으니, 마땅히 사죄로써 처단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이는 다만 깨달아 살피지 못한 죄입니다. 그러니 사율(死律)로 감죄할 수는 없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첨사가 만약 죽지 않았다면 그의 죄가 삼수 군수와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첨사는 자신이 파수를 맡고 있으니, 그의 죄는 지방관보다 더욱 무거운 것입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삼수 군수는 유 삼천리(流三千里)로 감죄하고 첨사는 비록 죽었지만 주문(奏文) 가운데에 ‘일체 감죄함이 마땅하다’ 하였으니, 사죄와 유 삼천리 사이에 율이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리 안치(圍籬安置)가 있습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첨사가 만일 살아 있었다면 마땅히 유 삼천리에 위리 안치 하였을 것이고, 삼수 군수는 파직(罷職)하고 유 이천리(流二千里)해야 옳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와 병사(兵使)의 죄는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사는 도 3년(徒三年), 감사는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서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마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감사와 병사를 어째서 죄를 달리합니까?"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병사는 구관(句管) 방수(防守)하고 감사는 다만 한 도(道)를 총관(摠管)하고 있을 뿐이므로 이것이 다른 까닭입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감사는 파직시키고, 병사는 영구히 서용하지 마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경한 듯합니다."
하였다. 부칙사(副勅使)가 상칙사(上勅使)에게 이르기를,
"감사는 한 도(道)를 구관하고 있으니 어찌 병사(兵使)와 죄를 달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칙사가 말하기를,
"율(律)을 쓰는 데는 스스로 차등이 있는 법인데 어찌 사람의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 부칙사가 말하기를,
"감사가 이미 변방 일을 관장 구관하였고 또 인민(人民)들을 총관하였으니 이는 두가지의 죄를 겸하여 가진 것인데 어찌 병사와 달리 하겠소."
하면서 한참 동안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말하기를,
"감사와 병사는 함께 파직시키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만 시키는 것은 너무 경한 듯합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그들이 먼 곳에 있었기에 형세를 깨달아 살피기가 어려웠을 것이니 그에게 어찌 파직보다 더한 율을 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전(從前)에 조사할 적에 비록 이에는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파직에 그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이제 감사는 혁직(革職)하고 병사는 삭탈 관직하도록 감률(勘律)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두 칙사가 말하기를,
"국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들에게 파직보다 더한 것을 쓸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명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함흥 판관(咸興判官)과 강계 부사(江界府使)와 희천 군수(熙川郡守)도 마땅히 평안 감사와 일률(一律)로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사는 자급(資級)을 강등시키고 수령(守令)들은 파직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본국(本國)에는 이미 백성들을 금지시키어 다른 나라에 가지 못하게 하는 법이 없으니, 평안 감사에게는 중하게 죄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다만 두 자급만 강등시켜 잉임(仍任)하게 하고, 수령들은 네 자급을 강등시켜 도로 서용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사는 이미 체직되어 왔고 새 감사가 내려갔으니, 형세가 잉임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감사의 죄는 마땅히 수령보다는 가벼워야 하는데, 이미 체직했다면 이는 도리어 수령보다 더 무겁게 된 것이니 이는 미안(未安)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수령들은 다시 다섯 자급을 강등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노사가 그제야 이를 허락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칙서의 말 뜻을 가지고 국왕에게 묻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깊이 스스로 인죄(引罪)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전교하기를 ‘소방인(小邦人)이 법금(法禁)을 범하고 몰래 범월해서는 청나라 관인(官人)을 상해하기까지 한 것은 검칙이 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간사한 백성들이 죄를 범한 것은 실로 과인이 검칙을 잘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황공(惶恐)하다는 것 외에는 더 주달(奏達)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노사가 말하기를,
"이를 문자(文字)로 써주어야 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조용히 써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삼공이 큰 기둥 바깥에 나가 앉으며 역관을 시켜 칙사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대신(大臣)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능히 금령(禁令)을 엄하게 신칙하지 못했으므로 변고(變故)가 발생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의 책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중죄(重罪)를 받기를 청합니다."
하니, 노사가 말하기를,
"대신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은 좋습니다만, 대신들에게는 별로 문책(問責)할 것이 없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합니까?"
하였다. 삼공이 다시 말하기를,
"칙사께서는 이미 주상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어간 뒤에 마땅히 이러한 뜻을 황제에게 진달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만일 문자로 대답하느라고 공사(供辭)같이 할 것 같으면 사체(事體)에 미안하기 때문에 감히 이를 청합니다."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혹시 말을 전할 즈음에 어구(語句)가 착오(錯誤)될까 하여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그렇다면 반드시 써 줄 것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다시 통사(通事)를 불러서 주상께서 대답할 말을 묻게 하고는 중서를 시켜 붓을 들어 이를 썼으니, 거기에 이르기를,
"소방(小邦)이 오랫동안 태종 황제(太宗皇帝)와 세종 황제(世宗皇帝)의 은혜를 입었기에 종전(從前)에는 범월하는 일이 있었지마는, 번번이 관대(寬大)한 은전(恩典)을 입었으므로 매양 감격하였습니다. 이제 변경(邊境)의 백성들이 법금을 범하면서 몰래 범월하여 조총(鳥銃)을 쏘아 관인(官人)을 상해하였습니다. 이는 과인이 털끝만큼이라도 만홀(慢忽)한 마음이 감히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금령(禁令)이 엄하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황제의 칙서를 받드니 황송(惶悚)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쓰기를 마치자 통관(通官)이 우리 나라 말로 전언(傳言)하여 차오(差誤)가 없는가를 물었다. 드디어 다례(茶禮)를 행하고는 다시 죄인들을 조사해 찾아낸 방도를 물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여러 방면으로 현상 걸고 찾아서 겨우 붙잡아 왔습니다."
하니, 칙사들이 드디어 물러 나갔다. 삼공이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이번의 조사한 일은 전날보다 매우 평순(平順)하였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노인(虜人)이 주상을 침책(侵責)한 것이 비록 처음에 염려하였던 것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지마는 부끄럽고 치욕스러움은 또한 얕지 않았으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으면 누군들 팔을 걷어붙이면서 분통(憤痛)해 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의 하는 것이 조금 순한 것을 겨우 보고서는, 대소(大小) 관원들이 서로 경하(慶賀)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칙사가 발꿈치도 미처 돌리기 전에 문득 그들에게 당한 부끄러움을 잊고 상하(上下)가 나태해지는가. 일찍이 와신 상담(臥薪嘗膽)할 계획을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없는 곤욕(困辱)을 영구히 받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의 일은 진실로 한심하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0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인사-임면(任免) / 사법-치안(治安) / 외교-야(野)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노인(虜人)이 주상을 침책(侵責)한 것이 비록 처음에 염려하였던 것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지마는 부끄럽고 치욕스러움은 또한 얕지 않았으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실로 사람의 마음이 있으면 누군들 팔을 걷어붙이면서 분통(憤痛)해 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의 하는 것이 조금 순한 것을 겨우 보고서는, 대소(大小) 관원들이 서로 경하(慶賀)하기에 겨를이 없어서 칙사가 발꿈치도 미처 돌리기 전에 문득 그들에게 당한 부끄러움을 잊고 상하(上下)가 나태해지는가. 일찍이 와신 상담(臥薪嘗膽)할 계획을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없는 곤욕(困辱)을 영구히 받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의 일은 진실로 한심하다."
삼도(三道)의 어사(御史)들이 서로 잇달아 복명 서계(復命書啓)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세화(李世華)·남평 현감(南平縣監) 성지선(成至善)·진산 군수(珍山郡守)·조상개(趙相槪)는 모두 선치(善治)로 포장(褒奬)하고, 임실 현감(任實縣監) 이윤문(李允文)은 평평(平平)이고, 광양 현감(光陽縣監) 남윤(南崙)·강진 현감(康津縣監) 이세강(李世剛)·만경 현령(萬頃縣令) 홍찬원(洪贊元)은 모두 탐오(貪汚)하여 잘 다스리지 못한 이유로 어떤 이는 나문(拿問)하고 어떤 이는 파직(罷職)시켰다. 평안도(平安道)의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효원(李孝源)·강동 현감(江東縣監) 조이량(曺爾樑)은 선치로 포장하고, 위원 군수(渭原郡守) 김회(金淮)는 정치에 하자(瑕疵)가 있었고, 곽산 군수(郭山郡守) 이석(李錫)·희천 군수(熙川郡守) 이유욱(李惟郁)·삼화 현령(三和縣令) 김광진(金光瑨)은 모두 탐오하여 잘 다스리지 못한 이유로 어떤 이는 나문하고 어떤 이는 파직시켰다. 함경도(咸鏡道)의 갑산 부사(甲山府使) 박상형(朴相馨)과 북청 판관(北靑判官) 정내상(鄭來祥)은 모두 선치(善治)로 포장하였고, 부령 부사(富寧府使) 박사돈(朴思敦)은 정치의 하자가 있었고, 회령 부사(會寧府使) 장시규(張是奎)와 명천 부사(明川府使) 한공준(韓公俊)은 평평(平平)이고, 감사(監司) 이수언(李秀彦)은 몸가짐이 간솔(簡率)하고 출척(黜陟)이 공평(公平)하므로 열읍(列邑)들이 두려워하고 꺼렸으니 직책(職責)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간혹 술에 취해 떨어져서 어떤 때는 일을 폐하는 지경에 이를 때도 있었다고 하였다.
12월 2일 무자
사간원(司諫院)에서 전일에 아뢴 것을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수역(首譯) 장현(張炫)은 어전(御前)의 통사(通事)로서 시기에 임박하여 밖에 나가서 여러 차례 재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들어왔습니다. 그의 자리를 떠나서 태만(怠慢)한 죄는 엄격히 징계(懲戒)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를 나문하여 정죄(定罪)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문하는 것은 너무 중하니 추고(推考)만 하라."
하였다.
조사하러 왔던 칙사가 돌아갔다.
12월 3일 기축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주상의 체후(體候)가 다 평복(平復)되지 못하였으므로 대상(大祥) 때에 들어와 곡(哭)하고서는 상복(喪服)을 바꾸어 입게 하여 초헌(初獻) 뒤에는 섭행(攝行)하기를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수흥 등이 반복(反復)하여 진청(陳請)하니 임금이 그제야 윤허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말하기를,
"주상께서 비록 작헌(酌獻)은 행하지 않으시더라도 이미 제사지내는 처소에 나아가셨으니 축문(祝文)의 머릿 말에 ‘신하를 보낸다’고 쓸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신하로 하여금’이라고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와 병사(兵使)에 대하여 죄를 의정(議定)한 것이 너무 경합니다. 혹시 칙사(勅使)가 들어간 뒤에 저들의 힐책(詰責)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다시 삭탈 관작하는 것으로 감죄(勘罪)하고서 이 뜻으로써 칙사(勅使)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인년184) 의 조사하는 사신(使臣)이 왔을 적에도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를 모두 혁직(革職)하는 것으로 감죄하였다. 그러니 지금도 삭탈 관직으로 언급(言及)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12월 5일 신묘
명성 왕대비(明聖王大妃)의 대상(大祥)이다. 임금이 친히 영모전(永慕殿)에 나아가서 들어가 곡(哭)하고 사배(四拜)를 드리고서 재전(齋殿)에 나아와서 담복(禫服)인 옥색(玉色) 단령(團領)과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바꾸어 입고서 다시 들어가 곡하고 사배하고서 도로 재전(齋殿)에 나아왔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이하의 관원들이 차례대로 삼헌례(三獻禮)를 행하였다. 제사를 마치고 임금이 환궁(還宮)하였다.
노사(虜使)가 중로(中路)에 이르러서 ‘청(淸)나라에는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는 법규가 없다는 것’으로 조지원(趙之瑗)의 죄를 장(杖) 1백, 유(流) 3천리로 고쳐서 감죄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증(李增)이 치계(馳啓)하기를,
"칙사(勅使)의 행차를 위하여 머물러 기르던 말이 범에게 놀라서 어떤 것은 범에게 물려 죽기도 하고 어떤 것은 놀라서 달아나다가 물에 빠져 죽기도 했으니 암말[雌馬]로써 대신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부윤(府尹)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칙사가 만일 너무 가벼이 여긴다고 성을 낸 뒤에 이로부터 죄를 가(加)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무겁게 논죄하여 저들이 가볍게 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비국에서는 또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여 저들이 답하는 것을 보기를 청하였다.
12월 7일 계사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위에 나왔다.
박태손(朴泰遜)을 승지(承旨)로, 송규렴(宋奎濂)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부제학(副提學) 이여(李畬)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바야흐로 《역경(易經)》을 강론(講論)하십니다. 《역경》의 글 됨됨이는 성인(聖人)께서 은미(隱微)한 사물을 나타내고 심오(深奧)한 이치를 천명(闡明)하여 개물 성무(開物成務)하려는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화목(和穆)하고 청평(淸平)한 가운데서 심오한 것을 다 궁구하고 기미(幾微)를 연구하시어 신묘(神妙)한 조화(造化)를 다 아시게 된 것은, 반드시 상정(常情)으로서는 미칠 바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토론(討論)하고 강마(講磨)하는 것이 오로지 법연(法筵)185) 에만 있게 되므로 그래서 전하께서 깊이 연묵(淵默)186) 만을 숭상하여 조금도 문란(問難)함이 없으시니, 이는 다른 경서(經書)를 강독하는 데에 있어서도 이미 뜻을 겸손히 하여 이익을 구하는 도리에 불만족함이 있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역경》이겠습니까? 이제 《역경》을 강독함에는 상도(常道)를 따라서는 아니됩니다. 마땅히 조정의 신하로서 《역경》에 숙달(熟達)한 자를 뽑으시어, 어떤 이는 경연(經筵)을 겸하게 하고 어떤 이는 강원(講員)으로 있게 하시며, 또 정조(政曹)로 하여금 가볍게 천이(遷移)하지 말게 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오로지하여 온역(縕繹)하게 하며, 초야(草野)에 숨어 있는 선비와 산직(散職)으로서 침륜(沈淪)한 무리에 이르기까지 역학(易學)으로써 일컬어지는 자들을 모두 초치(招致)하시어 상례(常例)를 깨뜨리고 시강(侍講)하게 하여서, 여러 훌륭한 분들이 다 모여서 개강하는 때에 반복하여 논란(論難)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면, 거의 글에 응하여 수(數)를 갖추는 데에 그치지 않으시어 점차 소광(昭曠)한 지역에 나아갈 것입니다. 또 엎드려 생각하니, 역경(易經)은 음양(陰陽)이 서로 응(應)하는 의리에서 반드시 중정(中正)을 취해야 합니다. 이른바 사사롭다고 하는 것은 대저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삼가 이홍적(李弘迪)에게 내린 비답을 보고서 개연(慨然)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대저 중비(中批)로 직위(職位)를 제수(除授)하심은 본래 제왕(帝王)의 미절(美節)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석정(崔錫鼎)의 문학과 이세백(李世白)의 기국(器局)과 이언강(李彦綱)의 은대(銀臺) 경력(經歷)에 특명(特命)을 더하신 것은 여론(輿論)에 잘 부합(符合)되었으니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털끝만큼인들 두서너 신하들에게 사사로움이 어찌 있었겠습니까? 다만 김석연(金錫衍)을 좌이(佐貳)에 제수하신 것만은 실로 여러 사람의 뜻을 벗어난 것이므로 사방(四方)의 사람들이 모두 ‘전하께서 조정의 공기(公器)를 가지고 척완(戚畹)을 위하는 사사로운 은전[私恩]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간신(諫臣)의 말이 비록 분별(分別)이 없었지마는 그러나 그 본 마음은 오로지 임금을 위하는 충성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임금의 교지가 매우 엄하여서 조금도 개납(開納)하지 않으시니 이는 아마 지공(至公)을 밝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전하께서 이에서 과연 사사로이 인색함[私吝]이 있었다면 이는 하늘을 본받아 교화(敎化)를 행하는 도리에는 멀다고 이르겠으니 왕도(王道)가 능히 평평(平平)하지 못한 것을 괴이히 여길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을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이를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 8일 갑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사명(李師命)과 참판(參判) 최일(崔逸)을 특명으로 파직하였다. 이보다 먼저 형조의 이서(吏胥) 신영한(辛英漢)이 액정(掖廷) 별감(別監) 김흥순(金興順)과 대궐 뜰에서 싸웠는데, 승정원에서 이들을 모두 잡아 가두기를 계청(啓請)하였다. 승지(承旨)가 명을 받들고 녹수(錄囚)해 보니, 김흥순은 갇혀 있고 신영한은 석방(釋放)되어 있었다. 승지가 이를 갖추 아뢰니 임금이 노하여 형조의 당상관을 중하게 추고하고 색랑(色郞)을 파직하고 신영한과 뇌물을 받고 일부러 석방하여 준 해리(該吏)를 모두 형을 엄하게 하여 정배(定配)하기를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또 아뢰기를,
"신영한을 석방한 것은 당상관이 한 짓이므로 낭관은 죄가 없습니다. 해리가 뇌물을 받은 형적(刑跡)이 나타나지 않으니 형배(刑配)한 것은 또한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당해(當該) 당상관은 모두 파직시키고 낭관과 해리는 모두 우선 그대로 두기를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과 지의금(知義禁) 오두인(吳斗寅)이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효원(李孝源)을 같이 조사하는 일로 칙사(勅使)를 따라가게 하여 황주(黃州)에 도착하였다. 이효원이 이르러 공초한 것이 이유욱(李惟郁) 등과 같았기에 이효원을 이유욱의 이름 아래에 첨서(添書)하여 넣었다. 그리고 함경 감사(咸鏡監司)와 병사(兵使)에게 죄를 더 주는 일을 같이 감죄하게 했는데 칙사가 말하기를,
"그들의 죄는 이미 의정하였으니 반드시 율(律)을 고칠 것이 아니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0일 병신
박태만(朴泰萬)을 수찬(修撰)으로, 정재희(鄭載禧)를 도승지(都承旨)로, 여성제(呂聖齊)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익상(李翊相)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사간(司諫) 신엽(申曅)이 ‘형조에서 죄인(罪人)의 병이 중한 것을 가지고 보방(保放)할 것을 허락한 것’은 바로 석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도 그를 특명으로 파면한 것은 과당(過當)하기에 거두어들이기를 청하고자 하여도 동료(同僚)들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인피(引避)하였다. 정언(正言) 이윤수(李允修)는 계하(啓下)한 죄인(罪人)을 계품(啓稟)하지 않고서 지레 먼저 보방한 것도 또한 온당(穩當)하지 못하였으니 그 벌을 거두어 돌려서는 아니된다고 하여, 인피하고 모두 물러가 기다렸다.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위에 나왔다.
12월 11일 정유
사헌부(司憲府)에서 아뢰기를,
"함경도(咸鏡道) 암행 어사(暗行御史) 이징명(李徵明)의 서계(書啓)에 한 고을을 추생(抽栍)하여 무단(無端)히 누락시켰으니, 파직을 명하시기를 청합니다. 함흥 판관(咸興判官) 조석(曺錫)은 죄를 짊어진 사람으로서 잡술(雜術)로 행세(行世)하여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미움받으니 파직을 명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다가 뒤에 이를 윤허하였다.
정언(正言) 이제민(李濟民)이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신엽(申曅)과 이윤수(李允修)를 처치(處置)하는 문제에 구차하게 신엽을 배척하고 체모(體貌)를 얻었다는 것으로 이윤수를 허락하여 한 사람은 체직하고 한 사람은 출사하게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만중(金萬重)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밤에 달무리가 지고 유성(流星)이 달무리 가운데에서 나왔다.
12월 12일 무술
이굉(李宏)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2월 13일 기해
주상의 체후(體候)가 아직도 조섭(調攝)하는 중이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품(稟)하여 계복(啓覆)을 정지하였다.
동부승지(同副承旨) 박태손(朴泰遜)이 소를 올려서 일을 말하였다. 그는 언로(言路)가 폐색(蔽塞)되는 폐단을 논(論)하기를,
"가만히 10여 년 동안 지내온 일을 보건대, 대개 언론(言論)으로 견책(譴責)을 얻은 자는 있었습니다만, 간언(諫言)으로 장려(奬勵)를 받았다는 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온비(溫批)와 우답(優答)을 입은 자가 있었습니다만, 이는 임금의 뜻에 맞기를 바라는 자가 아니면 곧 시론(時論)에 부회(傅會)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어찌 ‘거슬리는 마음으로 도(道)에서 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비도(非道)에서 구하는 뜻’이라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당직(讜直)한 기풍(氣風)이 날로 쇠하여지고 순묵(循默)하는 습상(習尙)이 날로 커지게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홍수주(洪受疇)의 상소는 소설(小說)을 끌어다 썼으니 진실로 어리석고 망령된 것입니다마는 그의 본 마음은 처음부터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하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먼 변방에 던져 버리는 형벌을 받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너그럽게 용서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홍수주를 비록 대단히 배척하던 사람들도 사사로이 서로 논의(論議)할 적에는 모두 과중함을 말하는데, 주광(黈纊)187) 아래에 한 번이라도 진달(陳達)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오늘날 조정에서 언론(言論)을 휘(諱)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인삼(人蔘)을 채취(採取)하였던 백성들은 본래 스스로 범월(犯越)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 변장(邊將)들이 아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엄하게 명하시어 정법(正法)으로 구문(究問)하여야 합니다. 남병사(南兵使)는 오로지 삼금(蔘禁)만을 관장(管掌)하고 있으니, 어찌 막연(漠然)하게 깨달아 살피지 못할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마땅히 똑같이 나문하여 죄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監司)는 엄하게 신칙(申飭)하지 못하여 이러한 흔단(釁端)을 일어나게 했으니 저들이 벌을 가볍게 주었다는 이유로 전적으로 논책(論責)하는 거조(擧措)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현재 고발(告發)된 죄인을 제외(除外)시키고 경한 자와 중한 자를 나누어 구분 처단하고 이어서 변경(邊境)의 관리(官吏)들을 신칙(申飭)하여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안집(安集)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경계함을 아뢰었으니 내가 이를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각진(各鎭)의 변장(邊將)들은 이미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가두게 하였으니 스스로 실상(實狀)을 살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감사와 병사의 죄를 논정(論定)하는 일과 죄인들을 경한 자와 중한 자로 나누어 구분 처리하는 일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규렴(宋奎濂)이 소를 올려서 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을 신구(伸救)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 일의 요체는 다만 임시로 석방한 것과 아주 석방한 것에 매여 있습니다. 만일 과연 공공연하게 놓아보낸 것이 옥리(獄吏)가 고한 것과 같다면 그를 특명으로 파직(罷職)시킨 벌(罰)은 불가한 것이 아니지만 이는 다만 그가 지레 죽을 것을 염려하여, 전례(前例)를 그대로 따라서 임시로 보방(保放)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주 석방(釋放)한 것에 비해 어찌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옥리(獄吏)가 구치(拘置)하지 않고 그를 마음대로 집에 돌아가게 하고서 적간(摘奸)하는 날에는 자기의 죄를 모면(謀免)하려 하여 바로 놓아주었다고 핑계하고서 거짓말로 속여 고한 것입니다. 그 사이의 정상(情狀)이 이미 환하게 나타났는데도 이제 형관(刑官)에게 죄를 돌려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으니 정상(情狀)과 죄가 서로 어긋나서 처분(處分)한 것이 정도에 지나쳤습니다. 그러기에 대각(臺閣)에서 〈그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라는 청을 그만 둘 수가 없었는데도 뜻밖에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주장이 그 사이에서 나왔기에, 이를 발론(發論)하였던 대관(臺官)을 즉시 체차시켰으니 이는 신이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형조의 당상관을 추고만 하고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2월 14일 경자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형조(刑曹)에 계하(啓下)한 죄인으로서 병(病)이 무거운 자는 또한 입계(入啓)하여 보방(保放)하도록 하는 일을 전교를 받들어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윤수(李允修)와 이제민(李濟民)이 송규렴(宋奎濂)의 상소 때문에 인피(引避)하였다. 이윤수는 발론(發論)할 때에 다른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이요, 이제민은 처치(處置)하여 이윤수를 나오게 하였기 때문이다. 모두 물러나 기다렸다. 지평(持平) 김우항(金宇杭)이 처치하기를 의견(意見)이 진실로 좋다는 것으로 하여 이윤수를 나오게 하고, 이제민은 참알(參謁)할 적에 불참(不參)한 것으로 체차(遞差)하였다.
해주(海州)의 유생(儒生) 윤상빙(尹商聘) 등이 상소하여 홍수주(洪受疇)가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것을 분변하여 배척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는 시기가 지난 후에 번거롭게 했다는 이유로 받지 아니하였다.
12월 15일 신축
사간(司諫) 이굉(李宏)이 박태손(朴泰遜)의 상소 내용 때문에 인피(引避)하면서 아뢰기를,
"홍수주(洪受疇)의 일은 크게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 상소의 조어(措語)는 교묘하게 속이고 이리저리 재주를 부려서 망녕되고 방자하여 차례가 없어서 마침내는 무욕(誣辱)이 선현(先賢)에까지 미쳤은즉, 그의 마음이 선현을 무욕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고 핑계하고서 끝내 죄를 징계하는 법전(法典)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신이 지난번에 사헌부(司憲府)의 직임을 맡고 있을 적에 이를 논렬(論列)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제 근신(近信)들이 혹은 홍수주를 어리석고 망령된 것으로 여기면서 혹 ‘그의 마음이 처음부터 선현을 무욕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마침내 또 죄를 입은 것이 너무 무거웠다고 하여 모두 그가 무지하여 마구 덤빈 것으로 돌림으로써 그가 전연 죄가 없는 것처럼 하니, 신은 실로 그들의 뜻을 알지 못하겠으며 거듭 세도(世道)를 위하여 대단히 슬프게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신구(伸救)하려는 말은 마음에 둘 것이 못된다. 그러니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윤지선(尹趾善)이 ‘유학(幼學) 이정익(李挺益)의 딸이 굶어 죽은 일’을 보고하니, 전교하기를,
"일이 매우 놀랍고 참혹(慘酷)하다. 그들을 특별히 돌보아 구휼(救恤)하라."
하였다.
12월 16일 임인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굉(李宏)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여(李畬)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홍적(李弘迪)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성인(聖人)이 성인이 되는 소이(所以)는 일용(日用) 사이에 힘을 써서 간단(間斷)이 없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성탕(成湯)이 그 본성(本性)을 회복하여 성인(聖人)에 이른 것은 오직 음악과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재화(財貨)의 이익을 늘리지 아니하며 의(義)로써 일을 마련하고 예(禮)로써 마음을 제어(制御)하며 간언(諫言)을 따르는데 막지 아니하고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과 사귈 적에 완비(完備)한 사람을 찾지 아니하고 몸단속 하기를 미처 하지 못하듯이 할 뿐이었습니다. 무왕(武王)도 그 본성(本性)을 회복하여 성인이 된 것은, 경(敬)이 게으름을 이기고 의(義)가 욕심을 이기는 단서(丹書)에 척연(惕然)하였던 것이며, 물러나서 상두(觴豆)와 도검(刀劍)에까지도 모두 명(銘)을 지어 경계하여 살피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 잗단일을 친절히 하는 데에 힘써서 진실(眞實)이 쌓이고 힘이 오래되면 곧 그에 합일(合一)되어 그 크기를 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이 규모(規模)와 체단(體段)이 홀연(忽然)히 나에게 있게 됩니다. 이를 총괄(摠括)하여 말하면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천리(天理)의 공심(公心)을 따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사이 진언(進言)하는 자들이 모두 전하께서 사정(私情)을 버리고 공도(公道)를 따르지 않는 일로써 말하고 있는데 잘 알 수 없습니다마는, 신하들이 전하의 마음 두신 데를 엿보아 알지 못하고서 망녕되이 서로 촌탁(忖度)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는 데도 정사(政事)의 사실에 나타나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이 말하게 되는 유래(由來)가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유독(幽獨)하고 은밀(隱密)한 사이에서 공력(功力)을 들이는 것의 소홀(疎忽)한가 주밀(周密)한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길에서 어찌 뒤로 물러나면서 앞으로 나가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인(仁)하면 영화(榮華)가 오고 불인(不仁)하면 치욕(恥辱)이 온다.’ 하였습니다. 이제 치욕을 싫어하면서도 불인에 처단한다면 이는 마치 습기(濕氣)는 싫어하면서 낮은 데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날에 조가(朝家)에서 만난 것들은 영광된 일은 아닙니다. 맹자는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살고 있으면서 그때의 군주에게 진언(進言)한 것은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말한 데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제 눈앞의 일들을 가지고 말하면 무릇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官員)들은 조정의 명령에 겁(㥘)이 나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매질하면서 빚진 것을 독촉하고 있으니 이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못됩니다. 대저 호강(豪强)한 자와 이서(吏胥)들은 믿고 그 명을 어기면서 탕척(蕩滌)될 때를 바라고 있으니 이들은 진실로 미워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잔약(殘弱)한 하호(下戶)로서 빈 배와 벌거숭이의 몸을 한 자들은 진실로 차마 볼 수 없는데도 수령(守令)이 된 자가 어찌 그들에게 매질을 원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매질하는 것은 진실로 마지못하여 하는 데서 나왔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게 하는 것은 인(仁)을 하는 것이 아니며, 백성을 보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이러한 것들의 일로써 스스로 삭약(削弱)함을 취하면서도 위태롭고 치욕(恥辱)된 것을 면하기를 구하는 것은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 본심(本心)이 위태(危殆)하고 미약(微弱)한 즈음에 자세히 살피고 정령(政令)이 잘되고 잘못되는 사이에 힘차게 반성(反省)하시어, 항상 마음에 보존된 것과 정령(政令)에 발표된 것이 인애(仁愛)의 본성(本性)에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면 성학(聖學)이 날로 진취(進就)되고 성덕(聖德)이 날로 새로워져서 참으로 성인(聖人)이 되고 그래서 마침내는 대순(大舜)과 같은 효(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홍수주를 귀양보내 쫓아낸 것은 진실로 부박(浮薄)하여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풍습(風習)을 미워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고, 오로지 선현(先賢)을 높이고 도학(道學)을 호위(護衛)하는 데 말미암은 뜻만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주의 말은 전인(前人)을 빙자(憑藉)하기는 했지만 반드시 선현을 무욕(誣辱)하려는 데서 나온 것은 아니니, 극변(極邊)으로 귀양보내는 율(律)은 과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북변은 추위가 심한데 올해는 더욱 심하다 하니, 만약 눈속에서 얼어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어찌 불쌍하여 애처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옛적에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적국(敵國)에 당한 치욕(恥辱)을 한 번 깨끗이 씻을 것을 물었을 적에 맹자께서 ‘형벌(刑罰)을 줄이고 세렴(稅斂)을 줄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허봉(許篈) 등이 이이를 공격하다가 멀리 쫓겨났을 적에 속히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과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죄를 너그럽게 해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대저 허봉 등이 범한 것은 지금의 홍수주에 비할 것이 아니었는데도 이이와 성혼은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당론(黨論)을 세척(洗滌)하려는 계책(計策)을 의론하였을 적에 이이는 부박(浮薄)하여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만 말하여 배척하고서 쓰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형벌을 쓰는 것이 과중(過中)하면 인정(仁政)에 누(累)를 끼칠까 진실로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방금 이이와 성혼의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장려(奬勵)하시는 까닭으로 감히 이로써 말을 합니다. 이는 또 전하께서 호령(號令)을 발포하여 시행하시는 것이 수연(粹然)하게 대중 지정(大中至正)하신 성규(聖規)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까닭에서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 일을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경계하여 가르쳐 준 말은 진실로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다. 이를 유심(留心)하여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홍수주가 선정(先正)을 무욕(誣辱)했던 죄는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아니하니 변방으로 귀양보낸 벌은 그것이 지나쳤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어서 생각해 보건대, 이러한 시세(時勢)가 위급한 날을 당하여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고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는 책임(責任)을 경에게 깊이 바람이 있다. 경은 과인(寡人)의 지극히 생각하는 마음을 본받아서 제갈무후(諸葛武候)의 국사(國事)를 위하여 몸을 바치던 뜻으로 날이 따뜻하기를 기다려 조용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갑진
윤이도(尹以道)를 승지(承旨)로, 안세징(安世徵)을 장령(掌令)으로, 이덕성(李德成)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호차(胡差)들이 죄인을 감죄(勘罪)하지 못한 일로 진품(進稟)하기를,
"포(砲)를 쏘아 조전(助戰)한 자는 진실로 마땅히 죽여야 할 것입니다. 비록 포(砲)는 쏘지 않았지만, 그러나 어연(魚淵)【영장(領將)을 일컫는다.】 10명도 마땅히 죽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범월(犯越)한 자를 다 죽이는 것은 너무나 무겁다. 남쪽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라. 어연들을 또한 죽음을 용서하려고 하는데 대신들의 뜻은 어떠하냐?"
하니, 김수항(金壽恒)과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은 ‘죽음을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은 ‘죄가 가벼운 자 두세 사람은 죽음을 용서하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가 진주사(陳奏使)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김수항이 또 전일(前日) 사간원(司諫院)의 계사(啓辭)를 들어 진품(進稟)하기를,
"삼상(蔘商)을 금단(禁斷)하는 것은 근본을 따르려는 의논이 되겠지마는, 또한 방해되는 곳이 있습니다. 대개 삼상은 북쪽 길 뿐만 아니고, 남방(南方)에도 또한 있습니다. 내국(內局)과 왜관(倭館)의 수용(需用)이 오로지 이에 의지하고 있으니, 형세가 일체(一切)로 엄하게 금단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소견(所見)을 진달(陳達)하도록 하였다. 남구만이 형조 판서(刑曹判書) 여성제(呂聖齊)·대사헌(大司憲) 이익상(李翊相)·광주 유수(廣州留守) 윤지선(尹趾善)과 헌납(獻納) 이국방(李國芳)과 교리(校理) 서문유(徐文𥙿)와 더불어 모두 ‘엄하게 금단하는 것의 마땅하다’ 하였고, 정재숭·예조 판서(禮曹判書) 신정(申晸)·호조 판서(戶曹判書) 유상운(柳尙運)·예조 참판(禮曹參判) 서문중(徐文重) 등은 ‘금단할 수 없다’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남북의 삼상들을 엄하게 금단하여서 이를 범하는 자는 일죄(一罪)로 논정(論定)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로써 법식(法式)을 정하게 하였다. 김수항이 또 박태손(朴泰遜)의 상소로 계품(啓稟)하기를,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와 병사(兵使)가 만일 더불어 꾀하였으면 그들의 죄는 진실로 크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검칙(檢飭)을 하지 못하였을 뿐이라면 형률(刑律)을 더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김수항(金壽恒)이 또,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등지가 수색(搜索)하여 붙잡는 소요(騷擾)를 가장 많이 당하였으므로 거의 텅비어 있는 지경이 되었으니, 청컨대 금년의 전조(田租) 및 크고 작은 신역(身役)들을 면제(免除)하여 조가(朝家)의 덕(德)을 베푸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수항이 송시열(宋時烈)의 상소에서 홍수주(洪受疇)가 죄를 받은 것은 너무나 무겁다고 논(論)하였음을 인용(引用)하여 아뢰기를,
"시비(是非)를 밝히는 것은 죄받는 것의 경중(輕重)이나 배소(配所)의 원근(遠近)에 관계되지 아니하니 참작(參酌)하여 처치(處置)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도(道)안에서 조금 가까운 곳으로 이배(移配)하기를 명하였다.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해서(海西)의 관향(管餉)을 이미 정파(停罷)한 뒤에라도 마땅히 구관(句管)하는 곳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이 말하기를,
"이를 호조(戶曹)에 소속(所屬)시키려고 한다면 구애(拘碍)되는 단서(端緖)가 없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또한 평안도로 하여금 구관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황해도로 하여금 구관하게 하고, 그대로 호조로 하여금 안찰(按察)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수항이,
"선정신(先正臣) 성수침(成守琛)은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 바르니, 그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는 날에 영의정을 가증(加贈)하시어 조가(朝家)에서 존상(尊尙)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서경덕(徐敬德)의 예(例)에 의거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기를 명하였다. 이국방(李國芳)이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고 또한 그가 영남(嶺南)에 봉사(奉使)하였을 때에 재황(災荒)이 참혹(慘酷)하였고 민사(民事)가 급하였던 것을 보고 재해(災害)를 입은 것이 가장 심하였던 고을의 적곡(糴穀)과 신역(身役)을 감(減)하여 바치기를 청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해(金海)는 비안 공주방(比安公主房)에서 절수(折受)한 곳인데 궁차(宮差)가 세력을 빙자하여 민전(民田)을 침탈(侵奪)하고 있습니다. 이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궁차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관(臺官)들이 들은 것은 간사한 백성들의 무소(誣訴)에서 나온 것 같다."
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승지(承旨) 이언강(李彦綱)이 말하기를,
"대관(臺官)들을 패초(牌招)하여도 나오지 않는 자는 또한 추고(推考)받고서도 행공(行公)하고 있는데 참알(參謁)에 불참(不參)한 자는 체직 당하고 있으니 이를 일체(一體)로 변통(變通)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남구만은 아뢰기를,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은 불참하는 것에 비하면 일의 체통이 더욱 중하다고 할 수가 있는데 이미 추고를 받고서도 행공하고 있으니, 이를 일체(一體)로 변통시키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지금부터는 참알에 불참한 자들에게 인피(引避)를 못하게 하기를 명하였습니다.
12월 19일 을사
사헌부(司憲府)에서 전일(前日)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고 이어서 여정(餘丁)과 아약(兒弱)에게는 징포(徵布)하지 말게 하며, 각사 노비(各司奴婢)로서 죽은 자는 한결같이 탕감(蕩減)하여 주어서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전에 아뢴 것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20일 병오
비변사(備邊司)에서 방민(坊民)과 시민(市民)들은 칙사(勅使)의 행차(行次)를 당하여 사역(使役)한 것이 많았다고 하여 장빙(藏氷)하는 대가(代價)의 미곡(米穀)을 바치지 말게 하며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마필(馬匹)의 대가(代價)를 충당해 주기를 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임실(任實) 고달산(高達山) 밑의 밭 가운데 두서너 길이 되는 바위가 11월에 갑자기 꺼져 내려앉았다.
12월 21일 정미
형조(刑曹)에서 대신들에게 문의(問議)하여 범월(犯越)한 죄인들을 제주(濟州)의 세 고을 및 진도(珍島)·거제(巨濟)·남해(南海) 등지에 나누어 유배(流配)시켰다.
12월 22일 무신
병조(兵曹)에서 사헌부(司憲府)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여정(餘丁)과 아약(兒弱)으로서 군역에 충군(充軍)되지 않은 자에게 징포(徵布)하지 말게 하기를 청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간원(諫院)의 계청(啓請)으로 인하여 말하기를,
"신포(身布)는 반드시 이미 거두어 바치고 있으니 비록 이를 구별(區別)하여 재감(裁減)하려고 하더라도 시기에 미치지 못해서 난처(難處)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시(歲時)가 이미 박두하였으니 고을의 적곡(糴穀)은 스스로 바치기를 정지(停止)해야 하겠습니다만 만일 원망이 있게 되면 당초(當初)에 분부(分付)하였던 뜻이 전연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그러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살펴서 계문(啓聞)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송규렴(宋奎濂)이 형관(刑官)의 일로 인피(引避)하였다. 그 대의(大意)는,
"형관(刑官)이 죄를 받은 것은 오로지 이서(吏胥)들의 무고(誣告)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대관(臺官)들이 벌을 거두어들이고 이서들을 치죄(治罪)하려고 한 것은 일의 체통으로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헌부(司憲府)의 처치(處置)는 도로 거두어들이지 않은 것으로써 좋은 의견으로 인정하고 있으니, 동료(同僚)들의 의견이 과연 좋은 것이면 이는 신의 의견이 좋지 못한 것이 됩니다."
한 것이다. 지평(持平) 김우항(金宇杭)이 이로써 인피(引避)하였다. 헌납(獻納) 이국방(李國芳)이 도로 거두어 들이라는 의논은 자못 구차한 데에 관계되기 때문에 송규렴은 체직하고 김우항은 나오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특별히 송규렴을 나오게 하였다. 형관(兄官)의 파직(罷職)시키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는지 여부(與否)는 본래 큰 사건이 아닌데도 논의가 갈리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형관을 그르다고 배척하는 자도 반드시 다 공심(公心)에서 나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마는 대간(臺諫)의 체통으로 말하면 모두 거두어들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자가 사리에 맞는다 하겠다.
심유(沈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12월 25일 신해
임금이 영모전(永慕殿)에서 삭망(朔望)에 친제(親祭)할 때에 곡림(哭臨)할 것으로 정하였다. 처음에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연제(練祭)189) 뒤에는 곡(哭)이 없는데 인조(仁祖)와 효종(孝宗)의 두 국휼(國恤) 때에는 이 예(禮)를 쓰지 아니하여 상제(祥祭) 뒤와 담제(禫祭) 전에는 삭망전(朔望奠)의 곡(哭)을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행하였습니다. 효경전(孝敬殿)에서도 상제 뒤와 담제 전은 또한 이 예(禮)를 의거하였습니다만, 그러나 홀기(笏記) 가운데에는 곡림(哭臨)하는 절차(節次)가 없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대신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남구만(南九萬)·정재숭(鄭載嵩) 등이 아뢰기를,
"효자(孝子)가 친상(親喪)에 있어서 정리(情理)로는 비록 한정이 없습니다마는 예(禮)로서는 절차(節次)가 있어야 합니다. 초상(初喪)에는 대곡(代哭)190) 으로 통곡하는 소리가 끊기지 않게 하고, 이미 빈소(殯所)를 차렸으면 대곡은 그만 두고 조석곡(朝夕哭)과 애지곡(哀至哭)191) 을 하고 졸곡(卒哭)이 되면 애지곡은 하지 않고 다만 조석곡을 하며, 소상(小祥)이 되면 조석곡을 그만두고 다만 삭망(朔望)과 상식(上食)에만 곡읍(哭泣)하는 절차(節次)가 있습니다. 이미 상제(祥祭)를 마치고 부묘(祔廟)하면 궤연(几筵)192) 을 철거하여 상사(喪事)가 끝나게 되므로 다시는 곡읍하는 일을 논함이 없게 되니 이로써 성현(聖賢)들께서 예(禮)를 제정(制定)하신 뜻이 스스로 시일의 경과에 따라 점점 줄이는 절차가 있음을 대개 알 수가 있겠습니다. 국가에서 아직 부묘(祔廟)193) 하기 전에는 그런대로 신위(神位)를 별전(別殿)에 받들어 모시는 것이 비록 사가(私家)에서 상제(祥祭) 뒤에 부묘하는 것과는 같지 아니합니다만, 무릇 향사(享祀)에 관계되는 의식(儀式)은 점차 길사(吉事)를 따라가야만 하는데 유독 곡읍하는 절차만이 변하여 덜어짐이 없다면 그것이 과연 예(禮)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기축년194) 과 기해년195) 의 두 국휼 때에 상제 뒤와 담제 전에 삭망전의 곡(哭)을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행하였으니, 그 때에 의정(議定)한 것이 반드시 고거(考據)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친제의 홀기에는 곡림(哭臨)하는 절차가 적혀 있지 않았다고 하니, 이를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기축년과 기해년 및 효경전(孝敬殿)에서 이미 행하였던 예(禮)를 일기(日記) 가운데서 고증(考證)해내서 다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각년(各年)의 일기를 상고(詳考)하여 보건대 기축년의 국휼에서는 상제의 뒤와 신묘년196) 의 5월 망제(望祭)를 친행할 때에 곡(哭)과 사배(四拜) 등의 예(禮)를 한결같이 삼년상(三年喪) 이하에 의하여 시행하는 일을 해조(該曹)로부터 마련(磨鍊)하여 입계(入啓)하였으니 외부(外部)의 의논들이 대부분 이를 그르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였더니, 그대로 곡(哭)하는 예(禮)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기해년의 국휼(國恤)에는 상제 뒤의 제의(祭儀)는 그 때의 일기(日記)에서는 나온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병진년197) 의 효경전에서 상제 뒤에 삭망제(朔望祭)를 친제할 때는 곡림(哭臨)하는 절목(節目)도 신묘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거행하였을 뿐이므로, 그 사이에 다시 의논하여 개정(改定)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신묘년과 병진년에 이미 행하였던 예(例)에 의하여 곡(哭)하는 예(禮)로써 마련(磨鍊)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유성(流星)이 태미원(太微垣)에 나왔다.
12월 26일 임자
사간(司諫) 이홍적(李弘迪)이 상소하여 ‘진신(搢紳)198) 들이 서로 싸우며 갑(甲)이니, 을(乙)이니, 시끄럽게 다투는 폐단’을 논(論)하고, 또 ‘대간(臺諫)들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 박(薄)함’을 논(論)하고서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언로(言路)를 넓힐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상세하게 경계를 진달한 말이 매우 절실(切實)하니,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경기 감사(京畿監司) 박신규(朴信圭)가 장계(狀啓)를 올리기를,
"본영(本營)에 있는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의 병부(兵符)가 모두 오른쪽뿐입니다. 그런데 오직 장단(長湍)·영평(永平)·교하(交河) 세 고을의 병부만 왼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 고을에서 차고 있는 병부들을 가져와서 맞추어보니 교하의 병부만은 왼쪽과 오른쪽을 비록 바꾸어 맞추어도 글자의 획이 꼭 맞았으며 장단·영평의 병부는 역시 오른쪽뿐이므로 체제(體制)의 대소가 또한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에서 계품(啓稟)하기를,
"무릇 병부가 왼쪽의 것은 감영에 남겨두고 오른쪽 것은 수령들이 차고 있는 것이 자연히 규례(規例)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기 감영에 있는 각읍의 병부가 모두 오른쪽이라고 하니, 이것이 이미 매우 괴이(怪異)합니다. 그리고 장단·영평 두 고을의 병부가 감영에 있는 것과 더불어 모두 왼쪽이었고 체제의 크고 작은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는 말은 더욱 놀랄 일이니 이를 급속(急速)하게 바로 잡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해영(該營)에 있는 장단 등 세 고을의 수령들이 차고 있는 것을 모두 거두어 모아 올려 보내서 고험(考驗)하여 품처(稟處)하는 터전이 되게 하소서."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병부는 사태가 위급할 때에 신표(信標)가 되는 것인데도 서로 틀리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혹시 뜻밖의 사변이라도 있게 된다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이에 앞서서 도신(道臣)이 이를 살피지 못하여 소루(踈漏)함이 너무 심하다.
12월 27일 계축
처음에 임금이 부묘(祔廟)한 뒤에 진하(陳賀)와 음복연(飮福宴)을 모두 그만두기를 명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진하(陳賀)하는 의식(儀式)은 열성조(列聖朝)에서 이미 행하였으니 이를 정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음복연만을 정지하기를 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전교하기를,
"궁장(宮庄)의 일을 어찌 한 쪽의 말만을 믿고 몽롱(朦朧)하게 연달아 아뢰는가? 더 번거롭게 말하지 말라."
하였다.
12월 28일 갑인
헌납(獻納) 이국방(李國芳)이 인피(引避)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신의 본뜻은 문안(文案)의 유무(有無)와 송리(訟理)의 곡직(曲直)에 있지 않고 다만 이를 유사(有司)에 회부(回付)하여 처리하지 않은 데에 있을 뿐입니다. 만약 궁가(宮家)로 하여금 법에 의거하여 처치(處置)하였다는 문안이 있다면 이를 유사에 회부하여 한 번에 결정(決定)될 것입니다. 설사 무소(誣訴)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도피(逃避)하기 어려울텐데 이제 다만 내수사(內需司)에서 올리는 말만을 의거하여 단안(斷案)을 내리니 그것이 과연 공정(公正)한 체통을 얻었겠습니까?"
하였다. 사헌부에서 그의 출사(出仕)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12월 29일 을묘
이에 앞서 황해도(黃海道)에서 양정(良丁)을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게 하는 거조(擧措)가 있었는데 거짓과 진실이 서로 섞여서 간사한 폐단이 함부로 발생하여 온 도(道)가 소란스러워서 장차 진정(鎭定)할 수가 없었다. 관찰사(觀察使) 이세백(李世白)이 도임(到任)한 처음에 민정(民情)을 채집(採集)하여 상문(上聞)하기를,
"국가에서 차라리 수 많은 한정(閑丁)들을 잃어버릴지라도 온 도(道)의 인심(人心)을 이반(離叛)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미 사정(査定)된 자는 장점(長點)을 따라 재량하여 처리하고 그 나머지는 그만 중지하소서."
하였으므로, 묘당(廟堂)에서 그의 말을 옳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변사(備邊司)에서 청하기를,
"그 조사하여 낸 여정(餘丁)들을 따로 등록(登錄)시켜 본사(本司)에서 구관(句管)하여 수포(收布)하고 그들 가운데서 근착(根着)199) 이 있는 자를 가려서 기병(騎兵)·보병(步兵) 및 삼군문(三軍門)의 모자란 정원(定員)을 충정(充定)하게 하며 그들에게 획급(劃給)하는 것은 우선 중지하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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