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1월

싸라리리 2025. 11. 1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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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진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는데, 이 뒤로 여러번 나타났다.

 

1월 2일 정사

윤이제(尹以濟)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서종태(徐宗泰)를 부응교(副應敎)로, 김구(金構)를 교리(校理)로, 김진귀(金鎭龜)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1월 3일 무오

전교(傳敎)하기를,
"내일 아침에 대제학(大提學)을 패초(牌招)001)                  할 터인데, 지난 갑자년002)                   겨울에도 나와서 기다리라는 명이 있었으나, 이미 지난날의 혐의를 끌어대어 병을 핑계하고 나아오지 않았었으니, 사체(事體)가 온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의 심사를 조정에서 벌써 환히 알고 상세히 개유하였고 보면, 그 자신이 문형(文衡)003)                  의 직임을 띠고 있으면서 한결같이 인혐(引嫌)만 하는 것은 또한 너무 부당하다. 이러한 뜻으로 명백히 분부하여, 시기에 임박해서 군급(窘急)해 하는 우려가 없게 하라."
하였다.

 

1월 4일 기미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밑에서 나와 북두성(北斗星) 위로 들어갔고, 또 남하성(南河星) 밑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반궁(泮宮)004)  의 선비에게 시험을 보여, 수석을 한 최중태(崔重泰)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005)  의 자격을 주었다.

 

이언강(李彦綱)·송규렴(宋奎濂)을 승지(承旨)로, 서종태(徐宗泰)를 집의(執義)로, 최관(崔寬)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최관은 정명(精明) 강직(剛直)하고, 성품이 평온하고도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또 학식이 있고 시비에 밝았다. 시의(時議)가 빗나가고 인심이 편벽된 것을 보고 더욱 벼슬길에 나올 뜻이 없어서, 스스로 노병(老病)을 핑계하여 서울 근교에 물러나 있었다. 무릇 제배(除拜)가 있을 적마다 모두 기꺼이 나오지 않았으나, 국가에 길흉(吉凶)의 대례(大禮)가 있으면, 때로는 도성 안에 들어와서 잠깐 출사(出謝)하였다가 곧 물러가곤 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 명이 내려졌어도 역시 기꺼이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1월 6일 신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봉조하(奉朝賀)006) 송시열(宋時烈)이 올해로 나이가 80세에 찹니다. 조신(朝臣)은 더러 자급(資給)을 올릴 수도 있는 규정이 있으나, 이는 다시 더할 만한 자급이 없으므로, 별도의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옷감이나 먹을 것을 특별히 내려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봉조하의 나이가 80에 찼다는 것을 지금 비로소 들어 알았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옷감과 먹을 것을 별도로 넉넉히 내려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호조(戶曹)에서 미두(米豆) 각각 15석(石), 돼지 2구(口), 민어(民魚) 20미(尾), 석오(石魚) 30속(束), 면주(綿紬) 10필, 면포(綿布) 20필을 보내줄 것을 계청(啓請)하여 보내 주었다.

 

1월 7일 임술

심수량(沈壽亮)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심수량이 바야흐로 안변(安邊)의 수령으로 나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불러들이지 않으므로, 대신이 건백(建白)하여 불러들인 것이다.

 

1월 8일 계해

비변사(備邊司)에서 절목(節目)을 의정(議定)하여, 변방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서 삼(蔘)을 캐는 것을 금지하였다. 지난해 겨울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과 사간(司諫) 신엽(申曅)이 진달한 때문이었다.

 

1월 9일 갑자

평양(平壤)의 효자 윤파유(尹坡瑜)의 마을에 정표(旌表)하도록 명하였다. 윤파유는 어릴 적부터 효성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나이 18세에 그의 아버지 윤창은(尹昌殷)이 강에서 고기를 잡다가 실족을 하여 물에 빠져 죽게 되자, 윤파유가 힘을 다하여 달려가 구제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물에 몸을 던져 같이 죽었다. 평안도 관찰사 이세백(李世白)이 이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한 것을 예조에 내려 복주(覆奏)케 한 바 정포(旌褒)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윤가(允可)한 것이었다.

 

1월 10일 을축

도목정(都目政)007)  을 하였다. 을축년008)   가을과 겨울의 대정(大政)을 물려서 행한 것이다. 임상원(任相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우석(金禹錫)을 도승지(都承旨)로, 김창협(金昌協)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조상우(趙相愚)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홍수헌(洪受瀗)을 수찬(修撰)으로, 김만길(金萬吉)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굉(李宏)을 부교리(副校理)로, 윤계(尹堦)를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정시한(丁時翰)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정시한은 효행으로 칭찬(稱讚)받아 여러 차례 도신(道臣)의 추천에 올랐다. 그러나 학문이 높다고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청망(淸望)에 올랐으니, 전형을 주관하는 자가 공론을 핑계하지만, 사람들은 간혹 그것이 조금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이번 정사에 권상하(權尙夏)를 지평에 주의(注義)009)  하였는데, 권상하는 사람됨이 장중 독실(莊重篤實)하고 글을 읽어 뜻을 구하므로, 여러 차례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대망(臺望)에 통고(通告)되어 그를 아는 사람들은 퍽 기대하는 뜻을 가지기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007] 도목정(都目政) : 관원의 근무 성적을 고과(考課)하여 출척(黜陟)과 이동(移動)을 행하던 일. 도목 정사(都目政事).[註 008] 을축년 : 1685 숙종 11년.[註 009] 주의(注義)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사신은 말한다. "정시한은 효행으로 칭찬(稱讚)받아 여러 차례 도신(道臣)의 추천에 올랐다. 그러나 학문이 높다고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청망(淸望)에 올랐으니, 전형을 주관하는 자가 공론을 핑계하지만, 사람들은 간혹 그것이 조금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이번 정사에 권상하(權尙夏)를 지평에 주의(注義)009)  하였는데, 권상하는 사람됨이 장중 독실(莊重篤實)하고 글을 읽어 뜻을 구하므로, 여러 차례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대망(臺望)에 통고(通告)되어 그를 아는 사람들은 퍽 기대하는 뜻을 가지기도 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지난번에 지충추부사(知中樞府事) 이단하(李端夏)의 소(疏)를 보니 문득 신의 성명을 들어 사실(私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진열하였으니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또 지중추부사 박신규(朴信圭)의 소를 보니, 더욱 구연(懼然)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의 상신(相臣)이 비록 매우 퇴폐(頹廢)하기는 하나, 이단하(李端夏)가 어찌 소매 속에 간직한 장계(狀啓)의 초안을 꺼내어 보일 수 있으며, 신이 비록 용렬하기는 하지만 또한 어찌 그의 소매 속에서 나온 것을 받아서 보았겠습니까? 이 말을 믿는다면 이단하가 신에게 수치를 줌이 클 뿐만 아니라, 신도 진실로 두렵습니다. 조정에서는 예양(禮讓)함을 중시하는 것이므로, 남의 배척을 받은 자가 감히 스스로 그 시비를 결정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공론의 결정에 부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 일입니다. 요즈음 기어코 자기를 해명하고자 하여 다시 번갈아 따지고 다투면서 서로 격분하여 분노의 말이 따르게 되어, 조정이 날로 그 격이 낮아지는 것도 실은 이러한 일들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식자(識者)들의 깊이 민망스러워하는 바인데 신이 외람되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것을 시정하지 못하고, 도리어 여러 신하들의 말에 오르게 되어 사체(事體)가 무너짐이 자못 여지가 없으니, 어떻게 만인이 우러러보는 지위에 있으면서 백료(百僚)를 거느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유시(諭示)하기를,
"체면을 손상시킨 것은 그 책임을 돌릴 곳이 따로 있는데, 경에게 무슨 불안할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앞서 이단하는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을 맡고, 박신규와 동료로 있을 적에 어떤 일로 인하여 서로 저지를 하느라 교장(交章)을 올려 변론을 하였는데, 이단하는 상소하기를, ‘신이 소를 올려 죄를 쓰고, 아울러 동료 사이의 의혹을 폭로하려다가 이런 사단을 초래하였는데,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듣고서 만류를 하였습니다.’하고, 박신규가 또 상소하기를, ‘이단하가 장계 초안을 소매 속에 넣고서 몸소 대신의 집으로 가서 고쳐 줄 것을 청하니, 문자를 수정하고, 이어 비변사 낭청을 시켜 신에게 보내어 보여 주었습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이 일로 해서 올린 차자의 내용은 대개 양편을 다 나무라면서도 박신규의 소를 더욱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1월 11일 병인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서북(西北) 양도(兩道)에 갇혀 있는 죄인을 양도에서 구별하여 계문(啓聞)하였습니다. 평안도에 갇혀 있는 사람 1명은 국경을 넘은 실상을 벌써 자복하였고, 함경도에 갇혀 있는 사람은 1백 39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다 따라 갔거나 연관된 무리로서, 서울에 갇힌 죄인을 남방에 노속(奴屬)시킨 것과 비교한건대 차등이 없지 않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사안(査案)을 가져다 상고하여, 그 중에서 국경을 넘은 사실을 자복한 자는 평안도 죄인 1명과 함께 종으로 삼아서 무산부(茂山府)에 소속시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놓아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에 앞서 서북 변방의 백성 가운데 몰래 국경을 넘다가 발각된 자로서 죄가 무거운 자는 사형에 처하고 가벼운 자는 모두 관노비로 삼아서 남쪽 땅에 배속시켰는데, 무산부는 북변의 신설한 고을로 저들과 경계가 서로 접속한 곳이다. 조정에서 죄인을 분배하는 것이 비록 변방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하나, 이들은 모두 국경을 넘는 데 익숙한 자들인데, 이제 또 다른 곳에 배속시키지 않고, 도리어 무산에다 배속시켰으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1월 12일 정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뜸질을 받는데,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이 계해년010)   사이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로 하여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주석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송시열이 얼마 안 되어 물러났으므로, 마침내 곧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듣건대 고향에 돌아간 이래 문제자(門弟子)와 더불어 《주서절요(朱書節要)》  【이황(李滉)이 편찬(編纂)한 것이다.】  및 《주문작해(朱文酌海)》  【정경세(鄭經世)가 편찬(編纂)한 것이다.】 를 한 책으로 편정하여 《절작통편(節酌通編)》이라 이름하고, 또 두 책에서 빠진 것들을 더 골라 넣어 혼합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이어 주해를 내었으니 후학에게 보탬이 큽니다. 성상께서 가져다 예람(睿覽)하신 뒤 운각(芸閣)011)  에 내려보내어 정밀히 교정하게 하시고, 양남(兩南)012)  으로 하여금 간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 전교하기를,
"문원공(文元公)  【곧 김장생(金長生)이다.】 의 문집을 열람한 후 승정원에 내려보내어 문정공(文正公)  【곧 송준길(宋浚吉)이다.】 의 문집과 함께 운각에 회부하여 일체 출간케 하라."
하였다.

 

김재현(金載顯)·박태손(朴泰遜)을 승지로 삼았다.

 

함경도에 여역(癘疫)이 들어 현재 앓고 있는 자가 80명이고, 병들어 죽은 소가 8백 60여 마리에 이른다고 관찰사가 계문하였다.

 

1월 13일 무진

예빈시 정(禮賓寺正) 홍무(洪茂)를 그대로 유임시키고, 중종(中宗) 때의 명신 송인수(宋麟壽)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홍무는 직무를 잘 수행하여 쇠잔한 고을을 회복시킨 공이 있었는데, 임기가 차서 관직을 옳길 때 사람들이 그의 떠나감을 아쉬워하였고, 송인수는 청명(淸名)과 직절(直節)이 있었으나, 을사 사화(乙巳士禍)에 억울하게 죽었는데, 그 후손이 영체(零替)하여 연시(延諡)013)  할 수 없었는데, 이는 모두 영중추부사 김수흥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삼인검(三寅劍)을 타조(打造)하는 데는 물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내수사(內需司)에서 충당해 주기가 어려우니 선혜청(宣惠廳)의 쌀 30석(石)과 돈 2백 냥(兩) 및 호조·병조의 면포(綿布) 각 2백 필(匹)을 제급(題給)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삼인검이란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타조하는 것을 말함인데, 사귀(邪鬼)를 물리칠 수 있다.

 

당초에 호남 백성들이 본읍(本邑)의 전부(田賦)가 너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은 꺼려하고, 내수사의 수세가 가벼운 것을 이롭게 여겨 토지를 억지로 내수사에 소속시켜 놓고, 이어 내수사의 위호(位號)로써 양안(量案)에 달아 놓았었는데, 그 뒤 내수사에서 이를 움켜잡고 그 토지를 추심하고는 차인(差人)들이 그대로 그 수세를 균등히 분배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민망하게 여겨 앞을 다투어 세전(世傳)의 문권을 가지고 호소하기를 마지 않았다. 암행 어사 김만길(金萬吉)이 돌아와서 그 실정을 아뢰자, 이를 호조에 내려 복주(覆奏)하게 하였는데, 김만길의 말과 같이 그 밭을 백성에게 돌려 줄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양안에 달아 놓은 지 오랜 토지를 이제 내수사에서 추심한 뒤에 갑자기 문권을 가지고 이처럼 호소하는 것은 그 정상이 몹시 간악하다 하여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우승지 윤이도(尹以道)가 집주(執奏)하기를,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처음에는 비록 거짓을 꾸몄다 하더라도 그 세전(世傳)의 문권이 다 함께 있고, 양안에 주인의 이름이 분명히 실려 있는데, 백년 뒤에 와서 하루아침에 빼앗긴다면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사세로 보아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어찌 내수사의 약간의 토지를 삼아 먼 지방 백성의 무한한 원망을 사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드디어 전의 명을 거두고 각 고을에 명하여 감색(監色)을 정하여 수세(收稅)하여 내수사에 들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는 전에 없었던 법규로서 뒷날에 폐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만 내수사의 차인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1월 14일 기사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밑에서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우의정 정재숭(鄭載崇)이 전임 호조 판서 적의 일로써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는 까닭없이 지연(遲延)시킨 데 비할 것이 아니다. 안심하고 사피(辭避)하지 말라."
하고, 추고(推考)의 전지(傳旨)도 지워버리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도 관찰사 서문중(徐文重)이 신유년014)  의 사안(査案) 중 도망한 노비로서 탕감받지 못한 무리 및 가명으로 죽은 것으로 하여 입안(立案)을 내지 않은 자도 일체 탕감케 할 것을 치계(馳啓)하니, 이를 호조에 내렸었다. 그때 정재숭이 호조 판서로 있었는데, 지금 인심이 교사(巧邪)하여 온갖 방법으로 허위를 가장해서 산 사람을 죽었다고도 하고 있는 사람을 도망쳤다고 하므로, 허위와 사실이 서로 혼동되어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영남뿐만 아니라 다른 도도 역시 그러하니, 여러 도의 문서를 상고하여 나온 것을 기다려서 일시에 품처(稟處)할 뜻을 청하고는 복주(覆奏)하였는데 윤허를 받았었다. 이에 와서 호조에서 비로소 그 일을 사핵(査覈)하여 아뢰니, 임금이 너무 지연시켰다하여 특별히 그때의 당상(堂上)·낭청(郞廳)을 종중 추고(從重推考)015)  하라고 하였으므로, 정재숭이 차자를 올려 대죄(待罪)하면서 그 곡절을 갖추어 진달하니, 임금이 전일의 명을 정지하였다.

 

1월 17일 임신

임금이 전교하기를,
"졸(卒)한 황창 부위(黃昌副尉)016)  를 천장(遷葬)할 적에 장례의 필요한 물품을 금방 내려 주게 하였으나, 다만 생각해 보니, 본가가 너무 가난하고, 또 상(喪)을 주장할 사람이 없어서 장사의 여러 도구도 마련할 수 없다고 한다. 듣고 나니 불쌍하고 측은하다. 별도의 고휼(顧恤)이 없을 수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계에 맞게 예장(禮葬)해 주게 하라."
하였다.

 

헌납 이국방(李國方)이 상소(上疏)하여 ‘사(私)’자로써 경계를 삼으라고 하고, 궁장(宮庄)의 일로써 김석연(金錫衍)을 특별히 제수(除授)한 일을 말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속담에, ‘권문엔 손이 있어도 초야엔 입이 없다[權門有手草野無口]’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손이 있다는 것은 약탈하여 불법으로 이득을 점유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고, 이른바 입이 없다는 것은 억울함을 품고도 드러내어 실토할 수가 없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말이 비록 비루하기는 하지만, 인주(人主)는 잘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 해변에 사는 먼 백성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다가 다만 내수사(內需司)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바로 논죄(論罪)의 안을 삼으시니, 이와 같은 거조는 성명(聖明)의 천심(淺深)을 엿보게 할 뿐만 아니라, 정치에 있어서 거리낌이 있으니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걱정하고 아낌을 다 말하였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1월 19일 갑술

박세장(朴世樟)을 장령(掌令)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신익상(申翼相)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월 20일 을해

최관(崔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다.

 

1월 22일 정축

달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1월 23일 무인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영변(寧邊)에는 새로 성을 쌓느라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청컨대, 본도의 면포(綿布) 천여 필을 주어 이광한(李光漢)으로 하여금 안주(安州)에서 돈을 주조하게 하고, 그 이식을 늘여서 곡식을 사 들여 배로 영변에 운반하고 그 본래의 〈면포〉는 갚게 하소서. 배와 수레의 용도는 본시 천하의 공통된 이기(利器)입니다. 이광한이 일찍이 영변에 있을 적에 수레를 제조하여 짐을 실어 날랐는데, 쇄마(刷馬)017)                  의 값의 태반이 감소되었으니, 그 편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땅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이광한으로 하여금 수레의 제조를 주관케 한다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집의        서종태(徐宗泰)가 김중하(金重夏)를 법으로 다스릴 것을 누누이 진달(陳達)하고, 남구만과 우의정        정재숭(鄭載崇)이 또한 이어서 아뢰었으나, 임금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사간        이홍적(李弘迪)이 전일 장계 속의 궁장(宮庄)의 일을 극력 아뢰고, 정재숭도 또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탑전(榻前)에서의 사사로운 말을 검속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승지를 추고하였는데, 이는 이 날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김중하의 일을 가지고 서로 수작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서종태와 이홍적이 다 같이 인피(引避)하여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교리        김구(金構) 또한 상소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 김중하의 일을 진계하기를,
"지난번에 대사헌(大司憲)        이익상(李翊相)이 인피한 것을 또 다시 돌연히 정론(停論)하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시나, 성명(聖明)께서 정론하려는 것임을 이미 아셨다면 더욱 윤허하여 좇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차라리 헌신(憲臣)이 인피(引避)한 과실을 먼저 공격하여야 할 것인데, 이제 날마다 앞서의 장계(狀啓)를 등사하여 구차하게 시애(撕捱)018)                  한다면 이는 거것이요, 진실이 아닙니다. 위아래가 서로 좇아서 속이는 것은 사체(事體)를 소중히 하고 한 시대를 훈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남면(南面) 금호강(琴湖江) 상류의 큰 여울물이 본월 초하룻날 인시(寅時)에 물줄기가 끊겼다가 진시(辰時)에 다시 흘렀다.

 

1월 25일 경진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여성제(呂聖齊)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신익상(申翼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박태상(朴泰相)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사명(李師命)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1월 27일 임오

천둥하고, 유성(流星)이 귀성(鬼星) 위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신엽(申曅)을 집의(執義)로, 이광(李宏)을 사간(司諫)으로, 강현(姜鋧)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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