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을유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차자를 올려 형옥(刑獄)이 적체되고, 각 관사에서 함부로 사람을 가두는 폐단을 극진히 논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중요한 죄수는 5, 6일을 두고 깊이 생각할 것이며, 열흘이나 되어서 그 중요한 죄수를 크게 결단하라.’고 하였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형옥을 결단하는 시한은, 대사(大事)019) 는 30일, 중사(中事)020) 는 20일, 소사(小事)021) 는 10일이며, 구애되는 일이 있어서 부득이 시한을 넘길 경우에는 반드시 그 사유를 갖추어 계문(啓聞)하게 되어 있으니, 고금의 제도를 참고하여 본다면 죄수를 적체시키지 않으려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문왕(文王)은 인군(人君)으로서 서옥(庶獄)을 겸무한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여러 관사(官司)의 백관(百官)이 각기 형옥을 함부로 결단한다면, 어찌 감옥이 늘어나서 어지러워지는 데로 귀착(歸着)되는 데 이르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묘당(廟堂)에 명하여 예전의 법전을 거듭 밝히도록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임술년022) 이후 매년 겨울 사이 국가에 사고가 있어서 계복(啓覆)023) 을 시행하지 않은 지 이제 4년이 되었습니다. 놓아 살리는 방도가 있어야 하는데도 오늘날까지 굳게 갇혀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드시 죽여야 함에도 지금까지 요행으로 면한 자가 있는 것을 상형(祥刑)024) 으로써 논한다면 그 실책은 똑같습니다.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추분(秋分)이 지난 뒤 곧장 계복할 기간을 정하여, 과거와 같은 착오의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차자의 사연은 아주 당연하다. 모두 차자의 사연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2월 3일 정해
임금이 영모전(永慕殿)025) 에서 친히 담제(禫祭)026) 를 행하였다.
2월 4일 무자
유성(流星)이 항성(亢星) 밑에서 나와 천시 서원(天市西垣)으로 들어가고, 직녀성(織女星) 밑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윤지완(尹趾完)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홍적(李弘迪)을 장령(掌令)으로, 허지(許墀)를 정언(正言)으로, 서종태(徐宗泰)를 교리(校理)로, 신완(申琓)을 승지(承旨)로, 송창(宋昌)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송창은 규모는 협애(狹隘)하였으나, 정상(精詳)하고 강개(剛介)하였다. 시론(時論)이 어수선하고부터 사람들이 대개 추종해 붙좇는 것으로 매진(媒進)하는 계책을 삼고자 하였으나, 송창만은 이러한 태도를 짓지 않아서 공론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송창은 규모는 협애(狹隘)하였으나, 정상(精詳)하고 강개(剛介)하였다. 시론(時論)이 어수선하고부터 사람들이 대개 추종해 붙좇는 것으로 매진(媒進)하는 계책을 삼고자 하였으나, 송창만은 이러한 태도를 짓지 않아서 공론이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2월 5일 기축
부호군(副護軍) 이익상(李翊相)이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전에 사헌부의 관직에 있을 적에 여러 동료들이 신에게 이르기를, ‘김중하(金重夏)의 장계(狀啓)가 비록 공공(公共)의 논의이기는 하나, 역시 한결같이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니, 정지함이 마땅할 듯하다.’ 하므로, 신이 답하기를, ‘나의 생각도 역시 이와 같다.’ 하였으나, 글을 띄워 물어 보니, 따르느니 아니 따르느니 하는 사이에 엇갈리는 바가 없지 않기 때문에 정지하지 못하였는데, 김구(金構)의 상소가 제멋대로 거센 공격을 하였고, 한 사람이 선창(先唱)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붙좇아 오직 신을 배척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큰 사업을 삼았으니, 신은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 위간(危懇)을 살피셔서 속히 전파(鐫罷)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뜻밖의 거센 배척이긴 하나 무엇을 입에 담을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피(辭避)하지 말라."
하였다.
2월 7일 신묘
한성 좌윤(漢城左尹) 김석익(金錫翼)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석익은 아무 재능도 없는 백도(白徒)로서 한갓 폐부(肺腑)의 친척인 까닭에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이어 병권(兵權)을 잡고는 자못 나아가 뵈올 기회를 얻어 망령되게 진백(陳白)하니, 시배(時輩)들이 더러 인연하여 부탁(附託)하려고 어두운 밤에 출입하기도 하니, 식자(識者)가 이를 걱정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과음으로 인해 갑자기 죽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매우 슬퍼하고 특별히 1등의 예장(禮葬)027) 을 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정원에서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니, 드디어 명을 고쳐서 2등 규례의 예장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8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註 027] 예장(禮葬) : 임금이나 종친(宗親), 2품 이상의 문무 백관(文武百官)과 그 부인들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그 격에 맞게 예(禮)를 갖추어 지내던 장사(葬事). 이때 일체의 장례 비용, 물자 및 군정(軍丁)을 지급하였음. 예장 도감(禮葬都監)에서 상등(上等:정·종1품)·중등(中等:정2품)·하등(下等:종2품)으로 나누어 산역 군인(山役軍人)과 석회(石灰)·관곽(棺槨) 등을 지급하였음.
사신은 말한다. "김석익은 아무 재능도 없는 백도(白徒)로서 한갓 폐부(肺腑)의 친척인 까닭에 갑자기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이어 병권(兵權)을 잡고는 자못 나아가 뵈올 기회를 얻어 망령되게 진백(陳白)하니, 시배(時輩)들이 더러 인연하여 부탁(附託)하려고 어두운 밤에 출입하기도 하니, 식자(識者)가 이를 걱정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과음으로 인해 갑자기 죽었다. 임금이 하교(下敎)하여 매우 슬퍼하고 특별히 1등의 예장(禮葬)027) 을 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정원에서 불가(不可)하다고 고집하니, 드디어 명을 고쳐서 2등 규례의 예장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예고제(預告祭)의 축문(祝文) 두사(頭辭)에 ‘효자(孝子)’ 또는 ‘애자(哀子)’라고 일컫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를 대신(大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향실관(香室官)028) 이 담제(譚祭)의 축문 속에 ‘애자’라고 썼으므로 예고제의 축문에도 또 ‘애자’로 썼는데, 승정원에서 ‘효자’라고 써야 할 것을 자못 ‘애자’로 썼다 하여 해당 관원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잡아다 추고(推考)하도록 하였었다. 예조에서 향실(香室)로 하여금 의궤(儀軌)를 상고하게 하였더니, 신축년029) 효종 대왕의 상(喪)을 마친 뒤 담제 및 고동가제(告動駕祭)의 축문이 모두 ‘효자’로 씌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여러 의논은 더러 담제 축문에 ‘효자’로 쓴 것이 예의(禮意)로 헤아려 볼 때 합당하지 않은 듯하니, 비록 의궤는 이와같다 하더라도 법식으로 정하기는 어렵고, 또 《의례(儀禮)》 및 《가례(家禮)》의 축문에 ‘애자’를 고쳐 ‘효자’로 쓴 것은 부제(祔祭)030) 때에 있었으므로, 지금 비록 담제는 지났다 하더라도 부묘(祔廟)031) 를 미처 지내기 전에 곧바로 ‘효자’를 쓰는 것 또한 절차가 없는 일이라고 하였으니, 신축년의 의궤 외에 달리 의거할 만한 전례(典禮)가 없다하여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한 것이었다. 이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의례(儀禮)》와 《가례(家禮)》를 상고한 바 모두 부제에는 ‘효자’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곧 졸곡(卒哭)032) 뒤에 행하는 부제입니다. 졸곡을 지내고 나서 부제를 행하고 대상(大祥)033) 을 지내고 나서 새 신주를 옮겨 사당에 모셔 들이는 것은 고금에 통행(通行)하는 예입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졸곡 뒤에 부묘하는 절차가 없고, 부묘의 예는 담제 뒤에 행하였습니다. 부제의 절차가 비록 고례(古禮)와 같지는 않으나, 미처 부묘하기 전에 축문에서 ‘애자’를 고쳐 ‘효자’로 쓰는 것은 《의례》·《가례》의 예문과는 어긋남이 있으므로, 여러 의논이 다 이렁성저렁성하는 것도 반드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단지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는 것은 잡기편(雜記篇)에 이르기를, ‘제사에는 ‘효자’·‘효손’이라 일컫고, 초상에는 ‘애자’·‘애손’이라 일컫는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이르기를, ‘제사는 길제(吉祭)이니, 졸곡 이후를 길제라 한다. 그러므로 축문에 ‘효자’라 일컬으며, 우제(虞祭)034) 이전은 흉제(凶祭)이기 때문에 ‘애자’라 일컫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의절(儀節)에는 우제에서 담제까지 선조(先祖)에게는 ‘효’라 일컫고 망자(亡者)에게는 ‘애’라 일컫는다고 하였으나, 잡기를 증거로 삼는다면 축문에 ‘효’라 일컫는 것은 졸곡에서 시작되었고, 부제까지 가지 않았으며, 우리 나라 선정(先正)의 논의에도 《예기》로써 정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영모전(永慕殿)의 졸곡 뒤 축문 두사(頭辭)에 그대로 ‘애’자(字)를 쓴 것이 본디 고례가 아니고, 또 비록 의절로써 논한다 하더라도 이미 담제까지도 ‘애’라고 일컬었다고 하였으니, 담제 뒤에 ‘효자’로 개칭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신축년의 식례(式例)가 반드시 의거한 데가 있을 것이오니, 이제 그대로 따라 준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남구만이 우선 담제에 의거하여 ‘애자’라 일컬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김수항 등의 의논을 좇으라고 명하였다.
2월 9일 계사
영모전(永慕殿)에 고동가제(告動駕祭)를 거행하고, 이어 신연(神輦)을 모시고 종묘에 이르러 태묘(太廟) 및 영녕전(永寧殿)에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다.
2월 10일 갑오
명성 왕후(明聖王后)를 태묘에 부묘(祔廟)하였다. 임금이 행제(行祭)를 마치고, 환궁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는 교서를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상기(喪期)가 겨우 끝나니 이미 슬퍼하던 날도 지나가고, 거룩한 의식(儀式)을 베풀어 마침내 승부(陞祔)의 전례를 수행하였으나, 오히려 남은 슬픔이 간절하여 이에 널리 반고를 거듭하노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명성 왕후께서는 태사(太姒)035) 가 주(周)나라에 왕비(王妃)로 임하고 선인 황후(宣仁皇后)036) 가 송(宋)나라에 국모로 임한 것과 같아서 깊으신 은애가 만물을 덮으니 휘음(徽音)이 장추(長秋)에 영구히 남게 되고, 지극한 덕이 임금과 배합하니 음교(陰敎)의 감화가 온 나라의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었다. 과매(寡昧)한 내가 왕위(王位)를 계승하자 여러 해 동안 가르침을 받았고, 국세(國勢)가 위급하던 때를 당하여서는 은밀히 자지(慈旨)를 품고(稟告)하였으며, 궁위(宮闈)에 한가로이 계실 때에는 의방(義方)을 더욱 극진히 하셨으므로 즐거운 마음에서 만세를 두고 받들 것을 기약하였는데, 갑자기 삼조(三朝)의 영양(榮養)을 버리시니, 드나들며 걱정되는 것은 나의 몸이 신명에게 죄를 얻은 것을 애통(哀痛)해서 하시던 것이요, 새벽에 잠 못이루며 그리워함은 선후(先后)께서 묘말(眇末)한 나에게 대업(大業)을 물려주신 것을 생각해서이다. 어느덧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 갑자기 대상과 담제가 서로 잇따르는데, 갱장(羹牆)037) 에서 뵌들 애모하는 마음을 어찌 펼 수 있으랴. 침묘(寢廟)038) 에 모시고 비로소 종묘의 제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빛나는 의식이 이미 갖추어 이루어졌는데도 아직도 거창했던 일을 잊기가 어려워서, 면복(冕服)을 갖추고 열조(烈祖)039) 를 조현(朝見)하니, 비록 음악을 들은들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마는, 보의(黼扆)를 벌이고 뭇 신하를 보니, 마땅히 축하로 바꾸어야 함에 위로가 된다. 생각하건대, 이 길흉의 변개(變改)하는 것 또한 나의 경시(更始)의 단서이다. 한 사당에 함께 오르니 고맙게도 정의와 예문에 결함이 없고, 사방에서 다 같이 경하하는데, 어찌 유교(諭敎)를 늦추겠는가? 바야흐로 환한(渙汗)040) 의 소식을 펴고, 또 사유(肆宥)의 은택을 베푼다. 이 달 초열흘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사면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資級)씩 올리되, 자궁(資窮)041) 된 자는 대가(代加)042) 하도록 하라. 아! 마음은 끝이 없지만, 예의는 절도가 있어야 하니 대효(大孝)의 근원을 높여야 될 것이고, 간 것은 반드시 되돌아오고 느끼면 서로 통하는 법이니 유신(維新)의 변화를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하였다.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9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註 035] 태사(太姒) :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註 036] 선인 황후(宣仁皇后) :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후(后). 철종(哲宗)의 섭정(攝政)이 되어 왕안석(王安石) 등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을 써서 원우(元祐)의 치적(治績)을 쌓았음. 여자 가운데 요순(堯舜)이라 칭송됨.[註 037] 갱장(羹牆) : 경모(敬慕)하여 추념하는 일.[註 038] 침묘(寢廟) : 종묘(宗廟).[註 039] 열조(烈祖) : 공이 높은 선조.[註 040] 환한(渙汗) : 칙명(勅命).[註 041]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의 품계(品階)로서는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된 것. 곧 당하 정3품(正三品)이 된 것을 말함.[註 042] 대가(代加) : 품계(品階)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 아들·사위·동생이나 조카들에게 대신 품계를 올려 주던 일.
2월 11일 을미
이익상(李翊相)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한범제(韓范齊)를 헌납(獻納)으로, 엄집(嚴緝)·박태만(朴泰萬)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2월 12일 병신
구일(具鎰)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구일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취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여러 차례 이 직임에 있으므로 물정(物情)이 불쾌해 하였다.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가 아뢰기를,
"경상도 관찰사 이규령(李奎齡)·전라도 관찰사 이세화(李世華)는 부처가 땀을 흘린다는 일로써 서로 잇따라 치계(馳啓)하였는데, 부처는 금이나 주석으로 주조한 것이므로, 음습한 기운이 어리면 물방울이 맺히는 것은 이치로 보아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어찌 혈기(血氣)를 가진 것과 같이 보아서 반드시 땀을 흘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변(異變)이라 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상문(上聞)을 하는가 하면, 치도(緇徒)의 거짓말을 사실화하여 세속에서 놀라고 의혹하는 단서를 만들었으니,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13일 정유
달이 귀성(鬼星)의 동북성을 범하였다.
부묘 도감(祔廟都監) 관원에게 시상을 하였는데, 차등을 두었다.
2월 14일 무술
임상원(任相元)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홍적(李弘迪)을 집의(執義)로, 서문중(徐文重)을 도승지(都承旨)로, 신엽(申曅)을 승지로, 김창협(金昌協)을 수찬(修撰)으로, 유명일(兪命一)을 사간(司諫)으로, 심평(沈枰)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16일 경자
동부승지 신엽이 아뢰기를,
"오상유(吳尙遊)는 곧 죄인 오시수(吳始壽)의 아들로서, 본디 조신(朝紳)의 반열에 두는 것조차 부당합니다. 그런데 세초(歲抄)043) 가운데 섞어 기록하여 마치 아무일이 없었던 조사(朝士)가 규례에 따라 응당 서용(敍用)된 것과 같이 한 바가 있으니, 보고 듣는 사람으로서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계사(啓辭)는 참으로 그러하나,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부묘례(祔廟禮)를 마치고 사면이 끝나자, 이어 세초를 시행하였는데, 오상유가 양계(兩界)의 관기(官妓)를 거느리고 와서 돌려 보내지 않은 일로 해서 일찍이 고신(告身)044) 을 빼앗았다가 이때 와서 직첩을 돌려 주는 속에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2월 18일 임인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조종저(趙宗著)를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19일 계묘
예조 판서 여성제(呂聖齊)가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계해년045) 가을에, 이듬해 봄에 양궁(兩宮)께 진연(進宴)하는 일을 품정(稟定)하였는데, 국가가 불행하여 자성(慈聖)께서 승하하셨으므로, 마침내 설행(設行)하지 못하였으니, 뭇신하의 애통함을 어찌 다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용(國用)이 고갈되었으므로, 평소 양궁(兩宮)에 진연(進宴)하지 못하였고, 또 자의전(慈懿殿)의 주갑(周甲)046) 을 당하여 일시에 진연하려던 뜻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음속에 담긴 그지 없는 슬픔을 비유할 바가 없다."
하였다. 여성제가 다시 아뢰기를,
"지금은 부례(祔禮)도 벌써 지나갔으니, 길일(吉日)을 가려서 설행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일찍이 갑자년047)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수의(收議) 중에서도 부묘(祔廟)를 지낸 뒤에 풍정(豐呈)048) 을 물려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풍정과 진연 중에서 모름지기 다시 품정(稟定)한 뒤에야 거행할 수 있겠지만, 비록 명칭을 품정으로 하더라도 번다한 형식을 줄이고 힘써 절생(節省)을 좇음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풍정으로 정하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자의전의 주갑이 비록 드물게 있는 경사이기는 하나, 진연만 설행하여도 기뻐하면서 두려워하는 심정은 펼 수 있는데, 해마다 기근(飢饉)을 당하고도 풍정을 거행하기까지 하는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뜻이 너무도 없는 것이다. 임금이 비록 반드시 설행하고자 하더라도 신하된 자로서 의당 바르게 깨우쳐야 할 터인데, 이제 곧 아래에서 설행할 것을 청하면서 심지어 송시열을 끌어대어 입증하기까지 하였으니, 특별히 알지 못하겠지만, 송시열의 헌의(獻議)는 다만 국상(國喪) 안에 경축의 예식을 행할 수 없으니, 우선 다른 날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지, 언제 그가 반드시 풍정을 거행할 것을 권하였던 것인가? 여성제는 여기에서 그 실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59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註 045] 계해년 : 1683 숙종 9년.[註 046] 주갑(周甲) : 회갑(回甲).[註 047] 갑자년 : 1684 숙종 10년.[註 048] 풍정(豐呈) :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신하들이 임금에게 물건을 바치던 일. 《세종실록(世宗實錄)》 제1권에, "국속(國俗)에 임금에게 음식을 차려 바치는 것을 풍정이라 한다." 하였음.
사신은 논한다. "자의전의 주갑이 비록 드물게 있는 경사이기는 하나, 진연만 설행하여도 기뻐하면서 두려워하는 심정은 펼 수 있는데, 해마다 기근(飢饉)을 당하고도 풍정을 거행하기까지 하는 것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뜻이 너무도 없는 것이다. 임금이 비록 반드시 설행하고자 하더라도 신하된 자로서 의당 바르게 깨우쳐야 할 터인데, 이제 곧 아래에서 설행할 것을 청하면서 심지어 송시열을 끌어대어 입증하기까지 하였으니, 특별히 알지 못하겠지만, 송시열의 헌의(獻議)는 다만 국상(國喪) 안에 경축의 예식을 행할 수 없으니, 우선 다른 날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었지, 언제 그가 반드시 풍정을 거행할 것을 권하였던 것인가? 여성제는 여기에서 그 실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2월 21일 을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주역(周易)》을 강하는데, 검토관(檢討官) 강현(姜鋧)이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누누이 진계(陳啓)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이 말을 애완(愛玩)하면서 늘 척념(惕念)을 더하였는데, 이제 마땅히 더욱 공부에 힘쓰겠다."
하였다. 입시(入侍)한 무신 이세선(李世選)이 막 북로(北路)에서 돌아왔는데, 임금이 북로의 사정을 물으니, 이세선이 대략 대답하자, 임금이 밖에 나가서 글로 써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세선이 드디어 글로 써서 올렸는데, 착실하게 시행할 만한 말의 뜻은 별로 없었다.
2월 22일 병오
엄집(嚴緝)을 집의(執義)로, 홍만종(洪萬鍾)을 승지(承旨)로, 윤빈(尹彬)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청대(請對)하여 민정중이, ‘윤세희(尹世喜)·최석항(崔錫恒)에게 오래도록 서용(敍用)하라는 명을 아끼는 것이 편벽되다.’고 아뢰고, 도승지 서문중(徐文重) 또한 그렇게 말하니, 임금이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숙이 말하기를,
"후주 첨사(厚州僉使)를 차출하지 않고 아직까지 가장(假將)으로 대신 지키게 하는 것은 일이 매우 허술합니다. 혁파하든가 그대로 두든가 속히 결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민정중에게 물었는데,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북로를 안찰하여 그 형세를 자세히 아는데, 백성들은 정장(呈狀)하여 설치를 원하는 자가 많지만, 월경(越境)을 범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들어주지 못하였습니다. 듣건대, 조계원(趙啓遠)이 안찰사로 나갔을 적에도 가서 지형을 살펴 보았지만, 또한 몰래 산삼을 채취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여 끝내 다시 설치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여러 대신에게 두루 물어 보았는데, 파하는 것이 좋다고 많이 말하였으나, 유독 좌의정만이 버티며 아니된다고 하였다. 이제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진달한 것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 서문중이 말하기를,
"신의 뜻도 파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이숙으로 하여금 판중추부사 정지화(鄭知和)·이상진(李尙眞)에게 문의하여 속히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2월 25일 기유
이국방(李國芳)을 장령(掌令)으로, 민진주(閔鎭周)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2월 27일 신해
정재희(鄭載禧)를 대사헌(大司憲)으로, 박세채(朴世采)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세기(尹世紀)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예조에 명하여 빈어(嬪御)를 간택하도록 하였다. 이때 임금이 오랫 동안 저사(儲嗣)049) 가 없어서 위아래가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상기(喪期)를 마치자 뭇사람의 바람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또 중궁(中宮)이 여러 차례 권유하므로, 임금이 빈어를 두기로 한 것이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조종조(祖宗朝)에서 반드시 후궁을 간택한 것은 대개 저사를 넓히려는 까닭이었다. 오늘날 숙의(淑儀)050) 가 미비한 것은 옛 제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내전(內殿)도 일찍이 이 뜻으로써 누누이 진청(陳請)하였으니, 그 말도 또한 사의(事宜)에 합당하므로, 마땅히 간택의 거조가 있어야 할 듯하다.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판중추부사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오늘날 신민(臣民)이 밤낮으로 크게 바라는 것은 오직 저사가 일찍 탄생하는 데에 있는데, 불행스럽게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국가의 절박한 걱정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성교(聖敎)는 고례(古禮)로써 헤아려 보고 조종의 제도로써 참고하여 보아도 모두 의거할 만한 바가 있으니, 이의(異議)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대 제왕들이 후궁을 많이 간택하여도 마침내 저사가 반드시 많았던 것만은 아니니, 더러 어색(漁色)051) 의 기롱을 면치 못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성명(聖明)에게 있어서는 만에 하나도 염려할 것은 아니나, 다만 염려되는 것은 성체(聖體)가 아직도 건강하지 못하셔서 성후(聖候)가 늘 편치 않으시니, 미연(未然)의 복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말하기 어려운 해를 끼칠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우애(憂愛)하는 정성 이를 데 없어서 참망(僭妄)스런 말씀이 이에 이르렀으나, 오직 성상께서 스스로 헤아려 잘 처리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은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기업(基業)이 공고하자면 오직 본손과 지손이 백세를 누려야 하는데, 이처럼 어렵고 위태한 날을 당하여 진위(震位)052) 가 오래도록 비어 있으니, 신민의 절박한 걱정이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 성교(聖敎)가 반드시 이러한 데서 나왔다면, 이는 조종의 옛 제도뿐만 아니라, 고례(古禮)로 논하더라도 그 누구가 불가(不可)하다 하겠습니까? 한 번에 부덕이 갖춘 자가 간택되면 오히려 혹 가(可)하다 하겠지만, 지금 성상께서 춘추가 바야흐로 성년(盛年)이어서 여색을 경계함에 있으므로, 실은 뭇신하들이 모두 깊이 염려하는 바이니, 성상의 고명하신 학문으로 종묘 사직의 무거운 부탁을 생각하신다면, 성궁(聖躬)을 보호하시는 도리에 있어 반드시 조금도 소홀히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은 아뢰기를,
"여러 대신이 아뢴 바는 벌써 옛 경전(經典)과 옛 제도에 의거하고, 또 지나친 걱정과 깊은 경계로써 거듭 아뢰었으니, 참으로 전하께 충성이 지극하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건대, 성교(聖敎)가 실로 뜻을 둔 데가 있고, 원래 빈어를 많이 두자는 의도가 아니라면 참작하여 잘 처리하셔도 또한 불가(不可)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은 아뢰기를,
"지금의 성교가 실로 종묘 사직의 대계에서 나왔다면 무릇 뭇신하의 성상을 축하하는 마음에 있어 그 누가 불가(不可)하다고 하겠습니까? 단지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국가의 화복(禍福)의 단서가 혹은 빈어를 넓히려는 데 있다고 하나,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묵묵한 보우(補祐)로 세자의 탄생을 거의 바라볼 수 있다면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대신의 진계(陳戒)한 말은 지극하다 할 만하다. 다만 나의 생각은 후사가 점점 늦추어지는 것을 염려해서이지, 본시 후궁을 많이 간택하려는 계획은 아니다. 마땅히 다시 요량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수일 후에 임금이 연석(筵席)에 나와 하교(下敎)하기를,
"여러 대신들의 경계하는 뜻이 간절하고 지극하므로, 다시 요량을 더하겠다고 전교한 바 있다. 이래저래 생각하여 보건대, 나의 나이 장차 30인데, 아직도 후사가 없는 것은 하루 이틀 미루다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부탁을 생각할 적마다 자신도 모르게 한밤에 한숨을 쉬게 되고, 혹시 병을 앓을 적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갑절 간절하였다. 당초 선택의 명도 빈어를 많이 두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참으로 국가의 대계를 위한 것이었다. 내가 무오년053) 에 큰 병을 앓은 뒤로는 조섭(調攝)의 경계를 삼가하여 일찍이 조금도 늦춘 적이 없었으니, 비록 대신의 진계(陳戒)하는 말이 없다 하더라도 내 어찌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겠는가? 이는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니, 예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인조조(仁祖朝)에서 장귀인(張貴人)을 간택하던 때의 일을 상고해 내도록 명하였는데, 춘추관(春秋館)에서 실록을 상고해 보아도 나오는 곳이 없다고 아뢰니,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내간(內間)에 있는 고사를 가져다 보니 조종조에서 숙의(淑儀)를 간택할 때의 처자 단자(處子單子)는 다만 음관(蔭官) 및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儒學)에게만 받들게 하였고, 또 인조 때의 궁인(宮人)에게 물었더니, 삼간택(三揀擇)한 날에 별궁에 나가 있게 하였다가, 한 달이 된 뒤에 입궐시켰다고 한다. 모든 것을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9일 계축
교리 서종태(徐宗泰)가 상소(上疏)하여 진학(進學)과 입지(立志)로써 누누이 진계(陳戒)하고, 이어 시폐(時弊) 9조를 열거하기를,
"1. 내치(內治)를 엄숙히 하여 궁금(宮禁)을 단속하는 일입니다. 가만히 듣건대, 근일 항간의 말이 궁중에 흘러들지 않은 것이 없다 하니, 바깥에서 한 말이 이미 들어갔다면 안에서 한 말이 어떻게 전파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보건대, 설어(暬御)·근습(近習)의 무리들이 모시면서 받들어 인도할 즈음에 엄숙하고도 공경하는 태도가 퍽 휴손되어 있고, 전하의 너그러운 표정 또한 너무 관용하시는 듯합니다. 은총의 길을 열어 업신여김을 당하는 조짐은 깊이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치체(治體)를 세워서 통기(統紀)054) 를 밝히는 일입니다. 오늘날 궁중과 관부의 안팎이 판연하게 두 길로 갈라져서 미세한 것까지도 상청(上聽) 관유(關由)를 띄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보필하는 정승이 단지 문서와 전례(典例)에만 힘쓰는 사이에 치밀한 곳은 너무 치밀하고 소홀한 곳은 너무 소홀하게 됩니다. 원하건대, 먼저 그 체통을 세워서 임무를 맡기고 그 성과를 다지소서.
1. 은택(恩澤)을 아껴서 재용(財用)을 절약하는 일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귀근(貴近)한 집에 하사를 하시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척리(戚里)와 부마(駙馬)의 예장(禮葬)이 지나치게 중첩되는데도 금석(金石)의 법전대로 않는 것이 허다하고, 전물(奠物)의 하사도 너무 어지러우며, 의문(醫問)의 명이 주가(主家)의 어린 손자에게까지 미치는가 하면, 약물의 급여가 종전의 갑절이나 됩니다. 원하건대, 일체 정지하고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1. 집수(執守)055) 를 굳게 하여 건강(乾剛)056) 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무릇 정무와 계획에 있어서 입대한 여러 신하가 한 가지 일을 가지고 그것이 적당하다고 말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면 전하께서 이미 윤허하셨다가, 그 뒤에 그것이 적당하지 못하다고 말하여 고치기를 청하면 전하께서 또 윤허하십니다. 어찌하여 그 이해[利病]와 편부[便否]를 당초에 잘 헤아리지 못하고 일정한 주간을 굳게 잡지 않으셔서, 그 정령(政令)으로 하여금 백성에게 믿어지지 않게 하십니까?
1. 호오(好惡)를 공정히 하여 조정 분위기를 화목하게 하는 일입니다. 보건대 오늘날 조정의 논의가 결렬된 것은 처음에 노성(老成)한 선진(先進)과 연소(年少)한 사류(士流)들의 주장하는 의논이 각기 다름으로 인해 감정과 의사가 서로 막히게 되자 갈수록 격화되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성명(聖明)의 호오가 치우치고 의노(疑怒)가 앞서므로, 조회를 하는 자리에서 혹은 남의 흠을 지적하여 문득 주상께 계문하게 되어 주상의 윤허하시려는 길을 막고 공론의 불쾌한 사단을 일으킵니다. 신은 참으로 이를 개탄하는 바입니다.
1. 언로(言路)를 넓혀서 직기(直氣)를 기르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대각(臺閣)이 군상(君上)의 잘못은 말하기 쉬워하면서도 재상의 과실을 논하기는 어려워하니, 군상의 잘못을 말한 죄는 가벼워서, 군덕(君德)의 결함을 논할 것 같으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간하는 말에 따르지도 않았습니다만 또한 중벌을 가하지도 않으시나, 그 말이 한번 재상에게 미칠 것 같으면 그 죄가 매우 무거워서 오래도록 서용(敍用)되지도 않고 정로(政路) 또한 막혀버립니다. 예컨대 근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補)·김석(金晳)·최석항(崔錫恒)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기가 떨어져서 매번 뒤돌아보고 두려워하니, 늘 포상을 권장하여도 오히려 말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꺾고 저지함이 이와 같으니 누가 다시 허리를 펴고 목을 들어서 전하를 위하여 할 말을 다 하겠습니까?
1. 관방(官方)057) 을 신중히 하여 명기(名器)를 소중히 하는 일입니다. 근래 사람을 선발해 쓰는 것이 순서가 없고 관방이 맑지 않아서 수십 년 전과 비교할 때 그 규범이 크게 어그러지고 있습니다. 관계(官階)가 통정(通政)058) 이면 은대(銀臺)059) 와 곤얼(閫臬)060) 을 당장 역임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는 선발을 신중히 하는 뜻이 황폐된 것이며, 시험을 거쳐야 하던 길이 끊어진 것입니다. 근래의 일을 들어 말하더라도 지신사(知申事)는 그 직임이 긴요하여 선발을 신중히 해야 하는데도 관자(官資)는 가당하나 성망(聲望)이 걸맞지 않은 자를 서둘러 의망(擬望)에 넣었고, 【이유(李柚)를 가리킨다.】 대사간(大司諫)은 더욱 높은 선발로 불리는데도 앞질러 후쇠(朽衰)한 자를 뽑았으며, 【황윤(黃玧)을 가리킨다.】 각 갈래로 조용(調用)하는 것이 해마다 더해지고 달마다 불어나서, 내외 각 군문(軍門)의 오래 근무한 자와 의복(醫卜)·방기(方技)·잡술(雜術)의 무리들까지도 6품에 오르지 않는 자가 없어서, 다 같이 벼슬길이 트였으나 이들은 이미 군현(郡縣)에 수령으로 나갈 수도 없고, 또 옮길 만한 다른 길도 없어서 여기에서 임기가 차면 저기로 서로 바꾸니, 각 관사마다 쌓이고 넘쳐온 것이 벌써 여러 해입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일체 아울러 사정(査正)하도록 하소서.
1. 탐오(貪汚)함을 바로잡아서 민곤(民困)을 푸는 일입니다. 근래 안으로는 경재(卿宰)의 반열에서 관절(關節)061) 이 공공연히 행해져서 뇌물 보따리가 낭자하게 오가고, 밖으로는 관찰사와 수령이 오로지 사욕만을 일삼아서 짐바리가 이어지는가 하면, 곤수(閫帥)062) 및 각 아문의 둔장(屯將) 무리까지도 더욱 방종하여 군민(軍民)에게서 박탈하여 크게는 집을 일으키고 작게는 재산을 늘리며, 또 그 한가한 틈을 타고 권귀(權貴)한 자의 집에 몰려가서 영진(榮進)할 계책을 하니, 이는 다 민생의 고혈(膏血)입니다. 백성이 어떻게 곤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국가가 팽아(烹阿)의 솥063) 을 설치하지 않아서 간혹 적발이 되어도 가벼운 귀양에 그치고, 중론(衆論)이 다 같이 아는 자일지라도 청직(淸職)에 버젓이 발탁되면, 이에 저촉되었다 하여도 누(累)로 여기지 않으니 무슨 방법으로 징계하고 두려워하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장률(贓律)을 거듭 엄중히 하고, 또 청백리(淸白吏)를 뽑도록 명하시어 이를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소서.
1. 염희(恬嬉)064) 를 경계하여 서적(庶績)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우리 나라 선비의 기풍이 본래 부화(浮華)한 면이 많은데 근일에 이르러 그 폐단이 더욱 심해져서 대관(大官)이나 소관(小官)이나 모두 그 세월만 허비하며, 잠시의 회합으로 문서나 조금 정리하고는 물러가 처자들을 상대로 느긋하게 스스로의 편의를 취한 채 나라일은 다시 생각에 두지 않으며, 또 놀이와 잔치를 다투어 숭상하고 사치가 풍조를 이루어 토목의 공사를 수없이 일으켜서 높은 제택에다 깊은 못들을 파곤 합니다. 이것이 비록 뭇신하들의 죄이기는 하나, 신은 성명(聖明)의 여정(勵精)에 부족함이 있어서 위에서 경계하지 못함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가만히 들으니 근일 정사에 근면하심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서 공사(公事)를 돌려서 내리실 때마다 지연된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도록 뭇신하들을 신칙하여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는 풍습을 통렬히 개혁토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곡한 경계와 가르침이 절실하고 지극한 논의가 아닌 것이 없다. 너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그 성의가 매우 가상한지라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느냐? 소(疏) 가운데에서 지적한 각 갈래의 외람되고 잡스런 것들을 혁파하라는 한 조항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겠다."
하였다. 이조에서 그 일이 관방(官方)을 변통하는 데 관계된다 하여 묘당(廟堂)과 의논하기를 청하니, 묘당에서 복주(覆奏)하여 청하기를,
"이제부터 서울 각 관사(官司)의 당하관으로서 임기가 찬 자는 임기가 찬 수령(守令)의 규례에 의거하여 개차(改差)하고, 녹사(錄事)·산원(算員)·율관(律官)의 무리는 그 재예(才藝)를 일컬을 만한 자를 가려서 조용(調用)하여 부추겨 권장할 수 있는 바탕으로 할 것이며, 삼의사(三醫司)065) 의 잡직은 본 아문(衙門)의 6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에게 동서반의 실직(實職)을 제수하되, 이때에 모두 처음 입사(入仕)한 예에 따라 일일이 수교(受敎)066) 에 의거하여 시행케 하고, 또 그 가운데 품수(品數)에 따라 벼슬자리를 옮기는 자는 옛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며, 각 군문(軍門)의 오래 근무하여 자리를 옮겨야 할 자는 도목정(都目政)을 임시하여 시재(試才)나 시강(試講)을 시행하여 그 가운데 인품이 용잡(庸雜)하고 문벌이 비천(卑賤)한 자는 해조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서 취하거나 버리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30일 갑인
신완(申琓)을 도승지(都承旨)로, 박치도(朴致道)를 승지(承旨)로, 김만채(金萬埰)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4월 (0) | 2025.11.17 |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3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1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6권, 숙종 11년 1685년 12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6권, 숙종 11년 1685년 11월 (0) | 2025.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