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8권, 숙종 13년 1687년 2월

싸라리리 2025. 11. 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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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기유

정언(正言) 이익수(李益壽)가 감찰(監察) 이담(李橝)을 도태시키자는 의논을 맨먼저 내놓은 것 때문에 옥당(玉堂)의 비난을 받게 되자, 차자(答子)를 올려 논하고 인피(引避)하려고 하니, 장령(掌令) 안규(安圭)가 처리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이담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이었는데, 이러한 탄핵이 나오자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2월 2일 경술

이숙(李䎘)을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창협(金昌協)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이홍적(李弘迪)을 집의(執義)로, 이진휴(李震休)를 지평(持平)으로, 임상원(任相元)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돈(李墩)을 사간(司諫)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좌참찬(左參贊)으로, 윤계(尹堦)를 판윤(判尹)으로, 이선(李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김만길(金萬吉)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박태보(朴泰輔)·민진주(閔鎭周)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삼았다.

 

좨주(祭酒) 박세채(朴世采)가 별유(別諭)를 받든 뒤에 상소하여, 지난해에 올린 ‘성(誠)’ 이라는 한 글자에 대한 뜻을 추연(推衍)하고 반복해서 논설(論說)하여 임금의 덕(德)에 관해 권면하고 경계하니, 답하기를,
"매우 간절하고 지극한 말인데,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3일 신해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호남(湖南)의 흉년이 다른 도(道)보다 가장 비참함을 많이 진달하고, 전세(田稅)와 대동(大同)을 본도(本道)에서 받아 두었다가 진제(賑濟)할 물자에 보충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흉년임을 들어 여러 도(道)의 병인년018)   조의 각가지 신포(身布)로서 바치지 못한 것을 받지 말고, 추수(秋收)하기를 기다렸다가 시가(市價)대로 각기 그 고을에 쌀로 바치도록 하여 진제할 물자에 보충하게 하고, 보리가 익은 뒤에는 또한 보리로 바치도록 하며, 그 대신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묵은 저장 곡식을 옮겨 주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바친 것과 본고을에 받아 두고 있는 것 이외에 아직 받지 못한 수를 자세히 물어보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대제학(大提學) 남용익(南龍翼)은 네 차례나 소비(疏批)019)  를 받들고도 아직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앞서의 천망 단자(薦望單子)에 의해 낙점(落點)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용익은 젊어서부터 문망(文望)을 지니어 호당(湖堂)020)  에 뽑히게 되고 여러 차례 제학(提學)을 지냈으며 문형(文衡)021)  으로도 권점(圈點)을 받았었으니, 이번의 제배(除拜)는 진실로 여론(輿論)에 맞는 것입니다. 선조(先祖)에서도 또한 복상(卜相)022)  을 앞서의 천망 단자에 의해 낙점한 일이 있었는데, 또한 즉시 공사(公事)를 시행하였었습니다. 문형은 비록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복상보다 더하기야 하겠습니까?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引嫌)하는 것은 합당치 않으니, 패초(牌招)하여 소임을 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옥당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승지(承旨) 신계화(申啓華)가 아뢰기를,
"송(宋)나라 고종(高宗)이 비록 조종(祖宗)들의 그전 강토를 수복하지는 못했었지만, 그래도 또한 강남(江南)에서나마 그런대로 안정되어 1백여 년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명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홍광(弘光)023)  이 남도(南渡)024)  한 다음에는 산산히 무너지고 이산(離散)하여 한 쪽의 강남도 또한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공이 있는 분이다. 임진년025)  에 판탕(板蕩)026)  했을 때를 당해 만약 신종 황제가 천하의 군사를 출동하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우리 나라가 재조(再造)하여 오늘이 있게 되었겠는가? 명나라 조정이 시급히 망하게 된 것은 동정(東征)을 하였기 때문이 아닐 수 없는데, 우리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여 이미 복수(復讎)하여서 치욕을 씻지도 못했고 홍광(弘光)이 남도(南渡)한 이후로는 또한 아득하여 존망(存亡)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적마다 일찍이 개탄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자, 신계화 및 옥당의 관원 김구(金構)·송주석(宋疇錫)이 일제히 아뢰기를,
"성상의 생각이 이에 미치시니, 우러러 받들게 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2월 4일 임자

최규서(崔奎瑞)를 헌납(獻納)으로, 최석항(崔錫恒)·이제민(李濟民)을 정언(正言)으로, 김만길(金萬吉)을 부응교(副應敎)로, 홍수헌(洪受瀗)을 교리(校理)로, 황흠(黃欽)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현도 봉장(縣道封章)027)  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열성(列聖)께서 뜻하셨던 일을 가지고 한번 전하(殿下)의 앞에 진달하여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계달(啓達)하고 싶으면서도, 이는 경복(更僕)028)  하더라도 끝낼 수 없는 일이요, 또한 한편으로는 청문(聽聞)을 번독(煩瀆)하게 되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했었습니다. 마침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經筵)에 임(臨)하시어 한탄하시면서 말씀이 만력 황제(萬歷皇帝)029)  의 훌륭한 덕에 미치셨다고 하니, 이는 바로 비풍(匪風)과 하천(下泉)030)  이 변풍(變風)의 끝에 있게 되고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면 다스려지기를 생각하게 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신같이 미천한 자가 일찍이 효종(孝宗)의 너그럽고 은밀한 부탁을 받았었으니, 어찌 울부짖으며 눈물을 뿌려 위로 성상의 뜻을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늙은 소와 같은 몸이라 채찍질을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그날 경연의 신하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고사(故事)를 다 말씀드리지 못했기에, 청컨대 신(臣)이 진달해 보겠습니다.
옛적에 은(殷)나라 태사(太師)031)  가 동쪽으로 오게 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황극(皇極)032)  의 도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고려(高麗) 말엽에 와서는 정몽주(鄭夢周)가 나와서 용하변이(用夏變夷)033)  하여 대의(大義)를 밝게 내걸었었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더욱 존주(尊周)034) 하는 대의(大義)를 주창하시어 온화 낙맥(溫禾洛麥)035)  같은 것도 오히려 감히 손대지 않으셨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피발 좌임(被髮左衽)을 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래로 본조(本朝)의 역대 임금들께서 대대로 충정(忠貞)을 독실하게 지켰고, 따라서 황상(皇上)의 돌보아줌을 받아 내복(內服)036)  과 같이 돌보아주게 되고 석뢰(錫賚)037)  도 또한 많아졌었습니다. 임진년038)  의 난리를 당해서는 팔도(八道)가 탕진되어 온나라 민생들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었는데, 다행히도 황상이 이를 듣고 발끈 화를 내어 온천하의 군사를 출동하고 온천하의 재물을 털어내어, 천위(天威)가 겹겹으로 진동하게 됨을 힘입어 흉악한 추왜(醜倭)들이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었습니다. 정유년039)  에 이르러 흉악한 칼날이 재차 날뛰게 되어서는, 우리 나라의 외롭게 남아 있는 백성으로서 어떻게 적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국가의 멸망이 만에 하나라도 바랄 것이 없게 되었었는데, 다시 황제(皇帝)가 마음 아파하며 불쌍하게 여기고서 재차 천병(天兵)을 출동하여 흉악한 무리들의 칼날을 쓸어내어 줌을 힘입어, 하늘이 맑아지고 땅이 안정되어 종사(宗社)가 편안해지고 민생들이 소생하게 되었었습니다. 무릇 우리 나라는 한 가지 털끝만한 것에서부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황제의 덕을 입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비록 무식한 상놈[常漢]이라 하더라도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죽도록 보답하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은혜를 생각하고 덕에 감사하며 힘을 다해 보답하려고 생각하심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찍이 서쪽을 등지고는 앉지도 않으셨고, 또한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대자(大字)로 써서 사모하는 성의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광해조(光海朝)에 이르러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가 심하(深河)에서 오랑캐에게 투항(投降)하였을 때를 당해서는 밀지(密旨)가 있다고 했었으니, 만일 그때에 김응하(金應河)가 전사(戰死)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천하에 해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목 대비(仁穆大姬)께서 광해군(光海君)의 죄상을 열거하기에 미쳐 밀지에 관한 일이 하나의 큰 제목(題目)이 되었었으니,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신 일은 더욱 천하에 광채가 있게 된 일입니다. 불행히도 정묘년040)  의 변(變) 때에는 일의 형세가 위태하고 급박하게 되어서 드디어 오랑캐와 강화(講和)했었는데, 만일 그때에 윤황(尹煌)·윤형지(尹衡志)같은 여러 신하가 없었더라면 또한 성조(聖朝)에 대해 해명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강화가 성립된 뒤에 즉시 주문(奏文)을 마련하여 중국 조정[天朝]에 사과하자, 황상(皇上)이 불쌍하게 여기며 도리어 가장(嘉奬)하는 조서를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조공(朝貢)하는 길을 해로(海路)로 바꾸게 되고 우대(優待)하던 뜻도 그만 달라지게 되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로부터 다시 황화(皇華)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불손(不遜)한 말이 광해군의 입에서 나와, 강화를 주장하던 여러 신하들이 스스로 모면하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仁祖)께서 특지(特旨)로 강화를 배척하던 유생(儒生) 윤명은(尹鳴殷)에게 관직을 제수했었으니, 거룩하신 뜻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때에 난(亂)을 피해 온 사람 모문룡(毛文龍)이 가도(豭島)에 와 있으면서 징색(徵索)을 한없이 하고, 또한 본조(本朝)를 중국 조정에 참소했었는데도, 인조께서 왕인(王人)041)  이라 하여 성의로 대우하기를 시종 변함없이 하셨고, 이 왕인(王人)이 섬 안에서 살해되자 시급하게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죄를 발표하고서 토벌하려고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했었습니다. 아! 인조께서 중국 조정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순종하기를 지극하게 하셨다 하겠습니다. 이 뒤부터 10년 동안은 오랑캐들의 공갈과 협박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었는데, 인조께서 항상 힘이 약해 떨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나라와 죽게 될지언정 의리는 마땅히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야 한다.’ 하시어, 성지(聖志)의 굳게 정해져 있음이 이러하셨습니다. 또한 불행하게도 병자년042)  과 정축년043)  의 난(亂)에 사리가 궁하고 힘이 꺾이어 만부득이 권의(權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아! 더구나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위태하고 급박한 때를 당하여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린 판에 인조께서 오히려 군신(羣臣)들을 거느리고 원조(元朝)에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시고 군신(君臣) 상하가 서로 보며 눈물을 씻었습니다. 강화가 이루어져 도성(都城)으로 돌아올 때를 당해 임금께서 말 위에서 목소리가 막히도록 통곡하시므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아뢰기를, ‘이는 족히 치욕을 씻고 중흥(中興)하게 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했었습니다.
이로부터는 성절(聖節)044)  이 될 적마다 임금께서 혼자 후원(後苑)에서 아무도 몰래 성의와 예절을 펴고 북쪽을 바라보며 비통해하셨는데, 눈물이 비오듯 했었습니다. 금주(錦州)의 전역(戰役) 때에는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여 진달하자, 성상의 마음에 더욱 애통이 절박해져 마치 살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三學士)045)  와 권순장(權順長) 등 삼유생(三儒生)의 죽음과 포수(砲手) 이사룡(李士龍)의 죽음에 있어서는 또한 족히 춘추(春秋)의 의리보다 빛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조정에서 몰래 독보(獨步)를 군문(軍門)에 보냈었고, 개주(盖州)의 전역 때에는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사람을 시켜 물 속으로 헤엄쳐 가서 중국 장수에게 밀통(密通)하여 중국 조정에 전달(轉達)하게 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더욱 본조(本朝)의 심사(心事)를 알게 되었었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 때에 와서는 성상의 마음이 이런 대의(大義)에 있어서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밝으시어, 임어(臨御)046)  하신 첫머리에 맨먼저 문정공(文正公)을 맞이하여 존숭하여 예우(禮遇)하고, 또한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상소에 답하기를, ‘지극한 애통이 마음속에 있는데, 날은 저물어가고 갈길은 멀다.’고 하셨었습니다. 또한 지금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臣) 민정중(閔鼎重)에게 사대(賜對)하여 강개(慷慨)하게 일을 논하시면서 거의 눈물을 흘리시게 되었었으니, 만일 하늘이 성상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면 비록 중국을 청소해내지는 못하셨더라도 관문(關門)을 닫아버리고 조약(條約)을 거절하는 일은 넉넉히 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선대왕(先大王)에 있어서는 비록 수성(守成)을 위주로 삼으셨으나, 이사룡(李士龍)의 아들을 포장(褒奬)하여 임용하고 강효원(姜孝元)의 자손을 속량(贖良)한 것을 가지고 본다면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깊은 어지심과 높은 의리가 이와 같이 지극했는데도, 본조(本朝)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한 제갈양(諸葛亮)047)  ·이강(李綱)048)  과 같이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신하들이 없어 죽음을 다 해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보답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만 도리어 원망으로 덕을 갚는 짓을 하게 되었으니, 온나라 신민(臣民)이 어떻게 천지 사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이래로는 가뭄과 홍수, 일식과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재변이 달마다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개 천리(天理)가 없어지고 사람의 양심이 없어지고서야 어떻게 천심(天心)을 대접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오랑캐인 원(元)이 중국에 들어가 주장할 때 누린내나는 살육을 일삼는 종류로서 요순(堯舜)과 문무(文武)의 강토를 더럽히고 어지럽혔으니, 이는 진실로 천지의 큰 변이고 고금에 없더 역덕(逆德)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때 하늘이 내리는 재변을 이루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의 추한 오랑캐 갈이(羯洟)의 성질은 호원(胡元)보다도 심한 것인데, 오래 신주(神州)를 차지하고 있으니, 미워하는 하늘의 위엄이 어찌 극도에 달하지 않게 되겠습니까? 듣건대 참혹한 이변(異變)이 호원(胡元) 때보다도 심하다는데, 우리가 그들과 서로 성식(聲息)을 통하게 되었으니, 그 여파가 미치게 될 것은 괴이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우리는 이처럼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니, 오직 통분함을 참고 원통함을 품으면서 급박하여 어찌할 수 없다는 마음을 속에 두고서 편하려는 생각을 짐독(鴆毒)처럼 경계하고 근검(勤儉)하는 착실한 덕을 쌓아가되, 한결같이 우리 백성을 보호하는 것과 힘써 선(善)을 행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 우리의 힘을 기르면서 저들의 틈이 생기기를 기다린다면, 하늘이 혹은 우리 소원을 이루어 주게 되지 않겠습니까? 병자년049)  과 정축년050)  에서 지금까지는 이미 50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에 생겨난 사람들이 이미 늙어서 죽게 되었고 보면, 황명(皇明)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비록 허형(許衡)과 같은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으로서도 오히려 송(宋)나라 제왕이 정통(正統)임을 알지 못하고 호원(胡元)에게 복종하여 섬겼으니, 하물며 한 쪽에 있는 나라인 우리 동방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에서 부여받은 병이 지성(秉彝之性)051)  은 같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이기에, 오늘날의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조상들이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은덕을 입음으로써 자신들의 몸이 있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된다면, 감사하게 여기며 보답하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듯 할 것입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이 내려 준 성인(聖人)으로서 힘쓰는 것이 천성(天性)을 다하고 인륜(人倫)을 다하는 일이니, 이번에 그러한 덕음(德音)을 경연(經筵)에서 발하신 것은, 어찌 천리가 밝아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잡아지게 될 하나의 큰 관건(關鍵)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한갓 마음에만 두고 있고 그만한 일을 해가지 않는다면, 도선(徒善)052)  은 정치(政治)가 될 수 없는 법이어서 헛된 명성에 따르는 실지의 화(禍)가 또한 두려운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조(宣祖)의 만수 필동(萬水必東)053)  을 말한 주문(奏文)을 외시고 인조(仁祖)의 북쪽을 향해 공수(拱手)하신 정성을 본받으시면서, 더욱 성상의 뜻을 가다듬고 더욱 성학(聖學)을 힘쓰시며 더욱 인정(仁政)을 닦고 더욱 무비(武備)를 갖추시어, 우리 성조(聖祖)들의 뜻둔 일을 계술(繼述)해 가소서.
또한 요사이 윤증(尹拯)의 일로 조정의 공론이 분열되고 있는 때, 실지는 허물이 신(臣)에게 있는 것이므로 간단하게 대략을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젊었을 적에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맹자(孟子)의 공이 진실로 우(禹)의 아래에 있지 않고, 주자(朱子)의 공은 또한 더러 더하기도 한다.’ 했었습니다. 대개 주자가 아니었다면 요순(堯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도(道)가 천하 후세에 밝아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로부터 주자(朱子)의 학문을 존신(尊信)했었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유현(儒賢)이 배출(輩出)되어 존경하며 행하고 익히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 이르러서는 또한 더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윤휴(尹鑴)란 사람이 당초부터 이황·이이의 말을 배척하고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들어서 말하지 않았으며, 성설(成說)054)  을 저술하여 신(臣)에게 보냈기에 신이 깜짝 놀라며 책망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며 신더러 무엇을 알겠느냐고 했었습니다. 이미 주자의 주설(註說)을 옳지 않다 하여 반드시 자기의 소견대로 바꾸어 놓았고, 《중용(中庸)》에 대해서는 장구(章句)를 없애버리고 자신이 새로 주(註)를 만들어 그의 무리들에게 주었습니다.
또 그가 종말에는 자신의 말을 저술하여 자신을 공자(孔子)에게 비하고 염구(冉求)055)  를 주자로 쳐놓아, 그가 시종 패류(悖謬)한 짓 하기를 이에 이르도록 했으니, 세상의 도의(道義)에 해가 됨이 심하였습니다. 한때의 소위 고명하다는 사람들이 그에게 중독(中毒)되었고,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더욱 심한 사람입니다. 윤선거는 곧 문간공(文簡公)의 외손(外孫)이어서 그 학문이 반드시 올바를 것인데도 지금 이러하므로, 그를 본받아 윤휴에게 투합하는 사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으니, 바로 고영(顧榮)과 하순(賀循)이 진(晋)나라로 돌아가자 강동(江東) 사람들이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056)  과 같은 일입니다. 신(臣)이 처음에는 자신을 망각하고 윤휴를 배척하다가 이제 와서는 또한 윤휴를 놓아 두고 윤선거를 배척했습니다. 성내에 다투는 신(臣)의 성질로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어찌 과격하게만 되었을 뿐이겠습니까? ‘윤휴는 곧 사문 난적(斯文亂賊)이고, 공(公)은 곧 당여(黨與)로서 주자를 배반한 사람이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당여부터 다스렸으니, 왕자(王者)가 나오게 된다면 마땅히 공이 윤휴보다 먼저 법에 걸리게 될 것이다.’ 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사람이 어찌 통분하고 박절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윤증이 신(臣)에게 보낸 편지에 말한 바 ‘통각(通刻)하다.’고 한 것이 곧 그의 진심(眞心)일 것입니다. 또 윤증이 사람들에게 신(臣)을 흉본 것은 모두가 사실을 고찰하여 한 것이고 모함한 것이 아니니, 바로 성인(聖人)이 말한 바인 ‘원망은 정직으로 갚는 것이다.’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가 신(臣)을 흉본 글에는 또한 ‘왕도(王道)의 왕(王)자와 의리(義理)의 의(義)자를 말하기 좋아한다’ 했습니다. 이는 신 자신에게 있어서 어찌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윤증이 신을 지나치게 칭찬한 것이라고 해야 할 일이고 신이 감히 감당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 뒤에 신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히려 ‘선생(先生)’이라고 했고 자신은 ‘문인(門人)’이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어찌 신을 배반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부제학(副提學) 이여(李畬)가 바로 스승을 배반한 것으로 말을 했습니다마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를 어찌 다른 사람이 억눌러 강제로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사헌부(司憲府)의 신하가 전조(銓曹)의 관원을 탁핵하면서도 또한 그런 말을 쓰고 있으니, 신이 진실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지금 신(臣)을 허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찍이 윤선거(尹宣擧)와 동문(同門)의 친구이었으므로 의리와 교분(交分)이 얕지 않을 터인데, 너무도 심하게 배척함은 무슨 일이냐?’고 했습니다. 신이 답변하기를, ‘단지 동문의 의리만이 아니라, 병자년057)   여름에 못된 오랑캐가 참람하게 칭호(稱號)를 자칭할 때를 당해 윤선거가 강개(慷慨)하게 기운을 내어 많은 선비들의 주창이 되어서 오랑캐의 사자(使者)를 베도록 청하여 오랑캐의 사자가 무서워서 도망가게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대사간(大司諫) 윤황(尹煌)은 지난 정묘년058)  부터 존주(尊周)하는 의리를 극력 주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온나라 정기(正氣)가 그 가문에 모였다.’고 여겼었는데, 뜻밖에도 강화(江華)의 변(變) 때에는 그 처신이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兼)·이돈오(李惇五)와 서로 반대되자, 그가 또한 부끄럽고 분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포기하여 다시는 과거도 보지 않고 세로(世路)에는 뜻을 끊고서 유현(儒賢)들을 따라 섬기며 글을 읽고 뜻을 지켜 갔습니다. 그러므로 김집(金集)이 그의 새로워짐을 허여(許與)하고 그의 과거는 생각하지 않았고, 신(臣) 또한 ‘두려운 벗으로 여겨 서로 신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불행히도 윤후(尹鑴)에게 중독(中毒)되어 그만 딴 사람이 됨으로써 세도(世道)에 방해가 된 것이기에, 신(臣)이 시운(時運) 소관이고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또 윤증(尹拯)이 강화(江華)에서의 일 때문에 매우 심각하게 신을 허물하였으므로, 신이 웃으면서 받지 못하고 다소의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이 천박한 장부(丈夫)이어서이니, 지금 논하는 사람들이 이로써 신을 죄준다면 신이 진실로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일 ‘그가 누구이기에 감히 윤선거를 공격하는 것이냐?’라고 한다면, 신은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주자(朱子)의 말에 ‘올바른 것을 해치는 사설(邪說)은 누구라도 공격해야 된다.’고 했으니 신(臣)의 소위는 또한 근거한 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자가 배척했던 사람은 육씨(陸氏)059)  였는데, 그가 마음을 다스리는 실제의 학문은 속여서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비록 총령(葱嶺)060)  에서 데려 온 진짜 호(胡)의 종자(種子)라는 등의 말을 했으면서도 사귀는 의리는 변함이 없어, 일찍이 자리에 올라 앉도록 하고서 문인(文人)들로 하여금 강론을 듣게 하였고, 부고(訃告)를 듣고 나서는 ‘죽었구나, 고자(告子)가!’ 하고서 또한 문인들을 거느리고 곡을 했습니다. 대개 그의 피음(詖淫)061)  은 배척하고 고구(故舊)에 대해서는 돈독함이 두 가지 다 행해지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은 일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문인들이 육씨의 문인들과 서로 좋아하지 않자 ‘비록 진짜 원수라 하더라도 어찌 그러할 수 있는가?’ 했습니다.
신이 윤선거에 대해서 비록 소견은 배치되지만 사귀는 의리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어, 그가 죽은 뒤에 있어서도 오히려 생전에 다하지 못한 말을 들어 제문(祭文)에다 질문했으니, 죽은 사람이지만 알게 된다면 반드시 신(臣)의 마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뜻밖에도 이 일을 조정으로 밀고 올라가, 천재(天災)와 시변(時變) 및 국가의 근심거리와 백성의 병폐는 도외시하고 있으니, 사슴만 쫓아가고 앞에 태산(泰山)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진실로 도승의 도리를 못했으니, 윤증이 신을 배척함은 또한 그의 도리가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윤증을 처음처럼 대우하신다면 이러니저러니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조정에 화평한 복(福)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과인(寡人)을 권면하고 경계한 말들은 은근하고 간절한 뜻이 말 표면에 넘치고 있으니 띠[帶]에 써놓고 패복(佩服)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윤증이 좌죄(坐罪)된 일에 있어서는 한때의 재변과 같은 것이 아니고, 진실로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것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작은 일이 아닌데, 어찌 의논이 시끄러운 것 때문에 처음과 같이 대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 6일 갑인

오도일(吳道一)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고, 최석정(崔錫鼎)을 부제학(副提學)으로, 강현(姜鋧)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이때 동래(東萊) 왜관(倭館)의 왜인들이 지급할 면포(綿布)를 쌀로 바꾸어서 주기를 청하였는데, 대개 신묘년062)  부터 이런 예가 있었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영남(嶺南)에 흉년이 들어 미곡(米穀)이 아주 귀하므로 4백 동(同)의 면포를 바꾸어 주기는 결코 어려우니, 면포 및 대가(代價)의 쌀은 모두 수량을 감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바꾸어 줄 수 있다는 뜻을 동래부(東萊府)로 하여금 개유(開諭)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항(李沆)이 아뢰기를,
"왜관의 왜인들이 들을 리가 만무하니, 청컨대,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절반은 우선 바꾸어 주고 절반은 추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추후로 주겠다는 뜻을 개유하도록 하소서."
하자, 비국에서 복계(覆啓)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2월 8일 병진

우박이 내리고 천둥 번개하였다.

 

2월 10일 무오

강양도(江襄道) 정선군(旌善郡)에 불이 나서 31호(戶)가 연소되었는데, 구제하는 은전(恩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2월 11일 기미

박신규(朴信圭)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의징(趙儀徵)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2월 12일 경신

밤에 우박이 내리고, 유성(流星)이 천시성(天市星) 서원(西垣) 안에서 나와 천봉성(天棓星) 밑으로 들어갔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대사헌(大司憲) 이숙(李䎘)이 국가에 아직도 저사(儲嗣)063)  가 없는 것을 들어, 욕심을 절제하고 저사(儲嗣)를 구하는 도리를 많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종학(宗學)에 관한 법이 요사이 오랫동안 폐이(廢弛)되었으니, 마땅히 총명하고 특출한 사람을 선택하여 권과(勸課)해서 교도(敎導)하도록 하되, 종학의 도선(導善) 등의 관원을 도로 설치하기는 어려우니, 종부시(宗簿寺)의 관원 중에서 잘 가려 교회(敎誨)하게 하는 것이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학의 일은 마땅히 대신들과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2월 13일 신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여러 신하들이 총융청(總戎廳)의 군제(軍制)를 바꾸는 일을 품주(稟奏)하니, 임금이 강화(江華)에 속해 있는 고양(高陽)과 교하(交河)의 군사를 도로 장단(長湍)에 소속시켜 총융청의 군사로 삼도록 명하였다.

 

서문유(徐文𥙿)를 헌납(獻納)으로, 한범제(韓范齊)를 장령(掌令)으로, 유상운(柳尙運)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고, 특별히 서문중(徐文重)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재숭(鄭載嵩)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올라오도록 하고,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에게는 호조(戶曹)로 하여금 월름(月廩)064)  을 실어 보내도록 하였으니,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의 말에 따른 것이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주육(酒肉)의 대가(代價)로 주는 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 다시 실어 보내도록 하였다.

 

2월 14일 임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2월 15일 계해

달이 태미원(太微垣)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앞서 숙원방(淑媛房)의 사패 노비(賜牌奴婢)065)  에 관한 판부(判付)의 내용 가운데 전토(田土)에 관한 한 조항이 누락된 것을 들어, 1백 50결(結)을 갈라 주도록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팔도(八道)에 흉년이 들어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길에 널려 있으므로, 막중한 종묘(宗廟)의 제향(祭享)도 절감하자는 의논이 있으니, 이와 같이 시급하지 않은 일은 마땅히 조용하게 천천히 의논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갈라 주도록 하였다.

 

2월 18일 병인

조의징(趙儀徵)을 장령(掌令)으로, 김홍복(金洪福)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관원을 야대(夜對)하였다.

 

2월 19일 정묘

달이 저성(氐星) 밑으로 들어갔다.

 

장령(掌令) 한범제(韓范齊)·지평(持平) 김홍복(金洪福)이 아뢰기를,
"경양 찰방(景陽察訪) 임대년(任大年)은 일찍이 신해년066)   무렵에 저축했던 것을 흩어 놓아 이웃과 마을에 나누어 주었다가 가을에 이르러 하나하나 도로 가두어 놓고도 친속(親屬)들을 교사(敎唆)하고 유인하여 조가(朝家)에 속여서 정단(呈單)하게 하고, 계획적으로 온고을에 부탁하여 자신의 일을 과장하도록 하여, 마침내 두드러진 상을 받았습니다. 유비(柳毗)에 이르러서는 시골에 있을 적에 재물을 거두어 모으고도 간사하게 속이는 짓을 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 임대년과 다름이 없는데, 또한 마관(馬官)067)  에 의망(擬望)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임대년은 도태시키고, 이러한 무리들은 실직(實職)에 서용(敍用)하지 말라는 것을 일정한 법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임대년과 유비의 일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引責)하였다. 대개 이단하는 임대년이 사재(私財)로 진제(賑濟)했다고 발탁하여 등용하기를 건의하고, 또 유비도 해마다 백성을 진제했다고 전조(銓曹)에 말을 하여 의망(擬望)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차자에 이르기를,
"임대년은 남쪽에서 오는 사인(士人)들이 훌륭한 선비라고 칭찬했고, 또한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하여 강경(講經) 시험에도 합격했으니, 이미 글에 능한 선비로서 또한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유비는 일찍이 재랑(齋郞)을 지냈으니, 이번에 다시 관직을 제수한 것이 옳지 못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전에 양운거(楊雲擧) 등에게 관직을 제수했을 적에 탄핵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마는, 이번의 일은 신(臣)으로부터 생긴 것이기 때문에 대신(臺臣)들이 곧바로 논하게 된 것으로서, 신에 대한 조소와 비방이 세상에 넘쳐 그러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강상(江上)으로 나갔다.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批答)을 내려 돌아오도록 촉구했다. 한범제(韓范齋) 등이 모두 인피(引避)하니, 지평(持平) 성호신(成虎臣)이 이단하(李端夏)와 이성친(異姓親)으로서 혐의스러움을 들어 처리하지 않고 인피하면서 ‘임대년의 일은 논해도 되고 그만두어도 또한 된다.’고 하여, 말이 되지 않는 모호(糢糊)한 소리를 했다. 임금이 계초(啓草)를 도로 내어주도록 명하고, 또한 승정원(承政院)에서 받아들인 것을 책망하였다. 또 전교(傳敎)를 내리되, 한범제의 인피하는 말에 ‘대신이 심각(深刻)하게 한다.’고 한 것을 들어 체차(遞差)하도록 명하니, 승정원에서 재차 도로 거두기를 청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2월 21일 기사

전라도(全羅道)의 경기전(慶基殿) 별전(別殿)에 재변이 생겼다. 예조(禮曹)에서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고 본조(本曹)의 당상(堂上)을 보내어 봉심(奉審)하며 또 본전(本殿)의 참봉(參奉)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추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 22일 경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대각(臺閣)이 망령되게 논한 잘못을 진달하고 이어 이단하(李端夏)를 돌아오도록 부르셔야 한다는 뜻을 언급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이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이단하를 위유(慰諭)하여 그와 함께 오도록 하였다.

 

연산(連山)의 생원(生員) 이중과(李仲果) 등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이미 전날 유생(儒生)들이 상소에 대한 비답(批答)에서 말했다."
하고,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3일 신미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사관(史官)과 함께 오라고 한 명에 의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고, 다시 승지(承旨)를 보내어 전유(傳諭)하고 그와 함께 오도록 했다. 그 이튿날 이단하가 비로소 명을 받들고 도성(都城)으로 들어왔다.

 

2월 25일 계유

정내상(鄭來祥)을 장령(掌令)으로, 유명웅(兪命雄)을 지평(持平)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판윤(判尹)으로, 박태보(朴泰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조의징(趙儀徵)이 임대년(任大年)에게 관직을 제수한 일과 한범제(韓范齊)를 특별히 체직(遞職)한 일을 들어 누누이 진달하고, 한범제의 대관(臺官) 관직을 돌려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잘못한 바가 대각(臺閣)에게 있는데도 도리어 대신의 차자 내용에 있는 말을 집어내어 조목조목 장황한 말을 했으니, 진실로 이상스럽다."
하였다. 사간(司諫) 이돈(李墩)이 또한 상소하여 특별히 체직한 잘못을 논하면서 도로 거두기를 청했으나,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에 조의징이 인피(引避)하며 물러가 대죄(待罪)하자, 사헌부(司憲府)에서 출사(出仕)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또 다시 체차(遞差)하도록 명했고, 사간원(司諫院)에서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6일 갑술

사간원(司諫院)에서 한범제(韓范齊)를 특별히 체차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조의징(趙儀徵)의 상소로 인해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니, 답하기를,
"요사이 조정 안에 체통이 크게 무너지고 승부를 겨루는 일이 이미 나타나,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을 능멸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2월 27일 을해

사간원(司諫院)에서 논계(論啓)하기를,
"정배(定配)한 죄인 한순석(韓舜錫)은 차술(借述)하는 간사한 일을 한 것이 한 번만이 아닙니다. 경신년068)   이후에 변지(邊地)로 정배되었다가 사유(赦宥)로 인해 석방된 것도 이미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인데, 이제 와서 과장(科場)에 드나들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니, 방자하고 거리낌 없음이 심합니다. 도로 배소(配所)로 내보내어 간사하게 외람된 짓을 하는 무리들이 징계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또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하기를 바라고, 두 대신(臺臣)을 특별히 체차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며, 또 임대년(任大年)은 우선 체직했다가 추후에 발탁하여 임용(任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임대년을 우선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2월 28일 병자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한영휘(韓永徽) 등이 상소하여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도로 부르기를 청하니,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2월 29일 정축

강도(江都)의 대두(大豆) 9천 석(石)을 호남(湖南)에 나누어 주어 진제(賑濟)에 보태어 쓰게 하고, 영남(嶺南)에서 세(稅)로 받은 콩 1천 3백 석도 나누어 주어 종자를 마련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한범제(韓范齊)와 조의징(趙儀徵)의 잘못을 진달하고, 이어 특별히 체차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2월 30일 무인

이익수(李益壽)를 지평(持平)으로, 임환(林渙)을 정언(正言)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박태보(朴泰輔)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후정(李后定)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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