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경진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위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3월 3일 신사
삼일 절제(三日節製)069) 를 거행하여, 수석을 한 진사(進士) 조대수(趙大壽)를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게 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창의문(彰義門) 밖 동쪽에서 응봉(鷹峰)까지의 성밑과 동소문(東小門) 북쪽에서 응봉의 동쪽까지의 성 안팎에 조[栗]·기장[稷]·대두(大豆)를 파종한 자가 있었는데, 한성부(漢城府)에서 계문(啓聞)하니, 파종한 사람을 잡아내어 죄주도록 명하였다.
사은사(謝恩使)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俣) 등이 청(淸)나라에서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우선 장문(狀聞)했는데, 그 별단(別單)에 대비 달자(大鼻㺚子)들의 일에 대해 대강 말하기를,
"대비 달자들로부터 청나라에 온 글을 구입(購入)하여 보건대, 각기 경계를 세우고 영원히 수호(修好)하자는 말만 있었고, 균등(均等)하게 대적(對敵)하는 예절은 있었지만 신복(臣服)하는 일은 없었으니, 귀순(歸順)이란 말은 과장(誇張)에서 나온 것인 듯했습니다. 오삼계(吳三桂)의 부곡(部曲)으로 이름이 황진(黃進)이라는 사람이 몰래 바다에 있는 섬을 점거(占據)하고 있으며 그전대로 영력(永曆)070) 이란 연호(年號)를 쓰고 요새(要塞)에 웅거하여 복종하지 않으므로, 청나라에서 바야흐로 토벌하여 무마하기로 의논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 문서를 보건대 과연 들은 바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3월 4일 임오
민진장(閔鎭長)를 승지(承旨)로, 김만길(金萬吉)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3월 6일 갑신
유집일(兪集一)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3월 7일 을유
김우항(金宇杭)을 정언(正言)으로, 유득일(兪得一)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3월 8일 병술
졸(卒)한 판관(判官) 김석달(金錫達)의 【임금의 외숙[內舅]이다.】 녹봉(祿俸)을 3년 동안 그대로 주도록 명하자, 승정원에서 대신(大臣)과 훈신(勳臣) 이외에는 3년 동안 녹봉을 준 예가 없음을 들어 복역(覆逆)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3월 10일 무자
달이 헌원성(軒轅星) 둘째 별을 침범했다.
3월 12일 경인
윤세기(尹世紀)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3월 13일 신묘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인견한다는 명을 내린 지 이미 오래된 다음에야 비로소 입시(入侍)하였다 하여 승지에게 잘 검칙(檢飭)하지 못했다고 책망하고, 추고(推考)하라고 명했다. 이때 임금이 명혜 공주(明惠公主)071) 방(房)의 궁차(宮差)072) 의 수본(手本)에 따라 진주(晋州)의 풍헌(風憲)을 별도로 처리하도록 명했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이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듣건대, 윤선거(尹宣擧)의 문인(門人)들이 송시열(宋時烈)의 상소로 인하여 바야흐로 자기들의 스승을 위해 소(疏)를 올려 변명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송시열이 윤선거를 책망하게 된 것은, 대개 윤휴(尹鑴)를 냉정하게 끊지 못한 것 때문에 후환(後患)이 있게 될까 하여 그와 같은 규계(規戒)를 한 것입니다. 만일 이번에 글로 써 놓고서 마치 취송(聚訟)하는 사람들처럼 하게 된다면, 노소(老少)의 논쟁이 이로부터 보합(保合)하는 날이 없게 될 듯합니다. 윤선거의 문생(門生)들의 상소를 받지 말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하고, 승지 윤세기(尹世紀)가 아뢰기를,
"병조(兵曹)로 하여금 바로 대략의 것도 받지 말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대신이 진달한 말은 비록 진정(鎭定)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바치지도 않은 상소를 앞질러 받지 말라는 영(令)을 내림은 과연 일의 대체에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헌납(獻納) 서문유(徐文𥙿)가 아뢰기를,
"승지의 말은 더욱 합당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우상(右相)의 뜻은 양자(兩者)의 사이를 조정하기 위한 것이니, 피차의 소장(疏章)을 일체 받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4일 임진
이세백(李世白)을 도승지(都承旨)로, 이익(李翊)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최규서(崔奎瑞)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3월 15일 계사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졸(卒)했는데, 나이가 55세였다. 김만기는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증손(曾孫)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묵직하고 후덕하여 구차하게 헐뜯거나 비웃지 않았고, 젊어서 등제(登第)하여 청렴한 재량으로 한 시기에 중시되었었다. 헌종조(顯宗朝)를 당하여 오랫동안 요로(要路)에 있으면서 유현(儒賢)을 보호하고 간사한 말과 치우친 말을 가리고 막아내어, 더욱 사류(士類)들이 의지하는 바가 되었다. 비록 세속 사람들이 시기하게 되어도 고려하지 않았고, 인경 왕후(仁敬王后)073) 가 덕선(德選)074) 받게 되면서는 더욱 삼가고 가다듬어 평소의 행동이 변함없었다. 성상(聖上)의 초년에 늙은 간신이 정권을 쥐고 있고 반역하는 종친(宗親)이 흘겨보고 있어 국가 사세의 위태로움이 터럭 하나에 매어달린 것처럼 두려웠었는데, 그야말로 모가 나지 않으면서 밀물(密勿)075) 하게 계획을 세워 그들의 기선(機先)을 제압하여 써먹을 수 없게 함으로써,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어 맑아지고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해지게 만들어, 그의 공이 컸었다. 주토(誅討)가 이미 끝나게 되어서는 즉시 극력 사직하여 장수(將帥)의 인수(印綬)를 내놓고 집으로 돌아와 8년을 살다가 졸(卒)했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일 처리 잘한 것을 칭찬했고, 공명(功名)을 세울 적에 비록 취향(趣向)이 달랐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하자를 지적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하교(下敎)하기를,
"슬픔과 서러움이 각가지로 지극하다."
하고, 3년 동안 녹(祿)을 주도록 명하였으며, 희정당(熙政堂)에서 거애(擧哀)했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고 내렸다.
3월 17일 을미
김호(金灝)를 장령(掌令)으로, 이여(李畬)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김우형(金宇亨)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이굉(李宏)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지평(持平) 유집일(兪集一)이 아뢰기를,
"전일에 나양좌(羅良佐) 등이 소장(疏章)을 올릴 적에 승정원(承政院)에서 종시 물리쳤고 또한 진계(陳啓)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무릇 장주(章奏)에 있어서는 한 번 예람(睿覽)을 거치고 나면 진퇴(進退)하거나 시비(是非)를 논하는 것이 오직 조정에 달려 있는데, 올리지도 않은 상소를 앞질러 받지 않기를 청했으니,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사(喉司)076) 에서 당초에 쟁집(爭執)하지도 않았고 또한 다시 곧바로 도로 주어버렸으니, 유윤(惟允)077) 의 의의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해당 승지를 모두 중벌(重罰)에 따라 추고(推考)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정중(閔鼎重)이 또한 차자를 올려 나양좌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시비(是非)와 곡직(曲直)이 밝은 해와 달 아래 도망갈 데가 없게 한 다음에 따라서 처분하도록 청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청대(請對)하여, 그들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분명하게 처분을 내리도록 청하였다. 이단하가 또한 아뢰기를,
"봉조하(奉朝賀)는 효종(孝宗)께서도 매번 선생(先生)이라고 불러 은덕과 예의의 융숭함이 전고(前古)의 시대보다도 훨씬 뛰어났었는데, 이제 대질(大耋)078) 의 나이에 두서너 미관(微官)들이 극력 모욕을 가하기를 마치 어린아이를 질책하듯이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은 이 일이 이미 진정될 가망이 없게 되었지만, 가져다가 보고 난 다음에 어찌 처치할 길이 없겠는가? 그 원래의 소(疏)를 받아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송시열의 상소의 대의(大意)는, 조정의 의논이 맞지 않고 과격함을 답답하게 여겨 시말(始末)을 모두 진달한 것에 지나지 않고, 또 윤증(尹拯)이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는 연유를 언급한 것입니다. 윤선거(尹宣擧)를 책망한 말에 있어서는 또한 평소에 서로 절차 탁마(切磋琢磨)하며 늘 하던 말로서, 옛적부터 친구 간에는 규계하고 경고하는 수가 많이 있었습니다. 주자(朱子)가 여조겸(呂祖謙)에게 심술(心術)을 가지고 책하기도 했었지만, 이 때문에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고, 또한 이 때문에 문도(門徒)들이 한을 품게 되었다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오늘날의 행동은 진실로 지극히 도리에 어그러집니다."
하고, 이단하가 아뢰기를,
"나양좌의 상소 내용에 ‘윤휴(尹鑴)가 《중용(中庸)》의 주(註)를 고친 다음에도 송시열이 또한 일찍이 손수 그를 강관(講官)에 추곡(推轂)079) 했다.’고 했었습니다. 송시열이 효종(孝宗) 말년에 윤휴를 진선(進善)080) 에 의망(擬望)했던 것은, 그때에 윤휴에 대한 당시의 인망(人望)이 매우 높아 혹자는 바로 대사헌(大司憲)에 의망하려고 하므로, 송시열이 중론을 어기기가 어려워 비록 한 차례 거의(擧擬)하기는 했었으나, 지금까지도 감히 자신을 옳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요(堯)임금 같은 성인(聖人)으로도 곤(鯀)이 적임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오히려 또한 가능한지를 시험해 보고서야 그만두었습니다. 한 차례 강관에 의망한 것이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윤선거에게 있어서는 끝까지 윤휴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송시열이 매양 조용히 준엄하게 배척하기를 한 두 번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윤증(尹拯)을 대해서도 곧바로 그의 아비의 과오를 말하므로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듣고서 근심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는 모두 윤선거가 세상에 생존해 있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 ‘그의 아들 때문에 화를 내어 그의 아비에게 옮겨간 것이다.’라는 말은 크게 옳지 않습니다. 사생(師生)이 있은 이래로 윤증처럼 무례하게 된 일은 없었습니다. 나양좌 등이 또한 ‘봉조하(奉朝賀)가 일찍이 글에다 쓰기를, 윤선거가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 더럽히지 않은 일은 강도(江都)에서 절의(節義)를 지킨 인사(人士)들과 귀결이 일치하게 된 일이라고 칭찬해 놓고, 이제 와서는 김익겸(金益兼) 등 여러 사람들과 상반된다고 하여 그의 말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개 윤선거가 정축년081) 이후에는 사진(仕進)할 생각을 그만둔 것이 30년이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자신을 깨끗하게 한 일’이고, 그 당시 김익겸이 죽을 적에 그와 더불어 함께 죽지 못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상반된 일’입니다. 전후에 한 말들의 의미가 훤하고도 분명한데, 어찌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양좌 등이 사사로운 뜻에 가려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함이 이러하기는 합니다마는, 이는 무식한 소치로 그러한 것이기에 애처롭게 여길 만하고 화를 내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나양좌 등의 상소에 【성지선(成至善)·조득중(趙得重)도 함께 참여했다.】 이르기를,
"돌아가신 스승 윤선거는 절의(節義)와 도학(道學)으로, 생존해서는 한 시대의 추앙받는 바가 되고 돌아가서는 후학(後學)들의 사모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봉조하 송시열의 상소 내용에 윤선거를 배척하여 바로 피사(詖辭)082) ·사사(邪辭)하는 당(黨)인 윤휴(尹鑴)의 부류에 돌렸다고 합니다. 아! 심한 일입니다. 처음에 윤선거가 일찍이 윤휴와 사귈 적에, 이때에는 윤휴가 명성과 명예를 도둑질하고 있는 참이라 윤선거가 윤휴에게 있어 교분이 또한 두텁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해년083) 과 경자년084) 에 예송(禮訟)이 일어나게 되어서는 윤휴가 3년을 주장하는 의논을 하고,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는 윤휴의 말을 조술(祖述)하여 화(禍)를 전가(傳嫁)할 계책을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윤휴가 말하는 예설(禮說)은 실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고, 윤선도는 또한 그의 사주(使嗾)를 받은 것이다.’라고 했었습니다. 윤선거는 말하기를, ‘윤휴가 진실로 망령되기는 하지만 화를 전가하려는 마음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억측할 수는 없다.’ 하여 이미 이를 들어 송시열을 경계하였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윤휴는 본래 처사(處士)였는데 그만 정승의 가문과 의합(依合)하여 국가의 예(禮)에 관해 주장을 세웠으니, 이는 크게 실신(失身)하는 짓이다.’ 하여 서함(書緘)을 만들어서 간절하게 책망하고, 이쪽에나 저쪽에나 경계하는 말을 하여 분쟁(紛爭)을 없애고 혼란을 구원하려고 바랐었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예송(禮訟)이 이미 전제(筌蹄)085) 가 되어 버렸으니, 당파의 화(禍)로 장차 큰 난(亂)이 일어나겠다. 윤휴는 이미 거만해져 규계(規戒)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송시열은 또한 부축도 억제도 힘쓰지 않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이 윤선거가 이미 윤휴와도 끊어지게 되고 또한 송시열과도 맞지 않게 된 일이다.’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윤휴는 과연 흉패(凶悖)를 부리다가 마침내 스스로 실패하게 되었고, 송시열의 말은 증험되지 않았다 할 수 없으니, 설령 윤선거가 생존해 있다면 ‘공(公)의 선견(先見)에 복종하게 된 것이 부끄럽다.’고 하게 될 뿐일 것입니다. 사마광(司馬光)086) 이 왕안석(王安石)을 알아보지 못한 것 때문에 군자(君子)가 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며, 정이(程頤)087) 가 형서(邢恕)를 알아보지 못한 것 때문에 대현(大賢)이 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니, 지금 윤선거가 윤휴를 알아보지 못한 것도 사마광이나 정이의 짝이 되기에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말하는 사람들이 단지 윤선거가 윤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끊었다고 말만 하고 실지는 끊지 않았었다고 말을 하여, 우물쭈물하고 이랬다저랬다했다는 누명을 씌우려고 합니다. 대개 윤선거가 불행하게도 갑인년088) 이후의 윤휴는 보게 되지 못했으니, 이번에 모름지기 갑인년 이전의 윤휴에 대하여 논한 다음에야 윤선거의 본래의 심사(心事)를 알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윤선거가 윤휴에게 대해서 진실로 나타나지도 않은 악(惡)을 미리 탐지하고서 경솔하게 끊지 않고, 다만 윤휴가 참회(懺悔)하는 뜻은 없이 의심을 가지고 성내는 기색이 있어 의리가 구차하게 합하기 어렵게 되자, 자신이 모욕받게 될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며 기어이 끊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 끊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윤선거가 일찍이 권시(權緦)에게 보낸 편지에, ‘희중(希仲)이 보과(補過)를 잘 해야 할 점은 뉘우칠 줄 아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만일 그가 이를 잘해간다는 것을 듣게 된다면, 내가 마땅히 즉시 편지를 보내어 축하하겠다.’고 했었습니다. 희중(希仲)은 윤휴의 자(字)로서, 오히려 윤휴에게 바라는 바가 없지 않았었으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의 마음입니다. 대개 윤선거의 끊는 방법은 송시열의 끊는 방법과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누가 두렵고 누구의 강박 때문에 실지는 끊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끊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말하는 사람들이 또한 윤선거가 기유년089) 에 송시열에게 의답(擬答)한 편지와 윤증(尹拯)이 윤휴가 차린 제전(祭奠)을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윤선거가 윤휴를 끊지 않은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른바 기유년의 의답서(擬答書)란 것은 송시열이 무신년090) 에 조정에 나왔을 때 서함을 보내 묻게 되자, 서함을 초잡아 장차 답하려 하다가 어느새 도성(都城)을 떠났음을 듣고 보내지 못했던 것인데, 그 뒤에 윤증이 묘문(墓文)을 지어주도록 청하였을 적에 아울러 가지고 가서 보여준 것입니다. 그 서함의 대략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사의(私意)가 없게 하려면 마땅히 먼저 자신의 사의를 없애야 하고, 우리 임금이 언로(路言)를 열어 놓게 하려면 마땅히 먼저 자신부터 언로를 열어 놓아야 하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시급히 해야 할 일에 있어서는 양현(兩賢)의 의논이 정해진다면 이단(異端)이 어디에서 생겨날 수가 없게 되어, 선비들의 풍습이 정(正)과 비슷한 것에서 무너지지 않게 되고 인재들이 쓰일 곳에 융통하게 되어 치우친 의논이 점차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송(禮訟)의 금지가 해제된다면 우리의 도(道)가 자연히 공정해지게 되어, 의심받던 사람들이 공평한 용서로 풀리게 되고 이론(異論)을 세우는 사람들이 변론하여 질정하는 데 방해받지 않게 되어 내세우는 표방(標榜)이 즉시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이 두 가지가 융화(融和)되어 보합(保合)하게 된 다음에야 동인 협공(同寅協恭)091) 하고 정신을 집결(集結)하게 되어, 조정이 바로잡아지고 모든 업적이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했습니다. 예론(禮論)의 금지를 해제해야 한다는 논설은 이르기를, ‘지금의 그 예송(禮訟)에 관한 의논은 당초에는 옳으냐 그르냐를 다투게 되다가 반전(反轉)하여 사(邪)와 정(正)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저쪽에서는 본래 다른 마음이 없었던 것이라 하고 이쪽에서는 반드시 간사한 뜻이 있는 것이라 하며,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억울하다 여기고 공격한 사람들은 오히려 통쾌하게 되지 못할까 염려하며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더러 공격이 너무 심하게 된다고 여기는데, 일체 수사(收司)의 율(律)092) 로 논죄(論罪)하기를 한층한층 더해 가고 만연(蔓延)시켜 가면서 사론(士論)으로 단정한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어찌 참으로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고 어찌 참으로 억울하게 된 사람이 없으며 어찌 참으로 너무 심하게 된 사람이 없겠습니까? 저 해윤(海尹)은 진실로 탐음(貪淫)한 인물이니, 비록 시기하여 미워하는 짓을 한 것이 아니더라도 진실로 임용(任用)해서는 안되지만, 그 나머지 조·홍(趙洪) 같은 여러 사람들은 비록 논한 말이 근거가 없고 마음씀이 편파적이라 하더라도 벌을 받은 것이 이미 지나치게 되고 금고(禁錮)된 지가 이미 오래이니, 진실로 탕척(蕩滌)하여 임용해야 합니다. 이는 율곡(栗谷)이 재차 조정에 들어왔을 적에 계미년093) 의 삼사(三司) 사람들을 도로 임용한 의리입니다. 하물며 윤·허(尹許) 같은 두 사람은 비록 괘오(詿誤)094) 한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 끝까지 참소하여 해치고 독기를 쏘는 인물이라 단정하여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능히 예송(禮訟) 때문에 시기하고 혐오하던 자취를 씻어버리기를 먼저 이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사심(私心)도 없고 인색하지도 않은 마음을 보여준다면, 안으로는 우리의 도량을 넓히게 될 수 있고 밖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하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저 두 사람인들 또한 어찌 감격하여 기쁘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해윤(海尹)이란 윤선도(尹善道)이니 해남(海南)에서 살기 때문이요, 조·홍(趙洪)이란 조경(趙綗)과 홍우원(洪宇遠)이요, 윤·허(尹許)란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입니다. 송시열이 글을 보고서 크게 한탄하였으며, 윤선거가 윤휴와 허목을 임용하도록 권했으니, 일찍이 끊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라 하고, 드디어 이를 가지고 서로 망신주었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보건대, 윤휴와 허목은 진실로 임용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난날에 있어서 면목을 고치고 그런 마음을 버릴 수 있게 했었다면, 화를 싹트기 전에 없애는 것은 자연히 도리가 있게 되었을 것이니, 생각하건대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린 바이었습니다. 이른바 ‘윤휴가 차린 제전(祭奠)을 받았다.’는 것에 있어서는, 윤선거와 윤휴가 비록 서로 끊기는 했지만 깊이 원수진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윤선거가 비록 윤휴와 더불어 안부는 통하지 않았었지만, 누이의 상사(喪事)를 만났을 적에 윤휴의 위문을 받고서는 보답하여 사례했었습니다. 고(故) 정(正) 권준(權儁)은 곧 윤선거의 매부(妹夫)이자 윤휴의 처형(妻兄)095) 이었기 때문에, 권준이 죽었을 때 또한 윤휴에게 서함(書緘)을 보내어 서로 조위(吊慰)했었던 것입니다. 윤휴가 윤선거의 상사 때를 당해 제문(祭文)을 지어 제전(祭奠)을 차린 것은 또한 그전의 정의(情意)로 한 것이고 반드시 물리쳐야 할 의의가 있지 않았던 것이므로, 이를 가지고 끊지 않은 것으로 의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송시열의 상소에 또한 자신이 윤휴를 배척하는 점은 오로지 《중용(中庸)》의 주설(註說)을 제멋대로 고친 것에 있는 듯이 하고, 또한 윤선거가 더욱 윤휴에게 중독(中毒)된 것으로 하여, 마치 윤선거가 온세상을 거느리고 윤휴에게 뛰어들어갈 것처럼 했는데, 진실로 말을 이처럼 자기의 심정대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윤휴가 《중용》의 주설을 고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윤선거가 일찍이 윤휴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한다고 지목했었으나, 이 때문에 서로 버리게 되지 않은 것은 또한 그의 재주를 아끼고 그의 망령됨을 용서한 것에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송시열은 일찍이 윤휴를 이단(異端)이라고 지목하게 되자, 윤선거는 또한 그대는 윤휴를 너무나 지나치게 두려워한다고 했었습니다. 그의 뜻은, 옛적의 이단이란 육구연(陸九淵)096) 과 같은 무리로 재주와 학문이 모두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고, 윤휴는 단지 참월(僭越)에만 관계된 것으로 이단에는 해당될 수 없었고 여긴 것입니다. 그 뒤 무술년097) 과 기해년098) 무렵에 송시열이 도성(都城)으로 들어와 윤휴와 가까이 오갔고, 윤휴는 영재(英才)이므로 임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하여 자급(資級)을 뛰어 발탁(拔擢)한 것이 실로 송시열이 전조(銓曹)를 맡았을 때에 한 일입니다. 송시열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서함에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는 윤휴와 친근했는데, 주부자(朱夫子)를 취색(吹索)099) 한 것을 보게 된 뒤부터는 점점 마음가짐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의(情意)가 이미 깊었었기에 붕우(朋友)들의 맨뒤에 두었었습니다.
상례(喪禮)에 관한 일 이래로는 논하는 말이 거의 상변(上變)에 가까운 것이어서, 내가 비록 구차하게 그전의 정의를 보존하려고 하더라도 그가 마땅히 끊을 것이기 때문에, 끊으려고 할 것도 없이 자연히 끊어졌습니다.’ 했었습니다. 이에 의한다면, 이번에 말한 ‘주자를 무패(誣悖)한 것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리고 윤휴를 배척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사실을 벗어난 것이고, 또한 어찌 윤휴는 놓아두고 윤선거를 배척하는 일을 한 것이겠습니까? 이른바 ‘먼저 당여(黨與)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은, 기미년100) 에 송상민(宋尙敏)이 한 상소를 보건대, 곧 송시열이 고(故) 현감(縣監) 김극형(金克亨)을 공격한 말입니다. 송시열이 일찍이 윤선거에게 서함을 보내어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일을 논하고서 말하기를, ‘형의 가문에서 너무 지나치게 존모(尊母)하고 있으니, 먼저 다스려야 할 범주(範疇)를 면하지 못하게 될 듯합니다.’ 했었던 것이고, 처음부터 윤휴의 일로 인해 또한 이런 말을 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 말을 빌어다가 공안(公案)으로 내세우며 추측하여 단정하기를 ‘간사한 말을 하여 사람들을 해롭게 한 율(律)’로 하려는 것인데, 비록 문인(門人)이나 자제(子弟)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억지로 억측하고 망령되어 인용한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송시열 그 자신이 이런 말을 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른바 ‘생전에 다하지 못한 말을 제문(祭文)에다 질정(質正)했다.’는 말은, 윤선거의 초기(初期)에 재차 치제(致祭)한 제문(祭文)을 가리킨 듯합니다. 만일 장차 안장(安葬)하게 될 적에 제문을 가지고 와 제전(祭奠)을 차린 때의 것이라면, 한 말이 진실로 흠잡거나 비방한 것은 없었고, 그의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고 학문을 칭찬하며 지조를 찬미하고 정분(情分)을 서술하여, 오늘날 배척하고 있는 것과는 진실로 한 사람의 말같지 않은 듯했습니다. 재차 치제할 때의 제문은 대개 윤증(尹拯)이 윤휴(尹鑴)의 치제를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나온 것인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오직 강(江)이 한 말은 조금 계합(契合)되지 않는 데가 있습니다. 만일 형이 해(海)에게도 아울러 용서를 내린 것이라면, 나의 의심은 한 마디 말에 즉각 풀릴 것입니다.’ 했었습니다. 강(江)이란 여강(驪江)을 말한 것이니 윤휴가 사는 곳이고, 해(海)란 앞에 말한바 해윤(海尹)이니 곧 윤선도(尹善道)입니다. 그의 뜻은 대개 윤선거가 비록 윤선도를 공격하기는 하지만 항상 윤휴를 용서하고 있고 윤휴와 윤선도는 떨어질 수 없다고 여겨, 기필코 윤휴를 용서하고자 한다면 아울러 윤선도도 용서하게 하려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생전에 다하지 못한 말이란 것이겠습니까? 대개 제전(祭奠)을 받아들인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는 본래 뒷사람들에게 관한 일인 것인데, 어찌 이를 가지고 유명(幽明)의 사이에 있어 원망을 하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단(異端)이란 논쟁은 계사년101) 에 있었던 일이고, 예송(禮訟)은 곧 경자년102) 이후의 일입니다. 계사년부터 경자년까지는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있어 정의(情義)의 두터움이 하룻동안 같았고, 경자년 이후에는 비록 윤휴를 냉엄하게 끊지 않는 것을 윤선거의 병폐로 여기기는 했지만, 또한 일찍이 윤휴의 당(黨)으로 배척한 적은 없었습니다. 강(江)이니 해(海)니 한 말도 또한 이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가령 윤선거가 과연 윤휴와 당(黨)이 된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자취가 나타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윤휴가 일찍이 뜻을 얻었으나 그가 윤씨(尹氏)를 대우함이 과연 어떠했었고 윤씨가 윤휴와 당이 된 일이 과연 어떤 일이란 것입니까? 그의 이른바 강도(江都)에서의 일이란 것에 있어서는, 대개 윤선거가 병자년103) 에 강도(江都)로 들어갈 적에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兼)과 함께 의병(義兵)이 되기로 언약하여 유병(儒兵)을 가지고 성첩(城堞)을 분담하여 지키다가 적(賊)의 군사가 성(城)에 들어오자 진원군(珍原君) 세완(世完)이 효종(孝宗)의 명으로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봉사(奉使)나가면서 윤선거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나와 함께 가야 되겠다.’ 하므로, 윤선거가 드디어 미복(微服) 차림으로 세완(世完)의 종자(從者)가 되어 갑진(甲津)을 건넜었고, 남한 산성에 이르러서는 성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드디어 세완을 따라 돌아와 효종(孝宗)의 행중(行中)으로 들어갔었던 것입니다. 지금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에 윤선거의 일을 말하기를, ‘벗들과 같이 일하기로 해놓고 벗들은 죽었는데도 죽지 못했고, 아내와 죽기로 언약해놓고 아내는 죽었는데도 죽지 못했다.’ 합니다. 대개 윤선거는 직사(職事)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군사를 피해 들어갔다가 군사가 닥치므로 떠난 것입니다. 이는 곧 선비의 정해진 분수로서 진실로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의무는 없는 것이고, 강화(講和)하는 일이 이미 이루어지고 수비(守備)를 또한 파하게 되어서는 비록 죽고 떠나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아내와 죽기로 언약했다.’는 것에 있어서는, 윤선거가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에게 답한 서함에 이르기를, ‘그때 윤선거가 여러 사우(士友)들과 모여 몸을 거처할 곳을 의논하고 있었는데, 죽은 아내가 사세의 위급함을 알고 계집종을 보내어 윤선거를 데리러 왔습니다. 가자마자 하는 말이 「적병(賊兵)에게 죽기 보다는 일찍 자결(自決)하는 것만 못하기에 한 번 만나보고 영결(永訣)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므로, 윤선거가 차마 볼 수 없어 사우(士友)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었습니다.’ 했습니다. 계사년104) 에 효종 대왕(孝宗大王)께 상소하기를, ‘병자년105) 에 강도(江都)에 들어갔을 때 사우(士友)들과 함께 일을 하다가 성(城)이 함락되게 되어 사우들이 모두 죽고 중부(仲父)106) 윤전(尹烇)도 목숨을 바쳤습니다. 신(臣)은 잔인하게도 한 번 죽는 것이 아까와 아내는 자결하고 자식은 버려둔 채 홀로 살기를 탐내어, 밖으로는 벗들을 저버리고 안으로는 처자에게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중부(仲父)를 따르지 못하고 노예(奴隷)가 되어 구차하게 면하여, 난(亂)에 임해서는 천성(天性)을 잃어버렸고 의리에 처하기를 무상(無狀)하게 했기에, 지금도 뒤쫓아 생각해보며 부끄러워 죽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했었습니다.
정유년107) 에는 상소하기를, ‘처음에는 진동(陳東)108) 이 한 일을 배웠던 것인데, 마침내는 윤곡(尹穀)109) 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효종께서 비답(批答)을 내리시기를, ‘그대의 뜻을 지킴이 변함없음은 가상하게 여긴다마는, 도리어 너무 지나친 것이 당혹스럽다. 왜냐 하면, 진동(陳東)이 나중에 윤곡(尹穀)처럼 죽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셨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윤선거를 깊이 아는 것은 효종(孝宗)보다 더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 남한 산성에서나 강도에서나 똑같았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누가 성이 포위되어 패전한 나라의 남은 목숨이 아니고, 난리 뒤에도 절의(節義)를 완전하게 지켜 이록(利祿)에 흔들리게 되지 않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송시열이 일찍이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齊) 삼학사(三學士)의 전(傳)을 짓기를, ‘입근(立慬)110) 한 사람들 중에 강도(江都)에 있어서는 선원(仙源) 김상국(金相國)111) 이하 뚜렷하게 드러난 사람들을 이루 셀 수가 없고, 또한 자신을 결백하게 하여 더럽히지 않으면서 뜻을 지킨 사람으로는 윤공(尹公) 선거(宣擧)와 같은 제현(諸賢)들이 사정은 비록 같지 않았지만 다같이 일치(一致)하게 되었다.’라고 했었습니다. 평소에 송시열이 윤선거의 절의를 허여(許輿)함이 이러하여, 제문(祭文)에 쓴 ‘지주(砥柱)’나 ‘일성(一星)’은 의의(意義)가 같았었는데, 이제 갑자기 김익겸(金益兼)·권순장(權順長) 등과는 서로 반대된다고 한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송시열이 강도에서의 일 때문에 세상에 자립(自立)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겼었다면, 나서지 말도록 권면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매번 윤선거의 나서지 않는 것을 너무 고집스러운 일이라 하여, 일찍이 ‘길보(吉甫)가 머리를 돌리게 된 다음에야 일을 하게 될 수 있겠다.’는 말을 했으면서, 이제는 사실 추적을 사양하는 체하는 말을 하여 흠을 삼는 자료로 삼으려 하니, 이는 과연 무슨 마음입니까? 더러는 또 미복(微服)차림으로 노예(奴隷)가 되었던 것을 가지고 망신을 주려고 하는데, 이는 더욱 가소로운 일입니다. 미복 차림은 이미 공자(孔子)부터 한 일인데 이것이 과연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 송시열이 윤증(尹拯)을 가장 노엽게 여겨 목천(木川)에서 한 말의 근거가 나온 곳으로 의심을 가졌었는데, 다만 송시열이 윤증에게 보낸 서함에 한 말 중에, ‘목천에서의 일은 고명(高明)112) 께서 깊이 노여워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생각해 보건대, 그런 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논할 것 없고, 대개는 타우(打愚)가 호향(互鄕)113)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도록 하려 한 것으로서, 이는 선장(先丈)을 존상(尊尙)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했었습니다. 타우(打愚)는 곧 이상(李翔)의 호(號)입니다. 이로써 본다면 그의 뜻이 충후(忠厚)한 듯합니다마는, 요사이 송시열의 문인(門人)이나 자제(子弟)들이 공공연히 취예(臭穢)114) 니 성전(腥膻)115) 등의 말을 통문(通文)에다 게재(揭載)하고 있고, 이경화(李景華)는 또한 따라서 사설(辭說)을 날조하여 소장에다 올리고 있는데, 이경화 역시 송시열의 문도(門徒)입니다. 이상에게 있어서는 호향(互鄕)의 원장(院長)이 되지 말도록 하려고 하고, 자기의 문도들은 모두가 호향인데도 마음 편히 서로 용납하게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송시열의 오늘날의 일은, 윤증의 왕복 서함에 충격받고서 흉보고 흠잡고 하는 추태를 거슬러 올라가 그의 아비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누가 자기를 그르게 여기는 것을 노여워하여 도리어 그 사람의 부모를 헐뜯는 것은 항간(巷間)의 어린아이들도 부끄럽게 여기는 바인데, 하물며 평소에 친하던 벗으로서 하나는 살아 있고 하나는 죽고 없는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곧바로 귀를 막고 가버리게 하는 일입니다."
하고, 끝에 또한 윤선거(尹宣擧)를 성대하게 추앙하기를,
"산림(山林)에서 일생을 마치어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이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었고, 언론(言論)과 지취(指趣)가 송시열과는 차이나는 바가 많았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준수(遵守)해 가던 분은 성혼(成渾)이고, 취정(就正)116) 해 가던 분은 김집(金集)이었는데, 김장생(金長生)을 끌고 올라가 이이(李珥)의 적통(嫡統)으로 삼고 궁극(窮極)을 주자(朱子)의 법문(法門)에다 대었었습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공사(公私)를 잘 살피고 소장(消長)을 자세히 관찰하고 시비(是非)의 결정을 진실하게 하며 호오(好惡)를 올바르게 하기를 시범(示範)하여, 사문(斯文)에 백육(百六)117) 의 액운이 없어지게 하소서."
하였다. 상소를 입계(入啓)한 이튿날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한번 윤증(尹拯)이 죄를 얻게 된 뒤 부터는 흔단(釁端)이 층층으로 생겨나 보합(保合)을 기하기 어렵게 되었다. 봉조하(奉朝賀)의 상소 내용에 말한 윤선거(尹宣擧)의 일은 갖추 원위(源委)118) 를 진달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실지는 친애(親愛)하고 책선(責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무슨 한하고 노여워한 의사가 있으며 무슨 분별할 속인 말이나 비방한 말이 있기에, 나양좌(羅良佐) 등이 스승을 위해 신변(伸辯)한다는 핑계로 몰래 대로(大老)를 배척할 마음을 품고서 무리한 말을 하고 위험한 마음을 먹는 것이냐? 이러한 귀역(鬼蜮)119) 같은 무리들을 만약 명백하게 분별하고 냉엄하게 배척하지 않는다면 인심(人心)이 몰락하고 의리(義理)가 막혀서, 호굉(胡紘)·심계조(沈繼祖)120) 와 같은 부류들이 반드시 장차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 소두(疏頭) 나양좌는 멀리 귀양보내고, 상소에 참여한 사람 성지선(成至善)·조득중(趙得重)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오도일(吳道一)이 독계(獨啓)하여 복역(覆逆)하기를,
"윤선거는 산림(山林)에서 도(道)를 지키며 홀로 유정(幽貞)121) 을 보존했었으니, 온 나라의 선사(善士)이고 성명(聖明)한 시대의 일민(逸民)122) 입니다. 봉조하(奉朝賀)의 상소 내용의 뜻은 진실로 그와 수작(酬酢)했던 일을 기록하여 윤증(尹拯)과 갈등이 생긴 연유를 밝힌 것이기는 하나, 말을 하는 도중에 더러는 절박하게 그의 스승을 몰아세우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양좌 등이 한번 신변(伸辨)하고자 한 것은 또한 인정(人情)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화평한 마음과 순탄한 말로 곡절을 밝히지 못하고서 오직 과격하게 이기기를 좋아했고, 또한 천천히 도리를 구명(究明)해가지 못하고서 자신이 부질없는 말로 들추어 헐뜯는 것에 귀결됨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견별(譴罰)을 가하는 것은 진실로 풍속이 후덕해지게 하고 체통을 보존해가는 도리에 있어 해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왕자(王者)는 벌을 줄 적에 반드시 실정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처리해야 하는 법인데, 유배(流配)하는 율(律)을 가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벌을 내리시니, 이것이 어찌 성명(聖明)한 조정이 관대(寬大)하게 하는 체통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망기를 내려 오도일이 당(黨)을 비호(庇護)하고 기치(旗幟)를 내세운 죄를 엄중하게 책망하였으며, 특별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승정원에서 오도일에 대한 책벌(責罰)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송시열에게 가서 유시(諭示)하게 하기를,
"경(卿)은 조정 3대(代)의 숙덕(宿德)이고 원로(元老)로서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지니고 온나라 사람들의 긍식(矜式)123) 이 되고 있으므로 미천한 여대(輿臺)124) 들도 존경하며 추앙할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올바른 것을 해치는 일부 무리들이 사생(師生)의 의리를 핑계로 속에 음흉한 생각을 품고서 멋대로 공격하고 배척하기를 조금도 기탄없이 했으니, 진실로 세도(世道)가 무너지고 의리가 막힘이 한결같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제 비록 명백하게 분별하고 준엄하게 배척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는 법을 통쾌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평소에 과인(寡人)이 현자(賢者)들을 존대하는 성의가 극진하지 못한 데가 있어 이러한 사문(斯文)의 큰 변을 가져오게 된 것이기에, 무안한 마음이 간절하여 무어라 말할 수 없으니, 이들의 터무니없고 망령된 말에 개의치 말고 벌떡 일어나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벌레가 솔잎을 갉아먹는 일이 관서(關西)에서부터 생겨 두어 해 동안에 도성(都城)과 기내(畿內)까지 가득 퍼져 거의 모두 먹어버렸다.
3월 20일 무술
이언강(李彦綱)을 승지(承旨)로, 서문유(徐文𥙿)를 수찬(修撰)으로, 최규서(崔奎瑞)를 헌납(獻納)으로, 이후항(李后沆)을 사간(司諫)으로, 김만길(金萬吉)을 응교(應敎)로, 이홍적(李弘迪)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박괘(剝卦)125) 를 진강(進講)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괘는 음(陰)이 강성하고 양(陽)은 미약한데, 바로 지금 조정에도 양은 미약하고 음은 강성하다. 의논하는 동안에는 비록 그가 군자(君子)인지 소인(小人)인지를 갑자기 분간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 사이에는 나양좌(羅良佐)같이 올바른 것을 해치는 무리가 있어, 3대의 조정에서 예우(禮遇)한 신하를 흉보고 헐뜯고 있으니, 이는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마땅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바이다."
하니, 설경(說徑) 송상기(宋相琦)가 아뢰기를,
"나양좌의 상소가 나오자 모양이 아름답지 못했으므로 신(臣)들이 마땅히 차자(箚子)를 올려 분변했어야 할 일인데, 성상께서 이미 더없이 명쾌하게 처분하셨기에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사간(司諫) 이돈(李墩)이, 나양좌를 멀리 귀양보내고 성지선(成至善) 등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기를,
"나양좌 등의 상소는 전연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니 또한 망령되기는 합니다마는, 윤선거(尹宣擧)는 진실로 누대(累代)의 조정에서 예우(禮遇)하던 바이니, 문생(門生)들이 망령된 뜻으로 지나친 욕심을 부려 한번 변명해 보려고 한 것은 그들의 심정을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봉조하(奉朝賀)의 상소는 본래 침해하여 공격하려 한 뜻이 아닌데, 나양좌 등이 스승을 위해 신변(伸辨)한다는 핑계로 3대의 조정에서 예우하던 신하를 헐뜯고 욕했다. 공론(公論)이 없어져 버리지 않았다면 삼사(三司)에서 마땅히 죄주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지금 급급하게 구원하려 하여 도로 거두기를 청하기까지 하니, 자못 지극히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였다. 송상기(宋相琦) 및 시독관(侍讀官) 홍수헌(洪受憲) 등이, 논계(論啓)한 말이 어긋났다 하여 이돈(李墩)을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나양좌(羅良佐)를 구원하려고 상소하기를,
"대로(大老)의 상소의 말이 절박하게 윤선거(尹宣擧)를 몰아세웠으니, 문생(門生)들의 마음에 몹시 박절하게 여겨 한 번 변명해 보려고 함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말을 해가는 사이에 실로 화평한 면은 없고 거의 과격한 말이 많았으니 진실로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서히 따져보지 않고 무거운 율(律)을 내리어 위엄과 노심(怒心)의 진동이 겹치게 되면 몰골이 수참(愁慘)하게 됩니다. 오도일(吳道一)에게 있어서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奏達)하는 일을 한 것인데 죄를 주었으니, 이 이후로는 비록 지나친 일이 있으시더라도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봉조하(奉朝賀)의 상소는 그전에 규계(規戒)한 말들을 가져다 그 원위(源委)를 진달(陳達)한 것이고, 본래 지금에 와서야 새 말을 만들어내어 터무니없는 말로 공격하고 배척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이른바 ‘절박하게 몰아세웠다.’는 말은 어떤 일이고, ‘몹시 박절하다.’는 말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이미 변명해야 할 만한 원통한 일이 없었으니, 나양좌의 무리들의 심술이 간사함은 알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봉조하(奉朝賀)는 여러 대의 조정에서 예우(禮愚)하던 대로(大老)이니, 조야(朝野)에서 평소에 추앙하고 긍식(矜式)이 됨이 어떠했겠느냐? 한번 의논이 마구 터져 붕당(朋黨)이 갈려서 대립하게 된 뒤부터는, 자기 자신 하나의 사심(私心)에 가려 병이 지심(秉彛之心)126) 을 잃어버리고,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와서 겉으로는 존경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배척하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침해하여 모욕하고 업신여겨 헐뜯는 짓을 하기를 조금도 아낌없이 하여 평소에 존경하고 사모하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헌신짝 벗어 버리듯이 하고 있다. 의리(義理)가 막히고 시비(是非)가 혼동됨이 어찌 오늘날과 같은 때가 있겠는가? 진실로 천하 후세에 들리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윤선거(尹宣擧)는 본래 모함을 받은 일이 없는데도 급급하게 신변(伸辨)하기를 오히려 혹시라도 늦어지게 될까 염려하고, 대로(大老)가 소소한 관원들에게 모함받음이 그처럼 참혹하고 심각했는데도, 곡진하게 구원하면서 오히려 견벌(譴罰)을 받게 될까 걱정한다. 한 가닥이라도 악(惡)을 싫어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부끄러운 짓임을 알지 못하겠느냐? 이와 같이 공정을 배반하고 당(黨)에 죽을 힘을 다하는 의논은 내가 차마 바로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3월 21일 기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평(持平) 유집일(兪集一)·이익수(李益壽)가 또한 나양좌(羅良佐) 등에 대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기를,
"윤휴(尹鑴)는 사문 난적(斯文亂賊)이고 주자(朱子)는 대현(大賢)입니다. 사문난적의 당(黨)이 되어 대현을 배반하는 것이 어떠한 죄입니까? 이번에 이를 가지고 지하(地下)에 있는 현사(賢師)에게 가했으니, 생삼(生三)·사일(事一)127) 의 의리에 있어 눈물을 흘리며 소장(疏章)을 올려 한번 신설(伸雪)하려고 함은 진실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말해 가다가 더러 올바른 데에서 벗어나기는 했었습니다마는, 어찌 급작스럽게 위엄과 노여움을 가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오도일(吳道一)을 특별히 파직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하였다. 또 이돈(李墩)이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한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옥당(玉堂)에서 제멋대로 영합(迎合)하여 공격한 것은 진실로 너무나 터무니없다고 논계(論啓)하여, 홍수헌(洪受瀗)·송상기(宋相琦)를 모두 체차(遞差)하도록 명하기를 청하였다. 또 입시(入侍)한 대신(臺臣)들이 입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아 대신의 체통을 손상했다 하여, 장령(掌令) 김호(金灝)를 체차하기를 청하였다. 전교하기를,
"지평(持平) 유집일·이익수를 우선 모두 체차하라."
하고, 또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이번에 나양좌(羅良佐)의 무리가 대로(大老)를 못되게 헐뜯은 상소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큰 변이니, 무릇 삼사(三司)에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명백하게 분별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여 일구동성으로 죄주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지평 유집일과 이익수 등이 한갓 사당(私黨)을 비호(庇護)할 줄만 알고 지극히 엄정(嚴正)한 공론은 돌아보지 않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자신이 나서서 구원하느라 저 편은 억제하고 제 편은 부추기는 짓을 하여 심정과 실태(實態)가 모두 드러났다. 그들의 이른바 ‘사문난적의 당이 되어 대현을 배반하는 것이 어떠한 죄라고 지하에 있는 현사에게 가하느냐?’는 등의 말은 있는 힘을 다하여 조절(操切)128) 하고 침핍(侵逼)한 말로서, 이는 바로 윤선거(尹宣擧)가 있는 것만 알고 대로(大老)가 있음은 알지 못한 것이다. 대로(大老)가 이 무리에게 무슨 죄를 진 것이 있기에 시기하여 미워하고 배척하여 거절하기를 한결같이 이에 이르도록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진실로 통탄스럽다. 유집일과 이익수는 모두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으라."
하였으며, 전교하기를,
"나양좌 등의 유배(流配)와 사판(仕版)에서의 삭제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일은 한 번만 하더라도 이미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하물며 양사(兩司)에서 다같이 하는 것이겠는가? 이는 사당(私黨)의 기세를 믿고서 요행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양좌의 배소(配所) 단자(單子)를 곧 계하(啓下)하겠으니, 오늘 안으로 압송(押送)하고, 배소에 도착한 날짜를 해도(該道) 감사(監司)로 하여금 계문(啓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대신(臺臣)이 계사(啓辭)를 수습하기 전에 바로 배소로 내보냄은 뒷날의 폐단과 크게 관계가 있음을 들어 여러 차례 아뢰어서 쟁집(爭執)하니, 임금이 비로소 수습한 다음에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정언(正言) 김우항(金宇杭)이, 나양좌 등에 대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계사(啓辭)는 결코 그대로 참여하기 어려움을 들어 인피(仁避)했다. 이 뒤에 집의(執義) 이홍적(李弘迪)도 똑같이 인피하다가 이내 나와서 나양좌 등에 대한 계사를 정지하였다.
3월 22일 경자
돌아온 사은사(謝恩使) 낭선군(郞善君) 우(俁)와 김덕원(金德遠)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김덕원이 아뢰기를,
"한인(漢人) 곽조서(郭朝瑞)가 오삼계(吳三桂)의 신하로서 주류하(周流河)에 유배(流配)되어 있기에, 신(臣)이 태극 달자(太極㺚子)들의 소식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여기에 온 사자(使子)가 말하기를, 「섬서(陝西)와 산서(山西)는 원래 우리 땅이므로 만일 내놓지 않는다면 마땅히 무기(武器)를 가지고 일을 해내겠다.」고 하므로, 황제(皇帝)가 성을 내고 또한 두려워하여 여러 곳에 있는 둔전(屯田)의 갑병(甲兵)을 이미 모두 철수시켜 각진(各鎭)으로 돌아왔고, 증원한 군사 8천 명은 아직 보내지 않고 남겨 두었으며, 땅을 갈라 주려고는 들지 않고서 단지 갖옷[裘]과 말[馬] 및 폐백(幣帛)만 더 주어 강화(講和)했는데, 이로 인해 드디어 사단이 이루어지게 될 듯하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우윤(右尹) 이수언(李秀彦)이 그의 스승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위해 상소하기를,
"윤선거(尹宣擧)는 병자년129) 과 정축년130) 의 난리 뒤부터는 세상 일에 대한 뜻을 끊고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에게서 수업(受業)하였으므로, 송시열이 그의 자정(自靖)하는 의리를 대단하게 여기며 도의(道義)로 사귀기를 허락했었습니다. 사문 난적(斯文亂賊) 윤휴(尹鑴)가 《중용(中庸)》의 주(註)를 고쳤을 적에 송시열은 사문(斯文)의 죄인으로 여겼는데, 윤선거는 이단(異端)에 해당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윤선거가 송시열에게 서함(書緘)을 보내기를 ‘희중(希仲)과 자주 서로 방문하느냐?’고 했었고, 또한 권준(權儁)에게 서함을 보내기를, ‘우·춘(尤春)이 세도(世道)를 담당하게 되겠는데, 성·희(誠希)와 덕(德)을 합치게 될 수 있겠느냐?’고 했었습니다. 우(尤)는 송시열의 호(號)이고 춘(春)은 송준길(宋浚吉)의 호이며, 희중(希仲)은 윤휴이고 성(誠)은 권시(權諰)입니다. 이때 윤선거가 바야흐로 윤휴를 존경하고 있으면서 기필코 송시열이 자기와 마음을 같게 하려고 했으나 송시열이 달가와하지 않으므로, 윤선거가 근심하고 한탄하여 그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지금 나양좌(羅良佐) 등이 마치 송시열이 당초에는 윤휴를 배척하지 않다가 예론(禮論)이 생긴 뒤에 그가 자기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미워하여 비로소 거절한 것처럼 했으니, 어찌 속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시열이 전조(銓曹)에 들어갔을 적에 윤휴가 어미의 복(服)을 마쳤었는데, 윤선거가 송시열에게 서함을 보내기를, ‘희중(希仲)이 거상(去喪)한 지 이미 오래인데, 성상께서 소식을 물어보거나 선외(先隗)131) 하는 수는 없으니, 잘못하여 해가 있게 되지나 않겠습니까? 한 마디 말을 진달(陳達)함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했었습니다. 그 뒤에 송시열은 윤휴를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하고, 송준길은 윤휴를 지평(持平)에 의망했던 것입니다. 윤선거가 또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서함을 보내기를 ‘이번에 희중(希仲)을 임용(任用)하려는 사람이 공론을 들어 말을 한다면 희중이 자기 변명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작록(爵祿)으로 묶기만 한다면 희중이 반드시 멀리 도망가게 될 것이니, 대사헌(大司憲)의 직책을 제수함은 참으로 그를 괴롭히기만 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므로, 송시열이 답하기를, ‘희중의 도덕은 진실로 얕고 고루한 내가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삼대(三代) 이후로는 인물(人物)이 이천(伊川)132) 만한 이가 없었고, 여·마(呂馬)133) 등 제현(諸賢)에게 교수(敎授)·설서(說書)의 벼슬을 추천하여 제수하니, 혹은 받고 혹은 받지 않았었지만, 이천에 대하여 추천과 제수를 그르게 했다고 여겼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과연 진청(陳請)해야 한다면, 마땅히 「아무개가 이미 복(服)을 벗었으니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마땅히 「친림(親臨)하여 만나보아야 합니다.」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이 몇 가지 일은 저[弟]와 같은 사람은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했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윤선거가 윤휴의 처지를 위해서 어떻게 했고, 송시열이 윤휴를 임용시킨 것은 과연 사모하고 기쁘게 여겨 임용시킨 것이겠습니까? 기해년134) 에 예론(禮論)이 생겼을 때 윤휴가 ‘임금을 비하(卑下)하고 종통(宗統)을 둘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되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모두 화(禍)를 일으키려는 마음이 있는 것임을 알았었는데, 윤선거는 유독 경솔하다고 했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어둑하고 침침하다.’고 했고, 나양좌(羅良佐)의 무리들도 일찍이 ‘윤선거나 윤휴와 끊었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침침하고 어둑하게 여기고서 끊었다면 이는 소인(小人)으로 여긴 것인데, 또한 어떻게 ‘융화하고 보합(保合)하여 정신을 모아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양좌의 무리가 대로(大老)를 모함하여 멋대로 짓밟는 짓을 하는데도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당(黨)을 비호(庇護)하기에만 급급하여 서로 잇달아서 구원하니, 내가 진실로 개탄한다."
하였다.
3월 23일 신축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사면(辭免)하였다.
3월 25일 계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권항(權恒)·유명웅(兪命雄)을 지평(持平)으로, 임영(林泳)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헌납(獻納) 최규서(崔奎瑞)가 상소하여 나양좌(羅良佐)·오도일(吳道一)·유집일(兪集一)·이익수(李益壽) 등을 구원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진실로 놀랍게 여긴다."
하였다. 정언(正言) 임환(林渙)이 또한 상소하여 나양좌·오도일·유집일·이익수 등을 구원하고, 이어 경연(經筵)에서 이돈(李墩)을 배척한 유신(儒臣)들을 공격하니, 비답하기를,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멋대로 구원하는 것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거니와, 좋고 나쁜 것을 분명히 하고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대관(臺官)을 부앙(俯仰)135) 한다고 배척하기까지 했으니, 더욱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3월 26일 갑진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또 석강(夕講)에 나아갔는데, 특진관(特進官) 이규령(李奎齡)이 영남(嶺南)의 인재(人才)들을 조용(調用)하기를 청하니,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경상도(慶尙道) 산음현(山陰縣)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목 하나에 귀는 둘이었으나 입이 둘, 눈이 넷이고 몸뚱이 하나에 발이 넷이었는데, 곧 죽었다.
3월 27일 을사
심유(沈攸)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侍讀官) 김만길(金萬吉)이 아뢰기를,
"최규서(崔奎瑞)의 상소 내용에, ‘사림(士林)들의 존경하여 추앙(推仰)하고 경모(景慕)함이 어찌 다름이 있었겠습니까?’라는 말은 매우 옳지 못합니다. 윤선거(尹宣擧)를 어찌 송시열(宋時烈)과 비등하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이 말이 비록 윤선거를 절박하게 몰아세운 일이 있었기는 하지만, 본래 규계(規戒)하고 모든 것을 잘하도록 하기 위해 나온 것이므로, 그의 아들이 사사로이 통탄할 일이 아닙니다. 윤증(尹拯)이 스승이라 하고 제자라 하며 송시열의 문하에 드나든 지 이미 수십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의 당(黨)이 많아진 것을 믿고서 이에 배척할 생각을 하는 것은 단지 스승을 배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불효(不孝)한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고, 또 최석정(崔奭鼎)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의망(擬望)한 것을 들어 전조(銓曹)를 배척하기를,
"공론(公論)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이 당초에 겉으로는 높이고 속으로는 배척하는 말을 하여 스스로 지극히 원통하다고 하다가 이제 와서는 나양좌(羅良佐) 등의 일을 이처럼 급급하게 구원하고 있으니, 겉으로는 높이고 속으로는 배척하고 있다는 말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이조(吏曹)의 해당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했다.
3월 29일 정미
평안도(平安道) 함종현(咸從縣)에서 지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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