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1. 1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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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신해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관(講官)이 군주가 법(法)을 쓰는 도(道)를 조금 논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옳다. 법을 쓰는 도는 오직 공(公)일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그렇지 못하여 흔히 형세에 따라 〈법을〉 굽히는 경우를 면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지난날 정제선(鄭濟先)의 일 같은 경우, 살인한 것이 아주 명백한데도 그가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선부(李善溥)가 급급하게 이두진(李斗鎭)의 계론(啓論)을 중지시키고 구해(救解)하려고 하였으니, 그 행동거지가 해괴하다. 임금이 법을 적용할 때도 친소(親疎)에 따라 조종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요. 신하가 법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도 강유(剛柔)에 따라 강자를 두려워하고 약자를 깔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면계(勉誡)하시니, 감히 공경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2월 2일 임자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첫번째 사직서를 올렸는데,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批答)을 세 차례나 내렸다.

 

12월 3일 계축

유성(流星)이 유성(柳星)의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장계(狀啓)를 보니 재앙의 참혹함이 이전에 없던 바입니다. 섬 안은 육지와 다르니 만약 특별히 마음을 써서 구제하지 않는다면 세 고을의 백성들을 구제할 길이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일찍이 신해년318)  에도 전후에 곡물을 운반한 것이 3만여 석(石)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양남도(兩南道)319)  는 비록 심한 흉년이었지만, 연해(沿海)의 곡물들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들여 보낸 것입니다. 지금은 양남도의 저축이 텅 비어서 본토(本土)의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데도 넉넉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우선 연해의 조금 넉넉한 곳에서 7천여 석을 분정(分定)해서 이송하여 나누어 주게 한다면 이것으로 맨처음 백성을 구제할 밑천을 삼을 수는 있겠으나, 또한 장차 부족하게 될 것이니, 섬 안 백성들의 일이 진실로 매우 급박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주도는 육지와 다른데 금년 농사가 이렇게 참혹하게 흉년이 들었으니, 7천여 석의 곡식으로 어떻게 허다한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진휼하는 곡물을 계속 보내도록 진휼청(賑恤廳)의 당상관(堂上官)과 상의하여 요량해서 이송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니, 진휼청 당상관 이사명(李師命)이 아뢰기를,
"양서도(兩西道)320)  의 전세(田稅)는 상납(上納)의 규정이 없는데, 을사년321)  과 정사년322)  에는 두 차례 베[布]를 받아서 썼습니다. 지금 양서도의 조세를 거두어들인 문서가 올라오지 않아 전세미의 수량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을 가져와서 제주도로만 이송할 것이 아니라 서울도 경비가 많이 드는 도이니 이송시킬 수량을 적절히 정하여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지난날 신이 유세기(兪世基) 등이 백성을 동원하여 방죽을 쌓은 일을 다시 조사하도록 청하였으나, 강도(江都)에 방죽을 쌓는 일에 대해 일찍이 금령(禁令)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다만 보장(保障)의 중지(重地)에다가 사대부(士大夫)가 사사로이 방죽을 쌓아 장전(莊田)을 만드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을 아뢰었습니다. 비로소 비국(備局)의 등록(謄錄)을 보니, 을미년323)  에 고(故) 상신(相臣) 홍중보(洪重普)가 유수(留守)가 되어 처음으로 방죽을 쌓았는데, 조정의 분부는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되 백성을 모아들여 농사지어 먹을 수 있는 장소로 삼게 하라는 것이었을 뿐 본토(本土) 사대부들에게는 나누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을사년324)  에 이르러 또 방죽을 쌓는 일로 인하여 별도로 사목(事目)을 만들었는데, 그 한 조항에, ‘방죽을 쌓아서 만든 농토를 농민과 군사를 모아 나누어 줄 때는 선왕조(先王朝)의 결정에 따라 원래부터 거주하던 사람에게는 절대로 나누어 주지 말 것이며, 비록 타처의 사람이라도 만약 노비를 몰래 보내어 응모하게 하여 나누어 받은 후에 그 땅을 자기의 소유로 하려고 한 사실이 드러나면, 조정의 관원이나 사인(士人)을 물론하고 무거운 죄를 부과하여 결코 용서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여 전후의 사목이 지극히 엄명합니다. 노비를 보내어 응모하는 것도 오히려 또한 금지했는데, 사대부가 어찌 감히 사사로이 스스로 방죽을 쌓아 장전(莊田)을 만들 계획을 하겠으며, 본부(本府)의 관원이 또한 어찌 감히 마음대로 입안(立案)을 허락하겠습니까? 지금 유세기(兪世基) 무리들이 방죽을 쌓는 일은 이미 드러나 죄를 받았으니, 이후로는 거듭 밝혀 금단(禁斷)하게 하고, 또 을사 사목(乙巳事目) 후에도 사대부의 집안에서 방죽을 쌓아 장전을 만드는 일이 또한 많이 있다고 하니, 본부(本府)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 내어 계문(啓聞)해서 속공(屬公)케 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 백관들의 태만함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성실하게 직임을 다해도 책임을 다하기가 어려운데, 전례에 따라 돌아가며 하는 숙직(宿直)도 빼어 먹으니, 이보다 더 한심한 일이 없다. 종부시(宗簿寺)의 경우는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는 곳이니 사체(事體)의 중함이 다른 관아와 다른데도 겨울 석달 동안의 생기(省記)325)  를 살펴보건대 10월에는 가관(假官)으로서 숙직을 대신한 것이 7일이요, 11월은 더 많아 13일이나 되었다. 어젯밤에 적간(摘奸)하매 또 숙직을 대신하였으니, 그들이 거만한 태도로 제 편안만을 하려는 습관이 이미 극도에 다달아 놀랄 만하다. 만약 국가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연달아 가관으로 하고 어람 생기(御覽省記) 중의 것을 수정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가?"
하고, 주부(主簿) 윤담(尹譚)과 직장(直長) 송담(宋曇)을 모두 잡아들여 문초하여 정죄(定罪)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正)은 입직하는 일이 없는가?"
하니,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입직하면 각 관아는 모두 장관(長官)이 생기(省記)를 하도록 합니다. 평상시에는 정(正)이 입직하는 규정이 없으나, 관리들이 모두 연고가 있을 때에는 어찌 스스로 장관이라고 해서 입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본시(本寺)326)  의 정(正) 이시만(李蓍晩) 역시 함께 잡아다 죄를 묻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7일 정사

헌납(獻納) 민진주(閔鎭周)와 정언(正言) 심권(沈權)이 계청(啓請)하기를,
"내수사(內需司)와 각 군문(軍門) 및 충익부(忠翊府)·사복시(司僕寺) 등의 은전(銀錢)과 미포(米布)를 모두 함께 진휼청(賑恤廳)으로 이송하여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데 보태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내수사에 만약 옮겨서 진휼(賑恤)에 보탤 자본이 있다면 어찌 그대들의 논청을 기다렸겠는가? 다른 나머지의 일은 곡절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홍산(鴻山)의 유학(幼學) 방숙제(方叔齊)가 장릉(長陵)327)  을 마땅히 옮겨야 한다는 뜻의 소(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풍수(風水)의 술(術)이 심히 불분명하나 분묘를 정하고 집터를 잡는 일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만히 오늘날의 일을 헤아려 보니, 기해년328)   이후 재화(災禍)의 빌미가 다단(多端)하니, 혹시 파주(坡州) 땅의 장릉(長陵)이 그 적지(適地)를 얻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그림을 손으로 문지르는 것은 진짜 얼굴을 맞대고 앉는 것만 못하며, 지자(智者)가 먼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곧 신(臣)으로 하여금 장릉에서 대죄(待罪)하게 하여 산수의 추향(趨向)과 풍기(風氣)의 순잡(純雜)을 삼가 자세히 살피게 하여 그 개장(改葬)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되는가의 양단(兩端)을 결정하소서."
하였는데, 소(疏)가 승정원(承政院)에 이르자 승정원에서는 방숙제가 망령되이 능침(陵寢)을 논하였다고 하여 유사로 하여금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고, 그 소는 돌려 주도록 청하였다. 또 한편의 의논은 방숙제의 소가 소견이 없지 않은데도 승정원에서 지레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자고 청한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하니, 승정원에서는 외부 여론으로 인해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그 소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이에 옮겨 모실 것인지의 여부를 대신들에게 물으니,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은 말하기를,
"세상의 여론이 떼 지어 일어나 대부분 옮겨 모시자는 설을 주장하니, 성상께서는 널리 자문을 구하여 대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이단하(李端夏)는 말하기를,
"산릉(山陵)의 사체(事體)는 지극히 중대하니 어찌 풍수(風水)의 허탄(虛誕)한 설로써 구원(久遠)의 침원(寢園)을 함부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민간의 사대부 집안으로써 말하면 근래에 천장(遷葬)의 폐단이 지극히 어지럽게 일어나 이로 인해 화패(禍敗)를 만나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단하의 의논에 따랐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12월 8일 무오

이여(李畬)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12월 10일 경신

사형수의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이진휴(李震休)를 정언(正言)으로, 민진주(閔鎭周)와 김창집(金昌集)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돈(李墩)을 사인(舍人)으로, 강현(姜鋧)을 검상(檢詳)으로, 김만채(金萬埰)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서문유(徐文𥙿)를 수찬(修撰)으로, 김구(金構)를 부교리(副校理)로,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이익수(李益壽)를 지평(持平)으로, 한범제(韓范齊)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호군(護軍) 이세화(李世華)가 종묘 향사를 절감(節減)해야 한다는 의론으로 인하여 각도(各道)의 성묘(聖廟)329)  와 사직(社稷)·성황(城隍)·여단(厲壇)·서원(書院)·사우(祠宇) 및 전라도의 경기전(慶基殿), 함경도의 각 능전(陵殿), 평안도의 숭인전(崇仁殿)에도 해마다 연례적인 제향(祭享) 이외에 조금이라도 상(傷)한 곳이 있으면 곧 고유(告由)하여 옮겨 환안제(還安祭)를 지내는데, 이것은 절사(節祀)와 더불어 경중(輕重)을 차별하여, 향사(享祀)하는 물건의 기록이 자못 많으니, 변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는 뜻의 소를 올렸다. 임금이 해조(亥曹)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였으나 해조에 의해 저지되었다.

 

장씨(張氏)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330)  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경신년 인경 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가 곧 명(命)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내 신씨(申氏)가 기화(奇貨)331)  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신유년332)  에 내전(內殿)333)  이 중전(中殿)의 위에 오르자 그 일을 듣고서 조용히 명성 왕후에 아뢰기를,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宮人)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명성 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내전이 말하기를,
"어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국가의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명성 왕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명성 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다시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고, 자의전(慈懿殿)334)  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총애하였다.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내전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마침내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이때 징(澂)의 아내는 상시 자의전(慈懿殿)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었는데, 자의전은 나이가 많은데다 또한 징의 아내를 믿고 있었으므로,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하고 내전과는 소원하였다. 이때 징의 아내는 안으로는 날로 임금과 자의전에게 차츰차츰 참소(讒訴)하고, 밖으로는 그 아들 항(杭)으로 하여금 장씨의 형 장희재(張希載)와 모의하여 정(楨)·남(枏)의 여당과 결탁해서 밤중에 모여 중전(中殿)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에 앞서 계해년335)   3월 13일은 인조 반정(仁朝反正)의 회갑(回甲)이 되는 날이었다.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어 조정 대신 이하의 관원이 모두 공주의 집에 모였는데, 기녀를 많이 모아 그들로 하여금 술을 따르고 가무(歌舞)를 하게 하였다. 그 중에 숙정(淑正)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노래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술을 마신 후 손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숙정과 더불어 희롱하려 하였는데, 숙정의 남편이 곧 장희재였다. 장희재는 이때 포도 부장(捕盜部將)으로서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몰래 숙정을 불러내어 달아나 버리니 어떤 사람이 여러 대신들에게 그 일을 고하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조정의 큰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술을 따르는 기녀가 먼저 달아났으니 사체(事體)가 놀랄 만하다.’ 하고,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기녀를 불러내어 데리고 간 그 남편을 곤장으로 엄하게 다스리게 했다. 장희재는 이 일로써 독을 품은 것이 뼈에 사무쳤는데, 혹자는 ‘이 일이 또한 화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가을에 부교리(副校理) 이징명(李徵明)이 소를 올려 논하기를,
"종사(宗社)의 존망이 반드시 여기에 매여 있지 않다고 기필할 수 없으니, 방출(放出)할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잘못 전해진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 김창협(金昌協)이 재앙을 만나 경계할 일을 늘 아뢰었는데, 궁중에서 집을 새로 건축하는 일을 논하여 아뢰기를,
"어제 사헌부(司憲府)의 계(啓)에 대해 전하께서는 전해 들은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근래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목(大木)을 구하는 공사(工師)가 자못 민간에 출입하니 대간의 아뢴, ‘장인(匠人)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운반하는 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한다.’는 것이 과연 거짓말이 아닙니다. 【흑자는 말하기를, "임금이 장씨를 위하여 별당(別堂)을 지으면서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다." 하였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하교하시고는 안으로는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는 변명을 하시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징명(李徵明)의 소가 전하의 노여움을 거듭 범하자, 그 때의 성교(聖敎)는 전적으로 ‘척리(戚里)’ 한 조항으로써 죄를 삼으셨고, 아래의 한 가지 일은 잘못 전해들은 것으로 핑계대셨지마는, 전하는 얘기들이 끝이 없이 모두 궁중(宮中)에 실지로 그 사람이 있다고 하니, 전하께서 이징명에게 노한 것은 실로 이 일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억측이 너무 심하다."
하였다. 임금이 전후의 소에 대해 꺼리는 비답(批答)을 내린 것은 그 사람이 선후(先后) 때에 내침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이러한 명이 있은 것은 어찌 치란(治亂)이 운수(運數)가 있으므로 사람의 힘을 용납하기가 어렵고, 화의 기틀이 장차 다가오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의 무리들이 장희재의 힘에 의지하여 끝내 기사(己巳)의 변(變)을 이루어 어진이를 죽이고 나라를 해쳐 종실(宗室)의 제사를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끝내는 내전(內殿)을 사제(私第)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장씨(張氏)가 대신 곤위(壼位)에 올랐으니, 아! 명성 모후(明聖母后)의 원려(遠慮)와 밝은 예견은 실로 역사상 없던 일이다. 그리고 우리 성상(聖上)의 영명(英明)하고 강의(剛毅)한 자질로서도 오히려 이같이 전에 없던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었으니, 심하도다. 여자를 총애함이 마음을 고혹(蠱惑)시키고 덕을 해침이여, 아!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12월 11일 신유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만길(金萬吉)이 아뢰기를,
"광무제(光武帝)가 동선(董宣)을 용납한 것은 진실로 어진 일입니다. 인정으로 말한다면 공주(公主)의 말을 듣고 반드시 노할 것인데, 곧 돌이켜 잘못을 깨달았으니 어질지 않고서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천자는 평민[白衣]과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본보기가 될 만한 말입니다. 포의(布衣)를 입은 평민은 비록 한때 법을 어기더라도 해가 없을 수도 있지만, 제왕의 경우에는 그 해가 무궁한 것입니다."
하고, 전경(典經) 송주석(宋疇錫)이 아뢰기를,
"신도 이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일찍이 효종(孝宗) 당시에 흥평위(興平尉)의 궁노(宮奴) 가운데에 체포해야 할 사람이 있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당시 포도 대장으로서 그 궁노를 심문하여 다스렸더니 효종께서 특별히 견책(譴責)을 가했습니다. 신의 조부가 계(啓)를 올려 아뢰기를, ‘이완은 잘못이 없습니다. 궁노에게 진실로 체포당할 일이 있었다면 어찌 잡아서 다스릴 수 없겠습니까? 옛날에 정자(程子)의 어머니가 「내 자식이 남에게 굽힐 수 없을까를 걱정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제왕가(帝王家)의 자제이겠습니까?’ 하니, 효종께서 하교하여, ‘그 말이 어디에 있는가?’ 하시자, ‘《근사록(近思錄)》과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효종께서 크게 감탄하시고 칭찬하시기를, ‘내가 오늘 가언(嘉言)을 얻어 들었노라.’하시고, 이에 이완을 견책하는 교지(敎旨)를 도로 거두도록 명하고는 특별히 흥평위(興平尉)를 추문(推問)하였습니다. 효종의 이 거조는 실로 광무제(光武帝)와 서로 부합(符合)하시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항시 성조(聖祖)의 법을 준수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장씨(張氏)를 숙원(淑媛)에 봉하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이징명(李徵明)의 소에 대한 대답에, ‘잘못 전해 들은 데서 나왔다.’고 하셨으므로, 신 등은 의혹하여 이징명에게 망언(妄言)을 하였다고 책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상께서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므로, 곧바로 하교하심이 불가할 것이 없는데, 급작스레 봉작(封爵)의 명이 계시니, 지난날 소에 대해 내린 비답(批答)의 뜻과는 다름이 있어 마치 성실함이 부족한 듯하여 지극히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 어찌 속이거나 숨기는 뜻이 있겠는가? 이징명의 소에 ‘은총을 입은 자가 많다.’는 말이 있었고, 또 ‘참언(讒言)을 믿는다.’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는 것이고, 원래 이러한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송주석(宋疇錫)이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뜻이 비록 이와 같으나 신들은 ‘원래 이러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명백히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직 세자(世子)가 없으니 궁인(宮人) 중에 은총을 입은 자가 많다고 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처음에 만약 하교하시기를, ‘진실로 은총을 입은 자는 있으나 참언을 믿은 적은 없다’라고 하셨다면 신들이 환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인데 비답(批答)의 뜻이 명백하지 않은데다 갑작스럽게 어제의 명이 계시니, 성실하지 못한 데로 귀착됨을 면할 수 없어 성덕(聖德)에 손상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본래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소의 비답에 쓴 말이 명백하지 않은 듯하여 경연(經筵) 석상에서 분명하게 밝히려고 하였으나, 아직 하지 못하였다. 아뢴 바가 실로 옳으니, 내가 마땅히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는데, 김만길(金萬吉)이 아뢰기를,
"송주석은 세자가 아직 없는 것을 염려하여 시중드는 빈(嬪)이 많은 것을 해롭지 않다고 하였으나, 무릇 사람이 품부(稟賦)받은 바는 각기 달라 혹 생명에 해가 될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혹 정령(政令)의 사이에 해로움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이것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기(史記)》를 보니, 여자를 총애함으로써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실정(失政)하게 된 자가 많았으므로 내가 상시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하물며 나는 종묘(宗廟)의 부탁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가볍게 행동하겠는가?"
하였다.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상소하기를,
"금창 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은 직위가 정3품이었는데, 지난해에 자급(資級)이 올라 종2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직(行職)336)  으로 하비(下批)하였는데, 지금 또 자급이 올라 정2품의 관함(官銜)으로 삼았습니다. 하비하는 규정에 군직(軍職)인 서반(西班)의 중추부(中樞府) 외에는 일찍이 2자급을 내려 행직으로 삼는 예가 없었습니다. 해조(該曹)에서 창졸간에 정사(政事)에 엄하다 보니 고증할 만한 조문을 찾지 못하였고, 또 행직으로 계하(啓下)하였으므로, 해당 관직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이 상례와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한 번 작정한 것은 그만둘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12월 13일 계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우의정 이단하(李端夏)의 차자 가운데 공안(貢案)에 관한 1조항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금년 세입의 실제 수량은 제도(諸道)의 수조안(收租案)이 모두 도착한 후에라야 알 수 있으나, 공물(貢物) 및 모든 용도에 관계되는 것과 세입의 수량을 비교하여 마련하고 조용히 강정(講定)해서, 품지하여 시행할 일을 미리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종전에 공물가(貢物價)와 물품의 종류는 많이 재감(裁減)하였으나, 대소 용도는 전보다 감하여진 것이 없으니, 한갓 백성의 원망만을 사게 되고 끝내 실효가 없습니다. 반드시 모름지기 먼저 힘써 절감(節減)한 뒤에라야 재감하는 정치가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공(御供)은 전후로 재감하여 다시 여지가 없으나, 신해년337)  에 재감한 것 가운데 만약 다시 옛날로 돌아가 아직까지 도로 감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시 아뢰게 하는 것이 합당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사하도록 분부하여 한결같이 신해년에 재감한 바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연전에 재감할 때에 신이 공조 판서 박신규(朴信圭)와 더불어 신해년338)  의 등록을 고출(考出)하여 그것을 본따서 만들었으며, 그 후에 다시 복구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세입이 크게 줄어들어 비록 이 재감(裁減)에 따르더라도 용도를 대기가 어렵습니다. 반드시 지금 남아 있는 비축과 세입의 수량을 모두 합하여 계산하고, 모든 용도가 이 수량을 넘지 않아야 궁색하게 되는 어려움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나아가 의논하게 하여 1년의 용도를 마련한 뒤 탑전(榻前)에 아뢰어 정하게 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해년의 재감에 더 감할 것은 없습니다만, 1년의 용도에 혹시 부족하다면 또한 반드시 신해년의 예로써 표준을 삼을 필요는 없으니, 다시 재감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이 마땅히 해당 관서의 당상관(堂上官)들과 상의하여 마련해서 아뢰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단하(李端夏)가 드디어 소매 속에서 문자를 꺼내어 읽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총재(冢宰)가 국가의 용도를 제정하는 데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나라에 9년의 비축이 없으면 부족(不足)하고, 6년의 비축이 없으면 급(急)하고, 3년의 비축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며, 3년을 경작하면 반드시 1년을 먹을 곡식이 있게 되고, 9년을 경작하면 반드시 3년을 먹을 것이 있게 되니, 30년을 통산(通算)하면 비록 한재(旱災)나 수재(水災)가 있더라도 백성에게 굶주린 얼굴빛이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주관(周官)의 비축하는 법이며 주공(周公)이 제정한 바입니다.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339)   5년에 이르러 탁지(度支) 장손평(長孫平)이 상주하기를, ‘주관의 저축법에 따라 청컨대 제주(諸州)의 당사(當社)로 하여금 모두 의창(義倉)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하자, 문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천하에 두루 사창(社倉)을 설립하게 하였으니, 그 뜻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 호씨(胡氏)도 사창이 현창(縣倉)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주자(朱子)의 사창법(私倉法)에 의거하여 관창(官倉)의 곡식을 대여하여 민간에 두루 사창을 세우게 하고, 6년 간 이자를 늘린 뒤에 본곡(本穀)을 갚게 한다면 관창에는 손해나는 것이 없고 사창에는 저축한 것이 있게 되니, 어찌 공사(公私) 양쪽에 모두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갑자년(甲子年)의 사목(事目)에 따라 민간에 효유(曉諭)하여 사창을 세우게 하고, 가을을 기다려 각기 그 동네에서 받아 보관하게 하되, 각도 각 고을로 하여금 설치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여 백성이 드물게 사는 산지 고을이나 동리 수가 많은 큰 고을에까지 어려움이 있는 마을마다 사창을 세우는데 이것은 비록 한 면(面)에 하나의 사창을 세우더라도 가합니다. 역촌(驛村)에도 모두 사창을 세우며, 이것은 비록 각 고을의 진휼곡을 대여하더라도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는 것이 가합니다. 사창에는 다섯 가지 이익이 있으니, 대여곡을 수령하거나 수납하는 데 관에 들어가기가 멀지 않은 것이 첫째 이익이오, 받을 때 감축(減縮)이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익이며, 납부할 때 더 보태는 수량이 없는 것이 세 번째 이익이며, 곡식을 대여곡의 이자를 받아 본곡(本穀)을 환납(還納)하게 하니, 절반은 길이 백성의 생업이 되는 것이 네 번째 이익이며, 가을과 겨울에 거두어 비축하여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이 다섯째 이익입니다. 금번 곡식을 거두어 들일 때에 새로 사창을 설립한다면 형장(刑杖)을 번거롭게 쓰지 않아도 모두 이미 다 받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이미 드러난 효과입니다. 3백 80주(州)에 비록 일일이 다 설치하기는 어려우나, 팔방(八方)에 힘써 효유(曉諭)하여 그들로 하여금 내년 가을까지 기다려 편리한 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고사(古事)에 경복궁 외의 각사(各司)에는 숙직하지 않음이 없으니, 날마다 상참(常參) 때에 생각한 바를 아뢰는 것인데, 사간원(司諫院)의 숙직은 대개 일을 아뢰는 것을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인조조(仁祖朝)에 간관이 숙직을 빠진 것을 적발하여 파직한 일이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의정부와 양사(兩司)는 적간(摘奸)하는 것 속에 들지 않는다."
하니, 이단하가 아뢰기를,
"그들로 하여금 시어소(時御所)의 직방(直房)에서 숙직하게 하는 것은 일을 아뢰는 것을 편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땔감이나 기름 등의 물건은 마련하여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단하가 아뢰기를,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흉년에 노비를 추쇄[推奴]하고 빚을 독촉하는 것은 모두 금령이 있는데도, 해미 현감(海美縣監) 강필건(姜必建)이 그 족인(族人)을 위해 병자년(丙子年)에 도망간 노비의 족속을 끝까지 추쇄하면서 혹독하게 형장(刑杖)으로 신문[訊問]하여, 한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 없으니, 잡아들여 신문하여 정죄(定罪)해야 할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들어 보니 매우 놀랄 만하다. 강필건을 잡아들여 신문[拿問] 정죄하고, 본도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4일 갑자

전교하여, 숙원방(淑媛房)에 사패 노비(賜牌奴婢) 1백 명을 나누어 주도록 해원(該院)에 분부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가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는 궁인(宮人) 장씨(張氏)를 숙원으로 삼았다 하니, 군왕의 말이 한 번 떨어지자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전날에 이징명(李徵明)이 소를 올렸을 때 전하의 비답(批答) 가운데에, ‘소의 끝에 운운(云云)한 것은 또한 잘못 전해 들은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이 있어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에 고명(高明)하신 전하께서는 실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며, 이징명이 논한 바는 과연 허망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여겼습니다. 또 대신들이 진달(陳達)하자 이징명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그 관직을 임명하시니, 신은 또 군주의 마음을 돌리시는 덕이 또한 우리 전하 같은 분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전조(銓曹)에서 이징명을 주의(注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매번 전하께서 낙점(落點)하기를 인색하게 하시니, 신은 또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이징명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오히려 석연(釋然)하지 못한 뜻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장씨에게 도리어 봉작(封爵)을 가하는 은전이 계시니, 전하의 전후 거조(擧措)가 과연 털끝만큼의 사의(私意)도 그 사이에 막힌 것이 없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궁중 안의 일은 금지된 것이므로 외조(外朝)에서는 참여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신하들이 어찌 감히 함부로 논하겠습니까? 일을 논하는 신하를 크게 꺾어버린 후에 반드시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이것은 고인(古人)이 말한, ‘뇌정(雷霆)의 위엄과 만균(萬勻)의 무게를 가지고 백성의 위에 베푼다면 감히 가까이 할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전하께서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하는 도리에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대저 군주의 일심(一心)의 사(邪)와 정(正)의 징험은 집안 사람에 대한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집안 사람 사이에서 정제 엄숙(整齊嚴肅)할 수 없으면, 또한 어찌 조정에 이르게 되고 일국에까지 미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왕자(王子)를 많이 두는 도리(道理) 때문에 이미 숙의(淑儀)의 선발이 있었는데, 또 반년이 지나지 않아 장씨(張氏)의 책봉이 있었으니, 삼가 궁중의 사이에 명분(名分)이 분명함을 알지 못하므로, 성색(盛色)340)  을 경계하라는 말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가만히 듣건대, 효종(孝宗)께서 궁인 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옹주(翁主)를 낳기에 이르렀으나, 임어(臨御)하는 날에 끝내 봉작을 내리는 한 명(命)을 아끼셨으므로, 성덕(成德)의 일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성조(聖祖)에게서 본받지 않으시고 이러한 오늘의 거조가 있으십니까? 또한 신이 삼가 깊이 우려하는 것은,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징명(李徵明)이 진언한 바의, ‘말을 들어 참소를 초래한다.’는 것이 훗날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의 간언을 한 번 듣고는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덕용(德用)이 바친 여자를 쫓아 내었으니, 신이 비록 변변찮으나 또한 어찌 감히 앞장서서 전하를 송나라 인종의 아래에 처하게 하여 곧바로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오직 성명(聖明)께서 밝게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봉작(封爵)은 고례(古例)로서 증명할 수 있는 일이며, 하물며 지난번 이징명(李徵明)의 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 ‘잘못된 것’이라는 한 조항은 연석(筵席)에서 나의 뜻을 자세하게 다 말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사실 밖의 일을 더 보태니, 이것이 모두 성의(誠意)가 성실하지 못하고 시태(時態)를 잘 알지 못하여 이러한 감히 할 수 없는 거조를 하게 되어 그대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결과까지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도 소 가운데 임어(臨御)하는 날에 끝내 한 명(命)은 아꼈다고 말한 것은 더욱 사실과 틀리는 일이오, 그 미색(美色)을 좋아하고 총애함 때문이라는 설에 이르러서는 억측이 너무 심하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심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전교하여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를 체차(遞差)하도록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궁인(宮人)들은 왕족(王族)들과 체결(締結)하고, 왕족들은 사대부(士大夫)들과 결탁하여 갖가지로 아첨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捏造)하며 음흉한 소문을 지어내어 군주를 모함하는 습관은 진실로 매우 통탄할 일이다. 지금부터 이와 같은 일은 드러나는 대로 효시(梟示)하는 것을 영갑(令甲)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의 전교 가운데 왕족(王族)은 대체로 제공주(諸公主)들을 가리킨 것으로서, 익평 공주(益平公主)의 집이 더욱 의심을 받았다. 나중에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환수(還收)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87면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치안(治安)

 

전교하기를,
"수라간(水剌間)의 하인 장업(莊業)·업이(業伊)·이열(二烈) 등이 어소(御所)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감히 큰소리로 싸우니, 그 교만하고 방자한 습관은 지극히 통탄하고 놀랄 만하다. 모두 유사로 하여금 가두어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承政院) 【이유(李濡)·이사영(李思永)이다.】 에서 아뢰기를,
"한성우(韓聖佑)의 소 가운데 말이 실로 정도에 지나친 것은 있으나, 그 본래의 실정을 구명(究明)해 보면 나라를 근심하고 전하를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조용히 그 뜻을 구명해 보지 않고 의심내어 노(怒)함이 너무 급하여, ‘그대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는 등의 전교(傳敎)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 예로부터 신하가 비록 광망(狂忘)한 말을 한 일이 있었더라도 군주가 임금을 경멸하고 모욕했다는 죄를 씌운 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궁중의 음흉한 무리들이 사대부들과 체결(締結)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고 군주를 모함한다는 전교에 이르러서는 더욱 미안(未安)합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이 비록 지극히 볼 모양이 없지마는 어찌 궁인들과 체결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리저리 점점 격노(激怒)하시어 이러한 억측의 전교(傳敎)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평일에 전하에게 기대하던 바이겠습니까? 청컨대, 정언 한성우를 체차(遞差)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거듭 헤아리심을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이것은 시끄럽게 떠들 일이 아니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다음날 승정원(承政院)과 옥당(玉堂)에서 청대(請對)하자, 전교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바를 글로 써서 올리라."
하였다. 좌승지 홍만종(洪萬鍾), 우승지 이언강(李彦綱), 좌부승지 이유(李濡), 동부승지 이사영(李思永)이 아뢰기를,
"한성우(韓聖佑)의 소 가운데에 사용한 말들이 전연 짐작이 없어서 광망(狂忘)하고 경솔함을 면하지 못했으나, 그 본래의 마음은 실로 군주로 하여금 허물이 없게 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그 사이에 있었겠습니까? 이징명(李徵明)의 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 ‘틀리고 잘못되었다.[謬戾]’는 한 조항은 지난날 경연에서 연신(筵臣)들의 아룀으로 인하여 성상(聖上)께서 명백하게 내용을 밝혀 말씀하셨으므로 그날 입시(入侍)한 신하들은 모두 실로 이미 의심이 풀렸습니다. 지금 한성우는 혹 아직 그것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운운(云云)’이라고 했을 뿐이지, 이것이 어찌 성신(誠信)이 성실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며, 또한 어찌 감히 사실 밖의 말로써 군부(君父)의 뜻을 능멸하는 것이겠습니까? 성상의 비답 가운데에 ‘시태(時態)를 헤아리지 못하여 이러한 감히 할 수 없는 거조를 하게 되어 그대들로부터 모욕을 받게 했다.’는 전교(傳敎)는 너무나도 미안합니다. 심지어 ‘궁인(宮人)들이 사대부와 체결(締結)하여 없는 사실을 지어내어 군주를 무함한다.’는 전교는 더욱 신자(臣子)들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만 한성우(韓聖佑) 한 사람 때문에 발설한 것이 아니라 거슬리는 한 마디의 말로 인하여 온 조정의 신료(臣僚)까지 의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료들이 비록 지극히 볼 모양이 없지마는, 어찌 차마 궁인들과 더불어 체결하겠습니까? 간관(諫官)이 국사를 말하다가 체직(遞職)을 당하니 언로(言路)에 방해됨이 큽니다. 성상의 비답 중 몇 조항의 과격한 말들은 더욱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니, 결코 팔방(八方)에 등시(謄示)하여서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빨리 미안한 비답을 삭제하여 고치고 체차(遞差)하라는 명령을 환수(還收)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답하여 말하기를,
"다시는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하였다. 교리(校理) 김만길(金萬吉)·김구(金構), 수찬(修撰) 서문유(徐文𥙿)·저작(著作) 송상기(宋相琦)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한성우의 소를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그 말한 것이 어떤 일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성상의 비답으로써 미루어 보건대 이는 숙원(淑媛) 장씨(張氏)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미색을 좋아하고, 그 총애함 때문에’ 등의 말은 과연 미안한 것이지만 그 본심을 구명한다면 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급작스럽게 그것을 꺾어버리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니, 이것이 어찌 성상(聖上)에게 기대하는 바이겠습니까? 또한 이징명(李徵明)이 죄를 얻은 것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한성우가 지금 또 거듭 견책을 받는다면 이 이후로 삼사(三司)의 언론(言論)을 맡은 신하들이 감히 다시는 궁중의 일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이 성덕(聖德)에 누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궁인 가운데 음흉한 무리들이 사대부와 체결하여 없는 사실을 지어내고 성상을 무함한다는 등의 전교(傳敎)는 더욱 놀라고 의심스럽습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이 매우 볼 모양이 없지만 어찌 궁인들과 체결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의심하는 마음이 한번 열리어 사람마다 의심하고 일마다 의심하면, 궁인의 침방(寢房) 사이에서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며,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무리들이 모두 위구심(危懼心)을 품을 것인데, 여기에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뒤따라 선동한다면 주련(株連)341)  의 화가 생겨날 것이 또한 매우 우려됩니다. 국가의 위란(危亂)의 기틀이 반드시 여기에 있으니, 소의 비답 가운데 미안한 말을 사용한 것은 모두 산개(刪改)하고 체차(遞差)의 명을 환수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참작해서 처리하겠다. 그리고 사용한 말 가운데 심한 곳도 대략 산개하겠다."
하고는 이미 체차한 직명(職名)도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한성우(韓聖佑)도 이로 인해 불안해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체직되었다.

 

전교하기를,
"의빈(儀賓)들이 조정의 일에 참여할 수 없게 한 것은 생각건대 우연한 일이 아닌데, 근래에 이 법이 해이해지는 조짐이 없지 않다. 시험삼아 한 가지 일로써 말한다면, 지난날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가 금창 부위(錦昌副尉)의 일로 진청(陳請)한 것이 있었는데 일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물론하고 이러한 길이 한번 열리면 앞으로의 폐단에 관계가 있으니, 소의 내용과 관련된 일은 시행하지 말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오태주의 소는 처음에는 관례에 따라 해당 부서로 내려 보냈는데, 지금 대간의 소에 격노하여 이러한 전교(傳敎)가 있게 된 것이다. 이때 여러 공주들은 다 장씨(張氏)에게 아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태주가 이러한 엄한 교지를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반드시 여기에 말미암았을 것이라 한다.

 

12월 16일 병인

임금이 사형수의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진언(進言)하기를,
"어제 정언 한성우의 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은 말뜻이 극히 엄하여 신자(臣子)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즉시 옥당(玉堂)의 차자로 인하여 특별히 그 말을 따라 시행하시어 비사(批辭)를 고쳐 내리시고 그 관직을 그대로 두게 하시니, 일월이 다시 밝아짐과 같아 누가 우러러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군주가 궁녀를 총애함이 지나치면 마음이 고혹(蠱惑)하여 덕을 잃게 되며, 혹 생명을 상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니, 신하로서 진계(進戒)함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후궁(後宮)의 봉작(封爵)은 고례(古例)에 따르면 흔히 있는 일인데, 근래 오랫동안 이러한 일이 없었으므로, 연소한 대간(臺諫)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이 여기나, 이것은 사체(事體)를 잘 알지 못하여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비답의 말씀 가운데 심지어 궁인들과 체결했다는 분부까지 계시니, 지금 사대부들이 매우 볼 모양이 없지마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진언하는 사람이 길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발설하였으니, 진실로 망령되고 경솔하였지만, 말씀과 안색이 너무 지나치셔서 거조가 중도(中道)를 잃었습니다. 이것이 만약 일시의 심한 노여움으로부터 나왔다면 지금 이미 고쳐 깨달으셨을 것이니, 다시 다른 걱정이 없겠지만 혹시 일분(一分)이라도 의심하는 바가 걸려 있다면, 다음날 또 일을 만났을 때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근심이 없으리란 것을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일이 일어난 다음에 구제해 바로잡는 것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경계를 하는 것만 못하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시 유의하소서.
또 들으니, 비망기(備忘記)에 궁인들이 왕족과 체결하여 유언비어를 만들어 비방을 지어내는 자는 효시(梟示)한다는 교지(敎旨)가 계셨다고 하는데, 생각건대 어제 대간의 비답을 고쳐 내려보내실 때 이것도 환수하셨어야 하는데, 지금 들으니 이미 해조(該曹)에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 신 등도 일찍이 궁중의 일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뜻을 진언하였으며, 모든 잘못을 저지르고 법을 범한 사람은 마땅히 유사(有司)에 맡겨 다스리게 하고, 만약에 누설한 사실이 현저하다면 따로 엄하게 다스리도록 함이 좋은 일이지, 어찌 반드시 영갑(令甲)342)  을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대간의 소로 인하여 이러한 교지가 내렸다면 이미 화평한 발언이 아니며, 하물며 효시는 곧 군율(軍律)로서 궁중에서 쓸 수 있는 형률은 아닙니다.
세종조(世宗朝)에 궁인 가운데 어부(御府)의 재물을 도둑질한 자가 있어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다스리게 하니, 그 형률이 참수형(斬首刑)에 해당이 되므로 세종께서 형률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대간이 말하기를,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이므로 경솔하게 주살(誅殺)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꼭 죽여야 할 것인가를 살핀 뒤에 죽인다는 것이 곧 옛날의 가르침이니, 군주가 단지 율문에만 의거하여 주살한다면 일이 매우 부당합니다.’ 하였습니다. 세종께서 그 말을 옳게 여겨 이로부터 사형수를 삼복(三覆)하는 법이 비로소 행해졌으며, 현저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세히 살펴야 하는 것이니, 금일의 계복(啓覆)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역시 그러한 것입니다. 대저 궁중을 엄하게 단속하는 도리는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데 있는 것이지 형벌과 법률을 준엄하게 하는 데 있지 않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하시어 이 비망기를 환수한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소한 대간이 자세히 알지 못하고 마치 처음 보듯이 사실이 아닌 일을 억측하여 말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조치했으나, 승정원과 옥당(玉堂)에서 서로 잇달아 헤아리기를 아뢰고 그 말 또한 옳으므로 그것을 고치는 것이다. 대신들의 말이 매우 정성스럽고 절실하니 내가 마땅히 유의하겠으며, 궁인의 일에 대한 비망기도 또한 환수하도록 하겠다. 금번의 일은 사사로운 희로(喜怒)의 감정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칠정(七情)343)   가운데 노함이 가장 제어하기 어렵다.’ 하고, 또 ‘모름지기 성품이 편벽(偏僻)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에 따라 이겨나가라.’ 하였으니, 내가 일찍이 이것을 깊이 생각하였으나 아직 이와 같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12월 17일 정묘

유성(流星)이 서쪽 하늘의 엷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강현(姜鋧)을 집의(執義)로, 정내상(鄭來祥)을 장령(掌令)으로, 이규령(李奎齡)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임금이 서북 지방의 인재를 뽑아 쓰는 일에 대해 거듭 반복하여 하교하기를,
"대정(大政)344)  이 이미 임박하였으니, 승지는 각별히 신칙(申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12월 18일 무진

신계화(申啓華)를 승지로, 김진규(金鎭圭)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옥당의 관원들을 야대하였는데 감귤 한 쟁반을 하사하였다.

 

12월 21일 신미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하여 이만령(李萬齡)을 정언(正言)으로, 박태보(朴泰輔)와 서문유(徐文𥙿)를 교리(校理)로, 신완(申琓)을 도승지로, 윤경교(尹敬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심성적(金盛迪)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심권(沈權)을 지평으로, 엄집(嚴緝)을 승진시켜 승지로, 이후항(李后沆)을 사간(司諫)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승지 홍만종(洪萬鍾)을 발탁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았는데, 아홉 달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무하면서 힘들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변사(備邊司)의 회계(回啓)로 이천 현감(伊川縣監)을 부사(府使)로 승진시키고, 이주 첨사(伊州僉使) 한석량(韓碩良)을 부사로 삼고, 첨사를 폐지하였다. 금주군(錦洲君) 박정(朴炡)에게 충숙(忠肅),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에게 문목(文穆), 좌의정 성세창(成世昌)에게 문장(文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순(朴淳)에게 충민(忠愍),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홍익한(洪翼漢)에게 충정(忠正), 윤집(尹集)에게 충정(忠貞), 오달제(吳達濟)에게 충렬(忠烈), 우참찬(右參贊) 이몽량(李夢亮)에게 정헌(定獻) 좌참찬(左參贊) 박동선(朴東善)에게 정헌(貞憲), 증(贈) 좌찬성(左贊成) 정발(鄭撥)에게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월 23일 계유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12월 26일 병자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과 장령(掌令) 안규(安圭)가 아뢰기를,
"전 현감(縣監) 정동익(鄭東益)이 그 아들 정광진(鄭光震)을 시켜 노비를 많이 이끌고 정척(鄭倜)의 집에 뛰어 들어가 무수히 난타하게 하고, 또 더러운 오물을 입속에 틀어넣게 하였습니다. 또 정동익은 고(故) 별제(別提) 양홍도(梁弘度)를 위해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비를 세우는데, ‘이길(李吉)이 기축 사화(己丑士禍)에 죽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 말뜻이 역적 정여립(鄭汝立)과 함께 신원(伸冤)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신년345)  에 법도를 바로잡은 뒤에는 그 사화(士禍)라는 두 글자를 제거하였는데, 전후의 정상이 모두 지극히 놀랄 만합니다. 청컨대 잡아들여 신문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동익의 공사(供辭)가운데 그 ‘사화(士禍)’라는 한 조항을 제거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진실로 이러한 일은 있었던 것 같으나 정척을 구타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상세히 변명하였는데, 죄인을 심의 처분하여 삭직시켰다.

 

12월 27일 정축

상평청(常平廳)에서 아뢰기를,
"갑자년346)  의 사창 사목(社倉事目)내에 금년부터 시작하여 공곡(公穀)을 백성에게 대여하는 것은 6년 동안 매년 일분(一分)이 소모된다는 것을 모두 계산하여 관창(官倉)에다 환납하는 것으로 마련하였습니다. 지금 3년이 지났는데 각 고을에서 조곡(糶穀)을 준봉(準捧)하는 때는 없었으나, 사창에는 다 바치지 않음이 없으며, 어지럽던 이의(異議)들로 점차 사라졌으니, 민간에서도 또한 그 편리함을 알게 되어 다투어 설치하려고 하나, 다만 매년 소모되는 것을 함께 계산하여 환납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국가에서 백성에게 편리한 정사를 온 나라에 두루 시행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호리(毫釐)를 계산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반드시 관청에 치우치게 이익이 되게 하고자 하나, 민심이 기꺼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곡식을 환납할 때에 다만 본곡(本穀)에다 1년의 소모분만 바치게 하더라도 오히려 지금의 관조(官糶)가 감축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부를 백성에게 저축하고, 공사(公私)가 다 편리하게 되면 이것이 큰 이익이 되는 것이니, 다시 이러한 뜻을 제도(諸道)에 잘 알려서 사창을 세우도록 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12월 28일 무인

영의정 김수항(金壽恒)과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청대(請對)하므로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이단하가 아뢰기를,
"신이 어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최중태(崔重泰)가 그 아비의 임소(任所)로 부터 갓 올라온 것을 보고 그곳 소식을 자세히 물었더니, 무뢰배들이 산골짜기에 모여 인가를 약탈하고, 심지어 백주(白晝)의 대로에서 길가는 사람의 보따리를 협박하여 빼앗는다고 하며, 전일 주군(州郡)을 공파(攻破)한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답니다. 또한 최중태가 오는 길에 여산(礪山)을 거쳐 왔는데, 군수의 말을 들으니 병마 절도사(兵馬節度使)가 순찰 중 그 곳에 도착하자 텅빈 관아(官衙)만 있고, 하리배(下吏輩)들도 모두 도망쳐버려 한 사람도 접대하는 사람이 없어 이른바 절부(節符)와 부월(符鉞) 등의 물건을 짐싣는 말에 싣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군수가 관아로 돌아온 후에 매우 놀라 곧 공방(工房)을 빨리 오라고 명령하였더니, 공방은 총을 어깨에 메고 달아나 버렸는데, 혹시라도 서흥(瑞興)의 변(變)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까 두려워서 우선 그대로 두고 감영(監營)에도 알리지 않았다고 하니, 조만간에 반드시 감영 장계(狀啓)가 있을 것입니다.
한(漢)나라 재상 위상(魏相)은 사방의 상주(上奏)를 기다리지 않고 풍우(風雨)·수한(水旱)·도적의 변고(變故)는 반드시 급히 먼저 아뢰었다고 합니다. 신 또한 감히 들은 바를 앙달(仰達)합니다. 인심의 패악(悖惡)함이 이같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게다가 기근(饑饉)이 더해진다면 눈앞에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근심이 닥칠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전일 종묘의 향사(享祀)를 절감하는 일로 진청(陳請)했던 것입니다. 생각건대 이러한 크게 경동(警動)할 만한 일을 이미 할 수가 없다면 구구한 절약은 나라에도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원망만 사게 될 뿐이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수의(收議)할 적에 그 절감하는지의 여부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므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송시열의 뜻은 절감하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에게 보낸 세 차례 편지로써 살펴보건대,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이 글을 영상(領相)에게 돌려 보였더니, 영상도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 역시 물러남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신이 즉시 물러나지 못한 까닭은 수상이 혐의를 지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우선 참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또한 예로부터 재상을 임명하는 일은 반드시 여망(輿望)이 오랫동안 위촉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인데, 예조 판서 이민서(李閔敍)는 영상(領相)·좌상과 인척이 되는 까닭에 혐의쩍어서 복상(卜相)할 수 없었으나, 복상이 얼마나 중한 일인데 구구한 작은 혐의에 구애될 수 있겠습니까? 고(故) 상신(相臣) 윤방(尹昉)은 김상헌(金尙憲)으로 자기를 대신하기를 청하였는데, 신과 같은 사람은 마땅히 물리쳐 버리고 어질고 덕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복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묘 향사를 절감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시행할 수는 없으나, 어찌 이 일로써 거취(去就)를 결정할 수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사양하지 말라. 이처럼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흩어지는 때를 만나 특별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으니, 지금으로부터 조참(朝參)이나 진하(陳賀) 등 모든 대소의 거동(擧動)에 주악(奏樂)은 진열만 하고 연주하지 않도록 하며, 영소전(永昭殿)의 제향 또한 춘향(春香)부터 당분간 음악을 폐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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