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18권, 숙종 13년 1687년 1월

싸라리리 2025. 11. 1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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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신사

박원도(朴元度)를 승지(承旨)로, 이돈(李墩)을 부교리(副校理)로, 이태룡(李台龍)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였다.

 

1월 3일 임오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지평(持平) 심권(沈權)과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강양 감사(江襄監司) 이희룡(李喜龍)은 성질이 거칠고 난잡하며 언사가 야비하고 도리에 어긋나서 지조 있는 선비들과 유종(儒宗)001)  을 헐뜯고 모욕하는 짓을 했습니다. 한갓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이 있는 것만으로 안렴(按廉)의 소임을 맡길 수 없으니, 파직(罷職)하시기 바랍니다. 지난해에 조식(趙湜)이 신방(新榜)으로서 알성(謁聖)하게 될 적에 반궁(泮宮)의 유생(儒生)들이 고묘(告廟)하기를 주창한 상소를 들어 배척하며 통알(通謁)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 박정(朴涏)이 조식이 배척받는 것을 한스럽게 여겨 그 자신도 또한 알성하지 않았었습니다. 흉악한 무리를 비호한 사람을 진신(搢紳)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또 박정이 괴원(槐院)002)  의 선임(選任)에 낀 것을 들어 승문원의 행수 장무관(行首掌務官)을 아울러 추고(推考)하도록 명하기를 청하고, 재차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평안도(平安道) 선천부(宣川府)에 지진하였다.

 

1월 5일 갑신

이익(李翊)을 판윤(判尹)으로, 김성적(金盛迪)을 교리(校理)로, 서문유(徐文𥙿)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1월 7일 병술

강양 감사(江襄監司)의 전망(前望)003)  을 들여오도록 명하여, 전(前) 집의(執義) 이이명(李頤命)을 제수(除授)했는데, 이때의 나이 30세였고, 또 대제학(大提學)의 전망을 들여오도록 명하여 남용익(南龍翼)으로 삼았는데, 이전에 없던 예(例)이다.

 

심유(沈攸)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聖祖)004)  께서 태종(太宗)신사년005)   봄에 풍악(楓岳)에서 안변(安邊)으로 행행(幸行)하실 때 태종께서 성석린(成石璘)을 기복(起復)006)  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기거(起居)하게 했었는데, 성석린이 잘 아뢰어 즉시 성조께서 환궁(還宮)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중동(仲冬)에 성조께서 또한 증파도(澄波渡)로 해서 북관(北關)으로 가시며 금성현(金城縣)에 머물렀을 때 먼저 시종(侍從)하는 신하 함승복(咸承復)과 배상충(裵尙忠) 등을 앞으로의 길에 보냈었는데,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와 영흥판관(永興判官) 김견(金譴) 등이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때 상호군(上護軍) 박순(朴淳)이 실지로 명을 받고 서울에서 함주(咸州)로 나아가, 감사(監司) 및 수령(守令)들에게 교유(敎諭)하기를, ‘조사의 등을 따르지 말라.’고 하다가 드디어 군중(軍中)에서 살해되었고, 호군(護軍) 송유(宋琉)도 함주에 왔다가 그 다음에 잇달아 죽었습니다. 이때를 당해 서울은 계엄(戒嚴)하게 되고, 조사의 등의 군사가 관서(關西)로 방향을 돌리게 되어 성조(聖祖)께서 조사의의 군중에 머무르셨는데, 수신(帥臣) 이천우(李天佑)가 서울에서 내려와 고맹주(古孟州)에 있다가 조사의의 군사와 서로 만나게 되어 겨우 몸만 빠져 나왔습니다. 성조께서 안주(安州)로 나와 머무르시자 조사의의 군사가 밤에 놀라서 흩어지게 되니, 조사의가 기병(騎兵) 수십과 안변(安邊)으로 도망해 갔다가 마침내 관군(官軍)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수신(帥臣) 이천우(李天佑)·이빈(李彬)·최운해(崔雲海) 등이 성조를 호위하고 평양(平壤)을 경유해서 송도(松都)에 돌아오시므로, 태종께서 금교역(金郊驛)에 나가 맞이하셨습니다. 이천우 등은 거가(車駕)를 호위한 공으로 말[馬]을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받았고, 조사의 및 여타의 시종하던 신하 10여 명은 모두 엄한 처형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박순(朴淳)에게 무슨 회천(回天)007)  한 공이 있겠습니까? 그의 후손들의 이른바 ‘성조께서 박순의 말에 따라 남쪽으로 돌아오시기로 뜻을 결단하셨다.’는 말은 본래 그 당시의 사실이 아닙니다. 대체로 박순 등은 명을 받고 북쪽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태종께서 거듭 가엾게 여겨 애도해 주시고 두루 돌보는 특전(特典)을 내리신 것이 당연하고, 조사의 등이 군사를 출동시켜 서울을 진동하게 한 짓은 차례차례 법대로 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되게 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조(聖祖)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 모시고 따르던 여러 신하들이 거의 무거운 죄에 빠졌으니, 가엾게 여기는 애도와 상심되는 한탄이 또한 어찌 태종께서 박순에 대한 것과 다르겠습니까마는, 지금까지 마침내 단서(丹書)008)  에 있는 이름을 지우지 못했고 보면, 박순이 성조(聖祖)에게 죽은 것을 어찌 유독 추후로 포장(褒奬)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대체는 살펴보지 않고서 한갓 후손들의 청원에만 따라 아름다운 명칭을 내려 주는 것은 의리(義理)에 크게 어그러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이어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이러하니, 마땅히 차자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지평(持平) 김진규(金鎭圭)가 아뢰기를,
"요사이 전관(銓官)들의 거조(擧措)가 여론에 만족스럽지 못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유성운(柳成運)의 상소는 감히 윤증(尹拯)을 유신(儒臣)으로 존칭하는 짓을 하여 조정을 가볍게 여기고 올바른 공론을 멸시함이 심했는데도, 외람되게 6품으로 올려 급급하게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에 의망(擬望)했습니다. 또 사학(四學)이 이동욱(李東郁)을 다시 사헌부의 관직에 제배(除拜)한 것을 가지고 상소하여 전조(銓曹)를 논박하자, 그 때의 참판(參判)은 【박태상(朴泰尙)이다.】  오히려 굳이 사직하려고 했는데도 여타의 전관들은 즉시 도로 공사(公事)를 행하였습니다. 대신(大臣)들이 또한 이일익(李日翼)에게 도로 정직(正職)009)  을 제수한 것을 가지고 크게 배척을 가했는데도 스스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잡도록 경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해당 전관들을 모두 중벌(重罰)에 따라 추고(推考)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에 사학(四學) 유생(儒生)들의 상소로 인해 전관들이 글을 올려 면직하기를 바라면서 패초(牌招)해도 어기고 나오지 않은 것이 한 두번 만이 아니다가, 그 뒤에 대신들이 끝까지 심각하게 피혐(避嫌)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진달(陳達)했었기 때문에 부득이 출사(出仕)하게 된 것이다. 하물며 이일익의 일은 한때 경계하여 책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서, 더욱이 이 때문에 체직(遞職)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저 염우(廉隅)010)  는 비록 사대부들이 중히 여겨야 할 바이기는 하지만, 문비(問備)011)  한 다음에 곧바로 모두 굳이 사양하여 면직해야 한다면, 끝판에 생기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번에 추고하기를 청한 논계(論啓)를 나는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때 김진규(金鎭圭)가 맨먼저 이 논계를 내놓았었는데, 장령(掌令) 이태룡(李台龍)이 의견이 같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인피(引避)하여 참여하지 않자, 김진규와 이선(李選)이 또한 맞서 인피하므로, 사헌부(司憲府)에서 처치(處置)하여 이태룡이 체직되었다.

 

1월 8일 정해

임환(林渙)을 장령(掌令)으로, 성호징(成虎徵)을 지평(持平)으로, 박태보(朴泰輔)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송주석(宋疇錫)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로, 조종저(趙宗著)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월 10일 기축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1월 11일 경인

해가 겹무리하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흰무지개가 양이에서 나와 비스듬히 북쪽을 가리켰다.

 

도승지(都承旨)        신완(申琓) 등이 무지개의 변(變)으로 인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아뢰고, 또한 대신들이 성상(聖上)에게 덕(德)을 닦는 실제를 찬양(贊襄)012)                  하지 못함을 지척(指斥)하니, 답하기를,
"계회(誡誨)하는 성의는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마는, 대신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일은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월 12일 신묘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재이(災異)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서 면직하기를 바라고, 명례궁(明禮宮)에 둑[堰]을 쌓도록 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너그럽게 비답(批答)을 내려 위로하여서 타이르고, 둑 쌓기를 정지하도록 청한 것을 윤허(允許)하였다.

 

헌납(獻納) 서문유(徐文𥙿)가 상소하여, 방백(方伯)·문형(文衡)의 제배(除拜)가 소략하여 마치 낭리(郞吏)의 관직을 임명하는 것 같게 되었다고 말하니, 비답하기를,
"방백을 대신할 자를 내는 일은 조금도 늦출 수 없고, 문형의 천망(薦望)은 위임하는 것이기에 그대로 앞서의 천망 단자(單子)를 사용한 것이니,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1월 14일 계사

유성(流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에서 나와 북쪽으로 들어갔다.

 

옥당(玉堂)에서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경계할 것을 진달(陳達)하고, 이어 올바른 말을 널리 구해야 한다는 뜻을 언급하니, 너그럽게 비답하기만 하고 구언(求言)해야 한다는 요청은 윤허하지 않았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였다.

 

1월 15일 갑오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흰무지개가 햇무리를 꿰뚫었다.

 

이민서(李敏敍)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유소(諭召)하고, 며칠 뒤에 또한 박세채(朴世采)·이상(李翔)·이상진(李尙眞)·정재숭(鄭載嵩)을 불렀으나 모두 들어오지 않았다.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송주석(宋疇錫)이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소하여서, 대신들에게 위임(委任)하고 날마다 다스리는 도리를 강구할 것과 빈어(嬪御)를 총애하여 화란(禍亂)을 가져오지 말 것을 누누이 말하니,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1월 16일 을미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국구(國舅) 김만기(金萬基)의 병이 위중한데, 그의 아들 김진귀(金鎭龜)가 현재 호남(湖南)의 방백(方伯)으로 있으니, 이성구(李聖求)·구일(具鎰)의 예에 의하여 바로 체직(遞職)하도록 윤허하고, 교귀(交龜)013)  를 기다릴 것 없이 올라오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계(尹堦)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전라도 각 고을에서 전염병 걸린 사람이 1백 83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52명이라고 장문(狀聞)하였다.

 

1월 17일 병신

달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임용(任用)하는 길이 한 가지만이 아니어서, 더러는 순서에 따라 승천(陞遷)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더러는 여럿 속에서 추려 계급을 뛰어올려 발탁하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한데, 대개는 오직 재주에 따라 취택하고 나이의 노소(老少)나 자급(資級)의 고하(高下)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물며 현명한지 여부의 구별과 진퇴(進退) 및 출척(黜陟)은 곧 임금의 큰 권한인 것이다. 이미 그 사람의 재질과 인망(人望)이 한 지방을 감당할 수 있음을 알고 있는데, 마침 바야흐로 시급하게 진휼(進恤)해야 할 일을 만나게 되거나 정청(政廳)을 열기가 쉽지 않게 된다면, 이번처럼 중비(中批)014)  하여 특별히 제수(除授)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정치의 대체에 있어 해가 됨을 알지 못하겠다. 간신(諫臣)들의 상소에 있어서는 단지 성헌(成憲)이 혹시라도 폐지될까 염려한 것뿐이고 본래 탄핵하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는데, 이 때문에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引嫌)만 하고 정당한 도리는 생각하지 않아 여러 차례나 소명(召命)을 어기고 있으니, 일의 대체에 있어서 자못 적당하지 못한 일이다. 강양 감사(江襄監司) 이이명(李頤命)을 추고(推考)하되, 다시 패초(牌招)하여 숙배(肅拜)하고서 여러 날이 되기 전에 사조(辭朝)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8일 정유

달무리가 토성(土星)에까지 둘렀다.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이 과천(果川)에서 호남(湖南)으로 옮겨갈 뜻을 두므로,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 돈유(敦諭)하여 만류하도록 하였다.

 

1월 19일 무술

김창협(金昌協)을 대사간(大司諫)으로, 김우항(金宇杭)을 지평(持平)으로, 김만길(金萬吉)을 교리(校理)로, 민진주(閔鎭周)를 수찬(修撰)으로, 오도일(吳道一)을 응교(應敎)로, 신계화(申啓華)를 승지(承旨)로, 이유(李濡)를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전(前) 감사(監司) 윤계(尹堦)는 강화(江華)에 있을 때의 일 때문에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들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한성우(韓聖佑)·이징명(李徵明) 등은 모두 일을 말하다가 성지(聖旨)를 거슬리게 된 사람들인데, 한성우는 의망(擬望)되어 낙점(落點)을 받았지만 이징명은 아직도 은혜로운 낙점을 아끼고 있는 일을 들어 아뢰기를,
"당초에 한 진언(進言)이 비록 더러 망령되고 경솔하였지만, 어찌 말 때문에 사람을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징명의 상소 내용에서 척완(戚睕)에 관한 말들이 자못 매우 부당했기 때문에 적당하지 못하다는 뜻을 조금 보인 것이지, 어찌 영구히 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咸鏡監司) 윤지완(尹趾完)의 장계(狀啓)에, ‘함흥(咸興)은 후주(厚州)에 비해 결코 힘을 얻게 될 형세(形勢)가 아니니, 혁파(革罷)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침범해 올 길을 엄중하게 막으려고 한다면, 백성을 옮겨 그 땅을 비워 두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하였다. 이단하가 아뢰기를,
"조상우(趙相愚)는 터무니없는 일을 기록한 것 때문에 귀양갔는데, 그 어미의 나이가 80이 넘었고 병세가 또한 위중하니 놓아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리(情理)가 불쌍하니, 특별히 놓아보내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한태동(韓泰東)이 김익훈(金益勳)의 일을 논하다가 두 사람 모두 버려졌는데, 한태동은 사람됨이 청렴하여 곤궁한데도 지조가 있고, 김익훈은 훈적(勳籍)에 이름이 있고 지혜로운 생각을 겸비했으니, 모두 다 수용(收用)하는 것이 화평하게 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익훈은 서용(敍用)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는데도 의망(擬望)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또한 그르게 여겼다. 한태동은 그의 문장과 청렴하여 곤궁한 것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그때 기필코 이기려고만 힘써 마음가짐이 올바르지 못했었다. 김익훈은 전조(銓曹)에 수용하도록 분부하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이 고(故) 판부사(判府事) 박순(朴淳)에게 준 시호(諡號)를 도로 거두는 일로 차자(箚子)를 진달하고, 다시 국가의 사책(史冊)을 고찰하도록 청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러나 채수(蔡壽)가 지은 비문(碑文)과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박순의 아내 유씨(柳氏)의 묘표(墓表)는 전하여 믿게 할 만한 글이니, 박순이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은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행행(幸行)하시게 되었을 때에 태종(太宗)께 진언(進言)한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역시 그의 국가를 위한 성의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관직이 대장군(大將軍)이었기에 마땅히 법례대로 명칭을 바꾸어야 하니, 이미 준 시호를 도로 거둘 필요가 없을 듯하며, 신(臣)의 생각에는 그 때의 일을 이제 와서 글에 써 놓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실록(實錄)을 고찰하는 일에 있어서도 일의 대체가 마땅하지 못하니, 그대로 시호를 주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널리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보아 처리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이단하가 아뢰기를,
"영상(領相)이 진달한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기를,
"실록을 고찰해 내기란 진실로 중대한 일이다. 시호를 줄 것인지의 여부를 다른 대신들에게도 물어보고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월 20일 기해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1월 21일 경자

유명웅(兪命雄)을 정언(正言)으로, 김만중(金萬重)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례(朝參禮)를 거행하였다.

 

1월 22일 신축

옥당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이 또 박순(朴淳)에게 시호를 줌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상소했으나, 답하지 않았다.

 

호남(湖南)의 전주(全州) 등 11 고을에서 크게 지진하였다.

 

1월 23일 임인

조사석(朝師錫)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익수(李益壽)를 정언(正言)으로, 송주석(宋疇錫)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로, 이후항(李后沆)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월 24일 계묘

목성(木星)이 미방(未方)015)  에 나타났는데, 잇달아 사흘이나 그러했다.

 

종묘(宗廟)의 영녕전(永寧殿)에 배알(拜謁)하였다.

 

1월 26일 을사

옥당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였다.

 

1월 27일 병오

장령(掌令) 안규(安圭)·지평(持平) 성호신(成虎臣)이 아뢰기를,
"공홍도(公洪道) 이산(尼山)의 유학(幼學) 안두장(安斗章) 등의 반노(叛奴)로서 내수사(內需司)에 들어가 의탁한 자들을 본도(本道)에서 이미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주인에게 주기로 결단하여서 호조(戶曹)에 이첩(移牒)하고, 호조에서는 내수사에 전이(轉移)했었는데, 내수사에서 전연 사보(査報)하는 말도 없었고 방계(防啓)까지 하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음이 자못 심합니다. 만일 추쇄(推刷)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자세히 조사하게 한다면, 그의 상전(上典)들이 반노들의 남몰래 해침을 면하게 되기를 기필하지 못할 것이니, 도신(道臣)이 처결한 대로 시급하게 내주어, 먼 지방의 사람들이 원통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없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추쇄(推刷)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세히 조사하여 처결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재차 아뢰니 윤허하였다.

 

헌납(獻納) 서문유(徐文𥙿)·정언(正言) 유명웅(兪命雄)과 이익수(李益壽)가 아뢰기를,
"감찰(監察) 이담(李橝)은 당초에 등용할 때 비록 보통 사람들보다 다르기는 했습니다마는, 한 번 횡역(橫逆)을 만났으니 한평생을 알 만하고, 그 때의 거조를 사람들이 모두 비웃으며 욕하고 있으니, 도태시키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월 28일 정미

강양 관찰사(江襄觀察使) 이이명(李頤命)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면유(勉諭)하였다.

 

승지(承旨) 신계화(申啓華)가 아뢰기를,
"가주서(假注書) 채성윤(蔡成胤)은 곧 을해년016)   무렵에 상소를 올려 선정(先正)을 모함하고 헐뜯은 사람 채진후(蔡振後)의 손자입니다. 본시 당후(堂后)017)  에 합당하지 못하고 또한 염피(厭避)하는 뜻이 있었는데, 본원(本院)에서 재차 재촉하자 하인(下人)을 꾸짖어 물리쳤고 마침내 오지 않았습니다. 일의 대체에 있어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먼저 파직한 다음에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1월 29일 무신

옥당의 관원들을 야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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