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임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검토관(劍討官) 홍수헌(洪受憲)이 아뢰기를,
"신이 염문사(廉問使)로 함경도(咸鏡道)에 가서 군영에 출입하면서 인심을 살펴보았더니, 토졸(土卒)들은 모두 서울 사람이 변장(邊將)이 되어 오기를 원하므로, 만약 본토(本土) 사람이 변장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는데, 대개 본토 사람은 집이 도내(道內)에 있으므로 재물을 착취해다가 본가(本家)로 실어 나르는 것이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다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조정에서 서북도(西北道)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병조(兵曹)에서 그 소원에 따라 본토 사람을 임명하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부터는 병조로 하여금 전례에 따르지 말고 서북 지방 사람으로서 도(道)를 바꾸어 임명해 보내어 토졸을 보존(保存)할 터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아뢰기를,
"이는 비록 일률적으로 얽어맬 수는 없지마는 연신(筵臣)이 아뢰는 바에도 의견이 없지 않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稟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3일 계미
윤경교(尹敬敎)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박순(朴淳)에 대한 일은 지금 검열(檢閱) 송주석(宋疇錫)의 복명서(復命書)를 보니, 녹공(錄功)에 관한 일은 비록 나타난 데가 없으나, 그가 왕명을 받들고 함흥(咸興)에 가서 죽은 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시장(諡狀)에는 그의 관직을 상호군(上護軍)이라 쓰였고, 실록(實錄)에는 대장군(大將軍)이라고 쓰였습니다. 또 그의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 책을 보니, 성종조(成宗朝)의 명신 채수(蔡壽)가 박순의 아들 박흔(朴昕)의 묘비문(墓碑文)을 지었는데, 그 중에 박순의 사적을 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태조(太祖)께서 함경도(咸鏡道)에 계실 때 박순이 운검(雲劍)288) 으로 입시(入侍)하여 자청해서 함경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태종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공신에 기록하여 증직(贈職)하고 아울러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록 사사로 간직한 문자이기는 하나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고 실록(實錄)에 기재된 것도 이와 같으니, 시호(諡號)를 하사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검열 송주석의 복명서 가운데 한 조목은 바로 광해조(光海朝)의 일기(日記)를 초본(草本)으로 보관해 둔 일이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노산조(魯山朝)289) 와 연산조(燕山朝)의 일기는 인쇄해서 보관해 두었는데, 이것만은 중초(中草)290) 로 두었으니, 그것은 사실상 암초(暗草)291) 와 같은 것이라 합니다. 인조조(仁祖朝) 때 수정할 적에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서 두 벌만 써서 적상산(赤裳山)과 강화(江華)의 사고(史庫)에 보관하였고, 태백산(太白山)에는 중초(中草)로 보관하였습니다. 일기와 실록이 비록 경중의 차별은 있지마는 후세에 전하는 데는 다름이 없습니다. 예전부터 모두 똑같이 인쇄한 데에는 반드시 그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모두 인쇄해서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오나 지금 이렇듯 흉년이 들어서 형편이 매우 어려우니, 우선 보류해 두었다가 명년의 농사를 보아서 품의(稟議)하여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그 당시는 조석으로 변란(變亂)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다만 정초(正草) 2벌 중 초 1벌을 세 곳의 사고에 나누어서 간직하였을 뿐이고, 두루 여러 곳에 보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또 중초를 그대로 보관한 것도 세초(洗草)292) 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혹은 정본(正本)에 첨가해서 기록하거나 혹은 인쇄하도록 하는 한편, 그 밖에 꼭 해야 할 일은 명년에 가서 다시 아뢰어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이단하가 또 명경과(明經科) 시험에 구두(口讀)의 폐단을 말하고, 이어서 오로지 글뜻을 숭상할 것과 《대전(大典)》에 강서(講書)하는 조항의 뜻을 거듭 밝힐 것을 되풀이하여 아뢰었다. 임금이 그 의견에 따라 해조로 하여금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의성 현령(義城縣令) 윤성교(尹誠敎)가 부임한 지 두어 달이 채 못되어서 그 향리(鄕吏)를 파면시켰는데 〈아전은〉 억울함을 호소하여 격쟁(擊錚)293)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승지 서종태(徐宗泰)가 아뢰기를,
"그 원[倅]이 그대로 있는데 격쟁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이고 또 앞으로의 폐단에도 관계되는 일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형조에 명하여 각별히 엄벌하여 정죄(定罪)하도록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절후가 중동(仲冬)에 이르도록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기설제(祈雪祭)를 지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는 얼마나 중대한 문서인데 근래에 주서(注書)가 간혹 남을 시켜 대신 쓰기도 하고, 심지어 하인(下人)을 시켜 대서해서 드린다고 하니, 더욱 한심한 일입니다. 대서한 사람을 낱낱이 조사해 내기는 어렵지마는 하인을 시켜 대서한 사람은 마땅히 별도로 논죄(論罪)해야만 할 것이고, 앞으로는 주서의 일기(日記)를 승지가 각별히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매우 한심한 일이다. 대서한 사람을 승정원에서 조사해 내어 처벌하고, 앞으로는 특별히 엄중하게 단속하라."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또 연석(筵席)에서 주고받은 말이 새어나가 항간에 전파되는 잘못을 강력하게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온실전(溫室殿)과 성중(省中)에 있는 나무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294) , 그 말을 조심하는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더 엄중하게 단속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4일 갑신
성호징(成虎徵)을 승지로 삼았다.
주서 임익원(任翊元)이 유지(諭旨)를 받들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한 뒤에 송시열이 서계(書啓)하여 대답하기를,
"신이 노쇠증(老衰症)으로 거의 죽게 된 즈음에 한열(寒熱)의 증세까지 겹치게 되어서 가슴이 막히고 숨이 차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사온데, 이러한 때에 갑자기 사관(史官)이 와서 성지(聖旨)를 전하니 간절하게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뜻이 정녕 간측(懇惻)하여 이같이 늙고 병든 신(臣)의 몸으로서는 감히 받들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신은 신하로서 이욕(利慾)을 품고 염치(廉恥)를 잃어버리는 것은 지극히 경계해야 할 것을 대략 진술하고 아울러 천신(賤臣)의 쇠잔한 근력(筋力)과 병든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실정을 하소하여, 거룩하신 전하의 굽어살피심을 간절히 바라고자 합니다. 신의 병세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 정신이 황홀하고 혓바닥이 움직이지 않으므로 고간(苦諫)하는 말과 슬픈 정성을 말하려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학문에 힘쓰셔서 더욱 성덕을 닦으시어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이 기대하는 바를 위로하시면 신은 비록 오늘 저녁에 죽더라도 눈을 감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알았다."
하였다.
부수찬(副修撰) 박태보(朴泰輔)가 소를 올려서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지금의 우의정 이단하(李端夏)를 논천(論斥)한 일로 말미암아 득죄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단하가 우상(右相)으로 들어와서 맨 먼저 신을 천거하였으나, 당시의 대신들이 신을 이단(異端)으로 지목해서 매우 엄하게 논박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이단으로 무함을 당한 자가 다시 시강(侍講)하는 반열(班列)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관직을 체임(遞任)하도록 하였다.
11월 5일 을유
전교하기를,
"지존(至尊)의 자리에 계신 분으로서 회갑(回甲)을 지낸 일은 매우 드물게 보는 경사이다. 그래서 지난 봄에 이미 경축례(慶祝禮)를 행하였고, 이번에 또 생신날이 닥쳐오니 한편은 기쁘고 한편은 두려운 지극한 심정(心情)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본전(本殿)에 시위(侍衞)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내직(內職)의 은전(恩典)이 있겠지마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연례적으로 상납하는 것 이외에 면포(綿布)·마포(麻布) 각 20동(同)과 면주(綿紬) 10동을 본전에 들여보내서 신년 설에 쓰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옥당(玉堂) 김만길(金萬吉) 등이 그것이 불가하다고 진언(進言)하였으나, 임금이 너그럽게 비답(批答)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
전교하기를,
"소의(昭儀) 김씨(金氏)를 귀인(貴人)으로 삼는다."
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 탄신일을 맞아서 궁액(宮掖)안에 이러한 은혜를 베푸는 특전(特典)이 있아오나, 소의 김씨는 대궐에 들어온 지 겨우 두서너 달 밖에 안 되고, 풍정(豐呈)을 베풀어 헌수(獻壽)하던 날 이미 작위를 올려주는 은전을 내리셨는데 어찌 이다지 급작스레 승진시키려 하십니까? 삼가 옛사람의 봉환(封還)295) 의 뜻을 덧붙여서 감히 외람되게 아룁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이번 대비전 탄신일을 맞아서 궁인(宮人)에게 은전을 베풀려는 것이니, 이는 이유없이 갑작스레 작위를 올려 주는 것과는 다르다. 번거로이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6일 병술
황흠(黃欽)을 헌납(獻納)으로, 한은(韓垽)을 집의(執義)로, 이일익(李日翼)을 장령(掌令)으로, 강현(姜鋧)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전관(銓官)이 날이 저물어서 정무(政務)를 개시하므로, 특별히 이조(吏曹)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추문(推問)하였다.
상평청(常平廳)에서 예조 판서 이민서(李敏敍)의 상소에 의하여 경기(京畿) 지역 중에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에는 진휼청(賑恤廳) 곡물 중에서 이미 상납한 것을 제외하고 아직 상납하지 아니한 것은 각각 그 고을에서 보관해 두도록 할 것을 복주(覆奏)하여 윤허를 받았다.
11월 7일 정해
민진주(閔鎭周)를 헌납(獻納)으로, 김몽신(金夢臣)을 정언(正言)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우참찬(右參贊)으로, 황흠(黃欽)을 수찬으로, 이사영(李思永)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8일 무자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동지사(同知事)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어제 대비전(大妃殿) 탄신(誕辰)을 축하할 때 민간의 늙은이들이 많이 들어와서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문안을 드렸다고 하는데, 이렇게 와람되고 번잡한 폐단은 마땅히 병조(兵曹)에서 일체 엄하게 금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노인들이 문안하는 일은 인조조(仁祖朝) 이후로 3대에 걸쳐 모두 이러한 규정이 있어서 주찬(酒饌)을 대접하게 되었던 것이지 이번에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11월 9일 기축
민진장(閔鎭長)과 신계화(申啓華)를 승지로, 서문유(徐文𥙿)를 지평(持平)으로, 조종저(趙宗著)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을 마치고서 하직 인사를 드리려고 온 감사(監司)와 지방으로 귀임(歸任)하는 차사원(差使員)과 수령·찰방(察訪)을 인견(引見)하고 백성의 폐단을 묻고 권계(勸戒)해서 보냈다.
지평(持平) 서문유(徐文𥙿)가 일찍이 이상진(李尙眞)을 굳이 처벌할 까닭이 없다는 뜻으로 친구끼리 응대(應對)한 일이 있어서 인피(引避)하였는데, 뒤에 홍문관(弘文館)에서 처치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11월 10일 경인
유성(流星)이 왕량성(王良星) 밑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고,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화성(火星)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11일 신묘
이 무렵 임금을 대신해서 지은 문사 중에, ‘무관(武官)은 백성의 재물을 착취해서 치부(致富)하는 자가 많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임금이 사람의 청렴하고 탐욕스러운 것은 문관과 무관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글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11월 12일 임진
유성(流星)이 각성(角星) 밑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
이규령(李奎齡)을 대사헌(大司憲)으로, 한성우(韓聖佑)를 정언(正言)으로, 민진주(閔鎭周)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송주석(宋疇錫)을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이현기(李玄紀)를 교리(校理)로, 강현(姜鋧)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이일익(李日翼)이 인피(引避)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변명하여 구(救)하면서 ‘비록 나이가 많아 정신이 혼미하여 시의(時議)에 합당하지 않았기는 하나…’ 하는 등등의 말이 있었던 때문이다. 처치하여 체임(遞任)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친 뒤에 하직 인사를 드리는 수령을 불러들여 훈계해서 보냈다.
11월 13일 계사
유성이 문창성(文昌星) 위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고, 또 북하성(北河星) 위에서 나와 북방(北方)으로 들어갔다.
여주(驪州) 지역에 초9일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감사(監司)가 이를 알렸다.
11월 16일 병신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밑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이덕성(李德成)을 지평(持平)으로, 송상기(宋相琦)를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으로 삼았다.
여러 승지들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케 하였다.
11월 17일 정유
하직 인사하는 수령을 인견(引見)하고 훈계하여 보냈다.
상평청(常平廳)에서 아뢰기를,
"갑자년296) 겨울에 진휼청(賑恤廳)에서 《구황촬요(救荒撮要)》에 기재된 바 가정(嘉靖)297) 연간의 계목(啓目) 중에 솔잎[松葉]을 먹는 방법을 상고해 가지고 민간에 권유하도록 여러 도(道)에 알렸는데, 각 고을에서는 태만하여 이를 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민간에서는 골고루 알지 못하고 실행하지 아니합니다. 이렇게 좋은 구황(救荒) 방법을 다시금 신칙(申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체 가정(嘉靖) 연간의 계목에 따라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모두 인쇄하여서 민간에 널리 보급하도록 할 것이며, 향민(鄕民) 중에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 그 고을의 담당관리를 문책하고, 더욱 심한 고을은 그 수령(守令)을 처벌할 것입니다. 또 사방의 모든 산의 솔잎은 전례에 따라 채취를 허용한다는 뜻을 널리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11월 18일 무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근일 여러 도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지진의 이변이 많습니다. 이달 초8일 밤에는 서울에도 지진이 있었는데, 관상감(觀象監)에서 홀로 보고(報告)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날 입직(入直)한 관원을 추문하여 치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일찍이 선대왕(先大王) 때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경연(經筵)에 입시했을 적에 지나친 경비를 절감해야 한다는 뜻을 아뢰니, 선대왕께서 특히 궐내에 진상하던 송엽(松葉)·도지(桃枝)·도판(桃板)·춘번(春幡)·인승(人勝)·세화(歲畫) 등의 물품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병진년298) 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지익(李之翼)이 아뢰어서 세화(歲畫)는 도로 복구되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흉년(凶年)이 극심하여 어공(御供) 또한 줄이는 판이니, 전례에 따라 폐지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뢰는 바가 진실로 그러하다. 폐지하라."
하였다.
11월 19일 기해
이익수(李益壽)를 정언(正言)으로, 이유(李濡)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호조(戶曹)의 말에 의하여 궁중(宮中)에 진상하는 물품과 각 관청(官廳)에 상납하는 잡종(雜種) 물품은 금년에도 또한 복구하지 못하였으니, 잡직(雜職)의 봉급 및 각종의 산료(散料)는 모두 그전대로 임시 삭감하게 하였다.
11월 20일 경자
홍문관(弘文館)에서 재변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임금이 너그러이 비답(批答)하고, 가상하게 여겨서 받아들였다.
11월 21일 신축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정(申晸)이 상소하기를,
"신이 경력(經歷) 조상개(朝相槪)에게 아객(衙客) 유세기(兪世基)와 더불어 방죽을 쌓는 일에 대하여 물었더니, 그의 말이 돌아본 일을 풍헌(風憲)에게 말했을 뿐이고, 관곡(官穀)을 지급하고, 대장장을 불러오며, 향소(鄕所)를 지휘하고, 면임(面任)에게 분부하는 등등의 일은 【풍헌(風憲)·향소(鄕所)·면임(面任)은 옛적 군현(郡縣)의 아전 등속이다.】 언급한 일이 없었다고 하므로, 그는 간여한 일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임무를 잘 수행하라고 타일렀었는데, 이억년(李億年)이 다시 추문(推問)한 다음에야 허다한 비행이 남김 없이 드러나서 은휘(隱諱)한 사실이 매우 많았으니, 진실로 해괴한 일입니다. 신은 애초에 관하의 일을 단속하지도 못하였고, 지금 또 사연이 스스로 변명한 초사(招辭)에 관련되었으니, 결코 구차스럽게 본직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체(事體)를 손상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살피라."
하였다.
11월 22일 임인
달이 태미성(太微星) 좌액문(左掖門) 안으로 들어갔다.
안규(安奎)를 장령(掌令)으로, 김성적(金盛迪)을 지평(持平)으로, 박신규(朴信圭)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11월 23일 계묘
대신과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달이 태미성에 들어가는 이변이 근래에 겹쳐서 나타나는데, 어제도 달이 좌액문에 들어갔습니다. 하늘에 나타나는 기상(氣象)이란 아득히 멀어서 측량할 수 없사오나, 방술(方術)에 관한 책을 보면 달은 음(陰)에 속하므로 궁중에 어지러운 일이 있으면 이러한 응보(應報)가 있다고 합니다. 성명(聖明)께서 계시는 이 즈음에 별다른 염려는 없겠지만, 예로부터 궁중의 단속이 엄하지 못한 것은 모두 여알(女謁)로 말미암는 것으로서 마침내는 임금의 어진 덕에 누를 끼치고 정사를 해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계하는 말이 매우 적절하다.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임 참의(參議) 장응일(張應一)이 지나간 계축년299) 에 구영릉(舊寧陵)300) 을 다시 봉심(奉審)한 뒤에 소(疏)를 올렸는데, 그가 기회를 타서 망측한 말을 만들어내어 남을 헐뜯어서 조정 고관들에게 화를 전가시키려고 한 죄상은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소에 말하기를, ‘능(陵)을 봉심한 대신을 모두 사면(赦免)하셨으니, 전하께서 대신들을 대우하심은 곡진하다고 하겠으나, 선대왕(先大王)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과연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모르긴 하겠습니다만, 성인(聖人)의 마음은 진실로 일반 사람의 상정(常情)과는 다른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하께서는 차라리 제어(制御)를 받는다는 평을 들을지언정 능히 대신을 다치게 할 수 없어서입니까?’ 하고, 또 ‘하찮은 범부(凡夫)도 그 어버이를 장사할 적에는 오히려 정성을 극진히 하는데, 한 나라의 군주로서 선왕을 장사하는 것이 도리어 범인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비록 대등(對等) 이하 사람이라도 쓸 수가 없는 것인데, 감히 방자하게 글로 기록하면서 조금도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었으니, 그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차마 할 짓이겠는가? 이는 익수(翼秀)301) 가 능묘를 경동(驚動)시켜서 충량(忠良)한 사람을 모해하려던 일과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나, 그 불순하고 도리에 어긋난 죄는 더욱 심하다. 익수는 이 사건으로 관작을 추탈당하였는데 장응일 만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가만 둘 수 없다. 그 관작을 추탈하라."
하였다. 병조 좌랑(兵曹佐郞) 유성운(柳成運)의 6품직을 환수(還收)하도록 명했다. 유성운이 주서(注書)가 되었을 적에 임관 후 숙배(肅拜) 전의 기간과 군직(軍職)에 붙였던 기간까지 통산해서 승진하였기 때문에, 도승지(都承旨) 이선(李選)이 일찍이 이 일로써 아뢰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여성제(呂聖齊)가 연석(筵席)에서 아뢰었으며, 김수항(金壽恒)이 또한 효종조(孝宗朝) 때 내린 교명(敎命)을 인용해서 말한 까닭에 임금이 이러한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여성제가 아뢰기를,
"어공(御供)의 각종 물품에 대하여 호조로부터 표(標)를 붙이는 일은 이미 재가(裁可)를 받았고, 월령 물선(月令物膳)은 금년 10월부터 예전과 같이 실시하기로 재결(裁決)을 받았는데, 이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최대한으로 절감하는 시기에 예전처럼 할 수가 없다. 명년 가을까지 우선 절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4일 갑진
유성(流星)이 항성(亢星) 제 3성(第三星)에 침범하였다.
김홍복(金洪福)을 정언으로, 김창집(金昌集)을 헌납으로, 임상원(任相元)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강현(姜鋧)을 교리로 삼았다.
성균관(成均館)에 감귤을 하사하고 유생(儒生)을 시험하여 뽑았는데, 수석을 한 민진원(閔鎭遠)에게 급제(及第)를 하사(下賜)하였다.
11월 25일 을사
달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윤빈(尹彬)을 집의(執義)로, 민진주(閔鎭周)를 헌납(獻納)으로, 김창집(金昌集)을 교리(校理)로, 이돈(李墩)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옥당(玉堂)302) 의 관원을 소대(召對)하였다.
11월 27일 정미
경기(京畿)의 유생(儒生) 남궁학(南宮學) 등이 소(疏)를 올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였다. 세 번 소를 올려 거듭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옥당(玉堂)의 관원을 야대(夜對)하였다.
11월 29일 기유
유성(流星)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우의정(右議政) 이단하(李端夏)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금년 재해의 흉작은 예전에 없던 바로서 경기(京畿) 지방이 조금 낫다고는 하지마는, 노상에서 소량의 피륙이나 곡식을 가진 자라도 살해와 약탈을 당한다고 하오니 타도는 이를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앞으로 도적 떼가 크게 일어나면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근심이 있을 것이니, 다만 백성이 굶주려 죽는 참사(慘事)에만 그치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경술년303) 가을의 흉작이 금년같이 심하지 않았으나, 그 이듬해인 신해년304) 의 보리 농사가 또 큰 흉작이었습니다. 그때 금산(錦山)의 도적은 전임 좌수(座首)가 괴수가 되어서 장수현(長水縣)의 병기(兵器)를 약탈해 가지고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웅거하면서 각 고을을 협박 약탈할 계획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의 민심은 또 예전과 같지 아니하니 큰 간활(奸猾)의 계획이 어찌 한 곳에만 그치겠습니까? 올해는 겨울 날씨가 따뜻해서 아직 큰 눈이 오지 않았으니, 내년의 보리 농사는 또 어떠할는지 알 수 없으며, 저축한 곡식이 떨어지면 신해년과 비해 볼 때 또 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크게 경계하고 크게 절약하는 조처가 없어서는 나라를 유지할 방책이 없을 것입니다.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재해(災害)로 흉년이 들면 군주의 선(膳)에 부제폐(不祭肺)하며, 말에게 곡식을 먹이지 아니하며, 제사에 불현(不懸)하며, 대부(大夫)가 양(粱)305) 을 먹지 아니하며, 사(士)는 술을 마시고 즐기지 아니한다.’ 하였고, 그 주해(註解)에 이르기를 ‘선(膳)은 미식(美食)의 명칭(名稱)이고 부제폐(不祭肺)란 짐승을 잡아서 음식을 풍성하게 잘 차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사(祭祀)에는 반드시 종과 북을 달아 놓고 음악을 연주하는 법인데, 불현(不懸)이란 주악(奏樂)을 하지 아니함을 말함이다. 대부(大夫)는 서(黍)와 직(稷)을 먹고 양(梁)으로 가식(加食)한다. 군주로부터 사(士)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가지씩만 들어서 말하였지만 그 실상은 서로 통하는 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잡기(雜記)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흉년이 들면 노마(駑馬)를 탈 것이며, 제사에는 하생(下牲)을 쓴다.’라 하고, 그 주해에 이르기를, ‘하생(下牲)이란 제사에 상제(常祭)에 대뢰(大牢)를 써야 할 사람은 강등해서 소뢰(小牢)를 쓰고, 소뢰를 써야 할 사람은 강등해서 특생(特牲)을 쓰고, 특생을 써야 할 사람은 강등해서 특돈(特豚) 따위를 쓴다. 흉년인 때문에 절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해에서 이른바 ‘대뢰’란 요즈음의 소[牛]·양(羊)·돼지[豕]이고 ‘소뢰(小牢)’란 양·돼지이고 ‘특생(特牲)’이란 송아지이고, ‘특돈(特豚)’이란 새끼돼지입니다.
신이 또 최명길(崔鳴吉)의 정축년306) 상소문을 보니 그 글에 말하기를, ‘이번의 제향(祭享)에 대해서는 이미 절감하였으나, 그 밖의 여러 가지 용도도 역시 예전처럼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니, 정해진 공안(貢案)을 마땅히 수입을 계산해서 지출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수년 동안은 그러한 방침으로 재정(財政)을 운용할 계획임을 먼저 백성에게 널리 알려서 피폐된 민력이 조금 펴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을 구휼(救恤)하기 위한 임시 조치일 뿐이고, 본래 영원토록 준수할 규정이 아니므로 평상시에 적용할 근본적인 공안(貢案) 또한 마련해서 백성에게 공포하여 외방의 소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본뜻을 환하게 알도록 해야만 후일 국가가 믿을 수 없다는 비방을 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당초에 정한 공안의 원본을 난리 중에 잃어버리고, 흩어져 없어진 것을 다시 주워 모아서 수정하였고, 또 난리를 치른 뒤에 국력에 알맞게 수입을 계산해서 지출하는 것으로 목전(目前)의 시행 방침을 세웠다가 국력이 조금 유족(裕足)해지기를 기다려서 원래의 공안대로 시행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적(文蹟)으로 보면 제향(祭享)에 절감한 전례가 있습니다.
신이 봉상시(奉常寺)의 제물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제도(諸道)와 각읍(各邑)의 중미(中米) 조목에, ‘정축년307) 에는 감하였고 갑오년308) 에는 복구하였다.’라고 주(註)를 달았는데, 여기에 ‘중미(中米)’란 대개 주미(酒米)입니다. 만약 갑오년에 복구한 수량을 제하면 비록 감했다고 하나 인조조(仁祖朝) 이후에는 종묘(宗廟)와 능묘(陵墓)의 제위(祭位)에 갑오년에 복구한 것보다 많았는데, 오히려 현재의 주미에도 모자라는 형편이었습니다. 그 밖에 제기(祭器)에 담아서 쓸 용품에 있어서도 제기에 알맞게 담은 것 외에는 다시 감할래야 감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잡기(雜記)에 기재된 ‘하생(下牲)’의 예로 제사를 차린다면 사직(社稷)·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문묘(文廟)의 상제(常祭)에 대뢰(大牢)로 쓰던 것을 강등해서 소뢰(小牢)를 써야 됩니다. 그러나 만약 서울 일대에 소 잡는 것을 일체 금하지 못하여 사람은 쇠고기를 먹으면서 국가의 큰 제향(祭享)에는 소를 쓰지 않는다면 미안할 일 입니다. 신의 의견에는 소와 돼지 두 가지만 쓰고 양(羊)을 쓰지 않는다면 소뢰로 강등하는 예문(禮文)에 합당할 것이고, 미안하지도 않을 듯합니다. 풍운 뇌우(風雲雷雨)·산천(山川)·성황(城隍)·악해독(嶽海瀆)·선농(先農)·선잠(先蠶)·우사(雩祀)·역대 시조(歷代始祖) 및 여제(厲祭)·둑제(纛祭)·향교(鄕校)·군(郡) 이상의 상제(常祭)로 소뢰(小牢)를 쓰는 경우는 강등해서 특생(特牲)을 쓸 것이며, 서울과 지방 문묘의 종향위(從享位)와 주현(州縣)의 사직(社稷)·영성(靈星)·영제(禜祭) 등 시생(豕牲)을 쓰는 경우에는 강등해서 특돈(特豚)을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은 또 예조(禮曹)의 제물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지방 향교에 쓰는 우포(牛脯)를 무인년309) 에는 장포(獐脯)로 대신 썼습니다. 예문(禮文)에는 본래 우포(牛脯)가 없었고 녹포를 갖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포로 대신했었는데, 무인년에는 우역(牛疫)으로 인하여 우포를 갖출 수 없었으므로 장포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장(獐)과 녹(鹿)은 같은 품종이므로 대신 쓰기에 아주 알맞습니다. 또 지방 향교에도 본래 우생(牛牲)을 쓰라는 조문은 없었으나, 다만 포(脯)를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소를 잡게 되므로, 선혜청(宣惠廳)에서 춘추로 그 대가(代價)를 지급하는데, 소읍(小邑)에는 8석(石)이고, 대읍(大邑)에는 20석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적절하게 변통하면 저치미 지급을 크게 감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고례(古禮)에 이렇게 강등하고 감축하는 것은 단지 흉년의 재력에 맞추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평소에 절감 검약함으로써 재화(災禍)를 멎게 하는 뜻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연사(年事)가 순조롭게 성숙하지 아니하면 팔사(八蜡)310) 가 통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또한 이러한 뜻입니다. 제향은 흉년으로 인하여 감하게 되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한 가지 조항도 고례(古禮)에 따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정축년 이후에 종묘와 문묘의 제향에 모두 음악을 연주하지 않다가 복구한 이후에는 비록 신해년과 같은 흉년에도 음악을 폐지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그 때의 조신(朝臣)들이 고례를 주청(奏請)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는 흉년을 만났는데, 조종(祖宗)의 영혼이 음악을 듣게 되면 반드시 마음이 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종묘를 받들고 예절에 맞게 제사를 모셔야 그것이 대효(大孝)이며, 흉년에 음악을 쓰지 않는 것이 곧 예절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신의 생각으로서는 도리어 예절에 어긋난다고 생각됩니다. 마땅히 내년 춘향(春享) 때부터 사직과 종묘의 대제 이외에도 모두 하생(下牲)의 예(禮)를 적용하여 제향하고 헌가악(軒架樂)은 진열만 해 둔 채 연주하지 않으면 신(神)과 사람이 서로 감동하는 바가 있을 것이며, 평년를 기다려 복구한다면 신과 사람이 모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근일에 특별히 전지(傳旨)를 내리시고, 또 신하들이 주청해서 어공 물선(御供物膳)을 많이 감손(減損)하였으니, 신민된 자로서 그 누가 공경하여 앙모(仰慕)하지 않겠습니까? 제향 용품과 어공(御供) 또한 이미 재감(裁減)하였으니, 국가의 모든 용도를 일체 감축하여서 반드시 현재의 국력에 알맞도록 수입을 계산해서 지출하기를 정축년311) 의 난리를 격은 직후처럼 하시고, 평년에 세입(歲入)이 조금 늘어난 때를 기다려 본래의 공안(貢案)대로 환원(還元)하면, 이것이 바로 옛적에 성조(聖祖)와 훌륭한 정승이 재난(災難)을 만났을 적에 이미 시행했던 전례인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의정부(議政府)에 하문하시어 꼭 시행하도록 하소서.
신이 또 근래 고 정승 이경여(李敬輿)가 효종조(孝宗朝)에 올린 차자를 보니 세종 대왕(世宗大王) 때는 궁인(宮人)이 1백 명 미만이었고, 어구(御廐)의 마필(馬匹)이 열 마리도 안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종 대왕은 곧 우리 나라의 성군(聖君)이십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니, 이 점을 생각하소서. 사람들은 혹 제향을 감손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들이 평소에 안일한 습성으로 이미 고질이 되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스스로 검약하고 절감할 수 없어 마치 진흙과 이슬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인데, 마침내 제향만을 감손할 뿐이라면 그러한 처사는 도리어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는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신 역시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사치의 폐해가 천재(天災)보다 더 심하다 하오니, 신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제향을 강등하여 감축할 경우 견식이 있는 사대부들이 반드시 모두 안일(安逸)에 젖은 습성을 버리고 일반 동포(同胞)와 더불어 함께 살길을 찾아가기를 생각한다면 우리 나라의 기반이 영구히 견고(堅固)해질 것입니다.
신이 또 전해 오는 옛이야기를 들으니, 세종 대왕께서 민간에 자못 사치스러운 풍습이 있음을 늘 걱정하시어 정승 황희(黃喜)에게 말씀하시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신이 마땅히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었는데, 훗날 등대(登對)할 적에 황희가 굵은 베로 장복(章服)과 내의(內衣)를 지어 입고 들어와서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신은 백관을 통솔하는 자로서 신 자신이 이런 차림새를 하였으니, 백관이 어찌 감히 사치를 범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상께서도 이러한 뜻을 이해하셔서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보여 주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세종께서 그 말을 받아들이시자 한때의 사치스러운 폐습이 크게 고쳐졌다고 합니다. 신과 같이 못난 사람이 비록 외람되게 정승의 직위에 있아오나 어찌 감히 그러한 것을 거론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거룩한 군주와 어진 정승이 생각을 한 번 전환시키는 데 달린 것이므로, 이것이 신 역시 희망하지 않을 수 없는 바입니다. 제향을 변통하는 일은 비록 예경(禮經)에 있는 성인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신이 어찌 감히 좁은 소견으로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의정부(議政府)에 하문(下問)하신 외에 또 원임 대신(原任大臣)과 밖에 있는 대로(大老)에게 물으셔서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불가하다고 반대한다면 신 또한 아무 여한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사연은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말이므로, 내가 칭찬하여 감탄(感歎)하는 바이니, 체념(體念)하지 아니하겠는가? 변통할 만한 것은 의정부로 하여금 상의해서 처결하기로 하겠고, 제향을 절감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마땅히 여러 대신들과 밖에 있는 유현(儒賢)에게 문의해서 참작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지(諭旨)를 전하였다. 뒤에 여러 신하들에게 수의(收議)하였는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일찍이 인조조(仁祖朝)병자년312) 에는 특히 각 능묘(陵墓)의 오향 대제(五享大祭)를 폐지하였고, 정축년313) 의 난리 이후에는 또 종묘(宗廟)의 삭망제(朔望祭)를 폐지하였었는데, 지금 그 희생(犧牲)을 감하고 헌가악(軒架樂)을 철폐하는 따위는 제향을 정지하거나 폐지하는 데 비하면 사체(事體)가 약간 경미하오니 우의정(右議政)의 건의대로 실행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한편 조금 걱정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우의정이 차자를 올리기에 앞서 서면으로 신에게 묻기에 감히 거기에 대해 대답한 일이 있었사온데 지금 그 차자 끝에, ‘아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검약(儉約)하고 절감할 수가 없어서 마치 진흙과 이슬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인데, 마침내 제향만을 감손할 뿐이라면 그러한 처사는 도리어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바로 신의 답서(答書) 중의 말입니다. 사리로 말하건대, 위로 임금과 아래로 신하가 서로 노력해서 절약을 힘써 제향(祭享)을 절감(節減)하는 뜻에 맞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신의 이 말이 구차하고 고식적(姑息的)임을 면치 못하는 줄을 스스로 깨닫고 있던 중에 지금 차자(箚子)의 내용을 보니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주자(朱子)가 장남헌(張南軒)314) 에게 보낸 편지에 절사(節祀)를 폐지하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논변(論辨)한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지금 속절(俗節)의 제사를 예경(禮經)에 의거하여 이미 폐지하였는데, 산 사람은 음식과 연락(宴樂)이 시속(時俗)에 따라 전과 같으니, 이는 죽은이 섬기기를 산사람 섬기듯이 한다는 뜻에 매우 어긋난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오늘날의 문제와는 좀 다르기는 하나, 또한 선현(先賢)들이 사리를 고찰하고 염려하는 데 자상하고 신중히 하는 뜻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시행하던 일을 갑자기 경솔하게 의정(議定)할 수 없으니, 2품 이상의 관원을 빈청(賓廳)에 불러서 회의하도록 하는 것이 제전(祭典)을 소중히 여기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고, 영부사(領府事) 김수항(金壽恒)과 판부사(判府事) 정지화(鄭知和)는 아뢰기를,
"제사를 받드는 예법(禮法)은 성신(誠信)과 충경(忠敬)을 위주로 하고, 또 반드시 희생(犧牲)을 드리고 음악으로 위안하는 법입니다. 이 일로써 논한다면 희생을 줄이고 등가(登歌)315) 를 정지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이므로, 사실상 한 나라에서 별제(別祭)를 창설해서 수시로 폐지하기도 하고 시행하기도 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우의정이 인용한 예문(禮文)이 이와 같다면 주(周)나라부터 송(宋)나라가 남천(南遷)한 이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에 과연 실행한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가령 한때 용단을 내려 실행했던 일이 있었더라도 번번이 상하가 서로 응하지 않고 처음과 마지막이 서로 맞지 아니하여 대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었으니 다만 성상(聖上)께서 깊이 생각하셔서 조처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민정중(閔鼎重)은 아뢰기를,
"예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고 풍속이 같지 아니한데, 진실로 때에 따라 적절하게 할 줄을 모르고, 그저 옛것만을 고수하면서 변통하지 않는다면, 혹 그 사이에 그 본의를 벗어나서 도리어 폐단이 생기게 되는 단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오늘날 군신(君臣) 상하가 한마음 한뜻으로 걱정하여 위로는 종묘(宗廟)를 받드는 성심을 극진히 하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구제하는 데 진실한 마음을 가진다면, 진실로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지니기 어렵고 게으르고 소홀히 하는 마음은 생기기 쉬워서 아래 있는 사람이 모두 우리 전하의 마음처럼 마음을 쓰지 아니하고, 음식과 의복 등의 소비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면서 종묘(宗廟) 제사를 받드는 데에만 먼저 절감한다면, 혹시 전하께서 몸소 삭감하시는 지성(至誠)에 미흡(未洽)함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은 아뢰기를,
"대신들이 아뢴 말은 이것이 옛날 성인(聖人)이 제정(制定)한 바이오나,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절사(節祀)는 이미 예경(禮經)에 따라 폐지하였는데도 산 사람은 시속에 따라 전과 다름없으니, 죽은이 섬기기를 산사람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본의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종묘의 향사(享祀)와 의례(儀禮)를 절감하자고 하면서 산사람의 모든 용도는 조절하여 감축하지 않는다면, 이 일을 의정(議定)한 사람은 마침내 예문을 핑계삼아서 거짓을 저지른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감히 함부로 말 참견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남용익(南龍翼)은 아뢰기를,
"정승(政丞)이 아뢴 말씀은 옛날 예경(禮經)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 근거(根據)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국가의 큰 일은 제전(祭典)에 있고, 제전은 종묘(宗廟)의 향례(享禮)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찍이 큰 흉년에 있어서도 제수(祭需)를 줄인 일이 없었습니다. 태뢰(太牢)와 등가(登歌)의 성대한 예절(禮節)을 지금 만약 갑자기 줄이고 철폐한다면, 사체(事體)에 진실로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또 인심이 예전과 다르고 안일(安逸)한 습성이 몸에 배어서 진흙과 이슬이 몸에 닥치는 걱정도 난리 중에 고생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으니, 바람 앞에 풀이 쓰러지듯이 임금의 덕화(德化)에 감응(感應)하는 효과를 신속하게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지금 이 절감하는 문제는 먼저 주상(主上)께서 굵은 베옷에 거친 명주 관을 쓰기를 한결같이 위후(衞侯)가 난리를 치른 때316) 와 같이 하시고, 사대부의 집에 혼례(婚禮)·상례(喪禮)·장례(葬禮)·제례(祭禮)는 일체 법을 정하여, 이서(吏胥)와 하인(下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도에 지나치게 사치한 폐습을 고친 다음 제향(祭享)을 절감하는 일은 천천히 의논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참찬(左參贊) 조사석(趙師錫)·호조 판서 유상운(柳尙運)·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공조 참판 서문중(徐文重)·이조 참판 박태상(朴泰尙)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조구(曹丘)·회계(會稽)317) 의 있었던 일로 마음을 가져 몸소 굵은 베와 거친 명주 옷을 입고 검약을 실천하시고 군신(君臣) 상하가 진흙과 이슬 속에 있는 것처럼 하면서 절약한 물화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백성을 구조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미치지 못할 경우에 비로소 종묘(宗廟)와 백신(百神)의 제향(祭享)에까지 미쳐 간다면 경중과 선후의 순서가 합당하게 되고, 신(神)과 산사람이 다같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판윤(判尹) 이숙(李䎘)은 아뢰기를,
"백성이 있어야만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만 종묘와 백신이 의지할 데가 있을 것인데, 지금 백성이 장차 살아 남을 수가 없게 된 판국이니, 비록 중요한 종묘(宗廟) 제향(祭享)이라도 절감하자는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흉년에는 제사에 하생(下牲)을 쓴다는 취지로 미루어 볼 때 그 말이 근거가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비록 희생(犧牲)이 평상시보다 미비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의리에 어긋나는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고, 대사성(大司成) 임상원(任相元)은 아뢰기를,
"흉년에 제례(祭禮)를 강쇄(降殺)하는 일은 예경(禮經)에 기재되어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국고가 탕갈되고 민생이 굶주려서 세입(稅入)의 감소가 난리 이후와 다름이 없으니, 비록 종묘(宗廟)의 제향에 제수(祭需)를 조금 줄이고 음악 연주를 폐지하여 용도를 절약하여 기민(飢民)을 구휼(救恤)하는 뜻을 보여 준다고 하더라도 조선(祖先)을 섬기는 도리에 허물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예조 참판 심재(沈梓)·동지(同知) 윤이제(尹以濟)·사직(司直) 유경(柳炅)·형조 참판 박상형(朴相馨)은 아뢰기를,
"지금 흉년을 만나 백성이 굶주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으므로, 대신이 고례(古禮)를 인용하여 차자를 올린 것은 대체로 국가의 용도를 절약해서 백성을 구제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주(周)나라 이후로 수천 년 동안에 흉년 기근이 없지 않았지만 《잡기(雜記)》에 기재된 이외에는 별다르게 절감한 전례를 증거로 삼을 명문(明文)이 없으니, 지중(至重)한 향례(享禮)를 경솔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신완(申琓)과 우윤(友尹) 최석정(崔錫鼎)은 아뢰기를,
"국가의 제례를 상정(詳定)한 것은 당초 거룩한 군주와 현명한 신하가 강구(講究)하여 한 왕조의 예법(禮法)을 만들어 영구히 준수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실로 쉽사리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헌납(獻納) 민진주(閔鎭周)는 아뢰기를,
"오늘날 이러한 조처는 만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일이니, 군신(君臣) 상하가 마땅히 서로 힘쓰고 노력하여 절약하는 실효를 거둔 뒤에라야 바야흐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나라의 정사(政事)가 매양 시작했다가는 흐지부지되는 병통이 있는데, 만약 세속의 풍습을 개선하지 못하여 사치한 버릇은 전일과 다름이 없으면서 유독 종묘의 제향(祭享)의 의식(儀式)만 먼저 절감한다면 어찌 매우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교리(校理) 강현(姜鋧)과 김창집(金昌集)은 아뢰기를,
"우의정의 차자는 크게 변통하여 아주 진작(振作)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만 군신(君臣) 상하가 진실로 일에 따라 절약하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기강이 문란할 때와 다름없이 한다면 아마도 공연히 제향만 줄인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副校理) 김만길(金萬吉)과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송주석(宋疇錫)은 아뢰기를,
"군주와 재상(宰相)은 만백성을 교화하는 권병(權柄)을 잡고 있으니, 전하께서 진실로 대신과 더불어 과감하게 실행하시고 통절(痛切)히 절약하셔서 조금이라도 사치한 일이 없게 한다면, 지금 이 절감하는 조처가 반드시 급박한 국가의 재정을 돕고 백성을 구휼하는 장본(張本)이 될 것입니다."
하고,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아뢰기를,
"오늘날 필요하지 아니한 모든 용도 중에서 절감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삭감하지 못하고 먼저 종묘(宗廟) 제향(祭享)만을 절감한다면 어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부호군(副護軍) 박세채(朴世采)는 아뢰기를,
"우의정이 아뢴 본뜻은 기민을 구제하기 위함이었고 예경(禮經)을 상고해도 난처하게 여길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마음에 찜찜한 점은 이렇게 변통한 뒤에 조정에서 실행하는 모든 행사가 표리(表裏)와 명실(名實)이 조금도 미진한 유감이 없게 될 수 있을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신(神)과 사람, 그리고 위아래의 도리에 있어서 지대한 관계가 있으니, 다만 성상(聖上)께서 깊이 생각하셔서 처결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이상(李翔)은 아뢰기를,
"이번에 향사 비용(享祀費用)을 절감하자는 거조는 실로 성대(聖代)의 종묘(宗廟)를 굳건히 하기 위한 방법이고, 한때의 절감은 마침내 자손 만대에 영구히 향사하는 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흉년이 거듭된 나머지 공사(公私)의 재정이 탕갈되어 위급 존망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는 이 즈음에 향사(享祀)를 절감(節減)하지 않을 수 없고, 향사를 절감하게 되면 궁중(宮中) 진상(進上)의 모든 용도 또한 절약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절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저절로 줄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재정(財政)을 감축(減縮)하는 근본이 어찌 향사(享祀)를 줄이는 데에 있지 않겠습니까? 정승의 의논은 사실상 그러한 마음에 맞는 것이니, 경비의 절감은 제례(祭禮)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대신이 아뢴 차자의 사연은 참으로 나라를 극진히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다. 그러나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지금까지 비록 큰 흉년을 만났을지라도 종묘(宗廟)의 향사(享祀)를 경솔하게 의논한 사람은 없었으니, 그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기 때문이다.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아도 종묘 향사를 감축하는 것은 끝내 미안한 점이 있으므로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렵겠다."
하였다.
옥당의 관원들을 야대(夜對)하였다.
11월 30일 경술
유성(流星)이 섭제성(攝提星) 밑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
이언강(李彦綱)을 승지로, 심권(沈權)을 정언(正言)으로, 오도일(吳道一)을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관원들을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중국을 침입해서 점거한 오랑캐들이 모두 다 오래 가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청(淸)나라 오랑캐는 중국을 점거한 지가 벌써 50년이 넘었으니, 천리(天理)는 진실로 추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명(明)나라가 덕을 쌓음이 깊고 두터웠으니, 그 자손이 반드시 중흥하는 남은 경사가 있을 것이고, 더욱이 신종 황제(神宗皇帝)는 우리 나라에 영구히 잊지 못할 은덕이 있는데, 우리는 국세(國勢)의 강약에 얽매여서 수치를 품은 채 참고 견디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통한(痛恨)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강현(姜鋧)과 전경(典經) 송주석(宋疇錫)이 대답하기를,
"거룩하신 전하의 간절하신 말씀은 신명(神明)도 감동하여 울 만 합니다. 만약 늘 그러한 마음을 잊지 않고 보존하여 더욱 오랑캐를 물리칠 방도를 강구하시면 나라의 형세가 저절로 굳세어져서 뜻한 바를 이룰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18권, 숙종 13년 1687년 1월 (0) | 2025.11.17 |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12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10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9월 (0) | 2025.11.17 |
| 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686년 8월 (0) | 2025.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