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5월 2일 무신
판부사(判府事) 김창집(金昌集)이 차자를 올리기를,
"양역(良役)349) 의 변통을 끝내 크게 경장(更張)하지 못하고, 단지 중외(中外)의 긴요하지 않은 명색(名色)만 모두 사태(沙汰)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여러 도(道)의 방백(方伯)350) 이 시종 아까와하면서 떼어 줄 뜻이 없습니다. 심지어 해서(海西)의 아병(牙兵)351) 이 열읍(列邑)에 두루 퍼져 있어 오명준(吳命峻)이 사폐(辭陛)할 때 특별히 내리신 옥음(玉音)이 정녕할 뿐만이 아닌데, 주저하며 관망하면서 말을 허비해 치계(馳啓)하고, 단지 병영(兵營)의 수영패(隨營牌)만을 임급(臨急)하여 떼주는 것으로써 책임을 면하여 구차하게 마감하였습니다.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은 모두 일체(一體)인데, 저쪽에 있으면 없애고 나에게 있으며 아끼며 차마 주지 못하니, 신이 생각하건대 각도의 아병(牙兵)은 마땅히 액수(額數)를 작정하여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으로 보충하고, 정식(定式)을 어긴 자는 드러나는 대로 책벌(責罰)하되, 앞으로 어사(御史)가 행차하여 염문(廉問)해 오게 할 것이며, 관동(關東)은 도내의 속오(束伍)352) 를 감사가 나누어 거느리므로 비록 별도로 아병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며, 원주의 아병 역시 혁파할 만하니, 모두 본주(本州)에 붙이도록 구처(區處)해야 합니다.
의주(義州)의 인물은 호준(豪俊)하지 않음이 없으니, 지금 마땅히 본부(本府)로 하여금 그 중 뛰어난 자를 뽑아서 조정에 전문(轉聞)하여 특별히 거두어 써야 합니다. 평양의 사인(士人) 황순승(黃順承)은 행실이 높고 학문이 돈독하여 여러 차례 천거(薦擧)에 올랐으니, 마땅히 먼저 거두어 임용(任用)하여 선비들의 기대를 위로해야 합니다. 춘천(春川)의 방죽을 쌓는 일을 주모(主謀)한 사람은 바로 사인(士人) 이공윤(李公胤)인데, 그는 의술(醫術)을 믿고 한 세상을 농락하였습니다. 본주(本州) 5백여 석(石) 대동미(大同米)353) 를 재해를 입었다고 핑계하여 거짓으로 해청(該廳)에 보고하고 대납(代納)하기를 조급히 청하여 가벼운 데 따라 돈으로 바꾸니, 돈이 이공윤에게 지출되어 쌀이 이공윤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방백을 지시해 부려서 4, 5고을 연군(煙軍)354) 을 독려해 내어 문득 위협을 가했으며, 또 도사(都事)에게 부탁해 스스로 적간(摘奸)하도록 하였으니, 포의(布衣)355) 로서 권세가 있다고 할 만합니다. 이공윤 및 방백·수령은 엄중히 조사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경중(京中)의 거간꾼 무리들이 소양강(昭陽江) 상류를 절단(截斷)하여 갯벌을 파헤쳐 논을 만들 계획을 삼았으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사람을 적발하여 각별히 엄중한 형벌로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위 조항의 일은 상확(商確)하여 변통하고, 이공윤 등의 일은 엄중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후에 이공윤은 감죄(勘罪)하여 장(杖) 1백에 유 3천리(流三千里)로 하였고, 그때 감사 김치룡(金致龍), 부사(府使) 박태항(朴泰恒)은 먼저 파직한 후 추고하였으며, 김세유(金世瑜)는 소양강 상류를 메운 죄로 역시 장(杖) 80에 고신(告身)356) 을 빼앗았다.
강원도 양양(襄陽)·횡성(橫城) 등지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윤5월 5일 신해
이보다 앞서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지평(持平) 권엽(權熀)이 대신(大臣)이 부리(府吏)를 가두고 치죄함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였다. 이는 대개 정동후 등이 금리(禁吏)로 하여금 의관(醫官) 조경기(趙慶基) 등의 집에 들어가 비단 침장(寢帳)357) 을 단속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이유(李濡)와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금리를 불러서 금제(禁制) 밖의 일을 묘당(廟堂)에 품하지 않고 나가서 금제(禁制)한 잘못을 힐책하고, 인하여 형리를 잡아 가두었다. 정동후와 권엽이 사피하여 말하기를,
"본부(本府)는 풍문(風聞)으로 범법자를 잡아 다스리는 것이 바로 그 직무(職務)이고, 더군다나 자의대(紫衣帶)는 이미 금제(禁制)에 기재되어 있으며, 채장(綵帳)은 또 의대(衣帶)에 비할 바가 아니니 금제에는 비록 채장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 가운데 저절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풍문으로 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먼저 묘당에 품하는 것은 신의 생각이 미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경기는 도처를 두루 찾아다니며 허언(虛言)을 날조하였으니 기강(紀綱)에 관계되는데,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이명이 차자를 올려 변명하기를,
"금제(禁制) 밖의 금해야 할 것을 묘당에 의논하는 것은 실로 뜻이 있는 것인데, 조제(條制)밖의 일을 나가서 금제하면서 금리로 하여금 들이닥쳐 뇌물을 받게 했으니, 아주 한탄스럽습니다. 나가서 금제할 때의 패자(牌子)358) 에 다만 역관(譯官)·서리(書吏) 두 곳만 일컬었으니, 이는 나가서 금제하는 패(牌)이지 풍문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의관(醫官)을 신은 며칠 동안 보지 못하였고, 단지 도로(道路)에서 떠도는 말로써 불러 묻게 하니, 헌리(憲吏)가 도리어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사간원에서 처치하여 정동후 등을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였다. 이후에 정동후 등과 이유·이이명이 어러 번 계차(啓箚)를 올려 서로 다투기를 그치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말세의 풍속이 사치스러워 이미 고폐(痼弊)가 되었는데, 의관(醫官)·역관(譯官)의 무리가 더욱 심해 그 거처와 의복이 거의 옥벽 문수(屋壁文繡)359) 보다 지나쳤다. 비록 조경기의 일로 말하더라도 침장(寢帳)은 본디 이 무리들이 가질 바가 아닌데, 더군다나 자금(紫錦)으로 하겠는가. 사헌부에서 가두어 다스리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어찌 금제(禁制)가 있는지 여부와 풍문의 잘잘못을 논하겠는가. 그런데도 대신(大臣)은 이에 도리어 품하지 않은 것을 핑계하여 부리(府吏)를 가두어 다스리고 또 뒤따라 그를 위해 말하였으니, 대신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사치한 풍속을 제거시켜 백성의 풍습을 바로잡겠는가.
주강(晝講)에 나갔다. 교리(校理) 홍우서(洪禹瑞)가 글의 뜻으로 인하여, 임진년360) 때 싸우다 죽은 사람 고인후(高因厚)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고인후는 바로 고(故) 참의(參議)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인데, 부자(父子)가 모두 왜란(倭難)에 순절(殉節)하였다.
권상유(權尙游)를 도승지(都承旨)로, 김유(金楺)를 수찬(修撰)으로, 어유귀(魚有龜)를 부교리(副校理)로, 서명균(徐命均)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윤5월 8일 갑인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지경연(知經筵) 조태채(趙泰采)가 진달하기를,
"서인(庶人)의 장례(葬禮)에 참람하게 죽격(竹格) 촉롱(燭籠)361) 을 쓰니, 지금부터 금하여 범한 자는 논죄(論罪)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윤5월 9일 을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심택현(沈宅賢)을 승지(承旨)로, 홍중휴(洪重休)를 필선(弼善)으로, 남일명(南一明)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윤5월 10일 병진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일전에 우윤(右尹) 이선부(李善溥)가 임금에게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신이 북번(北藩)에 있으면서 개시(開市)362) 의 폐단을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목차(穆差)363) 에게 통보하여 주선(周旋)하게 하였더니 전년 개시(開市)의 모든 일이 매우 순탄하였고, 또 동지사(冬至使)의 별단(別單) 가운데에 개시를 신칙(申飭)하는 저들의 말이 있었는데, 이는 목차(穆差)가 전주(轉奏)해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듣건대 목차가 나온다고 하니, 마땅히 빈신(儐臣)364) 으로 하여금 특별히 사례(謝禮)하는 뜻으로 표하게 하고 인하여 약속(約束)을 정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날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이선부의 말대로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진규(金鎭圭)가 말하기를,
"목차는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기를 좋아하니, 이사람에게 요구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어찌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후환을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의 폐해가 어찌 반드시 그와 같을 줄을 알겠는가."
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지난해 북자(北咨)365) 에 방수(防守)에 마음을 쓰라는 등의 말이 있었으므로, 서쪽 변방의 성첩(城堞)을 수축한 곳이 많았는데, 북한성(北漢城)도 역시 고양(高陽)의 큰 길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있으니, 뜻밖에 저들에게 힐문(詰問)을 당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말하기를,
"마땅히 자문 가운데 있는 말로써 대답해야 합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인하여 청하기를,
"빈신(儐臣)에게 분부하여 임시 변통해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이명이 또 양역(良役)의 폐단에 대해 극언(極言)하기를,
"만일 지금에 이르러서 변통하더라도 또한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구(祈求)할 수 가 있으니, 성상께서 특교(特敎)를 내리시어 조신(朝臣) 및 초야(草野)의 선비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진달하게 하고, 진실로 좋은 계책이 있으면 마땅히 즉시 채용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은 옳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말하기를,
"진언(進言)한 것을 반드시 쓸 수는 없으나, 또 구언(求言)366) 하였다가 쓰지 않으면 한갓 성실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자세히 시말(始末)을 처리한 후에야 비로소 변통할 수 있고, 먼저 묘당(廟堂)에 상확(商確)하여 그 요령을 얻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데, 어찌 실상은 없고 한갓 이름만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司諫) 유태명(柳泰明)이 논핵하기를,
"강원 도사(江原道事) 이제(李濟)는 이공윤(李公胤)이 방죽을 쌓는 일로 인하여 배리(陪吏)로 하여금 춘천부(春川府)에 사사롭게 통보한 것이 두 번에 이르렀고, 곧바로 군사를 주어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여 조정의 금법(禁法)을 안중(眼中)에 두지 않고 마음대로 죄를 범했으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가 전계(前啓)를 진달하고, 황순중(黃順中)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이명은 처음에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했다가, 마침내 절도(絶島)에 유배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절도에 유배하라 명하였다. 정동후가 거듭 청하니, 임금히 말하기를,
"내일 논계(論啓)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수찬(修撰) 김유(金楺)가 말하기를,
"이선부(李善溥)가 진달한 목차(穆差)에게 치사(致謝)하는 일은 지금 이미 품정(稟定)하였으나, 당초 번신(藩臣)이 사사로운 일로 다른 나라 사람에게 청촉(請囑)을 꾀하여 이미 매우 체모를 잃었는데, 또 조령(朝令)으로 사사로이 부탁하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큽니다. 조정에서 부득이 사은(謝恩)하는 일이 있는 것도 참으로 수치스러운데, 지금 또 사사로이 사의(謝意)를 표하여 은혜를 바라는 것처럼 한다면 어찌 구차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아직 분부하지 않았으니, 다시 헤아려 하교(下敎)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민진후(閔鎭厚)는 말하기를,
"이는 단지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언급하게 할 것이지 조령(朝令)으로 할 것은 아니므로 유신(儒臣)의 말이 정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김유의 말을 따라 다시 분부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유태명(柳泰明)을 승진시켜 승지(承旨)로 삼고, 김유(金楺)를 부교리(副校理)로, 한영조(韓永祚)를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윤5월 12일 무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윤5월 14일 경신
이선부(李善溥)를 도승지(都承旨)로, 권첨(權詹)을 보덕(輔德)으로, 여광주(呂光周)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윤5월 15일 신유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병조 판서 조태채가 말하기를,
"강창(江倉)을 지금 바야흐로 철거하여 북교(北郊)로 옮기는데, 각도의 세미(稅米) 전부가 올라오면 저장하기가 어려울 듯이니, 탕춘대(蕩春臺) 근처에다 10여 간의 창고를 지어 저장하게 하고, 경급(警急)을 당하면 마땅히 군향(軍餉)으로 소속시키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남한 산성의 예에 의하여 3백 석의 정백미(精白米)를 북한 산성의 새로 지은 창고 안에 쌓아두어 어공미(御供米)로 삼고, 호조(戶曹)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박성로(朴聖輅)가 논핵하기를,
"조경기(趙慶基)의 아들이 채장(綵帳)을 사용한 일은 참람함이 낭자하니, 조경기는 오로지 황공하게 여겨 감죄(勘罪)하기를 기다려야 마땅한데, 이에 감히 대신(臺臣)을 무함해 꾸짖고, 재신(宰臣)의 문에 달려가 참람되게 사치한 죄를 면하려고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당시 의논이 조경기는 마땅히 나국(拿鞫)을 청해야 하는데, 대계(臺啓)는 단지 파직으로만 논하였으니, 이를 그르쳐 너무 관대하게 한 것을 자못 비난하였다.
윤5월 16일 임술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지돈녕(知敦寧) 민진후(閔鎭厚)·호조 판서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하였는데, 이이명이 아뢰기를,
"원접사(遠接使) 박권(朴權)이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역관(譯官)으로 하여금 미리 목차(穆差)를 보고 성상께서 다리에 병환이 있어 전정(殿庭)의 행례(行禮) 때 오르내리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을 말하게 했더니, 그도 역시 놀라 염려하면서 말하기를, 「오래 된 예(禮)를 갑자기 변경할 수는 없으니,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마땅히 대신(大臣)과 대면해서 의논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서울 가까이 온 후에는 날짜가 이미 촉박하여 주선하기 어려우니, 미리 대신을 보내어 하루이틀 일정 안에 틀림없이 허락을 받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먼저 빈신(儐臣)으로 하여금 힘껏 말해 보아서 되지 않으면 대신을 보내도 늦지 않다고 전교하였다. 이이명이 또 말하기를,
"유집일(兪集一)의 글 가운데 말하기를, ‘칙사(勅使)의 행차가 백마 산성을 지나면서도 묻는 바가 없었고, 선천(宣川)에 이르러서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백령(栢嶺)에 성을 쌓아도 되는지 가부를 오관 사력(五官司曆)에게 묻게 하였더니, 하마 범철(下馬泛鐵)이 쌓아도 된다 하였는데, 목호(穆胡)가 듣고는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성에 대한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하였다.
윤5월 17일 계해
유명홍(兪命弘)을 승지(承旨)로, 남치훈(南致熏)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홍우서(洪禹瑞)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윤5월 18일 갑자
사헌부(司憲府)에서 논핵하기를,
"신급제(新及第) 이헌영(李獻英)은 과명(科名)이 어두웠으나 오히려 태연하였으며, 정계(停啓)한 후에 갑자기 당후(堂后)367) 의 가관(假官)에 의망(擬望)368) 되었으니, 청컨대 승지는 추고하고, 주서(注書)는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사(知事) 이광적(李光迪)이 상소하여 북한 산성의 도적에 대한 일을 논하기를,
"무뢰(無賴)한 유민(流民)들이 성중에 들어와 모여서 처음에는 마소[牛馬]를 훔치는 도둑이 되었다가, 지금은 겁략(刦掠)하는 적(賊)이 되니, 성 주위 수십 리 땅에서 약탈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해조(該曺)로 하여금 각문의 자물쇠를 거두어 들여 내수사(內需司)에 봉해 두고, 단지 남성문 한 길로 통행하게 하고, 해가 지면 즉시 닫고 뜬 후 열게 하되, 그 위장(衞將)으로 하여금 문금(門禁)을 엄중히 관장하게 하소서."
하자, 소(疏)를 비국(備局)에 내렸는데, 복주(覆奏)하여 남문의 개폐(開閉)는 허락하지 않고 단지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기찰(譏察)하여 잡도록 하였으니, 대개 성안 사람들이 땔나무를 채취하면서 한 남문만으로 통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원접사(遠接使) 박권(朴權)이 장계(狀啓)하기를,
"칙사(勅使)가 스스로 황제(皇帝)의 별지(別旨)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수역(首譯)으로 하여금 찾아와서 그 글을 등사하게 했는데, 이르기를, ‘너희들은 조선에 이르러서 국왕에게 유시하기를, 「왕이 나라를 이어받고 세월이 흘러갔는데, 거의 사단(事端)이 없이 앉아서 태평을 누리니,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할 만하다. 생각하건대 왕의 안모(顔貌)도 역시 반드시 옛날보다 못하고, 수염도 역시 반드시 점차 하얘졌을 것이다. 짐(朕)의 이곳도 사소한 일이 없으므로, 지난번 짐의 60수(壽)를 경축하는 예의(禮義)로 인해 특별히 대신(大臣)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서 반포(頒布)하게 한다. 짐(朕)은 이에 천하를 통치(統治)하는 대군(大君)으로서, 오로지 온 천하 인민(人民)이 두루 태평하고 안락(安樂)하게 되도록 마음먹고 있을 뿐 다른 것은 없다.」고 하라. 원컨대 너희들은 이로써 왕에게 유시함이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5월 19일 을축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포천(抱川) 왕방산(旺方山)은 연전에 고(故) 현감 권익흥(權益興)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의 집에 사여(賜與)하였는데, 양원군(陽原君) 이환(李煥)과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이 감히 오로지 차지할 계책을 내어 소송의 단서를 일으켰으니, 청컨대 환과 혁을 모두 삭직하소서. 목천(木川) 사람 박봉오(朴鳳五)는 혼조(昏朝) 때 박승종(朴承宗)의 여얼(餘孽)로서, 고(故) 부원군(府院君) 이귀를 무함하고 욕하였는데, 대개 그 곡절이 집터를 서로 소송함에서 말미암았으니, 풍교(風敎)에 관계되므로 엄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경옥(京獄)에 잡아다가 각별히 중하게 다스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고, 말단(末端)의 일만 윤허하였다.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교리(校理) 김유(金楺)가 글의 뜻으로 인하여 극언(極言)하기를,
"시정(市井) 민가에서 모두 비단으로 휘장[帳]을 만들고, 조금 재력이 있는 자는 문득 옥교(屋轎)369) 를 만드니, 청컨대 금일 이후에 묘당(廟堂)에서 등대(登對)할 때 품정(稟定)하여 금조(禁條)에 첨가해 넣어 각별히 금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윤5월 20일 병인
이건명(李健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문흥(李文興)을 보덕(輔德)으로, 홍중휴(洪重休)를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윤5월 21일 정묘
장령(掌令) 정동후(鄭東後)와 지평(持平) 권엽(權熀)이 이환(李煥)과 이혁(李爀) 등의 계사(啓辭)가운데 점하(點下)370) 한 일로 인피(引避)하기를,
"그가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는 줄을 미처 깨달아 살피지 못하고, 몽롱하게 그 관직(官職)을 썼으니, 소루함이 이에서 더욱 드러났습니다."
하였는데, 지평 박성로(朴聖輅)가 처치하지 않고 바로 핵체(劾遞)하는 계사를 올리기를,
"환과 혁 등은 역적 이남(李楠)의 조카[弟姪]로서 속적(屬籍)에서 의절(義絶)되었는데, 이미 삭직(削職)된 관직을 몽롱하게 써서 소루하고 착오됨이 역시 대단한 데 관계되니, 모두 체차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5월 22일 무진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였다. 교리(校理) 김유(金楺)가 이뢰기를,
"지난번【 기사년371) 이다.】 명의(名義)를 범한 권흉(權凶)들은 죽을 때까지 사적(仕籍)에 끼지 못하게 해야 하나, 가끔 죄명이 조금 가벼운 자는 반드시 한결같이 버릴 필요가 없으니, 점차 거두어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김유가 이우겸(李宇謙)이라고 대답하고, 말하기를,
"용산(冗散)한 관직이야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다른 사람을 물으니, 김유가 박정(朴涏)·박만정(朴萬鼎)을 들어 말하기를,
"박만정의 소(疏)는 윤지완(尹趾完)과 같은 뜻이었는데, 윤지완은 대신(族臣)인 까닭에 똑같이 대우하고, 박만정은 처음에 이미 편배(編配)372) 하였고 지금 또 폐고(廢錮)373) 하였으니, 과궐(窠闕)374) 에 따라 외임(外任)에 조용(調用)하면, 사람을 버리지 않는 뜻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교리(校理) 신사철(申思喆)이 잇따라 진달하기를,
"영남 사람으로 적체(積滯)된 자는 마땅히 조용해야 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박만정이 수령(守令)의 직임에는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앞으로 살펴보고 해조(該曹)에 분부하겠다."
하였다.
윤5월 23일 기사
윤덕준(尹德駿)을 형조 판서로, 박권(朴權)을 판윤(判尹)으로, 신임(申銋)을 이조 참판으로, 김만주(金萬胄)를 장령(掌令)으로, 김간(金榦)을 지평으로, 홍정필(洪廷弼)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유(李濡)와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이 청대(請對)하였다. 이이명이 말하기를,
"원접사(遠接使) 박권(朴權)이 사서(私書)로 말하기를, ‘칙사의 행차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병이 나았으므로, 역관을 시켜 들어가 말하게 하기를, 「성상께서 다리에 병환이 나서 오르내리는 것이 민망스럽다.」라고 하였더니, 상칙사(上勅使)는 정지해 면제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으나, 부칙사(副勅使)는 자못 고집을 부렸습니다. 홍이가(洪二哥)가 말하기를, 「만약 빈사(儐使)가 면대하여 청하면 잘될 것이다.」 하므로, 신이 마땅히 금일에 나가서 간청하면, 저들은 대신이 멀리 온 것을 보고는 거의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유가 말하기를,
"전일 유신(儒臣)의 말은 대체로 엄정(嚴正)하나, 저들은 오로지 도리로 대접할 수만은 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우리를 위해 주선했다고 여길 것인데, 우리의 사례(謝禮)가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이미 먼저 스스로 제기(提起)하였으니, 감사한 뜻이 없어서는 안된다, 이 한 조항을 접견하는 말 가운데에 첨가해 넣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유와 이이명이 다시 별유(別諭) 【별유는 위에 보인다.】 를 전할 때 받아들이는 예(禮)를 미리 강정(講定)하기를 청하기를,
"이는 문후(問候)할 때와 같지 않으니, 들을 때는 꿇어앉고, 듣기를 마치면 절하는 한 가지 절목은 마땅히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이이명이 청하기를,
"이번 행차에 강정(講定)해 와야 합니다."
하였다.
윤5월 26일 임신
좌의정 이이명이 일전에 명을 받들고 장단(長湍)에 갔는데 부칙사는 병으로 사양하기 때문에 단지 상칙사만 만나보고 힘써 말하기를,
"성상께서 다리 병환이 나서 자력(自力)으로 오리내리시지 못하니, 대국(大國)의 예(禮)에 의하여 계단 위에다 배위(拜位)를 설치하게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상칙사는 따르려는 뜻이 있었으나 부칙사 및 홍이가(洪二哥)가 저지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이명이 박권과 더불어 정문(呈文)하고 관소(館所)에 가려고 하자 부칙사가 비로소 변통하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계단 위의 배위(拜位)를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단지 전후(前後)의 4배(四拜)를 한꺼번에 다 계단 아래에서 행하고, 인하여 전(殿)에 올라가 칙서(勅書)를 받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지 않는 것만을 허락하므로, 이이명이 돌아와 이런 뜻을 아뢰었다.
윤5월 27일 계유
임금이 비를 무릅쓰고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장차 칙서(勅書)를 맞이하려 하니, 이유·이이명 및 원접사 박권이 입대(入對)하였다. 이유가 말하기를,
"신이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칙서를 받을 때 식례(式禮)를 더는 일로써 거듭 피인(彼人)에게 간청했더니, ‘내일 마땅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칙서를 맞이할 때 성상의 몸가짐을 탐견(探見)하여 허락하고자 한 것이니, 청컨대 행례(行禮)할 때에 내시로 하여금 꼭 붙잡게 하여 그 힘들고 고생스러움을 보여야 합니다."
하였다. 조금 후 칙서가 이르자 임금이 과연 돈의문(敦義門)을 경유해 나가서 먼저 대궐로 돌아오니, 칙사가 비로소 역관으로 하여금 전언하게 하기를,
"지금 국왕께서 교영(郊迎)하는 것을 보니, 과연 질환이 있습니다. 전정(殿庭)에서 칙서를 받을 때의 절목(節目)은 마땅히 빈사가 의논한 바에 의해 행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전정에 들어가 또 칙서를 맞이하면서 서교(西郊)에서 한 의식과 같이 하니, 부칙사가 말하기를,
"백두산의 물줄기와 산맥의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귀국(貴國)의 지도(地圖)를 보고자 하는데, 이는 황제의 명령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여 답하기를,
"황폐하고 외떨어진 곳이어서 일찍이 지도를 둔 적이 없습니다."
하니, 부칙사가 또 반드시 보고 싶다는 뜻으로 다시 품하였다. 다시 답하기를,
"백두산의 산맥과 물줄기는 동쪽으로 흩어져 곧바로 남해에 이르러 끝납니다."
하니, 부칙사가 말하기를,
"관소(館所)에 간 후에 마땅히 알 만한 사람을 불러 묻겠습니다."
하였다. 이날 큰 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범람하여 대궐 밖 큰 길과 교량이 통하지 못하므로, 칙사를 인도하여 정릉동 소로를 거쳐 관소로 돌아왔다. 칙사가 도감(都監)에 말하기를,
"임금께서 환후(患候)가 계신데, 하마연(下馬宴)375) 때 어찌 친히 나오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반드시 친히 나가겠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다시 청하게 하였다.
윤5월 28일 갑술
이관명(李觀命)을 이조 참의로, 서명우(徐命遇)를 장령으로, 박필몽(朴弼夢)을 사서로 삼았다.
칙사의 행차로써 예(例)에 의해 반교(頒敎)·반사(頒赦)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숙종실록54권, 숙종 39년 1713년 7월 (1) | 2025.11.28 |
|---|---|
| 숙종실록54권, 숙종 39년 1713년 6월 (0) | 2025.11.28 |
| 숙종실록53권, 숙종 39년 1713년 5월 (0) | 2025.11.28 |
| 숙종실록53권, 숙종 39년 1713년 4월 (0) | 2025.11.28 |
| 숙종실록53권, 숙종 39년 1713년 3월 (1) | 2025.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