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3권, 현종 6년 1665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4.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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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 형조 판서 김좌명, 대사간 이경억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과(武科)는 언제쯤 끝내야 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마땅히 4, 5일 사이에 시험을 끝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어가가 돌아가는 기일을 알 수 있다면 여기에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11일 사이에 돌아가려고 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홍패(紅牌)와 사화(賜花)를 만들더라도 기일에 미치지 못할 염려는 없을 듯하니, 11일에 합격자를 발표하고, 12일에 돌아가시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어가를 수행하는 무사들이 서울로 돌아간 후에 또 곧바로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 번거로울 듯합니다. 5일에 호군(犒軍)을 하고 나서 그대로 시취(試取)를 하고, 일시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돌아갈 때 또다시 이 도의 군사를 징발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으로는 마병을 전대(前隊)로, 보군을 후대로 삼고, 본도 및 수원의 군사는 징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하니, 태화가 매우 지당하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충청 감사의 장계를 보니, 민간에서 보리가 익기 전 10여 일 동안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본도 감사에게 분부하여 이러한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진휼하여 구제하도록 하고, 떠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자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먹을 것을 지급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행궁 밖에 오래된 우물이 있습니다. 세조조에 거둥했을 때 샘물이 갑자기 솟아 나왔기 때문에 신기한 우물이라고 하여 비를 세워 이 일을 기록하였다고 일찍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으나 자획이 흐려서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삼가 듣건대 액정(掖庭)에 공인이 있다고 하니 그로 하여금 다시 새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억이 아뢰기를,
"어가가 멀리 아랫고을에 임하신 것은 실로 한 세상의 드문 일입니다. 상께서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이 지방의 백성들을 위로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세 감면을 이르는 말인가? 내가 돌아갈 때쯤 의정하려고 미처 분부하지 못하였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비단 이 고을 뿐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군현마다 성상께서 유의해 주신다면 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신역(身役)에 대한 고통이 전역(田役)보다 심한데 그전부터 조정에서 진념해 주었지만 단지 전역만 살펴주고 신역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이 이것 때문에 일어나고 있으니 백성들을 위로하는 방법은 신역을 변통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에 대해 이미 우러러 진달하였으나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인들에게 일찍이 자급을 올려 주도록 하였으니 다시 음식을 제급해 줄 수는 없다. 다만 90세 이상된 자에게는 음식물을 지급해 주게 하라."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감사로 하여금 본도의 사람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아뢰게 하고, 우선 본군부터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경억이 아뢰기를,
"본도의 인재에 대해서도 감사에게 물어 보시고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거두어 쓰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충효와 절의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 문제는 갑자기 시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감사로 하여금 반드시 행실이 뚜렷하여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자를 아뢰도록 하여 시행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또 연로 여러 고을의 노인들을 모두 뽑아 보고하도록 하여, 자급을 올려 주는 일과 음식을 지급하는 일을 일체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예관을 보내어, 유신 증 영의정 김장생, 충신 증 이조 판서 조헌, 증 이조 판서 송상현, 증 우의정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이 와서 알현하니, 상이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편찮으시어 멀리 하읍(下邑)에 왕림하셨는데, 당초에 우려했던 마음을 어찌 다 비유하겠습니까. 근자에 온천에서 목욕을 하신 뒤로 신통한 효험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실로 종사와 신민의 경사입니다. 그런데 신은 몸에 질병이 있어서 이제야 와서 문안드리게 되니 더욱 더 황송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눈병이 지난 초봄부터 더욱 심해졌는데 비로소 습열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고는 혹시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때아닌 거둥을 하였던 것이다. 비록, 폐해를 없애려고 하나 농민을 몰아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몹시 민망하다. 다행스럽게도 경이 살고 있는 곳이 멀지 않아 한번 만나보기를 나는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금 그대를 만났으니 나의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장성한 아들을 잃고 마음에 잊지 못하여 스스로 병을 초래하였으므로 항상 머지않아 죽지나 않을까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상의 얼굴을 다시 뵙게 되니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 신이 비록 시골에 물러나 있으나 밤낮으로 바라고 있는 것은 다만 성상의 옥체가 날로 건강하시고 성상의 학문이 날로 진보하시며, 성상의 곤경이 날로 진전하시고 은택이 날로 펴지는 데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망에 부합되지 못하여 전야에 있는 신민의 근심이 날로 더욱 심하여지고 있었으므로 신은 실로 민망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 온천에서 목욕하시고 효험을 보셨으니, 서울로 돌아가신 후에 모든 일을 지난날보다 더욱 힘쓰신다면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뜻을 견고하게 갖지 못하시어 매양 질병에 걸려 한결같이 무너진 대로 내버려 두시는데, 이는 신이 매우 걱정하는 바입니다. 옛날에 주자도 항상 눈병이 있었으나 뜻을 세우고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눈병으로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좀더 일찍 소경이 되지 않았던 것을 한스러워 하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대개 눈을 감고 하는 공부가 더욱 진전된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공부하시는 것이 과연 이와 같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큰 뜻을 분발하신다면, 비록 눈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일인들 못하시겠습니까.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지는 못하시더라도 때때로 침소로 불러서 다스리는 도리를 의논하시고, 옥당의 유신으로 하여금 글뜻을 강의하게 하시며, 승지로 하여금 공사를 가지고 들어와 읽도록 하되, 누워서 이를 들으신다면 어찌 일을 폐지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아예 경연을 모두 폐지하여 10년 동안 열지 않으셨고, 공사는 묵혀두고 밀려서 열흘이 되어야 재가가 내려오고 있으니, 이는 모두 뜻을 세우지 않은 소치입니다. 만약 행궁에 계시는 중에라도 때때로 유신들을 접하시어 경전의 뜻을 강론하신다면 병을 조섭하는 데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
이번 거둥은 부득이해서 하신 것이지만, 무릇 여러 가지 조처들 중에는 백성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한 일이 많아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감격하여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옥체에 효험을 보셨으니 진실로 더할 수 없는 경사이지만, 백성들이 기뻐하며 심복하는 것은 이에 못지 않은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전환할 수 있는 커다란 기회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준길에게 시골에서 새로 올 때 백성들의 실정이 어떠한가에 대해 물으니, 준길이 아뢰기를,
"금년의 기근으로 허덕이고 있는 참상은 신축년이나 임인년보다도 심합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아직 구휼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감사와 수령들이 성상의 뜻을 우러러 받들지 못하여 이처럼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를 불러서 이르기를,
"지금 대사헌의 말을 들으니 본도의 흉년이 특별히 심하다. 전일 들은 바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논하려는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 역시 농사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사헌의 말을 듣건대, 기근의 참상이 신축년보다 심하다고 하니, 이는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감사가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백성들의 고통을 막연히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본도 감사를 추고하고 곡식을 나누어주어 급히 구제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준길이 아뢰기를,
"현재 수령 중에 그래도 조금 나은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신이 듣기에는 무주 현감 남득붕이 조정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성심으로 백성을 진구하여 구제하였으니 포상의 은전을 내릴 만합니다. 그리고 도내의 사정으로 말하면 서천(舒川)에서 승려들이 일으킨 변고는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대개 천방사(千方寺)의 중들이 바로 난을 일으킨 적도입니다. 이익한(李翊漢)이 양일한(楊逸漢)으로 하여금 가서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일한이 일을 잘못 처리하였으니 이는 익한의 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대질시켰을 때에 사실대로 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게 그의 죄입니다만, 만약 기만하였다는 죄로 논한다면 본래의 실정이 아닙니다. 도내의 여론들은 모두 익한이 끝까지 다 체포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데, 익한이 도리어 이 때문에 죄를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울분을 품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한은 이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죄를 준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김시진(金始振)이 보고한 것도 타당하지 않은데, 이경억(李慶億)의 계사(啓辭)중에 무고한 승려라는 말까지 하였기 때문에 도내의 인심이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정에서 익한이 아뢴 것은 믿지 않고 시진이 아뢴 것을 믿어 익한은 서울의 감옥에 갇혀 있고 승려의 무리들은 이곳에 갇혀 있습니다. 형벌이 이 정도로 일정하지 않는데 인심이 어떻게 승복하겠습니까. 삼가 듣자니 앞장서서 선동한 승려가 아직도 옥중에 있다고 하니, 만약 그를 본군에서 효시한 다음 그 절은 헐어서 다시 중건하지 못하게 하고 익한을 석방시킨다면 조정의 처치가 거의 타당성을 얻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모두 따르고, 익한의 죄를 감등하라고 명하였다.
준길이, 유시를 별도로 내려 이유태(李惟泰)와 윤선거(尹宣擧)를 부를 것을 청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유시를 전하도록 하였다. 준길이 또 자신의 늙고 병든 상황에 대해 아뢰고 본직을 체차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기 감사에게 하교하여 어가가 지나가는 각 고을의 노인들 중에 80세 이상된 자를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5월 2일 정해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대사헌 송준길에게 식량과 찬거리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경억이 인피하기를,
"지난번 본원에서 신숭구(申嵩耉)를 논하여 파직시킨 계사 중에 ‘영장(營將)이 무고한 승려를 때려 죽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닙니다. 본도에서 조사하여 올린 장계를 보면 영장 양일한이 승려 세 사람을 곤장을 쳐 죽였는데, 애초에 자복을 받지 않고 수행한 서리로 하여금 공초의 말을 꾸며내어 후일 해명할 근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의 승려 중에 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자이고, 한 사람은 부속된 절에 거처하는 자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천방사의 중이 아닌데 지레 먼저 때려 죽였으므로 마구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더라도 역시 불가할 것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을 하였던 것이지, 천방사의 중이 모두 무고하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헌부 장관이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헌부에서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우찬성 송시열이 공산(公山)001)  에 이르러 질병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도신(道臣)이 상소에 대한 비답을 전하고, 사관이 또 가서 임금의 뜻을 유시하자, 시열이 사관을 통하여 나오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강릉에 우박이 내리고, 또 서리가 왔다.

 

5월 3일 무자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어가를 수행하는 무사들에게 내일 연이어 시취를 하게 하고, 호궤하는 일은 시험이 끝난 뒤에 거행하라."

 

5월 4일 기축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돌아갈 때 천안의 도로로 가면 상당히 우회해야 하므로, 행궁에서 곧바로 직산(稷山)으로 향할 것을 의논하여 정리사 김좌명, 충청 감사 김시진으로 하여금 가서 도로의 사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런데 봇도랑과 밭두둑이 교차하여 길을 닦으려면 폐단이 있다는 이유로 그대로 천안으로 길을 정하였다.

 

5월 5일 경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무과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최응일(崔應逸) 등 1백 79인을 뽑아 모두 금군에 속하도록 하였다.

 

온양 생원 이문영(李文榮) 등이 상소하여 여덟 조목을 아뢰었다. 첫째, 교생을 3년에 한 번 태거(汰去)하는 법을 정할 것, 둘째, 학전(學田)을 지급할 것, 셋째, 온천의 수군(守軍)을 증원하여 정할 것, 넷째, 본군의 군액을 감원할 것, 다섯째, 본군의 노비를 더 지급할 것, 여섯째, 본군의 재상(災傷)을 잘못 상정하여 유배 중인 자를 석방할 것, 일곱째, 본군의 고 학생 맹희(孟喜)의 처 조씨의 효행과, 고 참봉 조상우(趙相禹)의 충효와, 고 처사 윤현(尹俔)의 학행과 충의, 이지헌(李之瓛)의 처 및 그의 동생 이황(李璜)의 처인 정씨(丁氏)의 절행을 예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할 것, 여덟째, 임유가 호적을 위조하여 시험에 응시한 죄를 말하였다. 상이 비변사에 내렸는데, 충효와 절의가 있는 사람은 본도에서 보고한 뒤에 품처하겠다고 회계하였고, 임유가 호적을 위조했는지 여부는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의 일은 시행하지 말게 하였다.

 

예산의 기보(騎保) 박효일(朴孝一)의 신역을 면제하였다. 효일은 효자 박충(朴忠)의 손자이다. 충은 아우인 박양(朴良)과 함께 효성과 우애로 고을에 알려져 선조조에 정려문을 내려 주었으며 그의 자손에 대해서는 군역에 충당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 효일이 군부에 편입되자, 감사 김시진이 그 실상을 아뢰고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그의 신역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니, 따른 것이다.

 

5월 6일 신묘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신계영(辛啓榮)을 지중추로 삼고, 온양 노인 박춘화(朴春華)등 15인의 자급을 올려 주었다.

 

어가를 호위하는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게 하였다.

 

온천 근처에 살고 있는 백성들과, 장막의 안팎으로 피해를 입은 토지나 가옥이 파손된 자 및 탕직(湯直) 등에게 모두 쌀과 콩을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사람과 말에 의하여 논과 밭이 짓밟힌 자에 대해서도 쌀과 콩을 계산하여 지급해 주도록 명하였다.

 

전라도  진산(珍山)·장성(長成)·창평(昌平)·흥양(興陽)·광주(光州)·고산(高山)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5월 7일 임진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김좌명(金佐明)을 약방 제조로 삼았다. 이때 도제조 허적이 발찌[腦後腫]가 나서 어가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정원에서 임시로 제조 한 사람을 차정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이 살아 있을 때 인조 대왕께서 융숭하게 대우하셨는데, 지금 여러 곳에 제사를 올리면서 유독 거기에만 지내지 않고 있다. 예관에게 말하여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우찬성 송시열이 와서 뵈니, 상이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초봄부터 눈병이 심하여 이 부득이한 행차를 하였으니 일로의 민폐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며 내 마음에 불안함은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목욕한 후로 현저한 효험이 있으니 이것이 다행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효험을 빠르게 보면 잃는 것도 빠른 법이니 천천히 효험을 보았으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몸에 고질병이 있어서 일과 마음이 어긋나고 구구하게 충성을 바치려는 뜻도 이미 서로 틀어지고 있으므로 매번 소장을 올려 감히 면직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신의 분의로 헤아려보면 외람된 일인 줄을 알지만 다만 신이 아직도 이공(貳公)의 임무를 맡고 있어 비국의 반열에 이름이 있습니다. 심지어 좨주(祭酒)는 전적으로 주손(冑孫)을 교도하는 책임을 관장해야 하는데 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직명만 띠고 있는 지가 이렇게까지 오래되었습니다. 아울러 체직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축년에 서로 이별한 후로 어느덧 4, 5년이 되었다. 매번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릴 때마다 정성스러운 뜻을 대략 진달하였다만 어설픈 문자로 어떻게 나의 생각을 다 피력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여기에 와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경들이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경과 도헌(都憲)이 잇따라 와서 만나보게 되니 내 마음에 이는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내 병이 차도가 보이니 경은 나와 함께 돌아가 경연에 출입하면서 과인을 교도해 달라. 경의 직명은 다 한가로운 직무인데 해직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외람되게 세상에 보기드문 선조의 예우를 받았고 전하의 비상한 보살핌을 받았으니 신이 비록 몸바쳐 뼈가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질병이 심한 데다가 죄까지 산처럼 쌓여 있으니 매일 밤이면 눈물로 베개를 적시웁니다. 다만 성명께서 저의 위급한 마음을 양지하여 주지 않으신 바람에 직명이 그대로 있고 지금까지 부르신 명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진실로 조금이라도 나아갈 형편만 된다면 어찌 한사코 물러나서 성상의 두터운 바람을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에 관한 말은 이 무슨 말인가. 매번 경의 상소를 볼 때마다 항시 죄를 지고 허물을 끌어대는 뜻이 있으니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사람이 서로 안다는 것은 마음을 서로 아는 것이 귀한 것이니 이런 말은 제기할 일이 아니다. 경의 질병에 대해서는 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 비록 경을 머물러 두고자 하지만 어찌 직분 내의 일로 경을 번거롭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오직 바라는 것은 경연에 출입하면서 가르치는 도리를 다해서 과인의 미치지 못한 점을 보조해 주고 위태로운 국가의 형세를 부지해 주는 것이니 어찌 고인의 이른 바 ‘선제(先帝)에게 보답하고 폐하에게 충성한다.’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상께서는 일월과 같은 밝으심과 천지와 같은 어짊으로 매번 신에게만은 관대함을 내리십니다마는, 다만 생각건대, 조정은 임금이 독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만약 공론이 들고 일어나면 성명께서 비록 끝까지 돌보아 주고 싶으셔도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행실도 무상하고 신하가 되어서도 불충하였으니 다소의 죄려가 몸에 잔뜩 쌓였는데 어찌 다시 조정의 반열에 끼어들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예의를 다하여 위유하고 식량과 찬거리를 하사하라고 하였다.

 

5월 8일 계사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대전 별감(大殿別監) 네 사람이 민가에서 횡포를 부렸다. 대사헌 송준길이 이를 듣고 정원에 보고하여 아뢰니, 상이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때리도록 하였다.

 

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와서 알현하였다.

 

전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부름을 받고 올라와 행궁문 밖에서 상소를 올리고, 촌사(村舍)에 물러나와 명을 기다렸다.

 

집의 오두인, 정언 이규령이 무과 방목에다 거주지를 잘못 바꾸어 쓴 것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헌납 성후설(成後卨)이 전에 홍양(洪陽)을 맡고 있을 때에 포흠량을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목장마를 죽게 하였다는 이유로 현재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라 하여 인피하니, 아울러 체직시켰다.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으로 하여금 불랑기(佛狼機) 4, 5호 50위(位)와 정철자포(正鐵子砲) 2백 문, 잠철(箴鐵) 1백 개 및 매 위(位)마다 족철(足鐵) 1개씩을 만들어 강화도로 보내게 하였다.

 

5월 9일 갑오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호군 이유태, 전 집의 윤선거에게 음식물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병조 판서 홍중보, 부호군 이유태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유태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전번 상경했을 때 상의하여 조처한 일이 많았다. 마침 내가 질병을 계속 앓는 바람에 겨우 한번 보았는데 훌쩍 돌아가버리기에 몹시 섭섭했었다. 지금 이렇게 서로 만나니 정말 다행이다. 서울로 돌아갈 때 그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전에 진달했던 일을 서로 의논하여 결정하고자 한다."
하니, 유태가 아뢰기를,
"신의 상소에 진달한 내용은 다 옛사람이 이미 언급한 진부한 말들입니다. 시의(時宜)에 부합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자연히 조정의 공론이 있기 마련인데 신이 있고 없고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의 말을 채용하려 하면서 그 사람과 상의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유태가 모친이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는 사람일지라도 휴가를 얻어 근친(覲親)가는 규정이 있으니, 그대가 모친을 보살피고 싶다면 왕래하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평소에 이르러오게 하기 어려운 여러 신하들이 지금 다 와서 모였으니 역시 얻기 어려운 기회입니다. 만일 서울로 돌아갈 때에 모두 데리고 간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윤선거가 지금 현재 가까운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불러 보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에 만나보기로 하겠다."
하였다.

 

5월 10일 을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낮에 태백이 나타났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어가가 돌아갈 때 물선(物膳)을 숙소에만 진배(進拜)하도록 하고 주정소(晝停所)에서는 진위(振威)에서 말고는 모두 올리지 말도록 하라."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또 식량과 찬거리를 내려준 명을 사양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사직(司直) 조계원(趙啓遠)이 상소하여 자신이 쇠하고 병들어 어가를 따라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아뢰고, 또 본도 백성들의 병폐를 자세히 진술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부호군 이유태가 상소하여 음식물을 내려준 것에 대해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 집의 윤선거가 소를 올리고 물러갔다. 선거가 명을 받들고 행궁에 달려온 것은 다만 한번 사정을 진달하고 돌아가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이 음식물을 내려주도록 명하고 또 불러 만나보려고 하자, 선거가 스스로 불안하게 여겼으며, 또 의리로 보더라도 음식물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겨 상소하고 곧바로 돌아갔다. 충청 감사가 그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로 음식물을 보내니 이미 떠나고 없었다. 감사가 이 소장을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기뻐서 나의 뜻을 면유하려고 했는데, 그대가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하도 섭섭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대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조용히 올라와서 내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정산(定山) 사람 충의위 조기(趙技)가 상소하여, 한전(旱田)에 있어서도 역시 재해로 인한 손실을 인정해 줄 것과, 각종 군인의 역포를 균일하게 분정할 것, 오가(五家)를 한 통(統)으로 만드는 법을 실시하여 도망한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대신 역(役)을 징수하는 폐단을 방지할 것, 그리고 향약(鄕約)을 시행하여 교화를 밝힐 것을 청하였다. 이를 비국에 내렸으나 시행된 것이 없었다.

 

5월 11일 병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행궁에서 문·무과의 합격자를 발표하였다.

 

고 정랑 조이숙(趙爾䎘)에게 좌승지를, 학생 윤현(尹俔)에게 의금부 도사를 증직하였는데, 효행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호서와 경기도의 80세 이상된 노인 3백여 명에게 당상첩(堂上帖)을 내려주었다.

 

오시수(吳始壽)를 집의로, 강호(姜鎬)를 헌납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행궁에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 형조 판서 김좌명을 불러 도내에 유배된 죄인을 심리하게 해서 25인을 방면하고, 한 사람을 감등하였다.

 

명하여 우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부호군 이유태, 충청 감사 김시진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부세를 감면하는 일에 대하여 경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려고 한다. 다른 고을은 추후에 시행하더라도 이 고을은 반드시 지금 서둘러 시행하여 조정의 덕의(德意)를 알게 하고자 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조세를 감해 주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대동 전세미로 헤아려 감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시진에게 물으니, 시진이 대답하기를,
"각읍에 정한 역의 경중을 가지고 말한다면 온양 외에 직산(稷山)·예산(禮山)·신창(新昌)·대흥(大興)·천안(天安) 등의 고을이 1등이며, 아산(牙山)·목천(木川)·전의(全義)·진천(鎭川)·공주(公州) 등의 고을이 2등입니다. 그 외에는 여러 물건을 나누어 분담시킨 데에 불과하고 별로 역을 정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비록 부세를 감면한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 예를 두루 적용시키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온양은 전세를 모두 감면하라. 그리고 1등 고을은 쌀 2두, 2등 고을은 1두를 감면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으면서 들으니, 백성의 신역이 가장 지나치게 무거운데 고통스러움과 원망 근심이 근래에 더욱 심하다 합니다. 지난번에 신역과 받아들이지 못한 관의 곡식을 탕감해 주라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대개 비록 관에 납부할 곡식을 탕감해 주라고 하였으나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으로 수령들이 하였기에 별로 탕감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징수할 곳이 없는 부류 중에 도망갔거나 사망한 자만을 포함시키고, 가난하여 구걸하는 자들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심한 고통거리는 신역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반드시 별도의 조처가 있어야만 백성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두루 시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소서."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널리 시행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마는 일을 담당한 자와 감사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역을 갑작스레 바꾸기 어렵다면 한 도를 통틀어 3등급에 따라 구분해서 감면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첫째 등급은 세 말, 둘째 등급은 두 말, 셋째 등급은 한 말을 감해주도록 하되, 감사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금일의 민심은 실로 가상합니다. 상께서 건강을 회복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기뻐하고 있는데, 곳곳마다 다 그러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구구하게 곡식을 감해주는 것이 조금이나마 백성의 바람을 보답하기에 부족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한 도를 통틀어 봄 가을로 각기 쌀 한 말씩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진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겪는 신역의 고통은 전역(田役)보다 갑절이나 되는데, 한 사람의 집에서 납부하는 것이 혹은 10여 필에 달하며, 혹은 20여 필에 이르기도 합니다. 비록 사대부의 집안이라 하더라도 마련해 내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가난한 백성이겠습니까. 국가에서 비록 어린 아이에게는 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양민이 날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린 아이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시달리는 백성들의 원망이 전적으로 신역에 있는 것이니, 실로 애처롭다고 하겠습니다. 하물며 이 외에 또 이웃이나 친족의 대신으로 징수시키는 피해가 더욱 참혹하고 혹독한 경우이겠습니까."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시진의 말이 옳습니다. 현재 대신과 도신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더불어 상의하되, 도망한 여부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고 가난하여 납부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하게 하여 탕감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분부해서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시열이 본직과 겸임하고 있는 성균 좨주를 사양하고 또 온천에서 목욕하기 위해 뒤에 남겠다고 하고, 준길도 병으로 수행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이유태도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 차도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올라와도 좋다. 내 마땅히 경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연소한 대관들이 간혹 과격하더라도 항상 애써 너그럽게 포용하여 기를 꺽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언로를 여는 것입니다. 근래 이민서(李敏叙)·김만기(金萬基)·민시중(閔蓍重) 같은 사람은 연소자 중에서도 과감히 말하는 자들인데 오래도록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고 있으니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옛날 사람 중에 현위(弦韋)를 차고서 자신의 병통을 다스리는 자가 있었으니, 병을 살펴 약을 쓰는 것은 실로 학문상 공부해야 할 부분입니다. 바라건대 더욱 유의하여 조심하는 생각을 갖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우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호군 이유태에게 모두 말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우의정 허적이 병으로 수행하지 못하자, 뒤에 남게 하고 또 말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5월 12일 정유

상이 온천 행궁에서 출발하였다.

 

대사간 이경억과 정언 이익상이 어가 앞에서 청대하여, 우찬성 송시열이 이곳에서 뒤처지려 한다고 말하고 별도로 유시하여 그로 하여금 어가를 수행하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우부승지 장선징을 보내어 유시하니, 시열이 뒤따라 올라가겠다고 아뢰었다.

 

날씨가 매우 더위 어가를 호위하는 포수가 따르지 못하자, 세 부대로 나누어 교대로 호위하게 하고, 마병과 어영군은 번갈아가며 전·후대로 만들어 따르게 하였다.

 

낮에는 천안에서 머물고 저녁에는 직산 숙소에 머물렀다.

 

호군 이유태가 어가를 따라 천안에 이르러 상소를 올리고 물러갔다.

 

5월 13일 무술

상이 직산을 출발하여 미시(未時)에 수원 숙소에 머물렀다.

 

대사헌 송준길이 성환(成歡)에 이르러 병으로 어가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지금 병으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경의 상소를 보고 내 놀라 탄식하였다. 경은 지난번 탑전에서 서로 마주 대하고 하던 말을 생각하여 조용히 조리한 뒤 올라와 지극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여 어의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5월 14일 기해

상이 수원을 출발하여 과천 주정소에 머물렀다.

 

어영 대장 유혁연에게 명하여 먼저 강변으로 가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정언 이익상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충청도는 전부 부역을 견감시켜 주는 혜택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산군은 수고한 일이 전혀 없는데도 역시 견감받는 대상에 들어 있는데 유독 경기 지역만 휼전이 없습니다. 거쳐가는 경기의 각읍들은 호서의 예에 따라 부역을 일체로 견감시켜 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만일 견감시켜 준 양이 너무 많아 경비가 부족할까 우려된다면 호서 산군에서 견감하여 거둔 쌀 2두 중 1두를 옮겨주고 연로(沿路)에 있는 기읍은 견감시켜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로 돌아간 후에 묘당에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상이 과천을 출발하였다. 백관들이 활집에 화살을 꽂고 따랐다. 어가가 강변에 이르자 유혁연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 군문에서 맞이하였다. 상이 수레를 한참 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방진(方陣)으로 바꾸도록 명하고, 또 병사를 출동시켜 접전하는 형상을 만들도록 하여 기동하는 절차를 관람하였다. 잠시 후에 상이 수레를 선소(船所)에 멈추고, 승지에게 명하여 약방과 시위하는 여러 장수들을 모두 입시하도록 한 다음 선전관에게 명하여 신전(信箭)을 가지고 가 유혁연과 중군 유정을 부르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번 왕래에 수고가 많았을 뿐만이 아니라, 군사를 통솔하는 데 법도가 있어서 군사들이 감히 시골 민가에 드나들지 않았고 오늘 진을 칠 때에도 그 호령에 따라서 감히 어기지 않았으니 내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하고, 혁연에게 의장 말과 갑옷 및 투구를 하사하고, 유정에게는 갑옷과 투구를 하사하였다.

 

강변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인 다음 차례대로 먼저 강을 건너도록 하였다. 유혁연으로 하여금 그의 병사를 거느리고 앞에 먼저 출발하도록 하고, 훈련 대장 이완에게는 표신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길 왼쪽에 진을 치도록 하되, 좌우로 나누어 있으면서 어가를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군대의 위용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수행하는 신하들에게 어찬(御饌)을 내려 주었다.

 

상이 선소에서 출발하여 훈국이 진을 친 곳에 이르렀는데, 훈국의 병사들이 길가에서 머무르지 않고 노량의 백사장에 나가서 진(陣)을 치고 있었다. 어가가 진 앞에 이르니 군문을 지킨 장수가 표신을 청하고 문을 열었다. 대장 이완이 갑주를 갖추고 깃발과 북으로 군문에서 맞이하였다. 상이 홀로 행진을 두루 둘러 본 뒤에 곧바로 수레를 돌리도록 명하고, 명령을 잘못 전하였다고 선전관 이동영(李東榮)을 벌하였다. 유시에 상이 환궁하였다.
상이 눈병이 난 이후로 서책의 글자 획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였는데,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더니 크게 효험을 보아 문서의 작은 글자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으며 습창과 핵환(核患)도 거의 나았다.

 

5월 15일 경자

예조에서 성변도 이미 사라지고 비도 연이어 내렸다 하여 정전(正殿)으로 돌아가 상선(常膳)을 회복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동래 부사 안진(安縝)이, 왜인이 준마를 무역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치계하여 허락하지 말 것을 청하니, 이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말을 무역한 것은 전례가 있으니, 본도로 하여금 무역을 허락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6일 신축

대사간 이경억이, 전에 충청 감사로 있을 때 도내 전송(田訟) 문제를 오랫동안 판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형조가 현재 조사해 내어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이 때문에 대관의 직책에 그대로 몸담고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장계를 올리기를,
"일찍이 김수항의 상소로 인하여 본도의 무사를 시취하여 계문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북병사와 함께 행영에 모여서 시취한 다음 1등한 자 최정원(崔挺元) 등 7인을 아룁니다."
하였는데, 이를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여 1등한 자는 변장에 제수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7일 임인

예관을 보내어 고 명현 김정(金淨)·송인수(宋麟壽)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상이 온천 행궁에 있을 때에 송준길이 아뢰기를,
"두 신하가 소인에게 모함을 받아 기묘·을사의 화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들의 묘가 도내에 있습니다. 송상현 등과 함께 일체로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하자, 상이 돌아갈 기일이 이미 촉박해졌다는 이유로 환도한 이후에 거행하라고 명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동래 부사 안진이 치계하기를,
"그전부터 왜관에는 문을 지키는 군관이 있고, 또 복병이 있어서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근래에 왜관의 왜인들이 생선과 채소를 매매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출입하는가 하면 심지어 10리 밖에 있는 암사(菴寺)에까지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훈도와 역관의 무리들은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으며 문을 지키는 군관배들은 오로지 일을 숨기려 들었고 부산 첨사도 서둘러 보고하지 않았으니, 일이 매우 한심합니다. 문을 지키는 군관배들을 아울러 엄히 가두어 놓고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선과 채소 시장을 왜관 문 밖에 다시 설치하여 왜인들이 멀리 드나드는 폐단을 근절하였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이를 비국이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도신으로 하여금 소통사(小通事), 수문 군관, 복병장(伏兵將) 등을 영문으로 잡아들여 각별히 엄한 형벌을 주도록 하소서. 그리고 첨사 노정(盧錠)과 해당 역관은 잡아다 심문하고, 동래 부사 안진은 추고하고, 생선 채소 시장은 관문 밖에 다시 설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황해 감사 서필원이 장계를 올리기를,
"안악(安岳)·장련(長連)·장연(長淵)의 선박을 정박시킨 곳은 관문에서 거리가 멀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소강(所江)과 백령(白翎)에는 전선 한 척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안악 등 고을의 전선을 1척은 백령에 옮겨 주고, 2척은 소강에 옮겨 준다면 평소의 주밀한 방위가 반드시 세 고을보다 나을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해당 고을의 수령과 상의하여 거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필원이 또 아뢰기를,
"양서 지방의 군정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만, 병선과 군기에 있어서도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병선은 법에 따라 수리하여 고치고, 군기는 훈련 도감의 조총 수천 자루를 옮겨 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기를,
"장계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조총 역시 참작하여 나누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주인을 살해한 얼용(乻龍)·생남(生男)·덕비(德非) 등이 복주되었다. 죄인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회(李檜)와 남양 부사(南陽府使) 이지익(李之翼)을 파직하였으며, 남양은 강등(降等)하여 현(縣)으로 삼고, 광주는 능침이 있는 곳이라 하여 강등하지 않았다.

 

평안도 은산(殷山) 지역 민가의 병아리가 두 다리 뒤에 또 두 다리가 붙어서 모양이 마치 두 마리의 닭과 같았다.

 

5월 18일 계묘

정만화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함경도 영흥(永興)에 우박이 내렸다.

 

선혜청이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 충청도만은 대동수미 10두 내에서 특별히 2두를 감하였습니다. 지금 갑진년의 실결로 계산하면 12만 1천 2백 결이므로 2두를 감하여 거둔 쌀이 1만 6천 1백 60석 남짓하고 8두를 낸 쌀의 숫자가 6만 4천 6백 40석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의 각청과 각사의 자성(粢盛) 어공(御供) 이하 제반 공물가로 응당 내려주어야 할 숫자가 5만 2천 3백 60석 정도이며, 본도의 각영과 각읍에 수용되는 숫자도 2만 1천 9백 70석 정도이며, 본도에 여미로 비축해 두어 불시에 쓰게 되는 것이 해마다 8천 석, 9천 석을 밑돌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응당 받아야 할 것이 6만 4천 6백 40석이고 응당 내려주어야 할 것이 7만 4천 3백 30석이니 부족한 수는 무려 1만 석이 됩니다.
그런데 일찍이 흉년이 들어 견감해 주었던 해에 각사의 미·포·은화를 대출해 주었는데 갚지 못한 것이 쌀은 6천 8백 63석, 은화는 6천 6백 46양, 면포는 1백 80동입니다. 지금 이 수미 2두를 감해 주고 원래의 공물을 감해 주지 않는다면 본청의 형세로 보아 결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미 내리신 명령을 다시 거둘 수는 없으니 본도에 현재 남아 있는 쌀 9천여 석을 옮겨다가 보충한다며 부족한 수에 차지는 않더라도 가까스로 유지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분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9일 갑진

장령 남천택이 본부의 회좌에서 감찰과 함께 서로 인사할 때 예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하여 인피하고, 장령 최일, 지평 민종도는 재우(宰牛)를 단단히 금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구례에 따라 속전을 징수했다가 간원의 신하에게 배척을 받았다 하여 인피하니, 모두 체직하였다.

 

5월 20일 을사

대사헌 송준길이 성문 밖에 이르러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번 노상에서 사직하는 상소를 보고 내 매우 섭섭하였는데, 앓고 있던 병이 이제 나아서 이미 성 밖에 이르렀으니,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오직 경은 기력을 잘 보전하여 나를 보좌하도록 하라. 사직한 본직은 지금 잠시 소원대로 애써 들어주겠으니, 경은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해당 관서로 하여금 전과 같이 곡식과 고기를 대어 주도록 하였다.

 

5월 21일 병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의 회령(會寧) 이북 5진에서는 근래 변경을 넘나드는 오랑캐의 잦은 왕래로 인하여 인심이 크게 술렁이고 있으며 심지어 바깥 촌락에서 사는 자들까지도 성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듣자하니 우지개(于知介)의 종족이 원래 설해도(雪海島) 안에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3백여 호를 후춘(厚春)으로 옮기고 또 재력있는 자를 뽑아서 영고탑(寧固塔)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 오랑캐들이 능멸하여 노략질을 하는 탓으로 이들이 원망을 품고 모두 도주하여 달아나자 여러 오랑캐들이 이들을 잡기 위해 왕래가 잦다고 합니다. 이 말이 비록 반드시 그러한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5진은 오랑캐와 작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종전부터 경각간에 사변이 일어나고 있으니, 민심이 의구하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변경의 고을과 보(堡)에는 하나도 의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혀 보장(堡將)을 간택하여 파견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정을 탐문하여 장계를 꾸미는 일조차도 자세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후로 보장을 선발하여 보낼 때에는 한결같이 조종조의 옛날 법식에 의거하여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서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남방의 조총 수천 자루와 양서 지방의 군포(軍布) 약간 동(同)을 옮겨 주어 사전에 미리 대비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국이 회계하기를,
"북도의 오랑캐들이 무슨 일로 왕래하는 지에 대해서는 비록 알지 못하겠으나, 우환에 대비하는 우리의 도리로서는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군병과 군기의 수를 헤아려 보니, 북도의 포수가 5천 49명이고 조총은 6천 4백 99자루인데 장계에서 말한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소서.
그리고 본도로 하여금 유황을 자취(煮取)하게 하고, 연환(鉛丸)에 대한 가목(價木)은 상으로 줄 군포(軍布)를 보낼 때 같이 보내어 마련하게끔 하고, 변장은 해조로 하여금 가려서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정이 일찍이 무과 감시관으로 방목(榜目)의 오자를 살피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5월 22일 정미

송준길을 좌참찬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성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사간으로, 이유(李秞)·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조성보(趙聖輔)·어진익(魚震翼)을 지평으로, 민주면(閔周冕)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삼고, 강호(姜鎬)를 발탁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

 

우찬성 송시열이 온천에서부터 뒤따라 올라오다가 수원에 도착하여 병을 핑계로 돌아가면서 소를 올려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에게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어서 일찍이 탑전에서 그 한두 가지를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황공하여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병이 났으니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원통함을 품은 지하에서 그 사사로운 한이 끝이 없을 것이기에 지금 대략 그 줄거리를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대체로 군신의 의리는 천지의 당연한 이치이고 백성의 떳떳한 본성으로서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무상하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의 형체를 타고 났는데 어찌 이러한 이치가 전혀 없겠습니까. 다만 이 몸이 하류에 처하여 모든 악이 다 모여들고 있으므로 한 사람이 비방하면 1백 사람이 호응하고 있어서 쇠를 녹이는 비방과 터무니없이 계속되는 무함에서 스스로 헤어나갈 길이 없으니 신의 처지가 애처롭다고 하겠습니다.
대개 지난번 국가에 원자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을 때 온 세상 백성들이 너나없이 기뻐서 날뛰었으며, 초야에 있는 소원한 자들까지도 모두 스스로 송축하는 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때 마침 대죄할 일이 있어서 황공한 마음으로 움츠리고 있느라고 끝내 감히 스스로 여러 신하들처럼 작은 정성이나마 나타내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개 사세상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점차로 비방하는 말이 생겨서 확대되어 오다가 지금에 와서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전일 허목의 상소도 신 때문에 올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 양숙자(羊叔子)가 어찌 남을 독살하는 자였기에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신이 목숨을 끊어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위에 태양처럼 밝은 임금이 계시어 빠짐없이 두루 통촉하고 계시는데 비록 참소하는 자가 1백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며 매번 이것으로 스스로 위로하였습니다. 때로는 또 스스로에게 ‘지금 세상에 남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자가 적지 않은데 이러한 말들이 유독 이 몸에만 모인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자문하며 항상 이것 때문에 스스로 슬퍼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을 때면 멍하니 마치 잊은 것이 있는 듯하고 나가서는 막연하여 갈 곳이 없으며 사람을 대해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니, 매번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의 가까운 친구들이 신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성명의 세상에 참소하는 말이 어찌 행세하겠는가.’라고 매번 너그럽게 비유할 때마다 신은 ‘성상께서 나를 의심하여 죄를 준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다만 신하로서 이러한 나쁜 말을 들은 것이 망극할 따름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이 어찌 마음을 태우고 속을 썩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또 남몰래 소리내어 울기도 했습니다.
아, 신하가 그 임금을 사랑하여 원하는 것이 끝이 없겠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큰 것을 논하자면 어찌 종묘에 배향되고 자손을 보존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우리 성고(聖考)를 우러르고 흠모하는 것이 어찌 70명의 제자들이 공자를 따르는 정도에만 그치겠습니까. 매번 성스러운 덕과 지극한 선은 비록 만세가 되더라도 천묘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어떤 사람이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신이 일찍이 ‘효종 대왕은 종묘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 종묘에 제향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고 지금 또 이런 비방이 있으니 이것은 신이 군부에 대해서 그 자손을 보호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의 죄악이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오늘날 신을 위한 계책은 다만 문을 닫고 허물을 생각하여 혀를 깨물고 말라 죽어서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는 것뿐입니다. 이 외에는 진실로 자처할 도리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가엾게 여기시어 신이 가진 직책을 속히 체차하라고 명하시어 편안한 마음으로 물러나와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그러면 이는 실로 성명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생성시켜 주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마치 두 팔을 잃은 것 같다. 옛날 사람은 비록 험악한 유언비어를 만나도 끝내 벼슬을 그만 두는 일은 없었으니 이는 실로 마음이 서로 부합되어서 그러했던 것이다. 나는 경이 나의 뜻을 알고 있는 줄로 여긴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왜 한낱 근거없는 말로 인하여 이와 같이 나를 저버린다는 말인가. 온천에서 출발할 때에 승지가 돌아와 하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 섭섭한 생각이 어떠하겠는가. 맹자가 논한 ‘도리에 어긋나거든 스스로 돌이켜본다.’는 뜻이 지극하니, 경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멀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속히 바꾸어 나의 간절한 소망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도록 하였다.

 

처음에 원자가 신축년 8월에 탄생하자, 조정에서 경과(慶科)를 베풀어 선비를 뽑았다. 송시열의 문도인 신만(申曼)이란 자가 목청을 돋우어 ‘선비는 이번 과거에 응시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그 말이 패역스러웠으므로 【대개 그 뜻은 원자의 탄생이 국상을 겨우 지난 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못들은 척하였다. 시열을 미워하던 자들이 드디어 ‘신만의 말은 곧 시열이 지시한 것이며 상소하여 하례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여 그 말이 기해년 최문(衰免)에 관한 비방과 부합되는 내용이었다.
당시에 인평(麟坪)의 여러 아들이 실로 한쪽 사람들의 종주(宗主)가 되어 오랫동안 상의 곁에 있었고, 시열이 또 민유중이 제기한 수도(隧道) 논의 때문에 거듭 인척의 거스름을 사고 있었으며 혹자는 참소하는 말이 이미 좌복(左腹)에 들어갔다고 하니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모두 그것이 다른 날 화근이 될 것으로 알았으며, 말하기 꺼려하는 내용이었으므로 결국 분명하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시열이 기절을 숭상하고 청론을 장려하니 선비 중에 격렬한 논변을 좋아하는 자들이 대부분 추종하여 이따금 시정(時政)을 참견하여 거리낌없는 말을 해대고, 논의를 통색시키는 지위에 있는 자도 그의 논의에 힘입어 중요하게 여김으로 해서 드디어 당인(黨人)들로 하여금 그 근사한 것을 인하여 비방을 조작하게 하였다. 멀리에서 조정의 권세를 잡고 있으므로 위복(威福)이 상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 허적의 상소에서 재차 발설되자, 임금과 신하 관계가 이 때문에 끝판이 좋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시열같은 훌륭함으로 두 조정에서 인정을 받은 자에게 어찌 예에 대한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이간할 수 있었겠는가.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이뢰기를,
"환궁하신 이후로 옥체가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다른 걱정이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제 조금 회복된 시기를 당하여 번거롭게 대응하신다면 반드시 악화되는 근심이 있을 것인데, 문서까지 친히 열람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관이나 혹은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여 결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번에 온천에 다녀오신 일에 대하여 신은 삼가 지나친 염려를 했었습니다마는 천지신명의 도움에 힘입어 안질과 부스럼이 모두 나으셨으니 종사 신민의 경사를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모든 일을 시행할 때마다 인심에 부합되기 때문에 원근의 백성들이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다 하니, 이는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유하였던 경기 고을의 역을 감해 주는 일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태화가 이르기를,
"크고 작은 고을에 따라 역을 부과한 정도의 차이가 심하지만, 부역을 감해 주는 데에 있어서는 구별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천·광주·수원·진위·양성 등 다섯 고을은 직산과 천안의 예에 의거하여 쌀과 콩 각 1두씩을 감하라."
하였다. 태화가 동래 왜관의 왜인들이 산사에 드나든 일을 말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저번에 왜인이 매를 가지고 사냥을 나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변신(邊臣)이 이를 금하지 않았다고 하여 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왜관에 있는 왜인들은 무려 수백 명에 이르고 있는데, 단지 몇 사람으로 하여금 관문을 지키게 하고 있어서 형편상 그들의 출입을 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인들이 시골집을 왕래하며 우리 나라 말을 알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사정을 죄다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귤성반(橘成般)이 일의 결말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우리가 이미, 1, 2년을 지내며 형편을 보아서 이 일을 허락하겠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오래 머물러 봐야 도움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이 아뢰기를,
"온양의 문·무과는 이미 적(籍)을 고열한 일이 있었으니 이후의 과거에도 다르게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후로는 장적(帳籍)을 고열하되, 만약 장적에 들어있지 않으면 비록 합격을 하였더라도 탈락시키고 미처 적에 들지 못한 자는 과거를 시행하기 전에 추가로 기록하라. 그리고 비록 전에 과거에 응시한 자라고 하더라도 장적에 들어 있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되, 엄히 밝혀 신칙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정원에 반드시 두 사람이 입직하게 하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삼성 추국할 때에 해당 부서의 승지가 국청(鞫廳)으로 갔는데, 다른 승지가 대신 입직하지 않고 장선징 혼자 입직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이뢰기를,
"도성에 굶주리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상평청(常平廳)에 있는 곡식을 오부(五部)에 분부하여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오시수가 아뢰기를,
"입직하지 않은 승지를 추고만 하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함사(緘辭)를 보고 나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릇 친히 임하여 군사를 위로할 때에 반드시 표신을 보고 문을 여는 것은 그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진으로 들어간 후에 시종과 시위하는 여러 신하들을 모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한 사람도 어가를 따르는 자가 없었으니 비록 일 없는 평상시라 하더하도 사체로 따져 볼 때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근시의 신하들도 어찌 감히 진문(陣門)이 막혔다는 핑계로 성상으로 하여금 홀로 군중에 들어가게 한단 말입니까.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훈련 대장 이완(李浣)과 어가를 수행한 승지를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시수가 또 아뢰기를,
"전 판서 조경(趙絅)은 세 조정을 섬긴 옛 신하로서, 선왕조에서 월봉을 지급하기까지 하였는데 지난번 윤선도의 일을 말한 것으로 인해 월봉의 지급을 중지하였기 때문에 굶주리는 지경에 놓였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상께서 바야흐로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를 베풀어 서울과 지방의 사서인으로 나이 80이 된 자는 모두 은전을 입었는데도, 조경의 나이 이미 팔십이 넘었으나 홀로 은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급을 올려 주라. 선조에서도 월봉을 지급한 적이 있었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것은 월봉이 아니었습니다. 조경과 이경석이 모두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된 것이 그들의 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조에서 명하여 본관(本官) 원회곡(元會穀)으로 월료(月料)를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경이 죄를 얻은 뒤부터 폐지하고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굶주려도 구휼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벼슬이 높은 신하의 경우이겠는가. 그대로 월료를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월과에서 연이어 세 차례 수석한 자에게는 당상에 오르게 한 예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 주서(注書) 홍주국(洪柱國) 역시 연이어 세 차례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이미 참하관(參下官)으로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6품으로 올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찬성이 올린 상소 중에 ‘오늘날 신을 비방하는 말로 신하로써 차마 듣지 못할 것이 있고 심지어 신만이 유독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신이 효종에 대하여 종묘에 제향되고 자손이 보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이러한 말들은 어찌 시열이 모두 직접 들은 말이겠습니까. 근거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온양에 있을 때 시열이 이 일에 대하여 신과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만약 한(漢)나라의 법으로 논한다면 죄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다시 맑은 조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실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원자의 나이가 이미 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신들이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 점차로 장성하고 있는 때에 항상 궁인들과 더불어 안에서 거처하게만 해서는 안 되니 때때로 밖에 나와서 바깥 사람들을 접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염 사대부 집안의 아이는 다섯 살이 되면 제법 장성한 편이지만, 이 아이는 충실하지 못하므로 밖에 출입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5월 25일 경술

정언 권두추(權斗樞)가 상소하기를,
"백성은 진실로 국가의 근본이며, 왕기(王畿)는 진실로 사방의 근본입니다. 불행하게도 팔도가 모두 연이어 흉년을 당한 데다가 경기 지역이 더욱 심하니 이는 진실로 국가에서 마땅히 먼저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번 토지를 측량한 이후로 전결이 배로 늘어나고 부세도 이에 따라 증가하였습니다만 근본이 되는 지역이 호서에 비하여 유독 2두가 증가되었으니, 우둔한 저 백성들이 공가의 경비는 각기 다르고 책응(策應)에 특별한 사정이 있는 줄을 어찌 알아서, 유독 고통을 받고 있다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자니 어가가 온천에 머물러 있던 날에 특별히 호서 지방의 백성들을 근심하시어 노인들을 우대하고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게 하는 등 여러 조처를 모두 시행하시니, 덕음이 한번 퍼지자 모두들 일시에 환호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정이 쉽게 동화되고 왕정이 쉽게 나타나는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러한 마음을 미루어 경기 지역의 허덕이는 백성들에게까지 두루 혜택을 입히지 않으십니까.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급히 창고의 곡식을 내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다시 수미(收米)의 법을 상의하시어 충청도 지방의 경우와 같이 영원히 2두를 감해 주어 골고루 혜택이 미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충성스럽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상소를 비국에 내렸으나 시행된 것이 없었다.

 

5월 26일 신해

정원에 하교하였다.
"좌참찬이 서울에 올라왔는데, 필시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다. 해당 관서로 하여금 성 안의 조용한 관사를 택하여 제공하도록 하라."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장계를 올려 장연(長淵) 등 열두 고을의 받아들이지 못한 군포를 해주의 예에 따라 모두 탕척해 주기를 청하니, 따랐다.

 

5월 27일 임자

정언 이익상·권두추가 아뢰기를,
"예전부터 늙고 병들어 시골로 물러나 살고 있는 재신(宰臣)이 어찌 한이 있겠으며, 조정에서 예로 우대했던 자 역시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관에서 그 집에 월봉을 지급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대개 음식물을 내려주는 것과 월봉을 지급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삼가 들으니, 지난번 경연에서 대신들의 진달로 인해 행 호군(行護軍) 조경(趙絅)에게 월봉을 지급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들은 지나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조경에게 월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던 것은 다만 조경이 나라의 일로 먼 지역에 유배되었던 일과 그가 벼슬을 버리고 한가하게 물러나 있는 것을 생각해 특별히 존휼의 뜻을 보여준 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후 죄를 지어 월봉의 지급을 중지하였으니 이제는 그만두어도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서용하여 이미 군직에 붙인 뒤에 마치 일정한 규식이 있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관례로 미루어 볼 때 실로 명분이 없습니다. 더구나 조경은 여러 해 동안 죄를 지고 버려져 있었으니 갑자기 우대하는 은전을 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관에서 조경에게 월봉을 지급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선조때부터 우대하였으니 지금 서용한 뒤에 다시 선조의 아름다운 일을 행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5월 28일 계축

집의 오시수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탑전에서 가까이 모셨을 때 조경의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그에게만 품계를 올려주지 않았다고 망령되이 아뢰고, 이어서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우대하여 월봉을 지급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성상께서 곧바로 품계를 올려주고 아울러 월봉을 지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선조에서 조경을 대우하던 뜻을 전하께서 본받으신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에서 아뢴 것을 보니 매우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조경은 세 왕조에서 예로써 대우하던 신하로서, 시골에 물러나 있으면서 일정한 녹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지금부터 녹봉을 지급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하물며 선조에서 이미 시행하셨던 은전이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군직(軍職)에 관한 조목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더욱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조경이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가던 초기에 이미 예에 따라 군직을 붙여 주었는데,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녹을 받는 것을 미안하다고 하여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으므로 선왕께서 특별히 월봉을 지급하여 녹을 대신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게 어찌 군직의 유무와 관계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조경이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니, 만약 조경이 전에는 사양하였지만 지금은 사양하지 않고 군직의 녹을 예에 따라 받고 있는데 조정에서 또 녹봉을 주려고 한다면 간관들이 말한 ‘명분이 없다.’는 것 역시 그렇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군직을 지니고 있었어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녹을 받지 않았고 보면, 이번에 지급하도록 한 일에 대해 보고 듣는 자들이 놀랄 줄은 실로 생각지도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죄를 용서받고 서용된 것은 이것과는 별개의 일인데도 이러한 연고로 저것까지 아울러 폐지하려고 하니, 이 점을 신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의 전말과 말의 시비는 논하지도 않고, 녹봉에 대한 명을 도로 중지하자는 청이 이미 간원에서 제기되었으니, 신은 감히 대간의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며,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이유가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승지로 하여금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게 하였다. 처리를 마치고 옥당의 관원에게 명하여 《통감》을 강하게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도 입시하였다. 부교리 오두인(吳斗寅), 부수찬 윤심(尹深)이 《통감》의 당태종기(唐太宗紀)를 강하고, 송준길이 글뜻을 강론하면서 옛것을 인용하여 현재를 증거대니, 상이 매우 경청하였다. 강이 끝나자 준길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이 바로 좋은 기회입니다. 전에는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상의 옥체가 편안하지 못하여 다른 일을 할 여가가 없었는데, 이제는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목을 늘이고 눈을 비비면서 무언가 하실 것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전철을 밟게 된다면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여 다시 무슨 일을 해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번 거둥을 하셨을 때에 무릇 여러 가지 일을 조처하실 적마다 인심에 부합되었으니 이러한 마음을 항상 지니셔서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오늘 강을 하신 것을 신이 처음으로 보았기에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는데, 이는 대개 어가가 돌아온 이후로 이러한 거조가 있었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이 일만을 행하고 법연(法筵)을 열지 않는다면 도리어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아 먼저 이 일을 하였으니 서서히 법연을 열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날씨가 매우 더우니, 아침 저녁의 선선한 틈을 타 자주 법연을 연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상께서는 어떤 책을 강하고자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용》을 강하고자 한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만약 먼저 이러한 책을 강하여 그 의미를 알게 되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선대왕께서는 《심경(心經)》을 가장 좋아하셔서 항상 강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이 책도 아울러 강하신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옥당에 명하여 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상이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경이 올라온 후로 여관이 거처하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관사를 가려 주라고 명했는데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기를 어찌 그렇게 하는가."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비록 이렇게까지 염려해 주십니다마는 신이 어찌 감히 공해(公廨)에 들어가서 죄를 더 짓겠습니까."
하자, 상이 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전일에 좌참찬에게 관사를 가려 주라고 한 것은 공해를 말한 것이 아니고 해조에 소속되어 있는 공가(公家)였다. 이러한 뜻으로 다시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5월 29일 갑인

양주(楊州)에 주인을 살해한 죄인 생이(生伊)가 승복하고 정형을 받았다 하여 목사 민진량(閔晋亮)를 법전에 따라 파직하고, 능침 소재지라 하여 읍호는 강등시키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형조 당상과 삼사를 불러 죄인을 심리한 다음 22명을 석방하고 9명을 감등하였다. 영부사 이경석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건강이 이미 회복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사업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원컨대 상께서는 이 기회를 타서 무엇인가 큰일을 할 수 있도록 분발하시고, 조용히 조섭하는 여가에 자주 경연을 열어 유신을 접견하소서. 주자가 이르기를 ‘경서(經書)는 냉담하여 음미하는 자가 적고 사서(史書)는 떠들썩하여 사람들이 즐겨 본다.’ 하였습니다. 어제 들으니 옥당의 관원이 《통감》을 강하였다고 합니다. 고금의 치란과 득실이 그 안에 실려있기 때문에 이것도 빼놓아서는 안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임금으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근원과 근본에 힘쓰는 도리를 알기 위해서는 《심경》과 《근사록》보다 더 좋은 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먼저 이러한 책들을 강독한 뒤에 다른 책을 강해야 합니다."
하였다.

 

충좌위 부사과 조진(趙搢)이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써서 올리니, 상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호피를 주라고 명하였다.

 

행 부호군 조경이 상소하기를,
"삼가 들으니, 지난달 온천에 거둥하여 목욕을 하시고 크게 효험을 보시어 옥체의 여러 병이 하나도 남김없이 쾌히 회복되시자, 거리의 어린 아이나 아녀자들이 서로 전하며 축하하였다 합니다. 신이 비록 거의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 왕조의 은택을 입었으니 이러한 훌륭한 일을 듣고서 그 기쁜 마음이 어찌 다른 신하들보다 못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경계를 보여 막히고 가린 것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노래를 지어 칭송할 시기는 아니라고 여겨져 감히 소인들의 경계하는 바를 본받아서 성상을 번거롭힙니다. 잠(箴)의 주된 뜻은 대개 한나라의 신하인 유향(劉向)이 말한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도진다.’는 교훈002)  을 취하였습니다. 병이 조금 나았을 때도 마땅히 경계해야 하는데 병이 크게 나았으니 경계할 것이 없겠습니까. 늙은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이는 바로 성명께서 특별히 경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때라고 여깁니다. 옛날 사람의 말에 ‘평탄할 때는 험난해질 것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는 위험해질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바로 성명께서 오늘날 처신하실 도리와 합치된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잠을 올립니다."
하였다. 그 잠에 이르기를,
타고난 기질의 청탁이야
성인과 범인이 다르지만
음과 양이 침해하면
우탕도 어찌할 수가 없다오
수고로움에 시달리면 정신이 흩어지고
이치에 어두우면 편협을 부른다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는
부지런함과 다스림이 병이 되어
하상과 똑같이 치화를 이뤘는데
혼자만 유난히 눈병을 앓으셨네
농사를 돌보는 봄철을 당해
온천에서 신통한 효험을 보니
그 향기는 난초와 같았네
한 차례 목욕하니
환후가 말끔한데
면류관과 곤복을
다 털 것이 뭐가 있나
눈동자엔 광채 나고
입술에는 황색 넘실
의기 양양 수행 신하
기뻐하면 웃음짓네
몽매하고 천한 신이
칭송 대신 잠을 올리오
앓던 병이 나았어도
뒷처리가 어려우니
나라에 비유하면
안일 속에 위험이라
요임금 때 화락하나
홍수가 크게 났고
순임금 덕 위대하나
묘민이 날뛰었네003) 그러므로 요순도 삼가고 조심했네 심하게 아플 때는 작은 일도 삼가다가 병이 이미 나은 후엔 아플 때를 싹 잊지요 마음대로 마셔대며 오색에 빠진다면  진무가 오를 평정하자004) 어지러워진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몸 보존과 나라 안정 그 귀감이 똑같다오 늙은 신하 말이지만 실천에 좋은거지 비방이 아니오니 아, 임금이시여 사람 때문에 말까지 소홀히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와 잠을 살펴보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충성과, 경계하는 성심에 깊이 감탄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5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註 002] 유향(劉向)이 말한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도진다.’는 교훈 : 《설원(說苑)》 권10에 있는 말로 ‘관리는 벼슬이 잘 다스려지면 게을러지고,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도지며, 나태한 데서 화근이 생기고, 처자로 인해 효(孝)가 쇠한다.’고 하였음.[註 003] 묘민이 날뛰었네 : 묘는 요순 시대 남방에 있던 세 부족[三苗]으로 사흉의 하나였음.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註 004] 진무가 오를 평정하자 : 진무(晋武)는 서진(西晋) 무제(武帝)인 사마염(司馬炎)을 말함. 오나라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만년에 정치를 게을리하여 왕족의 실권 다툼인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계기로 북방의 흉노족을 불러들여 진이 멸망하게 됨을 말함. 《진서(晋書)》.
그러므로 요순도
삼가고 조심했네
심하게 아플 때는
작은 일도 삼가다가
병이 이미 나은 후엔
아플 때를 싹 잊지요
마음대로 마셔대며
오색에 빠진다면
진무가 오를 평정하자004) 어지러워진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몸 보존과 나라 안정 그 귀감이 똑같다오 늙은 신하 말이지만 실천에 좋은거지 비방이 아니오니 아, 임금이시여 사람 때문에 말까지 소홀히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와 잠을 살펴보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충성과, 경계하는 성심에 깊이 감탄한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5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註 002] 유향(劉向)이 말한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도진다.’는 교훈 : 《설원(說苑)》 권10에 있는 말로 ‘관리는 벼슬이 잘 다스려지면 게을러지고,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도지며, 나태한 데서 화근이 생기고, 처자로 인해 효(孝)가 쇠한다.’고 하였음.[註 003] 묘민이 날뛰었네 : 묘는 요순 시대 남방에 있던 세 부족[三苗]으로 사흉의 하나였음.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註 004] 진무가 오를 평정하자 : 진무(晋武)는 서진(西晋) 무제(武帝)인 사마염(司馬炎)을 말함. 오나라를 항복시켜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만년에 정치를 게을리하여 왕족의 실권 다툼인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계기로 북방의 흉노족을 불러들여 진이 멸망하게 됨을 말함. 《진서(晋書)》.
어지러워진 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몸 보존과 나라 안정
그 귀감이 똑같다오
늙은 신하 말이지만
실천에 좋은거지 비방이 아니오니
아, 임금이시여
사람 때문에 말까지 소홀히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와 잠을 살펴보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충성과, 경계하는 성심에 깊이 감탄한다."
하였다.

 

5월 30일 을묘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이연년(李延年)을 대사간으로, 이정(李程)을 집의로, 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삼고, 이지온(李之馧)을 발탁하여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삼았다. 그리고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에게는 가선을, 온양 군수 조지맹(趙志孟)에게는 통정을 가자하였는데, 온천에서의 수고를 상준 것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죄인을 심리한 다음 40인을 방면하고 3인을 감등하였다.
정언 이익상이 아뢰기를,
"상께서 온천에 머무르실 때 모든 일을 검소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은 감히 법과 의례를 어기고 멀리서 바다의 진미를 올렸으니,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이보다 심한 게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체직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간원이 얼마 후에 또 강원 감사 이만영, 수원 부사 박경지도 모두 멋대로 봉진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아울러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만영은 체직 추고하고, 경지는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임의백과 이만영이 바다에서 나는 특산물을 약방(藥房)으로 특별히 보내왔고 어가가 수원을 지나갈 때 경지가 별도로 약과를 만들어 도제조 허적에게 전달하니, 허적이 싸가지고 온양에 갔었다. 이때에 만영이 논핵을 당하자, 허적도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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