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정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손 부위에 작은 부스럼이 나서 침을 맞은 후에 뜸을 떴다.
평안 감사 이정영이, 각사 노비의 신공 중 징수할 곳이 없는 것을 조사해 아뢰면서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도록 청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현재 살아있는 거렁뱅이 등에 대해서 모두 뒤섞어 탕척한다면 도망하거나 속임수를 부리는 폐습을 막기가 어려울 것이어서 결단코 가볍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다시 상세히 조사해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일 무자
상이 침을 맞았다.
이산군(理山郡) 산양회진(山羊會鎭)에 크게 우레가 쳤으며 눈보라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진성의 문루(門樓)가 5리 가량 되는 곳에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3월 3일 기축
상이 침을 맞았다.
3월 4일 경인
상이 침을 맞았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 문관으로 변방의 수령이 된 자 중에 임기가 다 차서 체직되는 자는 어쩌다가도 없습니다. 종성 부사 목내선(睦來善)은 부임한지 겨우 반년이 지나 갑자기 병이 중하다는 이유로 파면되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병이 대단하지는 않다고 하니, 공의로 헤아려 볼 때 몹시 놀랍습니다. 감사 역시 경솔하게 계문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목내선은 잉임시키고 감사 민정중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5일 신묘
상이 침을 맞았다.
혜성이 이날 밤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3월 6일 임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조한영(曺漢英)을 호조 참의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래에 천재가 거듭 발생하고 백성들의 원망이 매우 심하니 대대적으로 변통해주는 거조가 없고서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천재를 해소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가지 신역(身役)과 미포(米布) 중에 끝내 받아낼 수 없는 것은 비록 장부에는 있더라도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고 단지 백성들의 원망만 부를 뿐이다. 갑진년 이상 된 제반 신역 및 각가지 환자곡[還上縠]으로 징수할 수 없는 것은 아울러 탕척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예조 판서 정치화에게 이르기를,
"경이 저들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무슨 들은 것이 있는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오랑캐 지역에 혜성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천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한인(漢人)들은 모두들 ‘변괴가 참혹스러움이 한결같이 무오년과 같으니 머지않아 반드시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몽고(蒙古)의 여인이 일찍이 순치 황제(順治皇帝)의 황후가 되었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어서 본국으로 쫓겨났는데, 그 뒤에 낳은 아들이 나이가 지금 14세입니다. 청나라 사람이 몽고에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끝내 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몽고는 평소부터 강함을 믿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데다가 몽고의 여인이 낳은 아들이 인재여서 몽고 사람들이 왕으로 삼고 와서 다툰다면 반드시 큰 걱정거리가 될 것이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몹시 염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임금은 무어라고 하던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나이가 이제 12세인데 무슨 스스로 결단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듣건대, 보정(輔政)이 자못 일을 잘 처리하여 섭정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다만 스스로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번인(蕃人)과 한인(漢人)들로 하여금 칼을 차지 못하게 합니다. 오로지 놀기만을 일삼아 사치스럽기 한량없고 크고 작은 관직의 제수를 모두 뇌물에 따라 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머지않아 패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정치화의 말을 비추어 보건대 저들의 형세를 알 수 있습니다. 상께서는 모름지기 저들을 경계로 삼아서 만약 저들이 사치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저들이 무비(武備)에 관하여 잊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매번 평상시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마음을 가지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분야(分野)가 연(燕)과 같아서 매번 하늘의 변고가 있을 적마다 문득 서로 부합되었습니다. 지금 이 혜성의 변 역시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전 판서 여이재(呂爾載)가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여이재는 본디 명검(名劍)도 없고 재능도 없는 자이다. 눈치를 살피며 아부하여 재상의 반열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35면
【분류】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여이재는 본디 명검(名劍)도 없고 재능도 없는 자이다. 눈치를 살피며 아부하여 재상의 반열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3월 7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대사헌 박장원 등이 상차하기를,
"하늘이 우리 전하를 사랑하시는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난 겨울에 요망한 별이 나타나고 뇌성이 발생하였을 때에 전하께서는 즉시 피전·감선·철악·금주 등의 일을 거행하시고 기타 재변을 해소시키는 대책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마는 본말의 순서를 따져보면 하늘을 대응하는 도리에 가장 말단입니다. 하늘이 이에 경계를 거듭 간절하게 내리시어 2월 초하루에 음사한 무지개가 해를 침범하게 하고 20여 일이 못되어 혜성이 다시 나타나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 전하로 하여금 시련을 겪게 하여 훌륭한 분으로 만드시려는 것이지 패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으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백성들의 언급할 만한 병폐를 낱낱이 거론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우선 긴급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제로에 공천(公賤)을 소집하여 쇄환시키는 것은 진실로 바로잡기 위한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주군(州郡)이 목전의 허물을 구제하고자 하여 장적을 살피고 이름을 세는 것만 힘썼으니 허위로 기록된 것이 과반이나 되고 징수할 곳이 없는 환란은 이미 새로 쇄신하는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인족(隣族)을 각박하게 하는 것이 이미 지금 10년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형세상 당연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도고(逃故)에 한하여 징수하지 못한 포목을 이미 햇수를 한정하여 양감하였다고 하는데 유사가 서두르지 않아 아직도 받들어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이는 마땅히 서둘러야 하고 늦추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기보(畿輔)의 양전(量田)은 본래 경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인데 주현(州縣)들이 조정의 훌륭한 뜻을 본받지 않고 있으니, 균일하지 못하다는 한탄이 곳곳마다 나돌고 중간에 법을 이탈한 현상이 갈수록 급박합니다. 관리들이 너도나도 죄를 얻을까만 염려하고 다시 나가 살피지 아니하여 그 등수만 올리고 있으니 불쌍한 백성들이 어찌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기보는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보살펴주는 것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각읍 중에 강제로 등수를 높인 것을 찾아내어 다시 그전 등수대로 낮추어야 하니 이것은 더욱 마땅히 실행해야 하고 결코 그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라의 백성은 신역(身役)이 전역(田役)보다 무거워 백골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이웃과 종족에게까지 미치는 폐단에 대해서는 임진란 전에도 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마는 지금까지 7, 8년 동안 더욱 심합니다. 더구나 지난해 목화가 흉년이 들어 면포가 매우 귀한데 금년과 지난해 물려 받기로 한 세금을 한꺼번에 징수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것이 결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지난 겨울과 금년 봄에 거의 독촉하여 받아들였으니 그 각박하게 앗아간 참담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받아낸 것은 비록 논의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받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그대로 독촉할 수 없습니다. 만약 기간을 늦추어서 받기로 한다 하더라도 후일의 걱정은 그대로 남습니다. 더욱 양을 줄여서 견감하여 거의 죽어가는 백성들의 목숨을 이어가게 하신다면 이것이 어찌 화기(和氣)를 부르게 하는 일단이 아니겠습니까.
기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각 아문의 둔전(屯田)만한 것이 없으니 이는 간악한 백성들이 도망갈 수 있는 근거지와 별장(別將)과 감관(監官)이 이익을 탐하는 주머니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기보에 양전을 실시한 후에 문서가 명확하지 않은 자는 빼앗고서 돌려주지 않아 결국 아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지휘하시어 처음부터 주인이 없는 곳은 다 유사에게 부치고 주인이 있는 곳은 일일이 환급해 준다며 어찌 근심을 풀어 주고 은혜를 베푸는 데 일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길이 넓고 좁은 데에 따라 치란이 달려 있습니다. 조종조에 먼 지방 고단한 선비로 정승이 된 자가 많습니다. 인조 계해년 이후로 인물의 진퇴에 대하여 신들이 아직도 한두 가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남쪽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서 인재가 부족하지 아니하여 높은 벼슬을 하여 시종하는 반열에 거의 들게 되었고 서북 지역의 훌륭한 사람들도 청현직에 통하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당상 이상 및 삼사의 반열에는 모두 서울 태생의 대대로 이어온 주손(冑孫)들이고 시골 사람들은 전혀 없거나 겨우 있을 뿐이니 이것이 어찌 공적인 것이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한편에 치우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밝게 지휘를 내리셔서 각각 제로마다 우수한 자를 뽑아 재주에 따라서 임무를 맡기되 혹 순서에 따르지 아니하고 탁용하게 되면 거의 먼 지방 선비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너그럽고 인자하며 활달한 것은 가히 옛 선성왕의 덕과 균등하지만 강인한 기상을 발하시는 것은 오히려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학문을 힘쓰고 훌륭한 사람을 친히 하는 것이 옛 선성왕에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간혹 사물에 부합하지 아니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간간이 편협되고 사사로운 데서 나옵니다. 간언에 대하여 상주는 것은 충언을 인도하는 것인데 한번 군상을 거스르기라도 하면 성상이 낙점하는 것을 아끼십니다. 어진 이 좋아하는 것을 마땅히 치의장(緇衣章)처럼 해야 할 터인데 처음 대우하던 정성을 이어가지 못하고 지금은 어디에서 지내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첨하는 말은 날로 다가오고 충간하는 기풍은 날로 쇠퇴하여 결국 국사를 방파제 없는 위험한 지경에다 두게 되었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시니 겹쳐서 발생하는 천재를 해소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상께서 편찮으셔서 오랫동안 완쾌되지 않으시니 비록 어전에 나오셔서 경연을 개최하기를 일상적으로 하실 수 없으나 그러나 한가롭게 지낼 때에 수시로 편복 차림으로 한두 신하를 인접하시어 고금의 치란을 헤아리시고 답답한 마음을 인도하신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국가의 운명을 장구하게 보존하는 데에 도움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차자를 비국에 내렸으나, 끝내 채택하여 시행하지는 않았다.
3월 8일 갑오
상이 침을 맞았다.
호조 판서 정지화가 병 때문에 체직되었다.
정치화를 호조 판서로, 심재를 교리로, 이일상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태묘에 제향을 올릴 때에 바치는 제물은 매우 미미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그 관원들로 하여금 친히 진배하게 하는 것은 대개 경건함을 이루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입니다. 근래에 종묘에 축문쓰는 필묵을 해조에서 단지 필공으로 하여금 3개월 동안 필요한 양을 합계하여 미리 관리자에게 주었습니다. 이달 초하루 축문을 쓸 때에 먹 색깔이 완전히 묽은 것으로 봐서 분명히 송연(松烟)이었습니다. 대감이 즉시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헌부의 성상소가 하리와 필공에게 태형을 가하고 해관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거조는 없었습니다. 공조의 당해 낭청을 파직하고 헌부와 성상소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9일 을미
대사헌 박장원, 집의 오시수, 장령 강호, 지평 이경과 등이 공조 해관의 죄를 청하지 않은 것이 성상소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차되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3월 10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윤변(尹抃)을 장령으로, 어진익(魚震翼)·장건(張鍵)을 지평으로, 김휘(金徽)를 우윤으로, 이두진(李斗鎭)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윤변이 얼마 후에 홍양을 조사한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영천군(永川郡)의 못물이 피처럼 붉었으며, 울산(蔚山)·증성(甑城) 등의 들과 경주성(慶州城) 안팎에 두꺼비와 개구리가 들판을 뒤덮고 오갔는데 그 숫자를 알 수 없었으며, 하양현(河陽縣)의 성문 앞 큰 들판에 지렁이가 땅을 뒤덮어 땅 색깔을 볼 수 없었는데 하루 뒤에 없어졌다.
3월 11일 정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우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장례원은 사송(詞訟)하는 중대한 자리입니다. 판결사 김소(金素)가 정세가 편치 못하여 감히 공무를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홍만용의 일은 비록 근거할 데가 없으나 그가 방색한 것은 등한한 말이 아니니 사대부의 염우로 헤아려 보면 공무를 행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면 체차하라고 하였다.
3월 12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수원(水原)은 서울에 가까운 요충지여서 참으로 다독거려줄 만한 재주를 겸비하고 군민(軍民)들을 흡족하게 해줄 만한 인망을 가진 자가 아니면 진압하여 복종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부사 이두진(李斗鎭)은 역임한 곳이 많지 않은데 갑자기 중한 지역을 맡기므로, 제목(除目)이 내리자 물의가 시끄럽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따랐다.
3월 14일 경자
권격(權格)을 장령으로, 박세성(朴世城)을 판결사로 삼았다.
상이 의관을 시켜 약방에 말을 전하기를,
"요즈음 부스럼이 온 몸에 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데, 온천에 목욕하는 것이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민폐가 염려되어 할 생각을 못하였다. 지금 눈병과 부스럼이 한꺼번에 발하여 약은 오래 복용하였으나 효험이 없고 침은 겨우 당장 위급한 것만 치료할 뿐이다. 일찍이 듣건대, 온천이 습열(濕熱)을 배설시키고 또 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니, 지금 기회에 가서 목욕하였으면 한다. 여러 의원들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는데, 도제조 허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몸을 돌보는 자리에 있으면서 보익한 바는 없이 마음 조이며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고는 즉시 여러 의관들을 불러 물어보니, 여러 의관들이 모두 ‘성상의 눈병과 부스럼은 모두 습열 탓에 생긴 것이다. 이런 때에는 온정(溫井)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유후성만은 ‘온천에 가서 목욕하는 것이 안 될 것은 없지만 성상의 병환은 비위(脾胃)에 습열이 있어서일 뿐만 아니라 심간(心肝)에 화기가 자못 성해서이니 열을 오르게 해 더칠까봐 걱정이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의원들이 말한 주된 뜻은 신들의 의견과 차이가 없습니다. 온정의 효험이 과연 여러 의원들이 말한 바와 같다면 신하가 걱정하는 정성에 있어서 어찌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모름지기 널리 묻고 충분히 강구한 다음에야 미진한 점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여러 의관들의 말이 대략 서로 같고 유후성이 더칠 걱정이 있다고 한 말도 혹시 그럴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의관들의 뜻은 이미 귀일된 것이니 다시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라."
하였다.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장계하기를,
"요즈음 각도의 군역자(軍役者) 중 죄를 지어 충군(充軍)되거나 유도(流徒)된 자는 각 고을에서 임의대로 대신 정하지 못하고 또 먼 곳이어서 번포(番布)를 징수하지 못하다 보니 인족(隣族)을 침해하곤 합니다.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니 앞으로는 신역(身役)으로 정배(定配)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 정배된 고을의 군역으로 옮겨 정하고, 원적(原籍)이 있는 고을에서는 다른 한정(閑丁)으로 대신 정하게 하여, 인족이 피해를 당하는 폐단을 제거하소서. 그리고 똑같이 변방 진보(鎭堡)에 소속된 군병인데 이곳에서 저곳으로 정배되었을 경우에는 다시 돌려보내도록 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니,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장계대로 다른 도에도 똑같이 분부하여 정식으로 삼아 준행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5일 신축
정원에 하교하여 온천에 행행하는 것이 합당한가 부당한가를 대신들에게 물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가 모두 아뢰기를,
"습창에 온천의 목욕이 효험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는 자들이 많고 사대부 간에도 직접 시험한 자들도 있습니다마는 눈병에 효험이 있다는 말은 신들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원기가 허약한 사람은 낭패를 보지 아니한 경우도 드물거니와 상께서는 누차 침을 맞은 나머지 먼 길을 달려가서 경솔하게 온천을 시험하게 되면 병이 더칠 우려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유후성이 이른바 열을 도와 더 더치게 할까 염려된다는 말은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재변이 매우 심하여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는 날을 당하여 거가가 며칠 동안이나 출행한다는 것은 결코 적절한 시기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여러 의원에게 다시 물으라고 명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는데, 도제조 허적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눈병이 더욱 심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때로는 핏줄이 동자까지 번지고 흰 기운이 눈알을 가리니 만약 적절한 시기에 치료하지 아니하면 진실로 뒷날 말할 수 없는 후회를 남기게 될까 염려된다. 그리고 습창이 겸하여 발생하여 온몸이 문드러졌다. 대개 습창과 눈병은 습열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온천 목욕은 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경들과 상의하고 또 여러 대신과 논의하였다마는 여러 대신들은 나의 질병이 여기에 이른 줄도 모르고 모두 어렵게만 여긴다. 천재와 백성들의 폐해를 내가 모르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이 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침만을 믿고 40번이나 침을 맞았지만 효과는 없고 침혈에 문득 부스럼이 났습니다. 신들이 보호하는 자리에 대죄하고 있습니다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혹 온천에서 효험을 볼까 기대하여 감히 애써 중지시키지 못합니다마는 외부에 있는 대신들이야 증세가 여기에 이른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유후성 등에게 물으니, 후성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진달한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여염간에서 진실로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효험을 본 자가 많다고 합니다마는 지극히 존엄하신 성상께서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므로 신의 지나친 염려는 혹시라도 더 더칠까 염려되어 소견을 진달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의원들에게 물으니, 여러 의원들이 모두 온천에서 목욕하는 일 외에는 다른 묘방이 없다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온천에 행행하는 것은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신이 감히 곧바로 청하지 못했습니다마는 이 마음을 먹고 있는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현재 천재와 시변이 비록 이와 같지만 그 동안에 어찌 다른 걱정이 있겠습니까. 다만 임금이 거둥하는 것은 경솔하게 할 수 없으므로 오직 사세를 짐작하여 성상께서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경석·정태화·홍명화가 모두 앞서 주장한 내용을 가지고 불가한 일이라고 애써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걱정하는 것을 우상은 상세히 알 것이다. 재변이 극심한 이때를 당하여 내가 어찌 이번 걸음을 기꺼이 하려 하겠는가. 지금 만일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필시 실명(失明)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 시험삼아 치료해 보려는 것이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의 말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할 줄을 진실로 압니다마는 두 대신의 말이 이렇게 간절한데 유독 유념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까. 단지 성상의 뜻이 이미 결정됨에 따라 신들이 진달한 것은 귀에 거슬리는 말일 것이니 오직 성명께서는 마음을 차분히 하시고 살피소서."
하니, 상이 기쁘지 아니한 얼굴로 이르기를,
"경들이 비록 나의 병을 염려한다고는 하나 어찌 내게 있어서 절박한 것만 하겠는가. 병세가 이러하므로 이에 경들과 상의한 것이다. 무슨 편치못할 마음이 있겠으며, 또한 귀에 거슬릴 까닭이 있겠는가."
하고, 허적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침맞는 것을 이미 정지하였는데 온천마저 시험하지 않는다면 치료할 방법이 장차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나의 의견에는 중완(中腕)에 침을 맞아보고 싶은데 어떤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의관들이 간혹 중완을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마는 이것만은 결코 시험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이러한데 어찌 침과 약이 효과가 없다 하여 손을 묶어둔 채로 기다리고만 있겠는가. 경은 물러가 여러 의원들과 상의하여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6일 임인
이정을 사간으로, 삼고 장선징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
평안도 함종(咸從)에 사는 군인 한효상(韓孝祥)의 아들 한택건(韓擇建)이 나이가 13세였는데 아비의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워서 소생시키자, 감사 이정영이 장계하여 정려를 내리고 포상을 베풀어 줄 것을 청하자, 따랐다.
집의 오두인이 아뢰기를,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신이 잇따라 언관으로 있으면서도 논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성상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우러러 받들고자 해서였습니다. 오늘 동료가 도로 중지시키자는 논의를 석상에서 발론하였으니, 신이 논해야 하는데 논하지 않은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하고, 인피하였다.
3월 17일 계묘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오두인을 체차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윤선도가 화심(禍心)을 품고 흉악한 말을 해 사림(士林)을 모해한 죄에 대해서 성상께서 통촉하시어 북쪽 변방에 유배보내셨으니, 심리하는 날 거론해서는 결단코 안 되었습니다. 심리란 정상을 살펴 억울함을 펴주는 것입니다. 윤선도의 용서할 수 없는 죄와 같은 것을 어떻게 심리하는 속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번의 심리는 재변을 만난 탓에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혜성을 음사한 상으로 여겼으니, 전하께서 하늘에 응답하는 실상은 양기를 부추기고 음기를 억누르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거조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상반되게 하십니까. 지금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이 비록 나이 많음을 애처롭게 여기고 옛 정의를 생각하는 데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성조(聖朝)에서 형정(刑政)을 잘못하는 것은 유독 생각지 않으십니까.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단지 남북을 바꾸어 먼 변방에서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은 선조에서 사부로 있었던 정의를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음기를 부추기고 양기를 억누르는 것이겠는가. 지금 그대는 이런 괴상한 논의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 터무니 없는 말이라서 윤허하지 않는다. 오두인은 별로 체차할 만한 일이 없으니 출사시키라."
하였다.
대사간 이경억 역시 즉시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뜸을 떴다.
3월 18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동명은, 성상의 비답이 준엄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오두인은 이미 체차되었다가 그대로 직에 있을 수 있는 이치는 결단코 없다는 이유로 다시 인피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3월 19일 을사
상이 뜸을 떴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 금부에 있을 적에 추고를 받아 아직 끝이 나지 않았고, 또 심리할 때에도 여러 신하들의 뒤를 좇아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물러나 뒷말을 하면서 구차스럽게 동료들과 의견을 같이 하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 추고를 탕척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심재, 부수찬 윤심·김석주가 차자를 올리기를,
"윤선도를 남쪽에 유배하라고 특별히 명한 것은 대개 살리기를 좋아하는 은혜와 옛 정을 생각하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며, 돌아가서 죽게 한다는 분부는 실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니, 위엄과 덕에 있어서 양쪽 다 유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번에 분부를 그대로 따른 것은 본디 악을 미워하는 의리에 잘못된 것이 아니니, 뒤에 논핵하는 것은 전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체차하기를 청한 문제는 염치에 관계된 것이니, 또한 억지로 출사하게 할 수 없습니다. 대사간 이경억과 대사헌 정지화는 출사하게 하고, 장령 이동명과 집의 오두인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에 여역이 치성하였다.
3월 20일 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최일(崔逸)·남천택(南天澤)을 장령으로, 삼고 정륜을 발탁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는 ‘죄가 같은 사람을 조사하는 것은 껄끄러운 바가 있으며 유배지를 옮기라고 한 명을 환수하라는 논의에 대해서는 감히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대사간 이경억은 ‘사헌부의 관원이 이미 논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끝내 체차되었으니 당초에 대간으로 있었던 신으로서는 태연히 처치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고, 역시 인피하였다. 부교리 박세당이 상차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3월 21일 정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수안군(遂安郡)에 눈이 내렸으며, 서리가 내려 온갖 풀이 모두 손상되었다.
3월 22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송시철, 지평 어진익은 ‘저번에 금부 당상이 죄인의 유배지를 상세히 살피지 못하여 특별히 추고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신은 바로 그 당시의 죄인이므로 감히 그 일을 조사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였으며, 정언 정재희는 ‘헌관이 윤선도를 옮겨 유배한 일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체차되었습니다. 신은 무릅쓰고 있는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말하지 않은 책임을 신 역시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면서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경기 감사 김수흥이 장계하기를,
"강도(江都)에서 옮겨오는 쌀 수천 석을 얻어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강도의 쌀 3천 석을 내어 감사로 하여금 균일하게 나누어주게 하고 가을이 되어 모곡(耗穀)과 함께 징수하게 하소서."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첫 번째 정사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전 감사 조귀석이 졸하였다.
귀석은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여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벼슬하기 전부터 더욱 재주가 있다는 인정을 받았고 호얼(湖臬)에 제수하자 성명이 기대한 바에 차지 않았는데 얼마 후에 일에 연좌되어 삭직되더니 이때 이르러 졸하였다. 연신이 진달한 것을 인하여 직첩을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3월 23일 기유
서리가 내렸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정지화도 본부의 논의에 대하여 구차스럽게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사간 이정(李程)이 집의 송시철, 지평 어진익, 정언 정재희, 대사헌 정지화를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충청도에 여역이 치성하였다.
3월 25일 신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3월 26일 임자
상이 침을 맞았다.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박경지(朴敬祉)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3월 27일 계축
상이 침을 맞았다.
지평 장건(張鍵)이, 분부의 전계(前啓)와는 의견이 달라서 구차하게 같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송시철, 지평 어진익이 윤선도를 옮겨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일로 연계(連啓)하고, 또 전혀 자신의 견해가 없다는 이유로 장건을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무슨 괴상한 논의를 이와 같이 하는가.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처치한 일은 따랐다.
3월 28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이준구(李俊耉)를 우승지로, 이섬(李暹)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는 또 전번 일로 인피하고, 집의 송시철, 지평 어진익은 엄한 분부를 내려 감히 편히 있을 수 없다고 하고, 정언 이익상은 마땅히 논의해야 하는데 논의하지 않아 피척을 받는 중에 있다는 이유로 감히 처치할 수 없다 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사간 이정이, 한 가지 일로 네 번이나 인피하였으니 대관의 체례에 비추어 보면 번독스러움을 면할 수 없다 하여 정지화를 체차하기를 청하고, 미안한 전교가 뜻밖에 나오자 혐의하여 처치하지 못한 것은 형세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여 송시철·어진익·이익상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의견을 같이할 수 없어 입락을 정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가할 것이다. 미안스런 일이 있으며 일을 연유하여 번독스럽게 하는 것이 근래 대각이 숭상하는 바가 되었으니, 이미 괴이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이른바 ‘대각의 체면에 비추어 볼 때 번독스러움을 면하기 어렵다.’는 등의 말은 실로 모호한 데 관계된다. 정지화도 출사시키도록 하라."
하였는데, 정지화가 얼마 후에 이미 체차하고서 다시 그대로 두는 것은 결단코 그런 이치가 없다고 하고, 다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29일 을묘
상이 침을 맞았다. 약방 제조 허적·이일상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에도 가물 조짐이 있으니 이것이 매우 염려된다."
하니, 일상이 아뢰기를,
"신이 현재 예조에서 대죄하고 있으므로 기우제 설행에 관한 일을 앙품하려 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를 비는 일은 가뭄이 극심해질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서둘러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나에게 질병이 있으므로 인하여 심리를 지금까지 마치지 못했다마는 수일 내로 거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일 심리할 때 조사(朝士) 중에 도배(徒配)에 해당한 자가 모두 석방되었고 형조의 죄인 문안(罪人文案)도 적어서 쉽게 판결할 수 있으니 일체로 소결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조에 분부하여 도년형에 해당하는 부류는 모두 석방하고 나머지는 문서를 수정하여 나의 병이 조금 쾌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행하라."
하였다.
사간 이정이, 정지화에게 출사하라고 특별히 명하였으니, 처치가 마땅치 않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이익상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3월 30일 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고 상신 정유성(鄭維城)의 집에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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