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3권, 현종 6년 1665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4.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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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사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정언 이익상(李翊相)이 월과(月課)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2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삼았다.

 

관리를 보내어 삼각산·목멱산·한강 등지에 기우제를 지냈다.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치계하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도망간 노비 신공(身貢)의 수량을 합하면 모두 1천 7백 40여동(同)인데, 깨끗이 면제를 받게 되었으니 매우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 중에는 한 가구 내에서 혹 40, 50필의 면포를 내기도 하고 혹 1인당 10여필의 면포를 내기도 하는데 지금 도망간 노비만 면제해주고 이들 생존자들에게는 면제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현존하는 빈곤한 유들도 그 중에 추가로 넣어 일체로 조사하여 면제해주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해 지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그렇게 하면 간교한 거짓이 생겨 막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자, 시행하지 않았다.

 

4월 3일 기미

상이 침을 맞았다.

 

강유후(姜裕後)를 황해 감사로, 이유(李秞)를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이 아뢰기를,
"혜성이 이미 소멸했으니, 정전으로 환궁하셔야 할 듯하니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성변(星變)은 사라졌으나 한재가 이와 같으니 환궁하시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재뿐 아니라 혜성도 완전히 소멸되었는지 모를 일인데 어찌 서둘러 환궁하겠는가."
하니, 공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평안도 원회부(元會簿)의 곡식에 대하여 일찍이 전매(轉賣)하여 목면으로 바꾸는 규례가 있는데 산군인 경우는 목면으로 무역하는 것이 진실로 타당하지만 도로 사정이 좋은 곳 및 연해 지역의 고을은 마땅히 비축해 두어서 예기치 않은 일에 대비해야 하는데, 지금 듣자니 도로 사정이 좋은 각 고을마다 크고 작은 세미(稅米)를 목면으로 바꾼다고 합니다. 청컨대 그대로 두게 하여 풍년이 들거든 곡식을 무역하여 당초에 목면으로 바꾼 숫자를 충당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참판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기를,
"하늘이 거듭 재변을 내린 것이 오늘날보다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혜성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전하께서도 일찍이 정성어린 전교를 내리시고 정전을 피하고 반찬을 줄였으며 음악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수성하는 방법은 결국 점점 망각하게 되어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오랜 폐단을 제거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 국가가 어느 곳에서 보존하기를 도모하겠으며 재변을 어느 곳에서 해소시킬 수 있겠습니까.
심리하여 큰 은전을 내리시고 포흠을 탕척시켜 주시는 등의 일도 재해를 해소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단서이기는 합니다마는, 다만 생각건대 심상치 않은 재변을 만났을 때는 반드시 심상치 않은 방법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먼저 전하께서 덜어내기 어려운 것부터 덜어낸 연후에 재해를 바꾸어 상서로움이 되게 할 수 있으며 위태로움을 바꾸어 안전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덜어내기 어렵게 여기는 것은 내사(內司)와 궁가(宮家)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덜어내기 어려운 것을 서둘러 덜어내는 것이 재변을 해소시키는 제일가는 의의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위태로운 형세에 처해 있으면서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적으므로 국가의 기강이 날마다 무너지고 사사로운 뜻이 횡행합니다. 이것을 제거하는 방법은 오직 사심을 없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내사와 궁가를 정리하여 먼저 사정이 없다는 것을 보이소서. 근본을 맑게 하여 뭇 신하들로 하여금 맑고 깨끗한 데로 돌아가게 한다면 신의 이 말은 특별히 내사와 궁가의 폐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고달파하는 경우는 실로 병사를 다스리는 문이 많고 재물을 거두어 들이는 길이 많아서 제각기 독촉만 하고 흉년이 든 것은 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6, 7월 사이에 곡식이 오히려 무성했었는데 결실을 앞두고 바람의 피해를 혹독하게 받아 수확량의 3분의 2가 감소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풍년을 맞은 백성으로 간주하여 제반 세금을 독촉하다 보니 포흠이 쌓여갑니다. 오늘날 백성들의 대부분이 굶주린 나머지 도로에서 죽어가는 자가 날마다 속출하는데도 전하께서는 깊은 대궐에 계시므로 다 알 길도 없으려니와 일을 맡고 있는 신하들마저 재물만 아끼고 백성들은 아낄 줄을 모르니 역시 인자한 마음이 없다 하겠습니다.
양호의 대동미를 감해준 것은 특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전하께서 백성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풍흉(豐凶)의 실상에 대하여 오히려 자세히 듣지 못했기 때문에 감해준 양은 많지 않고 실질적인 혜택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흠에 대해 탕척시켜 주는 일도 오직 징수할 것이 없는 자에게 적용해야 하고 실호(實戶)가 흉년으로 납부하지 못한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말하는 것은, 제도로 하여금 떠돌아 다니는 무리에게 진휼곡을 나누어 주고 집에서 굶주린 자에게 조곡을 주는 것이며, 전요(田徭)와 신역(身役)에 대해 현재 독촉받고 있는 것을 일체 중지할 것이며, 먼저 이른바 병사를 다스리는 문이 많고 재물을 거두는 길이 많다는 것도 그 중에 백성에게 가장 피해를 주거나 긴요하지 않은 것을 헤아려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비변사에 내렸는데, 끝내 채택하여 실시한 실상은 없었다.

 

4월 4일 경신

상이 침을 맞았다.

 

재차 기우제를 지내려 하는데 이조에서 대부분 늙고 병든 이를 헌관으로 차출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모든 제향은 공경하고 삼갈 곳 아닌 것이 없으며 기우제는 더욱 중대한데 해조에서는 적합하지도 않은 늙은 사람을 사정에 따라 책임만 모면하기 위해서 차출하였다. 이조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라."
하고, 이조 판서 김수항을 차임하여 제사지내게 하였다.

 

헌납 이유가, 사간 이정과 종형제 관계이므로 서로 피해야 할 혐의가 있다 하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에 앞서 상이 대신 이하에게 누차 명하여 특별히 인재를 추천하라 했는데 난잡스러운 자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등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이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상의하여 엄격하게 뽑아 등급을 구별하게 하였는데, 승직(陞職)·탁용(擢用)·승주목(陞州牧)·직출육품(直出六品)·제직(除職)·수재수용(隨才收用)·문견제직(聞見除職) 등이었다. 여기에 추천된 자가 80여 명이었다.

 

동래 부사 안진(安鎭)이 치계하기를,
"왜인(倭人)이 쌀을 바꿔가고자 일부러 공무역의 면포를 도로 예전 급대로 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서로 여러 달을 버티었지만 아직껏 마땅한 방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바야흐로 여름을 맞아 쌀이 귀하여 민사가 걱정되니 묘당으로 하여금 지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비국에 하달하였다. 회계하기를,
"면포를 쌀과 바꾸는 데 있어서 말[斗]의 수를 줄여줄 경우 연도를 한정하지 않고 바꿔주겠다는 뜻을 그들에게 여러번 일깨워 주었지만 끝내 듣지 않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올해와 내년 두 해 동안은 우선 예전대로 쌀을 바꿔주되, 다시 쌀의 양을 줄여주는가의 여부를 보아가면서 별도로 의논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5일 신유

상이 침을 맞았다.

 

4월 6일 임술

관리를 보내 재차 기우제를 지냈다.

 

이 때에 상이 가슴과 등 그리고 머리 부위에 부스럼이 나 눈병과 핵환이 겸하여 발생하였다. 상이 진찰하러 들어온 의관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습창(濕瘡)이 이미 심하게 번질 조짐이 있고 앞으로 날씨가 점차로 더워질 텐데 눈병이 재발하였으니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약방(藥房)에 말해 보라."
하니, 약방이 이때 온천에서 목욕하기를 계청하고 또 대신들과 의논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의관에게 말한 것은 온천가는 문제를 다시 묻고자 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일전에 대신들과 이미 탑전에서 의논한 바 있는데 이제 다시 의논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계사의 뜻이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4월 7일 계해

약방이 아뢰었다.
"상의 안질 증세는 전적으로 습열이 오르내린 데에 달려 있는데, 침은 맞더라도 일시의 급한 것만을 구제할 뿐이며, 탕제(湯劑)를 쓰게 되면 위의 기운을 먼저 상하게 되며, 환약은 열을 치료하는 데 가장 더딥니다. 습열을 치료하는 데는 온천만한 것이 없으므로 여러 의원들의 소견을 진달한 것인데 구구한 신의 지나친 염려도 말단에 아울러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이 이미 묻고 의논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일의 형편이 전과 다르므로 반드시 변통의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뜻으로 다시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 보소서."

 

상이 침을 맞은 후에 도제조 허적이 나아와 아뢰기를,
"온천물이 습진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겸하여 안질까지 치료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근래 비로소 물어보니 사대부 간에도 효험을 본 자가 많다고 합니다. 굳이 고집하지 마시고 오늘 내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이미 대신과 대면하여 의논하였다. 지금 비록 다시 의논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처음 의견과 다르겠는가. 온천에 가는 것이 폐해가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어이 가서 목욕을 하려는 것은 정말 부득이해서이다. 의논자 중에 혹 귀에 거슬린다느니 편치 못하다느니 하고 말을 하는 자가 있는데 이 어찌 나의 본심을 아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요즘 여러 대신들이 비록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가기는 하지만 어찌 신들이 매일처럼 들어와 진찰함으로 해서 상의 건강 상태를 자세히 아는 것만 하겠습니까. 여러 대신들은 상의 건강이 여기에 이른 줄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온천에 관한 논의에서 어렵게만 여겼던 것은 더칠까 하는 우려가 있어서입니다.
전일 하문하셨을 때 홍명하가 과연 귀에 거슬린다느니 편치 못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마는 이는 경솔하게 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어찌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그 뒤에 홍명하가 상의 건강상태를 상세히 알고 뉘우치는 뜻이 있었고, 이경석도 온천물이 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당초 잘못 진달한 것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정태화가 오늘 신에게 말을 전해오기를 ‘온천에 가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다. 비록 의견들을 수렴한다고 하더라도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니 속히 품정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원컨대 약방에 비답을 내려서 속히 수의하게 하여 오늘 중으로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드디어 온천에 갈 것을 결정하고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대답하기를
"어리석은 신의 소견은 이미 전번 하문하셨을 때 다 진달하였으므로 지금은 감히 다시 진달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는 감히 다시 전번 견해를 고집하지 않았다. 상이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평산(平山)은 온천이 너무 뜨겁고 이천(伊川)은 길이 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드디어 온양(溫陽)으로 갈 것을 결정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및 비국 당상 홍중보 등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할 논의를 이미 결정하였으니 거행할 일을 미리 정해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으므로 형세상 오랫동안 목욕하기 어려울 것이니 보름 전에 출발했으면 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12일이 좋기는 한데 기간이 너무 촉박하고 보름 후에는 17일 역시 좋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름 전에 좋은 날이 없다면 17일로 결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호위하는 군병 중에 마병(馬兵)은 멀리 갈 수 있겠지만 보병(步兵)의 경우 훈련군은 한강(漢江) 가에서 교대해 주고 수원군은 충청도 접경지에서 교대해주면 충청도군이 온양까지 호위하게 하고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의 경우는 4백 명으로 교대하여 호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능에 거둥할 때는 으레 4백 명을 동원하였으니, 이번 행차에는 8백 명으로 서로 교대하여 호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외방에서 군병을 징발하고 싶지는 않다."
하자, 태화 등이 도감군 중에서 건장한 자를 뽑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각사에서는 한 명씩 수행하되 긴요하지 않은 각사는 수행하지 말도록 하였다. 파발을 세워 궁궐 내의 안부를 전하도록 하고 승지와 내관이 문안하는 것은 폐지하도록 하였다.
서울에서 행궁까지는 4일 노정이었는데 일정 잡기를 과천(果川)·수원(水原)·직산(稷山)을 숙소로 정하고, 수원군 6천 명을 두 부대로 나누어서 한 부대는 한강 가에서 기다리고 한 부대는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일이 되면 서로 교체하게 하고, 충청도 군병은 병사로 하여금 한 군영의 병사만 징발하여 접경지에서 기다리게 하고 마병은 도감군 및 금군을 이용하게 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을 유도 대장으로, 도총관 김우명을 호위 대장으로 삼아 입직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 안을 호위하게 하고, 좌상 홍명하, 영부사 이경석을 유도 대신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이일상은 서울에 남아서 약방에 숙직하였다. 예관이 온천에 가는 일을 종묘에 고하였다. 수행한 백관 및 군병에게 온양에 도착한 후에 본도에 있는 호조의 쌀을 식료로 주게 하였다. 온천에 간 후에 도성 안에 도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우변 포도 대장으로 좌변을 겸하여 살피게 하여 【대장 유혁연은 마땅히 왕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야금을 밝히게 하였다. 거둥할 때 가는 길에 드는 어공물을 모두 간략하게 하고 단지 연로의 각읍으로 하여금 취득되는 대로 진상하게 하였다.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침범하였다.

 

함경도(咸鏡道) 부령부(富寧府)의 바다가 3일 동안 붉었다.

 

4월 8일 갑자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허적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묻기를,
"충청도 군병을 다 징발해서는 안 되고 지금은 단지 한 군영의 군병만 징발하려 하는데 어느 진영이 온양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청주(淸州) 진영이 가장 가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병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당시에 도성 밖에 여역이 매우 심하였다. 예조가 전례에 따라 12일에는 서낭당에 발고제(發告制)를 먼저 지내고, 15일에는 중신을 보내 북교(北郊)에 제사를 지낼 것을 청하니, 따랐다.

 

4월 9일 을축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정랑으로, 성후설(成後卨)을 헌납으로, 정륜(鄭錀)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는데, 도제조 허적 등도 입시하였다. 상이 홍중보와 이일상에게 행행하는 데 필요한 의주(儀註)의 절목들을 읽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수원 군사는 단지 부사로 하여금 거느리고 오게 할 수 없으니 총융사로 하여금 거느리고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 가서 병부(兵符)를 총융사에게 내려 보내고, 충청도의 군병도 병사에게 병부를 보내어 병부를 서로 대조해 본 후에 징발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어영군은 대장이 맡아 거느리겠지만, 금군 및 도감 포수(砲手)와 마병은 소속시킬 만한 대장이 없습니다. 신이 여러 대신과 상의해 본 결과 성내를 호위하는 모든 군사는 병조 판서가 총괄하여 지휘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협련군(夾輦軍)은 병조 판서를 대장으로 삼고 기타 제색 군병은 어영 대장을 주장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 궁궐 내에 혹시 유문(留門)을 실시해야 할 경우 내전에 여쭈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실시하되 군호(軍號)를 미리 날에 따라 써서 들이면 내전에서 계(啓)자를 찍어 봉한 다음 내전에 둘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매일 여쭈어 하달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순장(巡將)과 감군(監軍)은 능행할 때에 으레 계속하여 숙직을 서는 것이 규례입니다마는 이번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므로 계속하여 숙직을 서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도 군호의 예와 같이 그들로 하여금 이름을 나열해 써서 들이면 날에 따라 낙점(落點)을 해 두어 그때 맞추어 돌아가며 숙직을 설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정원은 모두 가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 두 명은 승정원에 남아 돌아가면서 숙직하도록 하고 옥당과 총부도 한 사람씩 숙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경영고(京營庫)에서 진상하는 물품을 행재소까지 가서 바친다면 그 폐해가 반드시 배가 될 터이니 직접 궁궐 내에 바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수행할 사복마의 숫자를 불가불 줄여야만 하겠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상의 의도가 폐해를 없애려는 데 있어서 수행하는 내관을 줄였으므로 사복마를 줄인 숫자도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중보에게 이르기를,
"선전관(宣傳官) 등이 대가를 수행하는 자가 너무 많다. 선전관으로 대가 뒤를 따르는 자는 5명 외에 단지 10명으로 하며 무겸 선전관도 10명이 대가를 따르고 오위장(五衞將)은 아울러 뒤에 떨어져 있으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총융사(摠戎使)가 그때 가서 수원군을 거느리게 되면 필시 장수와 병졸 간에 친숙하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미리 보내서 사열하고 교련하게 했다가 그때 맞추어 와서 맞이하게 하고, 그대로 수원에 진을 치고 있다가 환궁할 때에 직산(稷山)으로 마중 나오게 하라."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한 후에는 외방의 군병은 모두 돌려 보낼 것입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만으로도 호위할 수 있으니 외방의 군병은 돌려 보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수행할 왕자, 대신, 승지, 사관에게 말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경기·충청 양 도의 감사들에게 하유하기를,
"절대로 도로를 닦거나 수리하지 말라. 혹시 부득이한 곳이 있을 경우에도 백성의 전답을 침범치 말며, 모든 일을 최대한 절약시켜 민폐가 없도록 하라."
하고, 이어 거둥 시에 횃불을 세우지 말라고 명하였다.

 

4월 10일 병인

햇무리가 겹치고 흰 무지개가 햇무리를 가로질렀다.

 

선전관에게 표신(標信)을 주어 보내 충청 감사와 병사(兵使)로 하여금 청주 군영의 군사를 동원하여 충청도 경계로 마중나오도록 유시하게 하였다.

 

4월 11일 정묘

상이 침을 맞은 후,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온천에 갔을 때 매사를 최대한 절약한다 하더라도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는 작은 폐단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관(內官)이 의대를 관장해 왔으나 음식물만은 반감(飯監)에게 전적으로 맡겨선 안 됩니다. 일찍이 비빈(妃嬪)이 따라갈 때도 있었다는 고사를 들은 것이 있는데 청컨대 내인(內人) 몇 명을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감이 찬을 맡아하면 반드시 정결하지 않을 것이다마는 내인을 데리고 가면 반드시 큰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자, 허적 등이 반복해 진달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각 고을이 사신을 접대하는 데도 다과상을 차렸으니 이번 어가가 지나가는 곳에 차리지 않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형조 판서 김좌명을 정리사(整理使)로 삼아 온양에 먼저 가서 제반 일들을 정리하게 하였다.

 

4월 12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은 후,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우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대장의 소임을 맡게 되었는데 총부(摠府)가 외진 곳에 있어 구애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빈청(賓廳)은 궁궐 내에서 매우 가깝고 또 비어 있으니 이곳에서 숙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우명이 아뢰기를,
"호위청에서 이미 10명의 군관을 배정하였으니 신의 군관을 합하면 80명이 됩니다. 40명이 서로 번갈아 숙직을 서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혁연이 아뢰기를,
"어가가 유숙하는 곳에는 엄격하게 장막을 치고 군사를 줄지어 주둔시켜야 하는데, 과천(果川) 같은 곳은 매우 비좁아 마을의 집들이 많이 철거될 것이니 이 점이 매우 걱정됩니다. 만일 장막을 조금 떨어진 빈 터에 치고 수십 인이나 백여 인으로 간간이 진을 치게 한다면 허술하지 않고 민가를 철거시키는 근심도 없게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혁연이 아뢰기를,
"군중(軍中)의 큰 일들은 품달하겠습니다만 소소한 일들은 일일이 모두 품달할 수가 없으니 군중에서 편의대로 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행궁의 모형도를 보니 협소한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요즘 같이 무더위지는 날씨에 필시 답답함을 느끼게 될 우려가 있으니 신들은 이것이 염려됩니다.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추가하여 축조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미처 해내지 못하는 폐해가 없지는 않겠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관아를 헐고 새로 짓는다 하더라도 기간 내에 해내지 못할까 하는 염려는 없습니다. 지금 서둘러 행회(行會)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정리사가 지금 이미 내려갔으니 필시 상의하여 잘 처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어가를 수행하는 백관을 이미 뽑아서 재가받았는데 그 중에 사헌부 감찰은 수행원을 규찰하는 임무를 전적으로 맡고 있으니 2명이 어가를 수행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도시(司䆃寺)의 관원은 1인이 어가를 수행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시(庭試)를 베풀어 선비를 뽑았는데, 김만중(金萬重) 등 11인에게는 문과 출신을, 김효청(金孝淸) 등 4백 26인에게는 무과 출신을 하사하였다.

 

4월 13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송시철(宋時喆)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민주면(閔周冕)을 길주 목사로, 우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삼았다.

 

예조가, 정시의 문·무과 합격자 발표를 환궁한 후로 늦추도록 아뢰었다.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장계하기를,
"신이 《대전(大典)》을 취해 살펴보니 무릇 거둥 뒤 지방관들이 문안드리는 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거둥은 본시 옥체가 불편해 만부득이해서 한 것인데, 신하의 도리에 있어서 묵묵히 뒷전에 물러앉아 성상의 안부를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문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인정으로나 예의로나 실로 크게 흠이 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정하여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비국에 하달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번 거둥 시에 폐단을 줄인 것이 한둘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종조의 고사로 말하자면, 여러 도의 감사들에게 경계를 넘어서 문안드리지 못하게 했으며 별도로 선물도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검소하고자 노력했던 뜻은 바로 오늘날 본받아 행해야 하니 이것으로써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4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부사 이경석이 뵙기를 청하니,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경석이, 먼저 목욕하고 나서 쉬는 방법에 대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와 호서의 백성들이 지금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데다가 또 성상의 거둥을 맞게 됐으니 비록 폐단을 줄이려고 애쓰고 있지만 어찌 백성들에게 폐해가 미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각읍의 원곡(元穀)을 방출하여 그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절부(節婦)·효자를 각도에서 예조에 보고하여 정부로 보고되고 있는데, 근래에 일이 많아 거행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른 도는 비록 모두 시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본도만은 거둥시에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사실대로 보고하게 한 다음 정문을 세워주거나 관직을 제수하고, 청백리와 전쟁에서 순절한 자의 자손에게도 모두 똑같이 포상을 시행한다면 어찌 한 도의 인심을 고무시키지 않겠습니까. 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 역시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조(仁祖) 때의 구신(舊臣)이 연로하여 조정에서 물러나 지금 도내에 살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경석이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은 일찍이 인조조에 시종신을 지냈는데 나이가 지금 80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미 노인을 우대하는 가자의 은전을 받았는가?"
하니, 우부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신계영은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가자(加資)하여 가의(嘉義)로 올랐으니 지금은 특명이 있어야만 비로소 품계를 올려 가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거둥할 때 특별히 과거를 베풀었던 고사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조그만 종이에 써서 올리라 명했다.

 

4월 15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중신(重臣)들을 보내어 북쪽 교외에 예제를 지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 창경궁(昌慶宮)의 선화문(宣化門)과 통화문(通化門)을 모두 봉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창덕궁 각문도 돈화문(敦化門)·금호문(金虎門) 이외에는 아울러 봉쇄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거둥한 후에 만일 국기일(國忌日)을 당하면 종관(從官)의 복장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거둥하실 때 상하 군신이 모두 융복(戎服)을 입는다면 이는 군대의 행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중에는 변복하는 절차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상복(上服)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융복을 입되 남색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상이
"거둥 후 제도의 공사는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행재소로 바로 진달하게 하되 서북 양도는 길이 서울을 경유해야 하니 승지가 먼저 살펴본 후에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것은 정원에 머물려두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온천 및 지나는 명산 대천에 모두 제사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예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서울 에 있는 백관은 대체로 출근하는 날 조방(朝房)에 함께 모여서 3전(三殿)에 문안을 드리는 것이 진실로 정례에 합당합니다."
하고, 명하가 청하기를,
"5일 간격으로 문안하도록 하고 각사의 당상과 낭청은 낮에는 일제히 본사에 좌회(坐會)하고 밤에는 당상과 낭청 각 1인이 숙직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낮에는 다같이 좌회하고 밤에는 평상시의 규례에 따라 낭청 1인이 숙직하게 하되, 각사에서는 회좌하고 회좌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문서를 정원에 보고하여 행재소에 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 제수된 관원이 사은 숙배하는 절차에 대해서 미리 결정해 두어야만 합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어가를 수행한 관원이 다른 관직에 제수되었을 때는 단지 대전에만 사은 숙배를 올리게 하고, 서울에 있는 관원 중에 관직에 제수된 자는 3전에 사은 숙배를 올리고 임무를 살피도록 허락하며, 남도의 수령인 경우에는 행재소에 나아와 하직한 후에 부임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날이 점점 더워져 군중의 전염병이 걱정된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의감 제조(典醫監提調)는 약물을 넉넉히 싸가지고 가서 치료해줄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듣자니 충청 감사가 지은 집이 꽤 많아 어실(御室)의 세 모퉁이에 담을 두르고 담 밖에는 1백 50여 칸이나 되는 임시 집을 지어 놓았다 하니, 민폐가 어찌 많지 않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과거를 실시하게 되면 단지 본도에만 실시할 것인가, 아니면 서울 사람도 모두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인조조에 공산(公山)에서 과거를 실시했었는데 단지 본도 사람 및 수행했던 사람만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 사람으로 규정을 어기고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된 자는 마땅히 빼 버리고 거듭 주의시켜 엄하게 단속하라."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노량진(露梁津)의 모래 사장은 모래가 깊어 말굽이 빠지기 때문에 말이 지나가기가 꽤 어렵습니다. 만약 용산(龍山)의 큰길로부터 와서(瓦署)를 거쳐 서빙고(西氷庫)로 돌아가면 매우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갈 때 선창(船槍)을 축조하지 말아서 민폐를 줄이도록 하라. 파발은 9시로 한정하여 9시 내에 왕복하도록 하고 떠난 시간을 적어서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정리사 김좌명이 신에게 통보하기를 ‘충청도 군병은 접경지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소사(素沙)의 앞 들이 모두 백성들의 밭이어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경기 지역이기 때문에 약간 물려서 진을 쳐야 할 듯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몇 리를 물리더라도 반드시 밭이 없는 넓은 곳을 택하여 진을 치라는 뜻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김좌명이 또 행궁에 포장을 칠 일로 문의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형이 낮은 곳에는 포장을 2층으로 치고 담이 있는 곳에는 홋포장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포장(布帳) 2백 벌을 이미 훈국으로부터 수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온양은 지세가 비좁아 마병과 금군이 진을 치고 꼴을 먹일 것이 없습니다. 그 곁에 넓고 물과 풀이 있는 곳을 택하여 각초(各哨)를 흩어보내어 진을 치고 서로 망을 보게 하면 별도로 복병을 설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니 두 가지가 다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도내의 부로(父老) 및 시골 사대부들이 깃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겠다고 모두 온양에 모인다고 합니다. 빨리 달리지 말게 하여 간혹 어가를 멈추고 위로도 해주고 겸하여 백성들의 실정을 물어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상이 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이 영부사가 차자로 진달한 것이 무슨 일에 대한 것인가?"
하니, 선징이 그 차자를 올렸다. 상이 다 보고 나서 이르기를,
"만약 송상현(宋象賢)에게 제사를 지낸다면 그 밖에 드러난 사람에게도 모두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하는가?"
하니, 선징이 아뢰기를,
"도내에 충절이 있는 사람으로 송상현보다 나은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군 향교(鄕校)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명화가 아뢰기를,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지나는 도로와 백성들의 전답 중 손상된 곳은 손상된 곳을 따져 그 주인에게 변상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 곳은 환궁한 뒤에 거행하고 머물렀던 곳은 올 때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완에게 이르기를,
"이미 외방에서 병사를 징발하지 않았으므로 도성이 비어있는 것이 염려된다. 순라도는 일을 각별히 잘하도록 하라."
하니, 이완이 아뢰기를,
"거둥하신 후에 우선 군사 훈련을 중단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이번에 마병 5백으로 어가를 호위해야 할 것인데 각초(哨)에 인원이 많이 빈데다 또 병든 말이 많아서 할 수 없이 쓸 만한 마병 4백 70명을 가려 어가를 호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하교하였다.
"따르는 군병이 상당히 많은데 통괄해 거느릴 장수가 없으면 어지러이 흐트러져 대오를 잃게 되는 우려가 있으니,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를 제외하고 총융사 이하는 모두 어영 대장 유혁연의 통제를 받도록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향실(香室) 문서와 《여지승람》을 가져다 참고해 보니 이번 거둥 시에 경유할 각읍 중에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명산 대천으로는 한강과 과천·관악산 밖에 없는데 이곳들은 항시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그리고 직산의 성거산(聖居山)은 고려 태조가 직산현의 서쪽에 어가를 멈추고 제사를 지낸 곳이고, 우리 태조 대왕·세종 대왕께서 온천에 행차하실 때 역시 제사를 지냈던 곳이니 어가가 머무는 날에 제사지내소서. 관악산에는 17일 새벽에 제사지내되, 향과 축(祝)·폐백·제관(祭官)·제사 음식 등은 기일에 앞서 미리 내려보내고, 희생(犧牲)은 본도에서 마련해 보내도록 하고, 한강은 해당 관서에서 전례대로 수송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정재희, 지평 어진익이 무과 감시관으로 방목(榜目) 중에 있는 오자(誤字)를 살피지 못했다는 실책으로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16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민종도(閔宗道)를 지평으로, 권두추(權斗樞)를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가 윤선도를 이배시키라는 명에 대해 환수하기를 청하던 계문에 이 때에 정지하였다.

 

4월 17일 계유

상이 온양 온천에 거둥하였다. 인시에 상은 군복을 입고 칼과 활·화살통을 차고서 작은 수레를 타고 나가 인정문 밖에 도착하였다. 수레에서 내려 말을 타고 숭례문 밖에 도착하여서 부터는 교자를 타고 출발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 호조 판서 정치화, 이조 판서 김수항, 한성 판윤 오정일, 지사(知事) 정지화, 예조 참판 남용익, 대사간 이경억, 도승지 박세모, 좌승지 이성징, 우승지 장선징, 동부승지 송시철, 교리 심재, 부수찬 윤심, 집의 오두인, 지평 이섬, 정언 이규령 및 각사의 관원과 종반(宗班) 숭선군 이징 등 8인, 의빈(儀賓)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 등 5인, 침의(鍼醫) 윤후익(尹後益) 등 4인, 약의(藥醫) 이동형(李東馨) 등 4인이 따라 갔으며, 영풍군 이식 등 형제 4인도 자원하여 어가를 수행하였다. 무예 별감(武藝別監) 30인, 어영군 1천 2백 명, 기병 50명, 군뢰(軍牢)와 잡색(雜色)이 합해 4백 명이었는데, 대장 유혁연과 중군(中軍) 유정(兪椗)이 이끌고, 금군 5백 명은 별장 이지원(李枝遠)이 이끌고, 마병 4백 70명과 포수 8백 명은 별장 유비연(柳斐然)·한여윤(韓汝尹)이 이끌었다.

 

어영 대장 유혁연에게 군사를 이끌고 금군·마병·훈국 포수와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를 선도하고, 훈련 대장 이완에게는 그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뒤를 보호하여 강가까지 가서는 뒤에 쳐졌다가 돌아와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총융사 구인기(具仁墍)에게는 수원 군병 5천을 거느리되,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강의 남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뒤를 보호하여 수원까지 가고, 다른 한 부대는 수원에서부터 뒤를 보호하여 충청도 경계에까지 가도록 명하였다. 충청 병사 민진익(閔震益), 청주 영장 이간(李旰)에게는 그들의 군사 5천을 이끌고 충청도 경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뒤를 보호하여 온양까지 가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홍명하에게는 남아서 서울을 지키면서 비국에 숙직하게 하고, 군사 일 외의 모든 일을 영중추부사 이경석과 더불어 상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풍 부원군 김우명은 궁궐 내를 지키면서 종사관(從事官) 이민서(李敏叙)와 함께 빈청에서 숙직을 하되 군관 80인을 거느려 호위하게 하고, 훈련 대장 이완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 군영에 진을 쳐서 궁성을 호위하라고 명하였다.

 

관리를 보내어 한강과 관악산에 제사를 지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묘시에 상이 서빙고 나룻터에 이르자 도성에 남는 백관들 및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강가에서 공손히 배웅하였다.

 

상이 선소(船所)에 나아가 호위하는 여러 장수들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을 앞으로 불러 음식을 하사한 다음, 수행 관원과 군병들은 모두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금군과 연을 호위하는 포수는 배에 타고 좌우로 나누어 어선(御船)을 호위하며 건너라고 명하였는데, 승지 장선징이 재가받았다. 축포를 쏜 다음 상이 배에서 내려 가마를 타고 먼저 출발하자, 총융사 구인기가 수원군을 이끌고 모래 사장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길 한편에서 무릎을 꿇고 알현하고는 뒤를 보호하면서 따라갔다.

 

오시 말에 과천 숙소에 묵었다.

 

이성징(李星徵)에게 하교하였다.
"진상하는 음식물의 가짓 수가 너무 많으니 본도와 사옹원(司饔院)에게 분부하여 간소하게 올리도록 하라."

 

저녁 때 크게 천둥이 치며 소낙비와 우박이 내리고 용이 강 속에서 솟아 올랐다.

 

4월 18일 갑술

상이 인시에 과천을 출발하여 광주(廣州) 사근천(沙斤川)의 주정소(晝停所)에서 머룰렀다. 상이 막사에 나아가 병조 판서 홍중보와 어영 대장 유혁연을 인견하고, 상이 혁연에게 이르기를,
"내가 수원 군대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어제는 조금 떨어진 모래 사장에 진을 쳐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만일 좌우에 진을 치도록 하여 그 사이를 통과하면 똑똑히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총융사에게 분부하여, 앞의 들판에 진을 치고 좌우로 나누어 기다리다가 어가가 군문에 도착하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꿇어 엎드리게 한 후에 그대로 앞을 지나 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사시에 상이 사근천(沙斤川)을 출발하였다. 어영군에게는 뒤를 따르고, 총융사 구인기는 수원군을 이끌고 먼저 떠나 앞의 들판에 진을 치되 길을 끼고 좌우로 나누어 머무르도록 명하였다. 금군 마병에게는 선봉이 되어 수원군 진지에 이르러 좌우로 나누어 서 있다가 상이 천천히 행하여 진영 앞에서 어가를 멈추면 군사들이 군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상이 진(陣) 중에 들어가면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치며 꿇어 엎드리고 난 다음 그대로 선두가 되어 가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이 애초 군사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앞에 가는 의장(儀仗)과 마병이 시끄럽고 무질서하게 치달려 먼지가 가득 일어났으며, 수원군 역시 연습이 안 되어 있어 앞지르기에만 급급하다보니 대오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미시에 수원 숙소에 머물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두 자전(慈殿)에게 문안하였다. 정원·옥당·약방이 각전(各殿)에 문안하고 유도 대신(留都大臣)이 3품 이상을 거느리고 각전에 문안하였는데, 대개 선묘조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상이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을 들고 땀을 빼었다. 약방이, 어가를 머물러 병세를 보아가며 떠나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상이 폐를 끼친다고 듣지 않자, 약방이 또 군령(軍令) 시각을 조금 늦추어 진위(振威)에서 묵다가 느즈막하게 출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 감사 김수흥이 장계하기를,
"방금 진상하는 음식물을 간소하게 받아들이라는 성상의 분부를 보았는데 이는 폐단을 덜려는 지극하신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상을 받드는 도리는 여러 모로 심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하물며 이 봉진하는 물품들은 산해(山海)의 토산물에 불과한 것들로 원래 얻기 어려운 물품들이 아니어서 반드시 폐단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마련한 것이니 그대로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은 우선 받아들이고 환궁할 때는 다시 간소하게 받아들일 것을 엄히 밝히고 거듭 주의기키라."
하였다.

 

평산(平山)과 토산(兎山) 등지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여 보리와 목화가 온통 절단났다.

 

4월 19일 을해

상이 수원 행궁에 있었다. 병조 판서 홍중보, 어영 대장 유혁연, 총융사 구인기를 인견하고 상이 묻기를,
"앞으로 가다가 어느 곳에 진을 칠 만한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여기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산성(山城)이 있고 산성을 지나면 평야가 나오는데 도로가 조금 넓기는 합니다마는 좌우에 모두 백성의 전답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로 하여금 길에 열을 지어 서게 하되, 곡식을 밟지 않게 하라."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어제는 대신들이 하교를 듣고 외작문(外作門) 밖으로 나가 있었는데 대신들이 밖에 나가 있는 것이 미안할 뿐만 아니라 또 병부(兵符)를 지니고 있으니 멀리 있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상의할 일이 있을 터이니 그들을 내작문(內作門) 밖에 들어와 있도록 하라."
하였다.

 

사시에 상이 수원을 떠났다. 총융사 구인기, 수원 부사 박경지에게 명하여 그들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산성의 남쪽 광활한 곳에 가서 진을 치게 하였다. 어가가 진문에 다다르자 군사들이 문을 열고 일제히 고함치며 나팔을 불고 북을 쳤다. 상이 어가를 멈추고 군대의 모습을 보고 난 다음 인기 등으로 하여금 뒤를 보호하며 따르도록 하였다. 오시 말에 진위 숙소에 머물렀다.

 

정리사 김좌명이 온천에서 마중나왔는데,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쓸 침실을 잘 쓸고 닦지 않아서 흙냄새가 상당히 났으므로 경기 감사 김수흥이 대죄하고, 본현의 현령 이관하(李觀夏)를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으나, 상이 농사철에 수령이 바뀌면 폐가 생긴다 하여 파직시키지 말고, 감사로 하여금 관하를 군문에서 곤장을 치도록 하였다.

 

행 대사헌 송준길이 부름을 받고 올라오다가 도중에서 병이 심해져 나아갈 수 없다며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4월 20일 병자

묘시에 진위를 떠나 진시에 소사(素沙)의 주정소에 머물렀다. 어영 대장 유혁연을 불러 묻기를,
"충청도 군사는 어디에 진을 쳤느냐?"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들 한가운데다 진을 쳤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보병 4천여 인과 마병 4백여 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이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니 충청도 군사로 하여금 어영군과 앞에서 인도하는 의장대를 내보낸 후에 다시 진문을 닫고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뵙기를 청하니, 막사에서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호위 군병은 처음에 각기 5일 양식을 지참케 했으니 온양에 도착한 후에는 급료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충청도의 군사는 동원한 지 벌써 오래 되어 싸가지고 온 양식이 이미 바닥나 굶주리게 될 걱정에 놓여 있다 합니다. 군사 6천 7백여 인의 하루 식량이 80여 석인데, 직산(稷山)에도 회부(會付)한 곡식이 있으니, 이것으로 나누어 주게 하소서. 행재소에 도착한 다음 수행한 백관에게도 급료를 주어야 하니, 1품관에게는 하인 3명과 말 두 마리가 먹을 식량을, 당상관에게는 하인 2명과 말 두 마리가 먹을 식량을, 3품 이하에게는 하인 1명과 말 한 마리가 먹을 식량을 지급하되, 매일 1인당 쌀 2되를 주고 말은 콩 3되를 주는 것으로 마련하여 왕의 수레를 호위하는 군병에게도 일체로 나누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막사를 떠나 소사(素沙) 다리 근처에 이르러서, 금군·선전관 등으로 하여금 다리 위에서 말을 타고 달려 보게 하고는 어가를 멈추고 지켜보았다. 충청 병사 민진익(閔震益)과 영장 이간(李旰)이 마병과 보병 5천을 이끌고 충청도 접경지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상이 진문에 이르자 민진익이 대장기를 세우고 군악(軍樂)을 울리며 마중나왔다. 상이 어가를 세우고 군대의 모습을 사열하다가 병조 판서 홍중보에게 이르기를,
"이 군대는 수원의 군대보다 나은 듯하다."
하고, 이어 진익과 이간 등을 앞으로 불러 하유하기를,
"이 군대는 대열이 꽤 정연하고 깃발들이 활기에 차 있는데, 그대들이 맡은 일에 근실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이어 말을 하사하라 명하고 그 군사들을 이끌고 뒷 대열에 서도록 하였다.

 

미시에 직산 숙소에 머물렀다. 충청 감사 김시진이 그의 도내 각 고을의 수령들을 이끌고 홍살문 밖에서 경건히 맞이하였다.

 

관리를 보내어 성거산(聖居山)에 제사지냈다.

 

어가가 작문(作門)에 들어갈 때 수행하는 여러 신하들이 앞을 다투어 말을 달려 마구 작문으로 들어갔다. 상이 병방 승지에게 작문의 초관(哨官)을 문초하게 했는데 초관이 두려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주아부(周亞夫)의 진중에 들어갈 때 진문을 지키는 졸병이, 군영 안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다며 문제에게 고삐를 늦추고 천천히 가라고 하였다. 이번 작문의 초관이 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비록 수행하는 여러 장수·승지·각 차비(差備)라도 결박지어 두었다가 보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법대로 금지하지도 못한 데다가 또 제멋대로 말을 둘러대니 매우 괘씸하다."
하고, 장선징으로 하여금 초관 2인에게 장형을 줄 때 감독하되, 곤장 20대씩 치도록 하고, 승지·사관(史官)·각 차비와 수행한 여러 장수들은 모두 엄중히 추고하라고 하였는데, 추고를 받은 자가 40여 인에 달하였다. 선징이 결박(結縛)이라는 두 글자가 미안하다고 진달하자, 상이 즉시 부집(扶執)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경억과 정언 이규령이 뵙기를 청하니,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삼가 듣자니 초관을 곤장 칠 때 승지 등을 결박하라는 하교가 있었다 하는데 너무나 미안합니다. 어가가 작문에 도착할 즈음에는 여러 신하들이 호위하는 일에 급하여 으레 복잡하기 마련입니다. 상께서 금지하신 것은 참으로 옳은 일입니다만, 결박이라는 말을 제왕이 해서는 안 됩니다. 빨리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미 고쳤다고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외작문의 일은 대장(大將)이 주관해야 하고, 내작문의 일은 본병이 주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초관에게 벌을 주면서 승지에게 장형(杖刑)을 감독하게 하였습니다. 초관은 군졸의 우두머리에 불과한데 어찌 존엄하신 임금께서 사소한 일까지 관여하십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일체 내외 대장에게 맡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무에 관한 일은 본병 외에 병방 승지도 그 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분부했던 것이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현재 본도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일이 다급합니다. 도신을 인접하여 진구할 대책을 물어 속히 거행하소서. 만약 서울로 돌아간 후에 시행한다면 백성들의 기대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을 우대하는 예와 상을 주어 권장하는 은전에 있어서는 병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의 연로한 사람들과 효자·절부(節婦)들을 감사로 하여금 일일이 아뢰게 하소서. 고 충신 송상현(宋象賢)·조헌(趙憲)과 유현(儒賢) 김장생(金長生)의 묘소가 모두 도내에 있으니 역시 관리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규령이 아뢰기를,
"지금 가뭄의 재해가 매우 혹독한데 충청도를 볼 때 그 나머지의 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팔도에 하교하시어 모두 부역을 감해주시면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 중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은 요·순도 못할까 걱정한 일이다. 나라의 비용이 몇 년만 지탱할 수 있다면 이 일 또한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장선징이 아뢰기를,
"나라의 비용이 부족하여 널리 베풀기가 어려우니 충청도에만 실시해야 됩니다."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비록 충청도라도 온양과 경유하신 각읍을 제외한 그 나머지의 읍들은 차등을 두어 구별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소사 다리 위에서 금군에게 말을 달려보라고까지 하셨는데 이 일은 비록 적은 것이나, 백성들이 바라볼 때는 반드시 관희(觀戲)에서 나온 것으로 여길 터이니 어찌 성상의 덕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선징이 아뢰기를,
"파발을 9시간으로 제한한 것이 너무 급박하여 한정한 시간 내에 왕복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좌상 홍명하 역시 이 일을 신에게 알려 품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2시간 내에 왕복하게 하라고 비국에 분부하라."
하였다.

 

전라 감사 민유중이 치계하기를,
"외방의 미결수들을 본도로 하여금 빨리 관대하게 처결한 다음 보고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도내 현재 죄수 중에 본도에서 의결하여 처리할 수 있는 죄수들은 석방하기도 하고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유배를 정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보고했던 죄인들과 인륜을 범한 자 및 사람을 죽인 유들은 신문관을 신칙하여 즉시 사실 조사를 실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금년 정월부터 3월까지 심리(審理)할 때 그 사이 도배(徒配) 죄인들은 도류안(徒流案)이 미처 서울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형조의 초계(抄啓) 중에 넣지 못했는데, 일례로 균등하게 은택을 베푸는 도리가 못 될까 걱정됩니다. 그러니 본도로 하여금 참작하여 관대하게 석방시키게 하거나 형조에서 전의 초계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형조에 하달하였다. 형조에서 회계하기를,
"각도의 죄인들이 이미 귀양간 후에 재가를 받은 자가 또한 많아 애초부터 심리 명단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신의 조에서 우선 그들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가 심리가 끝난 뒤에 품의하여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21일 정축

묘시에 상이 직산(稷山)을 출발하여 진시에 천안(天安)의 주정소에 머물렀다.

 

관리를 먼저 보내어 온천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오시에 어가가 온천에 도착하였다. 수원 이남부터 어가가 경유하는 각읍마다 유생·부로(父老)들이 수십 인 혹은 백여 인씩 곳곳에서 마중 나와 절하였으며, 온양에 이르자 십 리쯤 길 양쪽으로 인파의 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는데, 상이 가끔 어가를 멈추고 위문하였다.

 

상이 행궁에 나아갔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여러 의원들을 데리고 들어와 진찰한 후에 상이 영의정 정태화와 충청 감사 김시진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내외 장막 사이를 보니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만일 포장을 붙여서 치게 한다면 비록 군사의 수를 늘리지 않아도 도감의 병사만으로 호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포장을 붙여서 치고 충청도 병사들은 돌아가게 하였다. 상이 시진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곳에 옴으로 해서 민폐가 많으리라 생각하는데, 부역에 동원된 백성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시진이 대답하기를,
"토목 공사는 승군(僧軍)을 조달하여 쓰고 농민은 부리지 않았습니다만, 가건물의 경우는 각읍에 나누어 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각읍에서 모두 백성의 토지 결수에 따라 의무로 내보냈으니 어떻게 그 숫자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용한 승군의 수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못 되어도 수천 명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과거보는 일에 대해 여쭙자,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만일 시행하지 아니하면 이것 역시 인심을 잃는 일이다. 지금 나의 이번 행차는 만부득이해서 한 것이지만 도내의 민폐를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해조로 하여금 과거를 시행해 인재를 선발하여 위로하고 보답하게 하되, 다만 본도의 주민으로 호적에 들어 있는 자만을 응시하도록 하라. 무과는 초시를 보이지 말되, 그 기준을 높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가뭄이 들어 예조에 급히 기우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청주진(淸州鎭)의 병사들을 돌려보내고 병사 민진익은 남아 같이 행군을 지키게 하였으며, 훈국과 어영군으로만 호위하게 하였다. 외포장은 둘레가 5백 보로 도성문을 모방하였는데 대신들과 정리사가 머물렀고, 내포장은 둘레가 3백 보로 궁성문을 모방하였는데 정원·옥당·병조·총부(摠府) 및 수행하는 여러 장수들이 들어와 숙직하였으며, 그 나머지 각사는 모두 외작문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수령들이 차사원(差使員)으로 와 머물러 있는 자들이 많으니, 지금 농사철을 맞아 그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차사원을 수령들에게 겸임시키고 나머지 수령들은 본읍으로 돌려보내라. 음식물을 담당하는 차사원들이 들락거리면 역시 폐해가 있을 것이니 1인만 정하되, 각읍에서 음식물을 진상할 때 배지리(陪持吏)가 도착하면 차사원이 사옹원의 관례에 따라 살핀 다음 올리게 하라."

 

상이 처음으로 온천물에 손을 씻었는데 이 날을 길일로 택한 때문이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 판서 조계원(趙啓遠)이 연로하여 물러나 보령(保寧)에 살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와서 알현하였다.

 

하교하였다.
"농사철이어서 민폐가 염려되니 수라간에 배정되어 보내진 급수군(汲水軍)들과 여러 곳에 배정되어 보내진 자들을 아울러 모두 돌려 보내라."

 

유도 대신들이 궁성과 도성 각처의 숙위소가 무사하다는 것과 봉화(烽火)의 상황을 기록하여 날마다 아뢰었다.

 

4월 22일 무인

상이 온천의 행궁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감았다. 정원·옥당·약방과 2품 이상의 관원들이 아침에 문안하고 목욕한 후에도 문안하였다. 정원·옥당·약방은 다시 저녁 문안을 하였는데 매일 이와 같이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청하기를,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들로 하여금 낮에는 돌아가며 교대로 내보내고 밤에는 모두 숙직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어제 포장 밖에 모인 부로(父老)들의 수를 세어서 아뢰라는 명이 있었는데, 반드시 성상의 뜻이 있어서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원은 단지 본읍에서 보고한 대로 대충 7인이라고 서계하여, 물으신 뜻을 끝내 매몰시켜 버렸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이 아뢴 7인이 너무 적다고 하여 다시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물어 아뢰라 하니, 감사 김시진이 다시 1백 70인으로 서계하였다. 상이 나이 90 이상된 자에게는 쌀 5말과 조기 20마리를 하사하고 80된 자에게는 쌀 3말과 조기 10마리를 하사하고 70된 자에게는 쌀 1말을 하사하였다.

 

4월 23일 기묘

저녁에 크게 우레와 번개가 치며 비바람이 몰아쳤다.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를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과거를 실시하는 것은 오로지 본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인데, 만일 수행관들과 어가를 모시고 온 무사들까지 과거를 보라고 허락해 준다면 충청도의 사람들이 합격할 수 없게 될 터인데 이것이 어찌 과거를 실시한 본뜻이겠습니까. 어가를 수행한 무사들은 따로 기록해 놓았다가 환도한 후에 따로 시험을 보여 선발한 다음 정시(庭試)에 추가로 넣어주고, 수행관들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같이 한다면 무사들 또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무과의 기준을 높이지 않으면 환궁하시기 전에 반드시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1백 명을 선발하되 기준은 유엽전(柳葉箭)을 1회에 두 번 명중시키는 것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은 인조조의 시종신으로 나이가 90에 가깝고 병으로 행궁에 나와 알현하지 못하고 있으니, 특별히 은전을 베푸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연로한 사람들도 관직의 유무를 묻지 말고 모두 노직첩(老職帖)을 주시면 그들의 감동과 기쁨은 반드시 음식물을 받는 것보다 배나 더 클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계영은 이조로 하여금 특별히 가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듣건대, 간신(諫臣)이 충신과 유현(儒賢)들의 묘소에 제사지낼 것을 청했다는데 이순신(李舜臣)의 묘도 도내에 있고 그의 사당이 아산(牙山)에 있으니 일체로 제사를 지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앞서 이경석이 청대하여 훌륭한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하였으니, 상께서 예우하여 이르러 오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우승지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송 우찬성 및 송 대사헌의 집에 사관을 보내어, 내가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니 병이 조금 나아지길 기다렸다 와서 보라는 뜻으로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송시열은 우찬성이었고 송준길은 대사헌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43면
【분류】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풍속-예속(禮俗)

 

중사(中使)를 보내어 두 자전에게 문안하였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가 이렇게 오는데 호위 군병들이 어떻게 해야만 비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각 군영에 물어보니, 군사들이 모두 포장을 갖고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파주(坡州)·여주(驪州)·이천(利川)·장단(長湍) 등지에 우박이 크게 내렸는데, 혹은 밤톨만하고 혹은 콩알만하여 보리·밀·목화가 모두 손상을 입었다.

 

용안(龍安)에 사는 13세 난 여자 아이와 평택현에 사는 여인이 모두 벼락을 맞아 죽었다.

 

4월 24일 경진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오두인 등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 시에 외방의 폐해를 염려하여 어가를 수행하는 여러 관아에게 각기 알아서 일용품을 준비하도록 하였는데 정원의 사령(使令)이 차사원에게 깔 자리를 요구하며 마구 능욕을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유사로 하여금 죄를 적발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그리고 관원도 단속을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홍중보에게 명하여, 진중을 순시하며 무기를 점검하고 병사들의 질고(疾苦)를 묻게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이 행궁에 오다 공주의 산사(山寺)에 이르러 병 때문에 오지 못하고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질병 때문에 이처럼 만부득이한 행차를 하였다마는 오직 경과 서로 대면하여 나의 회포를 풀기를 바랐었는데 그대가 또 질병으로 상소하니, 내 몹시 섭섭하다. 이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내 뜻을 알리니, 경은 나의 뜻을 몸받아 빨리 멀어진 마음을 돌리기 바란다."
하였다. 송준길 역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똑같이 답하였다.

 

경기 감사 김수흥이 치계하여, 수원과 진위 두 읍 객사(客舍)에 시원한 방을 추가로 지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 25일 신사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처음으로 탕에서 목욕을 하였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요즘 각읍에서 바치는 음식물의 가짓수가 너무 많다. 심지어 산 노루는 더욱 얻기 어려운 것인데 매일 바치니 그 폐해가 어떠하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듣건대 각읍의 백성들이 대부분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병환이 나셔서 도내에 머물고 계시는데 진상하는 물품에 대하여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는가. 산 노루 같은 부류는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기어이 진상하고자 했기 때문에 날마다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니 얻기 어려운 폐단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물이 너무 많아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산 노루는 3일 간격으로 봉진하고 기타 물품도 적당량을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백관들에게 북쪽 탕에서 목욕하라고 하였다.

 

전 참판 신계영이, 노병(老病) 때문에 나아가 뵙지 못한다고 소를 올려 대죄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남양(南陽)에 우박이 내렸는데 비둘기 알만하였다.

 

4월 26일 임오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뵙기를 청하고 입시하여 아뢰기를,
"엊그제 심리 때에 도년형(徒年刑)은 모두 풀어 주었고 그 나머지는 미처 거론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문서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거둥하시는 날을 당하여 본도의 죄인을 너그러이 판결을 내리시면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문서를 써서 들이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거주민의 전토가 행궁의 담 안에 들어간 것이 무려 6결에 이릅니다. 이 밖에 사람과 말에 의해 짓밟힌 것이 역시 9결쯤 되며, 포장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 또한 10여 호가 있는데 모두 생업을 잃었다고 합니다. 대동미 수백 석이 지금 이 군에 있으니 만일 특별히 분부를 내리어 나누어 주게 하시면 백성들이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호위하는 여러 군사들이 종일 일이 없어 심지어는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으니 병이 날 지경입니다. 중일(中日)의 관례에 따라 활쏘기와 말타기 시험을 보인 다음에 병조에서 수송해온 목면을 그들에게 상주어 격려, 권장하게 하소서."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사복시에도 수송해 온 목면이 있으니, 이것을 잇대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에게 분부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도록 하고 환궁할 때도 호조로 하여금 강가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에 하교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 중 어떤 이는 그들의 집이 철거되었고 어떤 이는 그들의 집을 비워주고 한데서 지내고 있으며 또 포장 안팎의 전토를 많이 경작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몹시 딱하게 여기고 있다. 선혜청으로 하여금 먼저 쌀과 콩을 지급해주어 당장 호구할 수 있도록 하라."

 

사관을 보내어 우찬성 송시열과 대사헌 송준길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전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병 때문에 나와 뵙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를 올리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4월 27일 계미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릉(獻陵) 안에 있는 소나무에 벼락이 쳤다.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 2인이 병으로 죽었다. 상이 해조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고, 의관이 주의하여 구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겁게 추고하게 하였다.

 

4월 28일 갑신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문·무과의 정시(庭試)를 행궁 밖에서 시행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와 대제학 김수항은 문과를 맡고, 병조 판서 홍중보는 무과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호적에 들어 있지 않은 자와 어가를 수행한 백관과 도내의 수령들에게는 모두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어가를 수행한 무사들에게는 환도한 후에 따로 시험봐서 선발하라고 명하였다. 문과에서 홍우기(洪宇紀) 등 6인을 선발하였다.

 

4월 29일 을유

상이 온천의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본군 사람이 과거에 합격한 자가 없다는 것은 과거를 실시한 본래 의도가 아니라 하여, 차점으로 낙방한 자들의 시험지를 들여오라고 하였는데, 그 중 5인이 모두 온양 사람이었다. 상이 이들에게 모두 급제를 하사할 것을 명하자, 영의정 정태화와 대제학 김수항 등이, 규정을 벗어나 5인이나 급제를 하사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며 그 중에서 다시 가려 뽑기를 청하였다. 상이 그 말을 따라 조이병(趙爾炳)·선약봉(宣若奉)·임유(林濡) 등 3인에게만 급제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조명한(趙鳴漢)·신한선(申漢宣) 두 사람은 해조로 하여금 관직을 제수하게 하였다. 【뒤에 모두 재랑(齋郞)을 제수하였다.】 임유는 얼마 후에 호적을 위조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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