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4권, 현종 7년 1666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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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계축

호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대두는 1만 석인데 7천 석을 덜어내어 경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3천 석은 도민에게 나누어 줄 일로 이미 정탈하였습니다마는 3천 석은 너무 적은 듯하니 2천 석을 더 내어 제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강릉(江陵)의 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옥기(玉只)가 복주(伏誅)되었다. 강릉 백성 박귀남(朴貴男)은 아들 없이 단지 옥기(玉只)·연화(蓮花) 두 딸만 두었는데 귀남이 나쁜 병을 앓아 온 몸이 썩어서 문드러졌다. 귀남의 처 난개(難介)가 옥기와 옥기의 남편 말남 및 옥기의 아들 어둔금(於屯金)과 동모(同謀)하여 그 병이 집안에 전염될까 염려한 끝에 귀남을 결박하여 단지에 넣어가지고 산골짜기에 묻었다. 연화도 그의 남편 김기(金墍)와 함께 또한 같이 갔었다. 그 뒤 본읍의 향소(鄕所)에서 이 소문을 듣고 옥기와 말남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다음 이를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헌부가 뒤늦게 그 소문을 듣고 그때의 관리를 추고할 것을 청하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추관(推官)을 정하여 철저히 신문하게 했는데도 일이 오래도록 결단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난개·김기·연화 등은 자복하지 않은 채 죽었고 어둔금 등은 오래되어서야 이에 자복하였다. 경차관(敬差官) 박증휘(朴增輝)를 보내어 안문(按問)한 뒤 왕옥(王獄)으로 잡아오니, 삼성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옥기·어둔금이 아울러 복주되었으며, 강릉부을 현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를 원양도(原襄道)로 바꾸었다.

 

사간 정계주 등이 아뢰어 조적과 군포에 관한 포흠류에 관한 일들은 친부자 외에는 일족에게 침징하는 일을 허락하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3일 갑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일상은 약방 제조로 가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지금 이미 죽었으므로 본조에서는 재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가 있는가?"
하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고 판서 채유후가 죽은 후에 실록청 당상이라 하여 가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당시에 신이 본조에 몸담고 있었으므로 이 일로 앙품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추증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역시 이 예에 의하여 추증하라."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유후는 자헌(資憲)으로 숭정(崇政)에 증직되었지만 지금 일상은 관작이 정헌(正憲)이므로 만일 한 자급을 더하면 숭정이 됩니다. 유후의 전례와는 같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지금도 보국(輔國)에 한 자급을 뛰어 넘어 증직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보국은 실직을 증직한 것이 아니라 하여 의정(議政)을 증직하였다.

 

2월 5일 병진

소결청(疏決廳)을 설치하고 우의정 허적을 도제조로, 이상진(李尙眞)·이경휘(李慶徽)·김수흥(金壽興)·정만화(鄭萬和)를 당상으로 삼았다.

 

2월 7일 무오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교리로 삼았다.

 

헌납 최일(崔逸)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동료가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이영(宋以穎)이 잘 다스리지 못하는 정상에 대해 신에게 말하기에 상의하여 탄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물의를 듣건대, 억울하다고 말하고 남쪽에서 온 사부(士夫)들도 그가 잘 다스린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이 일을 논함에 있어 경솔하게 처리한 실책이 드러났습니다."
하고, 사간 정계주가 아뢰기를,
"송이영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에 신이 지난번 동료와 함께 상의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했습니다. 그 당시 동료가 신이 들은 것이 명백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면서 지금 사실과 어긋난다는 것으로 와서 피혐하니, 이는 모두 신이 경시당한 소치입니다."
하고, 모두 인혐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이경억(李慶億)이 처치하여 최일을 출사시키고 정계주는 체차시키게 하였는데, 최일이 다시 동료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이경억도 처치를 잘못하여 비난하는 물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장령 맹주서가 모두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강화(江華)의 덕포진(德浦鎭)을 통진(通津)으로, 철곶진(鐵串鎭)을 풍덕(豊德)으로, 정포진(井浦鎭)을 교동(喬桐)으로 옮기고, 가까운 고을의 육군(陸軍) 3백 15인을 세 진(鎭)에 나누어 주었다.

 

2월 10일 신유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을 헌납으로, 이혜(李嵆)·이동직(李東稷)을 정언으로, 이숙(李䎘)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렇게 재변을 만난 때를 당하여 문·무과(文武科)의 방방(放榜)이 있은 뒤 잔치를 베풀거나 유가(遊街)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일체 금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언사 낭청 및 전라 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하는 공사를 실로 경솔하게 거론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먼저 정지하자는 뜻으로 본도에 행회하여 제방의 안에 사는 백성들의 의구심을 안정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1일 임술

헌납 이동명이 전에 강릉 부사로 있을 때에 경내에 강상의 변이 있었는데 미처 살피지 못한 것 때문에 현재 신문에 대비하고 있다고 하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 판서 홍중보, 예조 판서 박장원, 공조 판서 이완, 행 부호군 이경억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조조 때 내가 원손으로 책례를 행할 적에 흑관(黑冠)을 쓰고 행례했는데 지금은 무슨 복색으로 해야 하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의당 장복(章服)으로 행례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중종조 때 인종이 책례를 행할 적에 처음에는 동자(童子)가 쓰는 관을 썼다가 책례를 끝낸 뒤 정식 관례를 추후 행했다고 한다. 《중종실록》을 조사하여 보면 책례와 관례의 선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책례 때에는 우선 평천관(平天冠)으로 행하고, 관례는 추후에 행하는 것이 온편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례는 우선 거행하지 말라. 복색은 비록 책례 때는 아니지만 내가 기축년003)  에 보양관에게 수학(受學)할 적에 곤룡포를 입었다."
하니, 장원이 아뢰기를,
"인종 대왕의 관례와 책례의 선후를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만,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는 열성들의 행장(行狀)을 상고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사해 본 뒤 품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청산 현감(靑山縣監) 허흠(許欽)을 조율한 공사를 가지고 홍중보에게 이르기를,
"창고에 화재가 발생한 경우에는 장 1백 도 2년에 처하는 것은 이것이 합당한 율이므로 단지 율에 의하여 시행해야 하는데 이에 공죄(公罪)에 속전(贖錢)을 내는 것으로 조감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수령 재임기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실정이 아닌 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전서부터 공죄로 조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읍쉬에 대하여 원한을 갖는 관리나 백성이 고의로 변을 짓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이와 같은 유는 다만 법률로 조감하되 공죄로 속전을 받는 경우에는 전교를 받아 들여서 기록하여 영원히 정식으로 삼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상이 또 한성부 호적의 일로 이경억에게 지목하여 이르기를,
"이 사목에 미진한 곳이 있다. 입적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인데 어떤 사람은 전가 사변하고 어떤 사람은 수군에 충정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경억이 아뢰기를,
"수군(水軍)이 가장 고역인데 사천(私賤)에 이르러서는 수군에 충정할 수 없으므로 전가의 율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군에 충정하지 말고 전가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억이 아뢰기를,
"옛날에 호적을 작성할 때에는 호구에 따라 성급(成給)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지금 거듭 이 법을 밝혀서 한성부로 하여금 묘당에 나아가 의논하여 절목을 마련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문서는 간략하게 해야만 거행하기에 편리합니다. 청컨대, 호적 사목 중에 나아가 이상진의 장계와 이경억이 계문한 것을 번거로운 글들은 삭제하고 사목을 작성하여 호적에 누락된 자들은 전가 사변하고 사송한 자들은 먼저 호적을 고찰한 후에 청리하도록 하소서. 만일 호적에 누락된 자들은 접송을 허락하지 말고 먼저 호적에 누락된 죄를 다스리고 크고 작은 죄범들도 응당 조율할 자들을 반드시 먼저 호구(戶口)를 고찰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원주(原州) 유생 권국형(權國衡)은 감시 초시에 입격한 후에 한성부가 호적 대장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방하였는데, 지금 들어보니, 국형은 실지로 입적되었다고 합니다. 예조로 하여금 진시 공문(陳試公文)을 지급하도록 허락하고 한성부의 해당 관원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중보가 아뢰기를,
"충의위(忠義衛)에 허위로 예속된 자들을 지금 조사해 내고 있는데 비록 허위로 예속되지 않았더라도 만약 호적에 기입되지 않았으면 삭제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호적에 누락된 자들은 거기에 상응하는 율이 있는데 어찌 삭제할 뿐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입적(入籍)하지 아니한 자와 허위로 예속된 자들은 모두 군역에 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강상의 변이 자주 일어나고 있어 수령이 연좌되어 파직된 자들이 심히 많습니다. 이 일을 법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 수령을 파하는 경우에는 백성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지금 변괴가 발생했을 때의 수령은 연좌시키지 아니하고 옥사가 이루어졌을 때의 수령을 파직시키고 있습니다. 고 공산 현감(公山縣監) 박지(朴贄)와 강릉 부사(江陵府使) 강유(姜瑜)는 모두 옥사가 이루어졌을 때의 수령으로 연좌되어 파직되었습니다. 강유의 경우는 경차관이 내려갈 때에 경우 임지에 도착하였는데 역시 파직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변이 발생했을 때의 수령을 파직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소결한 문서를 지금 조사해보니 이는 계묘년 7월에 올려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전가 사변한 유들이 역시 많았는데 지금 일체로 조사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묘년 후로 전가 사변한 유들을 아울러 조사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오두인(吳斗寅)의 말에, 두 대비전(大妃殿)께서 궁녀를 선입(選入)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내가 상세히 들어보니 실은 이런 일이 없었다. 양전(兩殿)의 일은 나의 궐실(闕失)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상세히 살펴야 할 터인데 지금 범범하게 소문만 듣고 그대로 진달하였으니, 어찌 사체에 손상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만일 이를 가지고 그르다고 한다면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무엇을 연유하여 진계(進戒)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어떤 사람이 뜬말을 만들어 두인의 귀에 들리게 한 것일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설사 조작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언근(言根)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평안도 박천(博川) 땅에 눈이 내렸는데 빛깔이 황적색이었으며 안주(安州)·숙천(肅川)·태천(泰川) 등지에도 적색의 눈이 내렸다.

 

2월 12일 계해

승지 김우석(金禹錫)이 아뢰었다.
"신이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는 열성(列聖)의 행장을 조사하여 보니, 인종은 6세 때 중조(中朝)에 책봉(冊封)을 청하고 8세에 관례(冠禮)를 행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의거해 살펴 본다면 관례는 책례 뒤에 있었습니다."

 

예조가 아뢰기를,
"인종 대왕이 먼저 책례를 행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마는, 지금은 단지 책례 길일만 다시 가려서 들여야 합니까? 그날 대신이, 관례를 만일 물려 행한다면 이전에 관례의 길일로 잡았던 5월 6일로 책례를 진정(進定)해야 한다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성명을 내리지 않으시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진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2월 13일 갑자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윤경교(尹敬敎)를 검열로, 최관(崔寬)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이유 등이 아뢰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유정(柳頲)은 관직에 있으면서 일처리를 멋대로 하였습니다. 본주의 관사를 중수할 때에 선혜청에서 예산에 의한 쌀을 지급해 주자 스스로 힘써 일해보겠다고 하고서 본청에 돌려 보냈습니다. 적곡을 분급할 즈음에 농민이 관문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자를 이름에 따라 호되게 부려 여러 날 동안 지체시켜 놓으니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본주에서 부역을 면제시켜 주는 일에 이르러 매결마다 12두로 거두는 잘못된 규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숙(稅菽)을 견감시켜 주는 날을 당하여 10두를 민간에 대신 내게 하니 원망이 날마다 심하고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이와 같이 기능을 과시하면서 원망을 모으는 사람을 하루라도 관직에 있게 하여 거듭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쳐서는 안 됩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누차 아뢴 뒤에야 따랐다.

 

전 집의 윤선거가 상소하기를,
"신이 전부터 여러 번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모두 저에게 있어서는 감히 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문득 소장을 진달하여 번거롭게 호소하였습니다.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죄려를 기다렸는데, 또 천만 뜻밖에 전에 없었던 은총을 거듭 받게 되었습니다. 부르시는 명이 특별히 성상의 마음에서 나와 윤음을 먼 곳에 내리시니 말뜻이 정녕하셨습니다. 심지어 경연에서 강론하는 것과 원자를 보도하는 책임을 신에게 맡기시고 이어서 도신에게 비지를 진달하여 유시하시고 반복하여 하유하셔서 마치 다시 하사하신 듯하니 신이 받들어 읽고 돌아오자 놀랍고 아찔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본래 하찮고 망령스러운 하류인데 선조가 그릇 수록(收錄)하셔서 선비를 부른 예로 대우하기까지 하셨으니 신은 저도 모르게 놀랍고 두려워서 대궐에 나아가 정상을 진달하고 물러왔습니다. 선왕이 재촉하여 부르셨으나 끝내 단지 죽을 죄를 자청하고 다시 다른 말이 없었던 것은 진실로 헛된 이름으로 원래 그 실상이 없었으니 비록 나아가서 헌신한다 하더라도 강할 만한 학문이 없으며 시행할 만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본정은 이러한 데 불과합니다. 헛되이 선조의 망극한 은혜를 받아 사생간에 보답할 길이 없게 되었으니 신이 평생에 우리 임금을 속인 죄는 비록 만 번이나 죽임을 당하더라도 역시 허물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선조의 은혜를 받은 인물로 삼아 매번 여러 유신들을 불러 신문할 때에 반드시 신을 그 말단에 소속시켰습니다. 신이 사양해도 면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득이 사죄라는 두 글자로 외람된 상소를 할 뿐입니다. 이는 한갓 신의 마음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만한 듯하고 거짓스러우며 정성스럽지 못하고 공경하지 아니하다는 꾸지람이 사면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이 방황하며 조심하여 바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부분입니다.
국가의 휴척 문제를 도리상 나 몰라라 하기 어렵다는 전교에 이르러서는 신이 진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대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하늘의 재해와 시절의 변괴가 화란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걱정한다는 비유는, 옛 사람이 이미 그렇게 한 것으로,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어찌 유독 나라를 걱정하는 구구한 정성이 없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어리석음과 지혜는 분수가 다르나 일에 응하는 데는 무궁하니 하늘과 사람의 즈음에 성패에 관한 계산은 사람마다 함부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법(死法)을 철습하여 대음(大音)을 망령스레 바라는 것은 신이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겨울 상소 중에 이미 이러한 뜻을 전달하였으니 성명께서 반드시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전에 이미 억지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뒤에 어찌 스스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또 말을 감히 망발하지 못하는데 몸을 어찌 억지로 하겠습니까. 몸에 미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신이 비록 분의의 책임을 면하고자 하나 그 형세가 또한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아, 종묘 사직은 복이 많아 원자가 영특하시니 책례를 장차 행하게 되자 중외가 모두 기뻐하고 사해의 내에 생명체들은 모두가 같은 하늘 아래 사는 경사를 보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신이 마치 이 즈음에 부르는 명을 받게 되어 만약 신으로 하여금 오히려 주연(冑筵)의 말석에 참여하고 명덕의 뒤에 참여하게 한다면 신이 목석이 아닌데 어찌 차마 잠자코 있어서 죽어도 사피하여 그칠 줄을 모르겠습니까.
진실로 원하건대, 저를 굽어 살피시어 속히 요속의 명단에서 신을 삭제하시고 그릇된 은혜를 아주 끊으셔서 다시는 거론하지 않게 하소서. 비단 신을 위한 길일 뿐만 아니라 국가 사체에 있어서도 실로 관련된 것이 큽니다. 신이 사양했던 식물의 하사에 대해서도 역시 신이 예를 갖추어 형식적으로 사양한 것이 아닙니다. 예에 이르기를 ‘존귀한 분이 하사한 것은 비천한 자가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임금이 하사한 것을 신하가 비록 마음에 편치 못하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사양할 계책을 하겠습니까. 지금 거듭 명령을 내리신 데 미쳐서 더욱 다시 장황한 말을 진달해서는 안 됩니다. 속히 불공하다는 주벌을 내리소서.
그러나 옛사람이 재차 삼차 사양한 예가 있었는데 신이 어찌 유독 지레 줄여서 스스로 다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또 이른바 두루한다는 의미는 마땅히 굶주린 백성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므로 신이 지난번 상소에 신은 삼가 굶주리는 현상이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옛날에 간혹 세시(歲時)에는 장로(長老)에게 하문하는 일이 있었으나 신의 나이가 팔구십에 이르지 않았으니 또한 감히 장로의 항렬에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 장차 무슨 명목으로 감히 이 하사품을 받겠습니까. 지금 흉년이 거듭 들어 백성이 살아갈 수 없는데 신만 유독 사체를 부지런히 하지 아니하니 죽그릇을 든 승려와 같습니다. 어려움이 눈에 넘치고 대소신하들이 위험을 느끼는데 신만 유독 편안히 엎드려서 구차하게 조석의 안일함만 훔치고 있으니 참으로 요행한 백성이라 하겠습니다. 신은 영광스러운 은혜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백성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끝내 편히 여길 수가 없어서 머리를 들어 천일지하(天日之下)에 다시 호소하노니 성명께서는 아울러 살피셔서 먼저 신에게 내린 식물의 지급을 거두시고 뒤에 신의 위만한 죄를 다스려서 법의(法義)를 밝힘으로써 공사간에 다행스럽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받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4일 을축

사방이 어둡고 누른 빛이 땅을 비추었다. 이어 눈이 내렸는데 먼지가 있었다.

 

홍처대를 승지로 삼았다.

 

대사헌 이경억이 추감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사은 정사 청평위 심익현과 부사 김시진과 서장관 성후설이 청나라에 갔다.

 

2월 15일 병인

달이 태미원으로 들어갔다.

 

2월 16일 정묘

동부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해조가 전라 감사의 장례로 인하여 양안에 주인이 없는 밭으로 민간이 경작하던 것을 비록 문권(文券)이 없더라도 입안(立案)하여 한결같이 실의(實宜)에 따라 전안을 만들어 시행하자는 뜻으로 회계하였는데 문권의 유무에 따라 결급하라고 판하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놀리고 있는 전토는 국가가 이미 백성들에게 경작하도록 허락한 것이므로 경작하던 백성들은 후일에 빼앗길 것을 예기치 않았으므로 입안을 낸 자가 드뭅니다. 여러 해 동안 세금을 내고 대대로 서로 전해온 후에 문권이 없다는 이유로 빼앗는다면 백성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대체로 문권이 있는 지의 여부로 문제를 삼는 것은 이는 갑과 을이 쟁송할 때에 판결하는 예인 것이니 여기에 적용할 것이 아닙니다. 궁가가 떼어받기 전에 사람마다 모두 경작하였으니 궁가가 떼어받은 것이 그 뒤에 있었다면 마땅히 경작하는 백성에게 예속시켜 주어야 하고 궁가에 들이지 않는 것이 사리에 당연합니다. 시기로 결정하여 전안을 작성하는 것이 실로 타당하나 성교가 이와 같으시니 백성들이 실망할까 매우 두렵습니다. 감히 판부한 것을 봉하여 다시 드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진년 이후에 주인없는 밭이라 하여 떼어받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 그 사이에 또한 어찌 먼저 개간한 자가 없겠는가마는 혁파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갑술년과 거리가 40년이 지나지 않았으니 ‘여러 세대가 서로 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혁파했다고 이른다면 오히려 가하지만 가만히 명목을 지어서 혁파하려 하고 있으니, 그것을 나는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2월 18일 기사

상이 종기가 나서 밤에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2월 19일 경오

조복양을 대사헌으로, 홍처후를 판결사로 삼았다.

 

상이 뜸을 떴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정언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공조 정랑 김수홍(金壽弘)이 사설(邪說)을 창도하여 망령되이 조정에서 이미 정한 대례(大禮)를 논의하면서 문자를 지어 사람들에게 돌려 보이며 시비(是非)를 현란시킬 계책을 부리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무상(無狀)하여 진실로 책할 가치조차도 없습니다만 조의(造意)가 음험하여 또한 괴이한 논의를 하는 자들이 구실로 삼을 수 있는 자료가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런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사판(仕版)에서 삭거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 김수홍이 이상(二相) 송시열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추생(鯫生)004)  은 초토(草土)005)  에서 3년을 있으면서 모진 목숨이 죽지 않고 부지되어 대략 예의의 깊은 뜻을 섭렵하였는데 혹 엿볼 만한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기해년006)   대상(大喪)이 있은 이후 상복에 관한 의례(議禮)의 소장과 제재(諸宰)들이 헌의한 글을 모아서 상하를 열람한 것이 어찌 한두 번만 되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서로 제재했기 때문에 대왕 대비의 삼년 복제에 대해 통변(洞辯)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정례(正禮)를 어기게 됨으로써 군상(君上) 부자(父子)의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큰 예를 시종 폐기하고 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막혀 지붕을 바라보며 긴 탄식을 자아냅니다.
《예기》 예운편(禮運篇)에 공자가 말하기를 ‘대저 예는 선왕이 천도를 받들며 인정을 다스렸던 것이므로 이를 어기는 자는 죽고 이를 어기지 않는 자는 산다. 《시경》에 이르기를 「쥐에게도 사체(四體)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가 없을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서 예가 없다면 어찌 일찍 죽지 않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예는 반드시 하늘에 근본하고 땅을 본받고 귀신에게 행해지고 상제(喪制)에 통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예를 보이셨으니, 천하 국가를 바룰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부자(夫子)의 말씀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예의 득실(得失)을 가지고 사람의 사생(死生)과 국가의 안위(安危)에 대해 경계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에서 이 대례(大禮)에 대해 노력했는데도 정례(正禮)를 찾지 못한 것인지, 당초 생각하지 않아 정례를 찾지 못해서 사람들이 모르고 그르다고 하는 것인지, 정례를 어겼다는 것을 알고서 의심하는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오복(五服)의 제도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적용해서 행하는 것이 오로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혹 명위(名位)와 존비(尊卑)에 잘못된 점이 있어 3년의 대례를 폐기하고 거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는 실로 일국 상하의 지극한 슬픔이니 마땅히 먹을 때나 쉴 때나 항상 잊지 않고 분명히 해명하여 올바르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잘못된 복제에 대해서야 지금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명위(名位)가 문란하게 된 것을 추후 바로잡는 것은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성인이 말하기를, ‘경솔히 예에 대해 의논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같이 천박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막중한 대례를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선각자에게 질의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바루지 않으면 도(道)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므로 단순한 견해를 진달하겠습니다. 첫머리에는 합하께서 헌의하면서 취사한 것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하고, 다음에는 경전에서 변별한 명문(明文)을 초기(抄記)하였으며, 끝에는 고금의 득실에 대한 논란을 붙였습니다. 비록 교제는 얕은데 말은 깊다는 경계를 범하는 것입니다만 이는 실로 나라를 위하고 예를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조처이니, 합하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하는 헌의한 말에 대해 조목별로 열거한 것이다.】 첫째는 ‘지금 허목(許穆)의 소장에서 인증한 것이 많기는 하나 긴요한 부분은 단지 두 개의 단락입니다. 그 하나는,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이고, 그 또 하나는 서자가 후사(後嗣)가 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이는 첩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종통(宗統)은 둘이 될 수 없고 참최복은 두 번 입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 어떠합니까.’ 하였으며, 또 ‘주공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鄭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만,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러 비로소 이 말이 있었습니다. 가공언은 명유(名儒)이고 또 황면재(黃勉齋)가 《통해(通解)》의 속편에 거두어 입록(入錄)했으니 어떻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으니 그 말이 과연 허목이 말한 것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서자란 진실로 첩자를 말하는 것이나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함께 서자라고 명명한다.」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을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서(庶)는 천칭이 아니라 중자(衆子)의 뜻인 것입니다. 예경을 상고하여 보면 이런 유가 매우 많습니다.’ 하였으며, 또 ‘그리고 소의 이야기에서 이미 「차장을 세웠을 경우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고는, 그 밑에 또 「서자가 승중(承重)했으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이설(二說)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때문에 허목이 기필코 서자를 첩자라고 하면서 차장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반드시 차자가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얻은 연후에야 허목의 말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또 한 가지 말이 있습니다. 가공언의 소에서는 단지 제일자(第一子)가 죽은 데 대해서만 말을 했고, 제일자가 후사가 없이 죽은 데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죽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긴요한 곳인데 지금 허목의 이야기는 입문(立文)의 본의를 상세히 고증하지 않고서 갑자기 입설(立說)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단궁(檀弓)과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007)  가 과연 모두 돌아보기에 부족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인정과 사세로 미루어 보라도 장자가 성인이 되어서 죽었는데 차장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비된 자가 한 몸에 참최복을 입게 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또 경전의 글을 초기(抄記)한 것이 아래와 같다.】  《의례》 참최장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경문에 대해 정현이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하게 해서 한 말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 해석하기를 ‘정현이 말한 것은 장자만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冢子)도 또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에 이르기를 「총자는 장자라고 말한 것과 같아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적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할 경우는 제일자에게만 해당되나, 장자라고 말하게 되면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점도 통해지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전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정·체(正體)가 되고 또 이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서자는 장자처럼 삼년복이 되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했는데, 정(鄭)주(註)에 ‘서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말한 것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는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해 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할아버지를 계승해야 이에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고 적처 소생인 제이자는 이것이 중자(衆子)인데 이제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장자와 원별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첩자와 호칭이 같은 것이다.’ 했고, 또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체(正體)이되 전중할 수 없는 경우인데 이는 적자가 폐질이 있어 종묘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둘째는 전중은 했지만 정·체가 아닌 경우로 서손을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부정인 경우로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고, 넷째는 정이불체로 적손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에 ‘제후 별자(別子)의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에 유해손(劉垓孫) 선생이, 제사에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써야만이 법방(法方)이 문란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고, 또 ‘종자는 적자만 세울 수 있다. 따라서 서장(庶長)은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또한 서자를 세울 수 있는데 이른바 세자의 동모제를 말하는 것으로 세자는 바로 적자인 것이다.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適)인 것으로 서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자최 삼년장의 경문에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소에 해석하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자최복을 입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다.’ 했습니다. 전에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가 낮추지 않은 것을 어머니 또한 감히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했고, 정주에 ‘감히 낮출 수 없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높다는 것으로 조녜(祖禰)의 정체(正體)에 대해 낮출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례》 춘관의 경문에 ‘소종백(小宗伯)의 직책은 삼족의 분별을 관장하여 친소를 분변하는 것인데 정실(正室)을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 했는데, 그 주에 ‘정실은 적자이고, 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을 담당하는 아들이란 뜻이다.’ 했습니다.  《예기》 증자문에 ‘증자가 묻기를 「종자(宗子)는 사(士)가 되고 서자(庶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면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생(上牲)으로 종자의 집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축에는 효자 아무가 개자(介子) 아무를 위하여 상사(常事)를 올린다고 써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효자는 종자를 말하고 개자는 서자를 말한다. 서(庶)라고 하지 않고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는 비천한 칭호이고 개는 부이(副貳)의 뜻이니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이다.’ 하였습니다.  《의례》 참최장의 경문에 ‘남의 후사가 된 자’라고 했고, 전에는 ‘어떻게 해야 남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동종인 경우에는 지자가 가합하다.’ 했으며, 소에 해석하기를 ‘다른 집의 적자는 다른 집의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지자를 취하는 것인데 지자는 제이 이하의 서자인 것이다. 서자라고 말하지 않고 지자라고 말한 것은 서자라고 말하면 첩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庶)를 바꾸어 지(支)라고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예기》 내칙에 ‘적자와 서자는 외침에서 만나는데 임금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방긋 웃게 한 다음 이름을 지어준다.’ 했는데, 그 주에 ‘여기의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하였고, 방씨(方氏)는 ‘세자는 노침(路寢)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의례》 자최 부장기장의 경문에 ‘대부의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대부의 첩자이기 때문에 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적처 소생의 둘째 이하라면 당연히 곧바로 곤제라고 할 것이요 서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시마삼월장의 경문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총자·적자가 없고 첩자만 있는 경우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서자가 후사를 승계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해 시마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했습니다.  주문공  《가례》 팔모도(八母圖)에 ‘서모’라고 한 데 대한 주에 ‘서모는 아버지의 첩이다.’ 했습니다.  《서전》 미자편의 편제에 ‘미자(微子)의 이름은 계(啓)인데 제을(帝乙)의 장자이고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이다.’ 했습니다.  《논어》 미자편에 ‘미자는 떠나갔다.’ 한 주에 ‘미자는 주의 서형이다.’ 하였고, 소주에 이르기를 ‘《사기》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미자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춘추》의 경문에 ‘태묘에 큰 일이 있었는데 희공(僖公)을 제승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에 ‘희공은 민공(閔公)의 서형이다.’고 했습니다.  《예기》 상복소기에 ‘왕자가 시조의 소자출(所自出)에게 체제(禘祭)를 지낼 적에 시조를 배향하여 사묘를 세우는데 서자인 왕도 또한 이렇게 한다.’ 했는데, 그 주에 ‘세자에게 폐질이 있어 후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서자를 세워 왕으로 삼은 경우인데 그때의 예제(禮制)도 세자가 하는 것과 같다.’ 했으며, 산음 육씨(山陰陸氏)는 말하기를 ‘한나라의 효문제(孝文帝)가 효혜제(孝惠帝)를 계승한 것이 적자로서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를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경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서자로서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서자왕(庶子王)이 된 연후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끝에는 고금을 참작해서 논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 제이적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에 대하여는 동모제요, 차적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가 전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로서 전중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에게만 의거하나, 장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의 주에는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 세자의 아우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이 경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의 적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가 서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자이고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의 전, 정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에서는 ‘주공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를 장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은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과 자하의 전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정자가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니, 대저 《대학》의 경일장의 주에 ‘증자의 뜻인데 문인이 기록했다.’는 유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내용을 따라가 소자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의 전문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인 ‘장자가 죽으면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주공과 공자도 적·서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선비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 이하는 장자와 원별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을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경전에서 서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공자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집니다. 귀천을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해 보자면, 정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가 공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효자로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는 지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에 ‘세자·적자·서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를 내어 44편의 수편에다 올려 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은 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는 《가례》에서 아버지의 첩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의 서형인 미자에 대해서는 《논어》의 주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의 서모형과 노 희공(魯僖公)의 서형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에 통용하였는데 주설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융쇄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자가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의 서자는 헌의에서 이른바 예경에 이런 유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이 세자의 지위에 있고 효묘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묘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種)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이니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이라는 글이 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경》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 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해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인 차장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하는 천칭을 취택한 것이 존비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에 의거해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임금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송·명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인 이도 있었고 서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로 전중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 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의 상복에 대한 복제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으로 해서 변복하기도 하고 복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 두세 번째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했으며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차장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차장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의 자연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을 궁구해 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한 서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을 존몰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이 일관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이 《의례》의 경문에 입언하기를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가 ‘정·체로서 전중한 것이다.’고 전을 내고, 정현은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을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천만고 동안 우주의 치란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께서 효묘의 상에 삼년 자최를 입는 것은 경전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가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이 얼음 녹듯이 풀릴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군신의 명위와 존비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김수홍의 말을 안찰하건대, 그 말이 만언에 가까우나 허목과 윤선도의 여론을 주워 모은데 불과하다. 그 사람은 본래 용렬하고 그 말은 기록할 것이 없으나 그것이 결국 후일 화를 불러 일으킨 계재가 되었으므로 그 전문(全文)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당시에 예를 의론한 자들이 비록 많으나 논쟁한 것은 서(庶)라고 하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오직 권시(權諰)가 이르기를 ‘오늘날 인용한 경전은 모두 선비들이 행하는 예이다.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비록 첩자(妾子)라 하더라도 대통(大統)을 이었으면 적모(嫡母)가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니, 이것이 비록 고례에는 근거할 데가 없으나 마땅히 의리로 발론한 것이다. 윤휴(尹鑴)가 신하가 임금을 위한 상을 주창하였는데 심지어 《강목(綱目)》에 원위 풍씨(瑪氏)가 그 임금을 죽였다는 기사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으니 비록 평소에 윤휴의 당을 한 자도 그 말을 옳다고 하지 않았는데 유독 윤선거만 끝내 그 학설을 주장하였고 항상 말하기를 예를 의논할 때면 마땅히 희중(希仲)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희중은 윤휴의 자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8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衣生活) / 가족(家族) / 출판-서책(書冊)


[註 004] 추생(鯫生) : 자기의 겸칭.[註 005] 초토(草土) : 상중(喪中)을 뜻함.[註 006]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註 007] 단궁(檀弓)과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 : 단궁의 문은, 옛날 공의 중자(公儀仲子)가 적자의 상을 당했을 때 적손을 버리고 서자를 후사로 삼자 단궁이 이를 기롱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상관(喪冠)인 문(免)을 쓰고 가서 조문했던 것을 말함. 자유의 최는, 옛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초상에 자유가 친구 사이에 조문하는 예에 벗어나는 최마복을 하고 조문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혜자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기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임.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
첫째는 ‘지금 허목(許穆)의 소장에서 인증한 것이 많기는 하나 긴요한 부분은 단지 두 개의 단락입니다. 그 하나는, 장자(長子)가 죽으면 제이장자(第二長者)를 세우고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이고, 그 또 하나는 서자가 후사(後嗣)가 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데 이는 첩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종통(宗統)은 둘이 될 수 없고 참최복은 두 번 입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 어떠합니까.’ 하였으며, 또 ‘주공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鄭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만,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러 비로소 이 말이 있었습니다. 가공언은 명유(名儒)이고 또 황면재(黃勉齋)가 《통해(通解)》의 속편에 거두어 입록(入錄)했으니 어떻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으니 그 말이 과연 허목이 말한 것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른바 서자란 진실로 첩자를 말하는 것이나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同母弟)라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함께 서자라고 명명한다.」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을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서(庶)는 천칭이 아니라 중자(衆子)의 뜻인 것입니다. 예경을 상고하여 보면 이런 유가 매우 많습니다.’ 하였으며, 또 ‘그리고 소의 이야기에서 이미 「차장을 세웠을 경우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고는, 그 밑에 또 「서자가 승중(承重)했으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이설(二說)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때문에 허목이 기필코 서자를 첩자라고 하면서 차장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반드시 차자가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얻은 연후에야 허목의 말을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또 한 가지 말이 있습니다. 가공언의 소에서는 단지 제일자(第一子)가 죽은 데 대해서만 말을 했고, 제일자가 후사가 없이 죽은 데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죽은 경우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긴요한 곳인데 지금 허목의 이야기는 입문(立文)의 본의를 상세히 고증하지 않고서 갑자기 입설(立說)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단궁(檀弓)과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007)  가 과연 모두 돌아보기에 부족한 것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인정과 사세로 미루어 보라도 장자가 성인이 되어서 죽었는데 차장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비된 자가 한 몸에 참최복을 입게 되는 횟수가 너무 많은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또 경전의 글을 초기(抄記)한 것이 아래와 같다.】  《의례》 참최장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경문에 대해 정현이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하게 해서 한 말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 해석하기를 ‘정현이 말한 것은 장자만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冢子)도 또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에 이르기를 「총자는 장자라고 말한 것과 같아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적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할 경우는 제일자에게만 해당되나, 장자라고 말하게 되면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점도 통해지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전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정·체(正體)가 되고 또 이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서자는 장자처럼 삼년복이 되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했는데, 정(鄭)주(註)에 ‘서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말한 것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는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해 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할아버지를 계승해야 이에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고 적처 소생인 제이자는 이것이 중자(衆子)인데 이제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장자와 원별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첩자와 호칭이 같은 것이다.’ 했고, 또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체(正體)이되 전중할 수 없는 경우인데 이는 적자가 폐질이 있어 종묘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둘째는 전중은 했지만 정·체가 아닌 경우로 서손을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부정인 경우로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고, 넷째는 정이불체로 적손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에 ‘제후 별자(別子)의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에 유해손(劉垓孫) 선생이, 제사에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써야만이 법방(法方)이 문란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고, 또 ‘종자는 적자만 세울 수 있다. 따라서 서장(庶長)은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또한 서자를 세울 수 있는데 이른바 세자의 동모제를 말하는 것으로 세자는 바로 적자인 것이다.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適)인 것으로 서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자최 삼년장의 경문에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소에 해석하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자최복을 입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다.’ 했습니다. 전에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가 낮추지 않은 것을 어머니 또한 감히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했고, 정주에 ‘감히 낮출 수 없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높다는 것으로 조녜(祖禰)의 정체(正體)에 대해 낮출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례》 춘관의 경문에 ‘소종백(小宗伯)의 직책은 삼족의 분별을 관장하여 친소를 분변하는 것인데 정실(正室)을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 했는데, 그 주에 ‘정실은 적자이고, 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을 담당하는 아들이란 뜻이다.’ 했습니다.  《예기》 증자문에 ‘증자가 묻기를 「종자(宗子)는 사(士)가 되고 서자(庶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면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생(上牲)으로 종자의 집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축에는 효자 아무가 개자(介子) 아무를 위하여 상사(常事)를 올린다고 써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효자는 종자를 말하고 개자는 서자를 말한다. 서(庶)라고 하지 않고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는 비천한 칭호이고 개는 부이(副貳)의 뜻이니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이다.’ 하였습니다.  《의례》 참최장의 경문에 ‘남의 후사가 된 자’라고 했고, 전에는 ‘어떻게 해야 남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동종인 경우에는 지자가 가합하다.’ 했으며, 소에 해석하기를 ‘다른 집의 적자는 다른 집의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지자를 취하는 것인데 지자는 제이 이하의 서자인 것이다. 서자라고 말하지 않고 지자라고 말한 것은 서자라고 말하면 첩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庶)를 바꾸어 지(支)라고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예기》 내칙에 ‘적자와 서자는 외침에서 만나는데 임금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방긋 웃게 한 다음 이름을 지어준다.’ 했는데, 그 주에 ‘여기의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하였고, 방씨(方氏)는 ‘세자는 노침(路寢)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의례》 자최 부장기장의 경문에 ‘대부의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대부의 첩자이기 때문에 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적처 소생의 둘째 이하라면 당연히 곧바로 곤제라고 할 것이요 서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시마삼월장의 경문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총자·적자가 없고 첩자만 있는 경우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서자가 후사를 승계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해 시마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했습니다.  주문공  《가례》 팔모도(八母圖)에 ‘서모’라고 한 데 대한 주에 ‘서모는 아버지의 첩이다.’ 했습니다.  《서전》 미자편의 편제에 ‘미자(微子)의 이름은 계(啓)인데 제을(帝乙)의 장자이고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이다.’ 했습니다.  《논어》 미자편에 ‘미자는 떠나갔다.’ 한 주에 ‘미자는 주의 서형이다.’ 하였고, 소주에 이르기를 ‘《사기》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미자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춘추》의 경문에 ‘태묘에 큰 일이 있었는데 희공(僖公)을 제승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에 ‘희공은 민공(閔公)의 서형이다.’고 했습니다.  《예기》 상복소기에 ‘왕자가 시조의 소자출(所自出)에게 체제(禘祭)를 지낼 적에 시조를 배향하여 사묘를 세우는데 서자인 왕도 또한 이렇게 한다.’ 했는데, 그 주에 ‘세자에게 폐질이 있어 후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서자를 세워 왕으로 삼은 경우인데 그때의 예제(禮制)도 세자가 하는 것과 같다.’ 했으며, 산음 육씨(山陰陸氏)는 말하기를 ‘한나라의 효문제(孝文帝)가 효혜제(孝惠帝)를 계승한 것이 적자로서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를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경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서자로서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서자왕(庶子王)이 된 연후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끝에는 고금을 참작해서 논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 제이적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에 대하여는 동모제요, 차적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가 전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로서 전중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에게만 의거하나, 장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의 주에는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 세자의 아우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이 경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의 적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가 서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자이고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의 전, 정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에서는 ‘주공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를 장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은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과 자하의 전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정자가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니, 대저 《대학》의 경일장의 주에 ‘증자의 뜻인데 문인이 기록했다.’는 유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내용을 따라가 소자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의 전문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인 ‘장자가 죽으면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주공과 공자도 적·서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선비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 이하는 장자와 원별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을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경전에서 서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공자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집니다. 귀천을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해 보자면, 정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가 공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효자로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는 지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에 ‘세자·적자·서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를 내어 44편의 수편에다 올려 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은 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는 《가례》에서 아버지의 첩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의 서형인 미자에 대해서는 《논어》의 주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의 서모형과 노 희공(魯僖公)의 서형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에 통용하였는데 주설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융쇄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자가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의 서자는 헌의에서 이른바 예경에 이런 유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이 세자의 지위에 있고 효묘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묘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種)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이니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이라는 글이 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경》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 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해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인 차장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하는 천칭을 취택한 것이 존비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에 의거해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임금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송·명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인 이도 있었고 서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로 전중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 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의 상복에 대한 복제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으로 해서 변복하기도 하고 복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 두세 번째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했으며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차장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차장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의 자연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을 궁구해 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한 서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을 존몰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이 일관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이 《의례》의 경문에 입언하기를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가 ‘정·체로서 전중한 것이다.’고 전을 내고, 정현은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을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천만고 동안 우주의 치란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께서 효묘의 상에 삼년 자최를 입는 것은 경전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가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이 얼음 녹듯이 풀릴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군신의 명위와 존비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김수홍의 말을 안찰하건대, 그 말이 만언에 가까우나 허목과 윤선도의 여론을 주워 모은데 불과하다. 그 사람은 본래 용렬하고 그 말은 기록할 것이 없으나 그것이 결국 후일 화를 불러 일으킨 계재가 되었으므로 그 전문(全文)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당시에 예를 의론한 자들이 비록 많으나 논쟁한 것은 서(庶)라고 하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오직 권시(權諰)가 이르기를 ‘오늘날 인용한 경전은 모두 선비들이 행하는 예이다.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비록 첩자(妾子)라 하더라도 대통(大統)을 이었으면 적모(嫡母)가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니, 이것이 비록 고례에는 근거할 데가 없으나 마땅히 의리로 발론한 것이다. 윤휴(尹鑴)가 신하가 임금을 위한 상을 주창하였는데 심지어 《강목(綱目)》에 원위 풍씨(瑪氏)가 그 임금을 죽였다는 기사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으니 비록 평소에 윤휴의 당을 한 자도 그 말을 옳다고 하지 않았는데 유독 윤선거만 끝내 그 학설을 주장하였고 항상 말하기를 예를 의논할 때면 마땅히 희중(希仲)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희중은 윤휴의 자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8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衣生活) / 가족(家族) / 출판-서책(書冊)


[註 004] 추생(鯫生) : 자기의 겸칭.[註 005] 초토(草土) : 상중(喪中)을 뜻함.[註 006]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註 007] 단궁(檀弓)과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 : 단궁의 문은, 옛날 공의 중자(公儀仲子)가 적자의 상을 당했을 때 적손을 버리고 서자를 후사로 삼자 단궁이 이를 기롱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상관(喪冠)인 문(免)을 쓰고 가서 조문했던 것을 말함. 자유의 최는, 옛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초상에 자유가 친구 사이에 조문하는 예에 벗어나는 최마복을 하고 조문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혜자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기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임.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
《의례》 참최장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경문에 대해 정현이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하게 해서 한 말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 해석하기를 ‘정현이 말한 것은 장자만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총자(冢子)도 또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에 이르기를 「총자는 장자라고 말한 것과 같아서 상하로 통용될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적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것은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라고 명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할 경우는 제일자에게만 해당되나, 장자라고 말하게 되면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점도 통해지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전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정·체(正體)가 되고 또 이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서자는 장자처럼 삼년복이 되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했는데, 정(鄭)주(註)에 ‘서자는 아버지의 후사가 된 사람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말한 것은 원별(遠別)하기 위한 것이다.’ 했고, 가공언의 소에서는 ‘이는 적자와 적자가 서로 계승해 가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할아버지를 계승해야 이에 장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고 적처 소생인 제이자는 이것이 중자(衆子)인데 이제 똑같이 서자라고 명명하는 것은 장자와 원별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첩자와 호칭이 같은 것이다.’ 했고, 또 ‘승중(承重)했어도 삼년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 있으니, 첫째는 정·체(正體)이되 전중할 수 없는 경우인데 이는 적자가 폐질이 있어 종묘의 주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고, 둘째는 전중은 했지만 정·체가 아닌 경우로 서손을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다. 셋째는 체이부정인 경우로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것이 이것이고, 넷째는 정이불체로 적손을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습니다.
주문공(朱文公)의 《가례》에 ‘제후 별자(別子)의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에 유해손(劉垓孫) 선생이, 제사에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써야만이 법방(法方)이 문란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였고, 또 ‘종자는 적자만 세울 수 있다. 따라서 서장(庶長)은 세울 수 없다. 그러나 적자가 없는 경우에는 또한 서자를 세울 수 있는데 이른바 세자의 동모제를 말하는 것으로 세자는 바로 적자인 것이다.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제(親弟)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適)인 것으로 서자는 세울 수 없는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자최 삼년장의 경문에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소에 해석하기를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서 자최복을 입기 때문에 또한 자최복을 입는다.’ 했습니다. 전에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버지가 낮추지 않은 것을 어머니 또한 감히 낮출 수 없기 때문이다.’ 했고, 정주에 ‘감히 낮출 수 없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높다는 것으로 조녜(祖禰)의 정체(正體)에 대해 낮출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례》 춘관의 경문에 ‘소종백(小宗伯)의 직책은 삼족의 분별을 관장하여 친소를 분변하는 것인데 정실(正室)을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 했는데, 그 주에 ‘정실은 적자이고, 문자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문을 담당하는 아들이란 뜻이다.’ 했습니다.
《예기》 증자문에 ‘증자가 묻기를 「종자(宗子)는 사(士)가 되고 서자(庶子)는 대부(大夫)가 되었으면 그 제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생(上牲)으로 종자의 집에서 제사지내야 하며, 축에는 효자 아무가 개자(介子) 아무를 위하여 상사(常事)를 올린다고 써야 한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효자는 종자를 말하고 개자는 서자를 말한다. 서(庶)라고 하지 않고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는 비천한 칭호이고 개는 부이(副貳)의 뜻이니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이다.’ 하였습니다.
《의례》 참최장의 경문에 ‘남의 후사가 된 자’라고 했고, 전에는 ‘어떻게 해야 남의 후사가 될 수 있는가. 동종인 경우에는 지자가 가합하다.’ 했으며, 소에 해석하기를 ‘다른 집의 적자는 다른 집의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지자를 취하는 것인데 지자는 제이 이하의 서자인 것이다. 서자라고 말하지 않고 지자라고 말한 것은 서자라고 말하면 첩자를 지칭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庶)를 바꾸어 지(支)라고 말한 것이다.’ 했습니다.
《예기》 내칙에 ‘적자와 서자는 외침에서 만나는데 임금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 방긋 웃게 한 다음 이름을 지어준다.’ 했는데, 그 주에 ‘여기의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하였고, 방씨(方氏)는 ‘세자는 노침(路寢)에서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의례》 자최 부장기장의 경문에 ‘대부의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대부의 첩자이기 때문에 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적처 소생의 둘째 이하라면 당연히 곧바로 곤제라고 할 것이요 서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했습니다.
《의례》 시마삼월장의 경문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어 자기 어머니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소에서 해석하기를 ‘이는 총자·적자가 없고 첩자만 있는 경우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서자가 후사를 승계하여 자기 어머니를 위해 시마복을 입는다는 뜻이다.’ 했습니다.
주문공  《가례》 팔모도(八母圖)에 ‘서모’라고 한 데 대한 주에 ‘서모는 아버지의 첩이다.’ 했습니다.
《서전》 미자편의 편제에 ‘미자(微子)의 이름은 계(啓)인데 제을(帝乙)의 장자이고 주(紂)의 서모형(庶母兄)이다.’ 했습니다.
《논어》 미자편에 ‘미자는 떠나갔다.’ 한 주에 ‘미자는 주의 서형이다.’ 하였고, 소주에 이르기를 ‘《사기》 송세가(宋世家)에 의하면 미자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아들이고, 주(紂)의 서형(庶兄)이다.’고 했습니다.
《춘추》의 경문에 ‘태묘에 큰 일이 있었는데 희공(僖公)을 제승하기 위한 것이다.’ 한 주에 ‘희공은 민공(閔公)의 서형이다.’고 했습니다.
《예기》 상복소기에 ‘왕자가 시조의 소자출(所自出)에게 체제(禘祭)를 지낼 적에 시조를 배향하여 사묘를 세우는데 서자인 왕도 또한 이렇게 한다.’ 했는데, 그 주에 ‘세자에게 폐질이 있어 후사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서자를 세워 왕으로 삼은 경우인데 그때의 예제(禮制)도 세자가 하는 것과 같다.’ 했으며, 산음 육씨(山陰陸氏)는 말하기를 ‘한나라의 효문제(孝文帝)가 효혜제(孝惠帝)를 계승한 것이 적자로서 이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사(祭祀)를 받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경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은 바로 서자로서는 제사를 주관할 수 없고, 서자왕(庶子王)이 된 연후에는 제사를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했습니다. 【끝에는 고금을 참작해서 논한 것으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 제이적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에 대하여는 동모제요, 차적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가 전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로서 전중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에게만 의거하나, 장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의 주에는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 세자의 아우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이 경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의 적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가 서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자이고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의 전, 정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에서는 ‘주공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를 장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은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과 자하의 전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정자가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니, 대저 《대학》의 경일장의 주에 ‘증자의 뜻인데 문인이 기록했다.’는 유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내용을 따라가 소자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의 전문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인 ‘장자가 죽으면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주공과 공자도 적·서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선비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 이하는 장자와 원별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을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경전에서 서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공자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집니다. 귀천을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해 보자면, 정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가 공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효자로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는 지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에 ‘세자·적자·서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를 내어 44편의 수편에다 올려 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은 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는 《가례》에서 아버지의 첩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의 서형인 미자에 대해서는 《논어》의 주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의 서모형과 노 희공(魯僖公)의 서형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에 통용하였는데 주설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융쇄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자가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의 서자는 헌의에서 이른바 예경에 이런 유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이 세자의 지위에 있고 효묘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묘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種)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이니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이라는 글이 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경》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 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해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인 차장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하는 천칭을 취택한 것이 존비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에 의거해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임금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송·명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인 이도 있었고 서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로 전중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 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의 상복에 대한 복제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으로 해서 변복하기도 하고 복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 두세 번째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했으며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차장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차장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의 자연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을 궁구해 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한 서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을 존몰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이 일관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이 《의례》의 경문에 입언하기를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가 ‘정·체로서 전중한 것이다.’고 전을 내고, 정현은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을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천만고 동안 우주의 치란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께서 효묘의 상에 삼년 자최를 입는 것은 경전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가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이 얼음 녹듯이 풀릴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군신의 명위와 존비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김수홍의 말을 안찰하건대, 그 말이 만언에 가까우나 허목과 윤선도의 여론을 주워 모은데 불과하다. 그 사람은 본래 용렬하고 그 말은 기록할 것이 없으나 그것이 결국 후일 화를 불러 일으킨 계재가 되었으므로 그 전문(全文)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당시에 예를 의론한 자들이 비록 많으나 논쟁한 것은 서(庶)라고 하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오직 권시(權諰)가 이르기를 ‘오늘날 인용한 경전은 모두 선비들이 행하는 예이다.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비록 첩자(妾子)라 하더라도 대통(大統)을 이었으면 적모(嫡母)가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니, 이것이 비록 고례에는 근거할 데가 없으나 마땅히 의리로 발론한 것이다. 윤휴(尹鑴)가 신하가 임금을 위한 상을 주창하였는데 심지어 《강목(綱目)》에 원위 풍씨(瑪氏)가 그 임금을 죽였다는 기사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으니 비록 평소에 윤휴의 당을 한 자도 그 말을 옳다고 하지 않았는데 유독 윤선거만 끝내 그 학설을 주장하였고 항상 말하기를 예를 의논할 때면 마땅히 희중(希仲)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희중은 윤휴의 자이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8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衣生活) / 가족(家族) / 출판-서책(書冊)


[註 004] 추생(鯫生) : 자기의 겸칭.[註 005] 초토(草土) : 상중(喪中)을 뜻함.[註 006]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註 007] 단궁(檀弓)과 문(免)과 자유(子游)의 최(衰) : 단궁의 문은, 옛날 공의 중자(公儀仲子)가 적자의 상을 당했을 때 적손을 버리고 서자를 후사로 삼자 단궁이 이를 기롱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상관(喪冠)인 문(免)을 쓰고 가서 조문했던 것을 말함. 자유의 최는, 옛날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초상에 자유가 친구 사이에 조문하는 예에 벗어나는 최마복을 하고 조문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혜자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것을 기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임.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
아,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에 대하여 정실 제이적자의 자리이고 또 소현 세자에 대하여는 동모제요, 차적의 자리인 것입니다. 《의례》의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한 데 대해 자하가 전을 내기를 ‘어찌하여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정·체로서 전중했기 때문이다.’ 했고, 정현은 주를 내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가 통하기 때문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제이자를 취하여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 적자라고 말하게 되면 제일자에게만 의거하나, 장자라고 말할 경우에는 적자를 장자로 세우는 것도 통해지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가례》의 주에는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 세자의 아우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인 것이다.’ 했습니다. 주공이 경을 지은 조목의 순서를 관찰하여 보면 반드시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어야 하는데 ‘적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가 적장자를 위하여’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이 사람들의 적장자가 사고가 있거나 혹 후사가 없이 죽을 경우 반드시 적자를 세워 장자로 삼아야 하는 도리가 있음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로 통용하는 뜻을 취하여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이니, 성인의 글은 간략하면서도 극진하여 참으로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저 약언(若言)과 약운(若云)이란 말은 적장(嫡長)·차장(次長)을 아울러 거론하여 나누어 해석한 것입니다. 또 전문(傳文)에서 정·체의 뜻을 논했는데, 정(正)은 정실의 적자를 말하는 것이고 체(體)는 부자가 서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은 정실의 제이자이고 소현 세자의 친제(親弟)로서 부왕(父王)의 명명(明命)을 받들어 종묘의 제사를 주관했으니, 바로 자하의 전, 정현의 주 및 공언(公彦)의 해석, 《가례》의 주 등의 말과 비의하여 논하여 본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합치됩니다. 헌의에서는 ‘주공이 경을 세우고 자하가 전을 짓고 정현이 주를 냈는데 모두 차자를 장자라고 한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정현이 말하기를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하기 때문이고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것은 말한다.’ 했으니, 실로 헌의에서 논한 것과는 상당히 틀린 점이 있습니다. 주공의 경과 자하의 전은 본의를 총괄한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따져서 생각하지 않으면 혹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참최장에 삼년이란 글자가 없는데, 이를 고집하여 삼년의 복제를 폐기하겠습니까.
주자·정자가 다른 논의에 주를 내면서 정현과 가공언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르다고 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는 면재(勉齋) 황간(黃幹), 유씨 해손이 주자의 문하에서 직접 수업하여 모두 저술한 것이 있으니, 대저 《대학》의 경일장의 주에 ‘증자의 뜻인데 문인이 기록했다.’는 유와 같은 것입니다. 헌의에서 ‘주자·정자의 감파(勘破)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허목의 소장에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이유는 첩자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소장을 만들 적에 예서(禮書)의 내용을 따라가 소자의 내용을 구성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비록 경전의 전문은 아니지만 그 내용 가운데 서자와 첩자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귀천을 분변하기 위해 말한 것이니, 기어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합하의 헌의에서는 허목의 소장 가운데서 제일조인 ‘장자가 죽으면 제이장자를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명명한다.’고 한 한 조항은 버려두고 단지 제이조의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으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한 것만을 취하여 논하였으니, 적자와 서자에 대한 것을 취사(取捨)하는 방도가 과연 정당하게 되었습니까.
아, 헌의에 ‘이른바 서자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첩자이지만, 차적(次嫡) 이하는 임금의 동모제라도 또한 서자라고 하기 때문에 소에 「서자는 첩자의 호칭인데 적자로서 둘째인 자도 같이 서자라고 명명한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는 것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갑자기 논설을 세웠습니다. 이는 바로 통융(通融)시켜 합쳐 말한 것으로 서자를 혼칭하여 마치 똑같은 것처럼 여긴 것이니, 서(庶)라고 말하여 원별(遠別)한 뜻을 전부 빼어버렸으니,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주공과 공자도 적·서의 분별에 대해 명백히 변론하였고 뒷날의 선비들도 모두 이 뜻을 숭상했습니다. 다만, 차적 이하는 장자와 원별한 까닭에 깊이 억제하여 첩자와 호칭을 같게 한 것이니, 이는 강쇄(降殺)시키는 도리로 대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경전에서 서자란 말을 통용해서 쓴 것인데 비천하다고 주석을 낸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서자가 비천하다는 것은 어찌 많은 말을 허비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반드시 명분을 바루어야 된다고 공자가 경계하였으니, 강쇄하기 위한 호칭을 감히 정적(正嫡)인 군부(君父)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의혹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집니다.
귀천을 거론하여 명백히 변별해 보자면, 정실이면 모두 문자(門子)라고 한다는 것이 《주례》에 기재되어 있는데, 증자가 공자에게 종자(宗子)와 서자(庶子)의 제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효자로 쓰라고 답한 것은 전중했기 때문이고,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은 서자가 비천한 것을 혐의해서이며, 개(介)라고 한 것은 또한 귀한 이를 귀하게 여기는 방도라고 말했습니다. 자하는 지자라야 된다는 것으로 《의례》 경문의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라고 한 데 전을 내었으며, 가공언의 소에는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서자는 첩자의 호칭이기 때문에 서를 고쳐 지(支)라고 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칙에 ‘세자·적자·서자가 태어나면 아버지에게 보이며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주에 ‘세자는 국군(國君)의 원자(元子)이고 적자는 세자의 아우이고 서자는 첩자이다.’ 했는데, 한(漢)나라의 군유(群儒)들이 이를 《예기》에 편차하기에 이르러 곡례(曲禮)의 ‘지자는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한 부분에 대해 ‘지자는 서자인데 서자는 비천하기 때문에 감히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주를 내어 44편의 수편에다 올려 놓았습니다. 서자라고 하지 않고 지자라고 한 것은 변별한 것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다섯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은 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의례》의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해서’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 시마복을 입는다.’ 했는데, 주공은 모두 이를 첩자의 호칭으로 곧바로 썼습니다. 내칙에 ‘서자를 아버지에게 보이면 이름을 지어준다.’고 한 것은 이미 상문(上文)에 보였습니다. 서모는 《가례》에서 아버지의 첩이라고 했고 아들을 낳으면 서얼이라고 한다고 했으며, 주의 서형인 미자에 대해서는 《논어》의 주에 드러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주회암(朱晦菴)의 기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자편의 서모형과 노 희공(魯僖公)의 서형이라고 한 것도 또한 선유의 의논에서 나온 것인데, 이른바 서형이란 것은 측실(側室)의 천얼(賤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곱 조항이 어찌 헌의에서 이른바 서자가 첩자가 된다고 따진 데 대한 명문이 아니겠습니까. 헌의에 ‘서(庶)는 천칭(賤稱)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서가 천칭이 됨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서자라는 뜻은 하류(下流)가 많은 것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예경에 통용하였는데 주설에는 비천하다고 일컬은 것이 많았습니다. 여자가 남의 서모가 되면 그 아버지가 반드시 천축(賤畜)이라고 했으며, 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라는 경일장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이 같지 않다고 한 의논이 많았으며, 제후와 서인에게 통달된다는 《중용》의 글에 있어서도 주에는 귀천·융쇄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이 두 절목은 모두 지극히 높고 지극히 낮은 것인데 공자가 말한 것이고, 증자문(曾子問)의 서자에 대한 주도 이와 같습니다. 서자와 장자에 대한 전의 서자는 헌의에서 이른바 예경에 이런 유가 매우 많다고 한 것이 이것인데 주에는 천하게 여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소현이 세자의 지위에 있고 효묘가 봉저(鳳邸)로 있을 적에 혹 비의해서 말할 경우가 있을 때 장자와 원별한다는 뜻에 의거 효묘를 서자라고 일컫는 것은 불가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은 정·체(正體)로 전중(傳重)하여 지위가 지존에 이르렀으며 인조의 적통이 이미 소현에게는 끊겼으니, 또한 원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자라는 천칭을 바로 효묘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서자라는 호칭이 예경에서 통용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귀천의 구별이 일성(日星)처럼 환히 밝은데, 헌의에서 이른바 차장을 세우고 또한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과 서자가 승중하면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말한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된다고 한 말은 어디에 전거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소에서 해석하기를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경우가 사종(四種)이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이니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이것이다.’ 했는데, 합하께서 서자라는 글을 가지고 효묘께 의심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효묘의 명위(名位)에 대해 원별의 대상인 서자로 견주어 논하는 것도 오히려 불가한 것인데 더구나 부정이라는 글이 있는 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옛날의 선유들은 모든 소소한 절문(節文)에 관계되는 것도 반드시 그 경중을 헤아려서 갑을(甲乙)이 서로 논란했는데 갑의 의견이 옳으면 옳은 것을 갑으로 돌려 옳게 여겼으며 을의 의견이 그르면 그른 것을 을에게 책임지워 그르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피차를 분변하고 시비를 판단하여 사리를 논하고 일을 기록해 놓은 것이 글에 드러나 훈계로 전하여 오는데, 더구나 이렇게 대단한 거조를 하면서 하나의 문장 안에서 어찌 상하를 살피지 않고서 도리어 모순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합하께서 의심해서는 안 될 서자에 관한 글에 생각이 미치어 일방적으로 고집하면서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도리어 모순된다고 하고 있으니, 저는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야말로 높은 것을 말하면서 물을 가리키고 낮은 것을 말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경》에 ‘하늘과 물은 서로 어긋나게 행한다.’ 했는데, 이는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서자를 통용한다는 데 대한 변별은 잘 되었으니, 귀천이 분명한 것에 의거해 그 지위를 변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겨 정적인 차장도 귀히 여기며 천한 이를 천히 여겨 비천한 서자를 천히 여겨서 변별이 사의(事宜)에 맞음으로써 존비를 정한다면, 명분도 바르고 사리도 순하며 일도 마땅하게 되고 예도 제대로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모순될 것이 있겠으며 무슨 변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합하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상세히 살피지 않으신 것입니다. 또 질책하시기를 ‘반드시 차장이 서자가 되지 않는다는 명문을 제시한 연후에야 허목의 이야기를 따를 수 있다.’고 한 것도 또한 어떠합니까. 정체의 귀한 것은 버려두고 비하하는 천칭을 취택한 것이 존비를 변별하는 의의에 있어 과연 사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아, 소현이 몰(歿)한 뒤 인조 대왕께서 특별히 효묘를 세워 저위(儲位)로 올렸는데 인조 대왕의 명이 헤아려 조처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 당시 외신(外臣)은 인조 대왕의 마음이 그렇게 된 이유를 몰랐었으므로 소현에게 적통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점이 있었으니, 이때 의당 단궁의 문과 자유의 최에 대한 이야기를 인용하여 예에 의거해 쟁론했다면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언 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강씨(姜氏)의 죄적(罪跡)이 중외에 드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소현이 인조에 대해 적통이 영영 끊어졌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제일자가 성인(成人)이 되어 죽었다고 한 것은 논할 겨를도 없는 것입니다.
대저 적통에 대한 의리는 지극히 엄하고도 지극히 중한 것이니, 이는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혹 끊길 경우에는 적자를 세워 종통을 잇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렇게 해 왔으며 경대부의 집에도 폐기한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더구나 임금이 어떻게 적통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대부의 집은 본디 경상(經常)의 방도가 있습니다만 제왕가(帝王家)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나라의 계력(季歷)과 무왕(武王), 한나라의 문제(文帝)는 모두 제일자의 지위가 아니었으며, 당·송·명의 여러 임금들도 제이 이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정실인 이도 있었고 서자인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나라는 8백 년을, 한나라는 4백년을, 당·송·명은 또한 3백 년을 이어왔습니다만, 그 사이에 적통이 없었다는 기롱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정·체로 전중하여 더없이 정정(正正)하고 장장(章章)한데 그 누가 간언(間言)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합하께서는 오직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었다는 데에만 의혹을 품었을 뿐 강씨(姜氏)의 대의(大義)가 이미 끊겼다는 것은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헌의에서 도리어 적통이 엄하지 않다고 했고 또 두 번 참최를 입는 의리가 없는 데야 어찌할 것이냐고 했으니, 의리를 헤아려 보자면 어찌 서로 틀리는 말이 아닙니까.
또 한 말이 있습니다. 참최를 두 번 입지 않는다는 글은 《의례》의 주소에서 나온 것인데, 신하가 임금과 후비에 대해서와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인 것으로, 이른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고 가정에는 어른이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인정에 따라 예법을 정한 것인데 5등의 상복에 대한 복제는 각기 그 지위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년상을 참최로도 하고 자최로도 하고 기년으로 해서 변복하기도 하고 복이 없이 심상(心喪)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당한 처지에 따라 옛일을 고증하고 지금의 예법을 참고하여 사의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와 고금을 통틀어 삼년의 참최와 자최의 복을 폐기하지 않고 통행하여 온 것은 예경의 글에 기재되기도 하고 기재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제가 감히 사설을 설정하여 다시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데 비의하여 논하여 보려 합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죽었으면 아들 된 사람은 삼년상의 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재삼 두세 번째 장가들고 또 그 어머니들이 모두 죽었다면 아들된 사람은 그 복을 반드시 입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형제가 서로 대를 잇는 경우가 역대에 또한 많이 있었는데 형위(兄位)에 있는 임금이 승하했으며 그 신하된 사람은 반드시 그 복을 입는 것이요, 아들된 사람과 신하된 사람이 한 몸에 자참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여겨서 폐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차장에 대해서 또 죽은 자가 있을 경우 자참의 삼년복을 입는 것은 조종을 높이고 공경하기 때문이니, 감히 자신이 높다는 것으로 강쇄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의의가 아들이 계모에 대해서와 신하가 제위(弟位)의 임금에 대해서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상도(常道)는 이미 그 지위에 있다면 반드시 그 복을 입어야 하는 것은 본래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에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고 한 글은 반드시 곧바로 어머니가 장자를 위해서라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헌의에서 ‘차장을 모두 장자라고 명명하여 참최복을 입는다면 아버지가 된 사람은 한 몸에 참최복을 입는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한 말은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 본래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천리의 자연인 것이고 세워서 대신하게 하는 것은 인도의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시종을 궁구해 보아 천리와 인도가 합쳐져 어긋나지 않은 것이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치 밖에 도가 없고 도 밖에 이치가 없다.’고 한 것이니, 다시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합하의 의견은 필연코 장자의 지위가 어떻게 둘이 있겠느냐고 여겨 탈적의 혐의에 빠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근사한 서자를 점출(拈出)하여 비의해서 논한 것이나, 또한 대의를 가리운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대저 인조의 적통을 존몰에 관계없이 기필코 대의가 이미 끊긴 성인(成人)이 되어 죽은 사람에게로 귀결시키려 한 것은 그 뜻을 말한다면 취할 만하지만 그 이치를 궁구하여 본다면 또한 모순되고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데 그 말을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옳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말이 일관된 말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 주공이 《의례》의 경문에 입언하기를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했는데, 자하가 ‘정·체로서 전중한 것이다.’고 전을 내고, 정현은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상하로 통용시키기 위한 것이니 또한 적자는 장자로 세운다는 말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차장을 세워 장자로 삼는다는 점을 밝힌 말입니다. 또 경문에 ‘서자가 적자인 형제를 위하여’라고 했고, 또 ‘서자가 아버지의 후사가 되면 어머니를 위해서는 시마복을 입는다.’고 했는데 이는 곧바로 서자가 첩자의 호칭이 되는 것이며, 공자도 서(庶)를 고쳐 개(介)라고 한 것이 전적(典籍)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천만고 동안 우주의 치란이 있을 즈음에도 없어지지 않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으니, 대왕 대비전께서 효묘의 상에 삼년 자최를 입는 것은 경전을 참고해 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해 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주머니의 입구를 꼭 묶어두듯이 말을 조심해야 허물이 없게 된다.’고 했으니, 삼가 조심해서 지키는 것이 의당한 일이겠습니다만, 의리에 관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운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훈(經訓)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두루 생각하고 관대히 살펴주시어 혹 취할 점이 있으면 다시 《예경》을 상고하여 사실에 따라 주의하신다면 위로는 문란된 명위가 바로잡히게 될 것이고 아래로는 중인(衆人)의 의혹이 얼음 녹듯이 풀릴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취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허물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는 대선(大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자·군신의 명위와 존비가 각기 올바르게 되어 예로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상하의 큰 경사인 것으로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김수홍의 말을 안찰하건대, 그 말이 만언에 가까우나 허목과 윤선도의 여론을 주워 모은데 불과하다. 그 사람은 본래 용렬하고 그 말은 기록할 것이 없으나 그것이 결국 후일 화를 불러 일으킨 계재가 되었으므로 그 전문(全文)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당시에 예를 의론한 자들이 비록 많으나 논쟁한 것은 서(庶)라고 하는 한 글자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오직 권시(權諰)가 이르기를 ‘오늘날 인용한 경전은 모두 선비들이 행하는 예이다.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비록 첩자(妾子)라 하더라도 대통(大統)을 이었으면 적모(嫡母)가 자최 삼년복을 입는다.’고 하니, 이것이 비록 고례에는 근거할 데가 없으나 마땅히 의리로 발론한 것이다. 윤휴(尹鑴)가 신하가 임금을 위한 상을 주창하였는데 심지어 《강목(綱目)》에 원위 풍씨(瑪氏)가 그 임금을 죽였다는 기사를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으니 비록 평소에 윤휴의 당을 한 자도 그 말을 옳다고 하지 않았는데 유독 윤선거만 끝내 그 학설을 주장하였고 항상 말하기를 예를 의논할 때면 마땅히 희중(希仲)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희중은 윤휴의 자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왕세자의 책례는 인묘조 때의 일에 의거하여 먼저 책례를 행할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책례 때의 관례와 복색도 의당 그때 이미 행한 절목에 의거해야 하겠습니다만 복색에 관련해서 전후 사관이 《실록》을 등서해온 것을 고찰하여 보건대 기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축년에 상께서 세손으로 있을 적에 책례를 관례보다 앞서 행하였으니 그때의 복색을 전거로 삼는 것이 합당할 듯하나 이는 세자의 책례 때 복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막중한 의절을 신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사관을 보내어 중묘·인묘의 책례 때의 《실록》을 조사하여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이유가, 대사헌 조복양과 동성 종매부 관계이므로 법규상 마땅히 체차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2월 20일 신미

상이 침을 맞았다.

 

관원이 김수홍을 사판에서 삭제하라는 일로 연계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설화가 분명하지 않다. 문자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문자이며 사설로 망령되이 논의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무슨 사설로 망령되이 논의한 것인가? 임금에게 고하는 말과 간사함을 분별하는 이야기는 의당 명백하게 하여 미진한 곳이 없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불분명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내가 여러 날 동안 생각하고 궁구해 보았지만 결국 계사의 본뜻을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2월 21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김수홍을 사판에서 삭거시키라는 계사는 말을 만드는 즈음에 명백하게 하지 못하여 성상의 하교를 내리게 하였으니 신들은 두려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당초 예를 논한 제신들이 복제를 의정할 적에 예경의 본의를 분명하게 근거로 삼을 수 있었는데도 오히려 감히 곧바로 결단하지 않고서 국조에서 이미 행한 예를 참고하고 명나라 시왕의 제도에 의거 단정한 것으로서 고금의 증거를 모두 원용하여 대신과 함께 품의해서 정하였습니다.
대개 정통의 복제는 본디 한 나라로 통한 것이 있고 각기 하나의 의의가 되는 것이 있으므로 순서를 잇고 정통을 계승하는 것이 복제의 경중에 관계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한데도 윤선도가 이에 감히 흉론을 수창하여 예를 의논한다고 가탁하고 이로 인하여 화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감이 매우 밝아 그 정상이 다 드러났으므로 공의에 의거하여 이미 그 죄를 바루었으니 음험하고 간사하고 화를 즐기는 무리들이 의당 감히 다시 멋대로 임금의 마음을 엿보는 행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김수홍이 선도의 무리의 여론을 주워모아 하나의 논리가 없는 글을 만들어 진신들에게 전하여 보였습니다. 그 글이 아직 예람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지금 조목에 따라 변파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전편의 주된 뜻은 헌의(獻議) 가운데 서(庶)라는 한 글자를 부각시켜 의심해서는 안 될 자리를 의심한 것으로 심지어 선왕에게 곧바로 천칭을 가하기까지 하였다고 하였으니 그가 지척하여 의논한 것은 신하로서는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헛말을 과장하고 극도로 음흉스러움을 부려 사람을 무함하는 기화(奇貨)를 만들고 억지로 제신들의 죄안을 만들었습니다. 그 속셈이 그지없이 공교하고 절절이 패망스러우니 또한 일종의 사설을 창도하는 자들이 구실로 삼을 자료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사판에서 삭거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충청 병사 정한기는 성품이 본디 탐욕스러워 전에 선천 부사로 있으면서 읍기에게 빠져 읍민에게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곤외의 중임을 이런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자, 이에 따랐다.

 

정계주를 집의로, 유심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소결(疏決)하기 위한 문서를 지금 조사해냈습니다. 전가 사변의 부류는 평소 심리할 때 넣을 수 있습니다만, 자기에 한해 충군(充軍)시킨 자와 연한을 한정하지 않고 정배시킨 자에 대해서는 당초 거론하지 않았으니, 실로 억울하고 원통한 데에 관계가 됩니다. 지금 의당 아울러 조사해 낼 것을 허락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2일 계유

장령 맹주서 등이 아뢰기를,
"홍순민(洪舜民)이 중물(重物)을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에게 보냈는데 퇴각시킨 것을 인하여 결국 탄로가 나기에 이르렀으나,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게 된 뒤에도 실토하지 않음으로써 중신이 소장을 올려 사실을 밝히고 인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감히 끝내 숨기지 못하고서 하나는 전부터 세시(歲時)에 보내던 것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망령되이 혼수(婚需)를 보낸 것이라고 했으니, 그가 거짓말로 꾸며서 속여온 것이 너무도 가증스럽습니다. 만일 무거운 율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탐오를 막고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겠습니까.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중한 율로 조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 순민이 표피(豹皮)와 군목(軍木)을 우의정 홍명하, 병조 판서 홍중보에게 보냈으나 명하 등이 이를 받지 않았는데 대관이 듣고 잡아다가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순민이 처음에는 사실대로 공초하지 않다가 명하 등이 소장을 올려 스스로 논열하니 순민이 감히 숨기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도배시키라고만 명하였는데, 대간이 다시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순민이 이에 갖추 자복하니, 다시 정배시킬 것을 명하게 되었다. 물의는 방형(邦刑)을 바루지 않았다는 것으로 한스럽게 여겼다.

 

양사가 온천에 행행하는 것을 정지하라는 논계를 중지했다.

 

2월 23일 갑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민유중이 적상 산성(赤裳山城)을 변통할 일로 계품하였는데 대개 적상은 형세가 지극히 험하여 여러 번 병란을 겪었으나 한 번도 병화(兵禍)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오년에 비로소 《실록》를 보관하고 신사년에 또 《선원록》을 보관한 후에 참봉 2명, 수복 24명, 사부(射夫) 84명을 두고 또 좌우 사찰을 두어 승도들을 모집해 들여 수호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성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어서 도둑질하는 데 요충지가 되므로 무주(茂朱)·용담(龍潭)·금산(錦山) 이 세 읍의 군을 전적으로 산성에 속하게 하고 진안군(鎭安軍) 39명과 진산군(珍山軍) 30명, 장수군(長水軍) 96명을 떼어내어 여기에 소속시켰습니다.
유중의 의도는 ‘이 성에 만약 단지 사책만 보관한다면 창고를 설치하고 기계를 갖추어 놓고 군병을 배치하여서 도둑들을 불러들이는 화근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만약 겸하여 보장하는 터전으로 삼는다면 소속 군병은 성첩에 배치하기에 부족하고 쌓아놓은 군량도 2달을 버티기에 부족하다. 지금의 계산으로는 군병과 군량과 기계의 대비를 모두 파하여서 도적들이 엿보는 단서를 끊어버리고 단지 참봉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되 한결같이 태백산(太白山)과 오대산(五臺山)의 예와 같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주(茂朱)의 안성면(安城面)과 옥천(沃川)의 양산면(陽山面)을 떼어 내어 소속시켜서 단독으로 진(鎭)을 만들게 하고 한 읍의 민정(民丁)을 성적(城籍)에 편입한다면 보장(保障)하는 도리에 흠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대단히 경장(更張)하는 것으로 어렵게 여긴다면 진안군 3백 10명을 전적으로 산성에 소속시키되 금산과 용담의 규례와 같이 하고 장수·진산 양읍 군병으로 좌우의 본영에 소속시킨다면 산성의 군액이 전에 비하여 더해지고 양읍에 있어서도 분열할 폐단이 없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민유중의 이 말은 견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의 크기가 어떠한가? 무주 군병이 단독으로 지킬 만한가?"
하고, 한림 최후상(崔後尙)에게 이르기를,
"한림이 이미 직접 보았으니 형세가 어떻던가?"
하자, 후상이 아뢰기를,
"3면이 매우 험하여서 사람들은 통행하지 못합니다. 단지 북문으로만 겨우 인마(人馬)가 통행할 수 있는데 그 길도 몹시 험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험하기가 그러하다면 군정(軍丁)을 많이 쓸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무주·용담·금산 세 고을의 군사만으로도 오히려 파수하기에 충분하니 진안군 병사는 비록 소속시키지 않더라도 가하다. 다시 편부에 관하여 도신에게 물어본 뒤에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강화 유수 서필원이 아뢰기를,
"본부 군병을 지금 포수와 사수 양대로 나누어서 훈련시키도록 하고 물론 약환(藥丸)을 회부하되 적당량을 제출해서 연습용으로 삼게 하소서. 또 본부에 비축해 둔 전죽(箭竹)이 비록 많으나 적체된 지가 오래 되어서 화살을 만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총합 비용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탄약은 2천 근이 들고 전죽은 3만 자루가 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회부한 약환을 우선 취해 쓰고 전죽은 반은 해당 관청에서 지급하고 반은 내궁방(內弓房)에서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본부의 봉수(烽燧)가 지금 네 곳이 있는데 세 곳은 그다지 긴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음(河陰) 한 곳만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해서 그 군병을 옮겨 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이완이 아뢰기를,
"필원의 의도는 봉군(烽軍)을 덜어내어 육군으로 삼고자 하는 것인데 봉군도 어찌 편파적으로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유혁연이 아뢰기를,
"강도는 양서와 삼남의 연해지의 교회하는 길목이므로 당초에 봉수를 설치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닐 것인데 어찌 긴요하거나 그렇지 않거나가 옛날과 지금이 다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혁연의 말이 옳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긴요한 것과 긴요하지 않은 것을 상세하게 살펴본 연후에 품처하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군병을 시재(試才)할 때에 상으로 줄 물품이 없습니다. 호조의 노비 공포를 혹 회외미(會外米)로 하거나 혹 노직 통정첩을 양급해 주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호조 공포는 가볍게 허락할 수 없으니 회미 5백여 석을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첩문의 경우에는 일이 매우 구차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양사가 온천에 가는 일에 대하여 아뢰던 것을 중지하였으니 반드시 먼저 택일한 뒤라야 바야흐로 분부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일기가 오히려 차가우니 날씨를 보아서 택일하고자 한다. 응당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미리 헤아려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필요한 군병의 숫자를 병판에게 먼저 정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대가를 호위하는 군병은 편리한 것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수원군을 기용해야 하는데 상년에 이미 대가를 호위하였으므로 편파되게 수고를 끼치게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른 영(營)인 경우엔 연로(沿路)와 가까운 읍이 아니므로 조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도 군병의 예에 의하여 각영을 써서 들여서 낙점을 받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상년에 행행할 때에는 경기·충청 양도의 역말을 이용하였는데 그 수효가 61필이었습니다. 지금 자전이 행행할 때에 30필로 마련하면 총수가 91필에 지나지 않는데 지금 병조와 경기 역말을 합하면 2백 필이 되고 충청도 역말도 3백 필이나 되므로 비록 사복마(司僕馬)가 아니라도 이용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부에서 마련하여 들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안에서 마땅히 참작하여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어용군이 시위하는 숫자는 미리 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먼저 양전이 행행하는 문제를 결정한 연후에 숫자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에는 대가가 먼저 인도하고 자전이 뒤에 가되 매차 관사에서 쉴 때에 대전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가 맞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앞에서 인도하더라도 나를 중심으로 선후의 사대(射隊)를 셋으로 나누어 1대는 앞에 가고 1대는 중간에 서고 또 1대는 뒤에 남게 하며 백관은 가장 뒤에 있게 한다면 상년에 비하여 더 쓴 숫자가 좌우 협연군이 1백 60명에 불과할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타당합니다. 마땅히 이것으로써 마련하여 취품하겠습니다."
하였다. 응교  이민서가 아뢰기를,
"이번 행행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민정과 사세가 그전과 매우 다릅니다. 작년에는 처음 가는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이 깃발을 다투어 보고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지금 해마다 가게 되어서 민간에 폐를 끼치게 되니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일은 충분히 절약해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민서가 아뢰기를,
"금년에 기근이 팔로가 다 같은데 경기가 더욱 심합니다. 진구할 일을 대신으로 하여금 미리 그 절목을 강정하게 하소서."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대관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제도로 하여금 재해를 입은 지방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여 진구할 바탕으로 삼았지만, 죽을 베푸는 일은 다시 경기에 분부하여 착실히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서울에도 해청으로 하여금 죽을 베풀어서 진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도성의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데 진구하고자 한다면 물력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양창에 비축해둔 묵은 콩 수천 석을 싼 값으로 팔아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일분의 혜택을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익이 아뢰기를,
"위에 올리는 물품은 신하들이 마땅히 심력을 다하여 제공해야 할 것이므로 민간에게 폐를 주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금 상한 꿩·노루의 모피는 공경하는 도리에 흠되는 바가 없는 듯합니다. 신이 듣건대, 지난해 행행할 때에 상께 바치는 물선을 반드시 상하지 않은 모피를 가렸기 때문에 민폐가 매우 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변통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듣고 이미 변통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줄을 일찍이 알았다면 지난해에 어찌 이와 같은 폐단이 있게 했겠는가."
하였다.

 

사간 이익, 정언 이혜·최관이, 정한기에 대하여 체직하기를 청한 계사 중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고 하여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24일 을해

전라 감사 민유중이 장계를 올리기를,
"강진(康津)·해남(海南) 등 바닷가 여덟 고을을 전영(前營)에 예속시켰는데 전영을 순천(順天)에 설치했습니다. 강진에서 순천까지의 거리는 3일 노정(路程)이고 해남에서 순천까지의 거리는 4일 노정이어서 먼 지방의 군사들이 왕래하기에 폐단이 있으니, 김해(金海)·해미(海美)의 규례(規例)처럼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 영장(營將)을 겸하게 한다면 온편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으로 내려보냈다. 비국이 장계에 의거 시행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5일 병자

대사간 이은상이 또한 정한기의 일 때문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동지 정사 김좌명, 부사 홍처대, 서장관 이경과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2월 26일 정축

지평 유헌이 정원에 전계할 때에 체례가 소홀하게 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정재희(鄭載禧)·이동직(李東稷)을 정언으로,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이정기(李廷虁)를 좌윤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우윤으로, 박세모(朴世模)를 예조 참판으로, 이박(李璞)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2월 27일 무인

집의 정계주 등이 아뢰기를,
"경흥 부사 노즙(盧濈)은 사람이 용렬하고 나이가 많아 변방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임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8일 기묘

소두산(蘇斗山)을 지평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예조 참의로, 남이성(南二星)을 부교리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경상 감사 민점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嶺南)에 잇따라 흉년이 들었으니 조설(措設)의 어려움이 타도(他道)에 배가 될 것이다. 경은 의당 마음과 힘을 다해야 한다. 근래 제도의 행정을 보면 형식만을 일삼고 실사(實事)가 적으니, 경은 이를 본받지 말라."
하였다. 민점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중임을 받고 보니 실로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어떻게 감히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각 고을의 창곡(倉穀)을 으레 다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보고하였으나 창고에 들어간 실제의 수효는 적으니, 앞으로 진구할 일이 진실로 우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곡(糴穀)은 긴급할 때 쓰기 위한 것인데 긴급한 일에 닥쳐 쓸 수 없게 된다며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민점이 아뢰기를,
"듣건대, 본도의 물력이 탕갈되어 아병(牙兵)을 조련(操鍊)시킬 적에 상격(賞格)으로 쓸 물품을 판출해 낼 데가 없다고 합니다. 본도에 유치되어 있는 군포(軍布)를 미루어 쓰는 것이 온편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에 말하여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안주(安州) 성 안에 화재가 발생하여 잇따라 1백 50여 가호(家戶)가 불탔고 관향(管餉)·천류(泉流) 두 창고도 다 불에 타버렸는데,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였다.

 

2월 29일 경진

폭풍이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대낮이 깜깜했다.

 

강원도 영동에 큰 바람이 불고 산불과 물로 인하여 삼척은 2백 51호, 강릉은 1백 27호, 양양은 38호가 연소되었으며, 불에 타 죽은 자는 4명이었고, 익사자는 5명이었는데, 도신이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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