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임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형조 좌랑 정시형(鄭時亨)은 자신의 전반비(傳飯婢)를 시켜 본조에 정장(呈狀)하여 쟁송한 일이 있는 데다 또 담당한 동료에 대해 직접 촉탁을 넣으려 했으니 비열하고 좀스럽기가 심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관원이 재변에 관하여 상차하여,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유신을 자주 인접하며 궁금을 엄하게 해서 내외를 엄숙하게 하고 언로를 열어서 직간자가 오게 하라고 청하고, 끝에는 백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고 서리(庶吏)가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언급하니, 상이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졸하였다.
일상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송시열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그와 함께 일을 하고자 하여 번얼(藩臬)로부터 아전(亞銓)으로 옮겨오게 하였으니 사론(士論)에 추중을 받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말년에 이지익의 탄핵을 받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이 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여 드디어 신설되었다. 일상이 평소에 답답하게 여기고 즐거워하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나같이 재주없는 자가 대제학이 되었으니 마땅히 재앙이 빨리 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상은 그의 아버지 이명한(李明漢)과 그의 할아버지 이정귀(李廷龜)와 더불어 3세가 대제학을 지냈으니 국조 수백 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1월 2일 계미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방물(方物)인 표피욕(豹皮褥)을 진상할 때 승전색(承傳色) 내관(內官) 전윤정(全胤鄭)이 감히 퇴송시키라는 내용으로 재삼 계달했는데, 그 외람스런 습관은 실로 뒤 폐단에 관계되니 은미한 조짐을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다 추문하여 정죄하라."
부제학 조복양(趙復陽) 등이 차자를 올려, 재이를 만나 수성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다. 성지(聖志)가 확립되지 않고 성학(聖學)을 강(講)하지 않고 언로(言路)가 넓지 않고 상하의 정지(情志)가 통하지 않고 폐정(弊政)과 해법(害法)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복하여 진계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차자의 내용이 격절한 것을 보니 내가 매우 가상스럽게 여긴다. 감히 띠에 써서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3일 갑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서필원도 입시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공조 판서 이완, 강화 유수 서필원과 함께 수군과 육군 및 진(鎭)을 옮기는 일의 이해를 논하게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수군과 육군이 아울러 잘 수거(修擧)되면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단지 군병의 숫자가 적어서 수군·육군을 둘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에 수군은 파하고 오로지 육군으로만 하려는 것인데 이완이 진을 옮기는 것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는 성명께서 참작하여 헤아리시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만 또한 대신과 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은 모두 주사를 파기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두 신하가 쟁집하는 것은 단지 주사(舟師)에 관한 한 가지 조항입니다. 덕포(德浦) 등 3진에 소속된 수군은 원래 강화도에 거주한 자가 4백 명인데 본부로 이속하고 그 대신에 별도로 요리하여 충당하게 한다면 양쪽 다 편리할 듯합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조치를 해야 충당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3진의 전선은 창설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정돈되지 않았습니다. 사공과 곁꾼 등 각색(各色)은 모양을 갖추지 못하여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대응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비록 정돈하고자 하더라도 단지 수사(水使)에게 책임을 지운다면 수사로서는 마련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3진에 소속된 4백 명을 본부로 이속하고 그 대신은 삼남 주사(三南舟師)의 분방한 예에 의하여 근처 육군에게 부쳐서 수대로 나누어 주도록 하고 사수(射手)인 경우에는 비록 청(廳)에 있는 군사라 하더라도 수를 정하여 보내도록 허락하고 사공과 곁꾼 등 각색 정돈할 일은 병조와 수사로 하여금 상의하여 요리해서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중군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물으니, 필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은 중군(中軍)에게 소속군을 모두 거느리게 한다면 유수(留守)가 거느린 군사는 4백, 5백 명에 불과할 것이며, 만약 유수로 하여금 거느리게 한다면 중군을 설치한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중군은 항시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므로 혁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군은 비록 당하관이라 하더라도 할 수가 있다. 당하 무변(堂下武弁) 중에 도감·파총·각 아문 군관을 물론하고 유수로 하여금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되 유수의 친병(親兵)은 2초(哨)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군향(軍餉)의 정수(定數)에 대해서 이완이 유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만, 군향은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것을 신 또한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존한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필원이 아뢰기를,
"쌀이 12만 석(石), 콩이 2만 석, 벼가 1만여 석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필원의 말은 민폐를 위한 것이고 이완의 말은 먼 훗날을 위한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경솔하게 숫자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필원이 아뢰기를,
"경기 수영(京畿水營)의 요미(料米)가 단지 1백 석이기 때문에 용도를 잇댈 수가 없습니다. 군관을 돌려보내는 사태까지 발생하니, 더 지급해 주어야만 모양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의당 선혜청에서 1백 석을 더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진연을 물려서 정하기는 하였으나 이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제 이미 해가 바뀌었으니 날짜를 정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전(兩殿)에 각기 따로 진연해야 하니 이것으로 예관에게 분부(分付)하여 2월 20일 후로 택일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송준길의 소장을 영상과 우상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소장의 한 조항은, 김좌명(金佐明)을 보양관(輔養官)으로 삼는 것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좌명이 이 직임에 합당하다 해도 체개(遞改)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 탑전에서 김좌명을 천거하여 이 직임을 맡겼는데, 지금 물의가 이러하니 대단히 황공합니다."
하자, 상이 개차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아뢰기를,
"능원 대군(綾原大君)이 집에서 행한 행실은 남이 따를 수 없으며 청검한 절의는 종척 중에 가장 훌륭한데 시장(諡狀)이 없는 탓으로 아직껏 시호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흠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다른 조정의 재신들에게도 행장이 없는데 시호를 내린 규례가 있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유명(遺命)했기 때문에 본가에서 시장을 짓지 않았습니다만, 신들이 진달하여 시호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 규례에 의하여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
진연청(進宴廳)을 다시 설치하고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게 하였다.
1월 4일 을유
해에 양이가 있었다. 흰 기운이 우이에서 나왔는데 길이가 한 발 정도 되었다.
1월 5일 병술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흰 무지개가 양이에서 나와 구불구불하게 북쪽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3, 4장 정도 되었다.
1월 6일 정해
동창위(東昌㷉) 권대항(權大恒)이 졸하였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저번 경안군(慶安君)의 상에 청평군(淸平君) 이전(李佺)이 유복(有服)의 친(親)으로 상복을 갖추어 입기 전에 기생을 불러 술에 취하는 등 예를 멸시하고 무식한 행위를 한 것이 심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헌부가 다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을 파직하라는 청을 다시 펼치니, 상이 따랐다.
1월 7일 무자
집의 오두인, 장령 성후설이 재이에 관하여 상차해서, 학문을 부지런히 힘쓰고 신하들을 자주 접하며 노비의 허위 문서를 탕척하고 중외의 죄수들을 소결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양사가 상을 함부로 주는 일과 중한 죄수를 가볍게 풀어주는 문제를 해를 넘겨 쟁집하였으니 공의(公議)를 알 만한데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어렵게 여기시니 삼가 두려워하건대, 형벌과 상전(賞典)이 이로부터 문란하게 되어 결국 권선 징악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보은(報恩) 사람 이환(李)의 집에 명화적(明火賊)이 돌입하여 이환을 죽이려 하니, 이환의 아들 이창경(李昌慶)은 23세이고 이원경(李元慶)은 17세이고 이명경(李鳴慶)은 15세인데, 세 아들이 칼날을 무릅쓰고 뛰어들어가 아버지가 누워있는 이불 위에 엎드리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나를 죽이고 아버지는 죽이지 말라."
하였다. 화적이 죽이려 하자, 형제가 서로 다투어 죽겠다고 하니, 화적이 의롭게 여겨 모두 죽이지는 않았으나 세 아들이 다 중상을 입었고 아버지는 끝내 죽음을 면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아울러 정표하게 하고 그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재능에 따라 녹용하게 하였다.
1월 8일 기축
박장원(朴長遠)을 예조 판서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9일 경인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전 부사 구문치(具文治)가 형장(刑杖)을 남용한 것과 전 목사 이인(李𡐔)이 외람되이 역말을 탄 것은 모두 불법에 관계가 되는데 본도에서 파출시키는 데 그쳤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양도(兩道)의 장계를 가져다 조사하여 율법에 의거 죄를 부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동지춘추관사 이상진(李尙眞) 등이 등서(謄書)한 《실록(實錄)》을 강도(江都)의 사고(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 처음에 강도에 둔 《실록》의 낙권(落卷)과 낙장(落張)의 숫자가 도합 3백여 권(卷)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등서해 넣어서 약간이나마 갖춰지게 되었는데 문종조(文宗朝)의 《실록》 1권은 여러 곳의 사고에 모두 결본(缺本)된 까닭에 등서하여 보결(補缺)하지 못하였다.
1월 10일 신묘
박형(朴泂)·이온(李溫)·송계종(宋繼宗)·유정식(劉廷式)·유호(柳濠)·맹호업(孟濠業) 등을 도로 가두라고 명했는데 양사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일찍이 계묘년001) 에 비국의 복계로 인하여 누적(淚籍)되었다가 발각된 자들은 죄범의 대소를 막론하고 매양 본죄에다가 1등을 더 가할 것으로 법식을 정하였습니다만 사세가 구애되어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죄가 도배(徒配)에 해당되는데 반 년을 가하면 너무 가볍게 되고, 죄가 전가 사변에 해당되는데 사율(死律)을 가하게 되면 너무 무겁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등법(加等法)은 거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뒷날 등대할 때 품처하라고 명하였다.
정언 이세장(李世長)이 상소하기를,
"임금이 하늘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그 이치가 같습니다. 진실로 어버이 섬기는 일에만 힘쓰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버이 마음은 편치 못할 것이며 하늘의 노여움은 더욱 심해질 것이니 효(孝)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전(兩殿)의 진연(進宴)은 당초 지난 겨울로 복정(卜定)했다가 10월에 천둥친 변이 있었기 때문에 금년 봄으로 물려서 하라고 명하였지만 불행하게도 하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재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무지개가 있었던 변은 지난 겨울의 천둥보다 더 참담한 것이었으니, 전하께서 공구하고 경척하는 정성을 의당 배가하셔야 될 터인데, 이런 때에 성대한 거조를 행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날을 아끼는 정성이 무한함을 알고 있습니다만, 지난 겨울 물리라고 명한 뜻에 견주면 과연 어떠합니까.
신이 듣건대, 진연(進宴)이 2월에 있고 온천의 행행이 또 3월에 있다고 하니, 이달에 기악(妓樂)을 선발하고 의문(儀文)을 사치스럽게 꾸며야 하며, 내달에는 도로(道路)를 수치하고 공돈(供頓)을 설치해야 합니다. 이는 평상시에도 일시에 아울러 행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재이를 당하여 수성하는 때인 지금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 양전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늘을 섬기시어 속히 우선 파하라는 명을 내리고 오는 가을을 기다린다면 하늘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둘 다 극진하여 유감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또 소문을 듣건대, 세 공주(公主)가 온천에 수행한다고 하는데 이 말이 참으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자전(慈殿)께서 가시는 것은 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일의 어려움을 계교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공주의 수행에 이르러서도 부득이한 데 연유된 것입니까? 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백성들이 망령되이 스스로 헤아려 혹 유관(遊觀)하러 가는 것으로 여긴다면 전하께서는 또한 어떻게 백성들에게 해명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진언(進言)한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그런데 소장의 끝의 일은 뜬소문을 들은 데에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1월 12일 계사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사인(舍人)으로, 남이성(南二星)을 부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수찬으로 삼았다.
집의 오두인 등이 아뢰기를,
"기읍(畿邑)에 대동미(大同米)를 설행하는 법을 세운 뒤에 사목을 거듭 밝혀 과외(科外)로 침탈하는 일이 없게 했는데 근래 수령들이 법령을 준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연호(烟戶)라고 일컫기도 하고 무역(貿易)을 칭탁하기도 하는 등 교묘하게 명목(名目)을 만들어 민간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객사(客使)의 사행(使行)이 있을 때 부마가(夫馬價)의 숫자를 감하여 지급하는 등 크고 작은 차역(差役)을 실시하는 즈음에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이 점점 만연되고 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계(査啓)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홍명하가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1월 15일 병신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집의로 삼았다.
풍덕(豊德) 사람 안추원(安秋元)은 병자호란 때 사로잡혀갔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망하여 돌아왔는데 조정에서 본토(本土)로 돌아가게 하였다. 가족 중에 생존자가 없고 또 살아갈 길이 없어 도로 청국(淸國)으로 들어가다가 봉성(鳳城)의 수장(守將)에게 잡혔다. 그리하여 심양(瀋陽)에 보고가 되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걱정하였다.
1월 16일 정유
경기 감사 김수흥이 재이에 관하여 상소하기를,
"전하의 총명이 지극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안일에 빠져들지 말라는 경계를 염두에 두지 아니한 바가 있으며, 공구수성이 지극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외유를 너무 즐긴다는 훈계에 간혹 체득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성학이 고명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간단의 우려가 있으며 백성의 괴로움을 보살펴 주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두루 미치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인도하는 도리에 미진한 바가 있으므로 조정에 화목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으며 교화의 근본에 궁구하지 못한 바가 있으므로 중외의 풍속이 날마다 괴려의 지역에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 일을 재결할 즈음에 조용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착오가 없으나 시간이 늦도록 정사에 겨를하지 못하는 뜻이 항상 옛 성왕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고, 군보와 노비, 도망간 자를 허위로 기록하고 함부로 징수하는 폐단과 각 아문의 녹사(錄事), 생도(生徒), 창준(唱准) 등의 난잡한 현상을 진달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답하고 그 상소를 주사에게 내렸으나, 시행한 바는 없었다.
1월 17일 무술
한량 유예일(柳禮一)에게 직부 전시하도록 하였는데 어영청 중일(中日) 시사에서 조총을 쏘아 과녁을 세 번 맞췄기 때문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재이의 현상이 오늘에 이르러 극심하다. 음사한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변괴가 계속 발생하니 이 무슨 현상인가. 그 허물을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진실로 나의 부덕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위로는 하늘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다. 걱정되고 부끄러워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더욱 공구 수성하는 도리에 있어서 내가 힘쓰지 아니할 수 없으니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지를 초해서 직언을 널리 구하여 나의 미치지 못한 점을 보충하라. 백사가 직책을 태만히 하고 대소의 신하들의 공경하게 공무를 받들지 아니한 것은 진실로 오늘날의 병폐이니 군공을 책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한 조항을 초교(草敎)에 첨가하라."
하니, 정원이 바로 비망기를 내려 중외(中外)에 반포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심히 두려워 하건대, 문자가 유창하지 못하여 나의 뜻을 다 전달할 수가 없으니 앞서 내린 전지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정원이 재이 문제로 경계를 진달하고, 마음에 돌이켜 구하여 진작 분발하여서 요 순을 목표로 하여 스스로 힘써서 성지를 수립할 것, 공명하게 사물에 대응하여 조정의 기강을 정돈할 것, 신하들을 인접하여 방법을 물을 것, 서연을 열어 성학을 강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달이 태미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1월 18일 기해
공산(公山) 사람 안국(安國)의 처 의향(義香)이 그의 종 승세(承世)와 간통하여 은밀히 안국을 살해하고 승세와 함께 도주하였다가 안국의 족인(族人)에게 붙잡혔다. 감사가 장문을 올려 보고하자, 경옥으로 잡아들여 삼성 추국을 하였는데 모두 자복하여 정형(正刑)을 받았다. 당시에 공산의 관호를 그전대로 강호(降號)하고 그곳 수령 박지(朴贄)를 파직하였다.
진연례를 퇴행하도록 명하였다. 당시에 흰 무지개가 자주 해를 가리므로 상이 하교하기를,
"아, 지금 이 잔치를 드리는 것이 어찌 잔치를 성대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자식으로서 세월을 아끼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하늘의 노여움이 이토록 심하고 재변이 계속 발생하니 이런 때에 예를 행하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올봄에 잔치를 베푸는 예는 정지하고 가을이 되거든 다시 품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9일 경자
부제학 조복양, 응교 이정, 교리 심재, 부교리 남이성, 수찬 오두인, 부수찬 박세당, 대사간 정만화, 사간 정계주, 헌납 최일, 정언 이세장, 장령 성후설 등이 재이 문제로 뵙기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음사한 무지개의 변고가 정월달에 다시 발생하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이 전일보다 배나 됩니다. 앞으로 무슨 화란이 있으려고 먼저 이런 조짐을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비망기를 보건대, 상께서 크게 경외하시어 잔치하는 예를 정파하시니 신하들이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하늘에 대응하는 도리는 반드시 일마다 성실하게 한 연후에 하늘의 마음에 보답할 수 있고 백성들의 기대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경연을 오랫동안 폐지했던 나머지 특별히 주강을 개최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하들의 기뻐하는 마음을 더욱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마음을 항시 갖고서 게을리하지 않는다며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온천에 다시 가시겠다는 거조에 대해서는 모두 우려됩니다마는 지난해에 행행하시어 이미 신통한 효험을 거두었으므로 감히 취소하기를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재변이 이러한데 자전을 모시고 멀리 수백 리 밖에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그럴 시기가 아닐 듯합니다. 또 자전께서 오랫동안 깊은 궁전에 거처하셔서 수고롭게 움직인 적이 없으시니 먼길에 몸을 요동시키는 것은 실로 다칠 우려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이런 염려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자전의 병환은 전적으로 습열로 말미암은 것이니 무더운 여름 장마철이 되면 병환이 더칠 것이다. 지금 만약 온천에 가서 습열을 제거한다면 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기에 온천에 가겠다고 하는 것이 어찌 즐거워서 하려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부득이해서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서로 잇달아 진달하였으나, 상도 누누이 개유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만화가 아뢰기를,
"만약 끝내 어쩔 수 없다면 매사에 폐단을 십분 줄여야 하겠습니다. 청컨대 이러한 뜻으로 도신에게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제왕이 정치하는 근본은 학문하는 데 있는데, 불행하게도 성상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오랫동안 법연을 정지하셨으니 신하들의 걱정이 항상 여기에 있었습니다. 오늘에 와서 비로소 경연을 열도록 하시니 신하들이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만약 이 마음을 항상 갖고서 거두지 않으신다면 어찌 하늘에 실지로 응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강학하는 공부는 학문하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니 초야에 있는 유신을 불러서 공부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시열과 송준길이 있는 곳에 사관을 보내어 부르도록 하고 이유태와 윤선거도 아울러 부르도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지난 겨울에 여러 신하들이 원자의 책봉 문제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가을을 기다려 행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책(史冊)을 상고해 보니 한나라 때는 가을과 겨울에 행한 일이 전혀 없고 진나라 이후에 혹 있었으나 역시 드물었습니다.
대개 옛사람은 좋은 일은 반드시 장양(長養)하는 계절에 행하였습니다. 올봄에 비록 미처 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여름철에라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강학할 때에 익히 살펴보니 대정(大庭)의 예를 감당하지 못할 우려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아이가 깊은 궁중에서 자라 전혀 본 일이 없으므로 대례를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제신들이 모두 애써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대신들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이성이 아뢰기를,
"비망기에 군공(群工)을 책려한 전교에 대하여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모든 일은 근본이 있기 마련이니 상께서 몸소 행하시어 솔선하신 다음에 백관들이 관직에 충실하는 효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본관의 일로 말한다면 상께서 자주 강연을 여신다면 관중의 모든 신하들이 항상 문자를 보게 되어 이익된 바가 있겠습니다마는 근래에 경연을 폐지한 지가 오래되어 옥당은 잠자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서울의 아문 및 외방의 일을 모두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원수가 명철하면 팔다리가 훌륭하고 원수가 게으르면 팔다리가 게을러진다.’ 하였습니다. 상께서 진실로 진작 분발하신다며 여러 신하들도 마땅히 하교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분주하게 직책을 받들 것이며 상께서 진실로 능히 시비를 밝히신다면 신하들이 누가 감히 방자하게 붕당을 지어서 국사를 염려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고, 세당이 아뢰기를,
"적곡과 군포에 대한 인족(隣族)을 침징하는 우려는 그 폐해가 극심합니다. 조정에서 이러한 폐단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훗날의 경비를 염려하여 끝내 변통하지 않으니 지금 비록 모두 탕척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서울의 아문에서 부채를 징수하는 예에 의하여 그 촌수(寸數)를 정하고 단지 가까운 일가에게만 징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오늘날 모든 도가 다 흉년이 들었지만 경기가 더욱 심하니 대동미의 말수를 양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에도 흉년에 감봉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강을 개최할 때에 대신들과 강정하겠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외인들이 다 말하기를 근래에 궁궐이 엄하지 못하다고 하니 신은 이 일이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어찌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궁중은 마땅히 엄밀한 것을 위주로 해야 하니 밖의 말이 안에 들어오거나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쇠퇴한 세상의 일인 것입니다. 더구나 재변을 만난 때에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성이 아뢰기를,
"근래 조정의 체면이 엄하지 않아서 한번 서로 바로잡는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마구 떠들면서 쟁변하곤 합니다. 대사헌 이상진이 지난 가을 상주는 일 때문에 상소했던 내용 중에 구별하여 차등을 두라는 말이 물의의 비난을 받았었는데, 이번에 상진이 상소하여, 옥당 사람들이 갑자기 한마디 하여 독단적으로 처치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실로 조정의 체면에 관계되는 것이고 또 뒤 폐단을 여는 일입니다."
하고, 복양은 아뢰기를,
"상진의 일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심재가 아뢰기를,
"비상한 재해를 마나면 마땅히 비상한 거조로 응해야 합니다. 예로부터 임금에게는 본디 사재(私財)가 없었습니다. 중고(中古) 이후에 비로소 있게 되었는데 이는 정대(正大)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만일 내수사를 혁파하신다면 민심이 어찌 흡족해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면 하늘도 반드시 따라주는 것이니 민심이 기뻐하게 된다면 천재(天災)는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內司)를 설치한 것은 오래전 일이므로 오늘날 가볍게 의논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정이 아뢰기를,
"각 아문의 둔전이 백성에게서 각박하게 거두어 들여 조그마한 것도 남기지 아니하니 즉 호조의 경비에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전부터 혁파하라는 논의가 많았으나 다만 각 해당 아문이 어렵게 여겨서 혁파하지 못했습니다. 백성이 곤궁하고 재정이 고갈된 것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재물을 모으면 백성이 흩어지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것이며 병사를 거느리고 군사를 다스리는 것은 국가를 형성하게 되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인데 만약 민심(民心)을 잃게 되면 난리에 임하여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에서 여러 아문의 염초를 굽는 도구를 여기에 힘입어 사용했는데 지금 만일 혁파한다면 염초를 구울 때에 반드시 인정을 조발해야 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니, 두언이 아뢰기를,
"전번에 듣건대, 진연할 때의 사령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양 대비전에서 궁인을 뽑아들이라는 분부가 있었다고 하니, 이러한 때에 성내에 있는 궁인도 마땅히 방출해야 하는데 더구나 더 뽑아들인다는 말입니까. 이 일이 비록 허실에 대해 알 수는 없으나 이미 거리에서 들은 바가 있으므로 이렇게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이런 일이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대가 진달한 소에 대해서는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최일이 아뢰기를,
"천변이 발생하는 것은 실로 백성들의 원망으로 말미암은 것이나 먼 지방 백성들의 병폐를 상세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각도 감사로 하여금 방문해서 계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이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널리 취합해야 하니 현재 휘하에 쓸 만한 인재가 어찌 없겠습니까. 마땅히 도신에게 분부하여 방문한 다음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의 폐해와 인재에 관하여 계문할 일을 팔도 감사에게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장이 아뢰기를,
"옥당이 이미 궁금을 엄하게 하라는 뜻으로 진달하였는데, 역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대내에서 왕자와 왕손을 자주 불러 무시로 출입하게 하여서 외인들이 간혹 전하께서 후원에 나아가 노닐며 심지어 바둑과 장기를 베풀어 놓고 관람한다고 하니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말한 것은 참으로 좋다."
하였다. 세장이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강가에다 공주집의 정자를 지어주는 역사가 있다고 합니다. 천재가 심히 참담한 요즘같은 때에 비록 대궐 내의 긴급한 영선(營繕)일지라도 마땅히 정파해야 하는데 더구나 공주집의 정자를 강가에다 짓는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마는 지난해 가을에 이미 정파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후설이 아뢰기를,
"원옥을 소결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급선무입니다. 외방의 멀리 있는 백성이 오래도록 감옥에 적체되어 억울함이 가슴에 맺힌 채 고할 데가 없는 형편이니 반드시 위로 하늘의 화기를 간범하게 될 것입니다. 의당 제도에 분부하여 조속히 소결하게 하소서."
하고, 복양이 아뢰기를,
"청컨대, 문서를 사출하여 삼사와 조당에게 회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상을 더 차출하여 속히 문서를 사출한 다음 탑전에서 소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재변 때문에 상차하여, 인구하여 면직시켜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잔치를 베푸는 일은 실로 성상의 효도에 세월을 아끼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전하께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셔서 특별히 늦추도록 명하셨으니 신하와 백성들이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에 대하여 흠앙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확장시켜 간다면 앞으로는 무슨 재앙이 소멸되지 않겠습니까. 처음 온천에 갔을 때는 신이 홀로 지나친 우려를 하여 망령스레 그릇된 견해를 진달하였습니다마는 목욕을 하고 나서 특이한 효험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또 자전을 모시고 온천에 가시려 하는 것이 진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신이 하문하셨을 때에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재이가 거듭 나타나서 군정이 두려워하여 모의하지 않아도 서로 같으니 이 점에 대하여 충분히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다시 재결하여 처리하소서. 전하께서 백성을 보살피는 정사가 근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외지에 있는 곤궁한 백성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원망이 실로 전과 같으니 이것은 감사와 수령이 제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회곡(元會穀)의 포흠과 상평청(常平廳)의 모곡을 전후하여 탕척시켜준 것은 실로 다소의 백성들을 소생시키자는 일인데 제도의 각영에서 독촉이 오히려 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원망을 국가에 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제도에 엄한 분부를 내려 이러한 폐단을 단단히 개정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도하의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시민(市民)이 실리를 잃고 공가의 무역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 강촌의 백성이 생업을 포기하고 크고 작은 집짓는 일에 시달리고 있는 바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는 상방과 해조의 무역하는 비용으로 대체로 물력을 허비하는 것과 공해와 궁가의 집짓는 일을 일체 정파하여서 백성들의 힘이 피게 하소서.
안으로는 조정과 밖으로는 팔방이 공이 사를 이기지 못하여 온갖 폐단이 함께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명께서 삼무사(三無私)002) 를 받들어 사심이 없고 지극히 공정한 도리로 위에서 행하고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조정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어느 누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자기 사심을 버리고 공적인 일을 받들며 공경히 성상의 면려하는 뜻을 이어받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강연을 여는 문제를 시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봄철에 자주 경연에 임하셔야 합니다. 초야에 있는 유신도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불러들여서 전적으로 계옥(啓沃)의 책임을 맡겨 근본을 단정하게 하고 정치를 시행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1월 20일 신축
대사간 정만화가 온천에 가는 일을 적극적으로 간쟁하지 아니하고 지레 ‘간략하게 하여 폐단을 줄이라.’는 청을 발론한 것이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 하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주강을 개최하였다. 부제학 조복양, 수찬 오두인이 《심경》을 진강하였다. 지경연 김수항이 아뢰기를,
"성상의 건강이 오랫동안 조섭 중에 계셨으므로 강연을 개최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에 품달하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경연을 개최하였으니 온 나라 신민들이 누가 기뻐 들뜨지 않겠습니까. 이로부터 비록 날마다 법연에 나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약 항시 유신을 접하고 마음에 성학을 머물러 둔다면 어찌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재해를 없앨 수 없겠습니까."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오늘의 강연은 바로 법연입니다. 만약 진강하고자 하신다면 어느 공을 이루기에 불가하겠습니까. 비록 내실에서 인입하더라도 가합니다."
하였다. 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앞으로 날씨가 점차로 따뜻해지는데 경연에서 볼 일을 날마다 취품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취품토록 하라고 하였다. 강연을 파한 후에 대신 및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도의 소결 문서를 일찍이 가져와서 우상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되 당상 두 사람을 차출하여 조사하게 하라. 지금은 우선 조사한 후에 거행하려 한다."
하니,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당상으로는 김수흥과 김시진을 차하했는데 수흥은 외임을 맡고 있고 시진은 장차 연경(燕京)에 가야 하므로 모두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조사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당상관 네 사람을 더 차출하여 속히 조사해 내도록 하라."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어제 부제학이 기읍의 대동법에 관한 일로 진달한 바가 있었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기읍의 흉년이 극심하니 거두어 들일 대동미의 말수를 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기읍의 흉년든 현상은 신도 들었습니다. 진휼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으니 병오년 춘등 수미 6두 내에서 1두를 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복양이 아뢰기를,
"각도의 신역(身役)으로 포흠에 관한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황해도는 정축년 이전에 요동으로 건너갔거나 전사했거나 사망하고 포로가 되었거나 도망간 자들이 1백 82명, 평안도는 5명, 경기는 난리 전에 도망간 자가 1백 10명입니다. 이런 부류가 아직도 군안(軍案)에 있으므로 불가불 영원히 그 명단을 제거하여 각읍으로 하여금 그 대신자를 충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러 신하들이 원자 책례를 여름철에 행할 것을 청하니, 5월로 정하라고 명하였다.
1월 21일 임인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주강을 열었다. 부제학 조복양, 수찬 오두인이 《심경》을 진강하였다. 영부사 이경석이 대궐 문밖에서 상차하여 온천에 가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고 유시하기를,
"원임 대신은 오직 경 한 사람뿐인데 어찌 자주 만나보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매번 질병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생각뿐이었다. 지금 경이 궐문 밖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차자로 답하는 것이 말을 많이 하면 번잡하고 대충하게 되면 미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면유하고자 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자전의 병환이 온천에 가서 목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개유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간절하였다. 경석이 이에 물러갔다.
1월 22일 계묘
상이 눈병이 재발하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고 이어 침을 맞았다.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집의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재변이 비상하여 사람마다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대소 군정이 온천의 행행을 우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지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지난해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민간에 식량이 없어서 밥을 짓지 못하는 자도 있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기전(畿甸)과 호읍(湖邑)이 더욱 극심하여 참담하고 급박하기 그지없다고 합니다. 해청과 제도로 하여금 재해를 입은 현황을 상세히 헤아려 조속히 진정(賑政)을 시작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 산군(山郡)의 대동미는 이미 정파하고 일체 구례를 따르게 했는데 단지 구례 중에는 공물(貢物)의 유무(有無)가 고르지 않고 관수(官需)의 다과(多寡) 또한 다릅니다. 산군의 전결(田結)을 통틀어 합산하여 공물을 고르게 정하게 하고 각 고을의 관수도 의당 참작해서 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해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경상 감사 김휘(金徽)가 소장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일전에 여러 가지 신역(身役) 가운데 징수할 데가 없는 것들을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낼 적에 대략 소견을 진달하였는데, 전하는 말을 들으니 대신이 신을 어리석다고 지척하면서 비국에서 마구 떠들었는가 하면 탑전에서도 진달했다고 합니다. ‘우(愚)’라는 한 글자는 신의 본성으로서 신 스스로도 알고 있습니다. 어찌 대신의 말을 기다린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존귀함으로도 신하를 함부로 꾸짖어서는 안 되는데 대신이 비록 존귀하다 하더라도 역시 신하입니다. 그런데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매도하니 조정의 체면에 있어서 어떻다 하겠습니까. 대신이 위세를 믿고 조신(朝臣)을 능욕할 경우 조신 또한 반드시 우기(愚氣)에 사역되어 대신을 침모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김휘가 자기의 일로 대신을 침모했으니 일의 체모에 손상이 됩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휘가 사기(辭氣)를 돋우어 칭찬했다 헐뜯었다 하면서 못할 말이 없이 하였다. 대신은 체면이 자별한데 그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추문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징계하고 체면을 보존시키게 하라."
하였다.
황해 감사 강유후(姜𥙿後)가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유후는 강명(剛明)하고 청렴하여 세상에서 양리(良吏)로 일컬었다. 그러나 성질이 괴팍하고 마음이 좁아 은혜를 베푼 것이 적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부족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81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유후는 강명(剛明)하고 청렴하여 세상에서 양리(良吏)로 일컬었다. 그러나 성질이 괴팍하고 마음이 좁아 은혜를 베푼 것이 적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부족하게 여겼다.
1월 23일 갑진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는데, 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다. 흰 기운이 좌이(左珥)로부터 나왔는데 길이가 5, 6장 정도였고 구불구불하게 북쪽을 가리키다가 오래 지난 다음 사라졌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은 뒤에 부제학 조복양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전에 부제학이 김제(金堤)의 제언(堤堰)에 관한 일로 진달하면서 대신과 상의하도록 청하였다. 오늘 우상이 입시하였으므로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자 한다."
하니, 복양이 아뢰기를,
"제언의 이해 관계에 대해서는 우상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에 제언의 형세에 관하여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전라 우도에는 물줄기도 없고 저수할 곳도 없어서 만약 한재(旱災)를 만나게 되면 피해가 가장 혹심합니다. 그러므로 제방을 쌓는다면 백성들이 혜택을 받는 것이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나 제방 내에 경작하는 백성이 매우 많으므로 지금 이미 대대로 거주하면서 터전을 일구어 살아오고 있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원망하는 말이 많을 것입니다. 더구나 만약 이해 관계로 참고하여 논한다면 이로움은 많고 해로움은 적을 것입니다. 다만 이 제방이 광활하기가 짝이 없어 지금 제방을 쌓고자 한다면 역사가 매우 거창하니 본도의 감사에게 물어보고 나서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는 즉시 감사에게 이해 관계를 물어보고 속히 계문하라. 제언사로 낭청을 보내어 이해의 대소와 공역의 다과에 대하여 상세히 살펴보고 와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소결한 당상은 누가 적합한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마땅히 네 사람을 차출해야 하는데 적합한 사람을 참으로 얻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의견에는 이경휘(李慶徽)와 이상진(李尙眞)으로 차하하고 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조 판서 외에 조복양이 겸찰하고 있는 것은 다 한만한 직종이 아니니 결코 이 직책을 검찰하기 어렵다. 당상 중에 어찌 적합한 사람이 없겠는가."
하니, 허적이 이뢰기를,
"만약 당상으로 차출한다면 정만화와 민점이 이 임무에 실로 적합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경휘·이상진·민점·정만화를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재변이 발생한 날을 당하여 인재를 수습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파산(罷散)한 조신 중에 역시 쓸 만한 인재를 시험한 일이 있었으니 혹 서용을 명하면서 마치 세초(歲抄)의 규약처럼 하거나 혹 대신에게 물어서 변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떠한 사람인가?"
하자, 복양이 아뢰기를,
"김우형이 오랫동안 파산 중에 있었으나 역시 쓸 만한 인재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은상도 월령(月令)에 천신(薦新)하는 일로 연좌되어 죄를 받고서 오랫동안 서용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북로의 일이 일찍이 소신에게 명하여 주관하게 하였습니다마는 반드시 당상이 있는 연후에 모든 일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북로에 왕래하였기 때문에 북로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상관을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따랐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황해 감사 강유후가 죽었는데 이 사람이 오랫동안 변방에 있다가 객사(客死)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측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춘궁에 있을 때에 이 사람이 일찍이 궁료가 되었었는데 모습이 수척해 보였고 수염이 길었었다."
하였다. 복양이 인하여 유후의 청근 강명(淸謹剛明)한 점을 들어 칭찬하니, 상이 애석하게 여기고 연로(沿路)에 위치한 각읍으로 하여금 상례를 돕도록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에게 안구마를 하사하고, 고 판서 이일상, 도승지 이경억, 의관 이동형·권유 등에게는 아울러 가자하도록 하였는데, 지난 가을 자전이 편찮았을 때 시약청에 있었다는 이유로 논상한 것이다.
민점(閔點)을 경상 감사로, 이상일(李尙逸)을 황해 감사로,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응교로, 민희(閔熙)를 좌부승지로, 정태화(鄭太和)를 책례 도감 도제조로, 윤강(尹絳)·이완(李浣)·정지화(鄭知和)를 제조로 삼았다.
1월 24일 을사
감시 초시에 입격한 권국형(權國衡)은 호적에 기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명주(金命冑)·김한걸(金漢傑)·김서(金瑞) 등은 호적에 기입된 이름자가 착오가 있다는 이유로 발방하도록 하고 해조로 하여금 죄를 주도록 하였다.
박장원을 예조 판서로, 오정위를 경기 감사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김우석을 우승지로, 김수흥을 도승지로 삼았다. 당시에 민희가 소결청 당상으로 경상 감사가 되어 나가 있었기 때문에 수흥으로 대신한 것이다.
사간 정계주 등이 계청하여 온천에 가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원자(元子)가 보양관 박장원(朴長遠)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다.
1월 25일 병오
상이 양심합에 나가서 침을 맞았다.
지평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김휘(金徽)가 자신의 일로 대신을 욕보였으니 보고 들은 사람은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미 파직 추고하게 했습니다만 그가 범한 죄는 해당되는 율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추문하라는 뜻으로 간통(簡通)을 발하였으나 동료들의 의논이 끝내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어찌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 이민적(李敏迪), 장령 성후설(成後卨), 지평 소두산(蘇斗山)도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들은 김휘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잡아다 추문한다는 것은 너무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서한(西漢) 때 가장 대신의 예모(禮貌)를 높였었는데 적방진(翟方進)이, 연훈(涓勳)이 대신에게 비난과 모욕을 가했다는 것으로 탄핵하였으나 관직에서 파면되었을 뿐이었으며, 수년 전 번신(藩臣)이 또한 대신(大臣)에게 비난과 모욕을 가한 자가 있었는데 체직시키는 데에서 끝났습니다. 신들의 소견이 이와 같은데 어찌 구차스럽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응교 이정 등이 처치하며 나문을 청하는 것을 너무 지나치다고 하고, 최관은 체차하고 이민적 등은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가 김휘에게 공척을 받았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은혜로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감시 시관을 대부분 질병이 있는 사람으로 구차하게 의망했다는 이유로 예조 참판 남용익, 참의 이진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밤에 화성(火星)이 태미 동원 안으로 들어갔다.
1월 26일 정미
김시진을 예조 참판으로, 강백년을 참의로 삼았다.
전라도에 여역이 치성하였다.
금산(錦山)의 민가에서 소가 몸통은 하나에 머리가 둘인 송아지를 낳았다.
전라 감사 민유중이 장계를 올리기를,
"도내(道內)의 민전(民田)과 양안(量案)에 주인이 없는 곳과 양안에 기재된 이외에 가경(加耕)한 곳은 모두 여러 궁가(宮家)에서 떼어받아 버렸습니다. 대저 송사(訟事)를 청리하는 방법은 전토(田土)를 다투는 것일 경우 하나는 일찍이 입안(立案)을 받았고 하나는 그 자신 스스로 개간(開墾)했다면 입안받은 자를 척퇴(斥退)시키고 개간한 자에게 결급(決給)하는 것이 바로 범례인 것입니다. 만일 궁가에 대해 개간한 것의 오램은 계산하지 않고 오직 주인이 없다는 것을 증거로 삼아 아울러 빼앗아 점유하게 한다면 백성들의 원통함이 딱할 뿐만이 아니라 국체(國體)에 있어서도 부당할 것 같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호조가 회계하기를,
"떼어받기 전에 경작하고 있던 것은 문권(文券)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울러 환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안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권이 있으면 내어 주고 문권이 없으면 내어 줄 수 없다. 일체 문권(文券)의 유무에 따라 결정하라."
하였다.
1월 27일 무신
상이 침을 맞았다.
집의 이민적, 장령 성후설, 지평 소두산 등이 조율 공사에서 규례를 어긴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28일 기유
해에 곁무리가 있었는데 안쪽 무리에 양이가 있었다. 흰 기운이 좌이에서 나왔는데 길이가 3, 4척이었고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상이 침을 맞았다.
이유(李秞)를 집의로, 맹주서(孟冑瑞)를 장령으로, 유헌(兪櫶)·어진익(魚震翼)을 지평으로, 박세모(朴世模)를 형조 참판으로, 이후산(李後山)을 참의로, 이상진(李尙眞)을 우윤으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에 연신이 진달한 적곡과 군포를 단지 인족에게 징수하라는 일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갑진년에 간원이, 빚을 진 자의 경우 친부자와 이외에는 침징을 허락하지 말라는 뜻으로 논계하였는데 본사에 계하하였습니다. 본사가 소원한 데까지 침징하는 것은 이치상 불가하겠지만 친부자 외에 3, 4촌 친척까지 아울러 거론하지 않아서 길가는 사람처럼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으로 복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간원이 본사의 복계가 불가하다고 하여 다시 친부자 외에 침징하지 말기를 청하여 또한 윤허를 받았었으니, 그것이 이미 정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들은 3, 4촌을 두고 묻지 않는 것이 결국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서 받는 세금과 군포는 각 아문에서 받는 부채와는 같지 아니하니 촌수법으로 정하는 것은 불가하다. 제도에 분부하여 단지 그 소원한 족속에게 침징하는 폐단만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9일 경술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흰 기운 한 가닥이 해곁에서 일어나 곧바로 서방을 가리켰는데 하늘 끝까지 뻗쳤으며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은 후에 대신 및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영부사 이경석의 차자로 인하여 본조에 비축해둔 대두를 도민과 기전에 분급하라는 일로 이미 정탈하였습니다. 6천 석은 경기 백성에게 분급하고 4천 석은 도민에게 분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도하에는 4천 석을, 기내에는 6천 석을 분급하는 것은 모두 넉넉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근래에 흉년이 들어서 각읍의 세두를 이미 감봉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금년 농사가 만일 다시 지난해와 같다면 앞으로의 일이 실로 염려됩니다. 만석 외에 더 지급하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컨대 경기 백성에게는 7천 석을, 도민에게는 3천 석을 분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치화가 아뢰기를,
"각읍의 환자곡은 만일 세전에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면 으레히 세후에 받아들였습니다. 상년의 환자곡은 열읍에서 받아들인 것이 혹 3분의 1이 되고, 혹 4분의 1이 되는데 세후에 조정에서 받아들인 것을 정지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수령이 받는 것을 독촉하지 않았습니다. 근년에 연달아 흉년이 들어 팔로의 환자곡을 받아드리지 못한 것이 태반이나 되는데 만약 큰 흉년이 들게 되면 진구할 자본은 어느 곳에서 책출하겠습니까. 신이 전번에 충청도에 가서 도신의 말을 들어보니 역시 신이 우려했던 바와 같았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능주 목사(陵州牧使) 민여로의 말을 들어보니 호조 판서의 말과 크게 서로 같지 않았습니다. 민여로는 말하기를, 각읍의 환자곡은 세후에도 독촉하여 마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그 고달픔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조운선이 파선된 경우, 언덕으로 인하여 일부러 파선시키는 자도 있고 혹 풍랑을 만나 뒤집힌 경우도 있는데 일부러 파선시킨 자는 진실로 중법으로 다스리고 그 쌀을 징납해야 하지만, 배가 뒤집힌 경우에는 진실로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사공과 곁군을 가두어 놓은 경우가 심히 많으니 그 중에 원망하고 있는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지금 재변을 만나 소결하는 날을 당하여 분간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양남 감사가 되었으므로 이 일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전부터 강진(康津)·해남(海南) 양읍에서는 배가 뒤집히는 우려가 없는 해가 없었으므로 배를 뒤집히게 한 자를 참수한 뒤부터 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이 일로 본다면 배를 뒤집히게 한 자는 대부분 고의적으로 뒤집히게 하여 도적질을 한 자들이니 결단코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충훈부(忠勳府)에서 거두어 들인 충의 단자(忠義單子)를 병조로 보냈는데 6천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허위로 기록된 자들이 필시 많을 것이므로 입으로 전하지 말고 우선 머물러 두었다가 조사하여 바로잡는 일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종부시(宗簿寺) 선원록 단자(璿源錄單子)에도 허위로 소속된 자들이 많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일체로 분명하게 조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홍중보는 충훈부의 당상이니 훈부에 허위로 소속된 자들을 중보로 하여금 사정토록 하고 선원 단자는 본시로 하여금 사정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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