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신사
햇무리가 지고 흰 기운이 서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햇무리 위를 가리켰다. 길이가 12장이었는데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3월 2일 임오
도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삼가 살피건대, 한성부의 호적 사목 가운데 ‘나이를 1년 이상 늘리거나 줄이면 죄를 적용한다.’는 법이 있는데, 사대부의 노비로 밖에 거주하는 자의 나이는 실로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문기(文記)에 기재된 나이를 범연히 써서 올렸다가 노비들이 거주하는 고을에서 또 단자를 올리면 나이가 어긋나는 사례가 반드시 많을 것이고 따라서 죄를 면하는 사대부가 드물 것이니, 몹시 난처한 일입니다. 이 한 조항은 참착하여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의 입작(入作)008) 한 무리들이 열 명이나 백 명씩 떼를 지어 신역을 피하기 위해 산골짜기 속에서 살고 있는데, 명적(名籍)이 관가(官家)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일종의 교화를 벗어난 백성이 되었으니, 신의 생각에는 입작한 이들의 호적에 대한 한 조항을 별도로 만들어서 그들의 원래 본향(本鄕) 및 양천(良賤)의 신역(身役)을 모두 사실대로 써넣도록 하되 호적에 빠졌을 경우에는 논죄(論罪)하는 법을 평민에 비해 한층 더 무겁게 하면 비록 한꺼번에 정돈하기는 어렵더라도 혹 그 효과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3월 3일 계미
상이 눈병이 나서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이경억을 형조 참판으로, 신명규를 장령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책례(冊禮) 때 이름을 들어 종묘에 고하는 예가 있습니다. 정부(政府)·관각(館閣)의 당상과 육조의 참판 이상으로 하여금 빈청에서 회의하여 이름을 정하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4일 갑신
상이 침을 맞았다.
식년 문과에 이후징(李厚徵) 등 38인, 무과에 차정철(車廷轍) 등 61인을 뽑았다. 문과·무과에 모두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한 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평소의 인원수보다 많았다.
3월 5일 을유
사헌부가 아뢰기를,
"궁가(宮家)가 장수(長水)·임실(任實) 등의 고을에 떼어받아 마구 차지한 토지를, 떼어받기 전에 개간했던 백성에게 돌려 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조복양이, 재변과 흉년에 대해 상소하여, 자책하여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한마음으로 공경하여 실덕을 닦으며 정열을 쏟아 의리를 궁구하고, 신하들을 자주 인접하여 정사에 대하여 강론하고, 널리 훌륭한 신하들을 구하여 천직(天職)을 다스리도록 하며, 충간하는 선비들을 나오도록 장려해서 언로를 넓히며, 궁중의 금법을 엄히 하여 내외의 방비를 삼가며 검약의 절제를 숭상하여 표솔하는 방향으로 삼을 것이며, 번거로운 일을 파탈하여 관대한 정치를 행하도록 힘쓰며, 백성들의 곤궁한 점을 불쌍히 여겨 항시 보호하려는 생각을 가져서 반드시 위로는 하늘의 뜻에 합당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에게 상주는 문제에 대하여 양사가 쟁집한 지 해를 넘겼는데 이것이 무슨 큰일이기에 이렇게까지 고집하십니까. 사체를 손상시킨 것이 실로 작지 않습니다.
오두인이 실지가 아닌 일을 진달한 것은 진실로 상세하게 살피고 신중을 기하지 못한 실수가 있지만, 들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도리에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부실하다고 배척하여 현저하게 성색을 보이시니 신하가 임금에게 진언하는 것은 예로부터 지난하게 여겼는데 진실로 실지가 아니라는 것으로 배척한다면 실질적인 일이 상에게 보고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미세한 일이나 언로에 관계되는 점이 있으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를 염려하고 나를 아끼는 정성을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상소 끝에 언급한 일에 대해서는 나는 경의 말이 반드시 적합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3월 6일 병술
상이 침을 맞았다.
이민적을 부응교로, 오두인을 교리로 삼았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제멋대로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입작(入作)들의 호적은 정원이 아뢴 대로 한껏 엄밀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호적에 빠진 자에 대한 법률이 이미 전가 사변인 이상, 정원의 계사처럼 한층 더 중하게 한다면 사형에 해당되므로 너무나 무거우니 부득이 평민이 호적에 빠졌을 경우와 똑같게 입법(立法)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공천(公賤)·사천(私賤)은 모두 사조(四祖)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모명(母名)과 관주(官主)는 쓰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 쪽의 공천·사천 여부를 분변하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송사를 벌이는 폐단이 많아질 것입니다. 모명과 관주도 모두 기록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3월 7일 정해
상이 침을 맞았다.
상평청이 아뢰기를,
"죽을 마련하여 진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굶주린 백성을 위한 호구책인데 지금 죽을 먹는 3, 4백 명은 대부분 사대부집의 노비들이고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은 약간명에 불과하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가난한 선비가 그 노비를 먹일 수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는 우려가 있는 경우에 기민으로 치부하는 것은 가한 일이지만 관직에 있는 사대부의 노비까지 기민으로 등록하여 일체 죽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진휼청을 설치한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청컨대, 각부로 하여금 의지할 데 없는 백성을 조사하여 규례에 따라 죽을 내어 주고 사부의 환과 고독자로 식량이 떨어진 집에는 마른 양식을 지급해 주어서 굶어죽는 우려가 없게 하소서. 성중에 여역이 한창 심하니 두 활인서로 하여금 병막(病幕)같은 것을 내주게 하고 마른 식량과 염장을 헤아려서 지급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장령 맹주서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의성 현령(義城縣令) 채익준(蔡翊俊)이 감사에게 일일이 올린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도내의 유생 1백여 명이 상소에 대한 모임이라 하여 관문 앞길을 가로막고 관리와 백성을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을 아전을 잡아다 놓고, 읍쉬를 수죄하면서 취각하여 관아에 앉아 있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며 모든 진배하는 것도 융숭하게 대우하는 뜻이 결여되었다고 크게 위엄을 부리며 마구 매질하고, 어린 아이 30명을 사환으로 채우도록 하였으며, 상배(床排) 2백을 장만하도록 하는 등 갖가지 물종을 공공연하게 각면에 분정한 것이 베는 2백 54필, 술은 3천 1백 72선이었고 고기와 과일 등도 이에 맞게 하였으며, 심지어 향교 노비를 멋대로 면천시켜 주고 면포(綿布)를 받아서 주식(酒食)의 밑천에 썼다고 합니다.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우며 법을 무시하고 피해를 끼친 죄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앞장서서 선동한 자를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서 죄를 주도록 하소서.
감사 김휘는 익준이 보고한 것을 보고도 이미 체차하였다고 핑계대고 끝내 덮어 두었으니 도내를 안찰하는 도리를 크게 잃었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엊그제 본조의 계사로 인해 인종이 책례할 때의 관대와 복색에 대하여 사관을 보내어 《실록》에서 상고해내어 가지고 오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에 따라 면복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사관의 서계 가운데 그 당시의 삼공(三公) 및 예조가 관례를 의논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두씨통전》009) 의 황태자구복원유관(皇太子具服遠遊冠) 대목의 주(註)에 「만약 아직 관례를 치루지 않았으면 쌍동계(雙童髻)로 한다.」 하였으니, 이로 보건대, 관례를 치루지 않고 책봉을 받을 경우에는 별도로 착용하는 관이 있으나 그 제도는 지금 고찰할 수가 없다.’고 하였고, 하나는 ‘비록 하루만 계발(髻髮)하고 도로 동자의 관을 쓴다고 하더라도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다. 책봉할 때에 총각(總角)의 차림을 하면 백관이 누구나 세자가 관을 쓰지 않은 것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것이므로 나중에 예를 거행해야 함이 분명해진다.’ 하니, 전교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똑같으니 의논한 대로 거행하라…….’고 하였고, 그 아래에 왕세자를 책봉하는 글이 있는데 ‘모든 의절에 대한 주석은 《오례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그때에도 관례를 치르기 전에 책례를 행하였기 때문에 전후 의논하여 아뢴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책봉할 때 총각의 차림으로 의논이 모아져서 예를 거행했던 것이 틀림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이 역시 의주에 근거할 만한 조항이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 최유상(崔有祥)의 집에 불이 나자, 유상이 거센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어머니 신주를 안고 나오다가 심한 화상을 입어 끝내 죽고 말았다. 도신이 이를 계문하니, 정문을 세워주라고 명하였다.
3월 8일 무자
상이 침을 맞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책봉의 예에 관복 문제로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말하기를 ‘관례를 치르기 전에 책례를 치르는 경우에 대하여 고전(古典)과 국제(國制)에 증거할 만한 일이 분명하나 어린 나이에 관례를 하는 것은 고례에 어긋납니다. 후일에 퇴행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근거할 곳이 있습니다. 의주에 대해서는 유사에게 물어보소서.’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말하기를 ‘왕세자를 책봉할 때에 면복으로 예를 행하는 것이 《오례의》에 실려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조종조에 책례를 어린 나이에 하게 되면 임시로 망건을 쓰고 예를 지낸 후에 다시 총각을 한다 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신은 관복 일체에 대해서 일찍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조의 계사 중에 《실록》을 상고한 내용을 보건대, 비록 하루 동안 계발하고서 다시 동자의 의관을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니 신이 이에 비로소 전에 들은 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쌍동계에 면류관을 쓰는 것이 불편한 일이 없으니 이에 의하여 마련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좌상 홍명하가 헌의한 것도 역시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형조의 공사를 취해보니, 죄인 윤선도가 이배할 때에 남여(藍輿)와 짐꾼을 지급한 수령을 추고하여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는데 단지 속전(贖錢)만 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니 신들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 당시 수령이 선도가 사적으로 전달한 문자를 근거로 민정(民丁)을 많이 내어 짐을 나르게 하고 호송과 음식 제공을 하는 등 거느린 인마가 마치 사명을 받고 가는 행렬과 같이 하였으니 놀라운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국법을 멸시하고 죄인을 비호한 죄가 어찌 속전만 받고 말 정도이겠습니까. 청컨대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0일 경인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흰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곧바로 서쪽을 가리켰다. 길이가 10여 장이었는데 오래 있다가 사라졌다.
상이 침을 맞았다.
원자(元子)의 이름을 정하는 일로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으로서 이품(二品) 이상인 관원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원자의 이름을 오늘 사시(巳時)에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두 글자를 쓸 것인지 한 글자를 쓸 것인지 및 한 글자를 쓴다면 무슨 변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 반드시 먼저 품지해야만 바야흐로 의논해서 정하고 길시(吉時)를 가려 서계해서 수점(受點)할 수 있겠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글자를 쓰되 불화변[火]에서 글자를 택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원자의 정명 단자(定名單子)를 써서 들였는데, 광(爌) 자로 낙점을 받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원자의 이름을 이미 정했으니 자(字)도 정해야 되는데, 관례를 치른 후에 자를 정하는 것이 고례(古禮)입니다마는 어떻게 할 것인지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례에 따라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우형(金宇亨)을 동부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부수찬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좌윤으로 삼았다.
일본이 차대 등성륜(藤成倫)을 보내어 표류한 왜인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했는데, 본도의 도사를 접위관으로 삼아 접대하게 하고 글을 만들어 답례하게 했다.
3월 11일 신묘
상이 침을 맞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도 연해 각읍의 소금을 굽는 지역에 수영(水營)에서 행하는 염무판(塩貿販)·갑절미(甲折米) 등의 일이 있습니다. 이른바 염무판이라는 것은 쌀과 베를 포민(浦民)에게 분급하고 소금을 강제로 책정하여 무납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시가에 비추어 보면 현저히 싸므로 이름은 비록 매매라고 하지만 실지로는 빼앗아 가는 것이라 합니다. 이른바 갑절미란 봄철에 1백 석을 포민에게 분급하고 그해 가을에 2백 석을 거두는 것이니 궁핍한 포민이 명을 감당할 수가 없이 떠돌이 생활하는 것이 10에 8, 9나 됩니다.
또 군정(軍政)에 후지(厚紙)를 거두는 일이 있는데 이른바 후지란 수군이 세초에 계문하는 종이입니다. 종이의 가격을 미포로 결정하여 열읍에서 주관하여 수합해서 납부하는데 계문하는 종이가 들어오는 것이 지극히 적은데 이것으로 명목을 삼아 신역이 편중되어 있는 수군에게 징수하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습니다. 이것이 다 호서의 연해 지역에 유래되는 병폐이니, 청컨대 일체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사실대로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3월 13일 계사
남이성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은 뒤에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실 날짜를 이미 잡았는데, 충청도 군병(軍兵)은 반드시 먼저 표신(標信)을 보내야 징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미리 여쭈어 처리하라고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장관(將官)과 금군장(禁軍將) 등이 궐내에 입번하는 일은 모두 작년의 예에 따라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그리고 이 밖의 모든 일도 다 작년에 거행한 대로 따라서 하라."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마병(馬兵)은 양전(兩殿)의 중간에서 호위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만, 금군(禁軍)의 수가 1천 명이므로 어수선한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자, 공조 판서 이완이 아뢰기를,
"행군하는 규정에는 마병이 당연히 보병의 앞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외방의 군사로 하여금 길 왼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거가(車駕)가 통과하고 난 뒤에 그대로 후대(後隊)가 되도록 하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달의 거센 바람은 실로 근고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화변이 언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드시 그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거둥이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일이기는 하나, 항상 경계하시고 조금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완에게 이르기를,
"천총 1인으로 하여금 도감군을 거느리고 작문(作門)010) 의 안에서 호위하게 하면서 문을 열고 닫을 때 호각을 부는 임무도 겸하게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구인기가 총융사로서 뒤에 쳐졌다가 수원에 남아 있게 되는데 도신도 수원에 남아 있으면 수원이 반드시 곡물을 잇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인기로 하여금 도성 안으로 도로 들어가서 경기를 통괄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는 남양(南陽)·안성(安城)·양성(陽城) 등의 고을을 왕래하면서 머무르게 하고, 인기는 산성에 머물면서 산성의 곡식을 가져다 먹게 하여 본부(本府)에 폐해가 없게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자전께서 궁(宮)을 나가실 때 연(輦)을 타실 것입니다만, 강을 건넌 뒤에도 연을 타실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비록 교자를 탄다고 하더라도 빈 연도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조가 올린 온천에 갈 택일 단자에 대하여 상이 이 달 26일로 온천 거둥의 날짜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충청도에 돌림병이 크게 돌아 50여 인이 사망하였다.
3월 15일 을미
이조 판서 김수항이 상차하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우셔서 원자의 훌륭한 바탕이 일찍이 창달하여 아름다운 소문이 크게 전파하게 하였으니 오늘날 종묘 사직의 경사가 무엇이 이것보다 크겠습니까. 돌아보건대, 무상한 신이 외람되어 보양하는 반열에 참가하게 되어 매번 강석에 나아가 감당할 수 없는 예를 받으면서 훌륭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접하고 송독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에 여러 동료와 말하면서 영화롭게 여기기도 하고 두렵게 여기기도 하였으며, 돌아와 조정 신하에게 말하면서는 기쁨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효경》 한 책을 지금 이미 다 읽어 덕기(德器)와 학업이 때로 민첩해지고 날로 나아가니, 신의 기뻐하는 마음은 실로 다른 사람보다 만 배나 됩니다. 다만 신이 생각건대, 관원을 두어 보도하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장구(章句)를 강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개 외부의 신하와 가까이해서 경계하는 마음을 더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록 배운 것을 복습하기 위하여 우선 강학을 철회하더라도 그 사이에 진견하는 일을 폐하여 세월이 오래 흘러버리게 되면 그것은 합당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마땅히 기간을 정하지 말고 수시로 인접하여 전에 배운 글을 되새겨보도록 하여 총명에 도달하게 하되 어린 나이부터 현사와 대부를 접견할 때가 적고 환시와 공첩을 가까이할 때가 많은 것을 경계하게 하소서.
신이 듣건대, 옛날 성왕이 세자를 가르칠 때에 태부(太傅)는 앞에 두고 소부(少傅)는 뒤에 두며 들어오면 보(保)가 있고 나가면 사(師)가 있어서 지각이 있는 어릴 때부터 효(孝)·인(仁)·예(禮)·의(義)의 도리로 개유해서 거처하고 출입할 때에 돌보지 않는 일이 없고 의복과 음식에도 모두 잠규(箴規)를 두어 한 걸음도 정직한 사람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잠시라도 반드시 정도를 말미암도록 하였으니 그 보도(輔導)하는 방법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규모는 옛날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안팎이 단절되기도 하고 진퇴하는 것도 시기가 있어서 비록 훌륭한 덕을 갖춘 선비로 하여금 맡게 한다 하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을까 걱정인데 더구나 신같이 하찮은 자의 경우이겠습니까. 가령 신들이 날마다 나아가 뵈온다 하더라도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과 평상시 생활에 대해서는 신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것은 오직 전하께서 일에 따라 이끌어주고 옳은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안일에 익숙해지게 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급박한 데 얽매이게 해서도 안 되며, 반드시 충분히 지도해서 이 양쪽의 도리를 다한다면 아마도 싫증을 내 오래 유지하기 어려운 병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추구해보면 또한 전하께서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기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전하의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행동이 원자의 학습 대상이 아닌 것이 없으니 진실로 소소한 일일지라도 삼가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하며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무슨 일이든 하늘의 법칙을 따라 모두 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항상 성조(聖祖)께서 도심을 중요시한 훈계와 선왕(先王)이 큰일을 해보려 한 뜻을 마음에 다짐해 보고 몸으로 징험해 보아서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가법으로 삼으소서.
또한 궁궐 안을 엄숙하게 하고 사특한 길을 막아서 아첨이나 떠는 심술이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즐기며 놀 물건을 드리는 일이 없게 하여 그런 것을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근본이 되는 일을 잡아서 밝힌다면 이모유후(貽謀裕後)하는 도리가 실로 여기에서 기초하게 될 것이니 성상의 몸에 이익되는 바가 어찌 작겠습니까.
《서경》에 이르기를,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자신의 철명을 스스로 결정짓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오직 성명께서는 더욱 신경을 쓰소서."
하고, 이어서 보양관의 직책을 사양하니, 답하기를,
"과인을 경계시켜 일깨워주고 원자를 보양하는 뜻이 지극하다 하겠다. 국가와 나라를 염려하고 아껴주는 충성심에 대하여 나는 감탄하고 있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북청 사람 이득립(李得立)이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자, 그의 아내 김씨가 얼음 밑으로 따라 들어가 남편의 시체를 안고 죽었다. 그의 아들 이지해(李之海) 및 그의 딸이 울부짖었으나 구해내지 못하자, 또 함께 빠지니 이웃 사람이 목간(木干)을 이용하여 구해내어 둘은 죽지 않았다. 도신이 보고하니, 상이 그 마을에 정려문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병신
장령 맹주서(孟胄瑞) 등이 아뢰기를,
"대·소과(大小科)의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본부가 재이가 몹시 참혹하다는 이유를 들어 유가(遊街)·설연(設宴)을 금지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조 참판 구인기(具仁墍)와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는 문희연(聞喜宴)011) 을 열어 풍악을 울리고 객(客)을 불렀는데 낭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한 짓이 정말 매우 놀랍고 이상합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듣지 않고 추고만 하라고 하다가, 계속 며칠 동안 아뢰자 따랐다.
3월 17일 정유
장령 맹주서 등이 아뢰기를,
"지난 겨울에 사신이 왔을 때 대통관(大通官)012) 이 금천군(金川郡)에 황광피(黃獷皮)013) 1백 여 벌을 요구하기에 그 군에서 사다가 주었는데, 송도(松都)의 부상(富商)이 은밀히 통관(通官)에게 촉탁하여 일부러 퇴짜를 놓게 하고는 자기의 물건으로 대납한 다음, 그 값으로 쌀 60석을 본군에 독촉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도(江都)의 신(申)씨 성을 가진 사람은 통관의 일가붙이로서 중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해서(海西)에서 식물(食物)과 쌀 50석을 얻어서 돌아오는 쇄마(刷馬)에다 나누어 실어오려고 꾀하였습니다.
저들이 요구하는 폐단이야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우리 나라 사람에 있어서는 생살(生殺)의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데, 어찌 그들이 하는 대로 놔두어 끝없는 폐단을 열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본도와 강도(江都)로 하여금 부상 및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을 적발토록 해서 극형의 죄로 논하소서. 그리고 사신이 올 때에 일로(一路)에서 접대하는 일은 전적으로 원접사(遠接使)에게 달려 있으니, 제대로 금지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원접사인 박장원(朴長遠)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8일 무술
대사간 정만화(鄭萬和)가 아뢰기를,
"재령 군수 한희설(韓希卨)은, 어떤 사람이 누구를 무함한 소송을 내었는데, 당초 자세히 살피지 않아 죄없는 사람을 죽였고, 자신이 잘못하였다는 것을 깨닫자 또 고발한 사람을 죽이는 등 전후로 죽인 사람이 3명이나 됩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보고하게 한 다음 법에 따라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0일 경자
이경억(李慶億)을 경기 감사로,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포구를 판 일이 있었는데 백성의 전답이 매우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전에 본부가 논계하여 본도로 하여금 엄히 금하게 하였는데도 이익을 노리는 무리들이 금령을 무시한 채 조정에 보고하였다 하기도 하고 본도에 보고하였다 하기도 하고는 거리낌없이 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하여 곤궁한 백성으로 하여금 생업을 잃게 하였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일을 맨 먼저 주도한 사람을 엄히 조사해 내게 하여 중하게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뵙기를 청하여 입시한 다음 온천에 거둥할 때 거행할 절차에 대해 여쭈어 정하였다. 그 일이 끝나자, 상이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의 상소를 꺼내 도승지 김수흥으로 하여금 읽게 한 다음 이르기를,
"서(庶) 자가 두 가지 뜻이 있는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의례(儀禮)》의 주소(註疏) 중에 있는 ‘부정지서(不正之庶)’의 서(庶) 자는 첩에게서 난 아들을 말한 것인데, 중자(衆子)도 통틀어 서자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서(庶) 자는 중(衆) 자의 뜻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예적(禰嫡)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단지 그 아비의 뒤만 계승한 적자인데, 할아버지 입장에서 볼 때는 서손이 되니 이는 중자에게서 난 장자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둘째 아들 역시 서자라고 한다는 서(庶) 자를 그는 첩에게서 난 아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던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읍고(伯邑考)에 대해 한 말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백읍고는 무왕(武王)의 형인데, 문왕(文王)이 그를 버리고 무왕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만약 문왕이 백읍고에게는 삼년복을 입어주고 무왕에게는 기년복을 입어주었다면 주(周)나라의 왕통은 이미 끊어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흉칙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소현(召顯)의 상 때 예조에서 상복에 대한 의논이 있었는지 찾아 써서 들이게 하라."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송시열의 의논은 ‘소현의 상에 인조 대왕께서 장자의 복으로 입어 주었으니, 세자로 서지 않았던 백읍고와는 다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설가들은 마치 송사하는 자들과 같다.’라고 고인이 말하였으니, 지금 세철 등이 예만 논한다면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뜻은 사실 이를 의탁해 무함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신들이 그 소를 받아들일 때에 이러한 뜻을 대략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소(元疏)를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원의 계사에 대해서도 즉시 비답을 내리지 못하였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복제(服制)를 의논하여 정한 지 이미 8년이나 지났는데도 일종의 사특한 논의가 서로 잇따라 일어났고 오늘날에 와서 또 이런 상소가 있으니 앞으로의 염려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믿는 것이라고는 성명께서 위에 계신 점뿐입니다."
하였다.
3월 21일 신축
상이 구인기를 서용하여 총융사에 제수하고, 좌의정 홍명하(洪命夏)에게 유도(留都)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청하기를,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 및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총융사 및 경기 감사로 하여금 수원(水原)의 군병을 징발하여 한강가에서 대기하도록 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2일 임인
장령 신명규가, 그의 아들이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기에 어버이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었는데, 금령을 어기고 말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좌상 홍명하(洪命夏)와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거둥하실 날짜가 며칠 밖에 안 남았는데, 영상이 예를 의논할 때 수상이었다는 이유로 감히 공무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그가 영남 유생들이 올린 소에 대한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려서 진정(陳情)하고 나가려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소에 대한 비답은 방금 내렸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당초에 복제(服制)를 유신(儒臣)들이 단독으로 정한 게 아니고 대신(大臣)과 서로 의논한 끝에 결국 국제(國制)로써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목(許穆)의 상소가 한번 나오자 뒤이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급기야 오늘날에 와서는 또 이번의 상소가 있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종묘에 고하자고 하였으니, 그 속셈이 실은 송시열을 극도의 죄에 빠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습니까. 서자(庶子)를 첩자(妾子)라고 한 설은 허목이 처음 제기한 것으로서 ‘첩자고(妾子故)’라는 세 자를 자기의 생각으로 첨가해 넣었으니 이는 매우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상께서 비답을 어떻게 내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통렬하게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 해로움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우리 명묘의 상에 공의전께서 입을 상복 제도에 대해 의논할 적에 선정신 이황(李滉)은 처음엔 ‘형수와 아주버니 사이에는 복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기대승(奇大升)이 말하기를 ‘비록 형수와 아주버니 사이이기는 하나 대통을 계승한 의리가 있는데 어떻게 삼년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자, 이황이 대승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도 ‘어찌 기년 이상 입어 주어야 할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고례에 장자를 제외하고 그 이외의 대통을 계승한 임금에게는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고 우리 나라 제도는 장자에게도 기년복만 입어주기 때문에 이황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현의 상에 인조께서도 삼년복을 입지 않으셨다."
하였다. 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시왕(時王)의 제도는 명나라의 예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이를 따라 행한 지 오래되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감히 임의로 비방하면서 무후(武后)에게서 나온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욱더 놀라운 일입니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윤휴가 말하기를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자, 송시열이 말하기를 ‘참최는 신하가 임금에게 입어주는 복이다. 자식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 의리가 어찌 있겠는가.’ 하였으나, 윤휴가 여전히 자기 설을 내세우고자 장편의 편지를 왕복하며 쟁논하였는데, 지금 영남 유생의 상소는 대체로 윤휴의 말을 주워 모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상소를 보니 ‘신들의 이 상소에 대해 내막을 모르는 자들은 필시 송시열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다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들의 작태가 통분하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설사 이 일이 과연 논할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복제를 의논해 정한 지 이미 8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소를 올려 감히 이런 짓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여러모로 모색하여 꾸민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 정상을 따져 보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만약 이를 확실히 분변하여 통렬히 배척하지 않으면 앞으로 반드시 이를 뒤따라 일어날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만약 이를 뒤따라 일어나 시끄럽게 하는 일이 있다면 조정에서 이들을 어떻게 유생으로 대우할 수 있겠는가."
하자, 김만기가 아뢰기를,
"그들의 소에 천여 명의 이름을 죽 썼기 때문에 전하께서 유생으로 대우하여 비답까지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다만 예를 논하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면 그냥 두어도 괜찮습니다만 그 주된 뜻을 보니 예를 논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의성현(義城縣)에 모여 작란한 일에 있어서는 어찌 선비들이 할 짓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그 무리였단 말인가?"
하자, 김만기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신이 의성 현령이 보고한 장계를 보았습니다. 대체로 유생이 상소에 참여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각자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버젓이 여러 고을에다 상소에 참여할 인원수를 배정한 다음 협박하고 윽박질러 참여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끝내 참여하지 않자 온 고을을 과거를 못 보이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고을에서 쫓아내기도 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는 자도 있었으나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선비의 악습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가장 통분할 것은 유생들이 향교의 노비들에게 감히 댓가를 받고 면천(免賤)을 허락해 준 것인데, 만일 이러한 마음으로 나간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오늘날 소를 올린 일도 괴이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신들이 비록 예를 모르지만 그들이 올린 책자(冊子)와 소(疏)를 보건대, 공박하여 깨뜨리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일 무렵에 미처 조목마다 논변할 수 없는 형세였기 때문에 먼저 정상이 놀랍다고만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비답을 보니 ‘선비의 습관이 아름답지 못하니 정말 놀랍다.’는 등의 말씀이 계셨는데, 이는 그들의 정상을 이미 빠짐없이 통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성인(大聖人)의 말씀처럼 점잖고 박절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이른바 화를 내지 않아도 부월보다 무섭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이 완고하고 거칠어서 성훈(聖訓)을 가슴에 새겨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승지가 한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의성(義城)에서 일어난 일은 지엽적인 일입니다. 그들이 꼭 종묘에 고하고자 하는 것은 송시열을 고묘죄인(告廟罪人)으로 만들려는 것이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조종조에 있었던 기묘·을사년의 화도 그 실마리는 몹시 미미하였으나 나중에 가서 커다란 화가 되었으니, 지금 만약 통렬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생길 화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통렬히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소요를 초래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마음이 불미한 점만 지척한 것이다."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영남 일도는 어진 선비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본래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근래에 와서 풍습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일찍이 선대 조정 때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청하였는데,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영남의 무리들이 어비(御批)를 위조한 다음 도내에 유포하여 선동하려고 꾀했습니다. 그 뒤에 그 일이 발각되자 선왕께서 가장 중한 죄로 논단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무리들이 선비란 이름을 기탁하여 어비를 위조했고 보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정말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로 대우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몹시 놀랍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이른바 책자란 것은 하달되지 않았으나 그들이 부본을 전해 보여 주었기 때문에 신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인용한 예경은 대부분 본문의 위아래를 잘라내고 자기들의 의견을 붙인 것이었는데 또한 시비를 현란시킬 만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상소 내용을 보니, 말은 동쪽을 가리키며 하고 있었으나 그 뜻은 사실 서쪽에 있었다.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뚜렷이 알 수 있는데 어찌 현란될 리가 있겠는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이 무리들은 예를 논하는 데 명분을 두고 있으나 실은 사람을 크나큰 죄에 빠뜨리고자 한 것이니 어떻게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통렬히 분변하는 것을 시급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므로 경들과 상의해 법을 만들어서 뒷날의 우환을 막고자 한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 분부하셨는데 사실 신들의 의견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원자가 《효경(孝經)》의 강을 이미 끝냈으니, 앞으로 강할 글을 불가불 미리 의논하여 정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글을 강해야겠는가?"
하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소학(小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초학은 무엇보다도 글자의 뜻을 많이 알아야 하니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아울러 강하게 한다면 더욱더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경상도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천여 명이 상소하기를,
"아, 우리 선왕(先王)의 복제가 잘못된 것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에 대한 논의가 한번 어긋나자 종적(宗嫡)이 폐괴(廢壞)되고 윤기가 도치되어 군신·부자 간에 차서를 잃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게 되었으니, 아, 이게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들으니, 신하와 자식이 임금과 어버이에게 융숭하게 대하는 것은 천지의 상경(常經)이자 고금의 통의(通誼)라고 합니다. 옛날 무왕(武王)의 말년에 천명(天命)을 받았을 때, 주공(周公)이 문무(文武)의 덕을 이루어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을 왕으로 추존하고 위로 천자의 예로써 선공(先公)을 제사지냈는데, 이는 대체로 무왕의 마음을 미루어서 삼왕(三王)014) 을 존숭하고, 또 삼왕의 마음을 미루어서 무궁한 데까지 미치게 함으로써 주(周)나라 왕가(王家) 종적(宗嫡)의 통서(統緖)가 천하 후세에 더욱 밝혀지고 더욱 존숭되도록 한 것이니, 이게 바로 주공의 효도입니다. 가령 그때에 주공이 제작한 예문(禮文)의 성대함이 없었고 예를 논의하는 신하들이, 계력(季歷)은 태왕(太王)의 막내 아들이고 무왕은 문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015) 로써 명호(名號)를 깎아내리고자 서자(庶子)의 예로써 대하고 또 문왕과 성왕(成王)을 하정(下正)인 서자라고 하여 종적(宗嫡)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종묘는 종묘다운 종묘가 되지 못하고 왕실은 왕실다운 왕실이 되지 못하여, 주(周)나라의 선왕(先王)은 그 자손에게서 존숭받지 못하고 주나라의 자손과 백성들은 선왕을 융숭하게 대우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인륜의 커다란 변고에 해당하는데 그래도 전례(典禮)를 밝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가령 그때에 이런 일이 있는데도 조정에 벼슬하는 신하들이 올바르게 바로잡지 못했다고 한다면, 공론이 반드시 초야의 선비한테서 일어났을 것이고, 필시 머리를 부수고 피를 흘리면서 성왕(成王)에게 고하여 그 잘못됨을 지척하였을 것입니다.
대체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은 복(服)이고 엄격히 해야 하는 것은 분수이므로 강상(綱常)에 관계된 일은 누구나 다 바로잡아야지 시기의 조만(早晩)은 꼭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일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효종 대왕은 적통의 둘째 아들로서 인조께 명을 받고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여 위로 선조(先祖)의 중(重)을 몸받고 아래로 조서(兆庶)의 종(宗)을 품고서 10년을 군림해 종묘를 주관하였고 보면, 무왕의 일과 더불어 전후가 똑같아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효묘(孝廟)야말로 인조의 무왕(武王)인 셈입니다.016) 무왕은 이미 태왕·왕계·문왕의 통서(統緖)를 이어 주(周)나라 왕가 8백 년 동안의 종통(宗統)이 되었고 보면, 우리 효묘라고 해서 열성(列聖)의 통서를 계승하여 조선 억만 년의 종통이 될 수 없단 말입니까.
기해년의 일은 돌이켜 생각할수록 망극합니다. 효종 대왕께서 요 순 같은 성군으로서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시니, 창졸간에 생긴 일이어서 온 나라 백성들이 경황없이 울부짖으며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마음을 쏟아야 될 것은 오직 신종(愼終)017) 일사(一事)에 있을 따름이었는데, 그때 예를 의논한 신하 송시열 등은 도리어 우리 선왕을 서자(庶子)로 지목하고는 마침내 대왕 대비께서 기년복으로 낮추어 입도록 하자고 청했으니,018) 아, 이게 어찌된 것입니까?
신들은 모두 영외(嶺外)의 빈한한 선비들입니다.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당초에 예를 논의했던 설들을 들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또한 어떻게 외정(外庭)의 의논에 참여하여 만에 하나라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랜 시일이 지나자 사람들의 마음에 날로 자꾸 불만이 쌓이고 나라 안에 여론이 날로 더욱 자자한 뒤에야 비로소 시열 등이 올린 문자를 보고 복제를 낮추어 정하게 된 시말(始末)을 살필 수 있게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탄식했습니다.
신들이 시험삼아 그 설을 가져다가 살펴보니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의 서자가 되어도 해될 게 없다.’ 하였는데, 이는 효종 대왕을 4종의 복019) 가운데 부정(不正)인 서자(庶子)020) 로 여긴 것이고, 또 ‘둘째 아들은 모두 장자로 부르지만 참최복(斬衰服)을 입게 되면 적통(嫡統)이 엄격하지 않게 된다.’ 하였는데, 이는 효종 대왕은 장자도 될 수 없고 적자도 될 수 없고 종묘의 주인도 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 그들이 인용한 하정서(下正庶)021) ·단궁문(檀弓免)022) ·자유최(子游衰)023) 등의 설은 더욱 사리에 맞지 않고 그 가운데 하정(下正) 한 조목 또한 몹시 이치에 어긋납니다. 대체로 하정은 곧 예적(禰嫡)024) 인데, 본래 중자(衆子)가 낳은 장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 어찌 남의 후사(後嗣)로 세워진 자의 장자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논의하는 자들이 조금도 관련이 없는 이 말을, 견주어서는 안 될 선왕(先王)에게 견주어서 끝내는 기어이 선왕을 서자로 삼는 설을 입증하여 놓았으니, 이게 과연 무슨 소견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하정은 예(禰)의 적자(嫡子)이므로 단지 아버지에 대해서만 제사지낼 수가 있고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제사지낼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이 말과 같이 선왕은 서자가 되고 전하는 하정이 된다고 하면, 선왕은 인조의 통서를 계승할 수 없고 전하는 인조를 제사지낼 수 없단 말입니까. 이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또 이 말대로라면, 문왕이 무왕을 세운 것은 잘못된 일이며 무왕은 종묘의 정체(正體) 주인이 될 수 없고, 성왕은 또 정적(正嫡)의 예로 무왕을 존숭할 수 없으니 정적의 제사로 무왕을 제사지낼 수 없으며, 주나라의 선왕(先王) 또한 무왕과 성왕에게서 정적의 효향(孝饗)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신들이 또 본조의 일로써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혀 보겠습니다. 태조 대왕 이하 열성(列聖)이 대부분 둘째 아들이나 방계 아들로서 대통을 계승하였습니다. 만약 논의하는 자의 말대로라면 태조 대왕 이하 열성 모두가 종통이 될 수 없고 장자로서 전중(傳重)한 선성왕(先聖王) 역시 모두 하정(下正)의 서자가 되어 종묘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국가가 3백 년 동안 서로 전한 종적(宗嫡)의 통서가 끝내는 모호하여 분명하지 않은 데로 귀착되고 말 것입니다. 아, 이게 어찌 정리에 합당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비록 그의 마음속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만과 망령됨이 또한 심한 것입니다. 신들이 잠시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역명장자(亦名長子)·원별서자(遠別庶子)·체이부정서자(體而不正庶子)025) 의 세 건을 조목별로 열거한 다음 변증을 덧붙여 전하께서 상세히 보시고 재량하여 처리하시는 데에 참고가 되게 하겠으니, 전하께서는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의례통해속(儀禮通解續)》026) 상복편(喪服篇) 참최장(斬衰章)의 경문(經文)에 ‘아비가 맏아들을 위하여[父爲長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공(周公)이 지은 글입니다. 자하전(子夏傳)027) 에 ‘어째서 삼년복(三年服)을 입는가 하면 윗대에 정(正)·체(體)가 되고 또 전중(傳重)028) 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장자가 장차 자기 대신 종묘의 주인이 되어 윗대에 정·체가 되기 때문에 아비가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 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이는 조상을 존숭하는 의리입니다. 정현(鄭玄)의 주(註)029) 에 ‘적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상하(上下)030) 가 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가씨(賈氏)031) 가 해석하기를 ‘장자라고 말하면 맏아들로 적통을 세운다는 점을 포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통틀어서 적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자는 모두 장자라고 부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과연 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소(疏)에 ‘또 큰아들로 적통을 세운다는 것은 적처(嫡妻)의 소생이면 모두 적자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가씨가 정현의 주를 이처럼 해석한 것이며, 이는 또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가 아비의 후사로 세워졌으면 이는 곧 장적(長嫡)인 셈이므로 서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의 분명한 조문입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과연 서자입니까? 소(疏)에 또 말하기를 ‘첫째 아들이 죽었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데려다가 세우는데, 또한 장자라고 일컫는다.’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가씨가 정현의 주를 해석한 말이며, 이는 또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가 이미 장자로 세워졌으면 다시 서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의 분명한 조문입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이미 임금의 후사로 세워졌는데도 도리어 서자가 되고 장적(長嫡)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소(疏)에서 말한 ‘역위장자(亦爲長子)’에서의 장자는 곧 경문(經文)의 ‘위장자(爲長子)’에서의 장자이니, 인조 대왕은 효종에 대해서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되는 의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 아들에 대해서 어머니도 감히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 법이고 보면, 대왕 대비가 효묘(孝廟)를 위해 삼년복을 입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신들이 또 살펴보건대, 자하전(子夏傳)에 ‘서자에게는 큰아들처럼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른바 서자는 모든 중자(衆子)를 가리켜 한 말이지, 애당초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둘째 아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현의 주에 말하기를 ‘서자란 아비의 후사가 된 자의 아우이다.’라고 하였고, 소(疏)에도 말하기를 ‘서자라는 말은 본래 첩에게서 난 아들의 호칭이고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은 중자(衆子)이다.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일컬은 것은 장자와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첩자와 똑같이 일컬은 것이다.’ 【소(疏)의 설은 여기에서 끝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똑같이 한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인데 중자로 있을 때는 서자라고 일컬어 장자와 구별하고, 그가 이미 장자로 세워졌으면 더 이상 엄격하게 구별해야 될 혐의가 없으므로 예전대로 서자라고 일컬어서는 안 되니, 이 또한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의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열 등이 우리 선왕(先王)을 서자라고 하여 삼년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몹시 경(經)에 위배되고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신들이 또 살펴보건대, 소(疏)에 말하기를 ‘비록 승중(承重)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처지가 네 종류 있다. 첫째는 정체부전중(正體不傳重)이니, 적자가 몹쓸 병이 들어서 종묘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경우이다. 둘째는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이니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경우이다. 세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니 서자가 후사가 된 경우이다. 네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이니 적손(嫡孫)을 후사로 세운 경우이다.’라고 【소(疏)의 설은 여기에서 끝난다.】 하였는데, 여기서 이른바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서자’란 곧 첩에게서 난 아들을 뜻합니다. 이 서자가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것은 가씨(賈氏)의 소설(疏說)에서 이미 언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예경(禮經)에 증거로 보이는 것도 모두가 그러합니다. 어찌 여기서의 서자를 첩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왕(先王)에게 적용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여기서 ‘부정(不正)’이라고 한 말은 바로 얼서(孼庶)에 대한 칭호인데 또 어떻게 이 천한 칭호를 선왕에게 적용시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는 예경(禮經)에 더욱 심히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의 서자가 첩에게서 난 아들을 뜻함은 신들이 굳이 여러 설을 널리 끌어댈 필요도 없이, 단지 이 네 종류 가운데에 논한 ‘정(正)·체(體)’ 두 자만 가지고서 참작하여 살펴보더라도 명의(名義)가 분명하여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正)’은 정실(正室) 소생의 적자를 뜻하고 ‘체(體)’는 아비와 아들이 일체(一體)임을 뜻하는데, 적자는 적처(嫡妻)가 낳은 친아들이기 때문에 ‘정체(正體)’라고 말하고 서손(庶孫)은 적출(嫡出)도 아니고 친아들도 아니기 때문에 ‘정체(正體)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며, 적손(嫡孫)은 적출(嫡出)이기는 하더라도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정이불체(正而不體)’라고 하였고, 서자는 친아들이기는 하나 적출이 아니기 때문에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서자가 틀림없이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는 점은 이 네 마디 속에 저절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서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고 보면, 이는 단적으로 첩에게서 난 아들의 명칭으로만 쓰인 것이니, 결단코 이 명칭을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장자에게 적용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차적(次嫡)으로서는 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의 명확한 조문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경문(經文)에 ‘아비가 큰아들을 위하여[父爲長子]’라고 한 것은 또한 그가 장차 적통을 전하게 될 자임을 가리켜서 말한 것인 데이겠습니까. 만약 이미 천자나 제후로 세워졌다고 하면 그 위치가 곧 종적(宗嫡)의 자리이니, 비록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부모가 그를 위해서 마땅히 정적(正嫡)으로 대하여 삼년복을 입어 주어야 됩니다. 예(禮)에 ‘천자와 제후의 상(喪)에는 모두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기년복은 없다.’032) 라고 말했으니, 이것이 명확한 조문입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은 제 2 정적(第二正嫡)으로서 임금 자리에 올라 명위(名位)가 존엄하므로, 또 장차 적통을 전하게 될 때하고는 자연히 다르고 보면 중자라고도 감히 지목하지 못할 바인데, 하물며 서자라고 지목하여 네 종류 가운데 ‘부정(不正)인 서자(庶子)’의 복을 입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모두 분별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논의하는 자들은 또 자기들의 사견을 내세워 그 잘못을 가리고자 도리어 면재(勉齋)033) 가 편입한 가씨(賈氏)의 소설(疏說)이 상하가 모순되고, 주자(朱子)와 정자(程子)의 교감(校堪)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도 심하게 터무니없단 말입니까.
대체로 주자는 가례(家禮)·향례(鄕禮)·방국례(邦國禮)·왕조례(王朝禮)는 자신이 편수(編修)하고, 상례(喪禮)·제례(祭禮)는 면재에게 위촉하여 편정(編定)하게 하였습니다. 면재는 주자 문하에서 학식이 높은 제자입니다. 그가 평생 동안 스승을 모시면서 강론한 끝에 고성인(古聖人)034) 이 예를 제작한 본의를 터득하였고, 그 소견의 분명함도 후대 여러 선비들의 갖가지 설을 절충하여 올바른 데로 귀결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스승의 중한 부탁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책을 편정할 무렵에 가서는 또 친히 주자의 지도를 받들어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여 그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자가 일찍이 면재에게 글을 보내 ‘상례(喪禮)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 벌써 들어서 알고 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일찍이 면재한테 말하기를 ‘자네가 편정한 상례와 제례는 짜임새가 매우 잘되었네. 내가 편정한 가례·향례·방국례·왕조례도 모두 이 짜임새에 따라 고쳐 편정하게나.’라고 하였으니, 가상히 여기어 기뻐하고 칭찬하여 인정해 준 정도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어서 감정(勘定)만 거친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또한 장자로 이름한다.[亦名長子]’라고 한 것은 차적(次嫡)을 가리켜서 한 말이고 ‘부정인 서자[不正庶子]’라고 한 것은 첩에게서 난 아들을 가리켜서 한 말로, 각각 조목의 구분이 있어 서로 관련이 없는 게 책을 펼치면 환하게 들어와 누구나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모순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자를 시열 등이 보았을 터인데도 곡해(曲解)하여 말을 만들어 그 실상을 어지럽혔습니다. 대저 이와 같고 보면 어찌 더 이상 마음에 편안하겠으며 천하 사람들의 한결같은 공론을 제압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 소견이 한번 틀리자 가리워지는 게 너무도 중하여 돌이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심지어 주자가 이미 정해 놓은 논리마저 버리고 강변해 마지않은 것이 아닙니까? 그리하여 감히 ‘부정(不正)인 서자(庶子)와 더불어 내력이 똑같다.’라고 말하고, 또 ‘차적(次嫡)이 부정(不正)인 서자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깊이 믿을 수 없는 말이다.’라고 합니다. 아, 너무나도 이상합니다.
신들이 또 들으니, 임금과 어버이에게 융숭하게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춘추(春秋)》의 의리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魯)나라는 본래 후작(侯爵)인데도 부자(夫子)께서 《춘추》를 지을 때 ‘공(公)’으로 일컬어서 높인 것입니다. 대체로 성인께서 군부(君父)를 위해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여 신자(臣子)로서의 본분을 다해 인정과 천리에 합당하게끔 하기 위해 이처럼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습니다. 맹자(孟子)가 이른바 ‘성인은 인륜(人倫)의 극치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적자를 서자로 강등하여 군부(君父)의 존귀함을 깎아내리는 것은, 성인의 도(道)를 그르게 여기고 《춘추》의 의리와 크게 상반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신들의 이 말에 대해서 제대로 의도를 모르는 자는 반드시 시열을 공격하고자 구실거리를 삼았다고 할 것입니다만, 신들이 비록 변변찮으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신들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명교(名敎)이고 중대하게 여기는 것은 인륜(人倫)이며, 밝히려고 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정·체(正體)이고 구제하고자 하는 것은 무너진 세도(世道)입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속마음을 드러내어 위로 성상을 번거롭히는 것이니 사실상 마지못한 일이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살피시고 재량하소서. 그리하여 또한 신들의 말에 혹 취할 만한 점이 있으면 신들의 이 글을 묘당에 내리어 조정의 의논을 널리 수렴해서 하루바삐 변정(辨正)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고 종묘에 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뒤에 팔방에 반포해 보여 중외의 신민으로 하여금 종적(宗嫡)이 우리 성고(聖考)에게 있음을 환하게 듣고 알도록 하고, 편파적이고 빠져나가려고 꾸며대는 말이 더 이상 천지 사이에 오가지 못하게 하신다면, 명분이 바로잡히고 지체가 존엄해져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선왕의 욕됨이 비로소 씻어지고 전하의 효성도 극진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에게 유감이 없게 되고 만세가 지나도록 떳떳히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늘에 계신 성고(聖考)의 영령이 어찌 기쁘게 여기시고 좋은 일을 끼쳐 주어 후손들을 넉넉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장차 온 나라 안이 누구나 다시 태어난 듯이 기뻐하면서 고무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민심이 크게 기뻐하면 화평한 기운이 뒤따라 일어나고 나쁜 기운이 그 사이를 간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국가의 억만 년 무강한 복이 틀림없이 이 일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신들은, 삼가 《의례통해》 가운데 주소(注疏)의 설들을 뽑아 종류에 따라 모은 다음 외람되게 변변찮은 설로 각기 조항 아래마다 변론해 놓고, 인하여 시열이 드린 의논을 마디마다 공박해 깨뜨렸는데 모두 열 여섯 조항이었습니다. 그것을 그 뒤에 첨부하고 책의 전체를 《상복고증(喪服考證)》이라고 이름을 붙여 소와 함께 올려 정무의 여가에 보시는 데 대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의 글과 뜻이 조리가 없고 뒤죽박죽이다. 남하고 다르게만 하지 의견을 같이하지는 않아서, 동쪽을 얘기하는데 뜻은 서쪽에 있고 서쪽을 얘기하는데 뜻은 동쪽에 있었다. 선비 풍습의 불미스러움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소 가운데 이른바 주자가 운운했다는 얘기를 살펴보면, 허다한 말들이 도리어 주자의 뜻에 배치되니, 그야말로 미안하기 짝이 없다. 너희들은 아무쪼록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나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1. 장자서자도
○장자(長子)
경(經):아비가 장자를 위해서는 참최(斬衰) 삼 년이다.
전(傳):어째서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윗대에 대해 정(正)·체(體)이고 또 곧 전중(傳重)하게 되는 바이기 때문이다.
경(經):어미가 장자를 위해서는 자최(齊衰) 삼 년이다.
전(傳):어째서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비가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 대상에게는 어미도 감히 복을 낮추어 입지 않기 때문이다.
주(註):역시 장자로 적통을 세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소(疏):적처(嫡妻) 소생은 다 적자(嫡子)라고 호칭한다.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데려다가 세우는데 또한 장자라고 호칭한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부모가 장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것은 그가 선조(先祖)의 정(正)·체(體)에 해당하고 장차 자기를 대신해서 종묘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이 비록 장자이기는 하나 혹 사고가 있어서 세우지 못하고 둘째 아들을 세웠더라도 장자로 호칭하고 삼년복을 입습니다.
○정체부전중(正體不傳重)
소(疏):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네 종류가 있다. 그 첫째는 정(正)·체(體)이되 전중(傳重)하지 않은 경우이다. 적자에게 몹쓸 병이 있어서 종묘의 주인 노릇을 해내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부모가 장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것은 그가 선조(先祖)의 중(重)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조를 존중하는 의리이기 때문에 전중(傳重)하지 못한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체이부정(體而不正)
소(疏):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종류가 있다. 그 세 번째는 체(體)이되 정(正)이 아닌 경우이니, 서자가 후사가 되었을 경우이다.
소(疏):서자는 첩에게서 난 아들의 칭호이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여기서의 서자는 곧 첩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비록 그 아비와 더불어 체(體)가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첩에게서 낳았기 때문에 부정(不正)이 되고 부정이기 때문에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전중(傳重)하게 된다는 전제를 깔고서 한 말입니다.
○중자칭서(衆子稱庶)
주(註):아비의 후사가 된 자의 아우이다. 서(庶)라고 칭한 것은 엄격히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소(疏):서자는 본디 첩에게서 난 아들의 칭호이고 적처(嫡妻) 소생의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중자(衆子)인데,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부른 것은 장자와 엄격히 구별하기 위해 첩에게서 난 아들과 명칭을 똑같이 부른 것이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중자는 본디 적처의 소생입니다. 비록 엄격히 구별하려는 의리 때문에 서(庶)라고 칭하였지만 네 종류 복제 가운데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서자와는 명위(名位)가 엄연히 다르니, 싸잡아 일컬어서는 진실로 안 됩니다. 더구나 중자를 적통으로 세워 장자가 되었을 경우 예전대로 중자라고 칭할 수 없는 법인데 더더구나 서자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까.
○하정서(下正庶)
주자(朱子):하정(下正)은 아버지의 적자를 말하니, 비록 정(正)이라 하여 아버지의 적자라고 일컫지만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서(庶)가 되므로 아버지의 적자일지라도 서(庶)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하정(下正)’은 곧 중자의 적자입니다.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정(下正)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중자를 장자로 세워 전중(傳重)되었고 그의 적자가 다시 또 할아버지를 이어 종통을 계승하였다면, 이는 곧 윗대에 정(正)·체(體)가 되는데 어떻게 하정(下正)이라고 칭할 수 있겠습니까.
2. 상복고증(喪服考證)
신들이 삼가 기해년에 의논하였던 예설을 살펴보니, 송시열(宋時烈) 등이 정한 복제는 근거없이 끌어다가 억지로 맞추어서 예경에 위배되어 이미 국가의 전례(典禮)를 그르쳐 놓았고, 또 중외의 뭇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므로 논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삼가 《의례통해(儀禮通解)》에서 긴요한 말들을 뽑고 또 선유(先儒)의 여러 설을 두루 인용하여 외람스럽게 변해(辨解)를 만들어 성상께서 보시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상복편(喪服篇) 참최장(斬衰章)의 【《의례통해속(儀禮通解續)》 제1권 상복편(喪服篇) 제18장에 나타나 있다.】 경문(經文)에 ‘아비가 맏아들을 위하여[父爲長子]’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또한 적통을 맏아들로 세운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 소에 이르기를 ‘적통을 맏아들로 세운 것을 말한다는 것은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로 호칭한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아비가 장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다음 아들을 후사로 세운 경우까지 통틀어서 하는 말이지, 첫째 아들만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소에 이른바 ‘장자라고 말한 것은 적통을 맏아들로 세우는 것을 통틀은 것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적자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가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도 장자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대개 이는 같은 어머니의 아우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는 곧 적처의 소생으로 윗대에 대해 정(正)·체(體)이면서 장차 전중(傳重)하게 될 것이므로 곁 가지에서 태어나 정(正)하지 않은 첩의 자식과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적처 소생이면 모두 적자로 호칭한다.’라고 말한 이상, 같은 어머니의 아우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를 적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안 될 일이며, 또 ‘또한 장자로 이름한다.[亦名長子]’라고 말했으니,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같은 어머니의 아우를 장자(長子)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안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는 곧 적자이며 장자인 셈인데 어찌 감히 서자의 명칭을 적자이자 장자인 같은 어머니의 아우에게 붙일 수 있겠습니까. 또 경문(經文)에 ‘아비가 적자를 위해서’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아비가 장자를 위해서’라고 논리를 세운 것은 실로 적통을 맏아들로 세우는 것을 통틀은 것이지 첫째 아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고 보면 무릇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면 다 장자이고 모두 삼년복을 입어줄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명확한 조문입니다.
소에 또 말하기를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우는데 또한 장자라고 호칭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 말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들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졌으면 이는 곧 장자이니, 예전처럼 중자로 호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더구나 서자로 호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역시 장자라고 부르며 삼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바로 인정의 극치이자 천리의 극치이니, 곡진히 참작한 것으로서 만세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적처소생 제2장자(嫡妻所生第二長者)’라고 말한 여덟 자는 분명히 효묘(孝廟)의 위차(位次)에 대한 사실을 묘사해낸 것으로서 글자 하나하나가 서로 딱 들어맞고 있습니다.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게 존숭(尊崇)과 경애(敬愛)하는 데 있어서 여러모로 힘을 다 기울이는 법이므로 만일 변칙적인 예를 만났을 경우에는 예전(禮典)에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의리로 헤아려서 만들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지금의 복제는 변칙적인 예가 아니고 주소의 여러 설이 이처럼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데도 도리어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는 천한 서자(庶子)의 칭호로서 성고(聖考)에게 빗대면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에 또 말하기를 ‘만약 ‘적자’라고 말했으면 오직 첫째 아들만 해당되고, 만약 ‘장자’라고 말했으면 적통을 맏아들로 세운 것을 통틀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여기서 말하는 ‘적자’는 물론 첫째 아들에 대한 칭호입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이 몹쓸 병이나 또는 다른 사고가 있어서 혹 후사가 없는 채로 죽었다거나 혹 후사는 두었으되 성립(成立)035) 하지 않아 전중(傳重)하지 못한 경우에 후사로 세워진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 또한 적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 구(句)에 다시 ‘입적(立嫡)’이란 두 자를 들어서 후사로 세운 그 다음 아들은 다 적자가 된다는 점을 밝힌 것이니, 《가례(家禮)》에 이른바 ‘세자가 곧 적통이다. 만약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아우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이다036) .’ 한 것이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들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는 적자이자 장자라는 것은 변론을 하지 않아도 분명합니다. 이는 인조 대왕께서 성고(聖考)를 적통으로 세운 일과 더불어 영낙없이 서로 부합되는 것으로서 이른바 ‘앞시대의 성인이나 뒷시대의 성인이 그 법도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 선왕을 종통과 적통으로 허여하지 않는 것은 경(經)에 배치되고 성인을 그르게 여기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전(傳)037) 에 이르기를 ‘어째서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위에 대해 정(正)·체(體)이고 또 장차 전중(傳重)하게 될 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른바 ‘정(正)’이라고 한 것은 적처 소생의 아들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 ‘체(體)’라고 한 것은 아들이 아비와 더불어 뼈와 피가 똑같은 몸이라는 뜻이며, ‘장차 전중(傳重)하게 될 자’라고 한 것은 장차 자기를 대신해 종묘의 주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전에 또 이르기를 ‘서자에게는 장자처럼 삼년복을 입어주지 아니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이는 아비의 후사가 되어야만 장자처럼 삼년복을 입어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그 선조(先祖)의 정(正)·체(體)에 해당함을 중하게 여기고 또 그가 장차 자기를 대신해서 종묘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자란 아비의 후사가 된 자의 아우를 뜻하는데 ‘서(庶)’라고 말한 것은 엄격히 구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여기서의 서자는 곧 중자(衆子)로서 부모의 후사가 되지 않은 자를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에 ‘서자는 아비의 후사가 된 자의 아우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설로 본다면 효종 대왕은 인조에게 명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아비의 후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안 될 일입니다. 이미 아비의 후사가 되었는데 예전처럼 서자로 낮추어 호칭하여 아비의 후사로 세워지지 아니한 중자와 동일시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 선대왕(先大王)은 임금 자리에 올라 종묘를 받들고 윗대에 정·체(正體)가 되었으므로 세자로서 장차 전중(傳重)하게 될 입장에 있던 때와는 또 자연히 다르니만큼 중자로 지목하거나 서자라고 호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대체로 ‘역명장자(亦名長子)’는 중자로서 아비의 후사가 된 자인데 이것이 일위(一位)이고, 자하전(子夏傳)에서 말한 ‘서자’는 곧 중자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지지 아니한 자인데 이것이 또 일위(一位)이고, 네 종류 가운데의 ‘부정서자(不正庶子)’는 곧 첩에게서 난 아들인데 이것이 또 일위(一位)가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저들이 정(正)·체(體)이자 전중(傳重)한 선왕을 장자도 적자도 될 수 없다고 하여, 장자에서 중자로 깎아내리고 중자에서 또 부정서자로 깎아내리는 등 갈수록 자꾸 깎아내리면서 꺼리는 것이 없는데, 이게 어찌 인정과 사리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경(經)에 배치되고 예(禮)에 어긋나는 정도가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으니, 이를 분변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소에 이르기를 ‘서자란 본디 첩에게서 난 아들에 대한 칭호이고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은 곧 중자이다. 지금 똑같이 서자라고 부른 것은 장자와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첩에게서 난 아들과 똑같이 호칭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 소설(疏說)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가 본디 서자가 아니라는 점을 또 밝힌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자하전(子夏傳)에서 언급한 서자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인데 장자와 엄격히 구분하기 위해 서자로 칭한 것이고, 네 종류 가운데의 ‘부정서자(不正庶子)’는 곧 본디 첩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설(說)은 아래 조항에 나타나 있다.】 이 두 유형(類型)의 서자는 명칭이 비록 같지만 사실 적(嫡)과 서(庶)로 체(體)가 달라서 귀천의 차이가 있으므로, 싸잡아 일컬어 둘을 똑같은 것으로 여겨 종통을 어지럽혀서는 진실로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선대왕께서는 종통을 이어 전중(傳重)한 뒤 명위(名位)가 바르게 되고 분의(分義)도 바르게 되었으므로 정(正)·체(體)의 존귀함은 결단코 범하기 어려워서 마치 하늘과 땅이 뒤바뀔 수 없는 것과 같고, 또 엄격히 구별하기 위해 서자로 칭하는 것과는 본래 관련이 없고 보면, 저들이 우리 선왕을 중자라고 하면서 ‘부정서자(不正庶子)’와 내력이 똑같다고까지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도(正道)에 어긋나는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소에 이르기를 ‘비록 승중(承重)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종류가 있다. 그 첫번째는 ‘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인데 적자에게 몹쓸 병이 있어서 종묘의 주인이 되지 못한 경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정(正)’은 적통을 말하고 ‘체(體)’는 아비와 아들이 일체임을 뜻합니다. 적처가 낳은 장자이므로 ‘정·체(正體)’라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 몹쓸 병이 있어서 후사가 될 수 없으면 이는 적자로서 전중(傳重)하지 못한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정(正)·체(體)이기는 해도 삼 년의 복을 입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인데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경우가 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서손은 첩이 낳은 손자를 말합니다. 적처의 소생도 아니고 친아들도 아니기 때문에 ‘정(正)·체(體)가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세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인데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그것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상복편(喪服篇) 시마장(緦麻章) 가운데 ‘서자로서 아비의 후사가 된 자가 그 어미를 위하여[庶子父後者爲其母]’ 조(條)의 【《의례통해속(儀禮通解續)》 제1권 상복편(喪服篇)의 제95장에 나타나 있다.】 주에 이르기를 ‘이는 총적(冢嫡)이 없고 오직 첩의 아들만 있어 아비가 죽은 후 뒤를 계승하였을 경우, 그 어미를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으며, 전(傳)에 이르기를 ‘존자(尊者)와 더불어 일체가 되고 나면 사친(私親)을 위해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소에 이르기를 ‘일체라고 말한 것은 아비와 아들이 한 몸[體]임을 뜻하고 사친이라고 말한 것은 첩모(妾母)가 임금과 일체가 될 수 없으므로 정친(正親)이 될 수가 없음을 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설로 본다면, ‘총(冢)’이라고 한 것은 곧 장자를 가리키고, ‘적(嫡)’이라고 한 것은 곧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 이하를 가리키며, ‘서자’라고 한 것은 곧 첩의 아들을 말합니다. 서자의 어미가 첩모(妾母)라는 이유로 정친(正親)이 되지 못하니, 첩모가 낳은 아들이 ‘부정(不正)’이 됨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체이부정(體而不正)은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가 그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서자가 누구인지는 변론하지 않아도 저절로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우리 선왕을 가리켜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서자로 여기는 것은 과연 어떤 소견이란 말입니까?
‘그 네 번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인데 적손(嫡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적손은 비록 적자의 정(正)이기는 하나 친아들이 아니어서 할아버지와 더불어 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정이불체(正而不體)’라고 말한 것입니다.
위의 네 조항에 해당하면 모두 기년복을 입고 삼년복을 입지 않습니다. 대체로 적자로서 전중(傳重)하지 않았으면 삼년복을 입지 아니하고, 적손으로서 전중(傳重)은 하였으나 친아들이 아니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정(正)’·‘체(體)’ 두 자를 참작하여 관찰해 보면 여기서의 서자가 과연 첩의 아들이라는 것은 단번에 판가름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우리 선왕을 첩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소견이란 말입니까?
○자최장(齊衰章) 【《의례통해속(儀禮通解續)》 상복편(喪服篇) 제33장에 나타나 있다.】 경문(經文)에 ‘어미가 맏아들을 위하여[母爲長子]’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어미가 장자를 위해서 복을 입어 줄 적에 지아비의 생존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삼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부모가 장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것이 본래 선조(先祖)의 정(正)·체(體)를 위한 것이어서 압강(壓降)하는 의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비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복을 낮추어 입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전(傳)에 이르기를 ‘어째서 삼년복을 입는가 하면, 아비가 낮추어 입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어미 또한 감히 낮추어 입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감히 낮추어 입지 못한다는 것은 감히 자기가 존귀하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正)·체(體)에 대해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는 모두 적통을 맏아들로 세운 것을 통틀어 말한 것입니다.
○시마장(緦麻章) 【《의례통해속(儀禮通解續)》 상복편(喪服篇) 제95장에 나타나 있다.】 경문(經文)에 ‘서자로서 아비의 후사가 된 자가 그 어미를 위하여[庶子爲父後者爲其母]’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만약 천자나 제후의 서자가 승중(承重)하였을 경우 그 어미를 위해 어떤 복을 입는가? 증자문(曾子問)을 살펴보면 ‘「옛날에 천자가 평소 연관(練冠) 차림으로 지낸다.’」라고 되어 있다.’ 하였습니다. 정현(鄭玄)은 《예기》 그 대목에 대해 ‘서자로서 왕이 된 자가 그 어미를 위해 입는 복제가 그러한 것이다.’라고 했으며, 《의례》 소(疏)에서도 또한 ‘서자왕(庶子王)038) 은 그 어미를 위해서 복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여기서 말한 서자는 첩의 아들을 뜻합니다. 만약 적자의 동복 아우라면, 어찌 그 어미를 위해 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또 서자는 동복 아우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봉작령(封爵令)에 【《의례통해속(儀禮通解續)》 제16권 87장 주(註)에 나타나 있다.】 이르기를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모두 적통을 계승한 자손이 전습(傳襲)한다. 만약 적자가 없거나 있기는 하되 죄나 병이 있을 때는 적손(嫡孫)을 세우고, 적손이 없으면 적자의 동복 아우를 차서에 따라 세우고, 동복의 아우가 없으면 서자를 세우고, 서자가 없으면 적손(嫡孫)의 동복 아우를 세우고, 동복의 아우가 없으면 서손을 세우는데, 증손(曾孫) 이하도 이에 준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위의 예경(禮經) 상복편(喪服篇) 안의 설들은 뜻이 이만저만 분명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적자가 죽고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도 장자로 부른다.’는 이 한 조항을 면재(勉齋)가 이미 ‘부위장자(父爲長子)’ 조에 편입해 놓았고, 다시 그 아래에서 또 ‘비록 승중(承重)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종류의 설(說)’을 별도로 한 단락을 만들어 각기 조례(條例)를 두었는데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경우가 바로 그 가운데에 들어 있고 보면, 장자와 서자는 본디 두 사람으로서, 결단코 적자를 가리켜 서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저절로 분명합니다. 더구나 봉작령(封爵令)에 ‘동복의 아우가 없으면 서자를 세운다.’라고 말했으니, 그 설이 또 한결 분명합니다. 동복의 아우는 어엿한 동복의 아우이고 서자도 어엿한 서자로서 지위가 각별하고 귀천이 현격하여 절대로 삽입할 수 없기 때문에 설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입니다. 대체로 소(疏)에 ‘적처의 소생은 모두 적자로 호칭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동복의 아우이지 서자가 아니라는 것의 명확한 조문이고, 또 ‘첫째 아들이 죽었고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 또한 장자로 호칭한다.’ 하였는데, 이는 또한 동복의 아우가 장자로 세워졌으면 예전처럼 서자로 호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의 명확한 조문이며, 또 ‘장자라고 말할 경우 적통을 맏아들로 세운다는 것도 통틀어 말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또한 동복의 아우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는 모두 장자가 된다는 것의 명확한 조문입니다. 위의 세 가지 설이 참최장(斬衰章)의 ‘부위장자(父爲長子)’ 조에 모두 나타나 있는데, 이는 또 차적(次嫡)으로서 후사가 된 자에 대해서 삼년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의 명확한 조문입니다. 이미 장자로 호칭해 놓고 삼년복을 입지 않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동복의 아우로서 장자로 세워져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으면 도로 낮추어 다시 서자로 호칭하여 마치 전후 두 사람인 것처럼 해서는 안 되니, 이것이 또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서자가 과연 동복의 아우가 아니고 분명히 첩의 아들이라는 것의 명확한 조문입니다. 또 예서(禮書)에서 논한 정(正)·체(體) 두 자의 뜻으로 본다면, 적자에 대한 칭호는 정·체(正體)라 하였고 서자에 대한 칭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는 적처의 소생이기 때문에 정(正)이라고 하였고 하나는 첩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에 부정(不正)이라고 하였으니, 적(嫡)과 서(庶)는 그 호칭이 자연히 다르고 그 분의(分義) 또한 엄격합니다. 이것이 또 서자라는 것은 첩의 아들을 지칭하기 위해 정한 것이지 단연코 동복의 아우가 아니라는 명확한 조문입니다. 더구나 봉작령(封爵令)에 동복의 아우와 서자의 구분이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만저만 분명한 게 아니고 보면, 이것이 또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동복의 아우를 서자라고 지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의 더더욱 분명한 조문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서자왕(庶子王)은 어미를 위해 복이 없다.’고 하였고 보면, 그가 첩의 아들이라는 것이 또한 분명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예경(禮經)에 나타난 여러 설들이 이렇게 자세한데 어떻게 한결같이 어지럽게만 말하여 그 진실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가례(家禮)》 【《가례》 대소종도(大小宗圖) 아래에 나타나 있다. 이 아래는 또 선유(先儒)의 설들도 인용하였는데 모두 2조이다.】 대소종도(大小宗圖)의 주에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세자가 적통이다. 만약 세자가 죽었을 경우에는 세자의 친아우를 세우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동복의 아우가 세자로 세워졌으면 이는 곧 적통이지 더이상 전일에 서(庶)로 칭하여 엄격히 구별을 하던 중자(衆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또한 차적(次嫡)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춘추(春秋)》에 ‘장공(莊公) 32년 겨울 10월 기미일(己未日)에 자반(子般)이 죽었다.’라고 하였는데, 《공양전(公羊傳)》에 이르기를 ‘자(子)가 죽었으면 자가 죽었다고 할 것이지 여기서 자반이 죽었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임금이 생존해 있으면 세자라고 칭하고, 임금이 죽었으면 아들 아무개라고 칭하고, 이미 장례(葬禮)를 치뤘으면 ‘자(子)’라고 칭하고, 해를 넘기면 ‘공(公)’이라고 칭한다. 자반이 죽었는데 어째서 언제 장례를 치뤘다는 얘기를 기록하지 않았는가? 한 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두었으면 종묘에 모시고 종묘에 모시면 장례일(葬禮日)을 기록하지만 아들이 없으면 종묘에 모시지 아니하고 종묘에 모시지 않으면 장례일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춘추(春秋)》의 법은 한 해에 임금이 둘이 될 수 없는 ‘종시(終始)’의 의리를 따른 까닭에 사군(嗣君)이 비록 계립(繼立)하여 대통을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공(公)으로 칭하지 않았으며,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가 없는 신민(臣民)의 심정을 따른 까닭에 이듬해 정월을 기다려 원년을 고치고 종묘에 고한 뒤 공(公)으로 성립이 되고 비로소 공(公)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자(公子) 반(般)이 장공(莊公)의 장례를 치루기 전에 죽으니, 공자(孔子)께서 이름을 써서 죽었다고 기록하였고, 자적(子赤)은 문공(文公)의 장례가 끝난 뒤에 죽으니 공자께서 이름을 쓰지 않은 채 죽었다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나라의 대통을 주고받는 법이 그야말로 엄격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아들을 두었으면 종묘에 모시고 아들이 없으면 종묘에 모시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대체로 아들이 있어 계립(繼立)해서 임금이 되었다면 이는 곧 종통을 전한 임금이기 때문에 비록 임금으로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종묘에 모시고, 이미 한 해를 넘기어 임금으로 성립되었으면 비록 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종묘에 모시는 것이니, 이는 모두가 선조(先祖)의 정·체(正體)를 중하게 여기고 적통을 엄격히 하는 의리입니다. 그렇고 보면, 비록 이미 대통을 이어 임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으면 임금으로 성립되지 않는데, 더구나 세자로서 선군(先君)의 생존시에 죽어서 대통을 잇지 못한 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한 해를 넘겨 원년을 고쳤으면 비록 금새 죽었다고 하더라도 종묘에 모셔지고 임금으로 성립이 되어 아들의 유무는 따지지도 않는데, 더구나 꽤 오랫동안 세상을 다스린 임금인데다 또 사군(嗣君)을 두어 종통을 전한 자야 어떻겠습니까. 이를 통해 살펴보면, 종통·적통이 어디에 있는가는 변론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분명해집니다. 오늘날 예를 논의하는 자가 소현(昭顯)에게 삼년복을 입어줘야 마땅하다고 하니, 이는 임금으로 성립시키고 적통으로 보는 것이고, 효묘(孝廟)를 서자로 여기어 기년복을 입어줘야 마땅하다고 하니, 이는 임금으로 성립시키지 아니하고 적통으로 보지 아니하는 것인데, 어쩌면 그리도 《춘추(春秋)》의 의리와 크게 상반된단 말입니까. 신들이 또 《춘추》를 살펴보건대, 희공(僖公)이 형이고 민공(閔公)이 아우인데, 민공이 먼저 즉위하였다가 죽자 희공이 그를 이어 즉위하였으니, 형제 간에 나라의 대통을 전승한 것이 곧 부자 사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희공이 비록 민공의 형이지만 민공을 아비처럼 보아야 할 의리가 있었기 때문에 희공이 죽자 민공의 아래에다가 부묘(祔廟)하였습니다. 그 뒤에 예를 논의하는 신하가 희공은 민공의 형이라는 이유로 마침내 민공의 위로 올려 모시니 공자께서 이 일을 비난하여 《춘추》에 썼는데, 여기서 형제의 순서는 도리어 가볍고 군신의 의리가 무겁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본조(本朝)의 일을 가지고 말하자면, 지난 정축년039) 인성 대비(仁聖大妃)의 상에, 예관(禮官)이 기년복으로 정하였는데, 대신(臺臣)이 따지기를 ‘조종의 가법과 만고의 강상이 하루아침에 모두 폐지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인묘(仁廟)·명묘(明廟)께서 서로 계승한 나라의 대통이 단절되어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하니, 선조 대왕께서 마침내 대신의 논의를 따라서 삼년복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춘추》에서 나라의 대통을 소중히 여기는 의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말하는 자는 ‘제왕(帝王)은 즉위한 자를 종통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니, 애석하게도 《춘추》의 의리를 강론치 아니하여 이런 망발을 하였습니다. 이른바 ‘조종의 가법과 만고의 강상이 하루아침에 모두 폐지되었다.’는 것은 진실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입니다.
3. 상복고증 부록(喪服考證附錄)
신들이, 송시열(宋時烈)이 전후에 헌의(獻議)040) 한 설들을 삼가 보니, 마디마디가 사리에 어긋나고 엉뚱한 말이어서 신들로는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그 가운데에 나아가 일일이 아래와 같이 분석하여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갖추어 드립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대부(大夫)나 사(士)의 아들이 가통(家統)을 이어받아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천자나 제후가 종통을 전하고 나라를 물려받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바로 긴요한 부분인데도 오늘날의 논의하는 자들은 오히려 가정과 국가는 통서를 전승하는 법이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니, 신이 감히 알 수 없는 바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가통을 계승하는 것과 나라를 전수하는 것이 그 이치는 비록 똑같지만 그 일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 이치가 똑같기 때문에 예는 대부분 통용하는 것이고, 그 일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예가 때로는 변하는 것입니다.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자의 복을 삼 년으로 입는 것은 통용하는 예입니다. 사나 대부의 서자로서 아비의 후사가 된 자는 그 어미의 상에 시마복을 입지만 천자의 서자로서 왕이 되면 그 어미를 위해 입는 복이 없으니, 이는 가정과 나라가 같지 아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절목을 보면 똑같게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도 시열이 가정과 나라는 같지 않다는 설을 몹시 배척하였으니,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대체로 위아래의 소설(疏說)로 보면, 부위장자(父爲長子) 조에 이미 「둘째 아들 또한 장자로 호칭한다.」라고 하여 놓고는, 그 아래에 또 「둘째 아들은 똑같이 서자로 호칭한다.」라고 말했으며, 그 아래에 또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서자로서 후사가 된 경우가 그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설은 한 사람이 기록하고 동시에 말한 것으로서 조목이 같고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을 내세우면서 저것을 공박한다거나, 이것을 옳다하면서 저것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정당하게 반복 참고하여 위아래가 서로 병통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소문(疏文)은 위아래가 애당초 병통되는 부분이 없습니다. 시열은 어째서 위와 아래가 서로 병통이 된다고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저 ‘두 번째 아들이 후사로 세워졌을 경우에도 장자라고 부른다.[亦名長子]’는 것은 곧 중자로서 아비의 후사로 세워진 자이니 이는 별도의 한 사람입니다. ‘둘째 아들도 똑같이 서자로 부른다.’는 것은 곧 중자로서 아비의 후사가 되지 아니한 자이니 이가 또 한 사람입니다. ‘체이부정이란 서자로서 후사가 된 경우가 그것이다.’는 것은 곧 첩모(妾母)의 아들이니 이가 또 한 사람이 되어서, 모두 3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시열은 3인을 합쳐서 한 사람으로 여겼으니, 그가 잘못 보고서 서로 병통이 된다고 둘러댈 만도 합니다. 장자도 하나의 어엿한 장자이고 중자도 하나의 어엿한 중자이고 첩의 아들도 하나의 어엿한 첩의 아들인 것이니, 소문(疏文)이 애당초부터 분명하고 뚜렷합니다. 어찌 서로 병통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시열이 헌의하기를 ‘이른바 「둘째 아들 또한 장자로 호칭하고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는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첫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었거나 혹은 몹쓸 병이 있어서 그 아비되는 이가 삼년복을 입지 아니했다는 전제 아래에서 그 둘째 아들을 세워 또한 장자로 호칭하고 삼년복을 입는 것을 두고서 말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첫째 아들이 전중(傳重)을 받은 뒤에 죽어 그의 아비가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고 난 상황이라면, 비록 둘째 아들을 세워 종통을 이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서자로 칭하고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위아래의 소설(疏說)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헌의하기를 ‘이른바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어느 때에 죽은 경우를 두고서 하는 말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미 성인(成人)이 되고 나서 죽어 그의 아비가 이미 그를 위해 참최(斬衰) 삼년복을 입고 난 뒤에 또 차적(次嫡)을 세워 장자로 호칭하고 그 차적이 죽으면 또 그를 위해 참최 삼년복을 입는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시열의 이 설도 몹시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대체로 부모가 그 아들을 위해 혹 기년복을 입는 것은 아들이 전중(傳重)을 했는지 전중을 하지 않았는지에 따라 경중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 또한 장자로 칭한다.’는 설이 참최장(斬衰章) ‘부위장자(父爲長子)’의 조항에 나타나 있고, ‘정·체(正體)로되 전중(傳重)하지 않았으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설이 또 ‘네 종류 복제[四種服制]’의 조항에 나타나 있고, ‘적자가 죽고 적손(嫡孫)을 세운 상황이라야만 장자를 위한 삼년복을 입을 수 있다.’는 설이 또 ‘위부후자 위장자삼년(爲父後者爲長子三年)’의 조항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첫째 아들에게 사고가 있어서 세우지 못하였거나, 혹은 후사가 없는 채 죽었거나, 혹은 후사는 두었으되 세우지 아니하고 차적(次嫡)을 세워 장자로 삼았으면, 차적이 전중(傳重)한 아들이 되고 첫째 아들은 전중한 아들이 되지 못합니다. 이미 전중(傳重)하지 못한 채 죽었으면 그의 부모가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줄 수 없고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이 예경(禮經)에 해와 별처럼 뚜렷이 명확한 조문이 있고 보면, 첫째 아들이 성인(成人)이냐 미성인(未成人)이냐와 후사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따질 필요도 없고 따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이른바 ‘이미 성인이 되고 나서 죽었고 그의 아비가 이미 그를 위해 참최복(斬衰服)을 입은 이상, 다시 세운 차적(次嫡)에게는 삼년복을 입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문왕(文王)이 백읍고(伯邑考)를 놔두고 무왕(武王)을 세운 것은 백읍고가 미성인이었던 이유에서도 아니고 또한 백읍고에게 후사가 없는 이유에서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무왕이 대성인(大聖人)이라는 것을 알고서 천하의 대기(大器)를 그에게 주고 싶었던 까닭이었으니, 이 또한 당연한 예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당시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백읍고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죄나 병도 없었고 후사도 두고 죽었다는 이유로써 도리어 적통으로 돌리면서 참최복(斬衰服)을 입어줘야 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만약에 ‘문왕이 전중(傳重)하지 아니한 백읍고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어주어야 하고, 이미 전중을 한 무왕을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선조를 존중하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무리한 말입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이른바 「둘째 아들을 똑같이 서자로 호칭한다.」는 것은, 대체로 둘째 아들을 첩의 아들과 구별하려고 하면 적(嫡)으로 칭하고 장자와 구별하려고 하면 그 또한 서(庶)로 칭한다는 것이니, 진실로 경우에 따라서 칭호를 수립하는 것이 해될 게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의 서자를 「첩의 아들 및 차적(次嫡)의 통칭이다.」라고 말한 이상, 아래의 이른바 「체이부정(體而不正)의 서자」가 첩의 자식에게만 해당하고 차적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시열의 이 설도 터무니없기 짝이 없습니다. 대체로 차적(次嫡)이 아비의 후사가 되기 전에는 서자로 칭하여 장자와 구별하고 그가 장자의 후사가 되고 나면 그 역시 장자로 불러서 중자와 구별하는 것이니, 이야말로 경우에 따라서 칭호를 세우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위의 글에서 이미 상세히 변론하였습니다. 아, 시열이 경우에 따라 칭호를 세우는 것이 해롭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았으면, 어째서 이 설을 ‘역명장자(亦名長子)’ 조항에 적용하여 우리 선왕이 장적(長嫡)으로서 서자와 구별된다는 것을 밝히지 아니하고, 도리어 네 종류 중의 부정(不正)인 서자에다 적용하면서 기어코 ‘선왕은 서자이다.’는 설을 입증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사리에 어둡고 생각이 고루한 것이 심합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이른바 「체이부정(體而不正)은 서자로서 후사가 된 경우이다.」라고 하였는데, 대체로 여기서의 서자는 위에 말한 서자와 내력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만약 이것이 첩의 아들만 칭한 것이고 차적(次嫡)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가씨(賈氏)가 여기에서 반드시 한번 얘기를 전환하여 구별을 했지 싸잡아 한 묶음으로 만들어서 후인의 의혹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신이 몹시 의아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시열이 주소(注疏)의 법례(法例)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 말입니다. 경전에 말한 서자는 모두 다 첩의 아들을 가리킨 것이고 자하전(子夏傳)에 ‘엄격히 구별한 서자’는 중자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씨는 여기에서 이미 한 차례 말을 전환하여 구별하기를 ‘서자는 첩의 아들에 대한 칭호이지만, 적처의 소생을 똑같이 서자로 부른 것은 엄격히 구별하려는 뜻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체이부정(體而不正)인 서자’라는 것은 곧 경전(經傳)에 말한 본디 첩의 아들인데 어찌 다시 한번 말을 전환하여 구별하겠습니까. 《논어(論語)》의 주법(註法)은, 이십 편 가운데에서 말한 ‘군자(君子)’가 모두 앞글의 ‘성덕(成德)에 대한 명칭이다.’는 주석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재차 풀이하지 아니하고, 오직 지위(地位)로써 얘기한 군자일 때만 주자(朱子)가 번번이 구별하여 풀이하였습니다. 그 주법이, 가씨(賈氏)가 오직 자하전(子夏傳)의 서자에 대해서만 풀이를 한 것과 같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시열의 설은 공박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너지게 됩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기복(朞服)의 소(疏)에 「임금의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 이하 및 첩의 아들을 모두 서자로 칭한다.」라고 했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무릇 위의 정·체(正體)가 하정(下正)을 말할 때 서(庶)라고 한다. 정체는 할아버지의 적통이 되는 자를 말하고 하정은 아버지의 적통이 되는 자를 말한다. 아버지에게는 적통인 정(正)이라고 하더라도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서(庶)가 되므로 적(嫡)을 서(庶)라고 칭하는 것이다.」라고 【주자의 설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는데, 이른바 「위에 대해 정·체(正體)이다.」라는 것은 적자인 아비를 뜻하고, 이른바 「하정」이라는 것은 차적(次嫡)의 적자를 말합니다. 어째서 「정(正)」이라 말해 놓고 또 「서(庶)와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적이므로 「정」이라 하되 순서가 다음이기 때문에 「서」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적통이라고 하더라도 차적(次嫡)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 있어서도 「서」로 칭하는데 더구나 본인에 대해서야 「서」로 칭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 기복(期服)의 소(疏) 및 주자의 설로 본다면, 여기서 이른바 「서자로서 후사가 된 자」가 반드시 첩의 자식만을 가리키고 차적(次嫡)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신이 정말 깊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더욱 사리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주자가 말한 ‘하정(下正)’은 중자 가운데 아비의 후사로 세워지지 아니한 자의 장자를 가리키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것으로 선왕과 전하에게 빗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그 아들에 있어서도 오히려 「서」로 칭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우리 전하를 ‘하정’으로 여기는 것이고, ‘더구나 본인에 대해서야 「서」로 칭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우리 선왕을 서자라고 지척하는 것입니다. 아, 그 패려하고 엉뚱함이 또한 심합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당초 헌의할 때 신은 진실로 이러한 《의례(儀禮)》의 소설(疏說)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소설에 의문이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의심이 가는 소설을 경솔히 채용하여 막중한 변례(變禮)를 단정하기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명(明)나라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그래도 잘못이 적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시열의 이 말은 예문(禮文)을 잘못 보아 예에 명확한 근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이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국가가 주공(周公)의 《의례(儀禮)》 및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준용(遵用)하는 것은 이미 조종조에 서로 전해 오는 가법(家法)이 되었는데, 어째서 우리 성고(聖考)의 상에만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올바른 예를 사용하지 않고 《대명률(大明律)》을 쓴단 말입니까. 더구나 《대명률》은 대부분 선왕의 옛 제도를 변경하여 당 무후(唐武后)의 설을 채용하였고 심지어는 어미의 상을 참최(斬衰) 삼년복으로 정하였는데, 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은 ‘우리 나라 예속(禮俗)이 《대명률》의 복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예의 의미를 깊이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뀔 수 없는 정론입니다. 시열이 기어이 《대명률》을 근거로 삼으려 하니, 또한 어미의 상에 참최복을 입는 것도 준행할 수 있는 제도라는 것입니까?
시열이 헌의하기를 ‘대체로 서자라는 말은 진실로 첩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차적(次嫡) 이하이면 비록 임금의 동복 아우라고 하더라도 또한 서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疏)에 이르기를 「서자는 첩에게서 난 아들만의 칭호가 아니고 둘째 적자(嫡子)도 똑같이 서자라고 부른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효종 대왕은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하여도 해될 것이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여기서의 ‘해될 게 없다.[不害]’는 두 자는 더욱 미안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이는 시열의 뜻에도 서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 어거지로 서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말을 조심해야 되는 부분인데도 사기(辭氣)가 너무나 거칠어서 조금도 어투를 부드럽고 점잖게 다듬는 의사가 없으니, 이게 어찌 신하로서 임금에게 아뢸 수 있는 말씨이겠습니까. 옛날에 주자(朱子)가 일찍이 향태후(向太后)의 말을 거론하다가 ‘여러 아들이 모두 서자였다.’는 문구에 이르러서는 ‘운운(云云)’의 자(字)로써 ‘서자(庶子)’의 자(字)를 대신 메웠습니다. 대체로 단왕(端王)은 실로 신종(神宗)의 서자이긴 하지만041) 그가 일찍이 천하의 아비가 되었기 때문에 감히 서자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곧 임금을 존중하고 윗사람에게 깍듯이 대하는 도리입니다. 아깝게도 시열은 이러한 의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패악한 말을 하면서 엉뚱하게 지척하여 갖다 붙였으니, 그 소견이 사리에 어긋나고 온당치 못한 점은 신들이 따질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주공(周公)이 경(經)을 세우고 자하(子夏)가 전(傳)을 붙이고 정현(鄭玄)이 주(註)를 냈지만 모두 「차자가 장자로 된다.」는 설이 없는데,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이르러 비로소 이 설이 있었고, 또 황면재(黃勉齋)가 《통해(通解)》의 속편(續篇)에다 거두어 편입했으니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자와 정자의 감정을 거치지 않았으니, 이 설이 과연 허목(許穆)이 한 말대로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지금 과감히 거행하는 것은 혹 미안할 듯합니다. 또 소설(疏說)에, 이미 「차적(次嫡)을 세웠으면 역시 삼년복을 입는다.」라고 말해 놓고, 그 아래에 또 「서자가 승중(承重)하였을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설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허목이 반드시 서자는 첩의 아들이고 둘째 아들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반드시 둘째 아들이 서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조문을 얻어내야만 허목의 설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가지 설 중 하나는 적자로서 정체(正體)이고 전중(傳重)하였기 때문에 삼 년의 복을 입는다는 것이고, 하나는 첩의 아들로서 체(體)이기는 하나 부정(不正)이기 때문에 비록 승중(承重)한 경우라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疏)를 단 사람의 조례(條例)가 이처럼 명백한데 어찌 서로 모순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와 정자의 감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는 설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대체로 주자(朱子)가 직접 가례·향례·방국례·왕조례를 찬수(纂修)하면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두 가지는 면재(勉齋)에게 편찬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면재가 친히 주자의 지도를 받들어 쓸 것은 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해서 그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주자가 일찍이 면재에게 편지를 보내 ‘상례의 상략(詳略)이 모두 이미 적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자네가 정한 상례와 제례는 짜임새가 매우 훌륭하네. 내가 편찬한 가례·향례·방국례·왕조례도 모두 이 짜임새에 따라 고쳐 정하게.’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살펴보면 이 조항은 주자의 감정을 거친 것이 분명하니 이것이 차장(次長)은 서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조문이 아니겠으며, 이것이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닌 서자는 첩의 아들에게만 해당한다는 명확한 조문이 아니겠습니까. 아, 《의례(儀禮)》 일서(一書)는 주공(周公)이 짓고 자하(子夏)가 전(傳)을 붙이고 선유(先儒)들이 주소(註疏)를 붙이고 면재가 편입하고 주자가 감정하였던 것입니다. 이 정도이고 보면 명확한 글이라고 해도 될 것이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주자와 정자의 감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헌의하기를 ‘지금 허목(許穆)이 주장하는 설은, 글의 본의를 상세히 고찰하지 아니한 채 서둘러 설을 마련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단궁(檀弓)의 문(免)과 자유(子遊)의 최(衰)는 과연 모두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단궁이 문(免)을 한 것은 손자를 놔두고 차자(次子)를 세운 것이 예가 아님을 기롱한 것이고, 자유가 최(衰)를 한 것은 적자를 놔두고 서자를 세운 일이 예가 아님을 풍자한 것입니다. 옛날에 공의 중자(公儀中子)의 상(喪)에 적손을 놔두고 차자(次子)를 세웠고, 사구 혜자(司寇惠子)의 상에 적자를 놔두고 서자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단궁과 자유가 예에 지나친 문(免)과 최(衰)의 차림새로 조문하면서 기롱하고 풍자한 것인데 정말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조 대왕께서 성사(聖嗣)042) 를 가려 세운 일에 있어서는 이 일과는 다른 것입니다. 소현 세자가 죽은 뒤, 오로지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무왕(武王)을 가려 세운 예에 따라 우리 효종 대왕을 책명(冊命)하여 세자로 세워서 대통을 전하였으니, 이는 대성인(大聖人)께서 종사와 생민을 위하신 대공(大公)·대법(大法)이었고, 또한 예에 있어서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공의(公儀)와 사구(司寇)의 일을 이 일에다 빗대어 대성인께서 이미 정해 놓은 전례를 함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헌의하기를 ‘또 인정과 사리로 미루어 보건대, 맏아들이 비록 성인(成人)이 된 뒤에 죽었어도 다음 아들을 모두 장자로 호칭하고 참최복을 입는다고 하면 적통이 엄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비 한 사람에게 참최복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시열이 이미 우리 선왕을 장자로 인정하지 않고 서자로 낮추어 칭하였고 보면, 그 언사에 드러낸 것들이 이처럼 사리에 어긋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예기(禮記)》에 ‘적처 소생은 모두 적자로 호칭한다.’라고 하였는데, 선왕이 과연 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세자로 세워지면 또한 장자로 부른다고 하였으며 마침내 왕위에 올라 위로 선조의 대통을 이었는데, 또 우리 선왕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적자로서 적통을 계승했는데도 삼년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적통이 엄격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게 과연 어떤 소견이란 말입니까. 아, 소현 세자에게 이미 전중(傳重)되지 못했고 선왕께서 세자로서 전중되어 위로 대통을 계승했으니 인조께서 전하신 종통이 소현에게 있습니까, 선왕에게 있습니까? 차적(次嫡)을 세웠을 경우 또한 장자로 호칭한다는 것이 이미 먼저 경문(經文)의 ‘부위장자(父爲長子)’ 조항에 세워졌고, 전중(傳重)될 수 없는 적자에 대한 설이 또 네 종류 복제를 설명한 조항에 나타나 있고 보면 종통·적통이 누구에게 있는지 단번에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종통과 적통이 우리 전중된 선왕에게 있지 전중되지 못한 소현에게 있지 않으니, 어찌 적통이 엄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 어찌 이통참(二統斬)043) 의 혐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헌의하기를 ‘아비는 지극히 높은 분이지만 출가한 딸은 감히 아비를 위해 참최복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참최복을 두 번 입지 않는 의리가 엄격합니다. 더구나 아비가 아들에 대해서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첫째 아들을 위해 참최복을 입은 일이 있는데 또 둘째 아들 이하를 위해 참최복을 입는다면 다시금 한계가 없으니, 대체로 허목(許穆)은, 한갓 둘째 아들이 승중(承重)하였을 경우 기년복이 된다는 것이 경(經)에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만 알았지, 첫째 아들이 성인이 된 뒤에 죽고 둘째 아들이 승중하였을 경우 참최복이 된다는 것 역시 경에 나타나 있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모른 것입니다. 어찌 하나만 고집하면서 하나는 무시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른바 참최복을 두 번 입지 아니한다는 것은, 가정에 존귀한 분이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다시 어미를 위해 참최복을 입지 못하는 것과, 또 남의 후사가 된 자 및 출가한 딸이 자기를 낳아준 아비를 위해 참최복을 입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어찌 지중(持重)한 대종(大宗)이 소종(小宗)에 대해 등급을 낮추는 것이겠습니까. 출가한 딸이 다시 자기를 낳아준 아비를 위해 참최복을 입지 못하는 것은 중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과는 본래 상관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것을 끌어다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아비가 맏아들을 위해 참최복을 입거나 기년복을 입는 것은, 단지 전중하였는지 전중하지 않았는지만 따져서 할 뿐이고 아들이 성인(成人)이 되었는지의 여부에는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한데 시열의 이 말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하였단 말입니까. 그의 이른바 ‘참최복을 두 번 입지 아니하는 법’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아랫글에서 상세하게 설명드리기로 하고 여기서는 거듭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또 세종 대왕의 경우로써 말씀드리자면, 가령 세종 대왕께서 오래 사시고 문종 대왕이 불행히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면, 세종 대왕은 당연히 참최복을 입고 첫째 대군(大君)을 세워야 되는데, 또 불행하게도 세운 대군이 먼저 죽으면 또 참최복을 입고 두 번째 대군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여덟 대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최 삼년복을 입는다면, 이는 문종과 세조 두 대왕까지 아울러 아홉 번의 삼년상이 됩니다. 삼 년씩 아홉 번이면 27년이 됩니다. 비록 선비나 서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인데 더구나 정통이 지엄한 제왕의 경우는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필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시열의 이 말이 장차 전중(傳重)하게 되는 점으로써 한 말이라면, 정·체(正體)이기는 하나 전중한 경우가 아니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뜻을 신들이 이미 앞에서 빠짐없이 논하였고, 만약 이미 전중한 상황에 입각하여 한 말이라면, 소현은 전중도 하지 않고 종통도 계승하지 아니한 적자인데 또 어떻게 이처럼 터무니없는 설을 가탁하여 예경(禮經)의 본의를 어지럽힐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춘추(春秋)》의 법으로 본다면, 비록 이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으면 임금으로 성립되지 못하며, 그 아들이 뒤를 이어 즉위하지 않았으면 종묘에 모셔져 대통을 계승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뒤에 이미 원년을 고치고 종묘에 고하여 임금으로 성립되었으면 비록 아들이 뒤를 이어 즉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종묘에 모셔져 종통을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춘추》에서 종통을 중시하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소현은 세자로서 선군(先君)의 생존시에 죽었고 아들도 뒤를 이어 즉위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예에 이른바 전중하지 못한 적자이니 어떻게 종적(宗嫡)의 대통을 소현에게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대왕(先大王)은 인조 대왕의 적처 소생인 둘째 아들로서 명을 받아 임금이 되어 1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으니, 원년을 고치고 임금으로 성립된 정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전하께서 선군(先君)의 종통을 계승하여 종묘의 정·체(正體)인 주인이 되었으니 만큼 더욱이 종적의 왕통을 성고(聖考)에게 부여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사견을 억지로 세워 임금을 도치시킨 것이 이보다도 심할 수 없으니, 이 또한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설은 상편의 《춘추》 조목 아래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만약 「대왕의 상에는 비록 시마복(緦麻服)에 해당되는 부녀자라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참최복을 입는다.」는 이유로 대왕 대비도 삼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한다면 이 또한 그렇지 않을 듯싶습니다. 대체로 신자(臣子)의 위치에 있는 자는 진실로 감히 공복(功服)이나 시마복으로써 대왕의 상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효종 대왕이 대왕 대비에게 군신의 의리가 있는데, 대왕 대비께서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해 입는 복으로 대왕을 위해 입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다 의심스런 설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도 얘기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대왕 대비는 전중(傳重)의 복으로 볼 때 대왕을 위해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됩니다. 이는 곧 어미로써 자식을 위해 입는 복인데, 어찌 임금으로써 신하를 위해 입는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말대로라면, 첫째 아들이 모후(母后)보다 나이가 많을 경우에는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모후가 첫째 아들을 위해 또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는 매우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시열은 기어이 선왕을 서자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 대체로 앞서의 헌의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없어서, 헛점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는데 그 병근(病根)의 시작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열이 헌의하기를 ‘원임 대신이 말한 「대체로 부왕(父王)이 서자의 상을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모후(母后)가, 대통을 이어 사직의 주인이 된 적자를 위해 기년복으로 낮추어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쟁론(爭論)하고 있는 것은 단지 차적(次嫡)이 서자에 포함되느냐의 여부 및 서자에 포함되면 기년복을 입는 것이 옳으냐의 여부일 따름입니다. 부왕(父王)이 이미 서자라고 여기어 삼년복을 입지 않은 이상, 비록 이미 대통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모후가 어찌 삼년복을 입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예기(禮記)》에 이른바 「장자를 위해서는 지아비의 생존 여부를 따지지 아니한다.」는 의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더구나 대왕 대비는 소현의 상에 이미 인조 대왕과 더불어 똑같이 장자의 복을 입었고 보면 그 의리를 어떻게 오늘날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신이 예의 논의를 잘못한 원인은 소(疏)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우선 대명(大明)의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과연 성인(聖人)에게 합당한 것인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공자(孔子)께서도 「지금 사용하고 있으니 나는 주(周)나라 제도를 따르겠다.」라고 말하셨으므로 오늘 정한 바에 대해서 항상 생각하기를 크게 사리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겼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이 조항을 살펴보건대,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대체로 부왕(父王)이 정(正)이 아닌 서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지 아니하는 것은, 그가 장차 전중(傳重)하게 될 첩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모후가 대통을 계승한 둘째 아들을 위해 삼년복을 입는 것은 그가 이미 전중한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체(體)가 또 다르니 만큼 진실로 합해서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왕이 이미 둘째 아들을 세워 장자로 삼고 또 이미 대통을 계승하고 난 뒤에 모후가 삼년복을 입는 것은 바로 아비가 복을 낮추어 입지 아니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어미 또한 감히 복을 낮추어 입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래도 지아비의 생존 여부를 따지지 아니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은 기어이 성고(聖考)를 서자로 여기려고 주장을 너무 심하게 하다가 결국에는 예를 버리고 자신의 의견대로 적용하였으니 이루 다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명나라 때의 제도를 사용한 잘못에 대해서는 신들이 진실로 이미 앞에서 확실히 분변하였는데도 시열은 또 은연히 공자가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겠다는 의리에다 스스로 가탁하여 자기 잘못을 눈가림하였습니다. 가령 시열의 주된 생각이 전적으로 주나라 제도를 따르겠다는 의리에서 나와 복제를 정하려고 하였다면 비록 예를 버린 잘못은 있지만 그래도 종통과 적통을 깎아내리는 마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당초 고집할 때 곧장 《의례(儀禮)》의 소설(疏說) 가운데 ‘정(正)이 아닌 서자’란 문구를 사용해 성고(聖考)에게 빗대어 이미 적(嫡)을 서(庶)로 낮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온 나라 안에 말썽이 그치지 않아 결국 숨기지 못하게 되자, 이에 명 나라 제도를 근거로 삼아 애당초 깎아내리려는 의사가 없었던 것처럼 하였으니, 그가 남의 눈치를 살펴 얼버무리고 잘못인 줄을 알고서도 꾸물대며 둘러댄 자취는 더욱이 가릴 수 없습니다.
정원이 아뢰기를,
"방금 영남 생원 유세철 등이 와서 소를 올렸는데 기해년 국상 때 상복 제도가 잘못되었다고 소급해 논한 것이었습니다. 그 음험하게 세운 뜻은 사실 전후로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자들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신들이 이에 대해 하나하나 공격하여 깨뜨릴 겨를이 없기에 우선 큰 것들만 뽑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종통이니 적통이니 하는 것은 즉 윤선도(尹善道)가 유신(儒臣)을 궁지로 몰아넣으려고 하였던 효시로서 이 무리들이 본받아 답습해온 것입니다. 첫째는 윤기가 도치되었다 하고 둘째는 강상에 관계된다 하며, 첫째는 천한 칭호를 선왕에게 뒤집어씌었다 하고 둘째는 전하를 하정(下正)의 서자로 만들었다 합니다. 그들이 반복해서 허튼 말을 한 것은 대부분 윤선도가 끄집어내지 않았던 것인데 그 주된 뜻은 오로지 예를 의논한 신하를 궁지로 밀어넣으려는 데에 있었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왕을 모함하여 빗대지 않아야 할 데에다 빗대고 말았습니다. 당초 정한 상복은 본래 한두 유신들의 독단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대신들이 절충해서 한 것이었는데,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거행한 것은 참으로 삼 년의 제도는 고례에 근거할 데가 없고 시왕(時王)의 제도와 선대 조정에서 거행하였던 것들이 모두 기년복으로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무리들의 의논이 8년이 지난 뒤에 나왔으니 그들의 꾸민 속셈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이 때가 지나갔다는 혐의가 염려되자 ‘때의 조만은 논할 것이 못 된다.’ 하고 그들이 남을 모함한 자취를 엄폐하고자 ‘신의 이 말을 모르는 자는 필시 송시열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며 구실거리를 삼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감히 유교를 아끼고 인륜을 부축한다는 의리에 가탁하였습니다. 그들이 부린 오만한 작태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으니 아, 참혹도 합니다. 이 의논을 만든 자들이 이미 종적(宗嫡) 두 글자를 기화로 삼았으나 여전히 그들의 계책을 펼 수가 없자, 예서(禮書)에 있는 서자의 설이 쓰는 데가 다르고 그 뜻이 어떠한지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체 갈기갈기 분리하고 억지로 뜯어 맞추어 상의 마음을 노하게 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려고 꾀했습니다. 그리고 책자에 논한 것은 참람하게도 고문을 인용한 다음 자신들의 뜻을 삽입하여 전도하고 현란시켜 사람을 밀어넣기 위한 구덩이를 만들었는데, 그들이 이른바 ‘경과 이치에 위배되고 선왕을 더럽히고 멸시하였다.’라고 한 말은 바로 자신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위에서 내려다 보시어 미세한 것도 죄다 통촉하고 계시니, 비록 이런 무리가 수없이 많이 있더라도 결국 그들의 뜻대로 기만할 수는 없으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만약 확실히 분변하고 통렬히 배척하여 천고의 시비를 크게 밝히지 않는다면 그 말류의 해독이 예를 논한 신하들에게 화가 전가되는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들이 왕명을 들이고 내는 자리에 있으므로 이와 같은 흉측한 글은 성상께 보여드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만, 그들이 이미 선비의 이름을 빌렸고 보면 역시 이유없이 기각할 수만은 없기에 감히 이렇게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쾌히 보이심으로써 음험하고 사특한 자취를 단절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 주소서. 그러면 그지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도승지 김수흥, 좌승지 김우석, 좌부승지 송시철, 우부승지 김만기, 동부승지 김우형이 연명하였는데, 우승지 민희는 참여하지 않았다. 상이 답하기를,
"그들의 상소와 책자를 보니, 음험 사특하고 부정한 뜻을 폐와 간을 들여다 본 것처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조정이 근원을 막도록 조처해야지 어찌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뜻만 보이고 말겠는가."
하였다.
3월 23일 계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기를,
"기해년 국상 초에 예관(禮官)이 대왕 대비의 복제 문제에 대해 의논을 수렴하자고 청했는데, 신은 평소 예문(禮文)을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지 국가의 예제 가운데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근거로 의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여러 대신 및 유신들이 마침 모두 신의 의론을 따랐기에 마침내 기년복으로 정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유세철 등의 소 가운데 적힌 말을 들으니, 머리칼이 오싹해지면서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가 변화를 부린 말들이 비록 몹시 여러 갈래이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오직 기년복이 실례(失禮)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로써 죄를 삼는다면 죄는 사실 신에게 있는데, 어찌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겨 의정(議政)의 반열에 태연히 있으면서 동참하였던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공박을 신 대신 받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임을 삭제하여 신의 죄를 바로잡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음험하고 부정(不正)한 심보가 정말 나를 놀라게 하였다. 경은 어찌 이러한 일로 인혐하여 도리어 사체를 손상시키는가. 어서 나와 공무를 보아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도 동참하여 의논을 드렸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3월 24일 갑진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왕세자를 책봉한 뒤 백관과 제도(諸道)가 전(箋)을 올려 진하할 때 대전(大殿)의 전문(箋文)·방물(方物)·물선(物膳) 및 대왕 대비전·중궁전·세자궁의 방물·물선을 전례에 따라 봉진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물선만 봉진하고 방물은 봉진하지 말라고 하였다.
3월 25일 을사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이시매(李時楳)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원자(元子)의 이름을 고쳐 돈(焞) 자로 정하였다. 처음에 상이 여러 재신들에게 명하여 빈청에서 회의한 끝에 광(爌) 자로 정했었는데, 대사헌 조복양(趙復陽)이 등대하여 아뢰기를,
"양광(楊廣)의 이름과 음이 같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복양이 대신에게 의논을 하지 않은 채 지레 제 혼자서 아뢰었으므로 대신이 모두 노하였다. 우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빈청(賓廳)에서 의논하여 정할 적에 복양이 참석하였는데, 이제 와서 뒷말을 하니, 사체가 부당합니다."
하자, 복양이 이 일로 인피하고 물러나갔다. 그뒤 좌상 홍명하(洪命夏)와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등대하여 모두 아뢰기를,
"원자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막중한 일입니다. 이미 다른 의논이 있는 이상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처음에 하였던 것처럼 모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삼망(三望)을 갖추어 써서 들이니, 상이 수망(首望)으로 정하도록 명한 것인데, 대체로 ‘광명(光明)’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대사헌 조복양, 집의 정계주, 장령 맹주서, 지평 어진익·소두산이 아뢰기를,
"영남의 생원 유세철 등이 윤선도의 전철을 밟아 그가 남긴 꾀를 주워 모은 다음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앙심을 풀어보려고 하였으나, 그 음흉한 실상이 성상의 감식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엄하게 분부를 내려 남김없이 배척하셨으므로 신들은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 대체로 처음 대왕 대비께서 입을 상복에 대해 의논하여 정할 때 예경(禮經)의 주소가 서로 다른 점이 없지 않았으므로 시왕의 제도를 행하기로 정해 국가 전례를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례(大禮)가 명백하고 정당하여 털끝만큼도 미진한 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철 등이 말하기를 ‘종통과 적통이 무너지고 윤기가 도치되어 군신 부자의 사이에 순서를 잃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하여 선왕께서는 인조의 대통을 계승하지 못하고 전하께서는 인조께 제사지내지 못하게 되었다.’라고 하는데, 이 무리들이 어디서 이러한 말들을 듣고 이렇게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참혹도 합니다. 주소(註疏) 가운데 근거로 내세울 만한 대목이 뚜렷이 있는데도 숨기고 논하지 않았으며, 인용한 예경의 설들은 대부분 배치되게 변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천한 이에게 사용하는 칭호인 서(庶) 자를 선왕에게 붙이고 하정(下正)의 서(庶) 자를 전하에게 돌리고는 결국 ‘종묘에 고하고 사방에 반포하여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그들의 흉악하고 어긋난 말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설들이 자행되어 금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해가 어찌 홍수나 맹수의 해 정도로 그치고 말겠습니까. 세철 등의 죄악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비의 이름을 빌려 올린 소라고 하여 불문에 붙일 수는 없습니다. 상소의 주동자인 유세철을 유사로 하여금 법을 상고해 죄를 정하게 하여 인심을 바르게 하고 사특한 설들이 사라지게 하소서."
하였다. 사간 이정, 헌납 최일, 정언 이동직도 이 일을 논해 아뢰었는데, 상이 답하기를,
"음험하고 부정한 그들의 실태를 내 이미 알고 있다. 어찌 그들을 중하게 다스리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나의 뜻은 그들의 죄를 다스리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후일의 폐단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다."
하였다.
응교 이민서(李敏叙), 교리 오두인(吳斗寅), 부교리 이단하(李端夏), 부수찬 박세당(朴世堂) 역시 상차하여, 유세철을 죄주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왕세자의 책례(冊禮)를 뒤로 물리고 싶어하신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린아이가 예를 행해야 하므로 불가불 의절을 여러번 익혀야 하겠다. 그런데 온천에 갔다 온 뒤에는 날짜가 너무 급박하기 때문에 내 뜻에는 꼭 뒤로 물려 거행하였으면 한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마음에는 모두 빨리 거행하였으면 합니다만 성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뒤로 물려 거행해야겠지만 날짜를 미리 정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초봄으로 물려 거행하고 싶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국가에 사고가 날지 미리 알 수 없으니 지금 무사할 때 빨리 거행하느니만 못하다고 봅니다. 내년은 너무나 머니 8, 9월 안으로 물려 정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인문(印文)은 지난 신묘년의 규례대로 ‘왕세자지인(王世子之印)’이라고 써야 하겠습니다마는, 좌우의 글자 수가 같지 않습니다. 만약 지(之) 자를 뺀다면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후의 인보(印寶)를 고찰해 보면 글자의 수가 짝수나 홀수로 되어 있어 일정한 규식이 없었다."
하자, 이판 김수항이 아뢰기를,
"대체로 인보의 전문(篆文)은 글자 수가 맞지 않는 경우에만 지(之) 자를 써서 채웠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인문에 쓸 글자는 왕세자인(王世子印) 넉 자로 파면 실로 적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따라 하라."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원자가 이어서 강할 글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해 보았더니, 모두 ‘《훈몽자회(訓蒙字會)》는 글자를 알기 위한 것뿐이니 《동몽선습(童蒙先習)》보다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체로 어릴 때에 과정을 정해 지나치게 독촉하면 총명이 감소할 뿐만 아니라 뼈속의 기운이 감퇴될 우려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잠시 앞에 읽었던 글을 복습하게 하라. 앞으로 온천에 갔다가 돌아온 뒤에 다시 이에 대해 의논할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소결청(疏決廳)의 당상관들 중에 김수흥·정만화가 마침 모두 수행하게 되었으니 충청도의 소결 문서를 가지고 가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기·충청 양도의 문서는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이번의 거둥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일들은 마땅히 절약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성상께서 누차 하교하여 신칙하셨지만, 일을 맡은 신하가 죄책을 받을까 걱정하여 일로(一路)의 관사(館舍)치고 새롭게 단장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것을 보신다면 반드시 집들을 과도하게 치장하였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민폐를 걱정하시어 다시금 너그러움을 베풀되, 홀아비·과부·고아·외톨이 및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위문하는 데에 유념하소서. 그러면 백성들이 너나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삼가 영남 선비의 소에 대해 내리신 비답을 보건대, 그들의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셨으므로 그야말로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어가를 머무르신 뒤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불러서 오게 하여 어진 사람들이 잇따라 진출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드신다면 앞으로 일어나는 사특한 말들은 공박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질 것입니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엊그제 경연에서 영남 유생들이 올린 소의 일에 대해 방지책을 수립해 근원을 막으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여러 대신이 지금 모두 입시하였으니 서로 의논하여 정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끊임없이 일어난다면 편안할 날이 없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방지책을 세워서 앞으로의 우환을 막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뜻을 먼저 정하시어 어진이를 임용하되 의심하지 말고 군자를 추켜세우고 소인을 억제하신다면 사특한 말들이 무슨 수로 일어나겠습니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영남 유생이 올린 소의 대의는 오로지 복제(服制) 문제 한 건을 거론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신이 그 당시 수상으로서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국가의 제도로써 정하였으니, 이로써 죄를 준다면 사실 신이 받아야 하므로, 신의 도리로 볼 때 감히 의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만 방지책을 세우려고 하시는 성상의 뜻은 그야말로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방지책을 어떤 식으로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또한 아래에 있는 자가 감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유생이 예를 논한 설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소의 말을 살펴보건대, 시열의 마음 속에 다른 의도가 없다고 하였으니, 만약 무함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진실로 그 본정이 아닙니다. 전후 성상의 비답에 처치하겠다는 분부가 계셨는데, 신이 생각하기로는 이미 유생의 소라고 명명해 놓고 논죄한다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고 여겨집니다. 방지책을 수립하는 일은 괜찮을 것도 같기는 하나, 다만 어떤 식으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방지책을 수립하라고 하신 말씀은 형벌을 사용하려는 것입니까?"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애당초 예를 의논할 때에 대신과 재신이 널리 의논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우상 허적이 당시 호조 판서로 경연에 나아갔을 때에 국가 전례로 단정해야 한다는 뜻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기년복은 국가에서 정한 제도이기 때문에 소현의 상에 인조께서도 기년복을 입었는데, 선왕의 상에 대왕 대비께서 어떻게 삼년복을 입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철 등이 인용한 백읍고의 고사는 더더욱 근사하지도 않습니다. 문왕은 백읍고를 버리고 무왕을 세웠지만 소현은 강씨(姜氏)가 폐위되었으나 세자의 위치는 폐해지지 않았고 보면 그들이 한 말이 어찌 무함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만약 ‘애당초 예문을 참작하여 국가 제도를 사용하였다.’는 뜻으로 명백하게 분변하여 깨뜨린 다음 이어서 방지책을 세운다면 괜찮을 것입니다만, 바로 방지책만 세우고 만다면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고 비방하는 자도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애당초 만약 우리 선대 임금께서 행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례의》를 따라 한 것이라고 했으면 어찌 지금까지 분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고례를 인용한 뒤로 점점 확대되어 여기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하자, 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복제를 의논해 정한 뒤에 별다른 의논이 없었습니다. 허목이 처음으로 삼년설을 제창하면서 스스로 고례를 인용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사실은 그의 억측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소급해 복을 입을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만, 세월이 오래된 뒤에 과거의 일을 들추어내어 유신(儒臣)을 이처럼 몹시 공격하니 그들의 마음씀이 정말 매우 밉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이 무리들의 의도는 예를 논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사람을 모함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송시열이 만약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했으면 필시 반대로 잘못되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신의 뜻에는 반드시 방지책을 세워 놓아야만 분란의 우려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소를 올린 영남 선비들의 죄를 논하고 싶기는 하나 다만 한때 벌을 주는 것만 가지고는 후일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고, 국가에서 반드시 제도를 정해 놓아야 먼 후세에까지 분란의 우려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복제를 모두 《오례의》에 따라 행하였으니 지금에 와서 다시 고칠 수 없다. 앞으로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소요를 야기할 경우에는 형벌을 주지 결코 흔들려 고치지는 않을 것이다.’는 뜻으로 정원이 안팎에 포고하라."
하였다.
관학(館學) 유생 홍득우(洪得禹)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경상도 생원 유세철 등이 올린 소의 내용을 보건대, 윤선도(尹善道)를 조술(祖述)하여 사림(士林)에게 화를 전가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성조(聖朝)에서 이미 정해 놓은 대례(大禮)를 8년이나 지난 뒤에 건방지게 논하였는데, 그 속셈의 흉악함과 세운 논리의 어긋남이 선도보다 백 배나 심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볼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신하와 자식이 임금과 아비에 대해 신종추원(愼終追遠)044) 하는 도리는 한결같이 예를 표준으로 삼아 예에 없는 일을 감히 하지 아니하는데, 이것이 바로 군신(君臣)·부자(父子) 간에 제각기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초에 여러 신하들이 드린 의논과 성상의 결단이 이미 신중하고도 극진하여 예에 합당하도록 애썼는데, 저들이 어찌 감히 ‘군신·부자 사이에 차서를 잃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또 우리 성상께서 여러 가지 논의를 절충하여 대례(大禮)를 정하시면서 선조(先祖)께서 행하신 바를 따랐으므로 넉넉히 후세의 정제(定制)가 될 만한데, 저들이 어찌 감히 ‘강상에 관계된 일이니만큼 누구나 다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의 통서가 계승되거나 단절되는 것은 애당초 복제의 융쇄(隆殺)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국조(國朝)의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예종(睿宗)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지만 예종이 전중(傳重)한 종통에 뭐가 해로운 게 있었으며, 문정 왕후(文貞王后)가 인종(仁宗)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지만 인종이 전중한 종통에 무슨 해로움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저들은 어찌 감히 효종 대왕이 종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또한 어찌 감히 종통과 적통이 무너지고 윤기가 도치되었다는 말을 한단 말입니까. 국조의 전례는 오늘날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성상께서 재정(裁定)하실 때 이미 준용한 바가 있는데, 저들이 어찌 감히 명호(名號)를 깎아내려 천한 서인으로 대한다는 등의 말을 선왕을 두고 할 수 있으며, 기년의 복제가 열성(列聖)의 전례에 어긋남이 없었는데, 저들이 어찌 감히 빨리 바르게 분변하여 종묘에 고하자고 청할 수 있으며, 성조(聖朝)의 대례(大禮)가 송종(送終)045) 에 극진하지 못한 점이 조금도 없었는데 저들이 어찌 감히 선왕이 입은 오욕(汚辱)이 비로소 씻어진다고 둘러붙일 수 있단 말입니까. 성상의 큰 효성으로 성의와 예의를 모두 극진히 하여 아무런 유감이 없는데, 저들이 어찌 감히 복제를 소급해 바로잡아야만 효도가 극진해져서 죽은 이나 산 이가 여한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편안치 못한 게 없고 성상께서 재정하신 예도 후세에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한데, 저들이 어찌 감히 복제를 소급해 바로잡아야만 바야흐로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기뻐하고 만세토록 떳떳이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의 몹시 불경(不敬)하고 몹시 부도(不道)한 죄가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신들은 실로 거듭 변론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성조를 지척한 패란 무도함과 유현(儒賢)을 무함하고 조정을 경멸한 죄에 있어서는 변론해 밝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통찰하시어 결단을 내리소서.
당초 예를 논의할 때에, 이미 경전(經傳)의 뜻을 취하여 시왕(時王)의 복제를 정하여 행하였으므로 신들은 먼저 우리 조정이 과거에 행했던 예에 대해 얘기하고 나서, 세철 등이 예경(禮經)을 인용하여 변란(變亂)시킨 점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살펴보건대, 우리 덕종(德宗)·예종(睿宗)·인종(仁宗)의 상에 대왕 및 왕대비께서 모두 삼년의 복을 입지 않았고, 인조 대왕과 대왕 대비께서도 소현(昭顯)의 상에 역시 기년복을 입고 삼 년의 복제를 쓰지 않았는데, 이는 대체로 선조(先祖)께서 이미 행하신 예를 따라 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차적(次嫡)으로서 승중(承重)한 경우의 복은 삼 년으로 해야 된다는 것은, 이미 국제(國制)도 아니고 고례에도 명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해년의 대상(大喪) 때, 수상 정태화(鄭太和)가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대왕 대비의 복제에 대해 의견을 묻자, 시열이 예경의 ‘맏아들을 위해 삼년복을 입는다.’는 조항 및 소설(疏說) 네 가지[四種]로 대답하였는데, 경전의 주소(註疏) 역시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없지 않으므로 억견(臆見)으로 단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선조에 이미 행한 전례와 명나라 시왕(時王)의 제도는 매우 명백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수상이 이것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고, 여러 대신 및 조정의 뭇 의논도 모두 그 의견과 합치되었으므로 성명께 여쭈어서 마침내 기년의 복제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의논이 이에 불과하였고 보면, 송시열의 마음을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철 등은 송시열이 선왕을 깎아내렸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 또한 참혹한 짓입니다. 허목(許穆)이 경자년046) 3월에 비로소 소를 올려 예를 논의하였는데, 허목이 논한 것도 《의례(儀禮)》의 주소(註疏)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비록 승중(承重)한 경우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설 가운데 ‘서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서의 ‘서자’에 대해서는 소설(疏說)의 범위를 벗어나 감히 자기 견해로써 첩의 아들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송시열이 허목의 견해를 꼭 믿을 수 없다고 여겨서 이런 뜻으로 헌의 속에 언급하였던 것이고, 송준길(宋浚吉)도 차자에서 말하기를 ‘고례(古禮)라 하더라도 만약 매우 분명하지 않으면 차라리 국가의 전례를 사용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주소에서 이미 둘째 아들도 통틀어 서자라고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데도, 허목은 「삼년복이 될 수 없다.」는 조항 아래 「서자를 후사로 삼은 경우」에서의 서자는 결단코 첩의 아들이라고 고집하였습니다. 하지만 예경의 뜻이 과연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근거할 만한 의논이 아니겠습니까.
아, ‘서(庶)’라는 하나의 글자를 허목이 천칭(賤稱)이라고 억단(臆斷)하기 시작하였으나, 유신(儒臣)이 내세운 바는 곧 예경(禮經)에 이른바 ‘중(衆)’ 자와 같은 뜻의 ‘서’ 자였고 보면, 비록 허목이 억단한 천칭으로써 유신(儒臣)의 죄안을 억지로 만들려 한들 그게 될 일이겠습니까. 선도가 처음에 종통·적통의 설로써 유신(儒臣)을 무함하는 기화로 삼았고, 세철 등이 다시 ‘선왕은 인조의 종통을 계승할 수 없고 전하는 인조를 제사지낼 수 없다.’는 등, 감히 차마 못할 얘기를 꺼내면서 남을 무함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스스로 선왕을 속이고 말씨가 승여(乘輿)를 핍박하는 죄에 빠짐을 면하지 못했으니, 아, 또한 이상한 짓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으로서 제사를 주관하고 종통을 전승한 사람들이, 어찌 삼년복을 입었다고 해서 바야흐로 그 왕통을 이은 것이 되고 기년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 왕통을 전하지 아니한 것이 되었겠습니까. 형제 간이나 숙질 간에 전계(傳繼)한 임금과 차적(次嫡) 또는 방지(旁支)로서 들어와 계승한 임금들도 예외없이 그 전국(傳國)의 통서를 이었으되 모두 정·체(正體)가 아니었고 보면, 어찌 일찍이 복제(服制)의 등급(等級)으로써 통서(統緖)의 경중(輕重)을 한정(限定)한 경우가 있었습니까. 더구나 우리 조종(祖宗)은 누조(累朝) 이래로 비록 장적(長嫡)의 상(喪)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삼 년의 복제를 행하지 아니하고 단지 기년복만 입었으나 종통(宗統)의 전승(傳承)은 진실로 그대로인 채 변함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명묘(明廟)의 상에 이르러 공의전(恭懿殿)이 입어야 될 복(服)에 대해서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어찌 기년복에서 그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계통(繼統)의 의리는 복제의 경중과는 상관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철 등의 이른바 ‘우리 국가의 삼백 년 전해온 종적(宗嫡)의 왕통이 끝내 모호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은, 어찌 흉패(凶悖)하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계력(季歷)은 태왕(太王)을 사속(嗣續)하였건만 태왕의 장자(長子)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태왕의 소자(小子)라고 하며,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을 사속하였건만 문왕의 장자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문왕의 차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성덕(聖德)을 지녀 천하의 임금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장유(長幼)의 본래 차서(次序)는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태백(太伯)과 백읍고(伯邑考)는 제일자(第一子)로되 이미 장차 전중(傳重)할 장자(長子)가 아니었고 보면, 바로 예(禮)에서 이른바 ‘폐질(廢疾)이 있거나 무슨 사고가 일어난 부류’에 속하고, 계력과 무왕은 진짜 차적(次嫡)으로서 맏이가 된 자들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전례(典禮)와는 크게 같지 아니한 면이 있으니, 어찌 똑같은 조항으로 함께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예가(禮家)의 칭위(稱謂)는 맏이와 구별시켜 ‘서(庶)’로 이르는 경우도 있고, 적(嫡)과 구별시켜 ‘서’로 이르는 경우도 있는데, 만약 맏이와 구별시켜 서(庶)로 이르는 경우이면 애당초 천한 칭호가 아니며 차장(次長) 이하의 통명(通名)이 되는 것이니, 신자(臣子)가 군부(君父)에 대해 비록 극도로 융숭하게 대하는 법이라고는 하더라도 기어이 맏이가 아닌 이를 맏이로 칭하려 하거나 기필코 차장(次長)이 서(庶)라는 것을 기휘(忌諱)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닿는 일이겠습니까.
또 예제를 논의한 신하가 말한 ‘적통(嫡統)’은 단지 장유(長幼)의 차서(次序)를 밝히려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것이 어찌 선왕을 강폄(降貶)하는 것이 되며 어찌 전서(傳序)에 해로움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세철 등이 기필코 차장인데 맏이로 이르고 차적인데 적(嫡)으로 이르고자 하는 것이 과연 효묘(孝廟)에 대한 융숭함이 불어난다거나 효묘에 대해 더 존경하는 것입니까. 《의례(儀禮)》의 기복(期服) 장(章)의 소(疏)에 말한 ‘임금 적부인(嫡夫人)의 제이자(第二子) 이하 및 첩의 자식을 모두 서자로 호칭한다.’는 것이야말로 명백하게 근거할 수 있는 글이고, 유신의 헌의에서도 이를 내세워 증명하였으나, 세철 등의 소(疏)는 이 한 조항에 대해서는 조금도 제기하여 논하지 않았고 보면, 그 말이 궁색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잘못을 꾸며대고 얼버무리는 태도를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유신이 주자(朱子)의 ‘하정서(下正庶)’ 설을 인용한 것에 있어서는, 하정(下正)이 비록 정(正)이 되기는 하더라도 그 또한 서(庶)로 부르기 때문에 인용하여 ‘서(庶)’ 자가 천칭(賤稱)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어찌 일찍이 국가의 유구한 종통(宗統)으로써 아비를 제사하는 종통을 삼으려는 뜻이 있습니까. 말뜻이 명백하니 뉘라서 이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세철 등은 도리어 그 본지(本旨)를 무시한 채 지척(指斥)한 바가 있다고 여기고서 유현(儒賢)을 함해(陷害)하는 함정으로 만들었으니, 그 심보와 의도가 그야말로 고약하지 않습니까.
예가(禮家)들은, 적장(嫡長)을 ‘정(正)’이라고 이르니 적(嫡)이 아니면 정이 아니고, 부자(父子) 사이를 ‘체(體)’라고 이르니 아들이 아니면 체가 아닙니다. 적자(嫡子)와 적손(嫡孫)을 똑같이 ‘정(正)’이라고 이르되 아들은 체라고 하나 손자는 불체(不體)가 되고, 장자(長子)와 중자(衆子)를 똑같이 ‘체(體)’라고 이르되 장자는 ‘정’이고 중자는 ‘부정’입니다. 그런데 세철 등은 도리어 적실(嫡室)의 아들 모두를 정체(正體)라고 하면서 다만 첩의 자식이라야만 ‘체(體)이되 부정(不正)’이라고 하니, 어찌 몹시 예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통상하(通上下)’의 설047) 에 대해서는, 상복편(喪服篇)의 ‘천자까지 모두 포괄한다.’는 이하의 문장으로써 살펴보면, 가정과 나라에 통행(通行)하는 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세철 등이 감히 ‘가정과 나라는 같지 아니하다.’는 설을 주장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겠습니까. 《의례(儀禮)》의 주(註)에 이미 ‘적통(嫡統)은 맏이로 세운다.’라고 했는데 그 소(疏)에는 ‘제일자(第一子)가 죽었으면 적처(嫡妻) 소생의 제이장자(第二長者)를 데려다가 세우고 또한 그도 장자(長子)로 호칭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장(長)’이라는 한 글자를 단지 제이장(第二長)으로서 후사로 세워진 자에게만 쓰고 제일자(第一子)로서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냥 ‘제일자(第一子)’라고만 말했을 뿐 ‘장자(長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그 제일자(第一子)에게 사고(事故)가 있어 맏이로 세워지지 못한 채 죽어서 삼년복을 입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 곧 이른바 ‘정·체(正體)로되 전중(傳重)하지 못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제이장(第二長)으로서 후사가 된 자는 자연히 장자로 호칭하며, 만약 그가 죽었을 경우에는 자연히 삼년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도와 세철 등이 그 주·소(註疏)의 지의(旨義)를 엄폐한 채 인용하여 오늘날에다 비의(比擬)하였으니, 어찌 엉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장차 전중(傳重)하게 될 것인지 이미 전중한 상황인지를 나누어 말한 부분에 있어서는, 유난히도 크게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대체로 예경(禮經)에 ‘장차 전중하게 될 것이다.’ 하고 ‘이미 전중한 상태’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아비가 아들의 복을 입은 것이 모두 장차 전중하게 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고 ‘장차 전중하게 될 자’라는 것은 아비의 입장에서 한 말이며, 어미가 아들의 복을 입는 것은 이미 전중한 상태일 때 적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미 전중한 상태’라는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어미가 아들을 위해 복을 입을 때는 지아비의 생사 여부를 따지지 않고 지아비가 아들을 위해 입는 복과 똑같게 입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세철 등의 설과 같이 한다면, 제왕(帝王)은 태자(太子)의 죽음에 대해 삼년복을 입어서는 부당하며 반드시 태상황(太上皇)이 사군(嗣君)의 상(喪)을 당한 상황이 벌어져야만 바야흐로 삼년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가례(家禮)》 대소종도(大小宗圖) 주자(朱子)의 설에 이르기를 ‘종자(宗子)만 적통(嫡統)으로 세워질 수 있고 비록 서자(庶子)가 맏이라고 하더라도 세울 수 없다. 만약 적자(嫡子)가 없을 경우에는 또한 서자(庶子)를 세우는 것이니, 이른바 세자(世子)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세자가 적통이 되고 만약 세자가 죽게 되면 세자의 친제(親弟)를 책립하는데 이 또한 차적(次嫡)이다.’라고 하였는데, 주부자(朱夫子)께서 이미 ‘서자(庶子)’라고 말하고 또 ‘차적(次嫡)’이라고 말한 이상, 차장(次長) 역시 ‘서자(庶子)’라고 호칭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지는데도, 세철 등은 상문(上文)을 잘라 빼버리고 단지 친제(親弟)·차적(次嫡)에 관한 얘기만 취하였으니, 그가 억지로 해석을 한 간사한 정상이 여기에서 더욱 드러나는 것입니다. 소설(疏說)의 이른바 ‘서자(庶子)와 똑같이 호칭한 것은 장자(長子)와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첩자(妾子)와 더불어 똑같게 호칭한다.’는 것은, 세철 등도 또한 똑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아우로 해석했고 보면, 여기서의 서자는 중자(衆子)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그들도 이미 말한 것인데 유독 ‘삼년복이 되지 못한다.’는 조항 아래 ‘서자(庶子)’라고 한 데서의 ‘서(庶)’ 자(字)에 대해서만 천첩(賤妾)의 아들이라고 단정하면서 ‘가씨(賈氏)의 소설에 이미 말했다.’라고 하고, 또 ‘그 증거로서 예경(禮經)에 보이는 것도 모두 그렇다.’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허목(許穆)도 감히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의 ‘서’ 자(字)인데도 시열은 중자(衆子)라는 의미의 ‘서(庶)’라고 하였고, 허목은 천칭(賤稱)의 ‘서’라고 하였으며, 세철 등에 이르러서는 감히 천첩(賤妾)의 소생인 ‘서’라고 하면서 경소(經疏)를 엉뚱하게 인증(引證)하여 대뜸 선왕(先王)에게 해당시켰고 보면, 그 경의(經義)와 배치되고 사리에 어긋난 죄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입니까.
예(禮)의 이른바 ‘천자와 제후의 상(喪)은 모두 참최복(斬衰服)이고 기복(期服)은 없다.’는 것은, 곧 신하로서 임금을 위해 입는 복(服)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철 등은 ‘자식은 어미를 신하로 여기지 아니한다048) .’는 의리를 모르고 경훈(經訓)을 억지로 해석하여 간사한 말을 꾸몄으니 아, 또한 심합니다.
그리고 면재(勉齋)가 상례(喪禮)를 속성(續成)한 때는 주자(朱子)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그가 스승에게 강론(講論)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삼가 스승의 설을 살펴보건대’라는 말을 썼으니, 그 밖에 유별(類別)로 편입(編入)한 주소(註疏)는 미처 일일이 감파(勘破)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세철 등은 도리어 ‘시열은 가리는 바가 너무 중해서 올바른 데로 돌아오기가 어렵자, 주자가 이미 정해 놓은 의론을 팽개쳤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른바 주자가 이미 정해 놓은 의론이 어느 책에 쓰여 있기에 이처럼 줄곧 건방지게 제멋대로 교무(矯誣)한단 말입니까.
아, 인조 대왕과 대왕 대비께서도 기년복(朞年服)만 입었으니, 이는 모두 국전(國典)대로만 따른 것이었습니다. 설령 전후의 복제(服制)에 경중(輕重)의 차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애당초 전통(傳統)의 의리에는 해로울 게 없습니다. 더구나 전후의 복(服)이 모두 기년(期年)의 복제를 썼고,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말에도 ‘제후는 비록 형제에 대해서는 기년복을 입지 않으나 만약 중자(衆子)가 계통(繼統)한 경우이면 반드시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적손(適孫)·적증손(適曾孫)·현손(玄孫)에 대해 기년복을 입는 점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전례(典禮)의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또 ‘임금으로 성립이 되고 임금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문제’라고 말한 부분에 있어서는, 이것이 어떤 말인데 잔인하게도 남에게 한단 말입니까. 사람이 차마 못하는 일은 남들도 타인에게 차마 못하는 법입니다. 세철 등도 사람인데 어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참혹한 일입니다. 당초에 송시열이 인용한 단궁(檀弓)과 자유(子遊)의 일은 단지 장자가 장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었는데도 지금 세철 등이 선도의 흉악한 말을 본받아 기어이 해치려는 꾀를 부리고자 하였으니, 이는 선도의 여모(餘謀)로서 그중 유난히 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송시열은 선왕(先王)에 대해 계합(契合) 소융(昭融)한 것이 천고(千古)에 드물만큼 대단하였는데, 그의 평생 심사(心事)는 성명께서도 환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가 수의(收議)하던 날에 고충(孤忠)을 자신(自信)하고 우리 임금을 믿었기 때문에 진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감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어서, 두루 주소(註疏)를 인용하면서 숨김없이 죄다 말하였던 것인데, 어찌 남을 해치려는 못된 무리가 몰래 틈을 노려 음해(陰害)할 꾀를 부릴 줄 알았겠습니까.
이번 세철 등의 소사(疏辭)는 그 뜻이 예를 논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충현(忠賢)을 무함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천칭(賤稱)의 서(庶)를 선왕에게 귀결시키고 하정(下正)의 서(庶)를 성명에게 귀결시키려고 하면서 복제(服制)의 경중(輕重)으로써 통서(統緖)의 단속(斷續)을 삼기까지 하는 등, 흉언(凶言)·패어(悖語)를 이를데 없이 하였습니다. 때문에 시열 등의 죄를 따지며 형용하는 대목마다 종묘(宗廟)의 소중함을 핑계댔던 것인데, 그들이 이른바 ‘윤기(倫紀)가 도치(倒置)되었다.’, ‘강상(綱常)에 관계된 일이다.’, ‘군신·부자 사이가 그 차서를 잃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 ‘종묘에 고해야 유명(幽明) 간에 여한이 없을 것이다.’는 등의 말은 어찌 신자(臣子)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며 차마 입에 올릴 수 있는 것이겠으며, 그 속셈과 꿍꿍이 또한 어찌 잠깐 동안에 만들어진 꾀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위에 성명이 계시어 도깨비 같은 무리들의 정상(情狀)을 환히 알고 계시므로, 신들은 진실로 수많은 이런 무리들이 아무리 무함을 해보았자 상의 총명함을 의혹시켜 흔들리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으나, 세철 등은 그 화심(禍心)을 드러내 사류(士類)를 무함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부도(不道)한 말을 조금도 꺼려하고 피함이 없었으니, 어찌 분명하게 통척(痛斥)을 보여서 참소하여 해치는 입을 막음으로써 패란(悖亂)한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서 총명을 회복하시어 결단을 시원스럽게 내리시고, 음사(陰邪)한 기운이 더 이상 태양(太陽)을 간범(干犯)하지 못하고 흉험(兇險)한 설(說)이 더 이상 성세(聖世)에 오가지 못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사림(士林)을 부지(扶持)하여 국맥(國脈)을 연장(延長)하면 더없이 다행스럽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음사(陰邪)한 짓은 마치 폐간(肺肝)을 보듯 뻔한데, 어찌 너희들의 소(疏)를 읽고 나서야 깨달았겠는가. 조정의 처치는 나름대로 도리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들의 상소 가운데 인용한 이황의 말에 ‘제후는 비록 형제에게 기년복을 입어주지 않지만 형제가 대통을 계승하였을 경우에는 반드시 기년복을 입어준다.’라고 하였는데, 그 가운데 형제시(兄弟是) 세 글자를 중자(衆子)로 잘못 썼었다. 홍득우 등이 또 상소하여 자신들이 혼미하여 잘못 쓴 죄를 밝히기를,
"신들이 상소의 초고를 쓸 때에는 ‘제후가 비록 형제에게 기년복을 입어주지 않지만 형제가 대통을 계승하였을 경우에는 반드시 기년복을 입어준다.’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그 밑에다 또 신의 의견을 곁들여 ‘제후는 비록 중자에게 기년복을 입어주지 않지만 중자가 대통을 계승하였을 경우에는 또한 기년복을 입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라고 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본으로 베껴 쓸 때에 세 글자를 잘못 썼고 또 아래 문단을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위에 올릴 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데 이 지경으로 착오된 데다 또 본의도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두어 글자 잘못 쓴 것이야 대의에는 지장이 없겠습니다마는, 신들의 본의를 모르는 자들은, 무심코 한 일을 일부러 하였다고들 하고 착오된 것을 속이려 하였다고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들이 우연히 살피지 못한 실수가 도리어 불성실한 데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신들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더 커졌습니다."
하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송시열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서신(書信)은 다음과 같다.
"영소(嶺疏)를 처음에는 필시 색다른 견해가 있으리라고 여겼으나, 얼핏 보니 한 차례 웃을 거리도 못 되고, 그저 홍(弘)·휴(鑴)049) 의 여론(餘論)을 주워 모아 놓은 것이었소. 맨 먼저 백읍고(伯邑考)와 무왕(武王)의 일을 증거로 제시했는데, 대체로 백읍고가 죽었을 때 문왕(文王)은 필시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지 아니하고 끊었을 것이니, 대체로 세자(世子)가 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소현(昭顯)에 대해 참최복을 입어야 되는 의리가 있는데 단지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복을 낮추어 입었던 것이니, 이는 백읍고의 일과는 조금도 관련성이 없는 것이오. 옛사람이 무왕(武王)을 ‘성서탈종(聖庶奪宗)한 임금’이라고 하는데, 어째서 ‘성(聖)’이라고 하느냐 하면 무왕은 성덕(聖德)을 지녔기 때문이요, 어째서 ‘서(庶)’라고 하느냐 하면 비록 문모(文母) 소생이더라도 오히려 차적(次嫡)이기 때문이요, 어째서 ‘탈(奪)’이라고 하느냐 하면 본래의 분의(分義)로는 응당 임금 자리에 설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어째서 ‘종(宗)’이라고 하느냐 하면 문왕(文王)의 종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이오. 여기에서 저들을 공박하는 말을 대략 들었는데, 또한 이것으로 저들을 공박하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잠자코 듣노라니 또한 가소롭기 짝이 없오. 기해년 5월 6일에 영상이 궐중(闕中)에서 나를 불러 《대명률》과 국제(國制)를 보여주고는 기년(期年)의 복제(服制)로 단정(斷定)하였던 것이니, 영소(嶺疏)의 이른바 ‘온 나라에 말썽이 그치지 않으니까 비로소 《대명률》을 끌어댔다.’는 것 역시 무함한 말이오."
청나라에서, 붙잡혀간 최순일(崔順一)과 여인 한 명에게 자문(咨問)을 주어 내보내고 원적(原籍) 고을에 돌려 보내도록 하였다.
3월 26일 병오
상이 대비를 모시고 온양 온천으로 거둥하였다. 도총관 낭선군(朗善君) 이우(俁), 완양군 이원로, 부총관 예조 참판 박세모, 봉산군 이형신, 시위 도총관 지사 김좌명, 별운검 회원군 이윤, 동평위 정재륜, 이조 판서 김수항, 병조 판서 홍중보, 판윤 오정일, 도승지 김수흥, 좌승지 김우석, 우부승지 김만기, 가주서 신정, 한림 윤경교, 교리 이단하, 수찬 박세당, 의관 윤후익 등은 어가의 뒤를 따르고, 약방 도제조 우상 허적, 시위 익평위 홍득기, 복창군 이정, 도총관 흥평위 원몽린, 우승지 민희, 주서 최상익, 한림 최후상, 참지 장선징, 의관 이동형 등은 자전의 수레를 따르고, 영상 정태화, 대사헌 조복양, 형조 참판 이은상, 대사간 정만화, 지평 어진익, 정언 이동직과 종반 낙선군 이숙 등 4인과 금창부위 박태정은 외반(外班)으로 따랐다. 호조 판서 정치화는 정리사로, 사옹 제조 복녕군 이유는 공상(供上)으로 먼저 떠났다. 어영 대장 유혁연은 보군 1천 3백 60명과 별마대 57명과 별초 무사 49명과 별파진 22명과 각 차비군 3백 31명을 거느리고, 훈련 천총 구문치는 연(輦)을 호위하는 포수 1천 명을 거느리고, 금군 별장 이동현은 금군 5백 50명을 거느리고 마대 별장 민승 등은 마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앞뒤로 호위하였다. 유도 대신 영중추 이경석, 좌상 홍명하는 비국에서 숙직하고, 훈련 대장 이완은 궁성을 호위하고, 수궁 대장 김우명은 종사관 이세장을 거느리고 빈청에서 숙직하면서 대궐 안을 호위하였다.
자전(慈殿)의 수레가 선소(船所)에 도착하니 상이 막차(幕次) 밖에서 맞이하였다.
총융사 구인기가 수원(水原) 군병(軍兵)을 거느리고 모래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상이 배에서 내려 진중(陣中)에 들어가서 군용(軍容)을 살핀 다음 후대(後隊)가 되라고 명하였다.
신시에 과천의 숙소에 어가가 머물렀다. 자전의 수레가 뒤따라 도착하자 상이 중문 밖에서 맞이하였다.
3월 27일 정미
묘시에 어가가 과천을 떠나 사시에 사근천(沙斤川) 주정소에 머물렀다. 내관으로 하여금 신전(信箭)을 가지고 가서 군인들이 백성의 전답을 밟거나 손상하지 않도록 하였다.
미시에 수원의 숙소에 머물렀는데 자전의 수레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군졸을 생각하여 빨리 달리지 말도록 하여 그들이 넘어져 다치는 우려가 없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가상히 받아들였다.
3월 28일 무신
진시에 어가가 수원을 떠나 청호(靑湖)의 앞 들에 도착하였는데 수원의 군대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상이 군중에 들어가 구인기에게 명하여 다시 방진(方陣)과 원진(圓陣)을 치게 한 다음, 상이 기치를 치우게 하고는 보면서 이르기를,
"이 군대의 진법은 그리 생소하지 않아 지난해보다 상당히 낫다."
하고, 구인기와 중군 이중신에게 사복의 말 한 필씩을 주라고 명하였다.
오시에 어가가 진위(振威)의 숙소에 머물렀는데, 자전의 수레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어가가 과천에 머물렀을 때 호위하는 군병 가운데 중도에서 죽은 자가 세 사람이나 되는데 모두가 굶주려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장수는 군졸이 굶주리고 있는지 배가 부른지 모르고 있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장수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번 아뢰자, 따랐다.
3월 29일 기유
묘시(卯時)에 상이 진위(振威)를 출발하여 사시에 소사(素沙)의 주정소에 머물렀다. 상이 막차에 나아가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를 불러 앞 들판이 넓으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이 들판은 비록 넓기는 하나 왼쪽과 오른쪽 모두가 민전(民田)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감(都監)050) 의 마병 및 금군(禁軍)의 위용을 보고 싶은데 여기서는 진을 칠 데가 없구나. 건너편 길 왼쪽은 모두 농사짓지 않는 농토이고 들판도 널찍하니 군사를 사열할 만하다."
하고는, 마병은 남아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군사들이 점심을 먹고 말에 여물을 먹인 다음에 저 곳에 가서 진을 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양사가 청대하니, 상이 막차(幕次)에서 인견하였다. 대사헌 조복양(趙復陽)과 대사간 정만화(鄭萬和)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자전을 모시고서 거둥을 하시니, 작년의 거둥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어제 청호(靑湖)의 노상에서 어가를 멈추고 군사를 사열하시는 바람에 자전의 수레가 길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으니 어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충청도 군병을 앞 들판에서 교체(交替)해야 되는데 혹시 어제 같은 일이 다시 있게 될까 염려되어 미리 말씀드립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복양 등이 또 아뢰기를,
"듣건대 액정(掖庭)의 하인이 관리한테 물품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구한 물품이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밝혀내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 김만기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병방이 이 일을 알고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병조 판서를 통해 들었는데, 어떤 별감이 관리에게 짚신을 요구하여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아뢰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이미 치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액정의 하인이 혹시라도 폐단을 저지르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보고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홍중보에게 이르기를,
"지금 어영군(御營軍)에 대해서도 한꺼번에 사열하고 싶으니, 와서 모이도록 명하라."
하니, 홍중보가 대답하기를,
"입으로 호령(號令)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신전(信箭)으로 대장(大將) 유혁연(柳赫然)을 불러 분부하도록 명하였다.
옥당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교리(校理) 이단하(李端夏) 등이 아뢰기를,
"오늘은 국기(國忌)를 앞두고 재계를 드리는 날인데 군사를 사열한다면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군사를 이동하고 있는 중이므로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듣지 않았다.
상이 소여(小輿)를 타고 길가의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니 승지(承旨)·사관(史官)·옥당(玉堂) 및 시위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걸어서 따라갔다. 상이 신전(信箭)으로써 금군 별장(禁軍別將) 정영(鄭韺)·이동현(李東顯), 마병 별장(馬兵別將) 민승(閔昇)을 불러 삼군으로 하여금 각자 진을 치고 있다가 포 쏘는 소리를 들은 다음 합하여 하나의 진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또 진을 해체하여 길에 죽 열지어 서 있도록 하였는데, 포를 쏘고 기를 세 번이나 내렸으나 빨리 진을 해체하지 못하자 상이 금고(金鼓)을 쳐서 지휘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북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자, 상이 이르기를,
"어가(御駕) 앞에서도 금고가 이렇게 형편없으니 군기시(軍器寺) 관원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추고하라 명하니, 승지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양사(兩司)가 피혐하고 와서 분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여서 입시한 한림(翰林)·주서(注書) 이외에는 추고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수레가 아직 출발하지 않은 상태이니, 저기에 있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나와 대령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신전으로 유혁연을 불러 육화진(六花陣)을 치게 한 다음 또 곡직원예(曲直圓銳)의 형세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만기가 아뢰기를,
"대간이 이미 계사를 전해 왔는데 미처 정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본으로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인가?"
하자, 만기가 계사를 읽었다. 그 계사에,
"신들이, 중도에서 군사를 사열하는 것은 미안하다는 뜻으로 말씀드렸는데도 곧바로 진을 치게 하고 보셨는데, 이러한 일은 아마도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시는 도리에 부족하다고 여겨집니다. 전하께서 비록 신들을 있으나마나 한 위인으로 친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대간을 설치한 사체는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이는 모두가 신들이 천박한 소치입니다. 신들을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유혁연이 진을 다 치고 나자, 상이 진을 해체하고 전진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총융사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뒤에 남아 있게 하고는 수원 산성에 머물렀다.
상이 막차(幕次)를 출발하니 경기 감사 이경억(李慶億)이 경계(境界)에서 배웅하였다. 상이 충청도(忠淸道) 군중(軍中)에 도착하여 병사(兵使) 민진익(閔震益)의 군중(軍中)에 들어가서 군병의 형세를 묻고 그 군대를 후대(後隊)가 되도록 명하였다.
충청 감사 임의백이 지경에서 맞이하였다.
미시에 어가가 직산의 숙소에 도착하였는데, 자전의 수레도 뒤따라 이르렀다. 승지 민희(閔熙)가 아뢰기를,
"내일이 국기(國忌)라서 상께서는 복색(服色)을 바꾸어야 하는 절차가 있으니 만큼,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작년에는 마침 행궁(行宮)에 머무를 때 국기(國忌)를 만났기 때문에 복색을 바꾸는 절차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가(大駕)가 사행(師行) 중에 있는 상황이니 바꾸는 일이 없어도 될 듯합니다. 상께서 바꾸지 않는 이상 수행한 신하들의 복색은 더욱이 논의할 것이 없습니다. 대신(大臣)의 생각도 이와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3월 30일 경술
상이 묘시에 직산을 출발하여 진시에 천안의 주정소에 머물렀다가 미시에 온양의 행궁(行宮)에 도착하였다. 자전의 수레가 뒤따라 이르자 상이 동문(東門) 안에서 맞이하였다.
호서의 병영 군사를 해산하여 되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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