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신해
상이 왕대비를 모시고 온천 행궁에 있었다.
상이 비로소 목욕하였다.
충청 병사 민진익에게 명하여 진(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과거를 보인 것은 오로지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금년에 또 자전을 모시고 왔으니, 어찌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일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지난해의 관례에 따라 과거를 보이도록 하라."
하고, 우상 허적 등에게 묻기를,
"관광하기 위해 온 사람이 90된 노모를 업고 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하니,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본도의 노인들에게 지난해의 예에 따라 음식물을 내리고 경기의 고을에도 똑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과 행 호군 송준길에게 사관을 보내 하유하여 행궁에 나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행 호군 이유태와 전 집의 윤선거에게도 모두 하유하였다.
4월 2일 임자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자전이 비로소 목욕하였다.
4월 3일 계축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4일 갑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헌부가, 유세철에게 죄를 주자고 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4월 5일 을묘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약방 제조 허적 등이 들어가 진찰하였는데, 영상 정태화도 입시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본도에 과거를 보일 때 수행 관원들도 과거를 보도록 허락할 것인지의 여부를 의논하여 정한 다음 분부해 놓아야만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본도의 수령들도 과거를 보게 할 것입니까?"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수령들의 노고는 수행 관원이나 차사원보다 덜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행 관원과 유대 차사원(留待差使員)은 과거를 보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4월 6일 병진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7일 정사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우찬성 송시열, 행 호군 송준길이, 영남 유생이 상소로 배척했다는 이유로 인책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자,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여 불렀다.
4월 8일 무오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송준길을 좌참찬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좌윤으로, 유명윤(兪命胤)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간원이, 유세철에게 죄주자는 계사를 중지하였다.
대사헌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안동 부사 이성징(李星徵)은 그 고을의 나쁜 무리들과 여러모로 모의하다가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본 고을의 유생들을 꾀어내 도내에 통문을 내게 함으로써 이처럼 물귀신 같은 짓을 하게 하였습니다. 수령으로서 사특한 의논을 선동하여 한 도를 그르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기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10일 경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우의정 허적, 대제학 김수항은 문과를 관장하고, 병조 판서 홍중보는 무과를 관장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비가 많이 내렸다. 우의정 허적이 승지 민희로 하여금 아뢰게 하기를,
"과거를 설치한 곳은 서울의 공청과는 달리 들 가운데다 과거장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비를 만나 유생 수천 명이 밖에 서서 비를 맞고는 과장을 나가 목숨을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일제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도의 변통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해 보라고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부터 과거장을 설치한 후에 비바람이 친다고 하여 과장을 파하고 뒤로 물려 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나가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해 주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제술하라고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나간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되어 거둔 시권이 겨우 56장 밖에 안되었다. 허적 등이 점수를 매긴 다음 석 장을 가져다 올리니, 상이 본군에서 합격한 자가 없다는 이유로 다시 탈락자의 시험지를 찾아 보라고 명하였다. 허적 등이 불가하다며 고집하니 상이 그만두었다. 권열(權說) 등 세 사람에게 급제를 주었다.
행 호군 이유태가 사양하는 소를 올리고 나오지 않자,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다시 불렀다.
4월 11일 신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상이, 각 진영의 군사에게 빈 섬을 주어 비에 젖는 우려가 없도록 하였다.
4월 12일 임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13일 계해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14일 갑자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15일 을축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상이, 산 노루를 날마다 봉진하면 민폐가 있다는 이유로 주원(廚院)에 분부하여 봉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4월 16일 병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김석주를 수찬으로 삼았다.
대사헌 조복양, 대사간 정만화가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이번 거둥은 비록 목욕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만 사실 지방을 순시하여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피는 의의도 있으니, 지난해의 관례에 따라 도신(道臣)과 머물러 대기하고 있는 수령들을 불러보고 백성들의 질고를 물어보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정만화가 아뢰기를,
"지난해에는 행궁 근처에 있는 백성들의 전답이 입은 피해의 다소를 헤아려 쌀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금년에는 궁장(宮墻) 밖에 각사가 지은 가건물의 땅이 모두 백성들의 전답입니다. 그런데 가건물을 지은 뒤에는 경작을 할 수 없으므로 실업을 면하지 못하니, 짓밟아 손상된 폐단의 정도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도신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게 한 다음 다른 전답으로 바꾸어 주거나 그 댓가를 헤아려 지급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본도에 물어서 처리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거둥할 때 효행이 뚜렷이 드러난 사람에게는 반드시 장려하고 불러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번에 도내에 효행이 뚜렷이 드러난 자에게 역시 노인을 대우하는 관례에 따라 음식물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신에게 물어서 거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인립(愼仁立)이란 자는 아산 사람인데 지극한 행실이 있습니다. 그의 동기가 독한 종기를 앓아 목숨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그가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결국 살아났다고 하며, 기타의 행실도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그 말을 듣고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윤삼(尹蔘)이란 자도 아산 사람인데 정축의 난에 형의 아들과 자기 아들이 모두 포로로 잡혀 갔는데, 속전을 주고 데려 오려고 하였으나 돈이 부족하자 형의 아들을 먼저 데려온 다음에 자기의 아들을 데려 왔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등백도(鄧伯道)051) 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일찍이 그에게 영릉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게 더욱 가상합니다. 그리고 천민 중에 역시 지극한 행실이 드러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아산의 관비인데 일찍이 지아비를 잃고 종신토록 수절하였으며, 아들도 어미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사람들이 ‘천민의 일가에서 열녀와 효자가 나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이 들은 바가 이와 같고 보면 이외에도 도내에 정문을 세워줄 만한 충효와 절의가 있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도는 비록 일시에 거행하지 못하더라도 본도만은 전후로 보고한 가운데 충효와 절의가 있는 사람을 먼저 과거에 합격시켜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우찬성 송시열 등이 두 번 소명이 있었는데도 모두 인책하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끝내 한번도 그들을 보지 않고 어가를 돌리신다면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곧 다시 부르겠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전 정랑 이상(李翔)은 학문과 덕행으로 시강관이 되어 서연을 출입하였습니다. 지금 머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 역시 불러 보시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참으로 보고 싶었다. 이 뜻으로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7일 정묘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전라 좌수사 이민발(李敏發)이 앞바다에서 수군을 조련하다 전선에 불이 나서 세 사람이 죽었는데, 이민발이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감사 민유중이 이 소식을 듣고 치계하여 그를 치죄할 것을 청하니, 상이, 죽은 자를 돌보아 주고 이민발을 잡아다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송시열, 송준길이 또 자신들의 허물을 들어 말하면서 나오지 않았다.
4월 18일 무진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부호군 이유태가 부름을 받고 나오니, 상이 불러 보았다. 이유태가 아뢰기를,
"신의 분수로 보아 마땅히 중도에 나가 어가를 맞이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송시열 등이 영남 유생이 올린 소로 인해 모두 대죄하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지만 당초 예를 논할 때 신도 같이 참여하였는데 시열 등이 만약 이 일로 죄를 얻게 된다면 신만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엎드려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계속 부르셨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 학문 강론하는 직임을 사양하면서 또 어머니가 병들었다고 말하자, 상이 거듭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전 집의 윤선거가 정산(定山)에 이르러 상소하고 오지 않았는데, 상이 그에게도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승지 김우석을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보내 하유하였다.
4월 19일 기사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충청도 생원 윤택(尹擇)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예라는 것은 천리에서 나오고 인정에 바탕을 두었다고 봅니다. 성인이 이를 절차화하여 의칙을 나타내고 이로써 논리를 세워 후세에 가르침으로 남겼으니 이게 바로 경(經)입니다. 후세에 현인이 계속해서 나와 전(傳)을 만들고 또 주소를 만들어 놓아 마치 해와 별의 형상이 드러나고 산천이 자리를 잡은 것 같이 되었는데, 갖추어지지 않은 의의와 분변하기 어려운 이치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현의 마음은 광대하고 정미하여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확실히 보고 깊이 터득할 수 없습니다. 경전의 글은 간략하고 깊으며 주소의 글은 넓고 복잡하여 후학의 얕은 견해로는 사실 정하게 택하고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각자 의견이 다른 말을 하기 마련이어서 갑과 을의 쟁론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데, 이 때문에 고인이 예를 논하는 사람들을 송사하는 자들과 같다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대개 역대 이후로 예에 대해 논란이 생긴 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우리 인조 대왕 조정 때 추숭하는 전례의 의논에 이르러서는 서로 시비를 다투고 상하가 서로 버티어 온 지 거의 10년이 되어 갑니다. 그 당시 예를 논한 신하들의 상소들 가운데에는 이른바 종자·지자·적자·서자의 분변이 매우 많았고 피차가 대치하는 사이에 좋은 말과 나쁜 말들이 있었습니다마는, 그 사이에 넘어뜨리고 모함한 말은 한번도 생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괜히 일을 만들고 의심 안해도 될 것을 의심함으로써 뜻이 날로 더욱 깊어지고 말이 날로 더욱 험악해져 분위기가 매우 참담하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트집잡아 말한 것들이 대부분 인정과 이치에 근사하지도 않는 것이고 보면 이는 사실 시변 중의 큰 시변으로서 천재나 괴물의 이변보다 심한 것입니다. 이게 세도가 상실되어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인심이 순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정말 해괴하고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신들이 삼가 영남의 생원 유세철 등의 상소를 보니, 종횡으로 떠벌린 말이 수천 마디나 되었습니다마는 그 큰 요점을 간추려 보면 ‘강상을 죄다 폐지하고 임금의 지체를 낮추어 성군들이 전해온 대통이 모호해져서 분명하지 않다.’라는 몇 마디뿐입니다. 경전의 글에 있어서는 오로지 자신들의 뜻으로 현상화한 채 다시금 그 본말을 참고해 보지도 않고, 유신의 의논에 있어서는 더러 글 귀절을 날조하느라 그 말뜻이 어떤지 천천히 궁구해 볼 여가도 없이 빨리 견제하고 공격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그들의 속셈이 죄다 드러나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아, 저 천여 명이나 되는 선비들 가운데 부끄러워하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을 온전히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성상의 비답이 내려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시원스럽게 보았으니, 비록 참소하는 말이 백 대의 수레로 오더라도 어떻게 큰 태양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신들이 변론하기를 좋아하여 행조(行朝)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린 것도 군더더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해 보니, 이른바 상복 제도의 설이 제기된 지 지금 8년이 되었으므로 저들이 덫을 만들어 사람에게 화를 입혔던 예문은 이미 물고기나 토끼를 잡고 난 발과 그물처럼 쓸데가 없이 되었으니, 참으로 저들과 더불어 말할 것도 못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세속의 견해가 비록 피차에 대해 사심은 없을지라도, 전주(箋註)가 엄청나게 많아 두루 볼 수가 없고 상복 제도가 정미하여 궁구할 수가 없는 나머지 좌우 사람의 말에 의심을 갖고는 참소하는 적들의 말에 넘어가서 참으로 영남 사람이 말한 것처럼 강상이 죄다 폐지되고 임금의 지체가 낮아져서 종통과 적통이 모호하여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고 여긴다면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유신 한두 사람이 죄를 얻고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다시 경전 주소 중 삼 년 사종의 설에 삼년복이나 기년복을 입는 의의에 나아가 먼저 서로 다른 설을 논하고, 다음에는 속인들의 상정이 그릇된 것에 미혹된 견해를 논하고, 끝에 가서는 유세철의 상소를 가지고 그가 참소한 말과 모함한 자취를 밝히려 합니다만, 한번 성상께서 보시고 소연히 뭇 사람들의 의심을 깨뜨리도록 하기 위해서 자세히 분변하는 데 힘쓰느라 번거롭고 지리한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념하시어 살펴보소서.
경에 ‘장자에게 삼년복을 입어준다.’라고 하였는데, 주에 ‘적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위아래가 통용되기 때문이니, 또한 적통을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고, 소에 ‘적자의 호칭은 오직 사대부만 근거로 한 것이므로 천자나 제후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만약 태자라고 말하면 또한 위아래가 통용되지 못하므로 적처에게서 난 사람은 모두 적자라고 한다. 첫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둘째 아들을 세우는데 이 역시 장자로 부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왜 삼년복을 입어주는가? 윗사람과 정체이고 또 장차 전중할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에 ‘그 사람이 선조에게 정체가 되고 또 장차 자신을 대신해 종묘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에 ‘비록 전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어주지 못하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정체이기는 하나 전중을 하지 못한 것이니, 적자가 몹쓸병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둘째는 전중된 사람이 정체가 아닌 것이니, 서손이 뒤를 계승한 것을 말한 것이고, 세째는 정체가 아닌 것이니, 서자가 뒤를 계승한 것을 말한 것이고, 네째는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닌 것이니, 적손이 뒤를 계승한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또 ‘서자는 장자처럼 삼년복을 입어주지 못하니 할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에 ‘서자란 아버지의 뒤를 계승한 자의 아우이다. 서자라고 한 것은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에 ‘서자는 첩에게서 난 아들의 호칭이다.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은 중자인데 지금 서자로 같이 부른 것은 장자와 분명하게 구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경전 주소의 본론 전말을 여기에다 대략 기록해 보았는데 이 두어 줄의 글에서 사실 오늘날 말썽거리가 생긴 것입니다.
대체로 위의 소에는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도 장자로 부르며 삼년복을 입어준다.’라고 하여 놓고, 아래 소에는 또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은 서자라고 같이 부른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또 ‘서자가 뒤를 계승하면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의 위아래 두 마디 말이 사실 모순되기 때문에 의논하는 자들은 아래 소에서 말한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닌 서자를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 하고, 유신들은 아래 소에서 말한 서자는 앞뒤 글뜻이 일관되어서 첩에게서 난 아들만 가리켜 말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위의 소에서 말한 첫째 아들이 죽었으면이라는 말을 일찍 죽은 자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위의 두 사람이 각각 근거에 따라 해설하고 있는데 이게 해결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대체로 의심스러운 의의를 결정하는 데는 의리와 문세(文勢)와 사증(事證) 세 가지뿐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증으로 말한다면 첩에게서 난 아들을 서자라고 일컬은 데에는 참으로 증거가 있고, 둘째 아들 이하는 서자라고 부른다는 것도 증거가 있으나, 첫째 아들이 일찍 죽었다는 것은 증거가 없고 네 가지 설 가운데 서자는 첩에게서 난 아들만 일컬은 것이다고 한 것도 증거가 없습니다. 문세로 말한다면 저들은 소에서 말한 위아래의 서자를 다르게 보면서 ‘하나는 둘째 아들 이하를 말한 것이고 하나는 첩에게서 난 아들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며, 이쪽에서는 소에서 말한 위아래의 서자를 똑같이 보면서 ‘모두 둘째 아들 이하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견해가 이미 다르므로 억지로 몰아 한 군데로 집약시킬 수 없습니다. 의리에 있어서는 신들의 어두운 학문으로 어떻게 감히 쉽사리 입을 열어 방자하다는 비방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경전을 상고해 보고 사세로 참작해 볼 때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마는 감히 스스로 옳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의리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 시험삼아 변론해 보겠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즉위하여 종묘를 계승하였으니 마땅히 삼 년의 제도를 사용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번에 논할 것은 마땅히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어떤 복을 입어야 하는가만 논해야 하니, 이미 아버지의 복이 정해지고 나면 어머니는 어떤 복을 입어야 할지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는 장자는 즉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죽은 자를 말한 것입니다. 어찌 즉위하여 종묘를 계승한 자에게 입어주는 것이겠습니까. 아버지가 삼 년을 입어주면 어머니도 삼 년을 입어주는 것이고 아버지가 기년복을 입어주면 어머니도 기년복을 입어주는 것입니다. 어찌 아버지가 죽은 뒤에 이미 전중하였다고 하여 어머니가 복을 더 입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대부의 적자는 대부의 복을 입지만 대부의 서자가 대부가 되었을 경우에는 그의 부모를 위해 대부의 복으로 입어주는 것이니, 적자와 서자의 한계가 이처럼 문란하지 않다.’라고 하는데 이 역시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예에는 장자에게는 삼년복을 입어주고, 중자는 적처나 첩에게서 난 아들을 막론하고 모두 기년복을 입어주며, 적손은 기년복을 입어주고 서손은 적처나 첩에게서 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대공복을 입어줍니다. 적장자는 중자나 서자와는 구분이 있지만 적처나 첩에게서 난 것은 차이가 없으니, 그 한계의 문란하지 않음이 적처나 첩에게서 난 자식의 사이에만 그러하겠습니까. 만약 적처에게서 난 사람과 첩에게서 난 사람이 귀천이 다르고 전중할 사람과 이미 전중한 사람은 경중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왜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적손이 뒤를 계승하였거나 서손이 뒤를 계승하였거나 간에 똑같이 기년복으로 단정하며, 왜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전중할 장자에게는 아버지가 삼 년을 입어주고 이미 전중한 서자에게는 어머니가 기년복을 입어준단 말입니까. 이를 가지고 본다면 의논하는 자들의 두 가지 설들이 모두 통하지 않습니다.
유신들의 의논에 이른바 ‘적통이 지극히 엄하므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두 번 참최복을 입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심지어 세종 대왕의 8대군의 일을 인용하여 밝힌 것은 사세상 더러 있을 수 있는 일을 말하여 사리가 필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대체로 참최복은 최고의 복입니다. 전중된 자가 적손이나 서손일 경우에는 대공복에서 기년복으로 올리고 서자일 경우에는 기년복대로만 입어주고, 다른 사람의 아들을 들여 후사를 삼았을 경우에도 같은데 서자는 귀천과 원근을 따지지 않고 모두 기년복만 입어주지만 장자에게만 최고의 복인 삼 년을 입어줍니다. 대체로 부자가 정통으로 서로 전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고, 형이 죽어 아우가 대신 계승하는 것이나 손자가 전중된 것이나 다른 사람의 아들을 후사로 들인 것은 모두 변칙적인 것입니다. 정상적인 후계자에게는 높여 최고의 복을 입어주고, 변칙적인 후계자에게는 변칙적인 법을 보여 그 복들이 모두 기년복에서 그치고 마는데, 그 뜻은 오로지 전중한 것에만 있지 않은 듯하며 최고의 복을 두서너 가지나 둘 수 없어서라는 것을 대략 상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장성하지 않고 일찍 죽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고 뒤에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는 장자라고 하며 삼년복을 입어주지만, 첫째 아들이 장성하여 죽어서 삼년복을 입어준 뒤에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는 서자가 후사가 되었다고 하며 기년복만 입어주는 것이니, 장자와 차자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비록 첫째 아들이 일찍 죽어서 둘째 아들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장자로 부르고 삼년복을 입어주지만 첩에게서 난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는 그대로 서자로 부르고 기년복만 입어주는 것이니, 적처에게서나 첩에게서 난 아들의 한계가 또한 분명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고인의 뜻을 감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도 이 설이 가장 의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유신들이 이른바 ‘일시의 의견으로 여러 예설가들이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의문점들을 단정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의심나는 것은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의리로 처리해야 한다.’라고 한 말은 사실 충후하고 자상한 뜻으로써 의문점을 잘 결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확실히 소의 뜻이 어떠한지 모른다고는 하나 적어도 주(周)나라를 따르겠다는 의리를 잃지 않아 그리 터무니없는 데 이르지 않았고 보면 아마도 이 의리에 처하는 데 있어서 이것을 변경할 수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대체로 상복을 제정한 의리로 말할 때 저와 같고 또 여기에 처하는 도리로 말할 때에는 또 이와 같으니,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본다면 유신들이 의논한 것이 거의 큰 허물은 없을 것입니다. 당초에 이 일을 놓고 다투게 된 것은 다만 이 점에 있었고 시비와 잘잘못은 이러한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명께서 이미 이에 대해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신들이 어찌 감히 파당의 사심을 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기 위해 임금을 속이는 죄에 스스로 빠지겠습니까. 이른바 경전 주소의 서로 다른 설들은 신들이 이미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을 속인들의 상정이 그릇된 것에 미혹된 견해를 가졌다고 하는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사대부들 집에서 혹 첫째 아들이 죽어 삼년복을 입어주고 또 둘째 아들을 세웠다가 죽어서 기년복을 입어주었을 경우에는 사람들이 필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의 명분과 위치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왕가에서 혹 세자가 죽어서 삼년복을 입어주고 또 둘째 아들을 세자로 세웠다가 죽어서 기년복을 입어줄 경우에는 사람들이 역시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앞의 세자나 뒤의 세자의 명분과 위치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소현이 세자로 있다가 죽고 선왕께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망극한 백성들의 마음에 ‘우리 선왕의 상은 소현의 상과 전혀 같지 않은데 어떻게 이미 전중받은 우리 선왕의 복이 도리어 전중을 받지 않은 소현보다 낮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면서 말하기를 ‘아버지가 삼년복을 입어주는 것은 장차 전중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장차 전중하려는 자에게도 삼년복을 입어주는데 더구나 이미 전중한 자인데 말할 게 있겠는가.’라고 한 것입니다. 또 적통을 귀중히 여기고 서자를 천시하는 것은 우리 나라 풍속이 특히 심하기 때문에 갑자기 높은 지체에다 빗대면 예절의 뜻이 어떠한지는 모르고 서(庶) 자만 가지고 놀라고 있는데, 오직 이 두 가지 관습이 세속 사람들의 큰 공통점입니다. 이러한 것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세속 사람들의 상정은, 정은 무한하고 예는 절제가 있어서 예의 제정에 따라 때로는 정을 펴지 못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글자는 똑같지만 뜻은 다른 법이므로 뜻이 다르다고 해서 글자가 같은 것이 지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신들이 이른바 속인들이 그릇된 견해에 미혹되어 참소하고 모함한 설들을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들이 다시 유세철 등이 올린 소를 가지고 조목마다 분변하여 깨뜨려서 참소하고 모함한 그들의 자취를 밝히고자 합니다. 대체로 윤선도 이하 참소하고 모함한 설들이 죄다 이 상소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 상소가 깨뜨려지면 나머지는 분변할 것조차 없습니다. 영남 유생이 올린 소에 맨 먼저 문왕과 무왕과의 종통과 적통의 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초 옥당의 차자에 ‘설사 소(疏)를 낸 사람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하였더라도 그 대통은 끊어진 것이라고 한 그들의 말은 정말 옳습니다. 그러나 소를 낸 사람이 참최를 입지 않는 네 가지 설들을 죽 나열함으로써 제사를 주관하고 전중하는 의의가 사실 그 사이에 들어 있는데 어찌 복이 높거나 낮다고 하여 종통이 두 개가 되어서 대통이 끊어지는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한 대목이 이 설을 가장 분명하게 깨뜨린 것이므로 지금 신들이 다시금 논할 필요가 없고, 다만 그들이 인용한 문왕의 일만 인용하여 명확히 분변하겠습니다. 대체로 문왕이 백읍고를 버리고 무왕을 세웠고 보면 백읍고가 살았을 때 세자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서, 죄나 병이 있고 자식이 없는 자와 똑같은 것이며 무왕이 백읍고가 살아 있을 때 대신 장자 노릇을 한 것이니, 이게 정말 이른바 둘째 아들로서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할 자입니다. 설사 문왕이 애초부터 무왕을 세울 뜻이 없어 백읍고를 세자로 세웠다 하더라도 백읍고가 이미 세자가 되어 죽었을 경우 어떻게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 입어주는 복을 입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미 백읍고를 위해 삼년복을 입어준 뒤에 무왕을 세웠다면 또 어떻게 무왕을 위해 삼년복을 입어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무왕을 위해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엇이 대통을 전하고 나라를 전수받는 데 지장이 있겠습니까. 성서(聖庶)가 적통을 빼앗았다고 한다면 비록 적통을 옮겼다 하더라도 그 근본은 서입니다. 이를 나무에다 비유하건대 곁가지가 줄기에 연해 있다고 한다면 줄기인 셈이지마는 그 근본은 곁가지인 것입니다. 이미 적통을 옮겼으면 다시 적자를 서자로 부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이미 끊어진 옛날의 적통에다 적을 돌리기 마련인데 다만 본디의 적통이 아니기 때문에 서가 적이 되었다고 한 것이며, 이미 줄기에 닿았으면 다시 줄기를 곁가지로 부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이미 끊어진 옛 줄기에다 줄기를 돌리기 마련인데 다만 본 줄기가 아니기 때문에 곁가지가 줄기가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이미 평상적인 것이 변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예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다고 하여 반드시 무왕에게 종통과 적통을 허여하지 않고 도리어 백읍고에게 돌리려 한다 하니 또한 무함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 한 건은 이른바 예를 논한다는 것인데 예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동쪽을 말하고 있으나 그 뜻은 서쪽에 있다.’라고 분부하신 말씀이 이 무리들의 정상을 이미 간파하신 것입니다. 영남 유생의 소에 또 유신이 말한 단궁(檀弓)문(免)과 자유(子游)최(衰)와 하정서(下正庶) 세 구절을 인용한 다음 예적과 하정 등의 말은 전하께 비유한 것이고 단궁문과 자유최의 말은 인조 대왕께서 선왕을 책립한 일에다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아, 사람의 말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대체로 하정의 말을 인용한 것은 예적(禰嫡)이 할아버지의 서손이 된다는 것으로, 둘째 적자는 서라고 칭해도 지장이 없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뿐이고, 단궁문과 자유최를 인용한 것은 성인이 예를 제정하고 법을 세운 의의로, 윤리의 차서와 장자와 서자의 구분을 밝히고자 한 것뿐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논하는 자들이 말한 것과 같은 의도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인조 대왕께서 선왕이 성대한 덕이 있는 줄을 알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셔서 왕위를 물려 주셨으니, 이게 바로 문왕이 무왕을 세운 일과 전후 똑같은 법도입니다. 당시 조정 신하들 중에 큰 권도를 몰라 감히 일반적인 법을 지켜야 한다는 설을 아뢴 사람이 있기는 있었습니다마는 오늘날에 이르러 소급해 비난하면서 반드시 선왕을 깎아내리려고 하니, 이게 어찌 신하의 마음에 차마 생각이나 해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의도한 바가 있어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역시 무함이 아니겠습니까. 아, 단궁문과 자유최의 설은 윤선도가 이미 말한 것이고 하정의 설은 윤선도가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을 모함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문자를 주워 모아 말거리를 만들어 불측한 곳으로 사람을 밀어넣기 위해 더욱 신기한 것을 찾느라 윤선도가 꺼내지 않았던 말을 애써 꺼냈으니, 아, 심하기도 합니다. 영남 유생의 소에 또 정체 두 글자를 인용하여 ‘정은 적처에게서 난 아들을 말한 것이고 부정은 첩에게서 난 아들을 말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첩이 천하다는 의의를 극구 말하면서 임금의 지체를 깎아내리고 선왕을 더럽히고 멸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정·부정의 설은 주소로 말하지 않았는데 저 무리들이 스스로 해석해 낸 말입니다. 정(正)의 뜻풀이가 주소에 나오지 않았고 보면 신들도 감히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복을 제정한 의의에 장자와 중자는 구분이 있으나 적처와 첩에게서 난 아들은 차이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정 자는 적장자를 가리킨 것 같고 부정 자는 중자와 서자를 가리킨 것 같습니다. 만약 적처와 첩에게서 난 것으로 정과 부정을 구분한다면 적손과 서손은 왜 정과 부정을 구분하지 않고 윗글에서 말한 것처럼 모두 기년복을 입어준단 말입니까. 더구나 예에 정통이란 조문이 있고 또 하정이라는 조문이 있고 보면 사실 아버지의 후사가 된 자를 정이라고 한 것이니, 장자·적자와 중자·서자로 정과 부정을 삼는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용한 주자가 운운한 말은 주자의 뜻이 과연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어류(語類)》 가운데 말한 것을 보니, 이와 같은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보면 이곳에 유독 은미한 뜻이 있다는 것은 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설사 그들이 말한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사사로이 기록한 글과 의문점을 분변해 결단을 내리는 글은 자세하고 소략한 것이 같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있으므로 지난번에 이른바 추숭의 전례를 논할 적에도 조서(祖庶)와 예서(禰庶) 등의 말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선왕의 지체를 깎아내리고 더럽히고 멸시했다고 한다면 역시 어긋난 말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반드시 부정이라는 천한 칭호를 선왕에게 뒤집어씌운다는 것으로 유신의 죄목을 삼고자 하기 때문에 이것을 특별히 끄집어내어 해석하고 되풀이해 말하여 전하를 감동시켜 노하시도록 만들려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순간에 스스로 사람을 의논한 법을 범하고 말았는데, 성상께서 이르신바 ‘도리어 주자의 설에 위배된다.’라고 한 말씀은 통쾌하다 하겠습니다. 영남 유생의 상소에 또 ‘이미 천자나 제후로 세워졌으면 비록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그를 정적으로 대우하여 삼년복을 입어주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예에 말한 천자나 제후의 상에 오속(五屬)의 친척이 모두 참최복을 입는다는 것을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습니다. 주에 ‘장자라고 한 것은 상하가 통용되기 때문이다.’ 하였고, 소에 ‘상하가 통용된다는 것은 천자·제후·대부·사에게 통용된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주소의 설이 이처럼 명백한데 어떻게 제왕가와 사대부가가 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우리 명종 대왕의 상에 인성 왕후께서 촌수로 따지면 형수와 아주버니의 사이였습니다. 선정신 이황이 처음에는 ‘마땅히 형수와 아주버니 간의 복으로 입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황의 문인인 기대승이 그 불가한 점을 반박하고 대통을 계승한 의의를 추출해내어 ‘마땅히 어머니가 장자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어야 하니 제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자, 이황이 깜짝 놀라 사과하고 앞서의 견해를 바꾸며 말하기를 ‘만약 기대승이 아니었더라면 천고의 죄인이 될 뻔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어찌 기년복에 그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대개 그가 이미 형수와 아주버니 간에 입는 복으로 입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또 제최 삼년복은 너무나 과하다고 여겨 네 가지 설에 있는 기년복으로 절충한 것입니다. 당시 이황은 일세의 유림 종장이었고 기대승과 선정신 이이 등이 모두 조정에 있었는데 드디어 기년의 제도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감히 주소의 본의를 버리고 선정들이 정한 의논을 팽개친 채 이렇게 근거없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인용한 천자와 제후의 상에 모두 참최복을 입는다고 한 말은 임금의 친속은 감히 친속이 입는 공복이나 시마복으로 임금의 복을 입지 못하고 모두 신하가 임금에게 입어주는 복인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지 어머니가 자식에게 입어주는 복을 입는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만, 이는 날조하여 맞춘 설이므로 많이 변론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영남 유생의 소에 이른바 고증 가운데 봉작령(封爵令)에 열거된 적자,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적자의 아우, 서자의 삼등 구별을 인용하여 그들의 설을 증거대었는데 이 삼등의 구별은 봉작령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경에 이른바 지자(支子)·서자와 내칙(內則)에 이른바 세자·적자·서자와 같은 것이니, 경전 가운데 이러한 설들이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대개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첫째 아들과 구별할 때에는 서자라 하고 첩에게서 난 아들과 구별할 때에는 적자라고 하는데,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적이나 서로 일컫더라도 일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가례(家禮)》의 대소종도(大小宗圖)에 주자가 말한 세자·차적·서자란 설이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일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네 글자로 유신을 책망하기를 ‘어찌 역시 장자라고 부른다는 조항을 사용하지 않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미 적장자가 된 뒤에 적장자로 치지 않았다면 그들의 말이 그래도 옳습니다만 지금 지자·서자를 적장자라고 하는데 어찌 적장자가 되는 데 지장이 있겠습니까. 그들의 고증에 또 임금으로 성립되었느냐 성립되지 않았느냐의 말을 인용하면서 ‘삼년복을 입었으면 임금으로 성립된 것이고 삼년복을 입지 않았으면 임금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경문에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서’라는 조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장자는 바로 세자를 가리킨 것이고 보면 어떻게 선군이 계실 때 죽었는데 승중을 못했다고 하여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삼년복을 입어주더라도 바로 아버지가 장자에게 입어주는 복입니다. 어찌 임금으로 성립되었다고 하여 입어준 것이겠습니까. 서자가 후사가 되었을 경우 아버지가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는데 비록 삼년복을 입어주지 않지만 바로 아버지가 승중한 서자의 복입니다. 어찌 임금으로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여 입어주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예를 들면 한 문제(漢文帝)는 한 고조(漢高祖)의 첩에게서 난 아들입니다. 가령 고조가 태상왕으로 있고 문제가 고조 생전에 죽었다고 할 경우 고조가 그를 서자라고 하여 기년복을 입어주었다면 이 역시 임금으로 성립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춘추》의 해가 넘고 해가 넘지 않은 것과 민공·희공의 위패 서열이 거꾸로 되었다는 의논이 이 일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억지로 인용하여 말한단 말입니까. 인성 대비의 상에 선조(宣祖)께서 입었던 복은 바로 손자나 증손자 이하가 승중하여 할머니의 복을 입어 준 것과 의리가 같은데, 어머니가 자식에게 복을 입어주는 의리와 또한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만고의 강상이 하루아침에 죄다 폐해졌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위협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고증에 또 주자가 해석한 군자(君子)에 대한 예를 인용하여 ‘경전에 일컬은 서자가 모두 첩에게서 난 아들이기 때문에 가씨(賈氏)가 다만 자하전(子夏傳)의 동떨어지게 구분하는 서자에만 해석하였다.’ 하고, 또 상복 시마장(喪服緦麻章)에 ‘아버지의 후사가 된 서자가 그 어머니를 위해서’라는 대목을 인용하여 증거를 댔습니다. 신들 역시 널리 다른 글을 인용할 틈이 없기 때문에 다만 상복편에 기록된 것으로 밝히고자 합니다. 상복 참최장에 ‘대부의 서자가 대부가 되면 그의 부모를 위해 대부복으로 입어준다. 남의 후사가 된 자는 지자라야 한다.’는 소에 서자를 말하지 않은 것은, 서자는 첩에게서 난 아들이기 때문에 서자를 지자로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부장기장(不杖朞章)에 ‘대부의 서자가 적처에게서 난 형제 간을 위하여’라고 하였고, 대공장(大功章)에 ‘공(公)의 서자 출신인 형제와 대부의 서자가 어머니나 처의 형제 간을 위하여’라고 하였고, 소공장(小功章)에 ‘후사가 된 차자가 그의 외조부모나 외숙에게는 복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다섯 조목이 모두 첩에게서 난 아들만 말하는데 그들이 인용한 시마장에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참최장(斬衰章)에 ‘대부는 서자에게 복을 낮추어 입는다.’라고 하였고, 공자가 말하기를 ‘종자가 어렸을 적에 죽었을 경우 서자가 후사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장기장(杖朞章)의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라는 소에 ‘임금의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 이하와 첩에게서 난 아들은 모두 서자라고 부른다.’라고 하였으며, 부장기장에는 ‘중자’라고 하였고, 대공장에는 ‘서손’, ‘대부의 첩이 임금의 서자를 위해서’라고 하였으며, 소공장에 ‘대부의 첩이 일찍 죽은 서자를 위해’, ‘서부’라고 하였고, 시마장에는 ‘서손의 지어미’라고 하였는데, 위의 아홉 조문이 모두 첩에게서 난 아들과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 이하를 겸하여 말하였으니, 자하전에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서자를 혹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고만 말하기도 하고 혹 적처에게서 난 둘째 아들 이하까지 겸하여 말하기도 한 것이 경전 주소에 이처럼 나타났는데, 어떻게 경전에 일컬은 서자는 모두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장기장에 ‘중자를 위해서는 적처에게서 난 아들이나 첩에게서 난 아들을 구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대공장에 ‘서손을 위해서는 적손과 첩손을 따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며, 시마장에는 ‘서손의 지어미를 위해서는 역시 적손부와 첩손부를 가리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네 종류의 설에 있는 서자를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고 하면서 시마장을 들어 증거를 대었는데 네 가지 설에 있는 서손만 대공장으로 증거를 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서손의 서 자는 이미 첩손만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서자의 서(庶) 자를 어떻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저 무리들이 이 책을 여러 해 동안 연구하여 책자까지 만들었고 보면 여러 조목들에 대해 미숙한 점이 없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겸하여 말한 쪽은 숨겨버리고 한 가지만 말한 것을 뽑아내어 ‘경전에 말한 서자는 모두 첩에게서 난 아들이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경전을 속이고 하늘을 속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고증에 또 당 무후(唐武后)가 어머니를 위해 참최복을 입은 설을 인용하여 명나라 제도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는데, 유신이 이른바 ‘잠시 명나라 제도를 따르자.’는 것은 위아래 소의 설이 이미 같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의심나는 것은 잠시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라 차라리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도리를 사용하자는 것이지 《의례》와 《가례》를 모두 버리고 순전히 명나라의 제도를 쓰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유신이 이른바 ‘대왕 대비께서는 신하가 임금에게 입어주는 복으로 대왕에게 입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은, 그들이 ‘임금의 상에 시마복을 입는 부녀자들도 반드시 참최복을 입는다.’고 말하기 때문에 ‘시마복을 입는 부녀자들이 참최복을 입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입어주는 복이다. 대왕 대비와 대왕의 사이는 모자 간이지 군신 간이 아니다.’라고 분변한 것이지 정말로 삼년복은 신하가 임금에게만 입어주는 복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말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도 이처럼 잘못 보고 있으니, 그들이 논한 바가 이처럼 매우 어긋난다는 것은 의아해 할 것도 없습니다. 신들이 이른바 참소하는 말과 어긋나게 무함한 자취에 대해 이미 죄다 열거하였습니다. 이밖에 잗단 곳은 세세히 그들과 변론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 이 설이 있은 이후로 피차 간에 서로 다른 의논과 전후로 기교를 부린 설들이 여기에서 이미 다하였습니다. 당초에 정한 것을 돌이켜 보건대 무슨 소요를 야기할 만한 것이 있기에 한없는 말을 창출해 내고 무한한 박자를 만들어내다가 심지어는 한 지방의 선비들을 동원하여 하나의 기만하는 문자를 만들어 버젓이 백주에 드러내 놓는단 말입니까. 이게 어찌 시운에 관계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또 마음에 느낀 바를 부득불 오늘날 아뢰어야 할 것이 있으니, 성명께서는 다시 살펴 주소서. 신들이 삼가 선대 조정에서의 군신 간의 만남을 보건대, 대체로 하상주(夏商周) 삼대 이후에 없었던 성대한 만남이었습니다. 유신의 학문 척도와 덕기의 대소는 늦게 태어난 어린 신들이 감히 헤아려 성명께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들이 몸소 사도(斯道)를 책임져서 영광스럽게 성상의 발탁을 입음으로써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아 우리 선왕의 말년 정사가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된 데에는 그들의 공을 정말 속일 수 없으며, 전하께서도 친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 당시 정사를 위임했던 관계는 물고기와 물의 사이와 같은 환호로서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의 사이였고 은정으로는 아비와 자식의 사이와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유신들이 선왕에게 입은 은혜를 전하께 갚고자 항상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할 곳을 얻지 못할까 염려하였고 보면 저들이 이른바 ‘선왕의 지체를 깎아내려 전하께 영향을 끼치려고 일부러 다른 곳으로 대통을 돌리려고 하였다.’라고 한 말은 비록 길러준 은혜만 아는 보통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실 인정과 천리로 보아 절대로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인데 저들은 어떻게 차마 이러한 마음이 있을거라고 뒤집어 씌운단 말입니까. 다만 그의 마음에만 그러할 뿐만 아니라 감히 글에다 썼고 다만 사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감히 떼로 일어나 윽박지르고 있는데, 만일 하늘에 태양 같은 성상께서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늠연히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들이라고 해서 어찌 성상의 앞에서 그들의 속셈을 펼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들이 이러한 짓을 한 이유는 연유가 있습니다. 대체로 조정의 의논에 시비가 있으면 두둔과 배제가 없을 수 없고 두둔과 배제가 있게 되면 트이거나 막힘이 없을 수 없는 법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논의가 이미 엇갈려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으며 더군다나 저 윤선도가 나온 뒤에는 사림을 음해하고 모함하는 자취가 현저히 드러났기 때문에 시비를 가리는 것이 사와 정을 구별하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사람들이 일제히 분노하고 여론이 매우 격렬해졌는데, 격렬해지면 감정이 생기는 법이고 감정이 생겼는데도 참는 자는 드문 법입니다. 그리고 저 영남은 참으로 옛날 문헌의 지방이었는데 한번 정인홍(鄭仁弘)이 어긋난 짓을 한 뒤로 갑자기 시비를 일으키는 고을로 변하여 조정 관료들이 알력 다툼을 할 때나 선정신들을 헐뜯는 의논이 있을 적마다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먼저 일어났으니, 신축년에 이경호(李景虎)가 한 짓과 경인년에 유직(柳㮨)이 하였던 짓들이 동일한 맥락이었습니다. 유직의 상소 가운데 심지어 ‘유교에 죄를 얻었으니 왕법으로 보아 용납할 수 없다.’는 등의 흉칙하고 어긋난 말을 선유들에게 하였으니, 그들이 거리낌없이 방자하다는 것을 이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스스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할 줄 아는 양심에다 자물쇠를 채워 놓고, 그들이 사는 곳을 빙 둘러 올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별도의 구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공론에 용납을 받지 못하자 개과할 것은 생각지 않은 채 도리어 원망과 독기를 품어왔으니 그들이 틈을 타 공격하려는 마음을 쌓은 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소 마음속에 망설이고 있다가 마치 막혀 있던 물이 터지듯이 갑자기 틈을 타 일어나 국가의 안위도 염려하지 않고 후세의 시비도 돌아보지 않고 인간의 수치스러운 일인 줄도 모른 채 다만 극구 모함하고 헐뜯으며 혈전을 치뤄 승리를 취하려고만 꾀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지 몇 사람만 주장하였는데 소문의 기세에 밀려 스스로 헤어나지 못한 채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가 못할 짓이 없었으니 그 또한 가련한 것들로서 나무랄 것조차도 없습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학문에 깊이 깨달으시어 모든 정사를 한결같이 중화(中和)롭게 처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저 무리들이 한 짓이 실로 몹시 더럽고 해괴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노하시지 않고 가르치시어 마치 친절히 깨우쳐 주는 것처럼 하심으로써 하늘이 봄에는 만물을 탄생하고 가을에는 만물을 죽이듯이 인과 의를 둘 다 극진히 하셨으니, 저들도 타고난 이성이 있는데 또한 어찌 감격하고 회개하여 함께 대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또 원인의 근본을 막으라는 분부를 받아 성상의 염려하신 바가 여느 때보다 훨씬 깊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천하의 일이 어느 것이나 점점 쌓여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역(周易)》에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얼 때가 온다.’ 하였는데, 이번 풍색의 불길함은 서리를 밟은 것에다 비유할 바가 아닙니다. 시비가 뒤얽혀 사와 정이 서로 공격하며 물러섰다가는 다시 나와 그치지 않고 있으니, 사변이 무궁하여 항상 뜻밖에 일어나므로 하루아침에 화가 발생하면 임금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일찍 원인의 근본을 막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경우에는 후일의 걱정거리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이른바 원인의 근본을 막는 대책에 대하여 필시 전하께서 마음속에 묵묵히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마는 보잘것없는 어리석은 신들의 구구한 견해를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선정신 이이가 말하기를 ‘동서(東西) 두 글자는 결국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될 것이니, 반드시 이를 타파해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심하면서 힘을 다해 무마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뭇 소인배들의 무함과 멸시를 받아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계미년 이후로 당론이 드디어 이루어져 씨앗이 씨앗을 낳고 뿌리와 줄기가 깊고 단단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미 치료할 수 없는 고질이 되고 말았으니 장차 사람을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이게 우국 지사가 지붕을 쳐다보고 탄식하면서 어떻게 구해낼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 개로 쪼개져 마치 음양과 같기 때문에 기세를 타고 변괴를 부려 닿는 곳마다 괴이한 현상을 빚어내는데, 이번의 일은 대체로 한두 사람을 위해서 발발한 것이 아니고 영남인의 죄만도 아닙니다. 이게 사실 화의 근원인데 그 근원을 막는 방법은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전하의 일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정말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마음을 세우고 더욱 학문에 힘쓰시어 오직 선왕께서 뜻하고 계시던 일을 본받아 하시고 어진이를 존경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정성을 더욱 다하여 국가의 원기를 배양하소서. 그리고 이어서 선유들의 의논을 높이 드러내어 사림들의 추향을 바로잡아주시되, 상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조정에 미치게 하고 조정에서 시작하여 사방에까지 미치게 하시면 마치 근원이 맑아져 물줄기가 깨끗해지고 물체가 단정하면 그림자가 바르게 되는 것처럼 될 것이니, 당파를 제거하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뭐가 있겠으며 사특한 말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유세철 등과 따지고 싶지도 않고 전하께서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한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위로 국가를 위하여 사특한 의논이 세상을 미혹시키는 것을 깊이 우려하고 아래로 사문(斯文)을 위하여 사설이 성행할까 염려한 나머지 소원하고 미천한 신들의 분수를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감히 무분별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비로운 성상께서는 참람한 데 대한 꾸지람을 늦추시고 정성 어린 충성을 살펴 주소서. 그러면 사문의 다행이고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인심과 세도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말 매우 한심스럽다. 그대들의 상소 내용을 보니, 충성스러운 뜻을 볼 수 있었으므로 내 참으로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4월 20일 경오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정영(鄭韺)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4월 21일 신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22일 임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정원에 하교하여 이달 27일에 어가를 돌리게끔 정하라고 하였다.
대사헌 조복양 등이 아뢰기를,
"각읍이 빌려주었다가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은 해마다 모곡(毛穀)을 계산하지 말고 1년 치의 모곡만을 받도록 하고, 감영과 병영의 곡식도 그와 같이 시행하라는 뜻을 재가받아 공문을 보냈으며, 통영의 곡식도 5년을 기한으로 모곡의 수봉을 정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이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예전처럼 독촉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조정의 은덕이 쇠잔한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합니다. 그를 엄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3일 계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처음 거둥하실 때에 이미 온천신에게 제사를 올렸으니, 효험을 보고 어가를 돌릴 때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제사를 올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미비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양전(兩殿)께서 목욕하시자마자 효험을 크게 보셨으니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는 게 사리에 맞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정만화 등이 아뢰기를,
"울산 부사 남천택(南天澤)이 문종 대왕의 태봉(胎封)인 금화(禁火) 구역 내에다 장원을 설치하였으니 법을 무시하는 태도가 매우 놀랍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그리고 경상도 전후 감사들이 즉시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들 역시 덮어준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찬성 송시열이 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부름을 받고 나오니, 상이 행궁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여기에 왔을 때에는 경들과 모였었다. 우찬성은 중도에서 곧바로 돌아갔으나 경은 나와 함께 같이 갔으므로 마음에 매우 기쁘고 다행스러워 의지할 데가 있는 것 같았는데, 경이 또 바삐 강을 건너고 말았으므로 자나깨나 잊기 어려웠었다. 지금 또 이곳에 이르러 경과 즉시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불행하게도 사특한 말이 있어서 경이 더욱 더 인혐하게 되었으므로 내 세월이 훌쩍 지나가 결국 한번도 보지 못하고 돌아갈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승지를 보내 이러한 뜻으로 알리게 한 것이었다. 경이 연로한 사람으로 이렇게 불꽃같은 더위에 마음을 바꿔먹고 와서 보니, 그 기쁨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하직 인사도 드리지 않은 채 물러가고 말았으니 신의 죄가 컸었는데, 상께서 자전을 모시고 지금 또 오셨으니 신의 분수에 어찌 감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의 정세가 그지없이 딱하고 황송하여 처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벌을 내리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특별히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간곡하게 타일러 주시니 감격하고 황송하여 신의 사적인 사정만 돌아볼 틈이 없어서 병든 몸을 부축하고 오느라 이제야 비로소 왔으니, 거만하다는 꾸지람을 실로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즉시 와서 보지 못한 것이 어찌 경의 본심이겠는가. 내가 평소 경을 대할 때 성의가 얕아서 영남 유생 무리로 하여금 감히 사특한 말을 하게 하였으니, 사실 나에게 잘못이 있지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가에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의혹되지 않은 적이 드물었는데 지금 성상께서 이처럼 분부하시니 정말 옛날에 드물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신이 학식이 얕고 좁은 데다가 병마져 심하므로 보답할 날이 없을까 염려스러우니, 다만 죽어서 결초보은하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를 지도하는 책임을 경에게 전부 맡겼는데, 경이 이렇게 말을 하니 자못 기대하였던 뜻에 어긋난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 점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지금 신의 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만 더해질 뿐입니다. 삼가 여러 신하들에게 원자의 학업이 날로 점점 계속 진취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개인적인 기쁨을 어떻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 더욱이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안 되니, 더욱더 학문을 닦으시어 원자의 표상이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갔을 때에 우찬성이 와서 볼 뜻이 없었던가?"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송시열에게 누이가 있는데, 지금 나이 70세로 심하게 병을 앓고 있으므로 차마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조금 위험한 지경만 면한다면 어떻게 감히 소명에 응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여기에 왔으니, 나와 함께 같이 돌아가기를 바란다. 내가 경을 보고자 한 것이 어찌 일시 회포만 풀기 위해서였겠는가."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정세가 비록 그지없이 딱하고 황송하지마는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는데 어떻게 감히 오늘 말씀드리겠습니까. 뒤에 조용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관찰사에게 분부하여 좌참찬에게 양식과 찬을 보내게 하라."
하였다.
소를 올리기 위해 모였던 경상도 유생 신전(申塼)에게는 앞장서서 난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곤장 1백 대를 때려 도삼년(徒三年)의 형을 주고, 정문보(鄭文輔)에게는 곤장 80대를 때렸다.
4월 24일 갑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25일 을해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무겸선전관 남속(南涑)이 온양의 아전을 구타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간원이 그를 죄주자고 청하니, 상이 일렀다.
"금령을 세워놓은 뒤에 이처럼 범하였으니, 중하게 곤장의 벌을 주어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라."
온양 백성 중 훈국의 군사가 그의 아내를 겁탈하였다고 병조에 소송을 낸 자가 있었다. 상이 병조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게 하였으나,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 우상 허적, 호조 판서 정치화, 충청 감사 임의백을 인견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어가를 돌릴 날짜가 수일밖에 안 남았는데, 안질이 더욱 나아지는 효과가 있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당히 나았다마는 지난해처럼 통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자전께서는 목욕하시고 나서 뚜렷한 효험을 보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 앓아오던 습열의 증세는 쾌히 근치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보기에는 신기한 효험이 있는 것 같다."
하고, 태화 등에게 묻기를,
"본도의 요역을 견감해 주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의논해 정하였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특별히 견감해주라고 명하시어 은혜의 뜻을 보이셔야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견감해 준 것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온양은 전세를 완전히 감해 주었고 나머지는 두 말을 감해 주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역시 일체 지난해처럼 견감해 주되 경기도 똑같이 감해 주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가 입시하였으니, 말씀드릴 만한 백성의 폐막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임의백이, 수군의 신역이 너무나 무거워서 유지할 수 없는 폐단에 대해 말하고, 또 아뢰기를,
"엊그제 재이로 인하여 백성의 폐막에 대해 하문하시고 또 인재를 구하셨는데, 때마침 거둥하신 때를 당하여 미처 장계를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뒤에 조목조목 열거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해 본도의 노인에게 가자할 때에 80세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79세된 자들이 그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올해에 이르러 기대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뽑아 아뢰게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전 참판 신계영(辛啓榮)에게 가자를 하였으나, 올해에 90이 찼으니, 이 사람에게 별도로 은전을 베풀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어떤 관작인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지중추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종1품으로 올려 주라."
하였다.
상이 연양 부원군 이시백(李時白), 판중추 김집(金集)의 묘소에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이는 도승지 김수흥의 말을 따른 것이다.
4월 26일 병자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영상·우상·삼사와 좌참찬 송준길을 불러 본도의 죄수들을 소결하려고 하자, 대신이 모두 "문안이 엄청나게 많아 요양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니, 도성에 돌아간 뒤에 하자."라고 청하니, 따랐다. 상이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내가 꼭 경과 같이 돌아가고자 한 것은 들뜬 의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이다."
하니, 송준길이 또 질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이어 뒤에 남았다가 온천에 목욕하였으면 한다고 청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들뜬 의논을 진정시키고자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지당합니다. 지금 준길이 여기에 남아 가지 않는다면 필시 군신의 사이가 어느 정도인가 엿보는 자가 있을 것이니,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셨는데 준길이 비록 병이 있지마는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말이 옳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병이 있어 어가를 수행하지 못하지마는 목욕하고 난 뒤에는 어떻게 감히 뒤따라 올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약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조용히 있다가 올라오더라도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분수에 어찌 어가를 수행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신이 이처럼 쇠하고 병이 들었으니, 고인이 이른바 건을 쓰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입니다. 이왕 어가를 수행하지 못할 형편인데 구구한 소회나마 어찌 감히 오늘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범인들도 온천에 목욕한 뒤에는 요양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더구나 지존이겠습니까. 어가가 환궁한 뒤에 더욱 더 신중히 요양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이 들었는데 선왕께서 궁중에 계실 때에는 항상 별도로 소합(小閤)에서 거처하셨다 합니다. 지금 성상께서도 선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을 따라 소합에서 따로 거처하시면서 신료들을 자주 접하신다면 내시나 궁녀들과 있을 때와 비교해 볼 때 그 이해가 어떠하겠습니까. 고인이 이른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나 병을 다스리는 법이 똑같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요양하는 방법은 일을 폐지하는 데 있지 않으니, 무릇 시급한 공사는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상시에 예절에 구애받지 말고 유신들을 접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옛날의 사기를 읽게 하고 누워서 논란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간의 계사는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온 나라의 공론이기 때문에 대간이 비록 정지하고 싶더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과 궁가에게 절수(折受)하는 등등의 일은 사실 온 나라의 공론이었는데 위아래가 해가 넘도록 서로 버티고 있으니, 어찌 거북스럽지 않습니까. 근래에 궁가에게 절수하는 일은 실로 백성을 병들게 하는 고질의 폐단인데, 지금 어가가 여기에 거둥하시어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일이면 어느 것이나 거행하셨으니, 지금 만약 대간의 계사를 쾌히 따르신다면 원근의 민심이 너나없이 흡족해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선대 조정에서 절수한 것인데 이미 10년이 지난 뒤에 모두 혁파한다면 미안한 바가 있기 때문에 따르지 못한 것이다. 경이 이처럼 말하니, 경자년 이후로 절수한 것들은 대간의 계사에 따라 개간한 선후를 조사해 내어 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겠다."
하자, 조복양이 아뢰기를,
"신들이 성의가 얕아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었는데, 지금 유신이 말씀드린 것으로 인해 윤허를 받았으니 이는 정말 국가의 큰 다행입니다. 그러나 다만 경자년 전후로 한정을 지을 경우에는 경자년 이전에 생업을 잃은 백성들이 어찌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연한을 정하신 것은 어찌 선대 조정에 있었던 일을 변경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신 게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 성상의 뜻이 어디에 계신 줄을 몰랐었는데, 지금 대신이 한 말을 들어보니, 성상의 뜻이 선대 조정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어렵게 여기고 계십니다만 이 점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일찍이 선대 조정 말년에 이 폐단을 통찰하시고 여러 궁가에게 절수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미처 처리하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의 슬픔을 만나고 말았으니, 이는 바로 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이어 일을 하실 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된 수교(受敎)를 지금 와서 갑자기 고치기에는 마음에 매우 미안하였기 때문에 연한을 정하여 혁파하고자 한 것이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고 상신 조익(趙翼)에게 제사를 지내고 본군의 효자 강봉수(姜鳳壽)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줄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우찬성 송시열과 전 정랑 이상이 부름을 받고 나왔다.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여기에 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만나보지 못해 매우 섭섭하였는데, 경이 지금 와서 보니 나의 기쁨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죄를 지고 있는 사람인데, 성상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황공하고 감격하여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남 선비들이 소를 올린 일은 이미 좌참찬에게 말하였다. 내가 경을 성의가 없이 대하였기 때문에 저 무리로 하여금 잇따라 일어나 분란을 피우며 이처럼 거리낌없이 행동하게 하였으니 내 매우 부끄럽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애당초 예를 의논할 때에 신이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정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본디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영남 선비들이 거론하지 않았고, 신은 평생 언행이 사람들에게 신용을 받지 못한 데다가 일처리하는 것도 보잘것이 없어 죄가 더욱 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말한 것입니다. 스스로 반성하는 일 말고 다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국조 이래로 유생 천여 명이 연명하여 죄주자고 청한 일은 일찍이 없었고 조정에서 유생의 상소로 중외에 방을 붙여 보였다는 일도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이게 모두 신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선대 조정에서 가장 깊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원망을 더욱 많이 산 것이다. 어찌 이것으로 자책한단 말인가. 지난해에 여기에 와서 모였을 때에 같이 가려고 하였으나 경이 목욕하였으면 한다고 청하기에 부득불 애써 따라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욕한 뒤에 올 것으로 여겼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섭섭한 회포를 거의 스스로 달랠 수 없었다. 지금은 꼭 경과 함께 같이 가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자책한단 말인가."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명을 따르지 못했으니, 신의 죄가 정말 큽니다. 그때 목욕한 뒤에 옛날의 병이 더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뒤이어 들으니 유언비어가 망극하여 심지어 신하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습니다. 신이 이때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고 심장과 뼈가 모두 쑤시어 감히 대궐로 들어가지 못하고 소를 올려 고충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망극한 회포를 어떻게 글로서 다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고인이 불행하여 신의 오늘날과 같은 일을 만났을 경우에는 혹은 자결하여 스스로 결백함을 밝히기도 하였는데, 신의 하찮은 목숨이야 물론 아까울 것도 없습니다만 성명의 세상에 감히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었으므로 참고 지내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유언비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상소 내용에는 내막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사정을 오늘날 죄다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말씀드리겠습니까. 지난해 봄철에 일종의 악성적인 말이 있어 신이 원자에게 조금도 성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점점 확대되어 퍼지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변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일단의 인심이 있다면 어찌 이처럼 극도로 상리에 어긋난 짓을 하겠습니까. 선왕께서 승하하신 다음날 신이 대궐 안에 있었는데, 고 상신 심지원(沈之源)이 신을 불러 말하기를 ‘국가에 기쁜 일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까닭을 물으니, ‘빈궁께서 태기가 있어 원자를 보게 될 경사가 있게 되었다.’라고 하기에 신과 지원이 서로 축하하고, 조정의 반열에 나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뒤에 의관 양제신(梁濟臣)이 와서 ‘중전께서 공주를 낳으셨다.’라고 말하고, 또 ‘궁중에 늙은 내시 무리들이 모두 원자의 경사를 보기 원했다가 이제 공주가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너나없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라고 전하면서 제신도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는 참으로 인정의 똑같은 바인데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습니다마는 나라를 위하는 정성이 어찌 저 무리들보다 못하겠습니까.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로 신이 받은 비난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만, 지금에 이르러 다시 한층 더하고 있으니, 신이 어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다시금 인간 세상에 끼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께서 만약 불쌍히 여기신다면 선영의 무덤을 지키면서 남은 여생을 끝마치게 해 주소서. 이게 신의 큰 다행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약 조정에 있게 되면 그들이 불리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말을 선동하여 동요하려고 꾀한 것이지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경이 만약 같이 간다면 그들이 필시 움츠러들 것이고 쓸데없는 말도 진정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무근한 말이 진정될 날이 없을 것이니, 바로 그들의 꾀에 빠지는 것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간곡하게 하유하시니 깊이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저들을 너무나 심하게 배척하시므로 신의 마음이 갈수록 불안하여 더욱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뭇 의논은 모두 그들을 엄하게 죄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경은 필시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선정의 신하 이이가 박근원(朴謹元) 등에게 배척을 받았다가 조정에 돌아온 뒤에도 박근원 등이 여전히 귀양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인대했을 때에 너그럽게 용서해 주라고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물러나와 성혼에게 ‘일을 말하다가 죄를 입은 것은 성대한 세상의 일이 아니니 뒤를 계승할 분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그를 용서해 줄 것을 극력 청하려고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이이가 죽고 성혼도 물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난번에 윤선도가 귀양갔을 때 신만 배척한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말썽이 있었기 때문에 상께서 엄하게 죄를 주셨으나, 그도 일을 말하다가 죄를 입은 것입니다. 지금 그가 귀양간 지 오래된 데다 너무나 늙고 쇠하였으니, 참으로 관대한 용서의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영남 유생이 이것으로 죄를 받는다면 어찌 성대한 세상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신 역시 결국 감히 나올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을 말하다가 죄를 입었다고 한 말은 어찌 이런 무리들의 일을 두고 한 말이겠는가. 옛날 순임금이 사흉(四兇)052) 을 죄주었을 때 가령 사흉이 한 말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일을 말하다가 죄를 입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이상에게 이르기를,
"옛날 경연을 출입하던 일을 늘 생각하였는데, 이번에 서로 만나보니 참으로 기쁘고 위로된다. 지금 나하고 같이 돌아간다면 다행이겠다."
하니, 이상이 아뢰기를,
"신이 막 아비의 상을 마치고 초야에 병들어 누웠는데, 뜻밖에 은혜가 잘못 내리니 그지없이 황공합니다. 상께서 일시의 명망있는 인사를 모아 국사를 도모하시면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마는 신처럼 불초한 자가 특별한 은혜를 똑같이 입는다면 어찌 원근에서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또 송시열에게 이르기를,
"원자를 지도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경만 믿고 있으니, 이 지극한 뜻을 몸받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니, 송시열이 아뢰기를,
"신의 구구한 정성이나마 어찌 한번 나아가 원자를 뵙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이처럼 사람들의 말이 망극한 때에 어떻게 감히 보통 사람처럼 행동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일시의 덕망있는 인사를 뽑아 지도의 책임을 맡기신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사람 한 명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인데 신처럼 죄진 자취로 어찌 그 사이에 끼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생각건대, 사부를 택하여 강석을 여는 것은 공자가 이른바 말로 가르친다는 것이고, 상께서 몸소 실천하시어 마음에 터득한 바로 매사를 다 잘하셔서 원자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 한다면 이는 바로 공자가 이른바 몸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니, 어리석은 신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신이 사람을 통해 들었는데 전하께서 비록 경연을 오래 폐지하셨으나 사학(史學)에 매우 밝으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러하십니까? 사서(史書)는 비록 경서만 못하지만 계속 쉬지 않고 보아 역대의 치란(治亂)을 고찰한다면 학문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정사를 보시고 난 여가에 어떤 일에 유의하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질 이외에 또 다른 병이 많기 때문에 병 조리를 일삼느라 별로 유의하는 것이 없다."
하자, 송시열이 아뢰기를,
"마음은 움직이는 물건이기 때문에 만약 학문에다 유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잡된 일로 흘러 들어가고 맙니다. 성상께서 이제 병환이 나으셨으니, 어가를 돌리신 뒤에 자주 경연을 열어 유신을 접견하심으로써 마음이 다른 길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후로 하유한 말을 경은 자세히 생각하여 나로 하여금 실망하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이어 관찰사에게 명하여 음식물을 실어 보내게 하였다.
4월 27일 정축
송시열과 송준길이 모두 도중에서 전송하고 이어 물러가려고 하자, 옥당이 차자를 올려 그들에게 도타이 권유하여 뒷수레에다 태우고 갈 것을 청하고, 승지 김수흥도 대면을 청하여 말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같이 가자는 뜻으로 하유하니, 송시열은 어가를 따라가겠다고 대답하고 송준길은 목욕한 뒤에 올라가겠다고 대답하자, 상이 송시열에게 말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사시에 상이 자전을 모시고 출발하여, 낮에는 천안의 주정소에 머물고 저녁에는 직산에 머물렀다.
송준길은 천안에 이르러 뒤에 남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궁가에게 절수한 것은 개간의 전후를 따지지 말고 도로 주라고 한 어제 유신의 아룀으로 인하여 경자년 이후로 개간한 곳은 도로 주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마는 경자년 이전에 개간하여 빼앗긴 자들의 원망도 똑같습니다. 하나는 주고 하나는 빼앗는 등 서로 달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궁가에게 절수하기 전에 개간한 백성의 땅을 모두 되돌려주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관원을 보내어 온천에 제사를 지냈다.
4월 28일 무인
상이 직산을 떠나 저녁에 수원에서 머물렀다.
송시열이 성환(成歡)에 이르러 물러갔다. 사관을 보내어 올라오도록 하유하게 하였다.
4월 29일 기묘
상이 수원을 떠나 저녁에 과천에서 머물렀다.
4월 30일 경진
비가 왔다. 상이 비가 조금 개거든 어가를 출발하라고 명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모두 우비를 준비하라고 하였다.
신시에 상이 자전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대신을 보내어 도성으로 돌아왔다고 종묘에 고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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