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임신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추위가 이처럼 심한데 판의금부사가 오랫동안 출사하지 않아 적체된 죄수가 몹시 많습니다. 죄수를 신중히 심리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결같이 지연시키기만 할 수 없습니다. 판의금부사 이완(李浣)을 즉시 패초하여 숙배하게 한 다음, 그날로 소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지금부터는 삼사와 춘방(春坊) 관원 및 감찰로서 이미 서경을 거친 자는 다시 서경하지 않는 일을 정식으로 만들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정영(李正英)을 도승지로, 이준구(李俊耉)·정익(鄭榏)을 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공조 참판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동지성균관사로 삼았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상차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이 궁전을 짓는 역은 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신하로서 그 형세가 이와 같다는 것을 안다면 그 누가 감히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 일의 유사(有司)로부터 이 명을 받고는 모든 힘을 다해 공사를 하여 속히 건물을 완공시켜 위로 자전을 받들어서 성상의 뜻을 편안케 하려고 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가의 체모가 낮고 말세의 습속이 부박하여 중외에서 떠도는 말이 대부분 실상을 벗어난 것들이니, 세도와 인심이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세도와 인심을 바로잡는 책임은 오로지 임금 한 몸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궁중과 부중(府中)을 일체로 보아 매우 공정하게 하기를 송 태조(宋太祖)가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서 모든 사람에게 보게 한 것과 같이 한다면, 아무리 소원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조정에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군신간에 교제함에 있어서 뜻을 성실히 하고 빈틈없이 하여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바깥 사람들이 믿을 경우, 설령 거조에 조금 잘못이 있더라도 모두들 ‘우리 임금은 반드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여, 상하가 서로 믿어서 끝내 서로 조화되어 안정되는 아름다움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만둘 수 없는 이 일에 대해서 어찌 의심하고 저어하는 걱정이 있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책임이 군상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법도를 세워 교화를 펴는 근본에 대한 것이 어찌 전하께서 스스로 돌아볼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요즈음 춥고 더움이 마땅함을 잃고 음산한 안개로 낮에도 어두컴컴하여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걱정스런 상황이 눈앞에 가득합니다. 그러니 생각건대, 한밤중까지 부지런히 정사를 살피려는 생각을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게을리 하셨겠으며, 궁전을 짓는 일 또한 어찌 성상께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미덥지 못한 것을 가지고 개연해 하지 마시고 더욱더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잠시도 중단함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한 전각을 옮겨 짓는 일 역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힘쓰는 덕에 손상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경이 무슨 꺼림칙해 할 일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외간에서 모두, 전각(殿閣)의 제도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심지어는 당주(唐朱)로 기둥을 칠하였다고까지 하면서 허물을 담당 신하에게 돌렸으므로 김수흥이 이런 차자를 올린 것이다.
12월 3일 계유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장선징(張善瀓)을 병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을 형조 참판으로, 이천기(李天基)를 예조 참의로 삼았다.
종부시가 아뢰기를,
"고 해평군(海平君) 이길(李佶)의 부인 신씨(申氏)가 본시(本寺)에 정장(呈狀)하여, 남편의 동생인 해령군(海寧君) 이급(李伋)의 셋째 아들 이장(李漳)을 후사로 삼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전례에 따라 예조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령군 급은 ‘큰형인 해평군 길은 폐질(廢疾)이 들어 제사를 받들지 못해 셋째 형인 해원군(海原君) 이건(李健)이 종사(宗祀)를 받들어 온 지 이미 2대가 되었다. 이 일은 비단 문중에서 정한 의논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이미 선조에서 품의해 정한 일이어서, 지금 큰형의 후사를 이어준다면 반드시 적통(嫡統)을 다투는 꼬투리가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끝까지 항거하고 있습니다. 본가의 봉사(奉祀)는 이미 입계하여 결정하였으니, 지금 뒤미처 의논할 일이 없습니다. 다만 예에 ‘대부(大夫)는 후사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해평군은 귀한 왕손인데가 존귀한 대부이니, 법에 있어서 의당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또 형제간의 정으로 볼 때에도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해령군 급을 우선 중한 쪽으로 추고하고 즉시 후사를 세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또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은 으레 서로 다투는 폐단이 많다. 적통을 잇는 한 가지 조항은 선조에서 결정한 대로 명백하게 시행하라."
하였다.
대사간 윤집 등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공조 판서 구인기는 비록 훈구신(勳舊臣)으로서 오랫동안 아경(亞卿)의 반열에 있었으나, 본디 인망이 없고 또한 몹시 늙었습니다.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일찍이 수령으로 있었을 때 각사의 공포(貢布)를 징납하면서 6동 이상을 포흠한 자 10인을 모두 옥리에게 내리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갑술
상이 선정전에 나아갔다. 대신 이하가 예에 따라 입시하여 경외의 사형수를 초복(初覆)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현재 의금부에 적체되어 있는 죄수가 또한 많으니, 판의금부사 이완(李浣)을 패초하여 소결(疏決)하게 하라."
12월 6일 병자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좌윤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찬선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삼았다.
헌납 이단하가 아뢰기를,
"노비 신공을 바치지 못한 것은, 혹 허록(虛錄)으로 인해서거나, 유망(流亡)으로 인해서거나, 혹 한 집에서 여러 명의 신공을 거두어서인데, 미처 마련하지 못하여 인족(隣族)을 침해하자 인족들이 또 도피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커다란 폐단인데, 다행히 조정에서 돌보아줌을 힘입어 특별히 반필로 감하고 이를 영원히 정식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납부하지 못한 것을 추가로 징수하는 일로 허다한 수령을 잡아다 신문하고 있습니다. 신은 아마도 이로부터 팔도의 수령들이 다투어 가혹한 정사를 펴 자기의 죄를 모면하기를 도모하고, 다시는 궁한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잡아오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날 밤에 도적이 전 병사(兵使) 이준한(李俊漢)의 집에 난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는데, 상이 포도청에 명하여 끝까지 수색하게 하였다.
12월 7일 정축
대궐 안에 추국청을 설치하여 승인(會人) 계습(戒習)과 맹인 진승건(陳承建)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12월 8일 무인
경기 감사 이경휘(李慶徽)와 우부승지 남구만(南九萬)을 하옥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경휘는 한 장 가득 불경한 내용뿐인 흉적의 문서를 찾아냈으면 즉시 계문하여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어야 했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추문하면서 여러 날을 지체하였으니 그 멋대로 시일을 끌면서 옥정(獄情)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해 죄주지 않을 수 없다. 남구만은 막중한 옥사를 심상하게 보아 감사의 계본이 신시(申時) 초에 정원에 도착하였는데도 초경에야 입계한데다 그 계본을 밀갑(密匣)에 넣어 두지 않았었으니, 심상하게 보아 넘기고 사체를 제대로 모른 정상이 몹시 놀랍다. 모두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계본이 신시에 정원에 도착하였으나 문안(文案)이 매우 많아 살펴보는 즈음에 자연 폐문(閉門)할 때가 된 것이지, 실로 소홀히 여겨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뜻밖에 잡아다 신문하라는 명이 갑자기 내렸으니, 정상을 살펴보고 죄를 정하는 대성인의 뜻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남구만을 잡아다 신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계사를 보건대, 역시 사체를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인바, 더욱더 놀랍다."
하였다. 정원이 대죄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판의금부사 이완(李浣)이 상소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바라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완은 늙어 병들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상소하여 사면하였는데, 이때 이르러서 체직한 것이다.
홍중보(洪重普)를 판의금부사로, 이숙달(李叔達)을 정언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간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장선징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12월 10일 경진
적승(賊僧) 계습과 맹인 진승건을 복주하였다.
계습은 영중추부사 이경석의 외손이며 홍중보(洪重普)의 조카인데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고 사칭하면서 경기 지방을 오가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이기를, ‘내가 너희들의 부역을 면제시켜 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백성들이 자못 믿었다. 그리고 상의 운명을 가지고 맹인인 진승건에게 점쳐 보았는데, 무도한 내용이 많았다. 다른 일로 인해서 수원부에 갇혔는데, 그 흉서(凶書)를 찾아내어 도신이 계문하자, 상이 즉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계습과 진승건이 모두 자복한 것이다.
12월 13일 계미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사형수를 삼복(三覆)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복하는 일은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다. 죄가 죽어 마땅한 자는 마땅히 법대로 처리하고, 죽이지 않아야 할 자는 원통하게 죽지 않게 하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원통함이 있게 되면 전혀 옥사를 심리하는 본뜻이 아니다. 오늘 율대로 처리한 자는 몇 사람이며, 사형을 감해준 자는 몇 사람인가?"
하니, 승지 심재(沈梓)가 아뢰기를,
"율대로 처결한 자는 10인이고, 사형을 감해 준 자는 3인입니다."
하였다. 계복을 마친 후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남아 있게 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남구만(南九萬)이 계본을 늦게 들인 것은 참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계본을 밀갑(密匣)에 넣지 않은 것은 대개 갑작스러운 중에 제대로 살피지 못한 소치로 다른 뜻은 없었던 것인데, 오랫동안 추운 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경휘(李慶徽)의 일 역시 공사(公事)간에 생소했던 소치로 참으로 잡아다 캐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옥에 갇힌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참작하는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남구만은 풀어주고 이경휘는 파직한 다음 풀어주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고 필선 정뇌경(鄭雷卿)의 어미에게 살아 있을 적에 일찍이 늠료를 지급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본인이 죽었으나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여 잘 보살펴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각사 공포(貢布)의 포흠이 몹시 많아서 한 번 신칙하는 일이 있어야겠기에 해당 고을 수령을 추고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허다한 수령들이 모두 잡혀오니, 신은 실로 마음이 불안합니다. 공포는 전해져 내려오는 포흠이 몹시 많은데, 수령들이 비록 받아들이는 바가 있더라도 매번 전임관이 거두지 못한 것을 차차로 채워 내려오므로, 그 해 분의 분량은 항상 부족함을 면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잡혀온 수령들의 원정(元情)을 보니 모두 이 점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 말 역시 근거가 없지는 않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와 같은 부류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전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4분의 1로 수효를 정해서 해마다 거두어들일 경우, 그 해 분의 수량은 다 납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규칙을 정한 다음,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에 죄를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을미년에 추쇄하기 이전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신공(身貢)은 포가 10여 동이고 쌀이 2백여 석인데, 이것은 거두어들일 형세가 전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특별히 탕감해 주라."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금년에는 각도가 모두 재변을 입었으니 전결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양남(兩南)은 다른 도에 비하여 조금은 나은데, 호남에 급재(給災)한 숫자가 2만 8천여 결이나 되니, 복심(覆審)한 도사(都事)에 대해 신이 추고하기를 청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급재한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도사의 추고를 청하면 외방의 의혹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끝내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호남의 전정(田政)이 이와 같이 허술한데도 호조 판서가 추고하기를 청하지 않은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호남은 면적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재변을 당한 것이 어찌 호서의 몇 배나 되겠는가. 도사가 보고한 바는 실로 지나치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영남의 유청군(有廳軍)은 한 몸에 세 가지 신역을 부담하고 있어서 원망과 고생이 아주 심하므로 일찍이 병사의 계문으로 인하여 매번 변통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하지 못하였습니다. 충훈부에 모속(冒屬)된 충의위(忠義衛) 및 충의위 가운데 병적(兵籍)에 올라 있지 않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됩니다. 그러니 의당 이들을 여정(餘丁)이라고 칭하고 매년 각 2필씩 포를 거두어 들여서 이것으로 유청군의 한 가지 신역을 감해 준 숫자를 채우고, 그 나머지를 가지고 금군(禁軍)의 보인(保人)으로 정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16일 병술
정양(鄭瀁)을 장령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응교로, 여성제(呂聖齊)를 집의로 삼았다.
대사간 민유중이 시골에 있으면서 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몸가짐이 형편없고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불충스러워 사람들에게 지적당하였는바, 죄명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으로서는 오로지 자취를 숨기고 스스로 반성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 만약 영록(榮祿)을 탐하여 무턱대고 나아가 그치지 않는다면 청명한 조정의 허물이 될 뿐만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의 비난에 대해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찍이 탑전에서 김좌명에게 논박을 받았으므로 이런 아룀이 있었다.
승지 남구만이 석방된 후 상소하여 파직시켜 주기를 바라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7일 정해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12월 19일 기축
종2품의 숫자가 적어서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당상관 중에서 탁용할 만한 자를 추천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명하는 윤집(尹鏶)과 이태연(李泰淵)을 추천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홍처량(洪處亮)·이시술(李時術)을 추천하였으며, 판중추부사 정태화는 조한영(曺漢英)을 추천하였다.
12월 20일 경인
헌부가 아뢰기를,
"전라 병사 민진익(閔震益)은 탐욕스러워 자신만을 살찌워왔는데, 늙을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호남의 곤수(閫帥)가 되었을 적에는 그 자식을 도내에다 장사지내면서 군포(軍布)를 많이 꺼내다가 묘지 아래에 밭을 샀으므로 체직되어 돌아오던 날에는 관고가 텅 비었습니다. 본직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서 군포 8, 9바리를 공공연히 서울로 실어와서 그의 비장(裨將)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도둑에게 털렸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며 사대부들이 서로 전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시하면서 군사를 점열할 때에는 시재(試才)에 상으로 줄 물품이라고 칭하고는 군포를 싣고 가서 기생들에게 다 나누어주어 군병들에게 줄 것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탐욕스러운 자는 장수의 직임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단지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영녕전(永寧殿)을 중건하였다. 도감 도제조 이하에게 상을 내렸다. 우상 정치화에게는 안장 갖춘 말을, 판중추부사 정태화·예조 판서 홍중보에게는 각각 숙마(熟馬)를 내려주고, 공조 판서 이완·병조 판서 김좌명·호조 판서 김수흥·이조판서 김수항·응교 홍만용·교리 오두인에게는 가자하였다. 낭청 이하에게도 각각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도목정을 하였다. 조위봉(趙威鳳)·이휴징(李休徵)을 정언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박세당(朴世堂)을 교리로, 민시중(閔蓍重)을 이조 좌랑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예조 참판으로, 윤집(尹鏶)을 호조 참판으로, 조한영(曺漢英)을 우윤으로, 정석(鄭晳)을 부수찬으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홍만형(洪萬衡)을 부교리로, 임위(林㙔)를 지평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겸사서로 삼았다.
12월 21일 신묘
충청 감사 이민적(李敏迪)을 삭직하였다.
당초에 청주 사람 남기명(南紀明)이 산송(山訟)에서 패하자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상이 형조의 낭관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는데, 감사가 파내어 이장(移葬)하도록 판결한 것이 과오라고 하자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본도 사람의 격쟁으로 인하여 감사를 죄주는 것은 뒤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부모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지금 이와 같이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대개 남기명(南紀明)은 척리(戚里)에게 연줄을 대고 있어서 그 세력을 믿고 그의 아비를 청주(淸州) 대촌(大村)에다 장사지내었다. 이에 대촌 사람이 감영에다 정소(呈訴)하였는데 이민적이 목사로 하여금 강제로 점거한 실상을 살펴보게 하고는 그 무덤을 파 옮기게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남기명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끝내 견책을 받자, 사람들이 모두들 국가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을 탄식하였다.
12월 22일 임진
헌부가 아뢰기를,
"도성 안에 명화적(明火賊)이 출몰하여 사람을 살해한 것은 근고에 없던 변입니다. 사건 당시 3일 안에 죄인을 수색하여 찾아내지 못하면 본청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미 여러 날이 지났어도 아직도 잡지 못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이미 큽니다. 게다가 대장 유여량(柳汝𣛀)은 위령(威令)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아 도적을 금하는 것이 크게 해이해져, 언제 어디서 이러한 일이 또 일어날지 모두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결단코 이 사람을 포도 대장의 직임에 그냥 놓아둘 수 없습니다.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필선 권격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동궁이 강학을 정지한 지가 지금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신은 참으로 추위가 한창 심하여서 혹 서연에 임하는 데 방해가 될 것임을 알고 있으며, 깨끗치 못해 출입을 삼가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질병을 염려하는 성상의 걱정에서 나온 것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가을과 겨울에 우약(羽籥)을 배우는 것 역시 기(氣)를 시절에 맞게 기르는 도리에 합당하며, 서연에 나아가 참여하는 사람은 모두 재숙(齋宿)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을 가지고 염려하며 폐지해서는 안될 일을 오랫동안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요속(僚屬)이 갖추어졌는데도 보도해 가르치는 엄함이 없고, 강독하는 예가 갖추어졌는데도 규계하는 보탬이 없는 것은 옛사람이 탄식한 바입니다. 지난번에 찬선 송준길이 잇달아서 헌직(憲職)을 사직하였을 때 전하께서는 비단 예를 다해 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득 그의 사직을 허락하였으니, 옆자리를 비워 두고 목마르듯이 어진이를 찾는 성의가 전혀 없는바, 신은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참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도(正道)를 닦는 공부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고 보익하는 방도에 온 힘을 다하여서, 동궁으로 하여금 자주 서연을 열어서 철폐하지 않게 하고 두루 훌륭한 사람을 불러와 좌우에 놓아두소서. 그러면 습관과 함께 지혜가 자라나고 교화와 함께 마음이 닦여져서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지는 효과가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 상소를 읽어보고는 각별히 마음을 쓰는 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겼다. 봄날씨가 점차 따뜻해져 병이 나아가고 있으니 어찌 오랫동안 서연을 폐하게 될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상소 끝에 한 말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2월 25일 을미
상이 충신 안홍국(安弘國)에게 작질을 가증(加贈)하라고 명하였다.
안홍국은 임진 왜란을 당하여 선전관으로서 용만(龍灣)까지 호가(扈駕)하였으며, 보성 군수(寶城郡守)에 제수됨에 이순신(李舜臣)이 이끌어 통영 중군(統營中軍)을 삼아 주사(舟師)를 총괄해 다스리게 하였는데 항상 비분 강개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섰다. 6월에 왜적과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배 한 척의 군졸을 거느리고 수십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는, 마침내 탄환에 맞아 죽으니, 당시 나이가 43세였다. 그 충의로운 대절(大節)이 이순신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의 사적(事蹟)이 《황명통기(皇明通紀)》 및 《종신록(從信錄)》·《만력동정기(萬曆東征記)》에 실려 있다. 호남의 기사(奇士) 임준(林埈)이 전(傳)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그의 아들 안종술(安宗述)이 상소하여 그의 아비가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음을 하소연하였다. 이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교리 이규령·윤심 등이 상차하여 속히 국옥(鞫獄)을 완결짓기를 청하였는데, 이 당시의 적승(賊僧) 계습(戒習)이 이미 복주되었으나 관련된 자가 몇십 명이나 되어 혹 옥중에서 지레 죽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유신(儒臣)이 상차한 것이다. 영중추부사 이경석 역시 차자를 올려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모두 안에다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12월 26일 병신
경최(慶㝡)·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27일 정유
상이 대신들에게 명하여 국옥을 의논해 결정하게 하였다. 대신들이 합계(合啓)하기를,
"세종 대왕께서 하교하기를 ‘죄가 중하나 정상이 가벼울 경우에는 법대로 처결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성인의 말씀이 위대합니다. 죄가 중하면 용서하기 어려운데도 정상이 가벼운 자의 경우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였으니, 포용한 것이 넓다 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재량하여 처결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는 치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더구나 이번 옥사이겠는가. 원악이 이미 복주되었으니 나머지를 고율(考律)할 필요가 있겠는가. 모두 석방하라."
하였다. 이에 즉시 여덟 사람을 뜨락에 끌어다 놓고 상의 전교를 전하고 석방하니, 모두들 감격하여 절하고 갔다. 해서와 호서 두 도에 이 일로 연루되어 갇혀 있는 자들도 감사에게 명하여 모두 풀어주게 하였다.
대사헌 민정중이 병을 이유로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졸하였다. 명하는 자(字)가 대이(大而)이고 판서를 지낸 홍성민(洪聖民)의 손자이다.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효종(孝宗)을 만났는데 돌보아줌이 몹시 융성하였다. 육부의 판서를 역임하고 수어(守禦)의 임무를 겸해서 맡았으며 마침내 영의정 자리에 올랐다. 비록 무슨 일을 담당해서 알선하는 재주는 없었으나 부지런히 봉공(奉公)하였으며, 평생 사류(士類)를 부식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리고 집이 본디 청빈해서 지위가 공경에 이르렀으나 집이 낮고 비좁았으며 생활이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학술이 모자라 몸가짐을 진중히 하지 못하였으므로 식자들이 병통으로 여기었다.
12월 28일 무술
예조가 아뢰기를,
"대신의 상에는 전부터 거애(擧哀)하는 예가 있는데, 현재 몸이 불편하시니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사부와 대신의 상에 왕세자가 응당 행하여야 할 절목을 예관으로 하여금 품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거애하고 조문하는 예는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나라가 불행하여 대신의 상을 당하였기에 내가 몹시 마음아프다. 더구나 객사(客使)가 우리 나라로 들어왔으니, 묘당의 여러 가지 일이 자못 우려스럽다. 그러니 비국의 당상으로 하여금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되, 품정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시임 대신의 예에 의거하여 빈청에서 개좌(開坐)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삼정승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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