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무인
대사헌 이경휘 등이 아뢰기를,
"집의 김익렴(金益廉)이 처음부터 간원과 의논하지 않은 채 혼자서 상가(賞加)의 환수에 관한 의논을 탑전에서 정지하였는데, 간원은 인혐할 줄도 몰랐고, 또 논열(論列)하지도 않았으니 대간의 체면을 극히 손상시켰습니다. 익렴과 그 당시 공무를 보았던 간원의 관원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기묘
이조 판서 김수항이 병이 있다고 상소하였는데, 체차되었다.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원만리(元萬里)·소두산(蘇斗山)을 정언으로,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이원정(李元楨)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거둥하여 소대하였다. 옥당의 관원이 《통감》을 강하였는데,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9월 3일 경진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래에 잇따라 개강(開講)하시니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쇠퇴하지 않고 시종 한결같다면 전화위복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북도의 기민으로 노인(路引)을 가지고 다른 도(道)에 가서 먹는 자는 그들이 간 고을에서 진휼을 실시하여 구제하게 하되, 임시로 명부를 작성하여 뒷날 쇄환할 자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강화 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작년에 본부의 세태(稅太)를 전면 감하였으므로 지금 콩으로 바꾸어 상환해야 하는데, 관가의 무역은 자칫하면 민폐가 되기 쉬우니, 콩이나 팥 2섬을 쌀 1섬으로 계산하여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교리 홍만용이 아뢰기를,
"며칠 전에 헌부가, 상가의 환수에 관한 계사를 정지한 일로 인해 간관을 체직할 것을 논하면서 이름을 지적하지 않고 막연히 체직하라고만 청하였으니, 자못 대간의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대사헌 이경휘, 장령 맹주서, 지평 안숙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4일 신사
상이 흥정당에 거둥하여 소대하였다. 옥당의 관원이 《통감》을 강하였는데, 승지도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9월 5일 임오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간으로, 최일(崔逸)을 장령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홍중보(洪重普)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헌납 이동로가 경상 우병사 박지용(朴之墉)을 탄핵하기를,
"일찍이 몇 군을 맡았을 때에 짐을 실은 말이 줄을 잇는 것을 어떤 사대부가 목격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곤수(閫帥)의 직책을 맡겨서는 안 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우상 허적의 병세가 꽤 깊은 데다가 또 연경으로 길을 떠나게 되니, 내 매우 염려스럽다. 내의원의 의원 1명을 뽑아 보내라."
9월 6일 계미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옥당의 관원이 《통감》을 진강하였는데, 승지도 공사를 가지고 들어와 아뢰었다.
9월 9일 병술
민유중(閔維重)을 동부승지로, 장선징(張善澂)을 도승지로, 박지(朴贄)를 지평으로, 조가석(趙嘉錫)을 정언으로, 이시술(李時術)을 호조 참의로, 이준구(李俊耉)를 예조 참의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충청 감사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판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정랑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장령 민광소가 아뢰기를,
"경주 부사 오빈(吳䎙)은 극히 노쇠하여 경주와 같은 큰 진영(鎭營)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평산 부사 정세보(鄭世輔)는 전에 순천을 맡았을 때 하는 일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으니 다시 수령의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정언 소두산(蘇斗山)은 일찍이 헌직(憲職)에 있을 때에, 열 달이 지난 뒤에 해유장(解由狀)을 내려고 하는 수령을 처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두산 자신도 관직에 있은 지 1년 남짓한 때에 해유장을 내었으면서 혐의할 줄 모르고 거리낌없이 남을 탄핵하였으니, 수치심이 이만저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0일 정해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소결청·형조의 당상과 같이 각도의 죄인을 의논하여 소결하였다. 경중을 나누어 용서하거나 감등(減等)하거나 그대로 귀양지에 두었다. 상이 이르기를,
"군포를 감해 받아들이는 일은 어떻게 의논하여 정하였는가?"
하니,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대장 이완과 상의하였더니, 그가 ‘포보(砲保)의 가포는 모조리 포수 무리의 겨울 옷거리로 쓰이고 있으므로 경솔하게 의논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마는, 원양도와 같이 특히 흉년이 심하게 든 곳은 또한 불가불 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동은 전부 감해주고 영서는 1필을 감해주고 경기와 삼남은 3필 중에 1필은 쌀로 대신 받아들이되, 부족한 수량은 호조에 비축된 것과 병조 및 도감의 군포를 가져다 충당해 써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묻기를,
"어린아이에게 받는 베를 감하자는 일은 어떻게 의논하여 정하였는가?"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어린아이의 수에 대해 이미 각도로 하여금 뽑아서 문안을 작성해 가지고 오라고 하였으니, 지금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감해주어 조정에서 실지의 혜택을 준다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10세가 차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받는 베는 3년을 한정하여 특별히 견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3필의 신역은 수군이나 포보가 다름이 없으니, 수군이 내는 베 중에 한 필도 대신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게 허락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각 관서의 노비 신공이 가장 중하니, 포보처럼 전부 감해주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삼분의 일을 다른 것으로 대신 받아들이게 한다면 또한 넉넉히 혜택을 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비가 원래 내는 신공의 수량은 얼마나 되는가?"
하자, 호판 김수흥이 아뢰기를,
"1천 8백여 동인데, 삼분의 일이면 6백여 동에 불과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노(奴)의 신공은 두 필 중에 한 필을, 비(婢)의 신공은 한 필 반 중에 반 필을 쌀로 대신 받아들이되, 한 필당 일곱 말로 규식을 정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북도는 흉년이 특히 심하게 들었으니,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 북병사 이여발은 그대로 유임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년 봄까지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자,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병사를 그대로 유임시켰으면 감사도 그대로 유임시켜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에 사람이 부족하여 탄식을 간절히 하고 있는데, 민정중을 북관에다 오랫동안 두고 있으니, 정말로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중도 명년 구황할 때까지만 그대로 유임시키라."
하였다.
9월 11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명익을 정언으로, 김시진을 좌윤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죄수를 관대하게 처결하였다. 사간 여성제가 아뢰기를,
"각 고을에 조곡의 이자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이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인데 통영의 조곡이 더욱 심합니다. 비국이 지방의 조곡이라 하여 한 말의 이자만 받아들여 백성의 힘을 느슨히 해주라는 뜻으로 결정하여 알렸습니다. 그런데 통제사 정부현(鄭傅賢)이 끝내 감해주지 않아 조정의 은혜로운 뜻으로 하여금 막혀 행해지지 않게 하였으니, 나문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우선 추고하라고 명하였다가 여러 번 청하자, 따랐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도감에서 세 필을 받는 보(保)의 유에게 그 중 한 필은 이미 쌀로 대신 받으라고 하였으니, 각 아문의 각종 가포도 삼분의 일은 쌀로 대신 받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원양도 포보(砲保)의 가포는 이미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전부 감해주기도 하고 한 필을 감해주기도 하였으니, 노비의 신공 역시 이와 달라서는 안 됩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원양도에 병조에서 받아들이는 군포도 똑같이 감해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홍중보가 또 아뢰기를,
"갑진년에 제주에 과거를 실시하였을 때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사람은 마땅히 금년 봄 식년시(式年試)를 보도록 하여야 할 것인데, 무과에 응시할 자가 태풍에 발이 묶여 제때에 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이 정장(呈狀)하여 별시를 보게 해 주길 바라고 있으니, 비록 상례는 아니지만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라고 명하였다.
정문부(鄭文孚)의 서원에 편액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사간 여성제의 청을 따른 것이다.
9월 12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죄인을 소결하였다.
9월 13일 경인
집의 정계주 등이 아뢰기를,
"전 군수 남천한(南天漢)은 일찍이 청도(淸道)의 수령으로 있다가 체임되어 올라올 때에 2백여 곡(斛)이나 되는 모곡(耗穀)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합니다. 모곡은 본디 관청의 수요에 보태 쓰는 것인데 수령이 어떻게 감히 이처럼 많은 양을 마음대로 사용한단 말입니까.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 가운데 징수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해 지금 조사하여 견감하고 있으나, 현재 있는 노비에게서 거두지 못한 것도 많은데 아직까지 변통하는 조처가 없습니다.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흩어져 달아나는 이유가 실로 여기에 있으니, 달아나버린 뒤에 탕감해 주는 것보다 달아나기 전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뜻을 여쭈어 의논을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전라도의 남원(南原)·장수(長水)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9월 14일 신묘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떴다.
9월 15일 임진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윤집(尹鏶)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9월 17일 갑오
숙영 옹주(淑寧翁主)가 죽었다. 선왕(先王)의 후궁 이씨의 소출로서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아내이다.
판중추부사 오준(吳竣)이 죽었다. 오준이 글씨를 잘 써서 조정의 길사나 흉사의 책문을 많이 썼기 때문에 높은 관직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질이 유하여, 그의 조카 오정일 무리가 한 짓을 늘 미워하였고 사나운 처에게 미혹되어 형제 간에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였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
사간 여성제 등이 아뢰기를,
"대구 영장(大邱營將) 이동상(李東相)은 군사를 호궤하는 일로 청도(淸道)에 도착해서 기녀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열고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본군(本郡)의 어린아이가 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자, 동상은 자기가 가까이 하는 기생에게 사정(私情)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잡아다가 심하게 매질을 하여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9일 병신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원을 내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9월 20일 정유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허적, 부사 남용익, 서장관 맹주서가 청나라로 가니, 상이 인견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연경에 들어간 뒤에 저들이 영상과 좌상이 공무를 보느냐고 물으면 ‘황공하여 공무를 보지 못하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일이 만약 순조롭지 않아 끝내 죄율을 감하여 주지 않으면 글을 올려 해명하고자 합니다."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저들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글을 올려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쪽 사람들이 여기에 오면 우리 나라의 일을 모르는 것이 없는데 우리 나라 사신은 저 나라의 사정을 탐지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대체로 이는 우리 나라 역관들이 저들에게 아첨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저쪽의 사정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 사신이 더러 한인(漢人)과 서로 접하기는 하지만 그 나라의 금령이 무서워서 감히 함부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하는 것을 보건대, 위험과 멸망이 금방 닥치게 되었으나, 지금까지 유지한 것은 명나라가 신종 때부터 숭정에 이르기까지 요령없이 재물을 마구 긁어모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옛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데다가 저들이 맥도(貊道)060) 를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적게 받고 풍년도 자주 들기 때문에 유지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의 조회하는 예법이 어떠하던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날 사신으로 가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였는데, 대신은 전(殿)의 서쪽에 있었고 학사(學士)들은 기둥의 밖에 죽 서 있었고 전 위에 호위하는 군졸들은 거의 수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또 하급내대신(蝦及內大臣)이 있었는데, 이들은 조정의 의논에 참여하지 않고 노는 객으로 청나라 임금과 농담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보통 때에는 반열이 많지 않았으나, 왕후를 책봉하고 하례를 드릴 때에 서 있는 자들이 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절하는 의절과 머리를 조아리는 등의 일은 가지런하여 가관이었습니다마는, 마음대로 포근하게 앉기도 하고 담배를 마구 피우기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치(順治)가 중국 말을 좋아하고 중국의 제도를 선호한다는데 지금은 어떠하던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들으니, 태후가 중국 말을 매우 싫어하여 혹 아이들이 중국의 풍속을 익히는 자가 있을 경우 ‘중국 풍속이 성해지면 호(胡)의 운수가 쇠해진다.’라고 하면서 그때마다 금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9월 21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계주(鄭繼胄)를 승지로, 오정위(吳挺緯)를 좌윤으로,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이익(李翊)을 부응교로, 최유지(崔攸之)를 교리로, 조복양(趙復陽)을 부제학으로, 이원정(李元禎)을 호조 참의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장령 최일(崔逸) 등이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 중에 문서에 힘쓰지 않는 자가 많은데, 미포(米布)를 출납하는 일의 경우에는 서리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여 도적질을 하도록 버려둠으로써 남은 것이 거의 없게 되니, 쓸 곳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공물주인(貢物主人)에게서 취하곤 합니다. 이러한 폐단은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진실로 한 명의 해당 관원이 혼자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적발하여 처벌하지는 못하더라도 폐습을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호조로 하여금 일일이 창고 조사를 하여 부족한 것은 해당 관리에게 징수하게 하고, 이후로는 해당 관원이 직접 출입을 주관하여 퇴폐한 풍속을 진작시키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별시(別試)의 전시(殿試)를 시행하였다. 문과에서 윤진(尹搢) 등 10명을, 무과에서 김성길(金成吉) 등 86명을 뽑았다.
9월 23일 경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4일 신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본직과 제주·보양관을 사양하고 아뢰기를,
"수치심이 있어야만 분개할 줄 알고 분개할 줄 알아야만 자강할 수 있고 자강해야만 정치를 할 수 있으며 국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전(傳)에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당하고 있는 곤액이 사실 병자년 이후로 있지 않았습니다. 인심이 참담하고 국세가 갈수록 좌절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안일만 탐하여 지난날의 습관만 한결같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하께서 경연을 열지 않으심이 옛날과 같고 신하를 드물게 접견하심이 옛날과 같고 무기력하고 무너져 인순고식적인 것이 또 옛날과 같아, 하나의 시행한 일이나 하나의 정치 명령이 분개하고 부끄러워하여 자강해보려는 의사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하늘이 우리 동방을 새롭게 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까? 어찌하여 전하께서 지기가 나약해지시어 이처럼 남이 하자는 대로 달갑게 따르신단 말입니까? 오늘날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이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통곡할 일입니다. 만일 후일에 이보다 더 큰 능욕이 있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이며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신도 모르게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지금 수재와 한재가 번갈아 찾아들고 별의 변고가 또 생겨 눈에 걱정거리가 넘쳐흐르고 있어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대궐에 변괴가 가장 많아 심지어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진짜의 양(陽)이 모두 집중한 곳에 이처럼 음사한 기운이 침범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근본이 나약하여 자립하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덕업을 닦아 의리가 마음속에 충족하게 하고 유명(幽明)에 표상이 되어 사람이나 귀신으로 하여금 각자의 위치에서 편안하게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얼마나 힘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옛말에 ‘어려움이 많으면 나라가 일어나고 근심이 많으면 슬기로운 지혜가 열린다.’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전하께서 걱정하실 때인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국사가 위태로와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있으니, 나의 황황급급한 회포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지금 경계하고 가르친 말을 보건대, 말은 간략하지만 뜻은 간절하니 좌우에 붙여두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뜻을 돌려 나의 갈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9월 25일 임인
상이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태백이 낮에 나타나고, 우레와 번개가 쳤다. 밤에 달이 헌원(軒轅) 성좌로 들어가고 유성이, 자미원(紫微垣)의 동원(東垣)에서 나왔다.
9월 26일 계묘
이은상을 형조 참판으로, 김우형을 참의로, 오두인을 교리로, 김석주를 수찬으로, 이선을 봉교로 삼았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과거를 본 자 중 초시를 본 뒤에 기년복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치르지 못해 회시를 보지 못한 자에게 부모의 상을 당한 자의 예처럼 진시(陳試)의 공문을 주도록 명하였는데, 승지 민유중의 말을 따른 것이다.
9월 27일 갑진
상이 승지 정계주를 영상 정태화에게 보내 돈유하게 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 달이 태미 성좌의 서원으로 들어갔다.
9월 29일 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 판서 윤순지(尹順之)가 죽었다. 윤순지는 감사 윤훤(尹暄)의 아들이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어 문형(文衡)을 맡아 육경의 자리에 올랐으나, 성품이 나약하고 지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중시(重試)를 실시하여, 문과에는 홍만용·김덕원·오시수·홍만형·민종도 등 5명을 뽑고, 무과에는 유태신 등 7명을 뽑았다.
9월 30일 정미
우레가 쳤다.
이준구를 승지로 삼았다.
지평 조성보·박지, 정언 조가석이 중시에서 제술을 하지 않아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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