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0권, 현종 10년 1669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6.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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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오

상이 진찰하러 들어온 의관(醫官)에게 하교하기를,
"중궁이 전부터 괴증(塊症)을 앓아 왔는데 수년 이래로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 약을 쓰고 뜸을 떠도 모두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만일 온천욕을 한다면 혹시 효험이 있을 것 같으니 이 뜻으로 약방에 말을 하라."
하니, 약방이 아뢰기를,
"신들이 항상 걱정하였는데 지금 성교를 받고 보니 더욱 놀랍고 염려됩니다. 즉시 의관들과 상의하였더니 모두가 온천욕이 해로움은 있어도 유익함은 없다고 합니다. 삼전(三殿)이 일시에 행차하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므로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사리에 합당하다고 할 수 없으니, 후일 등대할 때 품처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 하고 그 절차를 해조로 하여금 품정하게 하였다.

 

3월 2일 을미

지춘추 박장원(朴長遠)과 대교 이인환(李寅煥)을 강화부(江華府)로 보내어 《실록》에서 정릉(貞陵)에 대한 사적을 상고하게 하였다.

 

병조의 낭천(郞薦) 규정을 혁파하였다. 이전에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낭천의 폐단을 진달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기를,
"당초에 낭천을 혁파한 것과 다시 복구한 곡절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인조조 정축년에 상신 최명길의 차론으로 낭천을 혁파하였는데 그 후 대계로 인하여 다시 복구하였습니다."
하니,
"정축년 때의 일에 의거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정리사(整理使) 민정중(閔鼎重)이 온양 행궁 및 노정의 모든 일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3월 3일 병신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김징(金澄)을 집의로, 윤경교(尹敬敎)를 지평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병조 참지로,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이민적(李敏迪)을 승지로, 남용익(南龍翼)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성상의 기체가 누차 불편하시므로 해마다 거둥하시고 간간이 자전(慈殿)을 받들고 거둥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뭇 신하들이 감히 고삐를 잡고 괴롭게 간하지 않으며, 백성들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서로 수군대지 않은 것은, 전하께서 어쩔 수 없어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제 삼가 듣건대 중궁(中宮)께서 행행하기로 이미 결정하였다고 하는데, 신들은 지극한 근심을 견딜 수 없습니다. 깊은 궁궐에 계셨으므로 남자와는 크게 다른데, 망령된 의논을 지레 받아들여 백 리 밖으로 멀리 거둥하시어 시험해 보지 않은 온천에서 시험하고자 하시니, 원근의 듣는 사람들이 멈추어야 되는데 멈추지 않는다고 누군들 여기지 않겠습니까. 수삼십 리를 내전이 거둥하시어 삼궁이 아울러 수레를 나란히 하고 가신다면 뭇사람들이 놀라고 의심할 것이며, 약의 성분을 알지 못하면 맛보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의 현명한 가르침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살펴 정지하소서."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영의정 정태화와 함께 온천 행차의 일을 정하여 아뢰기를,
"중전의 병환이 이와 같으니 신들은 이런 때 행행하는 것이 매우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상에서 평안할지는 역시 예측하기 어려우나 앉아서 쾌차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계획을 하게 된 것이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만둘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굳이 다투겠지마는 지금은 그만둘 수 없으므로 폐단을 줄이는 것으로 절차를 품정하고자 하는데,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니, 앞질러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옥당이 방금 입시하였으니, 답해도 된다."
하고, 인하여 중전의 괴증(塊症)은 침이나 약으로 치유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하교하기를,
"차자의 말은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대단히 그만 둘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 함께 거둥할 수 있겠는가. 차자의 말단에 있는 ‘도로에서 군병이 쓰러진다.’는 말은 노정의 멀고 가까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진의 빠르고 느린 데 달려 있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니, 교리 이민서가 아뢰기를,
"이미 상의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중지하라고 청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판부사  정치화는 마땅히 도성에 남아 있어야 하고, 영부사 이경석은 노쇠하여 비변사에 나와 있기가 어렵다. 모든 일을 집에 있으면서 상의하여 처리하라는 뜻으로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였다. 대장 이완(李浣)이, 강도(江都) 주사(舟師)의 혁파는 실책이라고 극구 말하면서 아뢰기를,
"병가(兵家)의 일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깃발 하나를 세워서 의병(疑兵)을 만들어도 오히려 적으로 하여금 의심하여 돌아보게 하는 것인데 어찌 주사(舟師)를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버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적이 강가에 도달 하였을 때 우리가 주사를 성대하게 벌여 놓아 병력을 과시한다면 일에 있어서 도움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당초에 주사를 옮긴 것은 잘못된 계책이니 그것이 잘못인 줄 알았다면 다시 설치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되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다시 설치하자고 청하니, 예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혁파하잔다고 혁파하고 다시 설치하잔다고 다시 설치한다면 어느 때에 논의가 결정되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당초에 서필원이 유수로 있으면서 아뢰기를 ‘강도는 주사를 사용할 곳이 못 되고 만일 사변이 있게 되면 피란의 도구밖에 안 되니 주사를 혁파하소서.’ 하여, 강화도에 있는 수군을 모조리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이완이 매번 한스러워 하다가 이제야 이 말을 하였고, 허적이 또 이완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말이 이러하였다.
정태화가 무신으로 총융사를 차출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철곶진(鐵串鎭)은 승천보(昇天堡)에 있어서 서로(西路)로 왕래하는 중요한 나루입니다. 정묘년 이후에 이 진(鎭)을 신설하였는데 수군의 수가 다른 진에 비하여 배나 되니 우연한 의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건너편으로 진을 옮겼으니, 인조(仁祖) 때의 설립한 의도와 어긋납니다. 옛 진에 다시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주사(舟師)만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육군을 설립하여 함께 방어하게 하였으니 소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철곶(鐵串), 덕포(德浦), 정포(井浦)의 3진을 건너편으로 옮긴 것은 실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비단 3진의 토졸(土卒)들이 자리를 잃고 원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부당하다고 하니, 마땅히 모두 옛 진에 다시 설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3진의 옛터에는 이미 별장(別將)을 설치하였으니, 유수(留守)로 하여금 형세를 살펴서 별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시 3진을 설치하게 하라."
하였다.

 

3월 4일 정유

상이 춘당대(春塘臺)에 친히 임어하여 관무재(觀武才)를 하고 겸하여 문신도 시험보였는데 제목은 ‘용비어천가의 뒤에 쓰다.[題龍飛御天歌後]’로 하고 체재는 20운 배율(排律)로 하였다. 문신들에게 제술하게 하고 시간이 넘으면 시권(試券)을 받지 못하게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시각을 늦춰달라고 하였다. 이훤(李藼) 등 7명을 뽑았다.

 

동지 정사 이경억(李慶億), 부사 정륜(鄭錀), 서장관 박세당(朴世堂)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저들의 사정을 하문하니, 이경억 등이 모두 듣고 본 것으로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매번 저들의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반드시 쉬이 패망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미 전쟁도 없고 남쪽 땅을 모두 얻어서 물화(物貨)가 집중되어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정조(正朝) 때에 그들을 보니 비록 하급 관리라도 모두 흑초구(黑貂裘)를 입었고 사용하는 기물은 화려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가난하고 검소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과도하다고 여기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망할 조짐은 아닙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한인(漢人)을 침학함이 끝이 없어서 모두 언제나 망할꼬 하는 탄식을 하고 있으니 만일 뛰어난 사람이 한번 외친다면 장차 반드시 흙덩이가 무너지듯 기와가 깨지듯 하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걱정되었던 것은 몽고(蒙古)에서 변란을 일으켜 조공의 길이 막히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니, 경억이 답하기를,
"희봉구 부락(喜峰口部落)이 매우 강성하므로 청인(淸人)들이 두려워하고 있으나 모반(謀反)할 것이라는 것은 실상이 아니고 서달(西撻) 역시 당장 난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염려되는 것이라면 황제의 정령(政令)이 혹독하여 한인(漢人)의 원망과 노여움이 깊이 쌓였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함경 감사 권대운(權大運)이 사정(私情)을 진달하여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3월 5일 무술

상이 춘당대에 몸소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하였다.

 

정언 신정(申晸)이 상소하여 중궁(中宮)의 온천 거둥을 간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상소하여 중궁의 온천 거둥을 간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6일 기해

관리를 보내어 여제(厲祭)를 행하였다.

 

상이 춘당대에 몸소 임어하여 관무재를 하였다. 거자(擧子)를 정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조 낭관을 나문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연일 관무재를 하면서 싫증내지 않았다. 권법(拳法)이나 채찍, 곤봉 같은 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놀이 같았는데 어좌(御座)의 가까운 곳에서 시험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자들이 매우 놀라워했다. 장전(帳殿)의 왼쪽에 높은 누각이 하나 있어 울타리를 치고 장막으로 둘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내전께서 구경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차자를 올려 간언하니, 상이 기분 나빠하며 일어나 장막 안으로 들어갔고, 유의하겠다고 답했다. 영상 정태화가 좌상 허적에게 이르기를,
"옥당이 차자로 간하는데 우리들은 주상을 모시고 온종일 시재(試才)하였으니 미안하다."
하였다.

 

3월 7일 경자

상이 또 춘당대에 친히 나아가 관무재를 하고,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문신 정시(庭試)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훤(李藼)은 6품으로 옮겨 주었고, 그 다음인 권열(權說) 등 6명에게는 표피(豹皮)·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문신 시사(試射)에 수석을 차지한 강석빈(姜碩賓)에게는 호피를 하사하고 그 다음인 이후(李煦) 등에게는 망아지를 하사하였으며, 무신 민진익(閔震益) 등 3명에게는 말을 잘 탄다고 호피를 하사하였다. 육량원사(六兩遠射), 유엽전(柳葉箭), 기추(騎蒭), 조총(鳥銃) 등에 우등한 사람들은 혹 전시에 직부(直赴)할 수 있도록 하였고, 혹은 변장(邊將)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가자를 명하기도 하였다.

 

온양(溫陽)의 거둥 때 경기 일대 및 충청의 각 군읍이 진상하는 물선(物膳)은 일체 정미년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고, 함경과 전라 양도의 감사는 경상(境上)에 진주(進駐)하지 말게 하여 그 폐단을 제거하게 하였다.

 

홍처후(洪處厚)를 발탁하여 함경 감사로 삼았다. 처후는 별로 재주와 슬기가 없었으며 나이 또한 노쇠한데 대신이 추천하였으므로, 물의가 놀랍게 여겼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정시에 참여하여 제술하지 않고 물러나서 소를 올려 진계하기를,
"어제 상께서 내원(內苑)에 나아가 무예를 시험하는 것을 보시고 또 문사를 시험하시니 매우 훌륭한 생각이었습니다. 더구나 명제(命題)한 의도는 은미한 취지까지 있었으니 신은 진실로 감격하였고 전하의 의지가 광복(光復)에 있어서 여러 신하의 뜻을 살피고자 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신은 학술이 거칠고 재주가 짧아서 온종일 애써 보았지만 끝내 문장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구구한 충성을 바치려는 정성은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 대왕이 사조(四祖)가 덕을 쌓은 기반을 받들고 고려(高麗)의 망해가는 운세를 만나 천도와 인심에 순응하여 일가를 바꾸어 나라를 만들었으니, 신비롭고 성대한 공렬이 천지간에 높고 빛나 역사에도 다 싣지 못하고 칭송의 노래로도 모두 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요점을 간추려 말한다면 ‘너그럽고 인자하여 군중을 얻었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기반을 열었으며, 죽이지 않는 것으로 무(武)를 삼고 탐내지 않는 것으로 보(寶)를 삼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용비어천가 1백 25편이 대체로 이 아름다운 덕을 형용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역대의 군주를 살펴보니, 흥기할 때는 모두가 조종이 인후하고 절검하여 어려운 가운데 나라를 얻었으며, 패망할 때는 역시 모두가 교만하고 사치하면서 함부로 방자하게 굴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대체로 창업할 시초에는 자기 나름대로 법을 만드는 것이니 새로운 규모를 세워 전대의 폐정을 모두 제거할 수 있지만, 이어받는 때는 내려오며 쌓인 폐단이 보고 듣는 것에 익숙해져 약간의 변경이라도 하려고 하면 곧장 구애됨이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입니다. 창업할 시초에는 귀와 눈이 한결같이 새롭고 생각도 오로지 정밀하여 사람마다 일심으로 주의하여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는 이가 없지만, 이어받았을 때는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고 선비마다 의논이 달라서 뜻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사심을 펴려고 힘써서 하나의 일을 일으키려고 하면 의논이 어지럽게 일어나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입니다. 창업할 시초에는 호걸이 서로 만나 마음과 덕이 서로 같으며 본래 귀하고 본래 친한 사람이 없지만, 이어받았을 때는 이미 권행(權倖)이 있고 이미 귀척이 있으며 이미 사사로이 친밀한 사람이 있어서 저마다 굴혈에 사리고 웅거하여 좌우에서 견제합니다. 만일 사치를 금지하고 전산(田産)을 제한하려고 하면 모두 방해하는 것이 있어서 임금이 마음대로 명령을 행하지 못하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입니다. 창업할 시초에는 모두가 몸소 어려움과 변고를 겪었으니 전일에 잃게 된 것을 징계하고 후일의 편안하기를 계획하는지라 그 마음이 두려워하여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림을 분명히 살피니 선을 행하기가 쉽지만, 이어받았을 때는 진실로 명철한 이가 아니라면 비록 패망하는 형세가 가까이 목전에 있더라도 위세에 젖고 안일에 빠져 깨닫지 못하여 모두가 위험을 편히 여기고 재앙을 이익으로 생각하며,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위태로운 형세를 밤이 지남에 아침이 오는 것처럼 여기고 오래 쌓인 폐단에 젖어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니, 이것이 네 번째 어려움입니다. 이상의 것들이 두 시대가 서로 다른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는 태조께서 건국한 당초부터 지금까지 2백 77년 동안 오늘에 이르러 가장 극심하게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조종조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제대로 정리하여 거행하지 못하고 중간에 전해진 폐단과 쌓인 환란이 어지럽게 엉켜 고질이 되었는데도 성명께서는 목청(穆淸)한 곳에서 눈을 감고 앉아서 구습을 따르는 것에 힘을 쓰고 계시며, 대소 관원은 안팎에서 개인의 영리에 매달려 기름진 것을 영화로 여기고 있어, 안위와 존망의 큰 계획을 모두 소홀히 하여 도모하지 않으니 백성은 무엇을 바라며, 국가는 무엇에 의뢰하겠습니까. 이것이 숙향(叔向)이 이른바 ‘비록 나의 조국이지만 역시 말세이다.’라고 한 것이니, 통곡하며 눈물지을 일입니다.
신은 진실로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조종의 창업한 어려움을 거울삼는 한편 뒤를 이어 보존하면서 지키기가 쉽지 않음을 경계하여, 그 지위를 편안히 여기거나 서정(庶政)을 소홀히 여기지 마소서. 명령 하나를 내리거나 사업 하나를 일으키는 데도 일시의 안일한 습성에 그르쳐지거나 한 사람의 아첨하는 말에 엄폐되지 말아서, 중심(中心)이 얽매임 없이 대공 지정하게 위에서 밝게 임하여 뜻을 세우고 정신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창업의 초기처럼 하소서. 사람을 등용할 때는 오직 현능한 이를 구하며 말을 들을 때는 오직 시비를 분변하며 일을 할 때는 오직 의리를 강구하여 모든 구애됨과 견제되는 사사로움을 일체 쓸어 버리소서. 이것에 종사하여 게을리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면 천하에 어찌 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옛날 우리 조종께서는 없는 국가를 있게 하였고 창업하여 계통을 내렸는데 지금은 그 후대로서 있는 국가도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은 곤궁하고 법은 폐단이 되니, 그러고서도 어찌 계술(繼述)의 효성을 바라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주(周)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지만 그 천명은 새롭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소공(召公)도 역시 말하기를 ‘이것으로써 왕이 하늘에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기원하도록 이바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견딜 수 없는 구구한 뜻을 감히 이렇게 아뢰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시(庭試)에 들어와 제술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근일의 잘못된 풍조이지만, 아뢴 말이 염려하고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재삼 보며 깊이 감탄하였다. 제술에 응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3월 8일 신축

예조가, 좌의정 허적이 정릉(貞陵)을 봉심한 것으로써 서계하였다.
"능 위에는 예로부터 난간석(欄干石)과 무석(武石)이 없었고, 각릉도 이것을 설치하지 않은 곳이 더러 있으니, 대신과 의논하여 설치하지 마소서."

 

3월 9일 임인

김징(金澄)을 승지로, 조복양(趙復陽)을 형조 판서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삼았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온천에 거둥할 때 기일보다 앞서 떠나 삼전(三殿)의 행차가 이르기를 삼가 기다렸다가 영접례를 마치고 부모의 산소에 성묘하기를 청하고, 또 《심경》과 《어록해(語錄解)》의 발문을 지어올리라는 명을 사양하면서 응교 남이성(南二星)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상소를 보건대 매우 서운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내 마땅히 면유해야 되겠다. 상소 끝부분의 일은 실로 나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 유신이 잘못 진달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경은 지어 올리라는 명을 지나치게 사양하지 말라."
하고, 사간을 보내 전유하였다.

 

수찬 이규령(李奎齡) 등이 차자를 올려, 송준길을 만류하여 경연에 출입시켜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하여 보도하는 직임을 주라고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정말 옳다. 내 마땅히 성의와 예우를 극진히 하겠다."
하였다. 보덕 권격(權格) 등이 또 상소하여, 송준길을 만류하여 세자를 보도하게 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도 역시 그렇다. 마땅히 힘껏 만류하겠다."
하였다. 이때 상이 온양에 거둥하기로 이미 확정되었는데, 준길이 굳이 배행하려고 하면서 인하여 영영 떠나려 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청이 이와 같았다.

 

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홍중보(洪重普)를 판의금으로, 권격(權格)을 집의로, 조세환(趙世煥)을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김덕원(金德遠)을 지평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판으로, 조수익(趙壽益)을 공조 참판으로, 유철(兪撤)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3월 10일 계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을 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중전의 거둥에 가마를 사용하지 말기를 청하고, 또 4명의 공주가 일시에 배행하지 말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 판윤 민희가 대계로 인하여 감히 공무를 집행하지 못해 호적 사목(戶籍事目)을 이 때문에 반포하지 못하자, 모두 시일이 급박하여 일처리를 제대로 못할 것을 염려하였는데, 허적이 이 때문에 민희를 체직시키기를 청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위에서 간발한 사람을 아래에서 경솔하게 체직을 청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적 사목은 한성부 관원으로 하여금 대신을 찾아가 문의하여 완성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함경도(咸鏡道)에 정월 이후 두역(痘疫)으로 사망한 사람이 9백여 명이었다.

 

3월 11일 갑진

상이 사관을 보내어 좌참찬 송준길에게 면유할 뜻을 전하였다. 양심합에 나아가 준길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이 비록 소를 올리고 물러가기를 청하나 비단 나의 마음만 허전한 것이 아니다. 세자의 보익을 오로지 경에게 위임하였으므로 지금 면유하려고 한 것이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나이가 이미 70세에 가깝고 이처럼 질병이 있으니 여기에 머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오래 머물 뜻이 없으니 내 어찌 억지로 강요하겠는가. 다만 지금 사세가 이러하니 우선 머물러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렸다가 갈지 머물지를 천천히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준길이 《어록해(語錄解)》의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는 일을 사양하기를,
"비록 상의 하교가 있었으나 신이 문자에 있어서 날마다 매우 거칠어져 결코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남이성(南二星)에게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양 말고 지어 올려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 규정에 부제학으로 금부 당상을 겸임하게 되면 반드시 그 겸임의 체차를 허락하여 준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경연의 관원은 형관(刑官)을 겸임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인조 때 고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여러 차례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혹 금오 당상을 겸하게 되면 고례(古例)에 근거하여 체직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번에 빈객 조복양이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빈객은 보통 경연관과 다르고 형조 판서는 지의금(知義禁)과 비교가 안 되니, 신의 뜻으로는 조복양을 형조 판서에서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영릉(寧陵) 제관에 차출되었을 때 질병을 무릅쓰고 다녀왔습니다. 제관은 봉심하는 규정이 없으나 신은 제사를 지낸 뒤에 능을 봉심하였는데 석물(石物)들이 매우 염려되었습니다. 신이 보기로는 개수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일이 매우 중대하니 마땅히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풍수지리에 대해서 알지 못하나 산등성이에 올라 살펴보니 광명 쇄락(光明灑落)한 곳일 뿐만 아니라 선릉(先陵)과 함께 한 곳에 있으니 그 정리에 있어서도 역시 편안해 보였습니다. 혹 지관(地官) 무리들이 능소를 옮기자고 청하는 말이 있으면 이것은 실로 망령된 말이니, 일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또 산릉 제사 초략(山陵祭祀草略)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세종(世宗) 때의 상신 황희(黃喜)가 백관을 거느리고 3개월을 정청(廷請)한 것입니다. 옛 사람의 멀리 내다봄으로도 제사 의식이 융성하지 못함이 이러하며 그 중에도 가장 온당치 못한 것으로는 육촉(六燭)입니다. 【바로 이른바 용촉(龍燭)이다.】  그 만드는 방법을 보면 갈대 몇 개를 종이로 싸서 쇠기름과 들기름을 발랐는데 태우면 밝지도 않고 꺼지면 악취가 납니다. 사대부 집의 제사 때에도 촛불을 사용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유독 국가의 제사에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물은 비록 창졸간에 변경할 수 없더라도 제사 촛불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처음 사용한 것이 어느 때인지 조사해 내어 아뢰라고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지난해 온양 행차 때 충청도 내의 절행(節行)이 있는 사람들로서 전후 도신이 계문한 자를 속히 감정하여 포상할 것을 특별히 전교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충청도의 절행이 있는 사람들이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대신과 논의하여 행차가 있기 전에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지난 임진난 때에 장성(長城) 무인 조영규(趙英圭)가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있으면서 일 때문에 동래(東萊)에 갔었는데 마침 왜구가 상륙하였습니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에게 묻기를 ‘공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상현이 답하기를 ‘한 번 죽는 것 밖에 무슨 다른 계책이 있겠는가.’ 하고, 되묻기를 ‘그대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영규가 ‘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마땅히 공을 따라 죽겠다. 다만 노모(老母)가 임소(任所)에 있으니, 잠시 돌아가 영결(永訣)하고 피란할 곳을 지시해드리고 오겠다.’ 하자, 상현은 작별을 핑계로 살 길을 찾아 도망치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기약한 시간에 과연 찾아와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정로(廷老)는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고 하여 깊이 흙집에 거처하며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는데 지난번 어사가 정로의 효성을 계문하여 정려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영규는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장성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영규 역시 효행으로 소문이 났는데, 오랫동안 그 어버이와 떨어져 있을 때에 집에 편지를 보내지 못하여, 기르고 있던 개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육기(陸機)의 개 누렁이[黃耳]가 서신을 전한 일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자 개가 마치 그 뜻을 이해하는 모습을 하므로 인하여 편지를 매달아 보냈더니 며칠 안 되어 본가에 갔다 왔는데, 사람들이 효행에 감동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규는 평소의 효행이 이미 이러하고 난리에 임하여 절의를 수립한 바가 또 저와 같습니다. 이 사실은 상신 유성룡(柳成龍)의 문집 속에 있는데 이처럼 드러난 것을 어찌 민멸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그 사적을 조사해 내게 하였다. 준길이 또 고 참의 홍명형(洪命亨)이 강도(江都)에서 사절하였는데 유독 정포(旌褒)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언급하니, 상이 영규(英圭)의 일과 마찬가지로 품지(稟旨)하게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삼전(三殿)의 거동이 이미 결정되었고 또 질병 때문에 거둥하는 것이니 진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다만 들으니 예전에 앞에서 인도하는 포수가 기가 막혀 죽었다고 하는데, 생각건대 너무 빠르게 말을 몰아 그런 듯합니다. 임금이 거둥할 때에는 이와 같이 빨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 몇 해 사이에는 별로 죽는 일이 없었는데, 첫 해 거둥하던 때에 병이 나 죽은 포수가 있었으므로 나도 매우 놀랐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이 뒤로는 느리게 행진을 하시어 이런 근심이 없도록 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인동(仁同)의 길재(吉再), 밀양(密陽)의 김종직(金宗直), 김포(金浦)의 조헌(趙憲) 등의 서원과 남양(南陽)의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사우(祠宇)에 관한 일을 진달하고 모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처음에 민시중(閔蓍重)이 남양 현감으로 있을 때 사우를 창건하고 제갈무후와 호 문정공(胡文定公)을 함께 배향하였으니, 대체로 주자(朱子)가 와룡강(臥龍岡)에 사우를 세운 뜻을 취한 것이었으며, 그곳 부사 윤계(尹棨)가 정축년의 난리에 사절하였다고 배향하여 사액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 인동과 밀양·김포의 서원들도 역시 일찍이 사액을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이때 일체로 시행하였다.

 

사신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올 때면 나라에서 으레 은자(銀子)와 비단을 조정에 보내면서 상사(賞賜)라고 하였다. 이때 동지사(冬至使)가 받아온 은자가 1천 냥이었는데, 상이 명선 공주(明善公主)에게 하사하니 주상의 맏딸이었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저들 나라에서 의례상 보내는 것을 호조에 내려 저들을 접대할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다른 곳에 썼다고 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공적으로 얻은 것인데 상께서 사사로이 써서는 아니 되니, 전처럼 호조에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 때 서필원을 삭출하라는 논핵이 멈추지 않고 있었는데, 장령 조세환(趙世煥), 지평 민종도(閔宗道)가 이론을 세웠기 때문에 체직되었다.

 

3월 12일 을사

신명규(申命圭)를 장령으로,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이정영(李正英)을 호조 참판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우참찬으로, 이단상(李端相)을 부제학으로, 홍억(洪億)을 지평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교리로, 윤심(尹深)을 부수찬으로, 김상(金鋿)을 헌납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심재(沈梓)가, 호군 신석번(申碩番)의 상소를 중간에서 유실한 일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간 사람을 경상(境上)에서 효수(梟首)하기를 청하였다. 정원이 그것을 전도되었다고 하여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관에 새로 추천된 조근(趙根)이 병을 핑계로 강에 응하지 않자, 대신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놀랍다. 먼저 파직한 후 추고하라."
하였다. 조근이 남의 말이 있다는 이유로 끝내 강론에 나아가지 않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는데, 약방이 입진하였다.

 

3월 13일 병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통제사 이도빈(李道彬)을 인견하고 서로(西路)의 군사적 준비 상황을 물었다. 도빈이 평안 병사에서 새로 갈려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에 들어갔다.

 

3월 14일 정미

예조가 아뢰기를,
"성균관이 종향하고 있는 열위의 명호(名號)와 위차(位次)에 있어서 의심스러운 점을 지방에 있는 유현들에게 문의하라는 분부가 일찍이 있었습니다. 판부사 송시열은 말하기를 ‘신이 고루한 견해로써 대략 표시를 해 올림으로써 해조의 절충과 취사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신이 일찍이 주자(朱子)의 아직은 후일을 기다리자는 뜻으로 계성묘에 관하여 수의할 때 올렸으므로 지금 감히 다시 논단하지는 않겠습니다.’고 했으며, 좌참찬 송준길은 말하기를 ‘이 일은 사안이 중대하므로 신의 좁은 견문으로는 감히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홍문관과 성균관의 신하들이 고증한 것을 보건대 자세하고 완비되어 있으며, 송시열이 논한 바도 역시 모두 근거가 있으니, 참고 비교하여 헤아려 처리한다면 아마 적절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충청도의 충효와 절의로 전후 보고된 자가 95명인데, 대신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각각 실적의 등급에 따라 별도의 단자에 써서 들입니다. 그 가운데 다시 조사해야 할 자와 드러난 행적이 없어서 등급을 매기지 못한 자는 아울러 끝부분에 기록하여 올리니, 계하한 뒤에 이것으로써 분부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장령 신명규(申命圭)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이 어리석은 말을 대략 진달드렸는데, 성상의 비답에서 목내선의 일을 가지고 의아하게 여기시고 심지어는 그 의도가 괴이하다고 분부하셨으니, 신은 매우 송구스럽고 두렵습니다. 내선은 일찍이 국가에 장례가 있을 때 다른 사람과 창기를 다툰 일이 있어서 이 때문에 폐기된 지 지금까지 10여 년입니다. 대체로 그의 사람됨은 온 여론이 괴이하고 악독하다 하며 그의 행동은 또 이와 같으니, 이런 사람을 좌우에 둘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 말을 들은 이래로 항상 놀랍게 여겨 왔는데, 마침 저번에 그가 은대에 승진하여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대략 마음에 있던 것을 상소 끝부분에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끝까지 다하여 그의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공의에 버림받았으므로 근밀한 자리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범범하게 말했던 것이니, 성명께서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언을 명백하게 하지 못하여 스스로 군부에게 의심을 받았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전라도 부안현(扶安縣)의 전선이 합동 훈련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모든 배가 패몰되었는데, 사망자가 80여 명이었다. 우수사가 보고하자, 상이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했다. 현감 오두헌(吳斗憲)은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려졌다.

 

3월 15일 무신

상이 왕대비를 받들고 온양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중궁이 네 공주를 거느리고 배행하였다.
도총관 김우명·민응건, 부총관 영은군(靈恩君) 이함(李涵)·봉산군(蓬山君) 이형신(李炯信)·정영·이지온, 【형조 판서이다.】  병조 판서 홍중보, 【판의금과 내의원 제조를 겸하였다.】  참지 김우형, 별운검 회원군(檜原君) 이륜(李倫),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 예조 참판 남용익, 【동지의금을 겸하였다.】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 도승지 장선징, 【내의원 부제조를 겸하였다.】  우승지 이익, 우부승지 홍만용, 동부승지 김징, 주서 강석창, 가주서 민암, 사관 이인환·신익상,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내의원 도제조를 겸하였다.】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이조 판서 이경휘, 호조 판서 민정중, 【정리사를 겸하였다.】  집의 권격, 장령 홍주국, 대사간 강백년, 정언 신정, 부교리 이민서, 부수찬 김만균, 이조 좌랑 김만중, 의관 이동형(李東馨) 등 8명, 그리고 위장, 선전관, 병조·도총부·호조·예조·형조의 낭청, 감찰, 금부 도사, 승문원·통례원·상서원·사옹원·상의원·사복시·관상감·양의사의 관원 한 명 또는 두세 명이 모두 시위하며 수레를 따랐다.
어영 대장 유혁연은 마보군(馬步軍) 1천 7백 45명을 거느리고, 훈련 천총 성익 등은 협연군(挾輦軍) 7백 명을 거느리고, 마병별장 이간은 마병 3백 명, 별무사 2명, 잡색군 1백 44명, 복직군(卜直軍) 1백 47명을 거느리고, 금군 별장 구문치 등은 금군 3백 50명, 잡색군 61명, 복직군 67명을 거느리고 전후에서 호위하였다. 도성에 남아있는 대신으로 영부사 이경석, 판부사 정치화, 훈련 대장 이완, 수궁 대장 예조 판서 김좌명이 종사관 윤심(尹深)·이세화(李世華)를 거느리고서 숙직하고, 호위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지난해의 전례대로 하였다.

 

거가(車駕)가 출발하려 할 때 승지, 사관, 시위 장사가 인화문(仁和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이 시위하는 모든 신하에게 만안문(萬安門) 밖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 상이 홍의(紅衣)를 입고 궁전(弓箭)을 차고 깃털을 꽂고 수레를 타고서 만안문을 나왔다. 인정문(仁政門) 밖에서 말을 타고 숭례문(崇禮門)을 지나 청파(靑坡)에서부터는 가교(駕轎)를 타고 진두(津頭)에 이르러 언덕 위에 가교를 멈추었다. 금군(禁軍)의 말 달리는 것을 관람하고 배 있는 곳에 도착하니, 군기시가 승선포(乘船砲)를 발사하였다. 상이 정원에 묻기를,
"자성(慈聖)의 가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발포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정원이 해관을 추고하라고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의 상황으로는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신을 비인(匪人)이라 여기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하시니 신은 응당 감격하여 명을 받아야겠습니다. 이단상(李端相)과 박세채(朴世采)는 모두 학문하는 사람으로 전부터 불러오려고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이들입니다. 이단상은 지금 올라와서 서울에 있고 박세채도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찬선(贊善)이나 진선(進善)을 겸하게 하여 서연(書筵)에 시강하게 하소서. 혹 이렇게 되지 않으면 전교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특별히 시강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두 사람을 서연에 참여하게 할 것을 정원에 남아 있는 승지에게 분부하였다. 그 후 단상과 세채는 모두 질병을 이유로 소명에 나아오지 않았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거가가 온양에 도착하면 도내에 학문이 있는 사람을 즉시 초빙하여 위로하고 타일러 올려보내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하소서.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승지로 하여금 때맞추어 품지해서 거행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잘 알아서 거행하라."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상신이 경연에서 한 말이 있다고 하는데, 신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안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신이 지금까지 머물러 있는 것은 희망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흑 성명(成命)이 있다면 신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이는 좌상 허적이 송준길을 수이사(守貳師)로 삼으라고 청한 것 때문이었다. 자전의 거가가 도착하자 여러 신하가 모두 물러났다. 상이 막차(幕次)를 나와 공손히 맞이하였다. 상이 준길을 다시 입시하도록 명했다. 상이 준길에게 이르기를,
"오늘부터 성중이 비게 되고 세자를 보필하는 일을 오로지 경에게 위임하였다. 강원(講院)의 관원이 모두 나이 젊으니 모든 일을 경에게 문의하여 행하게 하라."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성교가 지성스럽고 간절하니, 신이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이 거둥이 만부득이한 것이므로 감히 중지하기를 청하지는 못하였으나, 가시는 노정에 폐단이 없다는 말은 망령된 말입니다. 상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후에야 백성이 고달프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지평 홍억(洪億)은 배종(陪從)을 회피하여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지평 김덕원(金德遠)은 어가 수행을 회피하여 탄핵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삼전(三殿)이 저녁 때 과천현(果川縣)에 머물렀다.

 

중사(中使)를 보내 대왕 대비께 문안하였다.

 

왕세자가 필선 경최(慶㝡)를 보내어 삼전께 문안하였다.

 

제천현(堤川縣)에 본월 1일에 눈이 내렸는데, 정강이가 묻힐 만큼 쌓였다.

 

3월 16일 기유

상이 저녁 때 진위현(振威縣)에 머물렀다. 거가가 노상에서 빨리 달리는 바람에 호위하던 군사가 넘어지고 의장이 흐트러졌는데, 승지가 천천히 행차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권격(權格),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아뢰기를,
"전 지평 홍억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시고, 김덕원은 파직하시고, 해당 승지와 주서는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홍억은 배종을 피하려 하였고 김덕원은 거가 수행을 회피하였으며, 승지와 주서는 대계를 바르게 써서 입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이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3월 17일 경술

상이 저녁에 온천 행궁에서 머물었다.

 

대가가 진위현으로부터 출발하려고 하는데,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부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청대하여 수레 앞에서 아뢰기를,
"어제 길이 멀고 날씨는 또 비가 왔습니다. 형세상 서서히 행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너무 빠르게 수레를 몰았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의장물들이 뒤집히고 배종하는 자들이 차례를 잃었으며, 군병들은 길 곁에 쓰러지는 자가 또한 많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군이 거둥하는 위의겠습니까. 그리고 읍내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보고 듣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수레를 너무 빠르게 몰았으니 더욱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가 그치지 않아서 배종하는 사람들이 젖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조금 몰게 했던 것이다." 하였다.

 

상이 모산(茅山)의 주정소에 멈추었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대가가 막차에 들어간 직후 신 허적이 후반(後班)에 있었는데, 말미에서 발포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더니 어영군 한 명이 밭에 있는 새를 잡으려고 발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무지한 소치이나 사건이 중대합니다. 평소에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를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장 유혁연(柳赫然)을 추고하고 그 부대의 장관을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은 뒤에 있었으므로 어쩌면 모를 수도 있겠지마는 장관이 어찌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대장은 추고하고 초관은 조사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정태화 등이 물러갔다가 다시 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 어영군 교련관 최영달(崔英達)의 말을 듣고 대장과 초관의 죄를 청하였는데, 교련관 한여신(韓汝信)이 대장의 뜻으로 와서 말하기를 ‘대장이 후진(後陣)에 있으면서 기러기 떼가 밭에 가득한 것을 보고 앞서 인도하는 포수(砲手)를 뒤처지게 하여 시험삼아 쏘게 한 것인데, 최영달이 대장에게 죄책이 미치는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거짓으로 대답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죄는 대장에게 있고 초관은 관계가 없으니 조사하여 다스리라는 명은 마땅히 거두어야 할 것 같으며, 대장의 죄는 상께서 재량하여 조처하소서."
하니, 상이 명하여 대신과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들어가기에 앞서 허적이 도승지 장선징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여러 의논이 어떻던가?"
하니, 선징이 대답하기를,
"사건이 극히 경악스러워 중론이 매우 준엄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정태화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들어갔다. 두 정승이 계사의 뜻으로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항오의 군졸이 아니라서 분간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우선 추고하라."
하니, 태화와 허적이 모두 아뢰기를,
"이것이 비록 경망한 행동에서 나왔으나 사건이 중대합니다. 외부의 여론이 모두 추고로는 가볍다고 합니다만, 거둥이 임박하였으니 온양의 행궁(行宮)에 도착한 후 상량하여 죄를 논의함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부교리 이민서가 청대하려고 하니, 부수찬 김만균이 거가가 곧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청대할 수 없다고 만류하였다. 동부승지 김징이 민서를 오라고 손짓하며 말하기를,
"속히 청대하시오."
하니, 반열을 헤치고 곧장 들어왔다. 허적이 반열에 있다가 노기띤 얼굴로 말하기를,
"혁연(赫然)은 도망칠 사람이 아닌데, 어찌 이처럼 급하게 구는가."
하였다. 상이 이때 이미 가마에 올랐다. 김징이 나아가 거가 앞에서 아뢰기를,
"옥당이 청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긴급한 일이 아니니 온천에 도착한 후 입시하라."
하자, 김징이 그제야 물러났다. 대가가 온천 행궁에 도착하자 옥당이 다시 청대하니, 상이 이르기를,
"몹시 피곤하다. 생각을 글로 적어서 들이라."
하였다.

 

3월 18일 신해

상이 온양 행궁에 있었다. 목욕하고서 약방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도 입시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유혁연이 망령되게 저지른 일로 인하여 물의가 비등하고 대계가 이미 발했는데, 간원은 잡아다 신문할 것을 논계했습니다. 신이 허적과 상의하였는데, 중한 죄를 주기도 매우 난처하고,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처치할 수도 없으니 참작해서 처리하여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관이 비록 일의 체모로 발론하였으나 잡아다 신문할 만한 정상은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물어야 될 정상은 없으나 잡아다 신문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좌상 허적의 말도 역시 같았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군율(軍律)은 지엄하여 참(斬)하는 죄가 있고 그 다음은 곤장을 치는 것입니다. 혁연은 별장에 비할 수 없으니 곤장을 친 후에 또 군병을 거느리게 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체면에 손상이 됩니다."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외부의 의논이 모두 만일 그때 상께서 장전(帳殿)에서 나와 곤장을 치는 데 직접 임했다면 군율의 체면을 세웠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좋았겠지만, 지금 와서 곤장을 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잡아다 신문한 후에 예사로이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상께서는 어떠한 죄로 단정하고자 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파직시키고자 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파직은 너무 가벼우니 삭직을 하고 놓아주어 백의 종군(白衣從軍)케 하고, 도제조 및 중군으로 하여금 군병을 영솔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곳에서 나문하려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판의금 으로 하여금 개좌(開坐)하여 잡아다가 문초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국가의 체모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부교리 이민서와 부수찬 김만균이 뒤따라 입시하였다. 민서가 유혁연의 일로 진달하기를,
"일이 중대하니 만일 예사롭게 처리한다면 국가의 체모와 군율에 크게 손상됩니다."
하며, 곤장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력히 말하였으나, 상은 이미 대신의 말을 옳게 여겨 끝내 따르지 않았다.
혁연의 죄가 비록 망령된 짓에서 나왔으나 범한 죄가 극중하니 비록 군율에 의하여 참형에 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곤장으로 다스려 군병에 충당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닌데, 대신은 인정에 구애되고 주상은 사체를 가볍게 여겨 파직으로 논죄하려다가 겨우 삭직하여 종군(從軍)케 하였고 곧바로 서용하여 군병을 영솔하게 하니,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상이 장선징에게 이르기를,
"판부사 송시열에게 와서 만나자는 뜻을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니, 선징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진달한, 학문하는 사람을 초빙하여 올라 오게 하라는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지로 불러 오게 하라."
하였다. 이민서 등이 청하기를,
"내려갔던 차사원들을 인견하고 폐단을 물으소서."
하니, 허적이 상의 안후(眼候)가 불편하다며 못하게 하였다. 상이 연배군(輦陪軍)을 파하여 돌려보내고 어가가 돌아갈 때 와서 대기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청하기를,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미(大同米) 여분 1천여 석을 가을에 작목(作木)하기를 자원하니,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본도가, 이번 거둥하는 때를 당하여 양전(量田) 및 안민(安民)과 공진(貢津)에 창고 축조하는 일을 일시에 함께 거행하니, 백성의 힘이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공진의 창고는 우선 역사를 멈추었다가 추수가 끝난 후 다시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어영 대장 유혁연을 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고, 어영 중군에게 그 임무를 대신 살피게 한 다음 도제조로 하여금 검칙하게 하였다.

 

집의 권격(權格), 장령 홍주국(洪柱國)이, 겨를이 없던 즈음이라 곡절을 상세히 알지 못하여 즉시 대장을 청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혐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했다. 권격 등이 이어서 아뢰기를,
"혁연이 삼갈 도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장난질을 하였으니, 군율이 이처럼 엄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율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행 대사간 강백년, 정언 신정 등도 역시 나문 정죄하라고 청하니, 상이 이미 잡아다 신문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간원도 법대로 시행하라 간쟁하고 양사가 누차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삼전(三殿)이 함께 온천에 온 것은 어쩔 수 없어서이다. 내 어찌 즐거워하는 일이겠는가. 더구나 도내에 양전하는 일과 두 곳에 창고를 설치하는 일을 일시에 벌여 놓은 데다가 행주(行厨)에 대접하는 수고까지 겹쳤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잠시도 편치 못하니, 민심을 위로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하고, 충청 감사에게 하유하기를,
"백성을 병되게 하는 모든 것을 자세히 탐문해서 조목별로 계문하여, 변통하여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을 판윤으로, 윤문거(尹文擧)를 좌부빈객으로, 송규렴(宋奎濂)·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특별히 윤문거(尹文擧)·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이상(李翔)·윤원거(尹元擧)·윤증(尹拯)을 불렀으나, 모두 나오지 않았다.

 

전라도 순창군(淳昌郡)에 본월 13일 눈이 내렸다.

 

3월 19일 임자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균전사(均田使)        민유중을 인견하여 양전하는 일을 하문하였는데, 영상과 좌상도 입시하였다. 민유중의 말로 청풍 부사(淸風府使)        임유후(任有後)의 자급을 올려주었는데, 그가 관직 생활을 깨끗하게 하였고 또 지난해에 진휼(賑恤)을 잘 하였기 때문이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유혁연이 나문을 당하자 군교(軍校)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혁연이 평소 사졸들에게 은혜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군율을 따지지 않고 먼저 삭작(削爵)의 명을 내렸으므로 대관(臺官)이 논집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엄한 음성으로 이르기를,
"이것은 죽을 죄가 아닌데 삭작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한가."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판부(判付)한 내용 중에 백의 종군하라는 명은 없고 다만 삭작하여 놓아주라고만 하셨으니, 혁연에게도 불편하고 일에 있어서도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미처 논정(論定)하지 못하였으므로 판부한 내용 중에 언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아뢰기를,
"판부사        송시열이 진달한, 직산(稷山) 사람 황박(黃珀)이 사절(死節)한 일에 대해 대가가 본현에 도착하여 그 실상을 알아보고 나서 품처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감히 품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직산을 거치지 않아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본도 감사에게 탐문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후에 예조가 증직을 계청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유혁연을 삭작하는 일은 비록 대계로 인하여 거행하지 못하더라도 백의 종군하라는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충청도 목천(木川)·전의(全義)에 본월 12일 눈이 내렸다. 제천(堤川)은 10일 이후로 광풍이 연일 불어 나무가 꺾이고 지붕이 날아갔으며, 12일은 진눈깨비가 내렸는데 다음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백기(白氣)는 하늘에 닿았으며 바람 부는 날 추위는 엄동(嚴冬)과 같았다. 임천(林川)은 15일과 16일에 지진이 있었다.

 

3월 20일 계축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장령 홍주국이, 동료들이 또 민희(閔熙)의 가자를 환수하라는 일로 발론하였는데 전일에 이미 이 일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지금 와서 따라 참여하기가 어렵다며 인피하니,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집의 권격이 유혁연의 일을 연달아 아뢰고, 또 전 판윤 민희의 가자를 환수하라고 청하기를,
"당초에 승급하여 발탁한 것이 오로지 호적의 감정(勘定)을 위함이었다면 지금 이미 체직한 후에 주었던 가자를 그대로 줄 까닭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고, 또 논박하기를,
"대신이 민희에게 내린 판윤직을 체차하라고 청할 때 행 도승지 장선징은 간발(簡拔)한 것이라고 핑계하며 대궐 안을 시끄럽게 하였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단지 장선징의 추고만 허락하였다.

 

상이, 집의 권격이 사람의 취사를 논하는 데 있어서 마음 씀씀이가 정직하지 못하여 대각에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특별히 체직시키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조정에 대각을 둔 것이 어찌 그 사사로움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전 집의 권격이 민희의 가자를 환수하라고 논한 일은 그 뜻이 진실로 매우 한심하다. 조정에서 승급 발탁한 후에는, 비록 사고로 인하여 소를 올려 체직을 청한다 하더라도 다만 그 직책만 교체하고 새로 가자한 것은 그대로 두는 것이 옛날부터의 일반적인 관례이다. 지난 일은 제쳐놓고 단지 이단상의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교활한 태도와 간휼한 뜻은 이보다 심할 수가 없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뒷날을 징계할 수 없으니, 전 집의 권격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니, 정원이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여 네 차례나 아뢰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민희에 대한 논박을 세 번 멈추고 세 번 발하였으니, 행위가 너무 심하여 주상의 의심을 당한 것은 당연하다. 과연 민희가 정경(正卿)의 반열에 합당하지 않다면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논하면 될 것인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구차한 말로 지리하게 행동하였으니 정직하지 못한 태도가 현저하였다. 이러고도 어찌 상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잘못된 일로 대각을 이처럼 멸시하니 군주의 덕에 누가 됨도 또한 적지 않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62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민희에 대한 논박을 세 번 멈추고 세 번 발하였으니, 행위가 너무 심하여 주상의 의심을 당한 것은 당연하다. 과연 민희가 정경(正卿)의 반열에 합당하지 않다면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논하면 될 것인데, 그렇게는 하지 않고 구차한 말로 지리하게 행동하였으니 정직하지 못한 태도가 현저하였다. 이러고도 어찌 상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잘못된 일로 대각을 이처럼 멸시하니 군주의 덕에 누가 됨도 또한 적지 않다.

 

3월 21일 갑인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옥당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연일 목욕으로 피곤하고 번열이 있으니 생각한 바를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교리 이민서 등이 물러나와 재이의 참상과 수성의 도리를 차례로 말하고, 또 언관을 죄준 잘못을 말하였다. 또 안흥(安興)에 창고 짓는 일을 멈출 것과 행차시 군병의 감축을 말하고, 아울러 도내 감옥의 죄수를 소결할 일들을 언급하니, 상이 이렇게 답하였다.
"아뢴 바는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대신과 논의하여 처리하겠다."

 

장령 홍주국이 인피하기를,
"일을 논의하던 동료가 파직 추고의 명까지 받았으니, 신의 직위가 언책(言責)에 있어 마땅히 쟁집하는 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환수하라는 이 일이 서울에서 제좌(齊坐)하는 날 처음 발론되었을 때 동료의 의논이 모두 동의하였으나 유독 신만은 혐의가 있었습니다. 전계(傳啓)한 지금은 행조(行朝)에 다른 요원은 없고 신 혼자만 있으니, 감히 연계할 수도 없는 데다 또한 계문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결코 이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간원이 처치하여 체직하였다.

 

행 대사간 강백년이 민희와는 상피가 있으므로 권격의 파직 추고를 환수하는 논의에 가부를 말하기 어려운 형세라며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신정이, 권격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계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정원의 4차 계문의 비답을 미시 초에 내렸는데 해가 저물녘에야 감히 전지(傳旨)를 받들 수 없다고 하며 꾸물꾸물 입계하여 마치 무엇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였으니, 조정의 체통이 비록 해이해졌다고 하나 어찌 무너지는 대로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겠는가. 해당 승지를 무겁게 추고하여 뒷날의 경종을 삼으라."

 

원양도(原襄道)의 춘천(春川)·금화(金化)·안협(安峽)·평창(平昌)에 본월 1일에 눈이 내렸다. 횡성(橫城)에는 12일에 눈이 내려 13일에 멈추었으며, 평해(平海)에는 13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

 

3월 22일 을묘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바람이 매우 사나워 노숙하는 군병이 염려된다. 해조로 하여금 가마니를 넉넉히 지급하게 하라."
하였는데, 나누어준 것이 균등하지 못하다고 차사원 홍산 현감(鴻山縣監) 조정우(曺挺宇)를 병조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김득신(金得臣)을 장령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이민채(李敏采)를 사서로 삼았다. 이조가, 조세환(趙世煥)·조원기(趙遠期)·민종도(閔宗道)를 순천 현감(順天縣監)에 갖추어 의망하였다. 세 사람 모두 서필원(徐必遠)을 삭출하는 논의에 이의를 세운 자들이었으므로 상이 특별히 정관(政官)을 추고하라 명하고, 다시 의망하게 하였다.

 

상이, 비바람이 매우 사나워 야차(野次)의 영어(囹圄)에 있는 자가 가긍하다며 해조로 하여금 유혁연을 우선 방면하라고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계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앞질러 유혁연을 보석함은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은 너희가 알 바 아니다."
하였다. 이때 도승지 장선징은 약방에 있었고 우승지 이익은 정청에 있었고 우부승지 홍만용은 술에 취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였다. 비록 정원의 뜻으로 진달한다 하였으나 동부승지 김징이 혼자 계문한 것이었는데, 상이, 계사가 김징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답이 이러하였다.

 

정언 신정이 인피하기를,
"그저께 하교에 집의 권격을 처음에는 체차하라고 명하였고 이어서 파직 추고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갑작스러워 미처 살피지 못하여 아울러 환수하라고 청하지 못함으로써 정원으로 하여금 전지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사에서 또한 그 후임을 선출하니 물의가 모두 잘못이라고 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해당 승지를 단지 추고만 하게 한 것은, 대체로 대계가 이미 전해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대계를 보니 체차에 관하여 거론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대계를 빙자하여 명령을 폐각했으니, 이것이 어찌 인신의 도리이겠는가.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뒷날을 징계할 수 없으니 해당 승지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대계를 잘못 인식한 죄는 정원에 있던 동료 모두가 면할 수 없는 것인데, 파직 추고하라는 명이 해당 승지에게만 미쳤으니, 이는 매우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파직 추고는 바로 태만하여 일을 거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행해야 하는 벌이다. 경이 환수하라고 계청한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에 이달 16일 지진이 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다음달 4월 1일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예전부터 구식관(救食官)은 으레 옥색 단령(團領)에 오모(烏帽)·각대(角帶)의 차림으로 나아가 참여하였습니다. 지금은 행궁에 수레가 머물고 있어 시종신들이 모두 융복(戎服)을 입고 있으니, 다시 다른 복장으로 바꿔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아가 참여할 승지의 경우는 임시로 당하관의 융복을 입어 복색을 조금 바꾸었다는 뜻을 나타내되 서울에서도 일체로 거행하게 하소서. 장소는 행궁의 중문 밖 뜰 가운데에다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3월 23일 병진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상이 두통의 증후가 있어서 약방이 약을 처방하여 들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정언 신정을 출사시키라고 청하니, 신정이 다시 옥당의 처치가 구차하다며 인피하였다.

 

3월 24일 정사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부교리 이민서(李敏叙), 부수찬 김만균(金萬均)이 감히 간관을 다시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소를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처치하여 신정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5일 무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민점(閔點)을 승지로, 강백년(姜柏年)을 공조 참판으로, 홍주국(洪柱國)을 교리로 삼았다.

 

경상도 대구(大丘) 지방에 본월 7일에 해서부(解西部) 다리동(多里洞)의 산허리가 터져 벌어졌는데 길이가 1백 87보(步)였고 넓이가 15보였으며 깊이는 약 3, 4장(丈)이었다. 산이 터질 때 잠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있었다. 본부 해북촌(解北村)에 사는 김승립(金承立)의 집에서 암탉이 변하여 수탉이 되었다.

 

3월 26일 기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이훤(李藼)을 정언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보덕으로 삼았다.

 

3월 27일 경신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지평 신정이 권격과 김징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여러 날 잇따라 연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 이유가 김징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여러 날 잇따라 계문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병조 좌랑 서문상(徐文尙)이 도성(都城) 각문의 수직을 순검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내사(內司)에 있는 성기(省記)을 가져오라고 하면서 순라군에게 잡히는 것을 염려하여 포도 군관을 불러 대동하고 있는 군사 한 명을 데리고 함께 가자고 하였는데, 군관이 가려 하지 않고 또 나쁜 말을 하였다. 문상이 그 불공함에 화가 나서 포도 군관을 곤장을 치자 군관은 달려가 대장 이완(李浣)에게 고하였다. 이완이 크게 화를 내며 나졸 수십 명을 동원하여 문상이 거느린 서리·사령·역졸을 포위하여 모조리 잡아가고 성기 문서도 모두 빼앗아 가버리니, 문상이 도보로 겨우 본조에 돌아 왔다. 도성에 머물러 있던 병조 당상이 사유를 갖추어 치보하니 병조 판서 홍중보가, 대장을 추고하고 포도 군관에 대해서는 유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죄주라고 계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은 교장(驕將)으로서 일들이 대개 이러하였는데 물의가 떠들썩하였다. 이완은 추고당한 것을 노여워하여 문상을 모해하는 것에 힘을 다하니,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3월 28일 신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3월 29일 임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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