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사
좌의정 허적, 예조 판서 김좌명, 관상감 제조 오정일을 정릉에 보내어 사초를 갈아 입혔다.
부호군 윤문거가 병으로 사양하고 오지 않자, 우부빈객을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5월 2일 갑오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홍만형(洪萬衡)을 부교리로, 신정(申晸)을 정언으로 삼고, 정두경(鄭斗卿)을 특별히 제수하여 홍문관 제학으로 삼고 그대로 예조 참판에 제배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여 단오날에 성묘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러이 답하여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5월 4일 병신
대구부의 사노 두어미(斗於未)의 처가 세 쌍둥이를 낳았다.
5월 5일 정유
영의정 정태화가 휴가를 얻어 성묘하기를 청하니, 상이 휴가를 주고 말과 제수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상소하여 사양하고 또 광주(廣州)를 들러서 그의 선대 묘산을 성묘하고자 청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 하고 소원대로 갔다오도록 허락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휴가를 받아 성묘하기를 청하자, 상이 다시 후일을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5월 6일 무술
대사헌 박장원과 집의 박증휘가,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상직(李尙稷)과 전 군수 이극화(李克和)가 제도가 정해진 뒤에 혼례를 행하여 국법을 어기고 예속을 무너뜨렸다고 논하며 모두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이하(李夏)가 인피했는데, 그 대략에,
"무과 초시의 시관들이 대각의 계사가 무겁게 일어났기 때문에 모두 파직되는 벌을 받았었습니다. 근래 육경의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중신 세 명이 특별 서용되었지만, 그 나머지 시관들은 아직도 파직자의 명부 안에 있습니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공조 판서 오정일(吳挺一), 판윤 조형(趙珩)은 일의 체모가 미안한 것은 생각지 않고 한결같이 조정의 지시에만 따르며 태연하게 공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논핵하여 체직하고자 했는데 장관이 어렵게 여겼습니다. 신이 가볍게 보인 소치이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했다.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인피했는데, 그 대략에,
"동료가 새로운 논계를 발론하였는데, 신의 뜻으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점이 있었습니다. 당초에 별도로 서용한 것은 특별한 은전에서 나온 것으로 두세 번이나 상소를 진달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이미 자세하게 말했으니, 신은 그것이 염우에 손상이 되는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소견이 이미 달랐기 때문에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동료가 벌써 경시를 당했다고 인피했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했다.
정언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전적으로 사양하지 않았다면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누차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억지로 직무에 종사했으니 일체로 아울러 논하는 것은 자못 분별이 부족한 듯합니다. 혼동하여 어렵게 여긴 것도 역시 구차한 듯합니다. 이하와 강백년을 체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민점(閔點)과 김징(金澄)을 승지로, 김만균(金萬均)을 사간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교리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참의로, 홍만형(洪萬衡)을 헌납으로 삼고, 정석(鄭晳)을 승진시켜 동래 부사로 삼았다.
5월 7일 기해
경주·안동·인동·대구·의성·고령·신령·예안 등 8읍에 4월 25일 서리가 내렸다.
5월 9일 신축
지평 김덕원·조성보, 집의 박증휘, 정언 신정을 체직시켰다. 처음에 덕원과 성보가 모두 경시관(京試官)으로 있을 때 과장의 가건물에 불이 난 과실로서 피혐하자, 증휘가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다. 그러자 덕원 등이 뜻밖에 출사를 청하여 물의가 일어났다는 이유로 다시 피혐하니, 증휘가 처치를 잘못하였다고 인피하였다. 신정이 처치하여 덕원·성보·증휘를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했다가, 곧바로 헌관의 출사를 청하여 물의에 비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피혐하였다. 이에 덕원 등이 신정의 피혐하는 말로 인하여 또 피혐하니,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5월 11일 계묘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를 집의로, 윤경교(尹敬敎)·이훤(李藼)을 정언으로, 이후(李煦)·홍억(洪億)을 지평으로,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이익상(李翊相)을 이조 정랑으로, 이간(李旰)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이번 달 6일에는 파주(坡州)에, 3일에는 은산(殷山)과 순천(順川)에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비둘기알만했다.
5월 12일 갑진
좌의정 허적이 상소를 올려 휴가를 얻어 성묘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했다. 이어 휴가와 말과 제수를 주라고 명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청했다.
5월 13일 을사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홍석귀(洪錫龜)가 상언하여 자기 아비의 원통함을 씻어 달라고 청했는데, 상이 그 사건을 조사하여 신원해 주도록 명했다.
처음에 석귀의 아비 홍준(洪浚)이 혼조 때의 이조 정랑 한옥(韓玉)의 사위였기 때문에 홍준을 비방하는 자가 말하기를 ‘홍준이 진사로서 폐모(廢母)를 주장하는 흉소를 올렸는데 그의 아비 봉선(奉先)이 그 상소를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석귀의 아우 성귀(聖龜)가 담양 부사가 되었을 때 선대의 허물로 인하여 탄핵을 입었다. 석귀가 온천에 행행했을 때 거가 앞에서 상언하여, 해조로 하여금 공사의 문적을 조사해서 자기 아비의 억울함을 풀어 주도록 청했는데, 일을 예조에 내렸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의금부로 하여금 문적을 상고하여 품처하도록 청했는데, 금부가 회계하기를,
"본부에 소장하고 있는 등록과 책자 안에 홍준의 이름이라곤 단지 정사년 교방(交榜)의 소에만 나와 있고 다른 곳에는 나온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조정이 근거할 수 있는 것은 문적뿐입니다. 금부가 소장하고 있는 등록이 이와 같을 뿐이니, 마땅히 신원을 허락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를 인견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 평안 감사 민유중도 입시하라고 명했다. 예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조영규(趙英圭)를 표창하라고 일찍이 품정한 분부가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는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의 문집 안에 나온 것이니, 사실과 어긋나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응교 남이성이 아뢰기를,
"영규가 절개있게 죽은 것은 사람들의 이목에 혁혁하게 전해 오니, 정표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전라도 어사의 별단 서계 안에 ‘영규의 아들 정로(廷老)의 효행과 실적을 조사했더니, 장성(長城)의 노인들이 인하여 영규가 사절한 상황을 언급했는데, 연신이 아뢴 바와 모든 것이 똑같았다.’고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표하라."
하였다. 상이 충청 감사에게 균전사(均田使)를 겸하고 조세환(趙世煥)을 종사관으로 삼아서 문서를 완전히 끝내라고 명했다. 균전사 민정중이 일이 끝나기 전에 먼저 체직되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인하여 대신과 의논하여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상이 송준길에게 나아오라고 하여, 《심경》의 강이 끝날 때까지만 우선 머물라고 유시하고는, 또 하교하기를,
"경이 비록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세자가 입학할 때 올라오지 않아서는 안 되니, 기한을 어기지 말라."
하고, 매우 간절하게 분부하자, 이성이 아뢰기를,
"준길이 만약 남아 있는다면 앞으로의 공부가 어찌 《심경》 몇 장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도록 허락하시고 준길도 물러날 뜻을 지니고서, 단지 《심경》의 강의만 끝내는 것으로 책임을 떼울 소지로 삼으려고 하니, 위아래가 서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당의 말이 옳다. 권유하여 만류할 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을 큰 예를 거행할 때 반드시 다시 보기 위하여 우선 오늘의 청을 들어 주어 경으로 하여금 지극한 정을 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가을에 만약 다시 오지 않는다면 오늘 권유해서 남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은 두 조정을 시강한 몸이니, 어찌 견마의 정이 없겠습니까. 기필할 수 없는 것은 질병입니다. 가을에 만약 일분이라도 스스로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찌 성상의 하교를 감히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준길이 또 아뢰기를,
"세자의 관례를 가을 동안에 거행하기로 정하셨습니다만, 하늘에는 사시가 있는데 봄 여름은 양에 속하고 가을 겨울은 음에 속합니다. 성인의 양을 부지하고 음을 억제하는 도리에 있어서 내년 봄까지 물려야 한다는 뜻으로 일찍이 이미 진달드렸더니, 성상께서 특별히 윤허하셨습니다. 올봄 강화의 《실록》을 상고했는데 근거할 만한 글이 없었지만, 신이 또 연초에 거행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드렸습니다. 지금 만약 다가오는 가을에 예를 거행한다면, 신이 전후로 진달한 것을 모두 어기는 것입니다. 열두 살에 거행하라는 강관의 청을 기왕에 쓰지 못했으니, 차라리 내년 봄까지 물리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이성이 아뢰기를,
"관례와 입학례는 두 가지 일이니, 관례는 비록 내년 봄으로 물린다 하더라도, 입학례는 물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준길의 말에 의거하면 관례는 연초로 물려야 하고, 남이성의 말과 같이 한다면 입학례는 가을 동안에 거행해야 합니다. 어느 때 행하기로 결정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관례를 반드시 입학례보다 먼저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부마들에게 집에 도로 들어가라는 뜻으로 이미 전유했고, 또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자세히 말했는데, 아직도 불안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 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공주들도 역시 간절하게 청하고 있으니, 내 억지로나마 따르고 싶다. 새로 지을 집에 대해 어떤 사람은 법으로 되어 있는 50칸을 말하는데, 그렇게 지으면 불편한 일이 많을 것이다. 경들과 상의하여 처리하고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법제를 따라 50칸을 한도로 한다면 반드시 좁아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참작하여 선처하여도 불가한 점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50칸으로는 좁아서 살기 곤란하고 옛집은 모두 너무 크다고 하니, 옛집 칸수의 반으로 줄이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제 선처할 방법을 생각하시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사당과 행랑이 모두 50칸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인지를 신이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만, 좀 더 생각하여 과도한 폐단이 없게 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헤아려 칸수를 줄이도록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옛집 근처에 공해(公廨)가 있으니 이곳으로 옮겨서 짓는 것이 편할 것 같다. 만약에 공유지가 부족하면 사유지라도 많이 사들여 보충해 주어야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의궁(於義宮) 근처에는 본래 공유지가 없으니 사유지를 매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조로 하여금 후일 집터 및 양포(粮布) 등 물품의 제급을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대간의 논계가 비록 정지되었으나 부마 등이 연달아 소장을 올려 그대로 들어가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간청하니, 이에 이르러 상이 제신에게 의논하여 이건(移建)을 명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집이 옛집에 비하여 조금도 칸수를 줄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와 병조 판서 홍중보가 모두 부마의 아비로서 입시할 때 조그만 혐의를 억지로 끌어대어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 비난하였다.
정언 윤경교(尹敬敎)가 이완에 관한 일을 연계하면서 삭탈 관직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파직하라 하고는, 이어 하교하기를,
"군문(軍門)에 난입한 경우 자연 그에 따른 율이 있다. 병조 낭관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비록 망령된 데서 나온 행동이라 하더라도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서문상을 파직하라."
하였다. 경교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문상이 죄가 없음은 신이 이미 진달드렸는데, 도리어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이는 일을 분명하게 아뢰지 못한 소치입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경교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유혁연(柳赫然)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훈련 중군 김경(金鏡)에게 대장군의 일을 행하라고 명했는데, 이완이 파직되었기 때문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도감에 이미 대장이 없으니 중군이 비록 대신 거느리고 있지만 모든 일을 검칙하지 않을 수 없다. 도제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라."
하였다.
현풍현(玄風縣)의 뱃사람들이 전세를 훔쳤는데, 주모자 두 명은 효시하고, 그 나머지는 정배하였다.
5월 14일 병오
김덕원(金德遠)을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문학으로, 이휴징(李休徵)을 필선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조성보(趙聖輔)를 헌납으로 삼고, 유비연(柳斐然)을 승진 발탁하여 북병사로 삼았다.
충청도 온천에 행행할 때 연로(沿路)의 80세 이상의 노인 정엽(鄭曄) 등 28명을 가자하였다.
5월 15일 정미
상이 양심합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글뜻을 강론하였다. 시독관 김만중이 아뢰기를,
"《맹자》에 ‘오직 대인(大人)만이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신하로서 누군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만 자신에게 신(信)이 있은 뒤에야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진실로 경외하는 신하가 아니라면 그 말을 자세히 듣지 않으며 과감히 쓰지 않는 것입니다."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이 말이 정말 옳습니다."하였다. 강론이 끝난 뒤 만중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전날 경연 중에 상께서 송준길의 귀향을 허락하시고 가을에 올라오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맹자》에 설거주(薛居州) 한 사람이 왕의 곁에 있다는 것030) 으로 말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이 한 사람조차 잡지 않으시니 아랫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형편을 상께서 굽어 살피시어 귀향을 허락한 것인데 젊은 사람이 이처럼 상께 아뢰니, 옳은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허락하였지만 만중의 말도 진실로 옳은 이야기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삼대 독자로서 자식을 잃은 뒤에 다행히 손자가 소과에 합격하였습니다. 이제 귀향하여 영분(榮墳)하려고 하니 빨리 가고 싶은 신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스스로 경의 마음을 안다고 여기고 있으니, 경도 역시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더위가 지나고 추위가 닥치기 전에 올라와야 된다."
하였다. 만중이 아뢰기를,
"신이 준길의 형편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이 말은 국가를 위한 계책입니다. 군자의 진퇴로 말한다면 준길이 반드시 떠나야 할 의리는 없습니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어떻게 감히 군자의 진퇴로써 스스로 기약하겠습니까."
하였다.
강화의 수군을 충정하지 못한 각읍 수령을 결장(決杖)했다.
처음에 강화의 각진에 배속된 수군을 강화 육군에 모두 이속시키고 본도로 하여금 고을 형편에 따라 참작 배정하여 모자라는 수군의 정액을 채우도록 하였는데, 그중 많은 수령이 현격하게 정액을 채우지 못하니 병조에서 곤장을 때리도록 계청하였다. 상이 3명 이하를 충정한 수령은 모두 곤장을 때리라고 명하니, 벌을 받을 수령이 열둘이나 되었다. 송준길이 이로 인하여 입시해서 너무 많다고 아뢰니, 상이 10명 이내의 정원에서 다만 1명을 충정한 자와 10명이 넘는 데에서 다만 2명을 충정한 자는 곤장을 때리고 나머지는 모두 추고하도록 다시 명하였다.
5월 16일 무신
이익상(李翊相)을 부교리로, 김좌명(金佐明)을 겸판의금으로, 김세정(金世鼎)을 사서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혼천의(渾天儀)를 지난해 옥당의 감관으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였다. 다시 더욱 신칙하여, 검사해서 정밀하게 만듦으로써 도수가 차이 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윤선거(尹宣擧)는 예우받던 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었으므로 친구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선거가 평상시 죄인으로 자처하여 소장에 한번도 직명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성명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듣건대 그가 죽은 뒤 명정에도 ‘성균 생원(成均生員)’이라고 썼다 합니다. 직명의 유무가 죽은 사람에겐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그를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증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한번 보고 싶었는데, 뜻하지 않게 죽다니 매우 애석하다. 해조에 명하여 이조 참의를 증직하라."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 중에 부마들의 집 문제를 가지고 하문하셨는데, 신이 식견이 없는 데다가 법전에도 어두워 자세히 진달드리지 못했습니다. 외부의 의논들은 모두 상의 분부가 지극히 아름다웠는데 신하들이 명백히 아뢰어 그 아름다움을 받들어 따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중문 안 50칸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준길이 또 아뢰기를,
"세자의 관례는 봄이나 여름에 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기에 일찍이 이미 탑전에서 진달드렸습니다. 비록 조정의 형편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미 소견이 있으므로 감히 다시 진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입학례와 관례를 봄 가을에 거행하는 것의 편리 여부를 여러 대신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7일 기유
헌납 조성보와 집의 이유가 무과를 보일 때 편전(片箭)에 관한 규칙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여 입격한 거자들에 대하여 계품하여 시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예조가 아뢰기를,
"세자의 입학례와 관례를 봄 가을에 거행하는 것에 대한 편리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정태화는 말하기를 ‘조종조에서 왕세자의 관례를 꼭 봄 여름에만 거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번 유신이 봄 여름은 양에 속하고 가을 겨울은 음에 속한다는 말로 탑전에서 아뢰었는데, 근거가 있는 말이니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입학례에 있어서는 관례보다 먼저 시행하여도 불편한 일이 없을 것이니, 조속히 거행해야 한다. 봄이든 여름이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고, 행 판중추 정치화는 ‘봄 여름 중에 왕세자의 관례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입학례는 봄 가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에 있는 대신에게도 수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때 좌상 허적이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다. 그 뒤 허적이 아뢰기를,
"유신이 관례를 봄이나 여름에 행하도록 청했는데, 그 말이 근거가 있고 뜻도 범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자께서 지난 겨울 심한 병을 앓은 뒤로 열이 아직도 남아 있고 진기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무더운 계절에 억지로 강행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만약 가을 이후에는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늦추어 내년 봄을 기다리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이 되겠습니다. 입학례에 있어서는 봄이나 가을을 굳이 가릴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입학례는 이번 가을에 행하고, 관례는 내년 봄에 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주회인(走回人) 김대선(金大善)을 청나라에 압송하였다. 의주(義州) 경내의 변장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압송하게 하였다.
5월 18일 경술
문학 신정(申晸) 등이 상소하여, 찬선 송준길을 만류해서 세자를 보도하도록 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우대하는 내용으로 비답했다.
관학 유생 윤이성(尹以性) 등이 상소하여 좌참찬 송준길을 만류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위로하는 내용으로 타일러 잘 달랬다.
우참찬 조복양이 상소하여 송준길을 돌아가도록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극진히 말했는데, 누누이 수백 마디였다. 상이 답하기를,
"내가 어찌 서운한 마음을 모르는 자이겠는가. 나름대로 옛사람들이 성의와 믿음으로 대한 뜻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 매우 부끄럽다. 그러나 경의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은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영중추 이경석이 일찍이 송시열에게 무거운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재덕(才德)과 문한(文翰)으로 두 조정에 걸쳐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으니 나랏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우하기를 더욱 무겁게 하는데 지금 이렇게까지 고사하다니, 어찌하여 나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준단 말인가."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지평 김덕원(金德遠)이 일찍이 감시(監試) 회시(會試)의 시관으로 있을 때 방목을 잘못 썼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전 판서 서필원을 삭출하라는 논계를 넉 달이 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비로소 정계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심경》을 강하였다. 시독관 김만중(金萬重)이 아뢰기를,
"경서를 강론하는 데 만약 외우기만 하고 체험하는 실지가 없다면 배움에 유익하지 않으니, 마땅히 더욱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강목》을 강하고 계신데, 만고의 흥망성쇠를 꿰뚫어 보시어 거울로 삼으신다면 진실로 유익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많이 보고 많이 들었다는 것으로써 아랫사람들에게 과시한다면, 이는 곧 위인지학(爲人之學)이니,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바르게 가르쳐 습관과 지혜가 함께 자라나게 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최고의 공부입니다. 지금 왕세자가 어린 나이에 날마다 《소학》을 강독하고 있는데, 이 과목은 곧 성인이 되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서연의 신하들은 글 몇 줄을 진강하고 물러나는 데 지나지 않으니, 어린 왕세자를 가르치는 바는 오직 전하께서 날로 학문에 힘쓰시고 교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항상 하는 말에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자손들이 본받을까 두렵다.’ 하는 말이 있는데, 전하께서 이 말을 명심하시어 훈육하신다면 비단 세자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성상의 몸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이어서 탑전에서 하직하고 물러나고자 했는데, 시독관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경연과 서연을 드나들면서 도움이 매우 많았는데 지금 물러가도록 허락하려 하시니, 신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송시열이 일찍이 소대했을 때 하직하고 돌아간 것은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별로 이런 일도 없습니다. 따라서 조용히 하직하고 떠나야지 어찌 꼭 갑자기 이렇게 사퇴한단 말입니까.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준길은 평소 질병이 많았습니다. 지금 비록 가을을 기한으로 한다고 하지만 이런 무더운 계절을 당하여 멀리 길을 간다면 앞으로의 병고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가을에 올라올 수 있다고 신은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미 돌아가도록 허락했으므로 다시 만류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익상이 또 아뢰기를,
"신이 막 북관(北關)에서 왔으므로 감히 북로의 폐단에 대해서 진달하겠습니다. 북로의 역졸들에게는 예전부터 결복(結卜)을 넉넉하게 지급했고 또 연호(烟戶)의 역(役)도 없었습니다. 상정법(詳定法)이 한 번 시행된 뒤로 그 결수가 줄고 또 연호의 역도 많아져 지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변통하는 길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정중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품처하라."
하였다. 익상이 또 아뢰기를,
"북도의 인민들은 정역(丁役)이 무겁기 때문에 사내아이 낳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내다 버리고 기르지 않는 자까지 있습니다. 비록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서라고 하지만, 요역이 무거운 폐단을 참작하여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민정을 채취하여 이전과 같이 자식을 내다 버리는 근심이 없도록 하라고 명했다. 준길이 아뢰기를,
"신의 사정을 이미 진달드렸으니, 자리 앞에서 하직하고 물러날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경의 사정을 보아서 물러나도록 허락했다만, 연신이 진달한 것도 진실로 옳다. 일단 경이 돌아가도록 허락하니, 모름지기 나의 뜻을 유념하여 약속대로 올라 오라. 오늘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은 오로지 뒷날 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면전에서 하직하게 해달라고 굳이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사퇴하는 것은 안 된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도 그렇게 말하였다. 상이 도승지 남용익에게 이르기를,
"좌참찬이 평소 병이 많았는데 무더위를 당하여 이런 먼 길을 가게 되었으니, 어의 권유(權愉)를 보내어 약품을 가지고 호행하게 하라. 그리고 송 판부사도 일찍이 병을 앓았다고 하니, 이어 그의 병도 살피게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좌참찬의 거처에 말을 지급하고, 제수도 갖추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송준길이 진달한 산릉의 제사 때 사용하는 초[燭]에 관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사 때 쓰는 초의 등수는 매우 고르지 못하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사부의 집안에서도 제사지낼 때 모두 소랍촉(小蠟燭)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사용한다면 불가한 점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육촉(六燭)을 소랍촉으로 바꾸어 사용하라고 명했다.
5월 19일 신해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거둥하여 좌참찬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제 하직하고 내려가니 내가 매우 섭섭하다."
하니, 준길이 하직 인사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섭섭하게 서로 헤어져도 기쁘게 다시 만난다면 시종(始終)이 있는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어제 말한 나의 뜻을 깊이 인식하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비록 우매하지만 어찌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까. 전하께서 성심으로 대우하시는데 신이 성심으로 보답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이제 멀리 떠나는데 특별히 아뢸 것은 없고, 다만 어제 말씀드린 대로 세자가 한창 공부하는 때에 있으니, 반드시 성상께서 스스로 닦아서 세자의 모범이 되어야 덕성이 이루어지게 되며 두 분에게 모두 유익하게 되는 바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조복양과 박장원은 노성하고 충실하니 동궁을 보도하는 책임을 이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인군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길은 다만 경연 하나에 있습니다. 간혹 경연을 열지 못할 때가 있더라도 자주 소대하여 중단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니, 이는 여러 사람이 지극히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명심하고 더욱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명나라 때에는 경태 황제(景泰皇帝)를 복호한 일과 전 황후(錢皇后)를 부묘한 일을 훌륭한 일로 삼았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소릉(昭陵)을 복위한 일을 훌륭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제 정릉(貞陵)을 부묘하자는 논의가 오래도록 거론되지 못하다가 다시 발론되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훌륭한 일을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신 소릉의 복위와 함께 이 일을 병칭할 것입니다. 상이 어렵게 여기시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지만 마침내는 의리로써 참작하여 선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선조(宣祖) 때에 실행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의리가 그렇지 않습니다. 효라는 것은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며 조상의 사업을 잘 이어 가는 것이니,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 효이나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을 변통하는 것도 효입니다. 선대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을 고집스레 지켜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변통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계술(繼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상의 건강을 묻고 또 아뢰기를,
"옛말에 ‘병을 이유로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더욱 뜻을 면려하시어 유신(維新)의 위업을 도모하소서. 신이 몇 달 곁에서 모시다가 이제 멀리 떠나게 되었고 또 이처럼 늙고 병들었으니, 구구한 견마지정(犬馬之情)을 이루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편안히 내려가서 조리하고 상경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준길 등이 상경하였을 때에는 비록 자주 경연을 열었지만 내려가 버리면 다시 열지 않게 될 것이니, 비록 성상께서 몸이 불편한 것 때문이라 하지만 만약 힘써 노력하신다면 어찌 신하들을 인견할 수 있는 때가 없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의 바람은 준길이 내려갔다고 생각지 마시고 자주 인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길이 막 떠나기에 앞서 또 정릉의 일에 대하여 아뢴 것은, 전하께서 받아들이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정릉 문제는 사체가 비록 중대하기는 하지만 바른 의리로써 구해 보면 끝까지 어렵게 여길 일은 아닙니다. 이제 준길이 하직하고 귀향하니, 떠나기에 앞서 오늘 아뢴 말씀을 잊지 마소서."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만기가 말한 바를 신이 감히 감당할 수는 없지만, 그 아뢴 바는 대개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술을 내리고 여러 가지 물품을 매우 많이 하사하였으며, 세자도 술을 내리고 여러 가지 물건을 하사하였다.
지평 홍억(洪億)이 현재 추함에 응하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장령 경최·정화제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는 대신이 건의하고 유신이 차자를 올렸으니 의리가 매우 분명하여 더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 흔쾌히 따르지 않으시니, 조종에서 거행하지 않은 일로서 연대가 매우 오래되어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다고 여겨서입니까. 신들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리에 부합되고 인정상 마땅한데도 조종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경우, 뒤를 이은 왕이 능히 거행한다면 어찌 조종을 빛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참으로 이른바 계지술사(繼志述事)하는 효입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성조(聖祖)께서 개국하셨던 날에 신의 왕후(神懿王后)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때 오직 신덕 왕후가 성조의 짝이 되어 명나라의 책명을 받고 중전에 자리하셨습니다. 어엿한 왕비와 국모로서 몇 년을 계셨으며, 승하하신 후에는 존호를 받고 의례대로 능침을 갖추어 조금도 손색이 없이 시종 숭봉(崇奉)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부묘의 예만은 아직까지 결여되어 있으니, 이 어찌 성세의 흠전이 아니며 신인(神人)이 함께 유감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 대신의 아룀을 인하여, 황폐한 정릉을 개수하면서 모든 의례를 여러 능의 제도 그대로 따랐는데, 온 나라의 신민들이 기뻐하고 감탄하며 모두 말하기를 ‘부묘의 예를 다음에는 거행하겠구나.’ 하며 목을 빼고 눈을 부비며 날짜를 꼽아 기다렸습니다. 여기에서 그칠 수 없는 천리와 인정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빨리 예관으로 하여금 정릉을 부묘하는 예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고, 사간 김만균, 정언 윤경교·이훤이 아뢰기를,
"임금의 효는 계술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계술하는 방법은 반드시 선왕이 펴지 못한 뜻을 펴고 선왕이 미처 하지 못한 예를 닦아서 조종을 빛낸 뒤에야 계술의 도리를 지극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신덕 왕후는 곧 태조 대왕의 둘째 부인입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의와 신덕이 함께 두 배필이 되었으니 지위도 같고 신분도 대등하여 처음부터 존비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천명을 받던 날에 미쳐서는 신의가 먼저 돌아가셨고 신덕이 이어 왕후가 되었습니다. 대왕의 배필로 자리잡아서 우리 태조의 창업을 도왔고 영광되게 명나라의 책명을 받으시어 지존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어미가 된 것이 거의 5년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능침의 제도나 시호를 올리는 의례를 모두 정비(正妃)의 예와 똑같이 처리하였습니다. 태종 대왕께서 봉양하는 즈음에 생전에는 받드는 도리를 극진히 하셨으며 돌아가심에 친히 향축을 전하기까지 하셨으니, 바른 명위(名位)와 엄한 분질(分秩)을 신자로서 어떻게 감히 폄론(貶論)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정릉을 옮기게 되자 당시 예를 논하는 신하들이 심지어 적처가 아니라고 하여 망령되이 폄손하고 부묘의 예를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았으며, 끝내는 능묘(陵廟)가 모두 폐지되고 향화(香火)가 오래도록 끊어진 것이 거의 2백 년이 되었으니, 신인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고 국가의 수치가 매우 컸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태조 대왕의 영령 또한 오르내리며 반드시 통한해 하시면서 속으로 당신을 계술할 후사를 기다리신 것이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이제 효성스런 성상께서, 조상의 뜻을 이어받고 쾌히 유신의 말을 따르시어 조상에 대한 추모의 정성을 극진히 하여 능을 쌓고 정자각을 세우시니, 묘(廟)의 모습이 일신되었습니다. 또 사관을 보내어 《실록》을 상고하게 하시니, 사방 신민들이 목을 빼고 바라는 바가 날로 깊어지고 간절해졌습니다. 《실록》을 베끼어 낸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부묘의 일에 대하여 아직도 처분을 내리시지 않습니까. 신들은 삼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중궁에 자리한 신덕으로서 오히려 태묘에 배향되지 못하여 서인의 위치로 떨어진다면, 이 어찌 우리 조종의 마음일 것이며 또한 이 어찌 성상의 계술하는 효심이겠습니까.
신들이 들으니 송태조의 장효 황후(章孝皇后)는 태종 때에는 태조에 배향되지 못하다가 인종(仁宗) 때에 가서야 비로소 회복되어 태묘에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조종조에도 소릉(昭陵)이 폐위되어 오래도록 복위되지 못하다가 중종 대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신하들의 정청(庭請)으로 인하여 회복되어 다시 봉안되었으니,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제왕의 훌륭한 처사로 송인종과 우리 중종의 효성을 칭송하니, 이를 어떻게 오늘날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심은 속이기 어렵고 공의는 거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예전에 의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조속히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내 뜻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범연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논계한 지 달이 넘도록 상이 따르지 않자, 양사가 합계하여 간쟁하였다.
5월 20일 임자
장선징(張善澂)을 대사간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신정(申晸)과 이후(李煦)를 지평으로 삼았다.
응교 남이성(南二星)이 상차했는데, 그 대략에,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편하지 못하여 가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누그러뜨릴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필시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심에 근본한 지성스런 연민의 뜻은 애초부터 밖에서 빌려올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어리석은 아녀자나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돌이켜 생각하면서 길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여, 그 애통하고 간절한 정은 만년이 지나도 하루와 같아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신덕 왕후를 부묘하자는 논의는 삼백 년 만에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세대가 까마득하여 보고 듣지도 못한 일이며, 애초부터 윽박질러 말하게 한 것이 아니고 또 이해가 자신들의 몸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에 한번 그 논의가 일어나자 재야의 사람들까지 모두 한 목소리를 내기를 강이 아래로 흘러감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니, 여기에서 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기맥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인심에 달려 있습니다. 인심을 거스르면 어지러워지고, 따르면 부흥하게 되는 것이니, 진실로 인심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소홀히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난처한 형편이 있다고 하여 폐기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수록되어 있는 것들을 모두 열거할 필요도 없이, 명 헌종(明憲宗)이 전후(錢后)를 부묘한 것이나 우리 나라 중묘(中廟)께서 소릉(昭陵)을 복위한 것은, 또한 요즈음의 징험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대신의 말에 느낌이 있어 원릉(園陵)의 제도를 회복하고 또 사신으로 하여금 《실록》을 상고해 내도록 하셨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모두 여기기를 ‘조종조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성대한 예전을 지금 다시 거행하려는가 보다.’ 하면서 귀를 기울인 지가 여러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처분이 있다고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나름대로 매우 걱정하고 탄식하는 바입니다.
신덕 왕후와 신의 왕후는 애초부터 적서나 전후의 구분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부인을 둘 두는 고려조의 제도를 따라 동시에 맞아들인 것입니다. 왕위에 오르시던 날에 이르러서는 성조의 정비는 오직 신덕 왕후 한 분뿐으로, 존귀하신 중전의 자리에 올라 신민들의 축하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조께서 사랑하셨고 중국에서 봉해주었으니, 그 명분이 매우 바르고도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성조의 배위로 종묘에 모셔지지 못하였으니, 어째서란 말입니까. 태종께서 신덕 왕후를 섬긴 것은 지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험한 길로 피난할 즈음에는 반드시 부축했으며, 계절마다 제사지낼 때에는 향축을 전하여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으셨으니, 그 강등시키고 박대한 조처는 결코 태종 대왕의 본뜻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전하께서 조종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에 짐짓 어렵게 여기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전하의 조종을 위한다는 것이 도리어 조종을 본받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조종에 관계된 일이라는 것에만 한갓 핑계대면서 변통할 줄 모른다면, 이것이 어찌 제왕의 효도이겠습니까. 지금 벌써 정자각을 건립했고 재랑(齋郞)도 설치하여 의물(儀物)과 제도가 다른 능들과 똑같게 되었으니, 종묘에 들이는 예는 다시 한 절차를 진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번 기회를 잃는다면 다시는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신덕 왕후의 억울함을 위로하고 조종의 바람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으로부터 판단하시어 미비된 예전을 완전하게 회복하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올라간 지 7일 만에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 《실록》을 상고해 낸 지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처분하는 일이 없자, 좌참찬 송준길이 입시했을 때 대신과 삼사가 입다물고 있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에 이성이 홀로 옥당에 있다가 제일 먼저 이 논의를 일으킨 것이었다.
5월 21일 계축
상이 제공주의 가사(家舍)에 대한 일로써 해조에 명하여 내관의 말을 들어 조성하라고 하였다.
5월 22일 갑인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소대하고, 《중용》 17장부터 18장까지 강하였는데, 시강관 남이성이 진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이성이 아뢰기를,
"18장에 이른바 ‘아비는 짓고 자식은 잇는다.’는 것은 바로 계술(繼述)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왕의 효도는 조종에서 미처 하지 못한 바를 미루어 행하는 것이니, 이를 대효(大孝)라고 합니다. 신이 지난번 온 나라의 공론에 따라 아뢴 바가 있었는데, 이 장의 글뜻으로 보면 조종에서 미처 하지 못한 바를 미루어 행하는 것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시독관 김만중이 아뢰기를,
"주자의 문인이 주자에게 묻기를 ‘선대에서 하지 못한 예를 지금 시행하려 하는데 조상이 모를까 걱정됩니다.’ 하니, 주자가 ‘자손이 안다면 조상이 바로 알게 된다. 왜냐하면 조상과 자손은 한 기운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일이 사리에 합당하면 되는 것이지 하필 조상이 행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십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성이 또 《강목》의 주 현왕(周顯王) 37년부터 48년까지 진강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장령 경최가 조속히 예관으로 하여금 정릉 부묘의 예를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도록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성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글뜻을 말미암아 조금 생각을 말씀드렸는데, 대간의 계사가 또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조종에서 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렵게 여기신다면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어찌 민망하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승지 송시철이 아뢰기를,
"삼사가 이처럼 청하니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성이 아뢰기를,
"제왕의 효도는 변통과 계술이 가장 중요합니다. 비록 《중용》으로 말하여도 무왕은 조상을 왕으로 추존하는 데 미치지 못하였는데 성왕 때 와서 주공이 비로소 왕에 추존하고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를 시행하였습니다. 언제 조종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것을 행했다 하여 주공에게 유감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지금 위로는 조종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태종이 절대로 정릉을 박대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이제 만약 따르지 않으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조종을 훌륭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며 능히 계술하지 못하는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이전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내 뜻을 다 밝혔다."
하였다.
5월 23일 을묘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여러 공주의 저택은 선조(先朝) 때 이미 구획하여 처리하였는데 이제 와서 어찌 다시 지을 수 있겠는가. 비용을 아끼는 것으로 논한다면 다섯 공주의 집을 다시 짓는 일이 어떻게 비용을 아끼는 길이 되겠는가. 조가에서 다만 선처하고자 하여 특별 조처를 한 것인데, 공해(公廨)로 바꾸어 주자는 뜻은 이미 경연에서 결정하였고 또 거행조(擧行條) 안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런데 해조가 거행하지 않으면서 감히 다른 빈 공유지로 지급하자고 청하다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 매우 해괴하다. 해당 당상을 추고하고 이 초기(草記)는 도로 내어주도록 하라."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공주들의 저택을 다시 짓는 이 조처는 실로 성조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이 지난날 탑전에 입시하였을 때 직접 자세한 하교를 받았는데 공해를 떼어 주도록 한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조처였습니다. 해조의 초기는 그 날의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한 듯한 감이 있지마는, 만약 다시 지을 만한 다른 빈 공유지가 있다면 공해를 철거하는 폐단이 없고 또한 재력을 낭비하는 근심도 없을 것이므로 담당한 신하가 품계하였는데, 뜻밖에 특별히 추감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당초에 화평하게 선처하려는 뜻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품은 뜻이 있기에 감히 이를 계문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탑전에서 하교를 들었으면서도 이런 계사를 올린단 말인가."
하였다. 당시에 상이 기필코 공해를 철거하려고 하면서 특별히 해조를 추감한 것은, 송시열의 말에 노한 나머지 공주의 집을 다시 지어주게 한 것으로 경비를 아낄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판서 민정중은 이 일로 인하여 끝내 직책을 맡지 않았다.
5월 25일 정사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조성보(趙聖輔)를 문학으로, 이규령(李奎齡)·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삼았다.
정언 윤경교와 이훤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들으니, 여러 공주의 집을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지어주게 했는데 칸수가 국법에서 정한 것보다 많으며 공해를 헐어 버린다고까지 하니,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에 여러 공주가 살던 집이 지나치게 사치하였기 때문에 공론이 제기되는 데 이르렀고 끝내 감히 들어가 살지 못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집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친한 이를 친히 여기는 은혜를 베풀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재력을 헤아려 지급해서, 각각 빈터를 찾아 옛집을 헐어서 나오는 자재를 가지고 스스로 건축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거듭 백성들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국가의 재정을 모조리 사용하여 한꺼번에 다섯 공주의 집을 짓게 하니,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이런 지나친 공사를 일으키면 사방에서 듣는 사람들이 장차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물며 공주의 집은 사가이고 공해는 공공 건물인데, 사가를 짓기 위하여 공해를 헐어 버리니 이는 실로 국조에 없었던 일이 전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또한 대단히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공해 이외에도 철거해야 하는 민가가 매우 많아서 집집마다 하늘을 부르며 슬피 울어 차마 들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도성 안에 빈터를 얻지 못할 근심이 뭐 있다고 기필코 공해와 백성의 집을 헐어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고 백성의 원망을 들은 뒤에야 후련하게 여기려 하십니까.
집의 칸수에 대해서는 국법이 지엄하니 이제 개축할 때를 당하여 마땅히 한결같이 《대전》의 50칸 제도를 따라 감히 참람하게 어길 수 없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협소하다고 하시어 특별히 참작하여 칸수를 늘리라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하니, 이는 곧 법을 어기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법은 금석처럼 견고한 것이며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이 본받는 것이 매우 빠른 것입니다. 법을 확립하는 도리는 반드시 귀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먼저 해야만 비로소 백성에게 믿음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성상께서 먼저 어기신다면 어떻게 아랫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공주의 집 지을 땅만 얻고자 하시어 민력과 재정이 고갈되는 근심은 생각하지 않으며, 사정(私情) 때문에 공사를 해치는 폐단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아울러 법제를 무너뜨리는 폐해도 고려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지어 주게 하신 명을 조속히 멈추시고 각자가 개인적으로 짓게 하며, 공해를 철거하여 옮기지 말도록 하고 각각에게 빈 땅을 나누어 주며, 집의 칸수를 법제보다 늘리지 못하게 하여 한결같이 《대전》의 법을 따르게 하소서."
하고, 아울러 형조 참판 이지온(李之馧)이 청탁을 받고 법을 무시하여 선비를 수감한 죄를 논하며 파직하기를 청하고, 또 병조 판서 홍중보가 개인적인 교분이 있는 사람을 위하여 형관에게 청탁한 잘못을 논하며 무겁게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대군과 공주의 집을 지을 때 해조에서 자재와 인부를 대고 선공감의 감역관이 그 일을 감독하는 것은 예전부터 시행해온 규례인데, 너희들이 감히 어떻게 멋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이미 해조에서 지어 준다면 관부(官府)는 관의 땅으로 옮기고 공유지를 내주어 사유지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실로 백성의 폐해를 줄이는 일이다. 너희들이 논한 것은 모두 망령되이 논한 것이다. 50칸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다면 무엇을 꺼려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이 일은 모두 경연에서 자세히 말했는데 너희들이 오히려 운운하다니, 이는 너희들이 믿음을 가지고 군부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의리에 합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지온은 이미 무고라는 것을 알고 즉시 방송하였으니, 무겁게 죄줄 일이 뭐 있겠는가. 이지온과 홍중보는 모두 엄중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응교 남이성, 부교리 이익상·김만중 등이 다시 차자를 올려 신덕 왕후의 부묘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행 대사헌 박장원이 상소하여 지방관으로 내려가 부모를 봉양하기 편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상이 그 소를 해조에 내렸다. 해조가 회계하기를,
"장원은 정경(正卿) 중신으로서 그 어미의 나이가 80에 가까워져 오기 때문에 지방관으로 나아가 편히 봉양하고자 하니, 그 뜻이 매우 간절합니다. 그러나 장원은 현재 정경의 우두머리로 있고 또 삼공의 물망이 있으니, 그가 나가는 것은 조정의 경중에 관계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원에 따라 지방관에 보임하는 것은 형편상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따르고 해조로 하여금 미포를 충분히 주도록 하여 봉양하게 하였다.
5월 26일 무오
정언 윤경교·이훤이 피혐하면서, 해조에서 지어 주는 부당성과 공해를 철거하여 이전하는 것의 온당치 못함과 그곳에 거주하여 집을 뜯기게 된 백성의 원성과 칸수가 법제를 넘는 잘못을 또 논하였다. 이에 상이 정원에 하교하여 이르기를,
"이 대관의 피혐하는 내용을 보니 공해를 철거할 때 철거당할 백성이 매우 많아 도처에서 슬피 운다고 하는데, 내가 벌써 이런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공해를 이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구분하여 처리했으니, 민가가 피해를 입을 리가 만무하다. 지금 이 이야기는 매우 해괴하니, 해조 낭관을 패초하여 물어서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송시철이 계문하여 아뢰기를,
"호조 낭관을 패초하여 물어보니, 장흥고(長興庫)를 철거해내는 곳에는 본래 피해를 당할 민가가 없는데 중사가 살피고서 말뚝을 박아 놓은 곳 안에는 헐어야 될 집이 18가구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회계가 모호하다고 하여 다시 명백하게 물어서 계문하라고 하였다. 시철이 회계하여 아뢰기를,
"다시 낭관에게 물어보니, 장흥고의 자리가 다만 4백여 칸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어 그 안에는 원래 민가가 없었으므로, 이번에 공해를 철거하여 이전할 때 민가가 뜯길 일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대관의 피혐한 계사에 대한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피혐하는 계사가 장황하고 은연중에 다른 의도가 있으니 매우 해괴하며 또한 가소롭다. 계사에서 ‘이사할 때마다 집을 지어 주라고 한다면 옛 규례에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계속하기도 어려울 듯하다.’고 한 것은 더욱 가소롭다. 예로부터 대군·공주 이하는 절대 이사하는 일이 없었으며 이사한다 하더라도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고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한갓 자신만 옳다고 하고 또 그 잘못을 꾸미니, 이는 내가 매우 미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조 참판 윤집(尹鏶)이 여러 번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5월 27일 기미
장령 정화제(鄭華齊)도 여러 공주의 집을 옮겨 짓는 잘못을 논하고 아울러 정언 윤경교와 이훤을 모두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말할 만한 일이라면 말하여도 되지만, 이제 망령된 말을 어지러이 뒤섞고 간원의 말을 이것저것 주워 모아 명성을 낚는 밑천을 삼다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매우 해괴하다."
하고, 출사에 대한 일은 따랐다. 정원이 성상의 비답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으로써 환수하도록 계청하자, 상이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화제가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5월 28일 경신
김만중(金萬重)을 헌납으로 삼았다.
정언 윤경교와 이훤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피혐하는 내용을 보니 ‘은연중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나의 한 마디를 가지고 마치 핵심적인 사안인 양 반복하여 거듭 말하고 큰소리로 성을 내는 것이 마치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으니, 내가 비록 어리석지만 어떻게 너희들과 다투겠는가. 다만 스스로 우스울 뿐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는데, 경교와 이훤은 모두 패초에 나아오지 않았다.
병조가 계문하여, 내일 무과 전시 때 전후에 걸쳐 전시에 직부토록 한 사람과 평안도에 중신을 파견하여 시취(試取)할 때 부자가 동참하여 후방(後榜)에 추가로 붙은 사람에 대하여 모두 응시를 허락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에 우박이 내렸다.
5월 29일 신유
평안도에 한재와 황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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