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술
조복양(趙復陽)을 대사헌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식년 문과 전시의 방을 발표하여, 이덕령(李德齡) 등 33명을 뽑고, 무과에서는 김응성(金應聲) 등 48명을 뽑았다. 일찍이 직부 전시를 명했던 자들을 이때 이르러 모두 방에 합격시켰다.
6월 2일 계해
집의 신명규(申命圭), 지평 조성보(趙聖輔)가 아뢰기를,
"지난해 동지사 일행으로 간 신하들이, 연경(燕京)에 머물러 있을 때 저들의 부잣집에서 관등놀이가 있다는 것을 듣고는 사신 세 명이 서로 이끌고 가서 구경했는데, 먼지나는 거리에 자리를 깔고 구경꾼들과 함께 섞여 구경하여 저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으니, 스스로 욕을 끼친 것입니다. 그리고 나올 때에도 온천에 목욕하러 가는 몽왕(蒙王)의 어미를 만났는데, 무단히 따라가서는 한번 보자고 하여 자리를 마주하고 서로 만나 음식을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고 곳곳에서 망령되이 군 정상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그 당시의 상사 이경억, 부사 정륜, 서장관 박세당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복(李馥)을 논핵하기를,
"송사의 일로 일시에 두 사람을 죽였으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형벌을 쓴 그의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복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복이 금부에 나아가 스스로 밝혔는데, 그 일은 모두 실상이 아니었다. 금부가 아뢰기를,
"이복에게는 죄줄 만한 일이 없습니다. 대간이 아뢴 내용에 ‘일시에 두 사람이 나란히 죽었다.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형벌을 가했다.’는 말은 모두가 실상이 아니니, 이복의 혐의는 분간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박정서(朴廷瑞)의 종이 거짓말을 꾸며 정장(呈狀)한 데에서 나온 것이니,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조로 하여금 심문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복을 석방하고 정서의 종을 치죄하도록 하였다. 대사헌 조복양이, 소패(召牌)를 받고도 나아오지 아니하여 응당 추감(推勘)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3일 갑자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우참찬으로, 김세정(金世鼎)을 문학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신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6일 정묘
관학 유생 조지정(趙持正) 등이 상소하여, 귀산(龜山) 양시(楊時), 예장(豫章) 나종언(羅從彦), 연평(延平) 이동(李侗) 및 우리 나라의 유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7일 무진
응교 남이성(南二星), 부교리 이익상(李翊相), 부수찬 윤심(尹深) 등이 상차하여, 공론을 따라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는 예를 속히 거행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0일 신미
정재숭(鄭載嵩)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재숭은 수상 정태화의 아들로서 광주(廣州)에 제수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 직임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의가 일어났다. 어미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6월 11일 임신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가 얼굴에 종기가 나서 병이 날로 심해지자 잇따라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어의를 보내어 곁에서 떠나지 말고 간병하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의 병이 몹시 심하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고, 액정인(掖庭人)을 보내어 약물을 하사하고 문병하게 하였다.
정언 이훤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공주들의 집이 제도를 넘어 끝내는 관사를 뜯어 옮기고 여염의 백성들이 원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삼가 들었기에, 개연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진달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말이 나가자마자 성상의 노여움이 갑자기 일어났는데, 전후의 엄한 내용의 교지도 모두 실정을 벗어난 것이지만, 세 번째 비답에 있어서는 더욱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신은 황송해 죽을 지경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집에서 석고 대죄하며 마침내 소명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도로에서 서로 전하기를 ‘대간의 논계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데 공주들의 집짓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오늘날의 언관은 있으나마나한 존재구나.’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조정이 대관을 멸시하는 것이 아,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나라의 치란과 백성의 휴척은 언로가 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는 만큼 만약 언관이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다면 이 어찌 조정의 복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친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돈독하시어 어려움이 많은 시절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지어주는 데 급하여 어기기 어려운 공의를 깨닫지 못하신 채, 억지로 이 일을 하시면서 위로 하늘의 노여움과 아래로 백성의 원망을 생각지 않으시니, 언로가 쓸쓸해짐에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정성을 다하여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성덕에 누만 끼쳤으며, 대각에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의 비난을 두터이 초래했으니, 어찌 감히 영화를 탐내 수치를 무릅쓴 채 다시 논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계(啓)자를 찍어 내렸다. 이때 삼사가 공주들의 집 문제로 끊임없이 쟁론했지만, 상은 듣지 않고 중사(中使)로 하여금 집을 지어 주게 했으므로 이훤이 이 상소를 했던 것이다. 이훤이 체직된 뒤 집의 신명규, 장령 정화제·경최, 지평 조성보·이후, 헌납 김만중, 정언 윤경교가 모두 이훤의 상소 내용을 인용하여 인피했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요즘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양사가 논집하자 전하께서 여러 차례 준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번 정언 이훤의 상소가 신병을 이유로 면직시켜 주기를 청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본의는 오로지 한편에서 논쟁하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그대로 집을 짓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에 따라 진언하는 것은 바로 그의 직책입니다. 사직소를 인하여 곧바로 진언한 대관을 체직시키는 것은 공평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이훤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귀찮게 굴지 말라. 사직소를 올림에 체직시키는 것은 바로 규례로, 특별 체직 같은 데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바로 환수하라고 청하다니 매우 놀랍다."
하였다.
6월 12일 계유
정언 윤경교가 인피하기를,
"오늘날 대각의 자리에 있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첨하고 순종하며 단지 임금의 비위만을 맞추자니 애당초 국가에서 대관을 설치한 의도가 아니며, 일에 따라 진언하여 조금이나마 직책을 수행하자니 전하께서는 따라 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기세를 꺾고 억제하시어 간관으로 하여금 직책을 잃게 한 뒤에야 그만두시니, 오늘날 대각의 자리에 있기가 어찌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재가 없어 구차하게 자리에 채워진 신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천시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인물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직책이 간관입니다. 성인(聖人)은 꼴베고 나무하는 사람의 말도 꼭 가려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이 쓸 만한가의 여부만을 볼 뿐이지 어찌 그 사람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드디어 그 말까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간의 논계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 한편에서 그대로 집을 짓고 있으니, 이것은 대각을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여겨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관을 하찮게 보시고 진언한 사람을 배척하면서 신하들로 하여금 전하의 말씀을 따르기만 하고 누구도 거역하는 사람이 없게 하고자 하신다면 그 폐해가 간하는 말을 거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인데,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라 하겠습니까.
신은 마음속으로 그른 줄 알았지만 미처 바로잡기 전에 동료의 상소가 먼저 진달되었습니다. 신이 안으로는 나름대로 먹었던 마음을 저버렸고 밖으로는 공의에 부끄러우니, 황송하여 어찌할 줄 모르겠으며 부끄러워 낯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아 성덕에 누를 끼치게 하고 또 대각에 욕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동료의 상소는, 들은 것을 바로 진달하여 상의 부족을 보충해 주는 책임을 다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에 체직하라는 명을 곧장 내려서 간관의 입을 막으시니, 신은 이 뒤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경계하게 됨으로써 상께서는 허물을 듣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라 나라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폐해가 있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분의(分義)가 있으므로 감히 소명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지만, 결코 얼굴을 들고 대간의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 피혐하는 내용을 보건대 함부로 성을 내면서 하는 말이 참으로 놀랍다. 내가 신하들을 말 못하도록 속박하는 것이 비록 심하다 하더라도, 속박받을 짓을 먼저 하면서 속박하는 폐단을 말하고자 하다니, 도리어 가소롭다. 대간의 직에 있는 몸이 일 처리가 이와 같다면 위에서 업신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경교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정원이 경교에 대한 비답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봉환하면서 환수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엄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집의 신명규, 지평 조성보·이후, 헌납 김만중, 장령 경최·정화제 등도 ‘일을 말한 대간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입다물고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간의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는데,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간 이유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유가 또 아뢰기를,
"정언 이훤이 상소에서 비록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지만, 그의 본심을 헤아려 보면 여러 번 준엄한 분부를 받고는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상소에 아뢴 말이 절실하고 정직하여 볼 만하니 전하께서는 채택하여 받아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끝내 한 마디의 비답도 내리지 않으시고 갑자기 체척하셨으니, 신들은 개탄스럽습니다. 임금의 거조는 하나하나가 온 나라 사람이 보고 듣는 것입니다. 정언 이훤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니, 약방이 입진하였다. 진찰이 끝나자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신병으로 공무를 집행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신이 마침 가서 만났는데 공사에 대한 수응을 완전히 못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거의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였습니다. 관아에 출사할 가망은 결코 없으니, 우선은 체직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이 기질이 평소 약하고 질병까지 심하여 지금의 형세로는 공무에 이바지할 가망이 없습니다. 한가한 자리에 있게 하여 예우한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체직하라고 명했다.
삼남(三南)의 감사는 가족을 데리고 가는 법을 정하였는데 감사는 본읍의 목수(牧守)를 겸직하고 임기를 2년으로 하였다. 경기·강원·황해 3도의 감사는 전례대로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고 1년을 임기로 하였다.
6월 13일 갑술
박장원(朴長遠)을 이조 판서로, 심지명(沈之溟)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이선(李選)을 수찬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여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월에 서리가 내린 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서리가 내린 것은 과연 예사로운 재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파종한 곡식은 평년작에 밑돌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가 너무 많이 내리지 않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비가 많이 내리기는 하였으나 농사에 그다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6진(六鎭)에 비가 적게 내렸다고 하는데 의주와 강변 고을에 든 한재가 매우 우려된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강변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면 구제할 곡식이 없으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때 들었는데 각사 노비의 신공을 확실히 받아낼 곳이 없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숙의 장계 안에도 역시 이것을 염려하여 보고하기까지 했으니, 이 일은 매우 처리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는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니 변통해야 한다. 그 계본을 비국에 보내 품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도의 노비도 도망하거나 죽은 부류가 역시 2천 명에 가깝습니다. 충청도의 노비를 변통해 줄 때 아울러 처리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의 장계 안에 어떤 백성의 계모가 다른 남자와 간음하는 것을 그 자식들이 결박하여 관가에 고발했다고 합니다. 중묘조(中廟朝)의 수교로 보건대, 그 어미에게는 간음의 율을 적용해야겠지만, 그 자식들도 계모를 결박한 죄를 마땅히 다스려야만 합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몰래 간음한 자취가 이미 환히 드러났으나, 그 계모가 재산이 매우 넉넉하면서도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식들이 모두 원망했는데, 그들의 계획된 마음은 어미를 고발하여 재산을 나누어 가지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이미 무겁게 죄를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묘조의 수교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완을 파직한 뒤 오래도록 대임자를 뽑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유혁연(柳赫然)이 대임자가 될 만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를 옮겨 차임한다면 어영군이 반드시 많이 허술해질 것입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완의 일은 대간의 계사가 매우 긴절했으니, 어떻게 중임을 다시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완도 신병이 있으니 우선은 체직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가 훈련 대장이 될 만한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여발(李汝發)이 평안 병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만약 부득이하다면 그를 임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밖에는 누가 합당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훈국 대장을 상의하여 의망해서 들이라."
하였다.
이여발(李汝發)을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6월 16일 정축
강백년(姜栢年)을 공조 참판으로, 성익(成釴)을 평안 병사로, 김우형(金宇亨)을 승지로 삼았다.
지평 조성보가 아뢰었다.
"지난해 동지 사신들이 행동을 삼가지 아니하여 매우 체신을 잃었으므로 일의 체모에 있어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과 의논하여 논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장령 경최가 논계를 정지하려고 두 번이나 서신을 보내어 신에게 묻기에 신은 갑자기 정지할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묻지도 않고 끝내 억지로 정지하였으니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대각은 소견이 서로 틀릴 경우 나름대로 처신하는 방도가 있는데 어떻게 신이 휴가 중에 있는 틈을 타 이처럼 서둘러 정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모두가 신이 하찮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체직하소서."
6월 17일 무인
장령 경최가 아뢰기를,
"동지 사신들에 대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한 것은 본시 동료로서 서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려는 뜻이었으니, 계속해서 쟁집하는 것은 실로 지나친 일인 듯하였습니다. 신이 논계를 정지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이 모두 휴가 중이었으므로 전례에 따라 간통(簡通)하지 못하고 서신으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동료들은 모두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지평 조성보는 과연 곤란하게 여기는 의사를 보이면서 ‘지금 휴가 중에 있으므로 가부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니 헤아려 선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정지해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재차 보내고 그 일에 대한 논계를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휴가 중에 있는 틈을 노려 서둘러 논계를 정지하였다.’고 말을 하니, 이것은 모두가 신이 신임을 받지 못한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집의 신명규, 장령 정화제, 지평 이후도 모두 논계를 정지한 일로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잇따라 인피하였다. 사간 이유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하고 경최만 체직시키라고 했는데, 상이 따랐다.
전 이조 판서 이경휘(李慶徽)가 죽었다.
경휘는 사람됨이 온후하고 확고했는데, 동료들 중에 논의가 제일 화평하다고 일컬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아우 경억(慶億)보다 더 훌륭하다고 하였다.
6월 18일 기묘
지평 이후가, 무겁게 제기된 논계를 서로 의논하고서 정지하였으니 그 잘못이 균등한 것인데 처치가 동일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지평 조성보, 장령 정화제, 집의 신명규도 모두 잇따라 인피하였으며, 사간 이유는 또 처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납 김만중은 ‘신과 이훤이 애초에 같은 일에 대해서 소를 올리기도 하고 인피하기도 하였는데 이훤은 체직되었고 신은 체직되지 않았으니,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에 태연히 참여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시켜주기를 청했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김만중은 출사하게 하고 이후·조성보·정화제·신명규·이유는 체직시키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0일 신사
남이성(南二星)을 집의로,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송창(宋昌)·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신정(申晸)·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어진익(魚震翼)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22일 계미
집의 남이성(南二星)이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 중에 상께서 공주들의 집 문제로 물으셨는데, 신은 옥당으로서 입시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지 못했습니다. 본부가 현재 집 문제를 굳게 간쟁하고 있는데, 신은 감히 그 사이에서 논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유혁연을 훈련 대장으로 옮겨 제배하고, 이여발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이때 좌의정 허적이 입시하여 상에게 아뢰기를,
"지난번 훈련 대장을 차출할 때 신의 생각은 유혁연을 훈국에 옮겨 제수하고 어영에는 다른 장수를 차출하고 싶었으나 영상의 의견이 신의 의견과 같지 않았으므로 감히 논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훈국은 설립된 지 오래 되어 누차 노련한 대장이 차임되었던 곳이고 어영은 신설된 곳이니, 경중의 차별이 없지 않다. 그리고 훈국의 병사들은 군기는 세지만 매우 교만스럽고 함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그들을 잘 무마하여 다스리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며, 휘하의 여러 장수들도 모두 곤수의 직을 역임한 유명한 장수들이다. 차임된 대장이 명망 높은 사람이 아닐 경우 진정하여 복종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다.’고 합니다. 혁연과 여발을 바꾸어 차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도 가볍게 여길 곳이 아니니, 내 생각은 그대로 제수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하였다. 허적이 외부의 의논이 여발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듯하다고 거듭 아뢰자,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거둥하였다. 약방이 입진한 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 광주 부윤(廣州府尹) 심지명(沈之溟)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영남은 왜국(倭國)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동래(東萊)의 일은 비록 부사가 있더라도 감사 또한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왜인을 경시하여, 이만웅(李萬雄)이 왜국을 무찔러 없애버리자는 주청을 올리기까지 하였는데 참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시중이 지금 내려가니, 일에 따라 잘 처리하여 흔단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시중이 아뢰기를,
"우리에게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하찮게 대하여 난처한 일이 발생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경하게 대해야 할 때에는 강경히 대하고 유순하게 대해야 할 때에는 유순하게 대하여 모든 일을 때에 따라 선처하고, 중대한 일은 품계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중이 아뢰기를,
"환미(換米)하는 일은 바로 영남의 큰 폐해입니다. 동래(東萊)에서 쌀을 받아들일 때 부사가 직접 받아들이지 않고 군관으로 하여금 감독하여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에 간사한 짓을 하는 폐단이 많습니다. 차사원을 배정하여 살피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심지명에게 묻기를,
"말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자, 지명이 아뢰기를,
"신이 10년 전에 이 직임을 맡은 적이 있으므로 고을의 폐단을 잘 알고 있는데, 그중에 견디기 어려운 폐단은 모집하여 들여보낸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몹시 가난한 자들인데 관아의 곡식을 먹은 뒤에는 마련하여 바치지 못해 군량이 점차 줄어들고, 독촉하여 받아들일 경우 흩어져 떠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 폐단이 있기 때문에 전부터 이들에게는 많이 지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6월 23일 갑신
교리 이익상·이규령, 수찬 이선, 부수찬 윤심 등이 상차하기를,
"언로의 직책은 대각에 있는 것인데 대간이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위에서는 관용의 아량을 보이지 않고 날로 기세를 꺾으려 하고 아래에서는 전하의 감정을 격분시키는 일이 있을까 우려하여 날로 기가 꺾여 사이가 멀어지니 지금의 언로는 두절되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간하는 말을 구르는 구슬처럼 잘 들어 주시는 미덕을 지니시어 모든 논의에 대해서 메아리보다 빠르게 호응하였으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대업을 성취하고 태평 시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어하신 지가 오래되자 점점 처음보다 못해져 수응(酬應)을 게을리하시는가 하면 대간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점점 싫어하고 박하게 하십니다. 대간의 논의가 하고 싶어하시는 일에 반대될 경우 따르지 않고, 이기고픈 마음이 발동하실 경우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내사(內司)에 관계되는 일, 궁척(宮戚)에 관한 일을 논급했을 경우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의에 따라 아뢰었을 경우 여러 사람의 말을 주워모은 것이라 하고, 의분에 북받쳐 아뢰었을 경우 그 과격한 것을 싫어하시어, 날이 갈수록 대간들과 틀어져 더욱 배척하셨습니다.
신들이 지나간 일을 소급해 보건대 5, 7년 사이에 대간이 아뢴 것에 대해서 10건에 2, 3건도 윤허하신 것이 없었습니다. 사리가 분명하여 알기 쉬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논의에 대해서도 대간이 말했을 경우 아예 들어주지 않으시다가, 마침내 여러 신하들의 말에 따라 윤허하신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예컨대 지난번 부마(駙馬)들에게 그대로 들어가 살게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한 논의의 경우, 양사가 함께 거론하여 한 달이 지나도록 쟁집하였지만 전하께서 끝내 거절하시다가 대간이 정계한 뒤에야 집을 다시 지으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이것은 단지 대간의 말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신 것일 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국가의 이해, 일의 득실은 따지지 않고 대간의 말이라면 일체 듣지 아니하였는데, 옛날 간하는 말을 거절하던 시대의 임금들도 이처럼 심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말만 들어주시지 않을 뿐더러 대우하시는 데 있어서도 몹시 싫어하고 미워하시며 변핵하시기를 마치 송사하는 사람들처럼 하시고 때로는 섭섭한 말씀으로 꾸짖는가 하면 덕이 부족하다는 말로 간언을 막기도 하고 계사의 구절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 따져 묻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특히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대하는 체모가 아닌 것입니다.
근래 이훤이 올린 상소는, 정세가 불안하였으므로 병을 핑계대어 면직시켜주기를 청한 것이었지만, 그가 아뢴 내용은 조정을 높이고 대간을 중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 말이 진정 옳고 그 뜻이 가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체직시켰습니다. 그리고 윤경교가 피혐하면서 올린 계사에 내리신 비답은 너무 심하게 꾸짖으셨는가 하면 심지어 ‘임금을 구속하고 억제하려 한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무릇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말은 모두가 좋은 일을 권면하고 그른 것을 막으려는 뜻이고 도리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몹시 꾸짖으며 임금을 구속하고 억제하려는 것이라고 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우려하고 탄식하면서 이 일을 여러 번 아뢰는 것은 경교의 처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전하의 말씀이 한번 전해지면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할까 염려해서입니다.
맹자(孟子)는 ‘임금의 자만하는 태도는 천리 밖에서도 선비를 막는 것이다. 선비들이 천리 밖에서 오지 않는다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소인이 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자(孔子)는 나라를 잃게 하는 한마디 말에 대해서 논하시기를 ‘바로 임금이 자신의 말을 누구도 거역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간하는 말에 대해서 이처럼 소중히 여기셨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계를 올린 뜻을 내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차자가 올라간 지 십여 일이 지나도록 비답을 않다가 이때 이르러 비로소 비답을 내린 것이다.
6월 24일 을유
홍문관 교리 이익상 등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태묘에 부묘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5일 병술
김좌명(金佐明)을 호조 판서로, 유철(兪撤)을 형조 참판으로, 이정기(李廷夔)를 행 대사간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부응교로, 홍주국(洪柱國)을 수찬으로 삼았다.
삼남(三南) 지방에 큰 홍수가 졌다.
6월 29일 경인
태학 유생 조상우(趙相愚) 등이 상소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속히 거행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8월 (0) | 2025.12.06 |
|---|---|
|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7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5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1권, 현종 10년 1669년 4월 (0) | 2025.12.06 |
| 현종개수실록20권, 현종 10년 1669년 3월 (0) | 2025.12.06 |